(33)

내가 언제나 무서운 외갓집은

초저녁이면 안팎마당이 그득하니 하이얀 나비수염을 물은 보득지근한 북쪽재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쨩쨩쨩쨩 쇳스럽게 울어대고

밤이면 무엇이 기화골에 무리돌을 던지고 뒤우란 배나무에 쩨듯하니 줄등을 헤여달고 부뚜막의 큰솥 적은솥을 모조리 뽑아놓고 재통에 간 사람의 목덜미를 그냥그냥 나려 눌러선 잿다리 아래로 처박고

그리고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바닥에 넘너른히 널리는 집이다.

   --<외갓집>


(38)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웅 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넘언집 범 같은 노큰머니> 中에서


(48-49)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수라(修羅)>


(59)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나의 조상은 현재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北方)에서> 中에서


(93)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은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 <선우사(膳友辭)> 中에서


(117)

빨간 물 짙게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 무르녹은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실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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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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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유현준님의 책 두 권을 읽고 이야기해주었잖아. 그리고 그의 대표작 3권 중 나머지 한 권 <어디서 살 것인가>로 읽었단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최근 아빠가 집 짓기에 대한 관심이 좀 있었기 때문이야. 물론 직접 집을 짓겠다는 것은 아니고, 가능성 낮은 바램이라고 할까?^^ 그래서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유튜브에서 직접 집 지은 사람들의 영상들을 자꾸만 클릭하게 되네. 물론 이번에 읽은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는 우리가 사는 집에 국한된 내용만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건축에 관련된 책이니까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겠지, 하면서 책을 펼쳐 들었단다.

책 제목 <어디서 살 것인가>를 보고 문득 아빠가 그 동안 어디서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단다. 아빠는 태어나서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시골의 작은 집에서 살았단다. 작고 불편한 점도 많지만, 그래도 많은 추억이 만들어진 곳이고요즘도 아주 간혹 꿈에서 나오기도 한단다. 조그마한 마당도 있고, 텃밭도 있는요즘 아빠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집의 형태가 아빠가 이미 어렸을 때 살아봤던 집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고등학교 3학년 때 아파트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지. 대학 1~2학년은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기도 했지만, 한동안 학교 근처 선배네 집에서 얹혀 살기도 했는데, 그 작은 원룸도 아빠가 머물던 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군대 생활할 때는 나라에서 지어준 집에서 지냈구나. 2년 여 군 생활 동안 3군데 거처를 옮겼던 기억이 있구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것도 아빠가 살았던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복학하고 나서는공부 좀 하겠다고 학교 근처에 친구랑 원룸에서 같이 지냈어회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학기 중 아빠의 집이었지. 그리고 회사 들어 가서는 고등학교 친구 셋이 원룸에 2년 정도 기거하다가 회사 초근접 지역에 원룸을 잡고 지냈지.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야 다시 아파트로 들어갔고,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세 군데서 살았구나. 이렇게 생각해 보니,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여럿 집에서 지냈구나. 아빠의 기억력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각각 집에서 있었던 기억들, 추억들이라고 해야겠지? 하나 둘 떠오르는 것이 좋은 것들이 많구나. 그리고 세월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도 들었어그것도 아주 빠르게앞으로는 또 어떤 집에서 살게 될까?


1.

유현준님의 어디서 살 것인가는 한 개인이 또는 한 가족이 어디서 살 것인가는 가이드 해주는 것은 아니고, 우리 사회가 우리 나라가, 그러니까 좀더 큰 공동체가 더불어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까?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단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 바로 학교야. 너희들도 앞으로도 한창 다녀야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곳이 학교이니 아빠도 관심 있게 읽어보았단다. 그리고 지은이가 지적한 것처럼, 학교 건물이 교도소를 닮았다는 내용에 인정할 수밖에 없고, 교육 관계자들이 오히려 그런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에 씁쓸해지는구나. 동선을 최대한 줄이고, 관리를 위한 구조로 만들어진 학교 건물은 창의력을 없애는 구조라고 이야기하더구나. 학교 건물은 낮게 지어야 하고, 밖에 쉽게 나갈 수 있는 동선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했어. 그래야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이야.

===========================

(51)

다양한 형태와 높이의 천장과 다양한 모양의 교실 평면도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대형 건물보다는 스머프 마을 같은 느낌이 나야 한다. 운동장 주변의 담장을 허물고 가까이에 가게를 두어 주변의 감시를 통해 안전한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방과 후 시민들이 운동장을 광장처럼 사용하고 마을 주민 전체가 아이들을 키우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 정신이 없고 전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만 양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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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몇몇 지은이가 구상한 학교의 도면을 책에 싣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공무원들께서는 그런 구조에 오케이를 해 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건물의 구조는 회사들의 건물인 사옥에도 영향을 준다고 했어. 직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회사라고 하면, 넓고 낮은 구조가 좋다고 했단다. 그것이 어렵다고 하면, 건물 안에서도 자연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했어. 아빠의 회사를 생각해 봤는데, 뭐 학교 건물이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2.

점점 1인 가구가 늘어가고 있단다. 그게 그저 사회현상인지 사회문제인지 아빠는 잘 모르겠지만, 그로 인해 그들을 위한 건축 양식도 많이 바뀌고 있다고 했어. 그것은 단지 건축 양식만 바뀌면 되는 것이 아니고, 도시는 그런 이들을 위한 도시계획을 세워야 도시가 활성화가 되는 거야. 그런 것이 잘 되어 있는 도시로 뉴욕이 있다고 했어. 뉴욕에는 1인 가구가 많고 집이 좁아도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쉽게 공원 같은 자연을 만날 수 있고, 문화적인 혜택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

그에 반해 서울도 1인 가구가 늘면서 집에 좁아지고 있는데, 갑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접근성이 좋은 공원이 적다는 거야. 대부분 공원이 차를 타고 가야 하고, 이 공원에서 저 공원으로 갈 때도 모두 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이 뉴욕과 서울의 차이라고 하는데, 이미 기반시설이 다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좁은 집만 그런 건 아니란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잖아. 그렇다 보니 자기만의 공간이 만들기 쉽지 않다고 했어. 그래서 편의점, 카페, PC, 자동차 등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주는 산업이 발달했다고 했어. 그것도 코로나19 때문에 많이 줄어들었지만 말이야. 문득 이런 코로나19 시대에는 어떤 건축의 형태가 필요할까?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작년에 세컨드 주택 붐이 불기도 했다는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아파트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19를 좀더 잘 극복하기 위해서 아파트 내부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3.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아파트가 많은 걸까?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라는 이유도 있고, 아파트 생활이 편해서라는 이유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렇게 고층 아파트가 가능하게 된 이유가, 지은이는 보일러 보급 때문이라고 하더구나. 흔하디 흔한 보일러가 아파트 붐의 시작이라고 하다니, 지은이의 설명을 들어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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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303)

이처럼 2층 양옥집은 보일러의 보급과 함께 생겨났다. 얼마 후 철근콘크리트와 보일러를 합쳐서 만든 아파트가 나타났다. 당시 아파트는 12층까지도 지어졌다. 고층 아파트가 부동산의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 이래 하늘 아래 빈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건축 업자가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공중에다가 없던 부동산 자산을 만든 것이다. 조선 시대 경제 계급은 극소수의 지주와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한된 땅덩어리에 살던 우리에게 부동산은 일부 부유층의 소유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파트로 인해 부동산이 늘어났고 직장에서 일해서 아파트를 사면 누구나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경제의 파이가 커지고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생겼고, 근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것은 보일러에서 시작됐다.

===========================

유현준님의 책을 읽다 보면 그가 공간을 중요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이 책에서도 결론은 공간이었어. 건축의 핵심은 공간이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 공간을 잘 만들어야.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화목하게 잘 살아간다고 했어. 우리도 앞으로 이 집에서, 이 공간에서 화목하게 잘 살아보자꾸나.

===========================

(370)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될 수 있다.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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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사람들은 건축물을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끝 문장 : 우리를 화목하게 만드는 도시를 함께 만들어 보자.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 같은 옷, 똑 같은 식판, 똑 같은 음식, 똑 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과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 양계장에서 키워 놓고는 닭을 어느 날 갑자기 닭장에서 꺼내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 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 P28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 이름 모르는 과거의 어떤 건축가가 수십 년 전에 디자인한 건물 위해 현재의 건축가가 이어서 연주하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앞선 사람이 펼쳐 놓은 기본 멜로디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음을 펼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과거의 것을 따라만 가서도 안 된다. 제약 가운데서 자신의 개성을 펼쳐야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차가 다니는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군데군데 무거운 쇠로 만들어진 철길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테일들도 보인다. 이 공간을 보면 두 명의 건축가의 연주하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재즈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 P158

영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지만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의 잠재적 위험이 만들어지는 방식 등 현재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그중에서도 건축가인 필자의 마음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벽과 다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마지막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벽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한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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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음식에는 가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기질과 취향과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함께 밥을 먹었던 기억은 가족을 단단히 결합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음식의 공유는 기억의 공유로 곧잘 이어진다. 사소한 것을 통해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백석의 시라면 백석에게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백석의 시를 지배하는 음식이 거의 모든 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가 음식을 감각의 총화로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시에 배치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음식은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해 독자를 시의 자장 안으로 강하게 끌어들인다.


(62)

당시 <조선일보> 사옥은 태평로 1가에 있던 2층짜리 조그마한 건물이었다. 백석은 광화문을 지나 세종로를 걸어 신문사로 출근했다. 멀리서 봐도 그는 남들의 눈에 금방 들어올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숱이 많은 새까만 곱슬머리에 선명한 눈썹에다 얼굴 한가운데에는 서양 사람처럼 콧날이 깎아놓은 듯 우뚝 자리 잡고 있었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다리를 가진 훤칠한 키의 백석이 세종로를 겅중겅중 걸어가면 누구나 다시 한 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목이 유난히 긴 이 청년은 늘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이었다. 길 가던 여성들이 이런 모던보이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화들짝 놀라며 곁눈질을 하기 일쑤였다.


(99)

1930년애 중반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가치체계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을 때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늘에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상상하였다. 그것은 과거의 재생을 통해 현실의 몰락을 타개해나가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석은 주관적 감상주의와 계몽주의를 넘어선 그 무엇을 찾고자 했다. ‘그 무엇은 새로운 미적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시단을 휩쓸었던 카프 계열의 사회주의 문학론은 지나치게 계몽성이 강해 백석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이상의 실험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백석은 식민지로 오염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고향, 즉 시원의 순결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과 고향의 방언에 착안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을 치닫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지켜낼 수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러니까 백석의 평안도 방언 사용은 향토주의에 매몰된 결과물이 아니라 준비된 창작방법론이며 의도된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이지.’


(160)

하지만 그는 1933년 일제의 기관총 구입비용 1,600만원을 헌납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전후해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1937 1 1일자 <조선일보> 1면에 일왕 부부 사진을 크게 실어 충성을 표시하는가 하면, 전쟁 발발 직후 8 2일자 사설에서는 출정 장병을 향하여 위로 고무 격려의 편지 한 장 보내는 것도 총후의 임무라고 썼다. 그 후에는 국방헌금을 모은다는 사고를 내고 전쟁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장도 군사헌금 1,000만원을 헌납하는 등 중일전쟁을 전후에 친일신문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161)

백석은 혼란스러워 머리를 흔들었다. 백석은 일본에 유학을 할 때나 귀국한 뒤에 단 한 편도 일본어로 작품을 쓰지 않았다. 수업을 하거나 사적인 편지를 쓸 때에도 일본어를 섞는 일을 극도로 자제했다. 의사전달도 문학적인 표현도 조선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고향 평안도의 방언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백석만의 특허상표였다. 그의 몸은 함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백석은 시시때때로 머리에 떠오르는 고향의 방언 때문에 외로움을 누를 수 있었다.


(218-219)

일제는 황국 신민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굴레를 씌워 분리하는 정책을 폈다. 식민지를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통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것은 백석이 보기에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백석은 내선일체를 강요하고 빠르게 미쳐가는 조선에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엄연히 민족과 언어가 다른데도 그 둘을 하나로 여기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경성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내선일체의 수렁으로 빠져들 게 뻔했다.


(337)

백석은 ‘1956년도 <아동문학>에 발표된 시인 및 서클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총평 형식의 글에서 시와 동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매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피력했다. 시의 요건은 생활에서 우러난 감정, 사색의 중요성, 언어를 부리를 법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 자신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북한문학의 주류가 항일혁명문학에 이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바탕으로 한 주체문학으로 변화하면서 북한문학에서 자율성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게 되었다.


(413)

<조국의 바다여>는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마지막 시였다. 아니, 그가 이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시였다.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시인으로 살아남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인간으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백석에게는 더 시급했다. 해방 이후 백석의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을 단순히 예술성을 망각하고 시를 정치도구화한 파렴치한 행위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백석이 북한에서 아동문학논쟁을 통해 문학의 자율성과 미학주의를 주장한 마지막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의 지도 아래 놓인 북한의 문학을 조금이라도 더 보편적인 미학의 논리로 되돌려놓겠다는 그의 문학주의는 결국 꺾일 수밖에 없었다.


(420)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은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거물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다.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 1997년 김영한은 백석 연구자 이동순의 주선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1999년 자야 여사는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백석의 연인답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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