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옥주, 너는 찾았니?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줄 줄 알았던, 바깥에서 얻어 온 상처를 감싸줄 줄 알았던, 언제든 돌아갈 둥지인 줄 알았던 하나뿐인 부모가 우리의 삶을 종말로 만들려 했던 이유.


(98)

밑동이 휘어진 나무는 그대로 휘어진 채 자란다. 기둥에 파인 흉터는 회복되지 않고 덮어버리는 방식으로 흉터 위에 벽을 세운다. 그건 새살이 돋아 상처가 아물어 사라지는 회복과는 다르다. 그래서 상처 입은 나무를 자르면 나이테에 흉터 자국이 혹처럼 남아 있다. 어느 시절에 받은 상처인지 보인다. 상처를 평생 품고 산다. 아물지 않은 채로, 붕어빵 가게 뒤에 습해진 여름 날씨에 썩어 죽어버린 보호수에 있었다. 300년이 넘게 산 나무였는데, 밑동이 휘어져 반쯤 기울어진 채 자란 이상한 나무였다. 소문에 의하면 도시 개발 때 나무를 뽑기 위해 밑동을 자르던 중 인부들이 연달아 죽는 일이 일어나자 저주받은 나무라며 자르기를 멈췄는데 그 상태로 다시 자랐단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저주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나무였다. 그렇게 보호수는 이 마을의 터주신처럼, 액막이처럼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 날 돌연 하루아침에 썩어버렸다. 묵호의 필리핀 출국 이틀 전의 일이었다.


(130)

꼭 날아야만 새인가? 우리를 정확히 분류하려면 공룡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 해. 고작 인간 따위 따위 뿌리의 깊이가 달라. 우리에겐 날개와 부리가 있어. 알을 낳지. 그런 여러 특징이 있어. 하지만 날개가 꼭 날기 위해 있다고는 할 수 없지. 모든 인간이 자기 신체를 전부 활용하며 사는가? 사용하지 못하면, 인간이 아닌가? ‘비행은 날개의 활용일 뿐, 새의 정의가 될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보행언어, 다리와 입의 활용일 뿐 인간 본질이 될 수 없지.


(145)

엄마의 상태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결혼했다고 하면 배우자와 아이가 당연히 존재한다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정상 범주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안에서, 그러니까 그것이 낮과 밤이 존재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물어봐. 아빠는 그런 경우가 더 어렵고 힘들었단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설명을 하는 게 맞는 건지, 굳이 꼭 모든 걸 말해줘야 하는지, 어차피 한 번 이야기 섞고 말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나를 위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거나, 나 역시 위로에 고마워하는 시늉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을지그래서 자주 거짓말을 했어. 아빠도, 지난 설에는 여행을 간 척,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평범한 가정과 다를 게 없는 하루인 척, 부동산과 주식이 삶의 가장 큰 고민인 척, 뱃살을 빼야 하는데 술 줄이는 게 제일 버거운 일인 척


(146)

이런, 아빠가 너무 나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아빠가 이럴 때마다 이해해 줄 수 있니? 사실 나약한 소리처럼 들렸겠지만, 이건 정말로 약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야. 더 단단해지기 위해 마음에 낀 거품을 빼는 거란다. 거품을 뺄 줄 알아야 해. 그래야 밀도가 높아져.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거품을 빼는 과정은 필수야. 그러니 아빠가 하는 나약한 말들을 깊이 새기지 말고, 여러 번 곱씹지 마. 온도가 높아지면 지워지던 펜 기억나? 그 펜으로 쓴 문장이라 생각해. 제비의 따뜻한 온기가 닿으면 거품이 다 터져버려 사라지는 문장들이야.


(149-150)

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행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마저 순결한 사람을 적어도 아빠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 단지 순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열매 같은 거란다. 씨앗은 같지만 어떤 과육은 싱그럽고 어떤 과육은 썩어 있지. 또 어떤 건 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쓰기도 하지. 떫기도 하고, 혀를 아리게 만들기도 해. 같은 씨앗이 모두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중요한 건 씨앗보다 과육이야. 마음보다 보이는 모습이 어떤지가 더 중요한 법이야. 아빠가 늘 말했잖니. 사람들의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 속에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어떤 우월함이나, 어떤 기만이 들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고. 엄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엄마는 그저 종일 누워 하늘만 바라볼 뿐이니까. 그러니 엄마가 심심해할 거라고, 외로워할 거라고, 슬퍼할 거라고 생각해서 너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기로 아빠랑 약속했잖니.


(156)

엄마는 이제 숨으로 우리랑 대화할 거야. 그러니 잘 듣고, 온몸으로 기억해 둬. 아가가 가장 가까이서 들었던, 한때 너의 숨이기도 했던 숨의 말을 잘 들어야 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숨에 모든 말이 새겨져 있으니까. 어렵지 않아. 집중의 문제지. 긴장할 때 숨은 빨라지고, 편안할 때 숨은 느려지고, 두려울 때 숨은 딱딱해지고, 슬플 때 숨은 축축해진단다. 화가 날 때 숨은 잘게 쪼개지고, 답답할 때 숨은 미지근해진다. 욕망할 때 숨은 뜨거워지고 낙담할 때 숨은 미지근해진다. 사랑을 느낄 때 숨은 찬란해지고 그리움을 느낄 때 숨은 잠시 멈춘단다. 그리고 이런 숨은 코나 입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빠는 엄마의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어깨와 등에서도 숨을 느낀단다. 특히 엄마처럼 숨으로 소통하는 인간들은 더 잘 느낄 수 있어. 엄마 품에 안겨봐. 아가를 가장 온전하게 안고 있던 품. 한때 아가의 전부였던 품.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의 리듬을, 아가가 영원히 기억했으면 좋겠어. 아빠는 그럴 거거든. 그럴 수 있거든.


(195)

태어난 게 벌이 될 수는 없어. 살아 있는 게 죄인 사람은 없어. 오해하지 마. 가끔 벌처럼 느껴질 땐, 등을 봐. 그 사람의. 노윤이의. 한참 동안 바라보면 햇살에 반짝이는 털들이 보여. 특히 뒷덜미에. 숨을 쉴 때마다 그것들이 움직여. 광대에도 털이 나 있어. 반짝여. 어깨가 미세하게 위로, 아래로, 또 위로, 다시 아래로숨을 쉴 때마다 바뀌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어서 더 편하고 때로는 슬퍼. 얇은 옷에 앙상하게 튀어나온 척추가 보여. 오돌토돌. 가녀리지만 단단함이 느껴져. 뼈로 당장 무너질 것 같은 몸에도 이토록 단단한 뼈가 있구나. 무너지지 않겠구나. 나약하지 않구나. 살아 있구나. 살아 있는 걸 마음에서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는데 미리 죽이지 말아야지. 살아 있다는 것만 생각해야지.”


(206)

우주를 정의 내린 건 인간이잖아요. 저 밖에 있는 공간을 우주라고 부르자고. 저기에 우주가 있다고. 더 큰 것에 작은 것이 담기는 게 진리니까. 우주는 제 안에 인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팽창하지만, 인간은 우주를 알고, 우주를 명명하고, 우주를 헤아리려 하잖아요. 사람들은 우주에 우리가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반대예요. 우주가 우리 뇌에 담긴 거예요. 더 큰 쪽이 늘 작은 걸 이해해요. 더 큰 게 언제나 더 고요하고, 잠잠하고, 잘 견뎌요. 노윤이요, 엄마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참고, 견디고 있어요. 세상이 노윤이를 이해하는 속도보다 노윤이가 세상을 훨씬 빨리 이해했으니까.’


(267)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바다는 변하지 않거든. 변덕이 심해. 종잡을 수 없어. 하지만 파도가 닿지 않는 바다 깊은 곳은 묵묵해. 아름다워. 휩쓸리지 않아. 지구의 대부분은 바다였어. 지구는 원래 묵묵해. 담담하고. 하지만 변했어. 인간이, 그렇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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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 금서기행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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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책 소개를 해주는 책도 가끔 읽곤 한단다. 그 책을 통해서 새로운 책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 오늘 이야기할 책도 책 소개를 해주는 책인데, 독특하게도 금서들만 모아놓은 책이란다.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이라는 책이고 부제는 금서기행이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는 책들이 있단다. 우리나라도 물론 마찬가지이지. 최근에는 금서가 거의 없지만, 예전에 군사독재시절에는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그런 금서를 출간한 지은이나 출판사들은 법적 처벌을 받기도 했단다.

보지 못하게 하면 더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 그렇게 금서로 지정되어 오히려 더 유명해진 책들도 많이 있단다. 오늘 이야기할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은 매일경제신문사 온라인 뉴스로 연재했던 내용을 엮은 것이라고 하는구나. 김유태 님의 책은 처음인데, 글솜씨가 좋으셔서 술술 잘 읽히더구나. 그리고 소개해주는 책들은 읽고 싶게 소개해주었어.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된 금서들 중 몇몇은 아빠의 독서리스트에 추가해 두었단다. 그럼 어떤 금서들을 소개해주었는지 몇몇 이야기해볼게.

 

1.

첫 번째 챕터는 아시아인들이 못 읽는 책들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했어.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이라는 책은 1937 12월 일어났던 난징대학살 사건에 관한 책인데, 난징대학살을 서구세계에 처음으로 자세히 알린 책이라고 하는구나. 난징대학살로 3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얼마나 잔인한 만행이었냐면, 당시 중국에 머물던 나치 출신의 독일인 욘 라베라는 사람도 일본의 만행에 치를 떨면서 일본군의 만행으로부터 20여만 명을 구출했다고 하는구나. 나치도 두손두발 다 들게 한 만행을 일본이 저지른 거야. 이 책을 쓴 지은이 아이리스 장은 중국계 미국인이었는데, <난징의 강간>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일본 극우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그로 인해 정신적 고통과 신경 쇠약을 겪다가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는구나. 일본에서는 <난징의 강간>을 반박하는 책이 오히려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니, 사과와 반성을 모르는 일본을 어찌하면 좋을꼬.

그런데 일본의 만행이 이것 하나뿐이겠니. SF 작가로 유명한 켄 리우의 단편 중에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은 일본의 또 다른 만행 731부대의 인체실험을 소재로 소설이란다. 이 작품 또한 일본에서는 금지되어 켄 리우를 출간할 때 이 작품은 빼고 출간했다고 하는구나. 켄 리우 작품에는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작품도 있는데, 그렇다 보니 중국에서도 켄 리우의 작품은 일부 빠져서 출간되었대. 동아시아에서 우리나라만 제대로 된 켄 리우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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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켄 리우는 이 소설에서 먼저 과거의 정보와 기억을 그래도 체험할 수 있는 기술의 발견을 언급한 뒤, 그 기술이 인간 사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했습니다. 반일 소설만은 아니고, 중국과 미국까지 동시에 비판한 작품입니다. 소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켄 리우의 단편 14편이 실린 <종이 동물원> 맨 끝에 수록됐는데, 일본에서는 이 소설만 빼고 작품집을 펴냈습니다. 그의 책은 중국에서 4권 이상 출간됐는데, 중국어판에는 공산당을 비판한 대목이 곳곳에서 삭제된 채 출간됐다고 전해집니다. 한중일 가운데 이 소설을 온전한 형태로 읽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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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팡의 <우한일기>라는 책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몇 년 전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갔던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책이란다. 전세계로 퍼져나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한 우한의 상황에 대해서 사실대로 쓴 글이나 이 책은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지은이 팡팡은 이 책 이후 중국 내에서 집필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구나. 글을 써도 출간해 주는 출판사가 없다는 거야. 책 하나를 금서로 지정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은이까지 억압하다니양심 있는 출판사가 없는 것인가, 공산당 정권에서 불가능한 것인가. 아빠가 얼마 전에 이야기해 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의 지은이 옌렌커도 금서 타이틀을 많이 갖고 있는 작가라는구나. 그의 책 중에 무려 여덟 권이 금서래. 이 책에서는 집단 에이즈 발병을 소재로 중국 공산당 정치를 비꼬는 작품인 <딩씨 마을의 꿈>이란 책을 소개해 주었단다.

...

얼마 전에 박찬욱 감독이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서 유명해진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도 소개했단다. 이 책은 호치민을 비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베트남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이래. 자국의 영웅들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비판하면 금서로 지정되기 쉬운데, 너무 속 좁은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 싶구나.

 

2.

책의 내용을 전혀 모른 상태에서 읽다가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가 아주 간혹 있단다. 그 불편함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작품이 분명 있단다. 그렇게 읽는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들 중에 금서로 지정되었던 작품들이 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중에도 그런 작품들이 있는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이란 작품도 그런 작품 중에 하나란다. 책 내용에 근친상간과 소아성애 등을 다루어 읽는 내내 불편함을 준다고 하는구나.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소설도 소개했는데, 이 작품은 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구나. 이 영화는 아빠도 어떤 경유에 의해서 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20여 년 전에 본 기억이 있구나. 보면서 너무 불편했던 영화인데, 이를 원작으로 한 소설도 너무 잔인한 소재로 인해 금서로 지정되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도 금서로 지정했었는데, 출판사의 항소로 19금 소설로 지정했다는구나.

아무튼 이 작품은 아빠는 영화로 봤지만 잔인함만 기억으로 남는 작품으로 너희들에게는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작품이구나. 스페인 작가 카밀로 호세 셀라의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품은 엄마를 살해하는 소재를 했는데, 스페인 내전 당시 군부에 참여했던 지은이가 나중에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이 되었대. 그럼에도 그 사람의 작품도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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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셀라의 문학적 위상은 독특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두 가지 아이러니를 형성합니다. 셀라는 스페인 내전을 겪은 시민들의 무의식을 건드려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프랑코의 군부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었습니다. 폭력의 원인에 대한 소설을 썼는데 작가 스스로가 폭력의 가담자였다는 예기지요. 또 그는 금서의 작가였지만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가 검열관으로 일한 이후에도 그의 다음 소설 <벌집>은 또 금서가 됩니다. 금서를 결정하는 검열관의 작품이 금서가 되는 아이러니라니 인생이든 문학이든 참으로 복잡한 요물입니다. 셀라가 논쟁적인 인물일지라도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 가진 사회문화적 위상까지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그 작품은 작가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자와의 공동 소유물이 되니까요. 어쩌면 어머니를 살해한 소설이 아직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읽힌다는 것, 그것이 이 책을 둘러싼 가장 큰 아이러니일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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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작품이 밀란 쿤데라의 자국 체코에서 금서라는 것은 조금 놀라운 소식이었단다.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이 거의 필독서일만큼 유명한 작가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는 작가라고 하는구나. 그의 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아빠는 읽어보질 않았는데, 이 책에서 <농담>을 소개해주었는데 읽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조만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또 다른 체코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이나는 작가의 <너무 시끄러운 고백>이라는 책도 소개해 주었는데, 두 작가 모두 체코 작가라서 그런지 두 작가를 비교하여 이야기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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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71)

한탸라는 인물의 하층민적 지위, 그리고 작가 흐라발이 한탸를 그려낸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보후밀 흐라발과 밀란 쿤데라는 같은 체코 출신 작가이면서 여러 면에서 대조적 위상을 지닙니다. 위기의 시대를 문장으로 견뎌낸 작가라는 점에서 둘은 동질적이지만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고, 흐라발은 끝까지 체코에 체류하며 체코어를 고집했습니다. 이는 단지 거주지 차이만이 아닙니다. 쿤데라와 흐라발의 소설 속 주인공도 차이를 보이니까요. 쿤데라가 창조한 문학적 인물이 시대를 내려다보며 고뇌에 빠진 허무주의적 지식인인 반면, 흐라발의 피조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회에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바보로 묘사됩니다. 또 쿤데라의 소설에는 성적 자유를 획득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이 줄곧 등장하는 반면, 흐라발의 소설에는 성적 불구의 인물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도 차이점입니다. ‘()의 실현이 한 인물의 자아를 형성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볼 때 흐라발의 남성상은 좌절된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대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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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소개한 금서들 중에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두 작품이 소개되었단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1980 4월에 출간되었대.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 뒤 1980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는데, 마치 이 책의 내용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인들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처럼 보였다는구나. <필론의 돼지>의 내용은 군인들과 전역병들의 싸움을 다룬 소설이었대. 그래서 계엄군과 광주 시민 모두 이 책을 싫어했다고 하는구나. 이문열은 정치적 노선이 아빠와 상극이라서 그의 작품은 무조건 패스. 또 다른 작품은 마광수의 <운명>이라는 작품인데, 한때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외설적인 작품을 썼다고 해서 세상에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단다. 그 이후 교수직도 잃고 힘들게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작품은 작품으로만 평가하지 지은이까지 연좌해서 평가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 밖에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 디스토피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오웰의 <1984>, 예전에 아빠도 읽어보려고 사두었다가 아직 읽지 않은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 등 금서로 지정된 적이 있는 많은 작품들이 실려 있었단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지은이 김유태 님이 노벨문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시고, 예측도 하시곤 했어.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24 4월이라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조심스럽게 예측도 하셨는데, 실제 수상을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되었을 때 지은이 김유태 님은 어떤 기사를 썼을까 궁금해서 한번 찾아봤단다. 그런데 김유태 님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얼마 전에 인터뷰를 했었고, 그 인터뷰를 신문에 실으려고 준비 중에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발표된 거야. 그래서 그날로 바로 작업을 해서, 한강의 노벨문학상 발표 후 다음날 한강 독점 인터뷰로 장문의 인터뷰를 싣는 대박을 터뜨렸단다. 아빠도 그 기억이 나는구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하루 만에 어떻게 독점 인터뷰가 가능하지? 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게 이미 몇 주 전에 이루어진 인터뷰였더구나. 그 인터뷰를 한 사람이 이 책의 지은이이고 말이야. 아빠도 이번에 그 인터뷰를 다시 찾아 읽어봤는데,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읽어야만 할 수 있는 양질의 질문이고, 한강 작가의 답변들도 문학작품 같은 답변들이라 좋았단다.

이번에 읽은 김유태 님의 <나쁜 책>은 새로 알게 된 책들이 많아서 좋았고, 글솜씨 좋은 작가 한 명을 알게 되어 좋았단다. 김유태 님의 다른 책들도 한번 눈여겨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몇 해 전 어느 주말, 나는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서울 시내의 한 대학 중앙도서관 책장과 책장 사이에 말없이 혼자 앉아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책의 바다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의 강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오래된 책을 정기적으로 펼쳐 읽는 행위는 생의 곁길로 빠지면서 즐기는 잠깐의 군것질이 아니라 정신의 식탁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는 정찬의 의례에 가까웠다. 묵은내가 폐부 끝까지 전해지는 도서관을 에어포켓 삼아 숨 쉬어보는 몽상을 거듭한 나는 수은을 삼키고 불가사의하지만 흡족한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귀가하곤 했다. 일회적이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책들을 내 안에 꾹꾹 눌러 담고 나오는 날의 노을빛은 아름다웠다. 생활인으로서, 한 명의 독자로서 그것은 내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 P7

해외의 한 출판사 편집장이 국내의 유명 평론가에게 해준 이야기를 떠올려옵니다. 이 평론가가 ‘좋은 책의 조건’을 편집장에게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고 하네요. 저도 사석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옮겨봅니다. "첫째, 흥미진진할 것. 둘째, 새로울 것. 그리고 셋째가 가장 중요한데, 바로 독자를 ‘불편’하게 할 것. 별생각 없이 드러누워 보다가 엇, 하고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입니다." <인비저블 몬스터>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췄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 전에 없던 새로움까지 있는데, 독자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남기기 때문이지요. 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의 참된 자아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나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척 팔라닉은 바로 그 점을 묻습니다. - P123

예술가의 창작이란 당이 추구하는 이념적 지평 위에서만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었지요. 일체의 낭만과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주의 예술의 엄숙주의가 지닌 문제점을 쿤데라는 간파했습니다. 예술의 도구화는 사회주의 예술, 좀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체이자 한계점입니다. 핸드리흐와 같은 사회주의 당직자들은 예술의 자유를 제한하고 이로써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예술의 한계를 규정하는 순간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한계가 노정된다고 쿤데라는 확신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듯이 예술은 스스로를 도구화하지 않는 무한한 자유 위에서의 진보적 창조이며, 문학이란 자유와 옹호를 위한 인간의 총체적인 언어활동이 아니던가요. 현실의 의미를 밝혀내고 해석하는 것이 언어예술로서 문학의 유일하고도 입체적인 목적이며, 예술에 굴레를 확정하는 순간 이는 죽어버린 예술이자 예술의 종막이 됩니다. - P157

문학은 정치와 동떨어진 예술로 간주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과 괴리되었다는 반감은 독자와 문학 사이의 거리를 멀게 만듭니다. 그러나 문학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예술 장르이며 때로는 정치 그 이상일 수 있음을 이스마일 카다레는 삶으로 또 작품으로 증명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러므로 영원히 빛날 겁니다. - P206

<눈먼 부엉이>를 읽은 일부 독자의 우울증과 자살은 이 책에 담긴 문장들로 생(生)의 근원을 염탐했다는 좌절과 막막함 때문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삶에서 유의미성을 발견하지 못한 영혼들은 영영 삶을 포기한 것이겠지요. 물론 이 책도, 이 글도, 삶을 지양하고 죽음을 찬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으며, 세상에 주어진 모든 삶에는 섭리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적 죽음은 문학 바깥에서는 제한되어야 하며, 죽음을 다룬 문학은 삶의 깊이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다만 삶의 이유가 모두에게 다르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죽음을 격리하고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좀더 삶 가까이에 두고 정확하게 통찰하면서, 삶의 유의미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만큼은 영원히 불변할 것입니다. - P333

런던에 세워진 조지 오웰의 동상의 벽면에 그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선과 악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갈망했던 오웰의 이 한마디를 저는 오래 간직할 생각입니다. 그의 이름은 필명으로, 오웰(orwell)은 그의 부모가 사는 지역에 흐르는 강의 이름입니다. 책의 바다에서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의 강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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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11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읽으면 좋은책 아닐까요?

bookholic 2025-12-12 22:27   좋아요 0 | URL
ㅎㅎ 네, 맞아요~~ 저도 이 책에서 소개된 책들 몇 권을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182)

<보부상 나데르의 잠언집> 중에서 다음 글은 그날의 장면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바위에 함께 앉았을 때 나는 타니오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앞에서 또다시 문들이 닫히거든 네 인생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그리고 또 다른 인생이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배에 올라서 너를 기다리는 도시를 향해 떠나거라.”


(196)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특권 폐지를 바란다면 외국인들을 그 지역 주민들이 부러워하지 않는 신세로 살도록 강요할 것이 아니라, 외국인들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들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359)

살인자의 머리를 갖고자 그들은 무고한 사람을 네 명이나 살해했다. 카흐탄 베이크는 자신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내게 말했다. 이제 내일이면 크파리야브다 사람들이 또 다른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베러 몰려갈 것이다. 늘 그렇듯 그럴싸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그들의 복수전은 대대로 이어지고, 오랜 세월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그저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359-360)

이렇게 된 것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산악지대 사람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든 사람은 이집트의 파샤가 틀림없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나폴레옹의 전쟁을 연장하고 있는 우리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태만과 자만을 일삼은 오스만 튀르크인들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산악 지대를 제2의 고향으로 사랑하게 된 내가 보기에 누구보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기독교도들이든 드루즈파든이 고장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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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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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참 꾸준하구나.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해 주는구나. 이번에 읽은 책도 제법 최근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추가된 작품으로, 아빠는 처음 들어가는 작가의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란다. 책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책소개를 읽어보다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게 된 소설이란다.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로 알려진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이라는 소설이란다. 알아보니 책표지의 사진은 1963년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의 한 장면이고, 책표지에 한쪽 안대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도 알고 있을 정도로 잘생기기로 유명했던 알랭 들롱이더구나. 그냥 사진으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가 알랭 들롱이더구나. 이 정도 되면 영화도 보고 싶긴 한데, 어디서 찾아서 봐야 할지 난감했는데, 유튜브에 검색을 해보니, 무료로 볼 수 있더구나. 안타깝게 한글자막은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중에 한번 도전해봐야겠구나. 그런데 영화가 3시간이나 되니, 영화도 큰 마음을 먹고 봐야겠구나.

또 알아보니 최근에도 이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이 있더구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는데, 넷플릭스를 구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당장 볼 수는 없겠구나. <표범>이라는 작품의 무대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이란다. 이 소설의 배경은 1860년대 중반의 시칠리아로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 하나의 국가가 아니고 여러 공국들이 공존하던 시기였단다. 당시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시기였어. 아빠가 이탈리아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소설 속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좀더 재미있게 읽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럼 이 소설의 이야기를 해줄게.

 

1.

1860 5월 시칠리아는 양시칠리아 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당시 왕은 페르디난드 국왕이 왕위에 있었어. 얼마 전인 4.4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시칠리아의 공화주의자 주세페 마치니가 일으킨 반란이었어. 그리고 주세페 가리발디라는 사람은 혁명군을 모집하여 이탈리아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단다. 그의 혁명군이 시칠리아까지 진입했단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리소르지멘토라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이탈리아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일하는데 성공하고 주세페 가리발디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고 했어. 당시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가 이해한 수준에서 적은 것이라서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단다.

이야기는 시칠리아의 대 귀족이자 영주인 돈 파브리초 살리나의 영지에서 시작한단다. 돈 파브리초는 귀족 가문을 이끄는 가장으로 키 크고 힘도 센 사람으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당시에는 흔치 않는 망원경도 갖고 있었어. 돈 파브리초의 아내는 마리아 스텔라야. 스무살 때 결혼하여 아이들을 일곱 명을 낳았는데 지금은 사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단다. 돈 파브리초는 아내 몰래 따로 사랑하는 마리안 나나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큰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단다. 지금은 사랑하지 아내에 대해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어. 딸 중에 콘체타는 수도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한 폭동으로 현재는 집에 와서 머물고 있었어.

돈 파브리초는 조카 탄크레디의 후견인으로 보살펴주고 있었단다. 탄크레디는 누나의 아들인데 고아가 된 이후 돈 파브리초가 후견인이 된 거야. 탄크레디와 콘체타는 어렸을 때부터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사랑을 알 나이가 된 콘체타는 그 호감이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게 되었단다.

어느날 탄크레디가 돈 파브리초를 찾아와 자신은 가리발디의 혁명군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찾아왔어. 돈 파브리초는 뜻이 다른 조카를 막지 않았단다. 조카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그런 어른이었어. 몇 달 뒤(1860 8) 탄크레디는 대위 계급장을 달고 한달 휴가를 왔단다. 눈 부위 부상을 입어서 한쪽 눈은 안대를 하고 왔어. 여름이면 살리나 식구들은 그들의 또다른 영지인 돈나푸가타로 휴가를 간단다. 돈나푸가타의 시장은 돈 칼로제로라는 사람인데 상업으로 자수성가하여 시장까지 된 인물이었어. 그런데 그의 아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집에만 있어서 이상한 소문들도 들었어. 천한 신분에 글도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엄청난 미모를 가졌다는 거야. 그래서 돈 칼로제로의 딸 안젤리카 또한 엄청난 미인이었어. 그러니까 안젤리나는 아버지의 머리와 어머니의 미모를 닮은 거야.

돈 파브리초는 저녁 만찬에 시장의 가족을 초대했는데, 이번에는 돈 칼로제로는 아내는 오지 않고 딸만 데리고 대동했단다. 안젤리카의 미모에 만찬에 참석했던 모든 남자들의 마음이 설레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 중에 탄크레디도 포함되어 있었고, 탄크레디는 안젤리카와 대화를 나누었단다. 그 장면이 이 책의 앞표지에 쓰인 장면인 것 같구나.

 

2.

1860 10. 다시 전쟁터로 간 탄크레디는 주기적으로 돈 파브리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날은 자기 대신 돈 칼로제로와 안젤리카에게 청혼을 해달라고 했어. 이 일을 아내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하고 의논했고, 마리아는 탄크레디를 배신자라고 했어. 물론 돈 파브리초도 자신의 딸 콘체타가 탄크레디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젊은이의 끓는 뜻을 꺾으려 하지 않았어. 탄크레디가 조카이지만 역시 자식처럼 대했고, 그의 뜻을 지지해주었단다.

한편 돈 칼로제로가 시장으로 있는 돈나푸가타에는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편입할 것인지를 두고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백퍼센트 찬성으로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편입하기로 했단다. 이 일은 돈 칼로제로가 주도하여 조작한 것 같은 의심이 들었지. 그래서 돈 파브리초는 돈 칼로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상인으로 성공하여 시장에 오른 것도 그와는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 탄크레디의 부탁은 들어주었단다. 그래서 돈 파브리초는 돈 칼로제로를 찾아가서 탄크레디의 청혼 소식을 알렸어. 돈 칼로제로도 그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

탄크레디가 군 동료 카브리아기와 함께 찾아왔단다. 탄크레디는 이제 사랑에 눈이 멀어 안젤리카만 바라보고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사랑을 키워나갔단다. 반면 탄크레디의 군 동료 카브리아기는 콘체타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탄크레디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콘체타는 그런 관심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어. 사랑은 언제나 어렵구나.

통일정부가 세워지고 정부측 인사인 슈발레가 돈 파브리초를 찾아왔어. 슈발레는 돈 파브리초에게 통일정부의 상원의원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단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정부의 중요인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지만 돈 파브리초는 슈발레의 제안을 거절했단다. 돈 파브리초 자신은 시칠리아의 역사를 함께 한 사람으로 시칠리아와 자신은 하나라고 했어. 그런 시칠리아 왕국이 사라졌으니 자신의 역할도 이젠 끝이 났다면서 자신은 이제 늙은 기성세대일 뿐이어서 새로운 통일정부와 맞지 않는다고 했어. 그러면서 돈 칼로제로를 추천해 주었단다. 돈 칼로제로는 그 동안 혁명군에게 적극 협조를 했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니까 새로운 통일정부와 맞다고 생각한 거야. 그동안 시칠리아를 지켰던 표범의 시대는 가고, 자칼이나 하이에나의 시대가 온 것이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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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236)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이다. 100, 200…..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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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마지막 장은 1910 5월로 이탈리아 통일정부가 들어선지도 거의 반세기가 되었단다. 통일정부를 반대했던 이들도 찬성했던 이들도 세상을 등졌단다. 살리나 가문은 홀로 남은 콘체타가 지키고 있지만 그 옛날의 위세는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단다. 그런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 가문으로 그렇게 조용히 문을 닫게 되는구나.

이 소설은 이탈리아 통일을 다룬 시기의 소설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소설로 느껴질 것 같구나. 아빠도 이탈리아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이 소설을 통해 이탈리아 통일 시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PS,

책의 첫 문장: “눈크 에트 인 호라 모르티스 노스트라이, 아멘.”

책의 끝 문장: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납빛 먼지 더미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사랑,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랑의 불길과 불꽃은 1년이면 꺼져 버리고 이후 30년은 그 재로 살아간다. - P93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저녁에 인사를 나누었던 구름들은 어딘지 모를 곳으로, 죄가 크지 않아 진노한 신이 가혹하게 벌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 버렸다. 별들은 흐릿했고 별빛은 더운 공기를 뚫고 나오려 애를 썼다. 돈 파브리초의 영혼은 별들을 향해, 손으로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별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기쁨을 주며 거래 따윈 하지 않는 별들을 향해. 그는 수없이 그랬듯이 공상에 빠졌다. 순수한 지성인이 자신이 계산용 수첩을 들고 곧 차디차고 광활한 공간으로 가는 상상이었다. 수첩에 풀어야 할 계산은 어렵고 복잡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잘 풀릴 터였다. ‘별들만이 순수하지. 유일하게 선량한 피조물들이지.’ 그는 세속적인 공식에 따라 생각했다. ‘어느 누가 플레이아데스성단의 지참금을, 시리우스의 정치 경력을, 베가의 부부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경 쓰겠는가?’ 그날은 운수가 좋지 않았다. - P108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배경으로 죄 많은 인생을 살게 될 탄크레디와 안젤리카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구름과 바람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인데, 구체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미래를 뒤쫓았다. 늙고 부질없이 지혜로워졌을 때 두 사람은 끊임없이 그 시절을 돌이켜 보았으며, 그리움과 후회를 떨칠 수 없었다. 그때는 욕망이 존재했으나 항상 패배하던 시기였고, 잠자리 기회가 수없이 주어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했다. 억제된 관능적인 충동이 잠시 체념으로 변하기도 하는, 그러니까 진정한 사랑으로 승화되기도 하는 때였다. 그때는 성(性)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던 결혼 준비기간이었다. 하지만 절묘하면서도 간결한, 완전체 같은 기간이었다. 잊힌 오페라, 그러니까 은근한 암시와 익살로 수치심을 가리고 공연 중에 조화롭게 연주되지 않아 실패한 아리아들이 담김 오페라의 서곡 같았다. - P206

"슈발레, 의도는 좋아요.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게다가 제가 이미 말했듯이 대부분은 우리 잘못입니다. 당신은 조금 전에 경이로운 현대 세계에 새로운 모습을 보일 젊은 시칠리아를 이야기했지요. 내가 보기에는 휘체어에 앉아 런던 만국박람회에 끌려 나온 백 살 먹은 노파처럼 보여요. 노파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셰필드의 철강 공장에도 맨체스터의 방적 공장에도 관심이 없어요. 그저 침으로 얼룩진 베개와 요강을 밑에 둔 침대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 P226

슈발레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민첩한 현대적인 행정부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영주는 우울했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을 이렇게 지속되게 놔두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늘 지속되겠지. 물론 인간사라는 시각으로 볼 때의 ‘늘’이다. 100년, 200년….. 그후에는 달라지겠지. 하지만 더 나빠질 게 분명해. 우리는 표범, 사자였다. 우리를 대신할 사람들은 자칼, 하이에나가 될 것이다. 이들 모두, 그러니까 표범, 자칼, 양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슈발레는 토사물 색깔의 바퀴 네 개가 지탱하는 우편 마차에 올라탔다. 굶주리고 상처투성이인 말이 긴 여정을 시작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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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bookholic 2025-12-08 22:2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북프리쿠키 님도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5-12-07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뱃지는 왤케 크고 빛나죠?! ㅎㅎ 와...2016년부터 연속! 흠...리뷰를 이렇게 꼼꼼히, 더구나 ‘독서편지‘라는 이리 독특하고 따스한 형식, 어쩔 거여요! 앞으로 자주 들를게요! 서재의 연속 달인 축하드려요!

bookholic 2025-12-08 22: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ㅎㅎ
젤소님아 님도 축하드리고, 늘 좋은 책 추천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부탁드립니다~~
 















(14-15)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심 안도하며 십 분만 늦었다면 나도…”라고 혼잣말을 했겠지만, 주니퍼 수사에게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왜 하필 저 다섯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우주에 어떤 계획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어떤 패턴이 있다면, 갑자기 중단된 저들의 삶 속에 숨겨진 불가사의한 무언가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주니퍼 수사는 그 순간 대기를 가르고 떨어진 그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겠다고,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떠난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었다.


(30)

백작은 그녀의 편지를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가 즐긴 것은 문체였고, 그것만으로 편지의 모든 풍부함과 의도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부분의 독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기록이라는 문학의 목적 자체를 놓치고 말았다. 문체는 쓰디쓴 액체를 담아 세상에 권하는 하찮은 그릇에 불과하다. 후작 부인이 자신의 편지가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항상 고결한 마음 상태로 살아가고, 우리에게 특별해 보이는 작품이 그들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과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185)

옛날 다리 대신 새로운 다리가 세워졌지만, 그 사건은 잊히지 않았다. 리마 사람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속담 같은 표현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어떤 사람은 화요일에 보세. 다리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말이야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가 내 사촌은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근처에 산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싱긋 웃는다. 그 말은 머리 위해 매달린 칼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사고에 대한 시도 있고 페루의 문집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고전들도 있지만, 진정한 문학적 기념비는 주니퍼 수사의 책이었다.


(207)

지금 이 순간에도나 말고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오직 카밀라만이 그녀의 아들과 피오 아저씨를 기억하고, 오직 이 여인만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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