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스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0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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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10번째 <폴리스>를 읽었단다. 처음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고 나서 잔인한 묘사에 읽기 불편하기도 했지만 스릴러 소설을 좀 읽는 아빠의 취향에 맞아서 하나 둘 읽게 되더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락밴드 출신의 독특한 지은이 이력에, 낯선 노르웨이 작가라는 점도 관심을 계속 갖게 되었어. 이번까지 해리 홀레 시리즈 10권 중에 실망한 작품들도 몇몇 있지만, 손을 못 끊게 되더구나. 지금까지 12권까지 출간되었는데 그 12권이 마지막인지 계속 출간되는지는 12권까지 읽어봐야겠구나.

아무튼 오늘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열 번째인 <폴리스>라는 책을 이야기해줄게. 이 소설 또한 기존 해리 홀레 시리즈처럼 잔인한 범죄 장면도 나오는 하드 코어 스릴러로 너희 같은 순진한 10대가 읽기에는 좀 적당하지 않은 듯 해. <폴리스>는 해리 홀레 시리즈 9권인 <팬텀>과 쭉 이어지게 된단다. <팬텀>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 홀레가 총에 맞으면서 끝났잖니.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고 아들처럼 사이가 좋았던 올레그한테 말이야해리 홀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끝이 났는데 해리 홀레 시리즈인데 설마 죽었겠냐고 아빠가 이야기했던 것 같구나. 10 <폴리스> 첫 부분에 병실에 혼수상태로 빠져 있다가 암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은이 요 네스뵈는 그 사람의 정체가 마치 해리 홀레인 것처럼 서술해서 읽는 이에게 혼동을 주기도 했지만, 좀 읽다 보면 그 사람은 해리 홀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1.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안톤 미테트라는 경관은 중요한 환자가 있는 병실을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어. 실예라고 하는 경찰 대학 학생에게 근무 교대를 하고 퇴근하려고 했으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단다. 안타깝게도 이번 살인 사건의 희생자는 경찰이었어. 이미 그곳에는 많은 경찰들이 출동했어. 아무래도 동료 경찰이 희생되었다 보니 평상시보다 많은 경찰들이 출동한 것 같았어. 총책임자인 군나르 하겐도 와 있었고 과학 수사관 베아테 뢴도 와 있었어. 이들은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겠구나. 경찰청장 미카엘 벨만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어. 그런데 전작 <팬텀>에서 미카엘 벨만이 정직 중인 동료 트롤스와 함께 마약 밀거래와 연루되어 있었잖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몇 안 되는데 그 중에 해리가 있었고 말이야.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 또 경찰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첫 번째 피해자와 연관성은 없었지만 두 살인 사건의 공통점이 있었단다. 예전에 있던 미제 살인 사건의 장소에서, 그 미제 살인 사건과 연관된 경찰들이 동일한 날짜에 살해당한 거야. 그래서 경찰들은 다음 살인 사건의 타켓을 예전에 발생했던 미제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췄어. 그런데 두 미제 사건 중 한 사건의 용의자였단 발렌틴이 감옥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죽인 것처럼 꾸민 다음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발렌틴이 최근 일어난 경찰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추적했단다. 그리고 이 사건의 전담할 소수 조직을 결성했어. 카트리네, 군나르, 베아테, 베에른이 그들이고 그들을 도와줄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스톨레도 합류했단다.

그들은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생각했지. 바로 해리 홀레. 아직 해리 홀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안 나왔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해리 홀레인 것 같았지만 이미 아빠가 이야기했듯이 그 사람은 해리가 아니었어. 그들은 카트리네가 리더가 되어 비밀리에 조사를 했어.

얼마 후 중요한 환자가 있는 병실을 지키던 안톤 미테트가 누군가 약물을 탄 커피를 마시고 잠에 빠져 들었고 그 사이에 환자가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환자는 자연사한 것으로 결론이 났어. 하지만 안톤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상관인 군나르에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군나르와 연락이 되지 않았어.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누군가에게 그만 살해당하고 말았단다. 안톤도 미제 살인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 동일 장소에서 살해 당한 거야. 세 번째 경찰 연쇄 살인이 일어난 거지.

 

2.

드디어 해리가 출현했단다. 올레그가 총을 쐈을 때 다행히 해리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살 수 있었단다. 해리는 사랑하는 라켈과 평범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을 하고 은퇴를 했단다. 그리고 지금은 경찰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어. 올레그가 자신을 쏜 사실은 경찰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올레그도 자신이 한 짓에 반성을 하고 마약 치료를 받겠다고 했어. 라켈은 스위스가 일하고 있어 올레그도 스위스에서 치료받고 라켈은 주말에만 노르웨이로 와서 해리와 함께 지냈단다. 어느날 베아테와 카르리네가 해리를 찾아와서 최근 발생한 경찰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함께 하자고 도움을 요청했어. 해리는 자신은 더 이상 경찰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사건을 해결할 만한 실마리를 주었단다. 해리에 조언에 따라 경찰은 다가올 미제 살인 사건 발생일에 덫을 놓고 준비를 했단다.

한편 해리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어. 제자 중에 실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억 나지? 첫 부분에 병실을 지켰던 그 경찰 대학 학생. 그 실예가 해리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는 거야. 그런 실예를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오히려 실예는 변호사를 데리고 와서 해리에게 강간당했다고 했어. 해리의 동료 대학 교수 중에 아르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는지 사전에 해리에게 이것저것 준비를 하라고 했고 이에 해리는 자신의 결백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었고 오히려 실예가 이 일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단다.

한편 경찰이 덫을 파 놓은 과거 미제 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파 놓은 덫에 걸리지 않고 의외의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단다. 해리의 친한 동료인 과학수사관 베아테 뢴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거야.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은이가 너무 잔인한 설정을 했구나. 오랫동안 해리의 동료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자주 출현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죽게 그만 두다니 말이야. 해리와 베아테의 동료 경찰들은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 베아테의 죽음은 해리를 복귀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단다. 해리는 복수심을 가득 채우고 경찰에 복귀하게 된단다.

소설의 지은이는 여려 사람이 용의자 선상에 올려 두면서 소설을 진행해 나갔어.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앞서 이야기한 발렌틴이었어. 발렌틴의 집 천장에 오래된 시신이 발견되거나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여 스톨레의 환자로 진료를 받다가 스톨레를 칼로 위협하다가 도망을 가는 등 말이야. 하지만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사람은 실제 범인은 아니었어.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 중에 진범이 있었지. 물론 발렌틴의 집 천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그 사람도 흉악범이긴 하지. 하지만 이번 경찰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닐 확률은 높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용의자로 자주 그려지는 사람은 앞서 이야기했던 전직 경찰 트롤스였어. 트롤스는 경찰총장인 미카엘과도 연관이 되고, 조사를 하다 보니 실예와도 연결고리가 있었어. 그렇다 보니 이 세 사람이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사건 전개를 하게 된단다. 하지만 진범은 이들도 아니야. 예상치 못한 인물, 별로 사건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 그 동안 해리와 경찰들에게 호의를 보였던 사람, 그 사람이 소설 뒷 부분에서 범인으로 짜잔하면서 나오게 된단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야기하지는 않을게.

한가지 걱정은 시간이 흘러서 아빠가 이 리뷰 독서 편지를 다시 봤을 때 아빠도 범인이 누군인지 기억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다시 읽기에는 책이 너무 두껍고 말이야. 읽은 지 두어 주 지난 지금도 줄거리가 헛갈리는데 말이야. 아무튼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열 번째 소설도 그렇게 끝이 났단다. 예상치 못한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는 규칙을 지키면서 말이야. 그 규칙이 오히려 범인을 예상하기 쉽게 만들기도 하더구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비슷비슷하여 어떤 게 어떤 작품인지 좀 헛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은 해리 홀레 시리즈를 마무리를 해야겠지. 나중에 또 읽고 이야기해줄게. 그런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노르웨이에 이런 잔인한 살인 사건이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나? 궁금하네.

 

PS,

책의 첫 문장: 그것은 그 안에, 그 문 뒤에 잠들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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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141-142)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콤프턴의 실험 결과는 확인 도장이었다. 그는 진보좌파 신문인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 이렇게 기고했다. “콤프턴 실험의 긍정적 결과는, 빛이 에너지 전달뿐 아니라 충돌 효과 측면에서도 마치 개별 에너지 발사체로 구성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수년 전부터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는 주장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빛은 파동이어야 했다. 맥스웰 이후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알고, 전기기술자는 그 지식으로 라디오와 방송기기를 만든다. 파동이어야 하는데 입자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제 빛의 이론이 두 가지다. 둘 다 필수불가결이고, 20년에 걸친 이론물리학자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백할 수밖에 없듯이, 둘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결도 없다.” 빛의 파동이론과 입자이론 둘 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 된다. 광양자는 간섭현상과 굴절현상 같은 빛의 파동현상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양자 없이는 콤프턴 효과와 광전 효과를 해명할 수 없다. 빛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파동과 입자. 물리학자는 이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262)

1928년에 디랙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디랙 방정식이라 불리게 될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방정식 하나를 발명했다.


짧고, 완벽하다. 말이 없는 발명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공식으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물리학 방정식일 것이다.

디랙이 이 공식을 종이에 적었을 때, 물리학은 두 기둥 위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혁신적인 이 두 기둥을 합칠 수 없었다. 슈뢰딩거 자신도 실패했다. 그러나 폴 디랙은 이 둘을 합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이론을 화해시켰다.

 

(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293)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 5 16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쓸모없는 사람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432)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466)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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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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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모비 딕>으로 유명한 작가 하먼 멜빌의 단편 소설을 하나 읽었단다.

필경사 바틀비. 이 책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니고, 우연히 하먼 멜빌의 소설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어. <모비 딕>이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게 읽어서 하먼 멜빌의 다른 소설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고단편 소설이라서 아주 짧게 읽을 수 있었단다. 이 책도 알고 보니 유명한 소설이라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을 했는데,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시리즈에서 나온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단다.

필경사는 것은 것은 공문서나 서신 등을 그대로 베껴 적는 사람을 이야기한단다. 예전에는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어서 공문서들이 많이 필요할 때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 적곤 했나 보구나. 그런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틀비라는 사람의 이야기란다. 참고로 이 소설은 1853년에 쓴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1.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는 변호사로 좌우명이 무사태평이었단다. 좌우명답게 힘든 변호를 하지 않고 주로 부자들의 공채, 부동산 관련한 업무를 주로 했단다. 그의 사무소는 뉴욕 월 스트리트에 있었단다. 그의 사무실에는 터키와 니퍼스라는 별명을 가진 두 명의 필경사와 잡무를 맡고 있는 진저너트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이 한 명 있었어. 터키는 오전에는 전문가의 최고를 찍을 정도의 업무 효율을 가지고 있으나, 오후에는 늘 화가 난 상태로 일의 효율도 좋지 않았단다.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을 했는데니퍼스는 비슷한 캐릭터로더구나. , 터키와 반대였단다. 오전에는 늘 화가 나 있는 얼굴로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오후에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서 착실히 일을 하곤 했어. 이렇듯 둘은 단점이 있는 필경사이지만 할 때는 능력이 출중한 필경사들이었어. 12살인 진저너트는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법률공부도 하였단다.

일이 많아져서 필경사 한 명을 더 뽑겠다고는 공고를 냈고 그 공고를 보고 찾아온 이가 오늘의 주인공 바틀비였단다. 바틀비는 일벌레 수준이었어. 엄청난 양을 베끼는 데 거의 기계처럼 일했어. 하지만 바틀비 역시 특이한 점이 있었단다. 절대로 검토 작업을 안 한다는 것. 필경사에 있어 중요한 일도 제대로 베껴 썼는지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바틀비는 하지 않았어. ‘가 검토 요청을 해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지.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야. 무엇인가 요청하거나, 시키면 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했어. 이런 일이 반복되자 는 화가 났지만 바틀비의 업무 능력과 근면성, 착실함을 보면 참게 되었단다. 바틀비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필사를 했으니까바틀비를 이해해보려고도 했어. 하루는 면담을 해서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어. 그러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면담조차 거부를 했단다. 해고하려고 했으나 그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의 능력이 아쉽기도 해서 자르지 못하고 다시 설득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거절을 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필사를 그만 두겠다고 하더니 그 이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회사는 꼬박꼬박 나와서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했어. 일주일 시간을 주고 그에게 해고 통지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사무실에 앉아 있었어. 우연히 주말에 사무실에 나온 는 그곳에서 바틀비를 보았고,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의 대해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해서 그에게 돈을 줄 테니 다른 곳에 가라고 했지만 여전히 바틀비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단다.

결국 가 사무실을 이전하기로 했단다. 마음 한켠에 바틀비가 걸리긴 했지만 이전한 사무실에서 또 열심히 일을 했지. 그런데 이전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찾아왔어. 바틀비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이야. 여전히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고 했어. ‘는 바틀비와 관련이 없다면서 책임질 수 없다고 했어. 알겠다면서 돌아간 이전 사무실의 사람며칠 후 다시 찾아온 이전 사무실의 사람바틀비가 건물 곳곳에서 출현하여 손님들이 놀라게 되고 그래서 손님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했어. 바틀비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었어. ‘는 다시 한번 바틀비를 찾아가 설득해보았어. 다른 일자리도 주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바틀비는 모두 거절을 했단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결국 바틀비가 유치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 ‘는 바틀비를 면회하려 갔고 그곳에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어. 심지어 식사도 하지 않아서 삐쩍 말라 있었어. 사식 넣은 넣어주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바틀비의 식사를 챙겨 달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바틀비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결국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단다.

바틀비가 의 사무실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 채 바틀비는 세상을 떠나버렸어. 몇 달 뒤 바틀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단다. 바틀비는 위싱턴에서 배달 일을 했는데 수취인 불명 우편물 처리하는 일을 하다가 해고당했다고 했어. 받을 수 없는 우편물을 처리하면서 바틀비는 많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런 것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만 이야기하는 바틀비를 만든 건 아니었을까 싶구나.

분명 능력은 있으나 마음의 병이 생겼던 바틀비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 전에 신경정신의를 만나 치료를 받아봤으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아마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병원 가기를 거부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필경사 바틀비>는 짧지만 재미있으면서 우울한 소설이라고 짧게 평가해 본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

책의 끝 문장: , 바틀비여! , 인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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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요즘 일부 한국인들은 미래를 걱정한다. 오랜 원한이 맺힌 일본이나 중국의 침략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우려에 대한 내 대답은 한국인은 한국어로 말한다라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한 나라의 모든 문화적 사안 중에서 언어가 단연 문화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수 세기 동안 한국을 속국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인의 언어를 파괴하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이 전쟁에 패해 한국을 떠나자마자 한국인들은 곧바로 한국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일본어로 말하라고 강요받았을 때도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공적으로 일본어를 말하도록 강요받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여전히 한국어를 사용했다.

 

(16-17)

나는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는 평화와 안정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를 흔히 희생의 역사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다. 이를 위해 나는 한국 역사를 일본 역사와 많이 비교해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장에서는 천 년 이상 동안 필기시험(과거제도)를 통해 정부 관료들을 채용해온 한국의 전동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이를 일본의 사무라이 역사와 비교해보라. 그들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자리를 계승했고 그것이 실패하면 자결했다. 일본의 역사는 삶과 죽음, 살인과 권력 장악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자는 라이벌을 가장 성공적으로 죽인 사람이다.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다이묘가 마침내 천황까지 통제한다. 일본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투성이다. 바면 한국에서의 권력은 최고의 문장력 및 학식으로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최고의 학생에게 돌아간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해보면 한국에서는 문자 그래도 펜이 칼보다 강했다.

 

(35)

한국사에 대한 나의 가장 기본적 시각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왜곡된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가난과 억압으로 왜곡되었고 외부의 영향, 특히 일본에 의해 때로는 고의적으로 때로는 부지불식간에 왜곡되어온 것이다. 나는 한국을 희생자라고 보는 일반적 서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대부분 기간에 일본의 희생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도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 점령보다 더 큰 피해를 초래한 한국의 분단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존재하는 피해의식의 요인이 되었다. 희생이 한국 역사에서 강력한 주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한국 역사의 유일한 주제는 아니다.

 

(48)

1627년과 1636년에 일어난 만주족(후금, 청나라)의 두 차례 침략(정묘호란과 병자호란)도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침략으로 언급되지만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에 그쳤습니다. 이 침략의 목적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에 새로 들어온 청왕조가 조선을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지요. 그 전쟁이 두 차례의 침약으로 이어진 이유는 조선이 동맹국이 되는데 동의했으면서도 비밀리에 명나라와 접촉해 청나라를 공격하는 방안을 모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선과 명나라의 밀약을 알게 된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 왕(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청 왕도에 대한 조선 왕의 충성을 담보하기 위해 왕의 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조선에서 철수했지요. 그들은 조선에 군대를 남겨두거나, 총독을 임명해 조선 조정을 통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완전히 조선을 떠났습니다.

 

(83)

나는 한국이 안정적으로 평화적인 문치의 역사를 유지해온 핵심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인이 아닌 선비에 의한 정부였다는 점을 누차 강조해왔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되었으니까요. 정말이지 한국의 역사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과거 시험은 유교적 철학적 문제에 관한 것이었지요. 비록 그 제도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한국은 중국보다 그 제도를 훨씬 더 완벽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지만 한국은 중국처럼 그렇게 많은 침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겪은 침략과 중국이 겪은 침략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횟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중국이야말로 한국보다 훨씬 더 큰 침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지요.

 

(108)

최근에는 ()’이라는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신 박사님도 그것이 일본의 강제 점령에서 나온 식민지 역사관의 일부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나는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해석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어떤 맥락에서는 식민사관이 한국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조선 시대 당파 논쟁도 자신들의 시각대로 극단적인 대립으로 해석했지요. 한국 역사를 식민지 과점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다는 주장은 기본적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한국 역사의 왜곡은 일부는 식민사관을 가진 악의적인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생긴 것이고, 일부는 유럽에서 들어온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148)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사항은 이런 변화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592, 1627, 1636년의 전쟁 이후에 조선이 사회 경제적으로 크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 한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 이전 상태의 사회와 정부를 복원하는 것이었지, 어떤 변화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언급하는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이념적 변화는 그로부터 2~3세기 지난 뒤에 찾아왔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이런 변화가 일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주장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요. 백성들을 전쟁터에서 남겨 놓고 도망간 불명예스러운 왕, 한양을 떠날 때 백성들이 돌을 던졌던 그 왕이 돌아와 다시 왕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정의 관리들과 정부도 이전과 같이 재건되었고, 농부들도 다시 그들의 농토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노비들도 다시 노비로 돌아왔습니다.

 

(230)

조선 왕실 사위들의 족보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신채용 박사는 <선원록>이라는 왕실의 족보를 통해 왕실 사람들과 주요 정치 세력 사이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선원록>은 세계 어느 왕실의 왕족 족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말 웅장한 족보입니다. 조선의 왕실보다 족보를 더 소중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왕실의 족보는 그 나라 족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요. 더구나 한국의 모든 왕실은 어느 왕조에서나 자신들의 족보를 인쇄물로 남겼습니다. 족보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으니까요.

 

(246)

국제사외는 이제 막 시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시조를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한국 밖에서 시조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국내에서도 시조를 한국 문화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부흥시키고, 교육 시스템 내에서뿐만 아니라 방과 후 생활 속에서도 시조를 쓰는 훈련을 계속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창의적이 되기 위한 길을 마련해주어야 합니다. 시조 만세, 만만세.

 

(264)

물론 이외에 더 많은 다른 질문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신은 내 말의 요점을 이해했을 것이다.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1965년의 한국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역사 교과서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이제는 한국이 이론 성과, 독특함, 우수한 능력을 설명해 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니까 한국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게 강하고 역동적인 나라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제 나는 그 모든 잘못된 역사관을 확실하게 바꾸고 싶다. ‘우물 밖의 개구리로서 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265)

물론 한국사 교육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4어도 한국사의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한국 역사를 희생의 역사로 보는 관점이다. 물론 20세기만 보면 한국은 분명 희생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20세기가 아니다. 그리고 20세를 너머 한국 역사를 보면 한국의 전 역사를 희생의 측면으로 보는 것도 사실이 아니거니와 비생산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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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 대한제국 외교관에서 러시아 혁명군 장교까지, 잊혀진 영웅 이위종 열사를 찾아서
이승우 지음 / 김영사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근현대사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때 꼭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 1907년 만국 평화 회의 헤이그 특사 파견이란다. 3명의 조선인 특사 3명이 헤이그에 갔는데,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그 분들이다. 이상설은 그 이전에도 많은 독립운동을 하셨고, 이준은 헤이그에서 서거를 하셔서 많이들 언급되곤 하는데, 이위종은 다른 두 분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곤 했어.. 아빠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말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우연히 이위종의 책에 대해 알게 되어 구입했단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위종이라는 분과 그의 아버지 이범진이라는 분이 정말 멋지고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우연히 알게 된 책이지만, 이 책을 만나 읽게 된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멋진 분을 만나게 되었어.

지은이라는 이승우라는 분인데, 한국역사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의의 역사연구가라고 하시는구나. 이위종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 보니, 지은이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부분도 많다고 서두에 이야기를 했단다. 그러니까 이 책의 일부는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인간 이위종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구나. 이위종이 했던 연설문 원문과 이위종의 후손들과 인터뷰한 내용들도 실려 있어서 좋았단다.

 

1.

이위종은 18841 9일 태어났단다. 그의 아버지 이범진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아버지 이범진은 서출 출신으로 무시당하며 지냈지만, 갑신정변 때 명성황후를 피신시킨 공으로 고종에게 발탁되었단다. 이후 아관파천을 주도하는 등 고종의 최측근이되었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후 사건의 진상에 대해 조사를 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기피대상 1호가 되기도 했어. 아관파천으로 조선 정부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일본이 기피대상 1호로 삼은 이범진을 국내에 두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어. 그래서 이범진은 미국주차 특명전권공사라는 직함으로 미국으로 보냈단다.

이때가 1896 7 16일이었는데, 이범진은 당시 12살이었던둘째 아들 이위종을 미국에 데리고 갔단다. 이위종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13살에는 미국횡단열차를 타고 여행을 했단다. 그것도 아버지 없이 통역을 담당했던 이의담과 단둘이 말이야. 이 여행으로 견문도 넓히고 생각도 깊어지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리고 13살짜리 아들을 이국땅에 혼자 여행을 보내는 이범진도 대단하시구나.

1899년 이범진은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특명전권공사로 부임하게 된단다. 그래서 이범진은 이위종과 함께 미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단다. 이위종은 파리에서 리쎄 대학에 입학해서 국제법을 공부한단다. 1902년에는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해서 군사학을 공부했어. 우리나라 사람이 그 당시 프랑스의 육관사관학교를 다녔다니... 이 시절에 이위종은 애덤스미스와 루소를 공부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구나. 이범진은 이번에는 러시아공사를 임명되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되었어. 이번에도 이위종도 함께 갔는데, 어느덧 성인이 된 이위종은 조선공사관 판임관 3등참서관으로 임명 받아 가게 된 것이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는데 러시아 사람 엘리자베타였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육군사관학교 친구인 빅토르의 여동생이었대. 아버지가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이위종은 아버지를 설득하고, 결혼을 위해서 필요한 러시아정교 세례까지 받고 엘라비베타와 결혼을 했단다. 행복했던 이위종과 달리 당시 러시아 사회는 혼란스러웠단다. 1905 1월에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직접 목격한 이위종은 민중의 삶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었대. 거기에 러시아는 일본과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어. 전쟁은 러시아가 졌는데, 우리나라가 더 큰 피해를 얻게 되었단다.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된 거야.

그런 분위기는 1905 11월 을사늑약까지 이어졌단다. 하지만 이것은 불법이었잖니. 얼마 전에 읽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을사늑약은 고종이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인 것이야. 이런 부당을 알리기 위해 1907년 만민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내기로 했어. 그렇게 뽑힌 사람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었단다. 국내에 있던 이상설과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그곳에서 이범준과 이위종을 만났단다. 그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서 1907 6월 헤이그에 도착했단다. 만국평화회의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심의해달라고 요청했어. 이때 활약을 한 이가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위종이었단다. 이위종은 각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외교관을 만나 설득했단다. 기자들 앞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프랑스로 연설을 했다는구나.

====================

(163-164)

그 순간 연설회장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적이 감돌았다. 위종은 조용한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세상에 부자와 빈자가 있듯이 강한 나라가 있으면 약한 나라도 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모두 먹어치우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을 정의의 신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믿는 정의의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웃의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되고, 이웃을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예수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하지만 문명국가의 시민이자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여러분은 지금 일본의 침탈과 압제로 고통받는 우리 대한제국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아직 잘 조직되어 있지는 않으나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의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침략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처하더라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다시 하나로 뭉쳐서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

하지만, 만국평화회의는 겉으로만 평화회의였지, 열강들이 식민지 탈취의 목적을 숨긴 채 겉으로만 생색만 낸 행사였단다. 이준 열사는 그곳에서 패혈증으로 순국하시게 된단다. 일본은 이 사건 이후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궐석재판을 통해 이상설은 사형, 이미 순국하신 이준과 이위종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어. 이들은 끝내 다시는 조선땅을 밟지 못했단다.

 

2.

이범진은 이위종에게 연해주로 가서 의병활동을 하라고 해서 이위종은 연해주로 오게 된단다. 그곳에서 이위종은 최재형과 이범윤과 만나 의병활동을 시작했어. 이위종은 동의회 회장을 맡아 국내연합작전에도 참여했단다. 이위종은 프랑스 육관사관학교 출신으로 의병들에게 도움을 주었어. 당시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하던 이들에는 너무나 유명한 안중근과 전재익, 엄인섭 등이 있었단다. 이범진은 군자금으로 1만루블을 보내주어 국내연합작전을 지원했단다. 하지만 국내진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어. 예전에 안중근에 관해 이야기할 때 했듯이 안중근이 포로들을 살려주는 바람에 일본군의 역습을 받고 패배했었잖니.

이후 연해주의 의병활동이 위축되었고, 최재형과 이범윤 사이의 계파 갈등도 고조되는 등 분위기가 안 좋았어. 이위종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어. 둘째딸이 태어났거든... 이위종의 아버지도 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활동을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경술국치 소식을 듣게 되었단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범진은 1911 1 26일 자결을 마고 만단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

이위종은 조선 독립을 위해서는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 장교로 지원하여 합격을 했어. 그런데 이때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장교로 1차세계대전에 참가하게 된단다.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입고 독일에 포로로 잡히게 돼. 6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있다가 탈출하여 다시 러시아로 왔어. 당시 러시아제정에 대한 민심은 완전 바닥이었어. 결국 1917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제정은 무너졌단다.

이위종은 조선독립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어. 이번에는 러시아혁명을 이끈 소비에트에 가입을 해서 붉은 군대에 입대했단다. 그는 조선독립을 위해 소비에트에 가입을 한 것이지만, 향후 그의 이런 행적은 조국에서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어 한동안 그의 공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게 되었단다. 붉은 군대 소속인 이위종은 일본이 지원하고 있는 백군을 상대로 싸웠어.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그는 '시베리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었단다. 국제연대 사령관이 되어 군대를 이끌었단다.

어느날은 적군 사령관의 편지를 받게 되었단다. 그 사령관은 다름 아닌 육군사관학교 친구이자 엘리자베타의 오빠 빅토르였어. 편지에는 큰딸의 병사소식도 있었단다. 이위종에게는 큰 슬픔이고 아픔이었을 거야. 다음날 적군은 철수하고 적지에는 아무도 없었단다. 이 책이 앞서 이야기했듯이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했잖아. 이 부분이 사실일지, 작가의 상상력일지 궁금하구나. 전쟁터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아 작가의 상상력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조선 사람의 신분으로 러시아 붉은 부대의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치른다고 하니 얼마나 복잡한 심정이고 힘든 일이 많았을까 싶구나. 큰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전쟁터를 비울 수 없었어.

이위종은 소비에트에 허락을 받고 고려인 부대 창설을 하기로 했단다. 이 부대를 만들기 위해 연해주로 이동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의 자원을 받았으나 그리 많이 모이지는 않았대. 연해주 우스리스크에 도착한 이후 의병대와 만나 고려인 부대를 창설하였어. 하지만 이내 일제에 체포되었다고 하는구나. 이카시라는 일본 장교가 주도를 했는데, 이위종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이위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총살당하고 말았단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비극적인 삶으로 마감을 했지만, 실제 이위종은 마지막은 실종이라고 하는구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위종은 1917년부터 1924년까지의 자신의 행적이 담긴 자서전을 일종의 보고서로서 소련 공산당에 제출하였대. 그러니까 1924년까지는 생존해 계셨던 거구나. 그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깝구나.

...

식상한 단어이긴 하지만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것 같구나. 영화나 드라마를 찍어도 매력 있는 캐릭터로 그려질 것 같은데 없는 것이 아쉽구나. 지은이는 이 책을 기반으로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는데 아직 소식이 없지만,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구나. 헤이그 특사만 해도 충분히 멋진 영화가 될 것 같은데... 언젠가는 만들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몇 년 전 하바롭스크에 있는 러시아 외무성 문서보관소 창고의 한 낡은 서류철에서 이력서가 한 통 발견되었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에서는 빅토르라는 이름으로 그를 살려냈지만 귀족 신분과 성향 때문에 러시아 혁명 후 그가  스탈린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위종의 미국 횡단 여행은 한 달이 걸렸다. 위종은 9월 신학기에 중급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를 왕복했던 기차 여행은 위종의 의식을 더욱 성숙시켰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을 놀라울 만큼 넓고 깊어졌다. 그는 이른 나이에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그 여행은 인종차별과 같은 인간의 부정적인 일면을 일깨우기도 했지만 반면에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위종의 인성을 변화시키며 그의 의식을 더욱 따뜻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P63

위종은 그날, 눈 덮인 겨울궁전 광장에서 흰 눈 위에 뿌려지던 노동자들의 붉은 피를 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눈밭에 뿌려진 선홍색 핏자국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금까지 위종에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이 지나간 이 도시는 위종에게 다른 의미의 도시가 되고 말았다. 위종은 요즈음 이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음산한 기운이 자신의 의식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위종은 자신의 의식 속에 슬금슬금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기운이 자신을 오랫동안 붙들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은 혁명의 기운이었다.
- P127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열강들은 식민지 탈취라는 목적을 책상 아래 숨기고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었다. 이런 자리에서 ‘일본의 불법적인 외교권 탈취’라는 한국 대표단의 주장은 애초부터 잠꼬대 같은 소리에 불과했다. 더불어 암암리에 식민지 나눠먹기를 묵계했던 열강들이 한국 대표단의 참가 봉쇄를 담합했기 때문에 특사들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헤이그를 떠나야 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문이 인류의 평화와 이익보다는 오직 국익만을 좇는 제국주의 국가들에만 열려 있었다는 것이 대한제국 특사들에게는 불운이었다. - P175

근대적인 유럽식 장교 교육을 받은 위종은, 나이는 약관이었지만 이미 전술과 전략 등 전반적인 군사 분야에서 모든 의병장을 지휘하고도 남을 만한 능력이 있었다.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와 같은 외국어 구사 능력도 탁월했고 만국공법과 전제주의와 공화주의 정치 체제에 관해서도 해박했다. 위종의 국제 정세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법 지식은 안중근이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안중근은 만국공법과 세계사를 포함하여 열강들의 제국주의 행태에 관한 위종의 논리 정연한 해설을 들으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그것은 지금까지 안중근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학문이 깨우쳐준 충격이었다. - P222

러시아 정부의 대일본 유화 정책의 실체를 파악한 위종은 이런 환경에서 대규모 의병전쟁으로 항일운동을 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투쟁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만주 지역에 파병된 일본군은 아예 만주를 점령하기 위해 더욱 많은 병력을 증파했다. 따라서 만주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러시아와의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또 한 번의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다. 위종은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이미 일본과 야합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며, 신해혁명으로 갓 태어난 신생 중국은 내전으로 남의 형편을 눈여겨볼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만이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다. - P254

우수리 원주민과 자작나무는 한국인과 소나무의 관계와 같다. 이들은 사람의 영혼은 나무에서 태어나며, 이승에서 삶을 마치면 남자의 영혼은 버드나무로, 여자의 영혼은 자작나무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들은 숲속의 모든 나무에 정령이 깃들어 산다고 여긴다.
봄이 되면 나무는 잠을 깨고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난다. 숲에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는, 영혼이 영원히 순환하는 곳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 있으며 서로 에너지를 교환한다고 믿었다. 그 에너지는 자연에서 잠시 빌려 쓰다가 언젠가는 자연에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이런 주기의 반복이며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나무도 꼭 필요한 만큼만 베어낸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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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01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이위종이라는 훌륭했던 우리나라 조상님을 소개해 주신 bookholic 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bookholic 2024-08-03 11:16   좋아요 1 | URL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이름만 알고 있는 독립투사들이 많이 계신 것 같아요..
그 분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힐 님도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