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래전에 쓴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목숨까지 걸게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 쿠바 정도가 사회주의의 명백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리키는 추상명사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33-34)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였을 뿐이었다. 어항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면 굴욕적으로 숨쉬느니 어항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게는 벽을 깰 방법이 없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있을 따름이었다. 판검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든가, 판검사가 될 수 없으니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의사라도 되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살기로 했다. 나를 소외시킨 세상을 오히려 내가 소외시킨면서 말이다.

 

(55-56)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92)

그러던 9월 전국적인 총파업이 시작됐다. 그가 소속해 있는 철도에서의 파업이 총파업이 불씨였다. 애당초 철도파업이 내건 요구사항은 쌀을 달라는 대부분 인민들의 요구와 별다른 바 없었다. 일급제 반대, 기본급료 인상, 가족수당 일인당 육백 원 지불, 물가수당 인상, 식량을 본인에게 네 홉, 가족에게 세 홉씩 지급할 것, 운수부 직원도 동등하게 대우할 것 등이 노조의 요구조건이었다. 당시 모든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엄청난 물가상승으로 일제시대의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도국장 맥크라인은 철도노조가 제출한 요구조건에 대하여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고 있으니 행복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군정청의 회답이 없자 철도노조는 24일 오전 9시를 기해 사만여 노조원들이 일제파업에 돌입했고, 26일에는 서울지역 출판부문 노동자들이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26경성지방 총파업 출판노동조합 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51-152)

천하의 개망나니 박종하는 46년 말이 되면서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천하의 박종하를 저렇게 얌전하게 만든 게 누구냐며 수군거렸다. 박종하를 변화시킨 장본인은 곧 밝혀졌다. 바로 공산당이었다. 주먹이나 휘두르는 것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말뿐인 해방조선 젊은이의 답답함이 무신자를 위한 평등한 새 세계 건설과, 친일파를 비호하며 조선을 새로운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이라는 이 땅의 역사적 사명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놀랍게 변해가는 박종하를 보며 마을사람들은 공산당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당시 남조선 대부분의 인민이 그랬지만 박종하와 같은 동네 사람들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노인네나 젊은이들이나 모두가 좌익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동네에서 조금 말썽피우는 사람을 보면 으레 저놈 공산당 만들어야 사람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62)

동무들! 우리는 조선노동당 당원들이오. 굶주리고 짓밟힌 무산대중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가들이오. 혁명가는 이미 자기를 버린 지 오래요, ……혁명가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혁명당을 따라야 하오. 동무들은 한 지도자의 일시적인 오류로 혁명사업을 그르쳤다고 해서 영원히 혁명을 포기하겠다는 거요? …… 이번 전쟁은 언젠가 중앙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오. 그때 모든 과오들이 가려지고 비판되겠지요. 이 점 명심하고 동무들 몇 명이서 북으로 가겠다는 거요? 이미 퇴로도 끊겼소. 지금까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시오.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각자 자기 부서로 돌아가 자기 임무를 다하시오.”

 

(313-314)

여름과 함께 소련이 유엔에서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한번 해방이 물거품으로 사라자는 순간이었다. 여순사건, 작년 여름의 광주 입성, 그 짧았더니 해방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의지만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내일모레일 것 같던 해방은 미제의 참전으로 물거품이 되고, 미제의 완전한 한반도 점령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저지되었다. 세계의 복잡다양한 얽힘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그렇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거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확신하면서도 웬일인지 정체 모를 허전함은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사라지지 않았다. 생성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아름답고 분명한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에는 슬픔도 있는 것일까. 한 인간, 그 개체는 죽되 인류는 발전한다는 위대한 진리 앞에서도 그는 가끔씩 섬뜩한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다.

 

(363)

묻혀진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한국의 현대사와 같은 뼈아픈 비극은 없었고, 또 그렇게 철저하게 묻혀진 비극의 역사도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는 금기로 묻혀져 있다. 최근 들어 간혹 한두 사람의 묻혀진 이야기들이 비밀스럽게 들춰지기도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흐름이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한 한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물줄기의 한 지류일 뿐이고, 그 작은 흐름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도 도도한 원 물줄기가 제자리를 잡을 때뿐일 것이다.

 

(384)

박갑출도 전적으로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보라빛 먼 날의 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간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당장 다시 오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것과,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고야 말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길뿐이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10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뿌린 싹이 해방의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이 결정적 시기를 해방으로 성공시키지 못한 쓰라림이 남는 것뿐이었다. 이제 밀알이 되는 것, 땅에 뿌려져 더 많은 밀로 태어날 그날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남은 그들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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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선오는 눈을 맞으며 한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득한 눈발 저쪽에 무등산이 그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산, 광주에 오면 누구나 바라보는 산, 언제나 중후하고 의연하고 듬직하고 넉넉한 자태의 무등산은 겹겹의 눈발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옷을 입으며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광주를 내려다보듯 보듬듯 하고 있는 그 산을 무시로 바라보며 무등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지난날을 김선오는 왠지 슬픈 감정으로 더듬고 있었다. 등수를 매길 필요가 없도록 으뜸이 되겠다는 꿈 속에는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

꿈은 클수록 좋고, 욕망은 치열할수록 좋다.”

 

(37-38)

그게 말입니다…… 얼핏 보면 항아리에 담아놓는 것이 더 손해일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따지고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딴 그릇에 따로 내와도 깍두기가 모자라게 되면 사람들은 또 달라고 합니다. 그럼 다시 갖다 주느라고 일손만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 담아두면 그 일손을 덜게 됩니다. 그리고 또…… 딴 그릇에 두 번 내온 것이 많아서 남기게 되면 그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서 각자가 먹을 만큼씩만 꺼내 먹으면 그런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항아리에 이렇게 담아두면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 같아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하고, 그게 더 손님을 끄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78)

허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자기 할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 일본놈들이 백배사죄하며 돈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을 판인데, 오히려 이쪽에서 사죄 같은 건 상관없이 어서 돈이나 좀 달라고 매달리는 형국 아니냔 말야. 그러니 자기 할아버지가 짓밟히고 모독당하는 것 같고, 괜히 헛된 일 한 것 같고, 또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우리가 허진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는데,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데모를 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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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 제주4·3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금숙, 오멸 원작 / 서해문집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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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다룬 책들을 몇 권 읽었단다. 소설이나 교양서적이었어. 제주 4.3 사건을 다른 책들 중에 <지슬>이라는 만화책이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아빠도 예전에 사 두고 있었어. 만화책이다 보니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얼마 전에 아빠가 4.3 사건을 다룬 한강 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지슬>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고 읽었단다.

<지슬>이라는 영화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빠는 만화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인 줄 알았는데, 반대더구나. 영화 <지슬>을 만화로 옮긴 것이라고 하더구나. 영화 <지슬>은 오멸이라는 사람이 감독을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등 많은 상을 탔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만화책은 김금숙 님이라는 분께서 그리셨는데, 영화 내용을 충실히 따르셨다고 했어. 우리가 보통 만화와는 색감이 좀 달랐단다. 굵은 붓으로 터치한 것 같았어. 그래서 인물 묘사가 사실적이지 않아서 너희들이 안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제주4.3사건의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만화는 이런 거친 붓질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주인공들이 당시 제주도에 살던 평범한 서민들인데 그런 거친 붓 터치가 그들의 거친 삶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어. 또 한편으로는 수묵화 느낌이 나기도 했단다.

 

1.

책 제목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뜻한다고 하는구나. 요즘에야 가공식품으로 맛있는 과자나 술안주로 많이들 먹지만, 예전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비상식량으로도 생각되는 감자였잖니. 빈센트 반 고흐도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작품 속 사람들은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기억이 있구나. 지슬은 바로 그 감자의 제주도 사투리. 이 책에서도 숨어지내고 도망다니는 이들에게 서로 지슬을 주고 받았단다. 지슬은 단순히 먹거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던 거야. 제주 4.3사건은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또 하지는 않겠지만, 제주 4.3 사건은 피해를 입은 국민들만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고, 국가의 부당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던 군인들에도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란다. 이 책에서도 국가의, 상사의 부당한 명령에 갈등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어.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작년 12.3 내란 사태 때 출동했던 군인들도 생각이 났단다. 어디로 출동하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내린 곳은 국회이고, 그들이 상대하는 것이 적군이 아니고 시민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면서 갈등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 속에도 보였거든.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은 당연한 것 같구나. 당시 몰상식한 지도자로 인해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지. 그리고 그런 몰상식한 지도자의 흉악한 결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2024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또 한번 큰 충격이었지. 많은 상식 있는 국민들이 나서서 행동하여 과거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구나.

….

만화 <지슬>을 읽고, 영화 <지슬>도 보고 싶더구나. 그런데 어디서 볼 수 있나? 찾아봤는데, 고맙게도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되어 있더구나. 오랜만에 영화도 한 편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춘섭아, 조심해.

책의 끝 문장: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는 미군정과 미군 고문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학살에 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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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진 2025-02-08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연극으로 4.3을 처음 만났죠. 가슴 먹먹했던 순간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책을 보기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죠.

bookholic 2025-02-08 22: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연극은 더욱 실감이 나겠네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4.3 사건을 다룬 연극을 못볼 것 같습니다.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아서요...
 















(40-41)

취리히는 늙어가기에 좋은 도시다. 죽기에도 좋다. 유럽의 나이 지형도 같은 게 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을 것이다.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은 젊음을 위한 곳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분위기, 어디선가 풍겨오는 대마초 냄새, 마우어파크에서 맥주를 마시고 풀밭에서 뒹굴거리는 사람들, 일요일의 벼룩시장, 가벼운 섹스…… 그 다음에는 빈이나 브뤼셀의 원숙함이 자리한다. 느려지는 박자, 안락함, 전차, 적절한 건강보험, 아이들을 위한 학교, 약간의 경력 쌓기, 유럽연합의 지루한 행정직 일자리. 그래, 좋다, 아직 늙기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는-로마,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맛있는 음식과 훈훈한 오후는 교통, 체증, 소음, 약간의 무질서를 상쇄할 것이다. 젊음의 막바지에 이른 이들에게는 뉴욕을 추가하겠다. 그렇다. 나는 그곳을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대서양 너머로 건너간 유럽 도시로 간주한다.

 

(73-74)

향을 기록하는 장비가 없다는 사실이 진정 놀랍지 않은가? 실은 하나가 있긴 하다. 기술보다 앞서 존재한 단 하나의 도구, 가장 오래된 아날로그 도구. 그것은 물론 언어다. 당분간은 언어 말고 다른 도구가 없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향기를 말로 포착해 또다른 노트에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묘사해봤거나 배교해본 향기만을 기억한다. 놀라운 점은 이런저런 냄새에 대한 이름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혹은 아담은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빨강, 파랑, 노랑, 보라 등등의 이름이 있는 색깔과는 다르다. 향기는 언제나 비교를 통해, 묘사를 통해 인식된다. 제비꽃 냄새가 난다. 토스트 냄새가, 해초 냄새가, 비 냄새가, 죽은 고양이 냄새가…… 하지만 제비꽃, 토스트, 해초, , 그리고 죽은 고양이는 향기의 이름이 아니다. 이 얼마나 부당한가. 아니 어쩌면 이 불가능성 아래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징조가 숨어 있는지도……

 

(79)

가만히 앉아서 인생 끝자락에 여기에 온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는 나의 불가리아 과거를 바라본다. 노인들은 언제나 나를 매혹한다. 나는 어렸을 때 노인들과 함께 살았다. 조부모와 더불어 자란 우리는 그들과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지만 다른 한 세대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바로 우리 부모들. 이제 나도 그들과 같은 대열에 합류했음을 깨닫는 지금, 나의 매혹에는 또다른 동기도 있다. 죽음을 직면하고 삶에서 계속 멀어지면서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구해낼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기억으로라도, 그러고 나면 그 개인적 과거는 다 어디로 가는가?

 

(169-170)

인생(과 시간)이란 얼마나 도둑 같은가, ? 얼마나 강도 같은가….. 평화로운 카라반을 매복 공격하는 악랄한 노상강도보다 더 악랄하다. 그런 노상강도들은 돈 가방과 숨겨둔 황금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유순하여 실랑이 없이 재물을 내놓으면 다른 것-목숨, 기억, 심장, 생기-은 빼앗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이나 시간이라는 이 강도는 어느덧 다가와 모든 것-기억, 심장, 청력, 생기-을 앗아간다. 심지어 고르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손에 넣는다.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그 와중에 당신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가슴을 축 늘어지게 하고, 엉덩이엔 뼈만 남게 하고, 허리를 굽게 하고, 머리칼을 성긴 백발로 변하게 하고, 귀에서 털이 자라게 하고, 온몸에 점을 뿌려놓고, 손과 얼굴에 검버섯을 돋게 하고, 앞뒤 안 맞는 말을 지껄이지 않으면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게 하고, 모든 말을 빼앗아 아둔하고 망령 든 사람이 되게 한다. 그 개자식은-인생, 시간, 노년 다 똑같다, 똑 같은 쓰레기, 똑 같은 깡패다. 그 개자식은 처음에는 적어도 공손해지려는 노력이라도 한다. 솜씨 좋은 소매치기처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도둑질하는 것이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작은 것들을 훔쳐간다-단추 한 개, 양말 한 짝, 가슴 왼쪽 윗부분의 미세하게 찌릿한 통증, 몇 밀리미터쯤 두꺼워진 안경, 앨범 속 사진 세 장, 얼굴들,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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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기원 - 어디에도 없는 고고학 이야기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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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달 전에 강인욱 님의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이란 책을 읽고 예상했지만 고고학이라는 분야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숨겨져 있던 옛 이야기를 읽는 것은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 그래서 강인욱 님의 책 두어 권을 더 구입했는데, 그 중에 한 권을 이번에 읽었단다.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어떤 것에 대한 기원을 찾는 것. 그것이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것에는 유형적인 것도 있고, 무형적인 것도 있고지은이 강인욱 님이 그 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알게 된 어떤 것들의 기원과 유래를 정리해서 이 책을 냈다고 하는구나. 세상 모든 것이라고 것이 한편으로 산만하고 주제가 일관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 다룬 것은 모두 우리 인간들이 즐기고 사용하고 먹던 것들이니 인류라는 공통점이 있구나.

 

1.

이 책에서는 잔치, 놀이, 명품, 영원 네 가지 키워드로 나누어 이야기해주었단다. ‘잔치에서는 먹거리에 대한 기원을 이야기해주었어. 주로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음식과 술을 소개해 주었단다. 막걸리, 소주, 김치, 삼겹살, 소고기, , 상어고기, 해장국을 이야기 주었단다. K-Food라는 말로 한식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요즘이라 더 알맞은 주제인 것 같구나. 그런 김치를 맛있게 즐기면 되는 거지이웃나라 중국은 자신이 원조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그러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미움이나 받지. 김치는 남한과 북한이 각각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더구나. 그것은 원조가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치를 저장음식으로 만들어 겨울을 나는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는구나. 인류문화유산은 누가 원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혜를 따지는 현명한 판단을 하는 것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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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

한국김치는 2013년과 2015년 각각 남한과 북한의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정 심사를 위해 유네스코에 제출한 보고서는 김치라는 무형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살려서 만들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이 보고서에는 김치의 역사가 1,000년 정도라고 적혀 있었지만 기간은 인류무형 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원조 유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당 문화의 현대적 의미와 보편적 가치다. 이는 유네스코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하며 붙인 타이틀, ‘김장 : 김치를 만들고 서로 나누기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따지지 않았다. 선정위원회 측은 김치의 원조를 나누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류가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지혜롭게 저장 음식을 만들고 함께 나누었던 지혜를 김치에서 발견하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승자는 불명한 원조를 큰 소리로 주장하는 자가 아니었다. 세계 사람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치를 재발견해는 자가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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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먹거리에 진심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한단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는데, 해장국도 그렇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가 다른 나라의 해장국이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는 해장국도 참 다양하고, 해장국을 먹으면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도 속이 시원하고 편안함이 느껴지거든요즘 아빠가 술을 거의 먹지 않아서, 숙취를 깨우는 해장국을 먹은 지 오래되었지만, 요즘 같은 추운 겨울날 식사로 먹어도 아주 좋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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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각 나라마다 저마다의 해장 문화가 있지만, 우리나라만큼해장이란 단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 한국에는 아예해장국이라는 음식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한국에서 해장국을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생활의 한 부분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요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회식을 한 다음날이면 으레 함께 술자리를 한 이들 중 한 명이오늘은 해장국이나 할까?” 하며 전날 멤버들을 다시 불러내어 합동으로 숙취 해소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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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놀이에서는 놀이, 고인돌, 씨름, 축구, 여행, 낙서, , 고양이를 이야기해주었단다. 축구의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근에 중국의 3200년 전 유적에서 공이 발견되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중국이 축구의 기원이라는 것이 통설이라고 하는데, 왜 오늘날 중국은 그리도 축구를 못하는지…^^

반려 동물의 대표격인 개와 고양이에 대한 기원도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야생 늑대가 개로 진화하는 것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지만, 1950년대 러시아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라는 사람은 온순한 여우들을 교배하여 20년만에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여우들이 나타났다고 하더구나. 그러니까 늑대들도 그런 식으로 짧은 시간에 온순한 개로 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고양이는 자신이 집주인양 행동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고대에도 고양이를 숭배하곤 했다는구나. 고양이들의 도도한 행동이 그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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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는 인간의 숭배 대상이었다. 이집트 선왕조인 기원전 3700년경의 무덤에서는 고양이 뼈가 발견되었는데, 무덤에 묻히기 4~6주 전에 부러진 뼈를 치료받은 흔적이 있었다. 살아생전에 인간의 보살핌을 받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이집트인들의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의 미라와 더불어 수많은 고양이 미라가 함께 발견되었다. 심지어 쥐 미라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양이의 먹잇감인 쥐를 함께 묻은 것으로 그만큼 고양이를 극진히 대우했다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바스테트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역시 이집트인들이 고양이를 숭배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죽이면 사랑에 처한다는 법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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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명품에서는 석기, 실크, 황금, 신라 금관, 인삼, 기후와 유물, 도굴, 모방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어.. 지구의 기후 변화가 고고학에서 악영향을 주는지 처음 알게 되었단다. 하기야 어디에 좋은 영향을 주겠니.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정말 걱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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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정이 급변 중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영구동결대 얼음이 녹아버리면서 알타이 지역 문화유산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상황처럼 현재 지구 곳곳에서 이상 기후나 환경오염으로 해서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역사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문화유산은 비단 발굴이 완료된 것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깊은 땅속에 매장되어 있어 언젠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유물들도 우리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이다. 말없이 사라지는 유물들이 많아질수록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밝혀줄 증거들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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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네 번째 영원에서는 벽화, 추모, 미라, 발굴 괴담, 마스크, 문신, 점복, 메신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이번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은 좀더 가볍게 읽을 수 있었고, 고고학에 대해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책인 것 같았어. 기억력만 좋다면 사람들에게 해줄 이야기보따리를 갖게 되는 것이지만, 아빠의 기억력으로는 이미....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019년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러시아 동료 고고학자가 한국에 온 적이 있다.

책의 끝 문장: 앞으로도 흥미진진한 고고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야생 늑대는 어떻게 개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는 굉장히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대 러시아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시베리아에서 사나운 은여우를 길들이는 실험에 착수한다. 그는 일군의 은여우 중에서 비교적 온순한 여우들을 골라 교배를 했다. 그 결과,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인 20년 만에(6세대를 거친 후)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행동을 하고, 형태적으로도 꼬리가 위로 말리는 오늘날의 개와 비슷한 모습을 한 여우를 키워냈다. 20년 정도의 짧은 기간 안에 유전자 수준의 변화가 이루어 질 수는 없다. 다만 길들여진 은여우의 호르몬은 야생의 은여우와 차이를 보였다. 벨랴예프의 연구로 늑대의 유전자에는 이미 인간의 반려동물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인간을 만나면서 발현되었음이 밝혀졌다. - P163

미라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부패하기 쉬운 내장을 빼내고 피부는 탈수를 시켜서 보존 처리를 하는 것이다. 먼저 콧구멍으로 갈고리를 집어넣어 뇌 속을 긁어 뇌수를 빼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얼굴에 상처가 나면 안 된다. 다음으로는 갈비뼈 밑에 구멍을 내서 장기를 빼내어 카노피라고 하는 별도의 단지에 넣는다. 단 저승에서 심판을 받을 때 필요한 심장은 부적과 함께 제자리에 다시 넣어둔다. 그 다음에는 몸에서 수분과 지방 성분을 빼내는 탈수 작업을 거친다. 단순한 탈수가 아니라 몸의 외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길고도 세심한 작업이다. 얼마 전 3,45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는 파피루스가 발견되었는데 35일간 건조를 하고 35일 간 군대를 감는 등 총 70일 뒤 소요된다고 했다. <창세기> 1장에도 이집트 정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죽자 40일간 미라를 만들고 70일동안 애도를 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파피루스 속 기록과도 대략 비슷하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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