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박종호 지음 / 풍월당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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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재미있게 읽은 풍월당 박종호 님의 클래식 관련된 책들이 있단다. 그래서 박종호 님의 책을 인터넷 서점에서 보게 되면 반갑고 그렇단다. 이 책도 그렇게 인터넷 서점에서 알게 된 책이란다. 책 제목은 <클래식을 처음 듣는 당신에게> 란 책이란다. 책 제목만 보면 예전에 쓰신 책과 살짝 중복되는 느낌도 있어 보였어. 그래도 오랜만에 박종호 님의 책이라는 생각이 펼쳐 들었단다. 아빠가 너무 기대를 해서 그런가? 예전의 박종호 님의 책을 읽을 때의 그런 재미는 없었단다. 책 분량도 적은데, 그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글이 약간 늘어지는 기분도 들었단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일반적인 지은이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하셨어. 지은이 박종호 님의 남다른 클래식 사랑은 그 전에도 알았지만 이번 책에서는 절절함마저 느껴졌단다. 중학교 때부터 집에 오면 클래식 음반을 듣기 시작해서, 75장 전집을 다 듣고, 고등학교 때에는 용돈을 모아 LP를 직접 사 모으셨다고 하더구나. 아빠의 중딩, 고딩 때와는 전혀 다른 취미 생활을 하셨구나. 그런데, 책 내용이 그리 새로운 것은 많지 않아 조금 아쉬웠단다. 클래식을 좋아하거나 전공한 다른 사람들이 전해주는 책이나 블로그 등에서 접할 수 있는 내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1.

클래식이라는 음악은 왠지 모를 장벽이 있는 것 같구나. 클래식 작곡가가 많고, 많은 곡들이 있지만, 클래식이라는 것은 1700년부터 1950년까지 약 250년 동안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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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것은 클래식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클래식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1700년에서 1950년 사이의 250년에 집중되어 있다고 했지요. 1950년 이후의 음악은 일반적인 콘서트의 레퍼토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음악들만 연주하는 음악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연구나 학술활동 혹은 특정 예술가를 위한 기념이거나 특정 청중을 대상으로 한 활동인 경우가 더 많고 관객 일반을 위한 공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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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은 건 아닌가 싶었단다. 그런 기간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에 삽입된 클래식 음악도 더 이상 클래식이 아니고, 쇼 프로에서 나온 성악가가 부른 노래도 클래식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클래식을 어려워하지만 클래식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귀에 익숙한 클래식부터 쉽게 접하면서 흥미를 생기면 좀더 깊고 넓게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고 아빠의 생각과 좀 다르구나. 지은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가뜩이나 클래식 진입 장벽이 있는데, 이것도 클래식이 아니다, 저것도 클래식이 아니다... 하는 것은 너무 클래식의 정의를 좁게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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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67)

그러니 클래식 음악을 차용한 영화음악이나 TV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아무리 클래식이 나와도 그것을 클래식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축하 행사장이나 결혼식 피로연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웃음꽃을 피우는 동안에 저만치 뒤에서 존재감 없이 울려 나오는 <사랑의 인사>는 더 이상 클래식이 아닌 것입니다. 쇼 프로에서 테너가 핏대를 세우며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고음을 성공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클래식의 정신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 성악가에게 일말의 박수를 보낸다면, 그것은 공중제비 넘기에 성공한 곡예사에게 보내는 박수와 같은 등급의 의미입니다. 베토벤은 청중들로부터 그러한 박수를 받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가 연주 대신 작곡에 더 집중하려고 했던 뜻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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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처럼 클래식을 처음 듣는 이에게 조언을 해주는 듯한 책이긴 한데, 너무 적극적인 방법으로 시작하도록 가이드를 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시간을 투자하고, 다른 것 하지 말고 오롯이 클래식만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고 하시니 말이다. , 오히려 클래식 진입 장벽이 높다는 것만 다시 새삼 깨닫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빠는 지금까지 클래식을 들어왔던 것처럼 좋아하는 클래식 듣고, 어떨 때는 온전히 들을 때도 있지만, 가볍게 책을 읽으면서도 듣고 차를 마시면서도 듣고 그러려고 한다.

너희들도 엄마의 영향으로 클래식을 즐겨 듣곤 하는데, 너희들만의 방식으로 클래식을 듣고 보길 바란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클래식을 듣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는 것 같구나.


PS:

책의 첫 문장: 적지 않은 분들이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합니다.

책의 끝 문장: 그들을 만나게 될 여러분에게 정말 축하를 보냅니다.


그런 클래스에서 ‘클래식’이라는 말이 나와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클래식은 어떠한 분야에서 최상위의 가치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클래식이란 말은 "가치가 불변하고 영구적이며,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고 품위가 있으며, 절제되고 모범적인"이라는 뜻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음악이나 문학이나 저술에서의 그런 것들을 일러 클래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즉 클래식이라는 말에는 각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의 것이며, 최상의 걸작이며, 영구불변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 P52

처음에는 귀족을 중심으로 성행했지만, 고전음악은 1800년을 전후하여, 음악 소비의 새로운 중심계층이 되었던 시민계층의 성원을 받게 되고, 점점 모든 계층을 아우르고 통합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징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 <환희의 송가>라고 할 것입니다. 교향곡 역사상 최초로 가사를 붙일 수밖에 없었을 만큼 베토벤과 실러가 전하려는 뜻은 위대했습니다. 그 가사를 유념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약하자면 "신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니 차별 없이 모든 인류가 손잡고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이르지 못한 고매한 이상입니다. - P64

음악은 다릅니다. 윤동주나 채만식은 활자를 통하여 나와 바로 연결되고, 비록 복사본으로 감상하여도 피카소나 이중섭의 그림은 나와 바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장르의 특징은 여기서 두드러지게 다릅니다. 즉 창작자와 감상자인 나 사이에는 재현이라는 과정, 즉 연주자가 있는 것입니다. 한 단계가 더 있는 것입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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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

, 손은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손 덕분에 우리는 정교한 도구를 만들고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고 동굴 곰이나 사자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뇌는 손과 함께 진화했다. 손짓은 뇌의 발달을 촉진했다. 어쩌면 손의 움직임이 인간의 인지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활성화하는 주요 요인이었고, 정교한 언어 능력은 그 후에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뇌와 상당 부분 역시 손과 관련되어 있다. 손을 잘 조작하는 법을 파악하려면 뇌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


(113)

1400년대 초 언젠가, 사카키라는 이름의 유명한 우즈베키스탄 시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한 몸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는 절름발이 개미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젊은이를 소재로 독특한 시를 썼다. 마침 시 속의 젊은이도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용맹한 전사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젊은이는 용기 있는 작은 개미에게 크게 감동한 나머지 자신도 장애를 딛고 끝까지 해내겠다고 다짐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시 속 젊은이는 세계적으로 위대하고 악명 높은 정복자 티무르였다.


(139)

에릭 에릭슨 같은 일부 프로이트 학자들은 루터의 가득 찬 장이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까지 했다. , 화가 나 있고 고통스러워하며 변비로 고생하던 남자가 가톨릭의 권위에 맞서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당시에 현대의 변비약이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오늘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널리 신뢰받지는 못하지만, 심리적인 요인이 교감 신경계를 제약한다는 것은, 어느 학술 논문에 따르면 그래서 결장이 더 길고 넓어지고 건조하고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이다.


(141)

물론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이들 중에는 장 칼뱅과 울리히 츠빙글리를 비롯한 다른 핵심 창시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탄생하기에 전반적으로 적절한 시기였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루터는 종교개혁가들 중 가장 주목받았고 분명 가장 거침없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특히 자신의 장 활동에 관련하여 격렬한 불만을 자주 쏟아냈다. 그렇다. 1517년에 그가 얻은 종교적 깨달음은 변기에 앉아 입을 삐죽이며 찡그린 채 생각에 잠긴 수많은 경험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하지만 나는 악마를 물리칠 때 종종 방귀를 뀌어 쫓아 버린다라고 하는 등 설교, 연설, 편지에서 배설물을 언급할 때 전혀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221-222)

배역에 충실한 여느 충실한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바이런은 다이어트를 했는데, 체중을 줄이기 위해 설사약까지 사용했다. (그는 통통한 편이라 필사적이었다.) 한편, 그는 매우 넓고 다양한 팬층을 계속 끌어들였다. 어딘가 어두우면서도 잘 생긴, 전형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바이런은 예상대로 여성팬이 아주 많았는데, 이들 중 다수가 그에게 사인을 받거나 그의 머리카락 뭉치를 가지려고 안달했고 무엇보다 은밀하고 낭만적인 밀회를 원했는데…… 바이런은 이런 식의 탐닉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고, 어느 정부의 말에 따르면 미치도록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나쁘고 끔찍한남자였다.


(237)

일부 신경학자들은 터브먼의 부상 후에 나타난 결과를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으로 본다. 이는 뇌의 외상으로 특별한 재능이 유발되는 증상이다. 서번트 증후군 자체는 자폐증을 비롯한 선천적 소아가 신경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발생하며 빈도가 100만 명 중에 한 명 정도로 매우 드물다. 후천적으로 갑자기 서번트 증후군이 발생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지금까지 약 50건의 사례만 기록되었다. 이는 대개 외상성 뇌 손상 이후에 발생하지만 뇌졸중 이후에 발생하기도 한다. 위스콘신 의학회가 인용한, 증거가 잘 정리된 사례는 열 살 난 소년이 야구공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에 발생했다. 의식을 찾은 소년은 달라진 뇌 덕분에 몇 가지 새롭고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중 하나로, 소년은 달력과 관련된 계산을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야말로 몇 초 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달력을 보지 않고도 주어진 날짜에 해당하는 요일을 빠르게 말할 수 있었다.


(249)

벨은 소리를 계속 연구했다. 그는 청력 측정기를 발명했고 세상에는 청력을 측정할 수 있는 최초의 수단이 생겼다. 또한 소리의 수준을 측정하는 단위로 데시벨(decibel)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은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햇빛을 소리로 바꾸는 방법을 개발하여 광선 전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실험에 성공하자 아버지에게 햇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는데, 이는 무선 통신과 광섬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83)

레닌은 사망 직전에 집단 지도력을 촉구하는 스탈린을 당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권고하는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 그중에서도 스탈린은 이를 감추었다. 스탈린은 주로 여론 조작용 재판과 처형을 통해 레닌 사후에 집단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사진을 조작하고 초창기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잘못된 사실을) 강조하는 영웅적인 그림을 새로 그리게 하여, 대중이 머릿속에서 그와 고인이 된 존경받는 지도자를 서로 연관 짓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죽어가던 레닌이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데도 그 뒤를 이어 곧 독재자가 된 스탈린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레닌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은 스탈린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에게 필요한 것은 그 숭배가 지속되도록 레닌을 부활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좀처럼 제기된 적이 없는 정치적 의문이 제기되었다. 죽은 지도자의 피부를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유지할 것인가?


(308)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뇌 연구를 통해 천재성의 기원이 밝혀졌을까?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연구자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생각한다. 1999년 맥매스터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 아인슈타인의 뇌는 평균보다 작았지만 두정엽 같은 특정 부분은 평균보다 컸고 더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 후 10년 넘게 지난 뒤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의 연구진은 그의 뇌가 신경세포 대비 신경교세포 비율이 높았고 모든 신경교세포끼리 매우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쉽게 설명하자면, 아인슈타인은 인지 능력이 높아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쉽게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추측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뇌구조가 지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이해하는 여정에서 시작점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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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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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영화 <영웅>을 보고 안중근 읽기 두 번째로 김훈 님의 <하얼빈>을 읽었단다. 정말 오랜만에 김훈 님의 소설을 읽었단다.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작가라도, 읽는 이의 취향과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아빠에게 김훈 님은 그런 작가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나 사건을 김훈 특유의 문체, 일명 김훈체로 다시 태어나게 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계신 김훈 님. 그런데 아빠는 그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단다. 오래 전에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소설 두 편과 <자전거 여행> 에세이 한 편을 읽은 것이 전부지만, 세 작품 모두 아빠의 취향과는 좀 거리가 있었단다. 독서 기록을 찾아보니 김훈 님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2007년이구나.

십 년이 넘었네. 십 년이 넘었으면 아빠의 독서 성향도 좀 바뀌었을 수도 있고, 십 년이 지났으니 작가 김훈 님의 글쓰기 성향도 좀 바뀌었을 수도 있고, 평전으로만 만나 보던 안중근을 소설을 통해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단다. 영화 <영웅>을 보고 나서 읽기 적합한 책이 아닌가 싶었단다.

, 예전의 김훈 소설에서 보였던 지나친 묘사가 사라지고 아빠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간략하게 서술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단다. , 뭐랄까, 이야기에 공백이 많은 느낌도 있었어. 아빠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점들도 있었는데, 그런 것은 소설이라 그렇게 각색한 것인가. 안중근 의거에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조도선, 유동하 같은 인물은 이 소설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단다. 지은이의 말에서 조도선,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에서 직접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하여 소설에 뺐다고 말씀하셨단다. ,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널리 알려지지 않은 분들도 소설을 통해 소개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단다.

재판장에서 이야기도 이토를 죽인 열다섯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도 빠져 있었단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안중근 의거에 있어서 중요한 두 장면은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과 재판장에서 이토를 죽인 열다섯 가지 이유를 말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 장면이 빠져 있어서 아쉬웠단다.


1.

이 책은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의 시선에서 그려졌으며,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이 각기 다른 경로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짧은 만남의 과정이 그려지고 있단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안중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은 아니란다. 안중근 의거 전 약 1년간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어. 그래서 소설의 제목도 하얼빈 아니겠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상해에 갔던 안중근은 큰 성과 없이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고향 진남포에서 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안씨 문중들과 시국을 논하기도 했어. 전국에서 일고 있는 의병 소식도 접했단다. 안중근는 늘 국권 회복을 위해 자신도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 행을 결심한단다. 당시 아내 김아려는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상태였어. 아빠라면 절대로 가지 못했을 것 같구나. 어린 아이들이 둘이나 있고, 임신한 아내가 있는데 아무리 의로운 길이라고 하지만 가족을 남기고 떠나다니.. 떠나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구나.

블라디보스크까지 가는 방법은 일단 부산까지 갔다가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가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구나. , 바로 원산 가서 배 타고 가면 안되나? 아무튼 안중근은 먼저 경성으로 가서 동생 안정근을 만나고 가족들의 안위를 부탁하고 부산,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된단다.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대롤 조직하여 참모중장을 맡은 안중근. 전투 중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살려주었다가 큰 어려움을 겪는단다. 그 포로들이 일본군을 데리고 와서 반격을 하여 안중근 의병대에 큰 타격을 주고, 의병대는 와해되고 말았거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또 다른 방법을 도모하면서 지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단다. 그리고 의병대 동료 우덕순을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해주고, 우덕순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계획을 세운단다.


2.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잡아먹기 위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좋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한단다. 대한제국의 황제인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한반도 여기저기 순행을 한단다. 그의 교묘한 전략이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기로 했단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이기기는 했지만,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거든. 그래서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기 위한 자리였을 거야.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을 누군가 노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 하얼빈까지 가는 길을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 기회로 삼았거든. 중간중간 들러서 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이벤트도 마련했어. 대련, 여순, 채가구를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단다.


3.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결심한 다음 지인 정대호에게 가족들을 하얼빈으로 데려오게 했단다.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까지 셋을 모두 데려오기 어려워 큰 딸 현생은 서울의 수녀원에 맡기기로 했어. 아직 어린데 가족과 떨어져 지낼 현생이 너무 불쌍하구나. 안중근은 유덕순과 함께 하얼빈 역을 탐사하였고, 혹시 모르니 그 앞 역인 채가구 역도 탐사하였단다. 이토 히로부미가 채가구에서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유덕순은 채가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단다.

그리고 1909 10 26일 아침 9 30.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 내린단다. 안중근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격을 가해서 작전이 성공한단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을 쏘고 나머지 총알들로 주변 인사를 쏘았단다. 곧바로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잡히게 되고 코레아 후라라고 외쳤단다. 이 소설에서는 이 의거 장면을 아주 담담하면서도 특별한 감정이나 극적인 요소를 담지 않고 신문 기사처럼 사실 위주로 서술한 점이 지은이 김훈 님의 문체가 잘 나타난 부분인 것 같았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소설 전체가 그런 식으로 쓰신 것 같아.

곧바로 일본 경찰에 넘겨진 안중근. 그에게 가장 궁금한 점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느냐는 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사람한테 맞은 것을 알고 있느냐는 점이었단다. 일본 경찰은 그런 사실을 안중근에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안중근도 자신의 의거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채가구에서 준비하고 있던 우덕순도 잡혀 왔단다. 안중근의 가족들은 의거 성공 하루 다음날인 10 27일 하얼빈에 도착했는데, 곧 경찰의 신문이 있었단다. 아내 김아려는 끝까지 자신의 남편이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어린 아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단다.

….

안중근이 재판 받는 장면도 아주 짧게 넘어갔단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도선과 유동하는 소설 속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유덕순과 단둘이 재판을 받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그려지고 있단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안중근, 유덕순, 조도선, 유동하가 재판장에 함께 앉아 있는 사진도 찾아볼 수 있는데, 지은이께서 이 장면을 너무 각색을 하신 것 같아 아빠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도선, 유동하도 독립을 위해 희생을 감수했는데, 그들을 통째로 편집하시다니

그에 반해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가 천주교 입장에서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을 비판하는 것은 비중 있게 실었으면서 말이야.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고해성사까지 반대를 했는데, 빌렘 신부는 안중근과 오랜 인연이 있어서 안중근이 갇혀 있는 여순에 와서 고해성사를 하게 된단다. 안중근은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었단다.

….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간략하고 공백이 많은 이야기 전개가 아쉬웠단다. 역사소설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반으로 비어져 있는 부분을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인데, 김훈 님은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까지 빼가면서 빠른 전개를 통해 안중근의 마지막 일 년을 그리셨단다. 그것이 김훈 님의 방식인 것 같은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전히 김훈 님의 소설은 아빠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구나. 우리 집에 오래 전에 사둔 김훈 님의 <남한산성>도 있는데, 이건 언제 읽게 될지 모르겠구나.

, 오늘은 여기까지. 이상.


PS:

책의 첫 문장: 1908 1 17, 일본 제국 천황 메이지는 도쿄의 황궁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했다.

책의 끝 문장: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사진은 대체로 지시 사항을 담아내고 있었다. 이토는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순종의 표정은 미소도 아니고 찡그림도 아니고, 그 양쪽을 다 섞은 것도 같았다. 이토는 비서관을 불러서 같은 앵글로 찍은 다른 사진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다른 사진에서도 순종의 표정은 마찬가지로 모호했다. 다시 찍을 수는 없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이 사진을 공포하면 정책 효과가 클 것이었다. 이 사진이 조선 민심의 상처를 자극하겠지만 위력으로 압도하는 힘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도 폭민과 양민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폭민들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낼 것이라고 이토는 판단했다. 남행의 성과는 작지 않았는데, 그 크기는 서서히 나타날 것이었다. - P47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다. 분도는 방안에서 잠들어 있었다. 헤어질 때 무슨 말을 했는지 김아려는 기억하지 못했다. 안중근은 문중 사내 몇 명과 함께 새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서 김아려는 남편이 결코 땅의 속박에서 풀려나지 못하리라는 예감에 눈물을 흘렸다. 마을 어귀까지 따라온 사내들은 개울가에서 돌아갔다. - P69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가늠쇠 너머에 표적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표적으로 시력을 집중할수록 표적은 희미해졌다. 표적에 닿지 못하는 한줄기 시선이 가늠쇠 너머에서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보이는 조준선과 보이지 않는 사이에서 총구는 늘 흔들렸고, 오른손 검지손가락 둘째 마디는 방아쇠를 거머쥐고 머뭇거렸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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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럼 최남선의 경우는 어떨까? 최남선은 최린과 근거리에서 독립운동에 긴밀히 관여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였다. 구한국 관료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려는 시도가 실팼을 때, 최린은 자신을 포함하여 최남선과 송진우가 나서면 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얘기했다. 하지만 최남선은 거절했다. 학자의 삶을 유지하는 게 꿈이니 정치운동의 표면에는 나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린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부착했을 때에도 최남선은 선언서를 쓰긴 하겠지만 작성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최린이 져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안 한용운이 책임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어떻게 선언서를 맡길 수 있느냐며 차라리 자신이 짓겠다고 했다. 최린은 최남선에게 계속 맡길 것을 고집하여 한용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밀했던 사이이기에 여러모로 속상했을 것이다.


(65)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날의 결정은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남았다. 그들의 결정은 끝까지 이해받지 못했고, 격렬한 불협화음을 낳았다. 민족대표 33인은 민족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학생과 시민 앞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대규모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한정했다. 독립을 선언한 이후 구체적으로 진행될 독립운동에서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기획한 독립운동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탈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68-69)

민족대표들이 세운 독립운동 계획은 완전하지 않았다. 선언서를 기초하고, 선언서를 배포하고, 조직의 힘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가능한 몇몇 지역의 시위를 조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었다. 많은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독립을 선언한 후 다음 계획도 치밀하지 않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수정할 계획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곳곳이 비어 있었고, 곳곳이 허점투성이였다. 그러나 결핍은 참여를 낳았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족함을 느낀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빈틈을 메워나갔다. 독립운동은 그렇게 민족대표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92)

우리를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16억의 양심이 우리를 후원한다. 우리를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2천만의 심인(心刃, 마음 속 칼날)은 우리의 무기다. 아아, 세계는 바야흐로 정의와 인도 위에 일대 부활을 수행하려 한다. 조선과 조선인은 이제야 생존과 존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지니고 있다. 거듭 말하겠다. 시대는 개화하고 있고 조선인은 자각했다고. - <독립통고문>


(120)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136-137)

청주경찰서 경부 이성근(33)은 인종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체포한 지 몇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기고 매달아도 묵묵부답이었다. 부풀어오른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 간혹 보이는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쉬이 비밀을 털어놓을 리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그였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두드리고 매달다가 살살 어르고 달래면 결국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없는 것까지 털어놓는 게 인간이라고, 여태껏 그렇지 않은 인간은 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단지 시간이 남들보다 좀더 오래 걸릴 뿐, 인종익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였다.


(174)

동혁이 예심판사 앞에 섰다. 예심판사가 묻는다.

피고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

동혁이 답했다.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219)

예심판사가 김백평에게 물었다.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며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면, 일본 정보나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독립을 희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학생이니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만 조선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일본과 병합되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원래대로 독립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243-244)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 큰 힘이 있어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큰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그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고작 10, 20년뿐이었다.

심대섭은 그 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만세 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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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 -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빼앗긴 M1900을 찾아서
이성주 지음, 우라웍스 기획 / 추수밭(청림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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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영화 <영웅>을 보았단다. 개봉하자마자 보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시간이 맞지 않아서, 거의 끝물에 봤지. 너희들은 사정이 있어서 못 봤는데, 나중에 꼭 한번 같이 보자꾸나.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에 다소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데, 재미와 감동을 모두 다 준 영화라 할 수 있었단다.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레 미제라블>에 버금가는 영화라고 이야기하고 싶더라. 영화가 나오기 전에 오랫동안 뮤지컬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던 이유를 알겠더구나.

안중근.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위인이고, 짧은 그의 삶이 강렬하고 고귀해서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를 이야기하고 있단다. 작년에는 김훈 님의 <하얼빈>이라는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지만, 그 전부터 이미 많은 매체에서 그를 다루고 있었어. 그런데 아빠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없는 것 같았어. 오래 전에 <도마 안중근>이라는 흥행에는 실패한 영화가 있었어. 아빠가 싫어하는 사람이 감독을 맡아서 아빠도 보지 않았단다. 이번에 본 영화 <영웅>이 제대로 된 안중근 영화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영화를 보고 검색을 하다 보니 김훈 님의 소설 <하얼빈>이 영화로 촬영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단다. 안중근 역으로 현빈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영화는 어떨까, 궁금하구나. 엄마의 말대로 현빈의 외모가 가장 큰 장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

아무튼 영화 <영웅> 참 잘 봤단다. 그 영화를 보고 인터넷 서점에서 안중근에 관한 책을 검색해봤어. 아빠는 예전부터 안중근을 존경해서 책들을 여럿 읽었는데, 혹시 그 최근에 출간된 책 중에서 읽을 만한 것이 없나 검색해 보았단다. 그러다가 알게 된 책이 바로 <안중근, 사라진 총의 비밀>이라는 책이란다. 안중근 의거에 대한 색다른 접근이라서 좋았어.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했던 총을 추적하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였지. 실제로 이 다큐멘터리는 KBS에서도 방영했다고 하는구나. 그 다큐멘터리는 보지 못했지만, 이 책을 통해 안종근 총에 대한 지식을 쌓아봐야겠다 싶었어. 아빠는 그 동안 안중근이 사용한 총은 어떤 총인지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그런 걸 기획하고 추적한 지은이 이성주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구나. 이 책의 출간일을 보니 2019 10 26. 정확하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10년째 되는 날에 맞춰 출간해서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1.

제국주의를 따라 근대화를 서둘렀던 일본은 서양 제국 열강들이 동아시아에 눈 돌릴 여유가 없는 사이,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단다. 그렇게 얻은 힘으로 한 것은 야비한 깡패의 짓과 마찬가지였어. 주변 국가들을 하나 둘 무력 침공을 하였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였던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에 한 명이었단다. 이 이야기는 작년에 아빠가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를 읽고 쓴 독서편지에서 이야기했었어.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에 막내로 심부름이나 하던 이였는데, 스승과 선배들이 일찍 죽고 일인자가 되었단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병합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비스마르크를 모범을 삼았던 그는 천천히 완벽한 병합을 노린 거야. 누군가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았다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전략에 완전히 넘어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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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비스마르크는 이 포위된 지정학적 위치를 외교로 극복해낸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비스마르크를 존경했고, 그를 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외교와 협상을 통해서 자국의 이익을 늘려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각 단계별로 형식과 절차를 갖춰서 차근차근 접근해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전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류큐국(지금의 오키나와)을 복속시킨 것도,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것도, 한국을 식민지 직전까지 몰고 간 것도 모두 전쟁을 기반으로 해서 얻은 결과다. 이토 히로부미는 전쟁의 결과 얻어낸 권한을 가지고 큰 잡음 없이 식민지 확보에 나서겠다는 것이지 식민지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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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은이 이성주 님은 안중근이 사용한 총에 대한 분석을 위해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밀리터리 덕후도 있었더구나. 그들을 통해 권총의 특징도 설명해 주었는데, 아빠도 그런 것은 처음 알게 되었어. 권총에는 리볼버 권총과 자동 권총이 가장 대표적인데, 리볼버 권총은 총을 쏠 때마다 둥그런 탄창이 돌아가는, 예전에 서부 영화를 보면 많이 나오는 그런 총이고, 자동 권총은 길쭉한 탄창을 꽂아서 아래에서 하나씩 올라오는 그런 총을 이야기한단다.

안중근이 사용했던 총은 M1900이라는 모델인데, 이는 자동 권총이라고 하는구나. 당시 이 총은 최신식 자동권총인데, 숫자 1900은 출시한 년도 1900년을 의미한다고 했어. 탄창에는 모두 7개의 총알을 넣을 수 있고, 약실에 한 개를 더 넣을 수 있어서 모두 8개의 총알을 넣을 수 있단다. 이 총의 장점은 리볼버에 비해 빠른 연사가 가능하다고 했어. 단점으로는 먼 거리 사격에는 불리했지만, 안중근의 타겟은 근거리 사격이었기 때문에 자동권총을 선택한 것은 적절했던 것이란다. 그리고 리볼버는 둥근 탄창 때문에 옷 속에 숨겨서 불룩 튀어 나올 텐데, 자동 권총은 둥근 탄창이 없기 때문에 옷 속에 숨기기도 유리했단다. 자동 권총이 리볼버에 성능이 다소 떨어졌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안중근이 사용한 총알의 앞쪽에 +자 홈을 내서 사용했다고 하는구나.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고 난 이후 안중근이 사용한 이 총은 어떻게 했을까? 사라진 상태란다. 일본에서는 그 총을 관동대지진 때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분명 지금도 어딘가에 잘 보관하고 있을 거야. 안중근이 죽은 이후 일본은 그의 흔적을 없애려는 노력을 했대. 그런 일환으로 그가 사용했던 총도 없어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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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그런 일본이 안중근 장군의 M1900 권총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M1900은 증거품으로 분류돼 일본 검찰에 넘어갔다. 재판이 끝난 뒤에는 일본 본토로 옮겨졌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 총이 사라진다. 일본은 관동 대지진 당시 분실했다고 주장한다. 1923 9 1일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뒤이은 사회적 혼란과 수습의 과정에서 M1900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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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M1900은 누가 개발한 것인가? 그것은 존 브라우닝이라는 총기 전문가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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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2차 세계대전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한국전쟁에도 사용됐고 우리나라에서도 제식화기로 쓰인 BAR나 현재까지도 쓰이는 MG50 같은 총들은 예비군으로 복무해본 이라면 익숙한 무기일 것이다. 한국은 MG50을 기반으로 하여 K-6 중기관총을 만들었는데, 거의 MG50을 베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총기 회사라 할 수 있는 윈체스터, 레밍턴, 콜트, 그리고 벨기에 FN사와 함께하며 시대를 뛰어넘는 역작들을 만들어낸 사람이 존 브라우닝이었다. 분명 브라우닝이 없었다면 현대 자동화기의 역사는 다른 식으로 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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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사용한 M1900뿐만 아니라 M1900 모델 자체를 찾기 어렵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지은이는 M1900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단다. 무기 경매 사이트를 뒤지고, 미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연락하는 등 오랜 노력 끝에 미국에서 M1900을 구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총의 위력 시험을 위해 실제 사격도 해보려고 했지만, 총기 허가 없는 사람이 그것을 사용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어. 지은이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이들은 M1900을 국내 반입하여 전쟁기념관에 기증을 하려고 했는데, 무기를 반입하는 것 또한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구나.

그들은 맞닥뜨린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이 책에서 이야기해주었어. 우리나라의 총기 사용 제한이 시스템으로 잘 되어있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들이 총기 반입하는데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었거든. 어차피 전쟁기념관에 기증을 하려고 했다면 정부에 이야기해서 도움을 청하면 그 절차가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아무튼 우여곡절을 넘어 M1900은 국내 반입하게 된단다. 비록 안중근 의사가 직접 사용한 총은 아니지만 말이야. 언젠가는 꼭 안중근이 직접 사용한 총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안중근의 권총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찾아야 할 대표적인 무기가 세 개가 있다고 하는구나. 모두 일제시대 때 사라졌다고 하는구나. 일본 어딘가에 누군가 소유하고 있을 텐데, 제발 이제는 돌려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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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어떤 역사학자가 내게 건넨 말이다.

한국사에서 꼭 찾아야 할 무기가 세 점 있다. 첫째는 신궁이라 평가 받는 태조 이성계의 어궁(御弓)’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장수 시절부터 수많은 전투에 사용하던 실전용 활로서 일제시대까지 함흥본궁에 남아 있다가 사라졌다. 둘째는 충무공 이순신의 실전검인 쌍룡검(雙龍劍)’이다. 마찬가지로 일제시대까지 종가에 전해지다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안중근 장군의 ‘M1900’이다. 이 세 점의 무기는 한국사에서 꼭 찾아야 할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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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중근 의사가 서거하고 난 이후 가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안중근 의사 서거 당시 나이는 우리나라 나이로 32. 만으로 30. 그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하고 유족으로는 아내와 21녀가 있었어. 30살에 돌아가셨으니 아이들도 무척 어렸겠지. 안중근 의거가 있기 전 동료들은 안중근 가족들을 이미 하얼빈으로 피신시켰다고 하는구나. 아무래도 국내에 있으면 어려움을 겪게 될 테니 말이야.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남 문생은 7살 때 누군가 건넨 과자를 먹고 죽고 말았단다. 독살 당한 거야.

나머지 살아 있는 가족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의거 이후 안중근의 동생들인 안영근, 안공근 형제들의 도움으로 연해주 등지에서 지내다가 임시정부가 세워진 다음에는 상해에서 지내게 되었대. 하지만, 임시정부 사정이 안 좋아져서 중칭으로 이전할 때 안중근 가족들은 상해에 남겨졌다고 하는구나. 그때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타난 이들이 일본인이었고, 차남이었던 준생을 회유했다고 하는구나.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형이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독살당했던 상황에서 일본의 회유를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 같구나. 안준생이 친일로 돌아서는 것은 잘못한 것이지만, 당시 상황을 알고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구나. 일본은 안중생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내선일체 정책에 적극 이용했단다. 대대적인 이벤트도 준비했어. 참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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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1939 10 16일 박문사에서 있었던 이 이벤트는 조선총독부의 작품이다. 격화되는 전쟁 앞에서 내선일체를 외치던 일제로서는 안준생과 이토 분기치의 만남과 화해가 더없이 훌륭한 이벤트가 될 수 있었다. “조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의 아들이 30년이 흘러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는 모습이것은 그 자체로 한일 병합의 정당성과 내선일체의 당위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철저히 기획했던 이벤트다. 안준생과 이토 분기치가 박문사 단상에서 처음 만났을까?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조선호텔에서 만나 박문사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이미 을 맞춰 놓고 박문사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가 기획한 이벤트는 기대했던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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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패망 후 친일을 했던 안중생을 돌볼 이는 아무도 없었어. 중국에서 힘들게 지내다가 부인과 자식들은 미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국내로 들어온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2년 폐결핵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1907년생이니까 46살이었어. 그를 탓하기에 앞서 그의 힘들었던 처지도 한번 생각해 주었음 한다.


PS:

책의 첫 문장: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의 발상은 단순했다.

책의 끝 문장: 그것은 영웅 안중근을 넘어 인간 안중근이 걸어간 길이었으며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물론 일본이 가진 내부적 역량이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요인을 찾자면 비슷한 시기에 근대화를 시도한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성공한 까닭은 결국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 P22

또한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갑옷은 조선식 갑옷이 아니라 중국식 갑옷이다. 그리고 제작자 측에서는 현충사에 있는 칼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순신 장국의 손에 들려 있는 칼은 실제 이순신이 사용한 조선식 ‘쌍룡검’이 아니라 일본도다. 그런데 이 칼이 일본도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 칼을 쥐고 있는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이다. 오른손에 칼을 든 것은 명백한 패장(敗將)의 항복을 의미한다.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패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조형물일 수도 있다. - P51

우리는 안중근 장군의 하얼빈 의거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당시 조건들을 현실에 그대로 대입해 보면, 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표적의 노출 면적은 상당히 적었고, 러시아군 덕분에 시야도 제한됐다. 결정적으로 표적이 이동했다. 이동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측면(오른쪽 상박)을 노리는 것, 그것도 시야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일곱발을 발사해 표적 넷에 여섯 발을 맞혔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신기(神技)에 가까운 능력이다. - P188

인생은 어쩌면 간단한 것이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그 ‘무엇인가’가 가리키는 대로 나아갈지, 아니면 저어할지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안중근 장군은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그의 짧은 인생을 안타까워하지만, 어쩌면 그는 여든, 아흔을 사는 현대의 우리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인생을 산 것인지도 모른다.
- P219

포기했을 때 패배가 시작된다. 독립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는 아무리 희망이 없더라도 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둘 무너지며 희망이 체념으로 변하면, 달아올랐던 독립에 대한 열망도 사라질 것이다. 내선일체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 민족의 ‘체념’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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