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 미지의 땅에서 들려오는 삶에 대한 울림
강인욱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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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읽은 책은 <강인욱 님의 고고학 여행>이라는 책이란다. 아빠가 이 책을 어떻게 알게 된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구나. 몇 년 전에 알게 되어 사서 책장에 꽂혀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어떤 경위로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얼마 전에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강인욱 님이 출연한 영상을 보게 되고, 이 책이 생각나서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고고학자라고 하면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있었구나. 지은이 강인욱 님은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과를 전공하고, 지금은 사학과 교수이시기도 하다는구나. 아빠가 고고학에 관련된 책은 처음 읽는 것 같구나. 고고학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 전 인류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대충 알고 있는데, 지은이는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고고학에 대한 정의부터 이야기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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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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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유물을 통해서 과거 사람들의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고고학이라는 것이래. 그래서 이 책은 유물로 알 수 있는 옛 사람들의 이것 저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해주고 있단다. 그렇다면 옛사람의 흔적이 많이 남겨져 있는 유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무덤이란다. 이 무덤이라는 것은 사후 세계를 꿈꾸고 영생을 갈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했어. 그리고 무덤에 시신과 함께 남겨진 유물을 통해서 그 시대의 생활을 추측하게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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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더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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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그렇게 알게 된 옛 사람들의 문화들을 이야기해주는데, 무덤 속에 남겨진 토기 속의 찌꺼기를 분석하여 그들이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남긴 악기를 통해서 그들이 어떤 음악을 즐겼는지도 알게 되었단다. 먼 과거의 인간 생활에서도 음악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데, 그것은 박물관의 영어 단어인 museum이 음악의 여신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는구나. 박물관 museum의 어원이 음악의 여신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아빠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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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6)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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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유물 중에도 음악 악기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오래된 것 중에 공후라는 악기가 있대. 공후라는 악기는 익숙지 않아도 공후라는 악기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가 그 유명한 고조선 가요 <공무도하가>라는구나. <공무도하가>는 너희들도 학교에서 배우지 않을까 싶구나. 그 공후라는 악기는 하프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이 악기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고조선까지 전래되었대. 그 당시에도 이미 동서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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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07)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공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 1세기 때 채옹의 <금조>,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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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은 옛사람들의 생활 전반적인 것을 복원하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데, 맛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쉽지는 않다는구나. 토기 등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통해서 젓갈을 오래 전부터 먹었다던가, 소와 돼지를 먹었다는 것 등 일부를 알 수 있다는구나.

 

2.

이 책에서는 고고학이 하는 일뿐만 아니라 고고학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주었단다. 고고학이라는 것은 역설적인 학문이래. 과거를 밝히기 위해 발굴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하게 되니 말이야.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인 고고학이 지향하는 바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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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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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의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유물이나 유적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은 것이 씁쓸한 현실이구나. 그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일어났었지.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인 춘천 중도에 세워진 레고랜드란다. 아빠도 이 레고랜드가 중도에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했던 이들 중에 한 명이란다. 고대 유물이 많은 것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풍광의 중도를 레고랜드로 만들다니 말이야. 도대체 누구의 생각이란 말이야그렇게 유물과 자연을 훼손하면서 만들어진 레고랜드는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단다. 그들은 아빠와 같은 여론이 많다는 것을 확인도 안 했나 보구나. 아빠가 알기로는 레고랜드의 실적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아마 아빠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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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98)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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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열 받는 이야기 하나 해야겠구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전후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의 유물을 많이 빼앗아가는 일이 일어났단다. 우리나라도 피해를 입은 국가들 중에 하나이고그런 문화재 약탈은 비윤리적인 행동이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 깨달았는지, 문화재를 불법으로 약탈할 수 없다는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을 체결했대. 그런데 이전에 빼앗은 문화재에는 소급 적용이 안 된다는구나. 이런 조약을 체결하려면 그 전에 약탈한 문화재를 일단 돌려주고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열 받는구나. 더 열 받는 일은 아래 발췌록에 적힌 이집트와 영국의 사례인데, 이 헤이그 조약은 이전에 제국주의 국가가 약탈한 문화재의 소유권을 불법으로 약탈한 제국주의 국가에 있다고 인정한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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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호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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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일제의 침략으로 오랜 기간 일제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고고학의 발전이 늦었다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1호 고고학 박사 도유호라는 분이 계셨대. 1935년 오스트리아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대. 안타까운 것은 해방 이후 도유호 박사는 월북을 하여 북한에서 고고학 연구를 하셨다는구나. 그래서인지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것 같구나. 도유호 박사의 여러 업적 중에 빗살무늬토기가 신석기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정의하였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우고, 너희들도 역사 시간에 배우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 빗살무늬토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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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1935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 1946년에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했다.)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동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토기’, ‘민무늬토기=청동시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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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이 책에는 고고학에 대한 재미있는 여러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단다. 그 중에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으나, 트로이 유적을 파괴한 슐리만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이 책은 재미있는 상식들이 많이 남겨 있어서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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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283)

(슐리만)가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라이모스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모스의 황금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라이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리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프라이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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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언제부턴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상황이 흔해졌다.

책의 끝 문장: 이 책은 이 세상을 사랑으로 살아오며 역사를 만들어온 그분들에게 바치는 게 마땅할 것 같습니다.



5000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포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섬서성 웨이허강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 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구근 덩어리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종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P66

즐겁게 살아간다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 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을 추구할 때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 - P86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 P125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 정에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홍산문화의 옥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홍산문화의 제사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 P245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이라는 뜻의 ‘호우’를 따서 이 이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에 따르면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년)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를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옻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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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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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 SF 작가 중에 한 명인 김초엽 님의 두 번째 장편 소설 <파견자들>을 읽었단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기후 변화의 현상들을 보면 이젠 기후위기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의 이야기인 것 같아 안타깝구나. 지구의 남아 있는 시간은 점점 빨리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구나. 지구의 미래는 밝은 것보다 무섭고 어둡고 불안한 것만 떠오르게 되는 요즘이란다. 그래서 SF 작가들이 지구의 미래를 그럴 때는 유토피아의 모습보다는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더 많이 그리는 것 같더구나.

김초엽 님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지구 끝의 온실>도 열악해진 지구 환경을 극복하려는 인간들의 삶이 그려졌는데, 두 번째 장편 소설도 열악한 지구, 정확히 이야기하면 지상 환경을 피해 지하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살고 있는 지구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단다. 여러 SF 소설들에서 이미 유사한 설정으로 땅속 세상을 그린 것을 보았는데, 김초엽 님이 만든 땅속 지구의 미래는 어떨지 이야기해줄게.

아빠의 개인적인 평을 하자면, 이번 <파견자들>은 조금 실망했단다. 기대하지 않고 읽었던 <지구 끝의 온실>이 괜찮았기 때문에, 기대를 하고 책을 펼쳤던 것이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고아참, 아빠가 하는 이야기는 늘 그렇지만, 읽은 지 좀 되어서 아빠가 잘못 기억하고 있어 책의 내용과 다를 수 있다는 점 양해 바란다.

 

1.

먼 미래인지, 가까운 미래인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지표면에 아포라는 물질이 생겨나게 되었단다. 아포가 몸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광증 증세를 보이게 된단다. 그 아포라는 물질은 전 세계로 계속 퍼지게 되자, 사람들은 지하세계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었단다. 그렇다고 아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야. 나도 모르게 음식물에 포함된 아포가 몸 속으로 들어올 수 있거든지하세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파견자라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들은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인데, 파견자들은 지상 세계를 나가 탐험하고 조사하는 임무를 갖는단다. 그리고 아포에 감염되지 않은 지역을 찾는 등 정착지를 찾는 일도 한단다.

태린이라는 지하에 살고 있는 소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사람들은 보통 7살에 머리 보조기억장치인 뉴로브릭을 심게 되는데, 태린은 좀 늦은 나이인 12살에 뉴로브릭을 시술하게 되었고, 이것이 제대로 이식이 되지 않아서 뇌와 뉴로브릭의 연결이 끊어졌단다. 다른 사람들은 뉴로브릭에 자신의 기억을 저장하여 잊지 않는데, 태린은 뇌에 저장을 하여야 하니 공부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어. 태린은 부모님은 안 계시고 자스완이라는 사람이 법적 보호자였단다. 자스완은 태린 이외에도 선오라는 아이의 법적 보호자이기도 해. 자스완은 파견자 출신이었고, 지금은 지하세계에서 지내고 있단다.

태린은 옛스승인 이제프처럼 파견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 그래서 파견자 자격 시험에 응시했단다. 태린은 다른 응시자들보다 외워서 하는 시험에는 약했는데, 아포에 대한 저항 능력은 거의 최고치였단다. 그러니까 별도 장치를 하지 않고 지상에 나가도 아포에 감염되지 않는 수준이었어. 1차 시험이 끝날 즈음, 태린은 갑자기 환청과 환상 증상으로 기절하고 말았단다. 머릿속에 연결이 제대로 안된 뉴로브릭 부작용으로 보였어.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뉴로브릭이 마치 태린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 선오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름을 붙여주고 대화를 해보라고 했어. 그렇게 태린은 머릿속 이 존재를 쏠이라고 불렀단다. 그 이후에도 쏠은 자주 나타났는데, 쏠은 자아의식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자신이 뉴로브릭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파견자 2차 시험. 여러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태린은 쏠이 잘 알려주어서 난관을 해결해 나갈 수 있었고, 결국 높은 성적으로 2차 시험도 합격을 했단다. 그리고 마지막 최종 시험에서도 태린은 쏠과 협심하여 1등으로 통과를 했단다. 파견자 자격 시험은 응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는 하나의 큰 축제였단다. 합격을 확정 지은 태린과 쏠갑자기 쏠이 태린의 몸을 완전히 혼자 조종하여 태린이 손쓸 틈도 주지 않고 테스트용 아포 봉지를 뜯었단다. 그곳에는 파견자들을 응원하러 나온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갑작스럽게 아포가 터지게 되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단다. 그리고 실제로 아포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나타나고 그랬단다.

 

2.

태린이 이 일로 상벌위원회가 열렸어. 태린도 억울할 거야.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쏠이 한 것인데 말이야. 처음에는 추방령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지만, 그보다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못하고 있던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제안했단다. 추방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태린은 그 일을 수락했단다. 멤버로는 팀장인 마일라와 팀원 네샤트와 태린이 전부였단다. 그들의 임무는 지상에서 정착지 후보지를 찾는 일이었단다. 네샤트는 약간 모난 성격의 소유자로, 팀장인 마일라와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어.

그들은 팀장 마일라의 리더 속에 지상 세계를 조심스럽게 탐험하기 시작했고, ‘범람체라고 하는 새로운 생물체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발견되게 되었단다. 그들은 분명 아포에 의해 중독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미치지도 않았어. 그저 점액질로 이루어진 징그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단다. 태린은 벌을 받는 대신 프로젝트에 참가를 했는데 다른 이들은 왜 참가를 했을까. 알고 보니 마일라는 파견자로 파견 나갔다가 실종된 자신의 옛 애인 오웬을 찾으러 온 목적도 있었어. 마일라의 설정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앤 해서웨이가 맡았던 역과 비슷한 것 같구나. 잃어버린 사랑하는 이를 찾기 위해 위험한 곳을 자원하는 캐릭터. 마일라와 네샤트, 태린은 탐험을 하다가 늪에 빠지게 되고 그것에서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되었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범람체가 동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변화시킨 거야. 그들은 늪인이라고 불렀단다. 이렇게 늪인이 된 것 역시 아포라는 물질 때문인데, 원래 아포 물질에 감염되면 광증을 일으켜야 하는데, 늪인들은 그렇지 않았어. 상당히 이성적이었고, 겉모습만 다르지 인간과 비슷했어. 마일라와 태린은 늪인들에게 협조하고 이해하려는 입장이었으나, 네샤트는 늪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나중에 폭탄과 칼을 이용하여 늪인들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늪인들의 반격으로 죽고 말았단다.

태린은 탐사 도중 늪에 빠지게 되는데 늪인이 아닌 범람체 자체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어. 그들 범람체 하나하나가 존재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그들은 마일라가 찾고 있는 애인 오웬도 범람체들로 융화되었다고 했어. 범람체들은 늪에 빠진 태린을 구해주기도 했단다. 그리고 그들은 태린의 머릿속에 있는 쏠이라는 존재도 사실은 범람체라는 놀라운 진실을 알려주었어. 태린은 오웬의 존재를 마일라에게 알려주자, 마일라는 오웬을 찾기 위해 늪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단다. 아마 마일라도 오웬처럼 범람체들로 융화되지 않을까 싶구나.

앞서 네샤트가 죽기 전에 지하세계에 도움을 청해서 지하세계의 반격이 예상되었단다. 태린은 늪인들에게 도망치라고 했지만, 늪인들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어. 늪에 있는 범람체들만 착해서 늪인들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지역의 범람체들은 그들을 어떻게 할지 몰랐어. 늪인들이 광증 증세를 보이지 않는 것도 늪에 있는 범람체들이 착한 범람체이기 때문이었단다.

 

3.

우여곡절 끝에 다시 지하세계로 돌아온 태린. 임무 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면서 그것에 대한 보상으로 정식 파견사 자격증을 받게 되었어.

….

사실 태린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었단다. 태린과 선오는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사실 범람화된 아이들이었어. 그래서 그들을 실험체라고 부르고 보호 시설에서 그들을 조사하였단다. 범람화된 아이들은 실험을 하다가 대부분 죽고 몇 명만 생존했던 거야. 태린이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는 이제프도 사실은 그 보호시설 연구원이었단다. 물론 태린을 잘 보살펴주긴 했어. 그리고 이미 어린 시절에도 태린은 머릿속에 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태린이 12살에 뉴브로릭 시술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 머릿속 범람체인 쏠을 제거하려고 했던 수술인데 실패해서 쏠이 그대로 머릿속에 있다가 나중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란다. 그 실험체들, 그러니까 범람화된 지하 세상 사람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그들은 여전히 갇혀 있다는 것을 태린이 알게 돼. 그리고 그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 존경하고 있던 이제프라는 것도 알게 되고태린은 그들을 구출하려고 하고, 이제프도 태린이 하려는 일을 알게 되어 그를 막으려고 했단다. 둘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결국 태린은 그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하고 이제프는 결국

….

시간이 흘러 7년의 시간이 지났단다. 그 사이에 지하세계의 사람들과 지상세계의 범람체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단다.

해피 엔딩.

새롭게 바뀐 지구의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은 전쟁이 아닌 평화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인가. 지금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일으킨 이들도 이 쉬운 진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디스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잘 적응하고 잘 공존할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가 오지 않게 지금이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SF 소설을 읽다 보면 지구의 암울한 미래가 떠올라 우울해 지는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그 애는 겨울에 도착한 불청객이었다.

책의 끝 문장: 어디선가 아득한 곳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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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적 사고였다. 표를 준 유권자들도 그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의도가 아니라 본성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도자기가 깨지는 것은 그의 의도와 무관한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사회적 위계(位階)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을 속이지 않았다. 검찰총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를 정확히 보려 하지 않았던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으로 윤석열의 결함을 감춰준 언론에 속은 시민도 많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21)

플라톤의 잘못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미덕인지 아는 철학자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따지지 말자.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권력을 쥐어줄 방법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상속하는 왕정국가에서는 생물학적 우연의 축복을 받아야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귀족정 국가에서도 높은 신분을 타고나지 않으면 권좌가 접근할 수 없다. 민중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공화정도 다르지 않다. 철학자가 선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지혜롭든 어리석든, 표를 많이 받는 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22)

포퍼의 말처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는 없다. 민중은 선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기도 하지만 사악하고 무능한 인물을 선택하기도 한다. 250년 전만 해도 국민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국가는 미합중국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의 문명국가는 대부분 민중이 보통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한다.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만 뽑은 나라는 없다.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사악하면 무능한 인물도 뽑았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똑같이 민주주의를 하는데도 정부 수준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권력자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서슴없이 악을 저지른 나라도 있지만 어떤 권력자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나라도 있다.

 

(30)

아이히만 재판 보고서 격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썼다. 보통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비속함이 아렌트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고 본다. 아이히만은 나치 핵심 권력자들의 홀로코스크 기획 회의에 참석했고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법정의 아이히만은 사악한 살인자라기보다는 지극히 비속한 공무원이었다. 아렌트는 그의 잘못이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객관화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적인 무능이라고 했다.

 

(43)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롱당해야 한다면, 조금의 약점만 드러나도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정치검찰과 보수언론은 말했다.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수치와 불명예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정의니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노무현과 노회찬과 조국의 최후를 보았지 않았는가!”

 

(44)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도 완전무결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움츠리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자연이 준 본성에 따라 사회적 미덕과 선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들과 손잡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일의 세상을 오늘보다 무엇 하나라도 낫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윤석열을 보면서 마음에 새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 악의 지배를 연장한다는 것을. 부족한 그대로, 서로 다른 그대로 친구가 되어 불완전한 벗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나아가야 악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77)

국민은 이념적 균질 집단이 아니다. 국민을 균질 집단으로 만들면 사회는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 일가의 북한처럼 된다. 국민은 복잡한 이질 집단이다. 사람마다 정치적 이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다. 어떤 정책도 모든 국민의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헌법과 법률에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93)

한국의 신문 방송은 대부분 사회의 공론장이 아니라 기득권 집단의 이념을 전파하고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정보유통 회사가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보수 세력의 선전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서술이다. 도덕적 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니 언론기업과 언론인을 비난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그런 언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겠다. 현실이 그렇다고 말할 따름이다.

 

(96-97)

기자는 사회에 책임을 느끼는 지식인이 아니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기자는 사는 게 괴롭다. 월급을 받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회사원일 뿐인데 비리를 폭로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인권에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하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기자가 자본과 정치권력의 간섭과 횡포에 맞서 언론 자유와 편집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시대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 것처럼 보인 때가 잠깐 있었을 뿐이다.

 

(98)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 규범을 무시한다. 무엇보다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이권을 따고 광고주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 대주주의 대리인이 보도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기자의 독립성이나 편집의 자율성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념적 균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지키지 않는다. 윤석열과 국힘당에 불리한 사실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보도한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가 윤석열 정부와 정치검사의 비리를 보도하면 그 비리를 심층 취재하는 게 아니라 보도한 기자의 신상을 털고 보도 내용을 공격해 신뢰성을 훼손하는 데 집중한다.

 

(142)

연구개발 예산을 과격하게 줄이면 현장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극단적인 경우 진행 중인 연구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 시작하려면 연구를 접어야 한다. 연구원을 해고하고 신규 인력 채용을 포기해야 한다. 연구사업단에서 학위 취득 과정을 병행하는 대학원생도 내보내야 한다. 대학과 국가연구 기관뿐만 아니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삭감 조처는 기묘하게도 바이오,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디지털콘텐츠 등 소위 ‘4차 산업혁명핵심 분야를 집중 타격했다.

 

(147)

그는 위험한 스타일의 권력자다. 사악한 권력자보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더 위험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현자라고 확신한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정반대 선택을 주저 없이 한다. 비판하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가족과 주변까지 괴롭힌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154-155)

윤석열은 전두환과 비슷한 데가 많아서 평행이론이 나올 만하다. 전두환은 군부 쿠데타로, 윤석열은 검찰 쿠데타로 직속상관을 공격해 권력을 차지했다. 전두환이 극소수 정치군인을 권력의 핵심으로 기용해 권력을 운용한다. 둘 모두 야당을 불순세력이라 여기며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두 사람 모두 좌파가 장악한 언론을 정상화해 여론을 바로잡겠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부부와 함께 민중의 조롱을 받는다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크게 다르다. 전두환은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윤석열은 기껏해야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괴롭힐 뿐이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한다. 윤석열은 전두환만큼 기괴하지만, 힘과 능력은 전두환에 닿지 못한다.

 

(165-166)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친일파라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무지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후쿠시마의 사고 원전에서 나온 핵 오염수에 어떤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오염수의 유해성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과 해양 방류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켜 ‘1 더하기 1을 백이라고 한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심각한 다툼이 있는 과학적 쟁점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논리의 규칙에 따라 토론하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머저리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머저리면서.

 

(174)

집단은 양심이 없다. 개인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지만 집단은 그렇지 않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가장 크고 강력한 집단이 국가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 정부를 구성하는 권력자들의 책무는 국가의 이기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힘과 능력만 있으면 국가는 무엇이든 한다. 미국은 19세기에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힘으로 빼앗았다. 20세기에는 베트남을 침략했고 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해 칠레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 21세기에는 국내법으로 국제무역의 규칙을 짓밟는다. 특별히 나쁜 국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 앞서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이나 냉전 시대 소련은 더한 짓을 했다. 러시아나 중국이 미국처럼 힘이 세다면 더 못된 행동을 할 것이다.

 

(182)

윤석열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로는 헌법을 읽지 않은 듯하다. 헌법에 관한 상식이 없다.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해 보라고? 국군 통수권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는 국방부의 육사를 앞세워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철거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 철거는 육사 교정의 조경 사업이 아니다. 육군과 육사의 정체성과 헌법 해석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고 국민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으며 반대자와 토론하지 않았다. 그는 방구석 여포.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앞장서는 게 아니라 참호에 숨어서 돌격 앞으로만 외친다. 논쟁을 벌일만한 철학이 없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도 없으며 불리한 싸움에서 선봉을 맡는 배짱 또한 없다. 박수칠 준비를 하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의미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어퍼컷을 휘두를 뿐이다.

 

(191)

사람은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 능력은 일반지능, 전문 지식, 업무 자세, 타인을 대하는 태도, 전략적 사고 능력, 경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A급이라고 하자. A급은 A급을 알아보고 좋아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흔하다. A급 책임자가 전권을 쥐면 주로 A급 인재를 기용한다. 그러면 그 A급들이 또 다른 A급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B급을 조직 책임자로 임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B급은 A급을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B급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B급 책임자는 기껏해야 B급을 기용한다. 아부를 잘하면 C, D급도 마다하지 않는다. A급은 기용하려고 해도 어렵다. A급 능력자는 B급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조직은 C급 이하 등외까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219-220)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조국 자신도 모른다. 길든 짧든, 그는 그 시간에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울 것이다.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는지, 그가 불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는 있다. 조국과 윤석열의 운명이 완전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둘의 싸움을 둘 모두 명예롭게 끝낼 방법은 없다. 윤석열에게 조국은 이재명과 다른 존재다. 윤석열의 시선으로 보면 이재명은 아직 죽이지 못한 자. 싸움을 멈추고, 공존을 시도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죽였던 자. ‘이미 죽였던 자와는 공존할 수 없다. 조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살아난 자는 자신을 죽였던 자를 죽여야 살아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석열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이재명이 아니라 조국이다.

 

(239)

민주당은 시대정신을 짊어진 유일한 정당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선거를 할 때마다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시대정신이 선거 때마다 새로 나올 수는 없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추구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가치나 목표라야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에 정치인 김대중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그것보다 높고 귀한 가치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254)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만남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 인간 윤석열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본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더닝-크루거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람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운명이 그를 덮친다. 자신에게 왜 그런 운명이 닥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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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balove 2024-07-02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의 말이 모두 옳아서 슬픕니다

bookholic 2024-07-02 22:16   좋아요 0 | URL
네.. 너무 슬픈데, 너무 오래 남았습니다. ㅠㅠ
 















(123-124)

세상에 불평객이 없는 때가 없사외다. 세종대왕께옵서는 요순과 같으신 성군이거니와 재위한 지 30여 년에 문()을 높이고 무()를 가벼이 하시오니 태평성대에 그럴 만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무신의 불평은 면치 못할 일이요, 또 재야의 인재도 문장재시는 뜻을 이루기 쉽되 궁시(弓矢)를 잘하는 사람은 일생에 달할 길이 없으니 자연 문인은 교만하여지고 무사는 불평하게 되는 것이외다. 또 문신 중에는 자기의 현재 처지를 불만스럽게 여겨 매양 불평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무리를 가리켜 불평객이라 하는 것이외다하고 한명회가 좋은 구변으로 기운차게 말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혹은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혹은 무릎을 치며 명회의 말에 탄복하는 기색을 보였다.

 

(275)

당시 이름 높던 집현전 팔학사 중에서 경학과 인격으로는 박팽년이 으뜸이요, 책론으로는 하위지가 으뜸이요, 시로는 기개가 으뜸이요, 사학으로는 유성원이 으뜸이요, 어학과 교제와 모략으로는 신숙주가 으뜸이요……. 이처럼 다 각기 특색이 있는 가운데 찬란한 문장과 풍류 해학으로는 성삼문이 으뜸이었다.

 

(337-338)

그러나 그까짓 것은 수양대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무리가 근심되는 것은 권력을 잡은 시초가 아니요, 옛 권력이 쇠할 만한 때인 까닭이다. 수양대군의 눈앞에는 끝없는 영화가 있다.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이어질 권세가 있다(왕의 자리만 얻고 보면 말이다). 인사(人事)의 무상(無常)을 깨닫기에는 수양대군은 너무도 젊고 너무도 순조로웠다. 건강하고 젊고(사십이면 한창이 아닌가) 뜻하는 바를 못 이루어 본 적이 없는 바에 순풍에 돛을 달고 물결 없는 한바다로 선유하는 것 정도밖에는 인생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런 수양대군에게 반성이 있을 리 없고, 후회가 있을 리 없으며, 무상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간 더 인생의 어리석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 쓰라린 무상의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10년이 얼마 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술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권세를 영원한 것으로 여겨 전력을 다하여 못할 것 없이 이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454-455)

김질이 아무쪼록 자기는 빼고, 또 왕이 듣기 싫어할 말을 빼가면서 지루하게 전말을 말하는 것을 삼문이 고개를 흔들어 막으면서 그만해라, 네 말이 다 옳지마는 좀 깐깐하다하고 다시 왕을 바라보며 더 말할 것 있소. 상왕께옵서 춘추가 높으셔서 선위하신 것도 아니고 잘못하심이 있어서 하신 것도 아니시오. 나으리라든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같은 불충한 무리들에게 밀려서 선위를 하옵신 것이니까 원하는 것은 인신소당위(人臣所當爲)가 아니오? 다시 물을 것 있소. 그래서 오늘 나으리 부자를 죽여서 천하의 공분을 풀려고 하였더니 일이 뜻 같지 못하여서 이 꼴이 되었소.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왕을 상감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458-459)

이때에 신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릉께옵서 원손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만세한 후에라도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지 극흉극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늘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 듯 싶으냐.”

 

(470-471)

삼문은 붓을 들어,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 한 편을 지어 쓰고, 이개도 붓을 들어,

 

가마귀 눈비 맞아 흰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하였고,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腔)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 건가

 

하였다.

 

(513-514)

이 지방은 노산군이 손수 쓴 것이다. 첫머리에 삼생부모영가(三生父母靈駕)’라고 썼다. 이것을 쓸 때에 가장 간절히 생각난 이는 조부 되시는 세종대왕과 아버님 문종대왕이시거니와, 금생에 한 번 대면해 보지도 못하고 또 일전에 종묘에서 그 위패까지도 철폐함을 당한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생각할 때에는 피눈물이 솟음을 금치 못하였다.

다음에 쓴 이는 조모도 되고 어머니와도 같은 혜빈 양씨와 그 세 아드님. 그 다음이 안평 숙부 부부자, 그 다음이 아버님 항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화의군 영, 다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분, 허후 등 계유정난 때에 죽은 사람들을 쓰고, 또 그 다음에는 성승, 유응부, 박쟁,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을 쓰고, 다음에 외조모와 외숙 권자신의 패를 쓰고, 다음에 장인장모 되는 송현수 부처를 쓰고, 나중에 노순군의 유모 이오 부처를 쓰고, 나중에 대자로 충혼원혼영가(忠魂寃魂靈駕)’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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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길 : 조정래 사진 여행 - 조정래 사진 여행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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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얼마 전에 20여 년 만에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을 다시 한번 읽었잖아. 다시 한번 완독한 기념으로, 조정래 님의 산문집을 하나 추가로 읽었단다. 집에 있던 책들 중에서 오래 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조정래 사진여행>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 속에 사진이 가득 들어 있단다. 조정래 님의 갓난 아기 시절의 사진부터 학창 시절, 젊은 시절을 거쳐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대하 소설을 쓰시면서 취재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 포함되어 있단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410컷의 사진이 담겨 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조정래 님이 그리신 그림 2컷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 뿐만 아니라 각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었어. 사진으로 보는 조정래 님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단다.

예전에 조정래 님의 <황홀한 글감옥>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글로 쓰는 자서전이라고 하면, 이번에 읽은 <조정래 사진 여행>은 사진으로 보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조정래 님의 문학과 함께 한 인생을 사진을 통해 보니 더 친근함이 가면서,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리고는 나중에 아빠의 인생도 어렸을 때부터 중요한 사진들을 쭉 모아 놓아서 정리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너무 빨리 흘러간 시간과 지금은 연락이 끊긴 사진 속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너희들이 쑥쑥 자라는 사진도 더 많이 찍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품은 사진기라는 말이 있는데, 아빠도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단다.

예전에 집에 화재가 발생한다면 사진 앨범부터 챙겨서 도망간다고 했던 어떤 분의 말씀도 생각이 나는구나. 우리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사진이야말로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고, 잠시나마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조정래 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의 치열함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단다. 조정래 님을 따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방식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되는 것 같구나.

오늘을 이렇게 간단히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사진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이 거장의 발걸음을 따라 오늘의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과 역사에 대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담배를 하루 평균 3~4갑을 피우고, 커피를 5~6잔 마시며 열흘에서 보름을 자는 시간 빼놓고는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첫째 나타나는 증상이 두 다리가 10배 20배로 퉁퉁 부어오른 착각이 든다. 그래서 얼른 만져보면 그렇지 않아 주무르고는 한다. 두 번째가 변비 증상이다. 옛날에 똥줄이 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게 된다. 세 번째가 머리에서부터 차츰 차츰 피가 줄어들어 온몸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번째가 걷는데 다리가 내 뜻과는 다르게 휘뚱거릴 뿐만 아니라 발 밑이 어질어질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출렁거린다. 그런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겹쳐져오다가 막바지에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온몸이 녹아 흘러 땅속으로 잠기는 듯한 느낌 속에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말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든다. 그 죽음과 소생의 되풀이 속에서 원고지는 쌓여갔다. - P98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 강변에 동포들이 일군 마을 이름은 ‘3.1촌’.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그 독립 의지가 가슴 뭉클하다. 동포들은 짧은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긴 겨울에는 아무르강의 두꺼운 얼음을 뚫어 생선 중에서 최고로 치는 철갑상어를 낚었다. 영하 30도의 추위를 견디며, 그것을 판 돈이 독립 자금이 되고 자식들의 학자금이 되었다. - P188

원고를 쓴 기간만 <태백산맥>이 6년. <아리랑>이 4년 8개월이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했는데 <아리랑>을 끝내고 보니 쉰셋이 되어 있었다. 내 인생 장년의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아이’에 흘러가버린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쓰느냐고. 삶의 보람이 가장 커서인가? 소설은 사나이의 생애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어서인가? 그 대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원고를 쌓아놓고 그 사이에 서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려 했는지 모른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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