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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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어령이라고 다재다능한 분이 계셨단다. 생전에는 살아있는 지식인이라고도 불렸어. 1988년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하시기도 하고 이후 문화부장관 등 국가의 중요한 일도 하셨단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죽음에 해탈한 듯 무척 편안한 모습으로 여러분 행복하시라면서 작별 인사를 하시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구나. 아무리 나이가 많으시다고 하지만 죽음 앞에 저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싶었지.

이어령 님은 책들도 많이 쓰셨는데 엄마는 몇 권 읽은 것은 같은데 아빠는 이어령 님의 책은 읽어 본 적은 없단다. 오늘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아빠의 친구가 추천해 주어 읽어보게 되었단다. 이 책은 인터뷰어로 유명한 김지수 님이 이어령 님과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책이란다.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인터뷰를 하다 보니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연상되기도 하더구나.

이 인터뷰를 진행할 때는 이미 이어령 님께서는 시한부 판정을 받으시고 항암 치료도 거절하면서 삶을 정리하고 계시던 시기였단다. 하지만 여전히 열정과 함께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죽음에 초연함을 느낄 수 있었단다. 또 하지만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무섭지 않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는 철창 속의 사자가 우리 밖으로 나와 있다는 비유로 말씀하였어.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나와는 상관없는 철창 속의 사자와 같으나 나의 죽음은 그 사자가 철창 밖으로 나와 내 앞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야. 죽음이라는 것은 편히 생각하기 쉽지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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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공포는 없으신가요?”

자신은 없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어. 그것을 본 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가 이렇게 답했다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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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을 띠고 있어서 인터뷰어인 김지수 님이 주로 묻고 이어령 님이 답변하는 식으로 되어 있단다. 자신의 삶 속에서 축적된 지식과 교양을 조곤조곤 말씀해 주셨어. 그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현실이잖니. 아빠가 인상적인 문구를 몇 개 발췌했는데 그것들과 너희들과 함께 다시 한번 읽어보는 것으로 오늘의 독서 편지를 대신하려고 한다. 베이컨이 인간을 개미, 거미, 꿀벌 이렇게 세 가지 부류로 분류했대. 너희들은 어떤 부류가 가장 나은 것 같니? 거미는 좀 징그럽고 다른 벌레들을 거미줄에 잡아 먹으니 안 좋을 것 같고개미와 꿀벌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답은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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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6)

내가 그 사람에게 물었지.

자네가 가장 잘 아는 게 뭔가?’

꿀벌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꿀벌을 잘 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만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 다니는 사람이야. 밥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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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겨울 아침 일어났을 때 밤새 눈이 내린 날이면 괜히 설레고 기분이 좋았거든. 당시에는 어려서 그런가 했는데, 지금까지도 겨울날 밤새 내린 눈을 보게 되면 설레고 기분이 좋단다. 왜 그럴까? 눈이 그냥 예뻐서 그런 걸까? 이어령 님께서 그 이유를 콕 짚어서 이야기해주셨단다. 풍경이 하룻밤에 변해서 그런 것이라고 마치 해외 여행을 갔을 때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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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밤사이 내린 눈은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막이 내렸다 올라가는 건 일생 중에 그렇게 많지 않거든. 외국 여행을 한다든지,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난다든지……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 거지. 보통 쿠데타가 밤에 일어나잖아. 자고 일어났는데 탱크가 한강은 넘어 세상이 싹 달라진 거야. 밤에 내린 첫눈이 그래. 쿠데타야. 오래 권력을 누리지 않고 바로 사라지는 쿠데타. 오래 있어 봐. 눈 녹으면 지옥이지. 곧 사라지니까 그만큼 좋은 거야. 아름다운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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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어령 님의 경험담 중에 하나 인데요즘 전세계적으로 한류가 큰 열풍을 일으키고 있어서 온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잖니. 한류의 중심인 케이팝, 케이클래식, 케이뮤비 등의 주요 인재를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한국예술종합학교인데 그 학교를 처음 만들자고 한 것도 이어령 님이라고 하시는구나.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아이들을 위한 곳을 만들겠다고 말이야. 선견지명이 있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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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천재가 있으면 특별 교육시켜야 해요. 특권이 아니에요. 오히려 불쌍한 애들이지. 하나님이 인간들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쓸모를 못 찾은 놈에게 눈곱 하나 떼서 붙여주면 그 아이가 화가가 되고, 귀지 좀 후벼서 넣어주면 그 아이가 음악가가 되는 거예요.

너 세상 나가면 쓸모없다 조롱받을 테니, 내 눈곱으로 미술 해먹어라. 너 세상 나가면 이상한 놈이라고 왕따 당할 테니 내 귀지로 음악 해먹어라.’

그게 예술가예요. 예술가들은 그 재능 빼면 세상 못 살아요. 아무것도 못해서 범죄자 돼요. 그러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에요. 학교 만들어주는 게 자비에요.’

그 얘기 듣고 사람들이 웃고 잠시 침묵했어. 총리가 그럼, 통과된 걸로 알겠습니다하고 땅땅땅 때린 거야. 그 순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생겨났다네. 한예종 아이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오면 내가 그래.

너희들은 five minute kids, 5분 동안 태어난 아이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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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님께도 아픔이 있었단다. 촉망 받고 능력 있던 목사 딸이 병으로 먼저 돌아가신 거야. 암이라고 진단 받은 이후에는 항암 치료도 거부하시고 더욱 신학에 몰두하셨다고 하는구나. 딸뿐만 아니라 손자도 이십 대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이어령 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이제야 딸과 손자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셔서 그리 편안하셨던 것인지.. 딸이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영성의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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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그렇지. 갑작스럽게. 물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영적 판, 인화지가 있어야 셔터를 눌렀을 때 빛이 담기지. 종이 넣고 아무리 셔터 눌러봐야 거기에 뭐가 나와. 0.001초의 셔터를 끊어주는 그 짧은 순간에 감광지에 비치는 모습, 그게 영의 세계야. 순식간에 다른 세상을 보는 거지. 그런데 내 딸 민아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머무는데, 나는 미끄러져서 계속 땅에 떨어져. 그래서 영성이 아니라 땅 지()자 지성이 되는 거야. 땅의 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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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님이 하신 일들이 많지만 1988년 올림픽 개폐회식을 빼놓을 수가 없겠구나. 특히 개회식. 한 장면만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다들 굴렁쇠 소년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구나. 누군가는 뜬금없는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화려한 축제의 갑작스런 침묵을 만들고 모든 관중들이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 그는 침묵의 소리를 보여주려고 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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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246)

제 기억으로는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이 반바지를 입고 굴렁쇠를 굴리며 갈 때, 사이렌이 울렸던 것 같습니다.”

그 제목이 silence였지. 내가 올림픽에서 수십 억 지구인들에게 들려준 것도 바로 그 침묵의 소리야. 꽹과리 치고 수천 명이 돌아다니던 운동장에 모든 소리가 딱 끊어지고 어린애 하나가 나올 때, 사람들은 듣고 본 거야. 귀가 멍멍한 침묵과 휑뎅그레한 빈 광장을…… 그게 얼마나 강력한 이미지였으면, 그 많은 돈 들여서 한 공연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시끄럽던 운동장이 조용해지고 소년이 굴리던 굴렁쇠만 기억들을 하겠나. 그게 어린 시절 미나리꽝에서 돌 던지며 정적에서 나온 이미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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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늘은 책의 발췌한 일부를 이야기해주는 것으로 독서 편지를 대신할게.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이어서 또 다른 영화를 트는 극장이 있을 뿐이지요.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데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군인들이 전투할 때 왜 위장복을 입겠어? 살기 위해서 감추고 색을 바꾸는 거지.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對談)이 아니라 상담(相談)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수지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 P44

"차이는 있어.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새도(five o’clock shadow)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 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낸다. 문득 정식 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다시 전철을 타고, 술집에 가고, 이윽고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고….. 그게 샐러리맨의 고독이지."
"오후 다섯시. 남자의 얼굴에 수염 그림자가 생길 때, 여자는 립스틱 자국이 지워진답니다."
- P74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떼’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그냥 무리 지어 사는 거지.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 사이에 interview가 있는 것처럼." - P125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 목자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자를 바라본 거지.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 거야.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길 잃은 양은 그런 존재라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종교조차 문학이었다네. 신학에서 ‘ㄴ’자를 빼면 시학이잖아. 보들레르도 니체도 나는 성경을 읽는 마음으로 읽었지." - P168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 다 그 제자들이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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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08-10 2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어령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엔 너무도 많은 어록들이 있어서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저도 제 자식들에게 전해 주고 싶지만 아직 이해하지 못 할 것 같아 알려주겠다는 생각 은 포기 했습니다. ㅎㅎ bookholic 님 독서 편지 애독자로서 이렇게 자식들에게 전해 주실 수 있다는게 부럽습니다,

bookholic 2024-08-11 23:06   좋아요 2 | URL
저희 아이들도 아빠가 자기들한테 이런 식으로 독서편지 쓰고 있는 것 아직 몰라요 ㅎㅎ
이 책에 이어령 님의 좋은 말씀은 많은데 금방 까먹는 제 머리가 한스럽네요..^^
주말도 휙 가버렸는데, 마힐 님, 새로운 한 주는 즐겁고 행복하고 시원한 한 주 되시길 바래요..~~
 















(21)

밖에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젊은이들이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는 그런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된 것일까? 나는 늦은 밤이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게 종종 그런 질문을 하고 술을 홀짝이며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벽 바로 뒤에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더욱 거대한 부재의 울림이 메아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 이런 기분을 아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쇼팽 음악에 집중했다. 이제는 다른 곡이었다. 녹턴, 섬세한, 서정적인, 부드러운.

 

(26)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그런 우리가 영원할 순 없다는 것을, 첫 아이가 태어나면 담배가 영원히 사라지고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와인과 심야의 여유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함께하는 인생은 더욱 풍부해지고, 사랑과 선의는 두 배가 되고,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

 

(92)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126)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127)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187)

아까 애들 얘기할 때 말이에요. 내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데, 아이들이 있으면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잡다한 데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나요?” 개릿이 나를 보았다. “애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경력에 온 신경을 쏟았는데-정말로 그 생각밖에 안 했는데-그러면 너무 비참해졌죠. 그런데 지금은 전혀 신경 안 써요. 그 사소한 문제들, 알잖아요, 그 자잘한 문제들-학과 내 정치라든가 그런 것-그건 그냥 잊게 돼요.”

 

(232)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집에 어린아이가 둘 있어서 아내와 나는 잠을 거의 못 자고 심지어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이 식당에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는 사십오 분 동안 수프를 먹고 신문을 읽고 가끔은 와인을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식당은 어둡지만 편안했고, 배경음악은 주로 경쾌한 어쿠스틱 멕시코 음악으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나온 오래된 곡들이었다. 손님들도 대체로 나이가 많거나 그렇게 보이는 이들, 모르긴 해도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들었을 사람들이었다.

 

(267)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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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0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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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10번째 <폴리스>를 읽었단다. 처음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고 나서 잔인한 묘사에 읽기 불편하기도 했지만 스릴러 소설을 좀 읽는 아빠의 취향에 맞아서 하나 둘 읽게 되더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락밴드 출신의 독특한 지은이 이력에, 낯선 노르웨이 작가라는 점도 관심을 계속 갖게 되었어. 이번까지 해리 홀레 시리즈 10권 중에 실망한 작품들도 몇몇 있지만, 손을 못 끊게 되더구나. 지금까지 12권까지 출간되었는데 그 12권이 마지막인지 계속 출간되는지는 12권까지 읽어봐야겠구나.

아무튼 오늘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열 번째인 <폴리스>라는 책을 이야기해줄게. 이 소설 또한 기존 해리 홀레 시리즈처럼 잔인한 범죄 장면도 나오는 하드 코어 스릴러로 너희 같은 순진한 10대가 읽기에는 좀 적당하지 않은 듯 해. <폴리스>는 해리 홀레 시리즈 9권인 <팬텀>과 쭉 이어지게 된단다. <팬텀>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 홀레가 총에 맞으면서 끝났잖니. 그것도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고 아들처럼 사이가 좋았던 올레그한테 말이야해리 홀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끝이 났는데 해리 홀레 시리즈인데 설마 죽었겠냐고 아빠가 이야기했던 것 같구나. 10 <폴리스> 첫 부분에 병실에 혼수상태로 빠져 있다가 암살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은이 요 네스뵈는 그 사람의 정체가 마치 해리 홀레인 것처럼 서술해서 읽는 이에게 혼동을 주기도 했지만, 좀 읽다 보면 그 사람은 해리 홀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단다.

 

1.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안톤 미테트라는 경관은 중요한 환자가 있는 병실을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어. 실예라고 하는 경찰 대학 학생에게 근무 교대를 하고 퇴근하려고 했으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했단다. 안타깝게도 이번 살인 사건의 희생자는 경찰이었어. 이미 그곳에는 많은 경찰들이 출동했어. 아무래도 동료 경찰이 희생되었다 보니 평상시보다 많은 경찰들이 출동한 것 같았어. 총책임자인 군나르 하겐도 와 있었고 과학 수사관 베아테 뢴도 와 있었어. 이들은 해리 홀레 시리즈를 읽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겠구나. 경찰청장 미카엘 벨만도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어. 그런데 전작 <팬텀>에서 미카엘 벨만이 정직 중인 동료 트롤스와 함께 마약 밀거래와 연루되어 있었잖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몇 안 되는데 그 중에 해리가 있었고 말이야.

이 사건이 있고 얼마 후 또 경찰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어. 첫 번째 피해자와 연관성은 없었지만 두 살인 사건의 공통점이 있었단다. 예전에 있던 미제 살인 사건의 장소에서, 그 미제 살인 사건과 연관된 경찰들이 동일한 날짜에 살해당한 거야. 그래서 경찰들은 다음 살인 사건의 타켓을 예전에 발생했던 미제살인사건에 초점을 맞췄어. 그런데 두 미제 사건 중 한 사건의 용의자였단 발렌틴이 감옥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죽인 것처럼 꾸민 다음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발렌틴이 최근 일어난 경찰 연쇄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추적했단다. 그리고 이 사건의 전담할 소수 조직을 결성했어. 카트리네, 군나르, 베아테, 베에른이 그들이고 그들을 도와줄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스톨레도 합류했단다.

그들은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생각했지. 바로 해리 홀레. 아직 해리 홀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안 나왔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해리 홀레인 것 같았지만 이미 아빠가 이야기했듯이 그 사람은 해리가 아니었어. 그들은 카트리네가 리더가 되어 비밀리에 조사를 했어.

얼마 후 중요한 환자가 있는 병실을 지키던 안톤 미테트가 누군가 약물을 탄 커피를 마시고 잠에 빠져 들었고 그 사이에 환자가 죽고 말았단다. 그런데 그 환자는 자연사한 것으로 결론이 났어. 하지만 안톤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상관인 군나르에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군나르와 연락이 되지 않았어. 그런데 얼마 후 그는 누군가에게 그만 살해당하고 말았단다. 안톤도 미제 살인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는데 바로 그 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 동일 장소에서 살해 당한 거야. 세 번째 경찰 연쇄 살인이 일어난 거지.

 

2.

드디어 해리가 출현했단다. 올레그가 총을 쐈을 때 다행히 해리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살 수 있었단다. 해리는 사랑하는 라켈과 평범한 삶을 살겠다고 약속을 하고 은퇴를 했단다. 그리고 지금은 경찰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어. 올레그가 자신을 쏜 사실은 경찰에 이야기하지 않았어. 올레그도 자신이 한 짓에 반성을 하고 마약 치료를 받겠다고 했어. 라켈은 스위스가 일하고 있어 올레그도 스위스에서 치료받고 라켈은 주말에만 노르웨이로 와서 해리와 함께 지냈단다. 어느날 베아테와 카르리네가 해리를 찾아와서 최근 발생한 경찰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함께 하자고 도움을 요청했어. 해리는 자신은 더 이상 경찰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고, 사건을 해결할 만한 실마리를 주었단다. 해리에 조언에 따라 경찰은 다가올 미제 살인 사건 발생일에 덫을 놓고 준비를 했단다.

한편 해리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어. 제자 중에 실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기억 나지? 첫 부분에 병실을 지켰던 그 경찰 대학 학생. 그 실예가 해리에게 적극적으로 대쉬를 하는 거야. 그런 실예를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오히려 실예는 변호사를 데리고 와서 해리에게 강간당했다고 했어. 해리의 동료 대학 교수 중에 아르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을 많이 경험했는지 사전에 해리에게 이것저것 준비를 하라고 했고 이에 해리는 자신의 결백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었고 오히려 실예가 이 일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단다.

한편 경찰이 덫을 파 놓은 과거 미제 살인 사건이 있었던 날파 놓은 덫에 걸리지 않고 의외의 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단다. 해리의 친한 동료인 과학수사관 베아테 뢴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거야.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은이가 너무 잔인한 설정을 했구나. 오랫동안 해리의 동료로 해리 홀레 시리즈에 자주 출현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죽게 그만 두다니 말이야. 해리와 베아테의 동료 경찰들은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어. 베아테의 죽음은 해리를 복귀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단다. 해리는 복수심을 가득 채우고 경찰에 복귀하게 된단다.

소설의 지은이는 여려 사람이 용의자 선상에 올려 두면서 소설을 진행해 나갔어.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앞서 이야기한 발렌틴이었어. 발렌틴의 집 천장에 오래된 시신이 발견되거나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여 스톨레의 환자로 진료를 받다가 스톨레를 칼로 위협하다가 도망을 가는 등 말이야. 하지만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사람은 실제 범인은 아니었어.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 중에 진범이 있었지. 물론 발렌틴의 집 천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그 사람도 흉악범이긴 하지. 하지만 이번 경찰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 아닐 확률은 높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 용의자로 자주 그려지는 사람은 앞서 이야기했던 전직 경찰 트롤스였어. 트롤스는 경찰총장인 미카엘과도 연관이 되고, 조사를 하다 보니 실예와도 연결고리가 있었어. 그렇다 보니 이 세 사람이 이번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사건 전개를 하게 된단다. 하지만 진범은 이들도 아니야. 예상치 못한 인물, 별로 사건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 그 동안 해리와 경찰들에게 호의를 보였던 사람, 그 사람이 소설 뒷 부분에서 범인으로 짜잔하면서 나오게 된단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야기하지는 않을게.

한가지 걱정은 시간이 흘러서 아빠가 이 리뷰 독서 편지를 다시 봤을 때 아빠도 범인이 누군인지 기억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다시 읽기에는 책이 너무 두껍고 말이야. 읽은 지 두어 주 지난 지금도 줄거리가 헛갈리는데 말이야. 아무튼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열 번째 소설도 그렇게 끝이 났단다. 예상치 못한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는 규칙을 지키면서 말이야. 그 규칙이 오히려 범인을 예상하기 쉽게 만들기도 하더구나. 해리 홀레 시리즈가 비슷비슷하여 어떤 게 어떤 작품인지 좀 헛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남은 해리 홀레 시리즈를 마무리를 해야겠지. 나중에 또 읽고 이야기해줄게. 그런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노르웨이에 이런 잔인한 살인 사건이 실제로도 많이 일어나나? 궁금하네.

 

PS,

책의 첫 문장: 그것은 그 안에, 그 문 뒤에 잠들어 있었다.

책의 끝 문장: 모든 것이 이렇게 끝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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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141-142)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콤프턴의 실험 결과는 확인 도장이었다. 그는 진보좌파 신문인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에 이렇게 기고했다. “콤프턴 실험의 긍정적 결과는, 빛이 에너지 전달뿐 아니라 충돌 효과 측면에서도 마치 개별 에너지 발사체로 구성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수년 전부터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는 주장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빛은 파동이어야 했다. 맥스웰 이후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알고, 전기기술자는 그 지식으로 라디오와 방송기기를 만든다. 파동이어야 하는데 입자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제 빛의 이론이 두 가지다. 둘 다 필수불가결이고, 20년에 걸친 이론물리학자들의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백할 수밖에 없듯이, 둘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연결도 없다.” 빛의 파동이론과 입자이론 둘 다 어떤 식으로든 말이 된다. 광양자는 간섭현상과 굴절현상 같은 빛의 파동현상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양자 없이는 콤프턴 효과와 광전 효과를 해명할 수 없다. 빛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파동과 입자. 물리학자는 이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262)

1928년에 디랙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디랙 방정식이라 불리게 될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운 방정식 하나를 발명했다.


짧고, 완벽하다. 말이 없는 발명자와 아주 잘 어울리는 공식으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물리학 방정식일 것이다.

디랙이 이 공식을 종이에 적었을 때, 물리학은 두 기둥 위에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혁신적인 이 두 기둥을 합칠 수 없었다. 슈뢰딩거 자신도 실패했다. 그러나 폴 디랙은 이 둘을 합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방정식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의 이론을 화해시켰다.

 

(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293)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 5 16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쓸모없는 사람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432)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466)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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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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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모비 딕>으로 유명한 작가 하먼 멜빌의 단편 소설을 하나 읽었단다.

필경사 바틀비. 이 책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니고, 우연히 하먼 멜빌의 소설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어. <모비 딕>이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게 읽어서 하먼 멜빌의 다른 소설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고단편 소설이라서 아주 짧게 읽을 수 있었단다. 이 책도 알고 보니 유명한 소설이라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을 했는데,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시리즈에서 나온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단다.

필경사는 것은 것은 공문서나 서신 등을 그대로 베껴 적는 사람을 이야기한단다. 예전에는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어서 공문서들이 많이 필요할 때 사람들이 손으로 베껴 적곤 했나 보구나. 그런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틀비라는 사람의 이야기란다. 참고로 이 소설은 1853년에 쓴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1.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는 변호사로 좌우명이 무사태평이었단다. 좌우명답게 힘든 변호를 하지 않고 주로 부자들의 공채, 부동산 관련한 업무를 주로 했단다. 그의 사무소는 뉴욕 월 스트리트에 있었단다. 그의 사무실에는 터키와 니퍼스라는 별명을 가진 두 명의 필경사와 잡무를 맡고 있는 진저너트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이 한 명 있었어. 터키는 오전에는 전문가의 최고를 찍을 정도의 업무 효율을 가지고 있으나, 오후에는 늘 화가 난 상태로 일의 효율도 좋지 않았단다.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을 했는데니퍼스는 비슷한 캐릭터로더구나. , 터키와 반대였단다. 오전에는 늘 화가 나 있는 얼굴로 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오후에는 평온한 상태로 돌아와서 착실히 일을 하곤 했어. 이렇듯 둘은 단점이 있는 필경사이지만 할 때는 능력이 출중한 필경사들이었어. 12살인 진저너트는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법률공부도 하였단다.

일이 많아져서 필경사 한 명을 더 뽑겠다고는 공고를 냈고 그 공고를 보고 찾아온 이가 오늘의 주인공 바틀비였단다. 바틀비는 일벌레 수준이었어. 엄청난 양을 베끼는 데 거의 기계처럼 일했어. 하지만 바틀비 역시 특이한 점이 있었단다. 절대로 검토 작업을 안 한다는 것. 필경사에 있어 중요한 일도 제대로 베껴 썼는지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바틀비는 하지 않았어. ‘가 검토 요청을 해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지.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야. 무엇인가 요청하거나, 시키면 늘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했어. 이런 일이 반복되자 는 화가 났지만 바틀비의 업무 능력과 근면성, 착실함을 보면 참게 되었단다. 바틀비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필사를 했으니까바틀비를 이해해보려고도 했어. 하루는 면담을 해서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어. 그러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며 면담조차 거부를 했단다. 해고하려고 했으나 그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의 능력이 아쉽기도 해서 자르지 못하고 다시 설득하려 했으나 이번에도 거절을 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필사를 그만 두겠다고 하더니 그 이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회사는 꼬박꼬박 나와서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했어. 일주일 시간을 주고 그에게 해고 통지를 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전히 사무실에 앉아 있었어. 우연히 주말에 사무실에 나온 는 그곳에서 바틀비를 보았고,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의 대해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해서 그에게 돈을 줄 테니 다른 곳에 가라고 했지만 여전히 바틀비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단다.

결국 가 사무실을 이전하기로 했단다. 마음 한켠에 바틀비가 걸리긴 했지만 이전한 사무실에서 또 열심히 일을 했지. 그런데 이전 사무실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찾아왔어. 바틀비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이야. 여전히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고 했어. ‘는 바틀비와 관련이 없다면서 책임질 수 없다고 했어. 알겠다면서 돌아간 이전 사무실의 사람며칠 후 다시 찾아온 이전 사무실의 사람바틀비가 건물 곳곳에서 출현하여 손님들이 놀라게 되고 그래서 손님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했어. 바틀비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었어. ‘는 다시 한번 바틀비를 찾아가 설득해보았어. 다른 일자리도 주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바틀비는 모두 거절을 했단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결국 바틀비가 유치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 ‘는 바틀비를 면회하려 갔고 그곳에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었어. 심지어 식사도 하지 않아서 삐쩍 말라 있었어. 사식 넣은 넣어주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바틀비의 식사를 챙겨 달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바틀비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결국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단다.

바틀비가 의 사무실에 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한 채 바틀비는 세상을 떠나버렸어. 몇 달 뒤 바틀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단다. 바틀비는 위싱턴에서 배달 일을 했는데 수취인 불명 우편물 처리하는 일을 하다가 해고당했다고 했어. 받을 수 없는 우편물을 처리하면서 바틀비는 많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런 것이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만 이야기하는 바틀비를 만든 건 아니었을까 싶구나.

분명 능력은 있으나 마음의 병이 생겼던 바틀비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 전에 신경정신의를 만나 치료를 받아봤으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아마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병원 가기를 거부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필경사 바틀비>는 짧지만 재미있으면서 우울한 소설이라고 짧게 평가해 본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초로에 접어들었다.

책의 끝 문장: , 바틀비여! , 인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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