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 그럼 <세여자> 2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1권의 줄거리는 다시 안 해도 되지?

..

고명자는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옛 동료들로부터 배신자를 소리를 듣고, 남은 가족들과 멀어지면서 혼자 외롭게 지내게 되었어. 경찰들은 계속 감시를 하면서도 전향을 했다면서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다그쳤어. 옛 동료들을 찾아가 회유하라고 협박까지 했어. 그 와중에 단야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 헛소문단야는 이미 모스크바에서 누명을 쓰고 죽었잖아. 단야만 생각하고 있던 명자는 그 소문을 듣고 알아보려고 했지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 무작정 나라밖으로 갈 생각에 신의주로 향했다가 사기만 당하고 빈털터리로 다시 경성으로 왔어.

그렇게 외롭게 지내던 명자에게 옛 동지 박희도와 김한경이 찾아왔어. 잡지사동양지광에서 같이 나와서 일하자고 했어. 명자와 같은 지식인 여성이 필요하다고 했지. 명자는 생각을 해보겠다고 했어. 답변을 안 하자 경찰까지 찾아와서 협박을 했어. 다시 감옥을 갈래? 동양지광에 출근할래? 결국 명자는 동양지광에 기자로 취직을 했어. 명자가 망설였던 이유는 그곳은 친일잡지를 만들던 곳이었어. 조선인들을 회유하고, 전쟁에 자연하라는 내용이었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명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전향한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었어. 다들 철저한 황국신민이 되어 있었어. 또 한번 크게 실망.

고명자는 기자 일만 했던 것은 아니야.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어. 박헌영, 여운형을 회유해라…. 이걸 어떻게 하겠니..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동양지광은 휴간을 했어. 다시 고독하고 우울한 시간들.. 멀리서 들려온 정숙의 소식.. 조선의용군에 들어갔다고비록 전쟁터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겠지만.. 고독하고 외로움보다 낫다고 생각했을 거야.


1.

1945 8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너무나 갑작스러운명자는 해방되기 얼마 전부터 여운형의 연락을 받고 건국동맹비밀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어. 그리고 해방 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단다. 여운형은 명자가 전향했던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견디고 나서 어쩔 수 없는 전향이라고 이해해 주었어. 해방이 된 조선땅에 소련과 미국이 진군한다는 소식은 모든 백성들에게 좌절을 심어주게 되었단다. 죄는 일본이 지었는데, 벌은 조선이 받는 기분이랄까

.

연안에 있던 정숙도 일본의 패전 소식과 항복 소식을 들었어. 조선의용군들은 모여서 경성 귀환에 대한 회의를 했어. 그동안 정숙은 창익과 다시 이혼을 하고 동지로 남았단다. 그들에게 소련과 미국의 분할점령 소식이 전해졌어. 다들 이해가 가지 않는 움직임이었지. 정숙을 비롯한 조선의용군은 평양으로 가기로 했어. 남쪽은 반공주의로 똘똘 뭉친 미국이 들어와 있다고 하잖아. 북쪽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성공한 소련이 와 있으니, 비록 고향은 서울이지만, 정숙은 평양행이 맞다고 생각했어.

행군으로 신의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단다. 그들을 반기는 환영인파는 기대도 안 했을지 몰라. 하지만, 무장 해제 당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 심사까지 했을 때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평양에서도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어. 소련이 새파랗게 젊은 김일성 대위를 앞세우고 있다는 소식이었어. 항일 투쟁에 있어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김일성이 갑자기 나서게 되니 다른 이들은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어.

그 와중에 거기에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있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지. 평양에 도착한 정숙과 조선의용군은 김일성과 만났어. 생각보다 김일성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어. 호감이 갔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도 해방 소식을 들었단다. 세죽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대를 잠시 했지만, 길이 보이질 않았어.. 길이세죽은 딸 영이, 아니 이제 러시아 이름이 더 익숙한 비비안나와 점점 멀어졌어.


2.

명자는 여운형 아래에서 일을 했지만, 미군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어.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5년간 신탁 통치를 한다고 결정했는데, 이후에는 전국이 반탁과 친탁으로 갈리게 되었어. 이때 반탁이었던 박헌영과 공산당은 친탁으로 돌아서자, 남한에서는 거의 매장 분위기였단다. 결국 박헌영은 북한으로 향했어. 남북을 초월했던 조선공산당을 창건하고 이끌던 박헌영이 북한에 오자, 대단한 환영을 받는 것은 당연하겠지. 하지만 북한의 일인자는 젊은 김일성이었어. 박헌영이 설 자리는 김일성의 옆자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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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는 해방을 했으니 단야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틈나는 대로 서울역에 나가보곤 했단다. 그런 명자를 보기가 안쓰러워 여운형은 사람을 시켜서 단야의 소식을 알아냈단다. 단야는 이미 10년 전에 죽었다고 했어. 더 이상은 알려 하지 말라고 했어. 더 이상이라 함은 죽기 전에 단야가 세죽과 재혼했다는 것이겠지. 명자가 얼마나 실망하겠어. 그동안 단야만 믿고 버텨왔는데…. 여운형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윤동명이라는 사람을 명자에게 소개시켜 주었어. 고명자는 윤동명과 재혼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비극 하나자신을 그렇게 잘 봐주고 지원해주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한 거야. 그 시절은 그런 시절이었어. 일본의 총칼도 수십 년 생명을 앗아가지 못했는데, 같은 민족에 의해 죽는 사건들.. 정말 비참하고 슬픈 일들이구나.

한편, 정숙은 몇몇 불만들이 있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소비에트 국가 만들기에 협조하기로 했어. 김일성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도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어. 김일성파, 연안에서 온 연안파, 남쪽에서 올라온 조선공선당파, 소련파 등등…. 계속되는 분파들의 갈등들김일성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도 많았어.

.

정숙은 뜻밖의 소식을 들었어. 세죽의 소식을 들은 거야. 세죽이 유형지에서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보내달라는 요청 문서를 보내온 것이야박헌영이 오케이만 하면 세죽은 평양으로 올 수 있었어. 하지만 박헌영은 냉담하게도 거절을 했단다. 세죽의 처지 좀 생각해 주지세죽은 남편 박헌영이 죽은 줄 알고 있었고, 상황이 단야와 재혼하게 만들었고, 단야와 고작 3년 생활을 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형 생활을 7년이나 하고 있으니책을 읽는 아빠가 다 억울하더구나. 속 좁은 박헌영어찌 인민을 보살피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변한 것이냐…. 심지어 모스크바에 와서 딸까지 만났었는데, 세죽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박헌영, 너는 이미 변절한 사람이도다. 세죽이 불쌍하지도 않단 말이야. 세죽이 잘못한 게 뭐 있단 말이야. 이 속좁은 인간아.

명자는 남부연석회의의 남한대표 중 한 명으로 평양을 가게 되었어. 평양에서 정숙을 만나고 정숙을 통해 충격소식을 들었어. 단야와 세죽이 재혼했다는 소식그리고 세죽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자유 연애를 하는 정숙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단야 한 사람만 믿고 십 년 넘게 기다린 명자에게는…. 뒤늦은 심한 배신감…. 정숙은 명자에서 평양에 남아달라고 했지만, 명자는 서울을 선택하게 된단다.

비비안나는 무용수로 유명해져서 평양까지 공연을 하러 왔단다 평양에 있으면서 아버지인 박헌영도 만나고 허정숙도 만났어.

..


3.

1949년에서 50, 평양은 전쟁을 통한 남조선을 해방하는 의견들이 많았어. 정숙은 한 민족끼리 전쟁은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지만, 대세는 전쟁으로 기울었단다. 참 안타깝구나. 일제의 지옥에서 벗어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이번에는 같은 민족끼리 전쟁이라니.. 그렇게 이성적인 사람이 없었던 말인가.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게 전쟁의 불가피함을 설득해야 했어. 정숙은 모택동과 인연이 있어서 모택동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았어. 중국은 개입을 안하겠다, 하더라도 미국이 먼저 개입하게 되면 하겠다고 했어. 그리고 1950 6 25일 전쟁이 시작되었어.

전쟁 직전 서울은 공산주의가 불법으로 되어 있었어. 공산주의자들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어. 명자도 도망 중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고 있었어. 그 와중에 전쟁이 일어났어. 이때 남한은 후퇴하면서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이들을 많이 죽였는데, 김삼룡, 이주하 등이 이때 처형되었다고 하는구나. 다행히 명자는 다시 풀려났어.

북한군의 진군을 본 명자는 마치 해방 때의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명자가 일했던 근로인민당 사무실에 다시 출근을 했어. 하지만, 노동당은 근로인민당이 중도 성향을 띠고 있어서 인정하지 않았고, 명자는 친일 활동을 했던 근거를 들어 전향서를 쓰라는 명령을 받았어. 이게 무슨 황당한 상황이니…. 해방이라고 느꼈던 명자가 며칠 만에 다시 수감되어 며칠 동안 전향서를 쓰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어. 집에 먹을 것도 없어서 굶주리는 날이 많았고, 당의 명령으로 툭하면 사역을 하러 나갔어. 결국 명자는 병에 걸려 외롭고 쓸쓸하게 죽고 말았단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다시 밀리기 시작하면서, 북한군은 압록강까지 밀려났단다. 그러자 전쟁의 실패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기 시작했어. 전쟁이야 최고 지도자의 책임이지 뭐 볼 게 있겠니. 다만, 그에게 니 책임이다 물러나라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문제지. 그러다 보니 그 밑에 어떤 사람한테 덮어 씌울까 그걸 고민하게 된 거야. 결국 3여 년에 걸친 전쟁은 남북을 둘로 그대로 유지된 채 끝나고 말았어. 전쟁을 왜 한 건지

전쟁이 끝나고 북한에서는 다시 책임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수상인 김일성은 이걸 이용해서 반대파를 제거해 나갔단다. 빨치산파, 남로당파, 연안파를 차례대로 숙청했어. 박헌영은 미국 스파이로 몰려 사형을 당했어. 문화선정상이었던 허정숙은 이런 사태를 일어나지 않게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 그리고 자신도 연안파였잖아. 결국 허정숙은 생존을 위한 선택들을 했단다. 허정숙도 잠시 연안파 숙청 때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가족까지 끌어들인 협박에 결국 김일성 편에 서게 되었어.

.


4.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던 세죽비비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크바에 왔어. 비비안나가 결혼하면서 비비안나도 조금씩 엄마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어. 1953년 전쟁이 끝나고도 여전히 세죽은 크질오르다에 있었어. 그곳에서 신문을 통해 박헌영의 체포 소식을 들었어. 비비안나가 걱정이 되었어. 당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가족도 벌을 받는 연좌제가 당연시되었거든..

비비안나가 걱정이 된 세죽은 모스크바로 향했어. 당시 공포 정치를 벌였던 스탈린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모스크바를 가득 메우고 있었거든하지만 모스크바 가는 길은 쉽지 않았어. 이제 나이도 있으니…. 가는 길에 세죽은 폐결핵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모스크바에 도착했어. 딸 비비안나는 지방 공연 중으로 없었고, 사위 빅토르가 보살펴주었어.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했지만, 그만 죽고 말았단다. 다음날 비비안나가 도착을 해서 엄마의 임종을 보지도 못했어.

세죽의 죽음의 여정을 읽을 때 아빠도 눈시울이 붉어졌단다. 이것이 단지 허구가 아니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아. 자신의 열정으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니너무 가슴이 아팠단다.

.

세 여자 중에 생존한 이는 이제 정숙 하나뿐이구나. 정숙은 숙청의 바람에서 살았고, 1980년대까지도 북한에서 여러 중요 요직을 맡아서 활동을 했다는구나. 그리고 1991년 눈을 감았대.

.

아빠가 이 소설을 가슴 아프지만 재미있게 읽었단다. 지은이 조선희라는 분은 처음 알게 된 분인데, 이 분이 쓰신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중간이 공직의 일을 맡는 바람에 소설을 쓰는데 12년이나 걸렸다고 했는데, 이런 소설을 써 주셔서 정말 고맙더구나. 직접 전할 길은 없으니, 아빠는 이 책을 주변 사람들한테 추천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전달하기로 했단다.

이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 보았던 드라마 <1945>가 많이 생각이 났고, 태백산맥, 아리랑 등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들도 생각이 나고, 이 책에 등장한 위인들의 평전들도 많이 생각이 났단다. 무엇보다 세 여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이 세 분을 알게 되어 좋았고, 그들의 이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더구나. 그들이 지금은 하늘에서 다시 만나, 화해를 하고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모습으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면 좋겠구나.


(174)
815 해방 당시 조선에 관한 한 루즈벨트는 스탈린보다 무지했고, 미국 정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관심 있었고,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조선보다는 일본에 몰두했으며, 군정책임자인 하지 중장은 한국엔 처음이었다. 하지는 어느 정파가 자신의 우군인지, 이 난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정치지도자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미군정이 남로당을 불법화시키는 한편 이승만, 김구 같은 극우로도 복잡한 한국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한 끝에 그 중간 지대의 여운형과 김규식을 자신의 파트너로 찍었을 때 여운형이 암살돼버렸다.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282)
세죽에겐 함흥에서 어린 시절부터 늘 그랬다. 사는 건 고달프고 힘든 일이었다. 겨울이면 춥고 배고프고 여름이면 덥고 배고팠다. 게다가 고향도 조국도 잃고 남편을 두 번 잃고 아들도 잃고 낯선 나라에서 유형수로 홀로 늙어가다니, 상상도 못 한 불운이 끝없이 밀려왔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문당해 미치면서 마음자리가 한 번 깨지고 난 이후론 밑 빠진 독처럼 행복이 고이질 않았다. 사랑이 두려웠고 희망은 슬펐다. 단야와의 결혼생활도 언제 깨질지 몰라 늘 불안했고 결과는 걱정한 대로였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건 신혼의 훈정동 시절인지 모른다. 좁은 방에서 버글버글한 객식구들에 시달리며 끼니 걱정하고 밥해대느라 손이 마를 날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자 세죽은 슬며시 웃음이 나면서 마음이 따스해졌다.

(297-298)
그녀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내 나이 오십, 귀찮은 것이 많아지는 나이로구나. 아니, 사람에 대한, 사람들 집단에 대한 기대가 사라져버린 것 아닌가.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린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까.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의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한때 태산도 옮길 것 같았던 그 믿음이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349-350)
북조선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토지개혁도 근사했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그 사상 위에 정부를 세우는 일을 해보았으니 행운이었다. 권력이라는 것도 누려보았다. 그녀는 남자들이 그것에 목을 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팔자를 고쳐줄 수 있는 힘, 싫어하는 사람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은 권력자로 하여금 그것이 그대로 자신의 인격이라 믿게 만든다. 또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권력은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고 그 마력이란 때로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력하다. 그녀도 권력의 맛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한 게 묻으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 그녀는 땅에 떨어져서 흙이 묻어 있는 것도, 똥이 묻어 있는 것도, 그게 권력이라면 털지도 않고 주워 먹는 남자들을 많이 보았다.

(371-372)
1848년 팸플릿에서 시작된 19세기의 이론은 20세기에 세계적 규모의 이데올로기투쟁으로 전개됐지만 세기가 바뀌기 전에 종료되었다. 한반도 북쪽의 소비에트 실험은 일찍이 공산주의 트랙에서 튕겨나와 해괴한 파시즘으로 가버렸다. 21세기로 넘어와서 마르크스주의는 체제나 혁명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태도와 정책의 문제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대경합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르크스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그들을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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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더 큰 자괴감은 외부검열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하면서 찾아들었다. 교수님이나 간사 선배에게 한소리 안 듣기 위해, 막판에 대형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우리는 스스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누가 기획안을 내놓으면 그거 되겠어? 나갈 수 있겠어?”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갔다. 물정 모르고 용감한 제안을 내놓는 동료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안팎의 압력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유를 스스로 선택하는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표현도 점점 에둘러서, 비판인지 아닌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문장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검열의 눈을 피해가고 비껴갈 수 있었기에.

(49)

담배 없이 대체 무슨 낙으로 사니? 이 답답한 세상에 담배라도 없으면 정말 숨막혀 죽을 것 같 같은…… 너도 한번 피워볼래?”

담배 없이 무슨 낙으로라는 말이 내 가슴에 탁 꽂혔다. 그즈음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보사를 둘러싼 숨막히는 분위기, 신문사를 떠난 동기, 야학과 신문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

(89)

그도 그럴 것이 이날 언니가 연단에 선 장면은 그동안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에 깔려 있던 고정관념, 운동권의 기존 프레임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었다. 입학하고 난 뒤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은 이야기는 데모할 때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돌을 날라다주거나 마실 물을 떠다주거나 피를 닦아주었다는 등의 미담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 치마폭으로 돌을 나른 조선시대 여인들의 현대판이라고나 할까. 그런 남성 중심적인 대학에서 이념서클 출신도 아니고, 운동권에서도 사실상 무명이나 다름없는 여학생이 데모를 주동하다니, 일대 사건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 무성하게 나돌던 데모 주동자 예상 명단에 혜자언니는 올라 있지 않았다.

(117)

무고한 양민들이 좌익으로 몰려서 죽어간 4.3의 영향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도로 친정부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억울하게 몰리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으리라. 시장통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바쁜 일상에 휘둘리던 우리 부모의 정치의식도 제주도민의 평균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평균 이상의 우파 보수층이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강제 징용당해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남한을 선택한 이른바 반공청년단소속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당시 같은 문중이던 현씨 집안이 배출한 현오봉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던, 시장통의 공화당 조직책이었다.

(237)

그 좁은 방에서 영초언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등사하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광주를 찾아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기에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온몸으로 결기를 내뿜는 그녀 앞에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경험칙상 많은 걸 안다는 건 그만큼 위험해지는 지름길이었다. 이렇게 만든 유인물을 누구를 시켜서 어디에 배포할 것인지 나는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언니도 내게 같이하기를 권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한 차례 구속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했으므로.

(272)

행복! 당시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사전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그런 단어로 여겨졌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치부 기자들의 최대 전쟁터, 시사지의 판도를 좌우하는 대목인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사지 편집장인 내게 행복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는 총 맞고 전사하기 딱 좋은 전쟁터에서 이 악물고 용케 버텨내고 있었기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어가는 느낌이었고, 내 영혼의 우물물은 바싹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자각에서 진저리치는 나날이었다.

(280)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비참한 심경이 들더라고.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걸고 맞서 싸웠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가 그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다니. 우리가 젊은 날 한 그 모든 일들이 역사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느낌이랄까. 박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나는 텔레비전 뉴스만 봐도 입는 것 같아서 한동안 뉴스조차 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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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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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이야기 해줄 책은 <세 여자> 1권이란다. 모두 두 권짜리야. 작년에 신간소개에서 알게 된 책이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세 명의 여자 이야기라고만 정말 대충 알고 있던 책이야. 아빠는 일제시대에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아.. 특히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욱 관심이 가. 아빠가 어른이 되어 책들을 읽어보니, 학창 시절에 배웠던 위인들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더욱 그런 것 같아.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국토만이 아니었고, 이념은 더 깊게 갈라져 버렸고, 남한과 이념이 달랐던 독립운동가들은 교과서에서 완전히 빠져버렸거든학교에서 배운 것은 잘해야 절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제서라도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 것이,  그들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는 것이 그들로 인해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졌던 것 같아. 그리고 그들의 삶이 다들 너무 극적이었어.

이번에 읽은 세 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도 실화로 하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였단다.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그들은 모두 부잣집 규수로 태어나 시대에 부응하며 편하게 살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단다. 이 소설의 부제가 “20세기의 봄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들은 여름의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거운 젊음을 보냈어. 책 표지에 젊고 아름다운 세 여인이 냇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빛 바랜 사진이 하나 있어. 저 사진을 찍을 당시에 그들은 그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까? 그 사진을 찍을 당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어.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자신의 꿈을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 그럼 그들의 이야기를 해줄게

1.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삼일 운동을 이끌었던 민족대표 33. 그 중에 인권변호사로 일했던 허헌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허헌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허정숙. 허정숙은 신여성이었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어. 그래서 일본에 유학을 갔었는데, 그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삼일운동이 일어난 거야. 일본에 있던 허정숙은 그런 일이 있어났는지도 몰랐어. 나중에 방학 때 집에 왔을 때 그 소식을 접하고 나서 나라를 잃었는데, 편하게 공부나 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일본이 아닌 상해로 가겠다고 했어.

아무리 의식 있는 아버지였지만, 딸 혼자서 위험한 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겠니. 유학을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면 안전한 미국으로 가라고 했어. 허정숙은 아버지를 속이고 무조건 상해로 갔어. 상해에 도착한 다음에야 상해에 도착했다고 소식을 보냈어. 상해에서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어 안면이 있던 이동휘를 무작정 찾아갔어. 당시 상해는 조그마한 지구라고 할 수 있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많이 모여들 곳이었어. 1920년대 상해를 좀더 자세히 설명한 글이 소설 속에 있어 발췌해 보았단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당시 상해의 모습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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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920년의 상해는 나이 스물의 식민지 청년들이 자유와 해방의 공기에 한껏 들뜰 만한 도시였다. 퇴폐와 향락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사상과 문화의 별천지였다. 동양이면서 서양이었고 중국이면서 유럽이었다. 근대식 석조건물들이 아스팔트 대로를 따라 즐비했고 프랑스조계에는 식민지 베트남 남자들이 순사복 차림으로 경계를 섰고 영국조계에는 터번을 두른 인도 순사가 돌아다녔다. 또한 백주대낮에 조폭집단 청홍방이 사제폭탄으로 빌딩 하나를 날려버리기도 하고 밤마다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금시계를 찬 신사 숙녀들이 백화점과 오락관을 드나드는 번화한 거리 뒷골목에선 아편굴이 번창했고 식민지 조선의 망명객들이 개미굴 같은 하숙들을 얻어놓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프랑스조계는 거리나 상점, 학교에서도 영어나 불어를 썼다. 점원이나 인력거꾼, 하인 들만이 중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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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허정숙은 사회주의 연구소에서 사회주의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주세죽이라는 조선 여자를 만났어. 주세죽은 상해로 음악을 공부하러 왔다가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어. 허정숙은 조선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박헌영을 상해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을 서로 인사시켜 주었는데, 박헌영과 주세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 정숙은 박헌영의 동료 임원근과 교제를 하였단다.

상해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고 했잖아. 그중에는 김단야라는 사람도 있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 그들은 모두 1900년생 동갑이었고, 모두 공산주의자였어. 그렇다 보니 자주 어울렸어. 거기에 주세죽, 허정숙도 함께 했지. 상해에서 박헌영과 주세죽은 결혼을 했고, 주례는 여운형이 했어. 당시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은 러시아 공산당으로 독립자금을 받곤 했단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본보기로 생각했단다. 러시아 혁명이야 말로 마르크스가 주장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린, 진정한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공산당 내부에 여러 당파가 있는 것이 문제였어. 그들 당파간의 내분이 골칫거리였고, 공산당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임시정부와 갈등도 있었어. 나라 잃은 사람들이 이것저것 너무 많이 따지는 것 같구나.

2.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창건하려고 했으나 잠입하다가 잡혀 형무소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나왔어. 허정숙과 주세죽도 국내로 와서 여성동우회 활동을 했어. 그리고 연인 관계에 있던 허정숙과 임원근은 결혼을 했단다. 정숙과 세죽이 여성동우회를 참여하면서 고명자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어.

고명자의 아버지는 판사로써 부잣집이었어. 어린 시절 집안에서 점지한 혼처도 있지만, 그런 결혼은 죽기보다 싫다고 했어. 정숙과 세죽을 통해 김단야를 알게 된 고명자는 사랑에 빠지고 둘은 연인 관계가 되었단다. 주세죽과 박헌영. 허정숙과 임원근. 고명자와 김단야. 당시 그들은 뜨거운 젊은이들이었어. 그들이 오늘날에 만났다면 알콩달콩 예쁜 사랑을 하였겠지만, 당시 시대는 그들은 그냥 두지 않았어. 그들 또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어.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한 사이지만, 혁명을 위해서 아기도 뒤로 미루어 두었어.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는 생계를 위해서 기자 일을 시작했어. 박헌영과 임원근은 동아일보 기자, 김단야는 조선일보 기자로 일했어. 그리고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건을 준비했지. 드디어 1925 4 17일 경성의 어느 한 중국집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고, 다음날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박헌영의 집에서 만들었어. 당시 박헌영과 주세죽의 신혼집은 손님으로 늘 가득 찼고, 늘 토론과 회의를 했고, 주세죽은 그들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

조봉암이 모스크바에 조선공산당 창당을 보고하러 가기로 했는데 책임비서로 박헌영이 동행했고, 주세죽도 일행에 포함되어 모스크바에 다녀 왔어. 그런데, 얼마 안되어 일본은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조선공산당은 불법단체가 되었어.

허정숙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신여성>이라는 잡지의 편집장 일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단발 머리로 자르고 단발특집호를 내기도 했어. 그 잡지에 실린 사진이 바로 이 책의 표지로 뽑은 사진이란다. 세 여자 중에 허정숙은 다른 여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생각이야.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오늘날 여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야. 정숙은 그래서 결혼 후에도 다른 남자와 데이트도 했어.

정숙은 자신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을 하지만, 공산주의를 하는 남자들이 파벌싸움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단다. 박헌영은 정숙의 소비와 자유연애 등을 보고 공산주의자라 인정을 하지 않았어. 허정숙과 박헌영은 자주 말다툼을 하곤 했지..

고명자는 김단야의 추천으로 코민테른 후원으로 모스크바 유학 길을 떠나기로 했어. 집에서는 난리 났고, 고명자는 내심 김단야와 함께 가길 원했지만, 김단야는 국내에 남았어.

3.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본이 공산주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조선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있었어. 1925 11월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임원근, 허정숙, 박헌영, 주세죽 모두 잡혀 들어가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되었어. 허정숙은 허정숙의 아버지가 손을 써서 풀려 나왔어. 고향에 있다가 체포를 피한 김단야는 그들의 체포 소식을 접하고 조선을 탈출했어. 주세죽은 갇힌 지 한 달 만에 풀려나 경성으로 왔어.

허정숙과 임원근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이의 아버지는 임원근이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대. 허정숙의 아버지 하헌은 세상의 정세를 파악하고 공부하고 위해 세계일주를 계획했어. 허헌이라는 분도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구나. 그 당시에 세계일주 할 생각을 하다니허정숙이 스케일이 크고 생각이 트여 있는 것은 아버지의 피를 받은 것 같구나. 그런데 허헌은 한술 더 떴어. 허정숙에게 미국 유학을 가라고 한 것이야. 자신과 함께 미국에 갔다가 자신은 세계 일주를 하고 정숙에게는 그곳에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지. 허정숙은 흔쾌히 좋다고 했어. 이 일로 세죽과 잠시 트러블도 있었단다.

나라 꼴이 이렇고 공산당 재건이라는 큰 일을 두고 자본주의 국가 미국으로 유학이라니세죽은 정숙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 허정숙은 콜롬비아 대학에 다니게 되었단다. 1926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이 일의 여파로 공산당 탄압이 다시 한번 있었는데, 이것을 제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라고 부른단다. 이때 세죽은 또 유치장에 갇혔다가 한 달에 풀려났어. 2차 조선공산당 사건은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허헌 등이 변호사로 변호를 했어.

박헌영는 극심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어. 그렇게 병보석으로 풀려나게 되었어. 미국 유학 중이었던 허정숙도 국내소식을 접하고 1년 반 만에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어. 세죽과 화해도 했어. 한편 김단야는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에 들어가서 명자와 재회를 했단다.

헌영은 병보석 상태였는데, 몰래 세죽과 함께 모스크바로 도망을 갔단다. 당시 세죽은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모스크바를 가는 길에 아이를 낳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들은 명자, 단야와도 재회했어. 그리고 헌영과 세죽은 모스크바에서 요양도 하면서 공부도 했어.

처음 느껴보는 행복.. 단란한 가족헌영과 세죽은 딸의 이름을 영이라고 지었어. 그리고 헌영은 모스크바에서 조선공산당 대표로 활동을 했어. 당시 러시아는 권력 투쟁이 한창이었어. 레닌이 죽고 나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데 레닌과 성향이 비슷했던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스탈린은 일인 지배 체제를 만들어갔어.

명자와 단야는 잇달아 국내로 들어왔어. 당시 국내는 신간회 활동이 활동하였고 여자들의 조식은 근우회가 있었는데, 근우회는 여성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섰어... 한편 정숙은 임원근과 이혼을 하고 송봉우와 재혼을 했단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정숙은 연애만큼은 자유주의자였잖아. 임원근과 이혼은 했지만 옥살이 뒷바라지는 계속 했고, 동지로써 관계도 유지했어. 정숙도 근우회에 활동을 했어.

단야의 귀국 소식이 일본경찰에 알려지면서 다시 압박이 왔고 단야는 다시 러시아로 가기로 했어. 아빠는 이때 명자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사랑하는 사이인데 말이야. 그렇다고 조선이 안전한 곳도 아니고 말이야. 명자도 그러고 싶었지만... 단야는 홀로 갔어. 그리고 얼마 뒤 명자는 감옥에 갔다가 풀려났어.

명자의 엄마는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명자를 반 강제로 고향으로 데리고 갔지. 그리고 나중에 서울에 다시 왔다가 메이데이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났어. 이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명자가 전향을 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아무도 명자에게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어.

정숙은 송봉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가 아이를 낳는다고 가석방되었고,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감옥에 갔어. 아버지 허헌도 감옥을 수감되었고, 그러다가 1932년 허헌과 허정숙 모두 출감을 했단다. 그때는 이미 신간회와 근우회는 모두 해산되고 없어진 뒤였단다. 암흑의 시절이었지.

4.

한편, 러시아에서 공부를 마친 헌영과 세죽은 상해로 돌아왔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 공산당 재건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어. 네 살이 된 딸 영이는 모스크바 보육원에 맡겨둔 채였어. 그들은 상해에서 중국인 부부 행세를 했어. 당시 상해는 그들이 마지막 상해를 떠났던 십 년 전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어. 이제 상해는 일본의 손아귀 안에 있었어. 살벌한 분위기였지.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의 홍구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의거이라는 쾌거도 있었지만, 일시적이었던 것이었고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는 행동반경을 좁게 만들었단다.

러시아로 가려던 단야도 상해에 머물고 있어서 그들과 재회하기도 했어. 그런데, 결국 헌영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었어. 당시 상해에 많은 조선인들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끌려갔어. 세죽은 더 이상 상해에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갔어. 이때 단야와 함께 갔는데, 안전을 위해서 둘은 중국인 부부 행세를 하였단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떠난 지 이 년 만에 도착을 하였어. 딸 영이는 세죽을 기억하지 못했어. 한국말도 다 잊고 러시아말로만 이야기를 했어. 그것을 보고 세죽은 어찌나 가슴 아파했는지 몰라. 남편 헌영은 조선으로 끌려가고, 남편 친구와 도망을 위해 위장 부부 행세를 하고, 어린 딸은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공산주의고 뭐고, 이상국가 건설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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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세죽은 벤치에 앉아 함흥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가장 그리운 건 조선의 봄이었다. 조선의 봄은 따스했다. 세죽은 동네 아이들과 나물 캔다고 마구니 들고 들판과 야산을 쏘다녔다. 6년 전 함흥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뵈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산만 한 배를 부둥켜안고 성치 않은 남편과 서로를 부축하면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그래, 어여 멀리멀리 가거라라고 오른손을 휘휘 저으면서 왼손으로 옷고름을 쥐고 눈물을 찍어냈다. 올해 일흔여섯인데 생전에 어머니를 다시 뵐 수나 있을까. 남편은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 멀쩡할까 미쳤을까. 살았을까 죽었을까. 딸은 아직 그녀를 엄마로 부르지 않는다. 아이는 보육교사를 엄마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인생은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세상에 눈 떴을 때부터 세상은 위험하고 불친절했다. 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절망을 떠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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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후 모스크바 생활이 행복한 것도 아니었어. 모스크바도 이 년 전보다 더 강력해진 스탈린의 일인 독재 체제가 구축되었고, 공포정치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어. 세죽과 단야도 몸을 사려야 했고, 상황이 그들을 같이 살게 만들었어. 세죽은 단야와 혼인신고를 하였단다. 세죽은 헌영이 조선에서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있었거든.단야는 헌영의 소식을 알고도 세죽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그런 썰도 있단다.

5.

감옥에서 나온 정숙은 송봉우가 전향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끊었어. 그리고 아버지의 지원으로 태양광선 치료원을 시작했어. 물론 그 사이에 많은 시련을 겪기도 했지. 아버지 허헌도 금광사업을 시작했고, 가끔 정숙의 치료원에 들렀어. 어느날은 공산주의자 청년 최창익을 치료원에 데리고 왔는데, 정숙과 최창익은 이후 사랑을 하게 된단다. 명자의 부친상 소식에 정숙은 오랜만에 명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소문과 달리 명자는 밀정 같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제 명자는 더 이상 공산주의자는 아닌 듯 보였지. 허정숙은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열렬한 공산주의자였고,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창익과 함께 다시 조선을 빠져나가 남경에 갔어. 그리고 창익과 결혼을 하였단다.

모스크바에서는 세죽이 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어. 아들의 이름은 비탈리로 지었단다. 보육원에 있는 딸 영이와 가끔 만나지만, 딸 영이는 세죽을 불편해하는 것 같았어.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아 스탈린은 자신들의 측근들도 토사구팽하듯 숙청시켰단다.

그리고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 스파이가 있다면서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죽였어. 조선인들은 이걸 이용하여 서로 반대파에 있던 이들을 무고하기도 했는데, 이성태라는 사람이 김단야를 밀정이라고 무고했단다. 김단야는 아무도 모르게 끌려갔고, 세죽은 김단야가 죽은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어.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족에게도 벌이 내려졌어. 그래서 세죽은 갓난 아기를 데리고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게 되었단다. 추운 겨울 긴 유형 길을 비탈리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에 걸리 운명을 달리했단다. 홀로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세죽은 외롭고 무서운 유형 생활을 시작했어.

정숙과 창익은 남경에 있다가, 일본군의 남경 점령 전에 빠져 나와 무한으로 도망갔고, 다시 일본군에 쫓겨 연안에 도착했어. 당시 연안은 중국 소비에트의 수도이자 본거지였어. 그리고 많은 조선인들도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지. 정숙은 항일군정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그곳에서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의 핵심 인물들과 인연을 만들었단다. 또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도 많이 만났는데, 김산으로 더 유명한 장지락을 만나기도 했어. 연안에서 세 계절이 지나고 정숙과 창익은 실재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태항산으로 이동하였단다. 1939 7 10일이었지.

여기까지가 세 여자 1권에 대한 이야기였단다. 아빠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 여자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 아빠는 소설을 읽을 때 감정이입을 하면서 책을 읽고는 하는데 세 여자 중에 특히 세죽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더구나. 그녀의 삶이 너무 안타까웠어.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였지만, 세상은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어. 멀고 먼 유형길을 떠나 낯선 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 또한 다 지나간다고 했는데

다시 행복한 날은 올 수 있을까.


(61)
정숙이 반격에 나섰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소설이란 말이죠. 인물의 심리묘사만 제대로 해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거예요. 심리가 사회를 반영하니까. 그 안에 리얼리즘도 있고 인민성도 있어요. 소설에 그렇게 교조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톨스토이도 설 자리가 없어요. 레닌은 톨스토이를 러시아혁명의 거울이라 했지만 플레하노프는 그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귀족 작가 정도로 취급했지요. 그래서 플레하노프는 레닌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는 종국에는 분파주의밖에 못 되는 거지요. 단순한 주의주장으로 달려가버리면 소설이 아니라 팸플릿이 되는 거예요. 카라마조프의 둘째 아들 이반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우직한 건 단순하고 현명한 것은 모호하다고. 그리고 진실은 복잡한 데 숨어 있는 거라고."

(337)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인생이 깨진 거울처럼 돼버린 것이. 딸을 두고 상해로 갈 때였을까, 조선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밀항할 때였을까, 아니 영생학교에서 퇴학당할 때부터였을까. 거울이 한 번 깨지고 나면 거울에 비치는 모든 것은 갈라지고 어긋날 수밖에 없다. 단야도 마찬가지였다. 이 풍운아에겐 아내도 가정도 바람이고 구름이다. 줄잡아 열 군데 학교를 전전하던 다혈질의 학생이 고향 집 아내에게 무슨 정이 있었겠으며 명자와는 결국 아내냐 애인이냐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제는 친구의 아내를 맞이했으니 운명이 그에게 행복한 남편이 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죽은 단야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단야처럼 유쾌하고 낙관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결심은 효과가 있었다. 마음을 가볍게 띄워 올리자 자주 웃음이 터졌다.

(394-395)
"조선에 있을 때는 사회가 미성숙하고 여건이 열악하다 보니 최선의 인간이라는 공산주의자들조차 쓸데없는 파벌투쟁에 힘을 낭비하고 있구나 했어요. 연안은 물론 많이 달랐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 아닌가 싶어요. 당이 전투력을 유지하려면 때로 숙당작업이 불가피하겠지요. 한데 온갖 개인감정과 파벌적 음모가 끼어들면서 활동가들이 개죽음한단 말이지요. 그걸 피할 수 없는 게 인간이라면 인간성이란 원칙적으로 진화가 불가능한 걸까요? 혁명 과정의 문제이고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소련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395)
창익은 읽은 책을 접어 탁자 위에 놓고 침상으로 왔다.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 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이상주의라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런 이상주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버렸소. 정치란 양의 얼굴을 한 늑대요. 어떤 정치에도 최선은 없소. 진보는 상대적인 것이고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것뿐이오. 마르크시즘이 봉건제보다 낫고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니까. 끼니도 해결 못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아편을 강제로 떠먹인 것이 자본주의요, 그 자본의 나갈 길을 개척하는 게 제국주의 총칼 아니오? 부르주아 정치라는 게 뭐요? 자본가들과 지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요. 장개석이 지금 하는 짓이 그것 아니오? 지주 자본가들이 장개석군대를 먹여 살리고 있잖소? 장개석 일파는 중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더라도 공산정부의 토지개혁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오. 장개석은 끊임없이 일본하고 뒷거래하고 있소. 아마 서안사변 없었으면 일본에 황하 이북을 내줬을 거요. 중국을 반토막 내서 그 반쪽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심보요. 그런 장개석에 비해 모택동은 단연 우월하오. 정치에 최선은 없소. 차선을 선택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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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1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1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권김현영 님 강연을 통해서 ‘허정숙’이라는 분을 처음 알았어요. 권김현영 님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허정숙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허정숙의 삶과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 있는지 찾고 있는 중입니다. <세 여자> 이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bookholic 2018-04-21 22:1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허정숙이 광복 이후 북한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남북 관계가 더욱 좋아지면 허정숙과 같은 북한에서 활동한 이들에 대한 저술도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오.^^
 
신해철 : In Memory of 申海澈 1968-2014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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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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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그가 좋았다.

SF, 판타지를 좋아한 대한민국의 음악 청년.

그의 집요한 광기와 좌충우돌의 불화,

어떨 땐 해학적이기까지 한 허세와 그 뒷면의 대책 없는 섬세함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분만한 가장 모순적인 열정을 지닌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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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

아빠 세대면 신해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신해철을 싫어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 신해철은 음악과 말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아빠 또한 그의 음악에 열광을 했고, 그의 말에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았고, 그의 생각과 영혼을 존경했단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지금도 그는 아빠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만,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던 무한궤도라는 그룹을 통해서야. 그들의 시작은 너무나 강렬했으며, 그 강렬함의 여운은 아직도 진동하고 있는 듯 해.

음악평론가로 유명한 강헌이 신해철에 대한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에 아빠는 출간일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이 책을 쓰신 강헌이라는 분도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이거든강헌이 음악평론가로써 신해철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끈끈하고 찐~~한 인연이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신해철이 허망하게 세상을 등지기 얼마 전에도 그들은 신해철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에 대해 계획하기도 했었대. 강헌은 신해철이 죽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일필휘지로 긴 추모사를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해. 당시 신해철의 유고집이 나오기로 되어 있어서, 이 책은 3년 뒤로 출간을 미루었다가 올 봄에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강헌은 1996년에 영화 <정글스토리>를 제작하고 있었대. , 정글스토리이 영화, 아빠도 기억하고 있어. 윤도현이 신인 시절에 주연을 했던 그 영화록커가 주인공이었던 그 영화그 영화의 제작을 강헌이 했구나강헌은 음악감독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신해철에게 부탁을 했는데 한치 망설임 없이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는구나. 1996년이면 이미 신해철은 일류스타였는데, 돈도 얼마 주지 못하는 음악감독을 흔쾌히 하겠다고 했대. 비록 영화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신해철은 이 영화를 통해 영화음악감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했던 것이야. 이후에도 두어 편의 영화의 음악감독을 했었다고 하는구나. 아빠도 처음 알게 될 사실이란다.

그리고 강헌은 또 한번 신해철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대. 그것은 바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설. 그 전까지 신해철은 정치와 담을 쌓고 음악에만 충실했는데, 이 찬조연설을 함으로써, 논객으로써의 재능도 보여주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가 직접 쓴 찬조연설은 명연설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어. 이 책에도 그의 찬조연설의 일부를 실어서 아빠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는데, 지금 읽어봐도 감동이구나. 신해철은 찬조연설로 끝난 것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거리 유세까지 함께 했다는구나. 한번 책임을 지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의리파 신해철.  멋지구나.

그런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까지 이어져서 추모앨범 <노무현을 위한 레퀘엠> 프로듀싱을 강헌과 함께 했단다. 이 앨범은 아빠도 가지고 있어 다시 한번 꺼내봤어.그 앨범에는 신해철의 사진도 들어 있었는데, 그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뭉클해지는구나.


1.

이제 본격적으로 신해철, 그의 음악과 삶과 영혼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앞서 이야기했던 1988, 이보다 화려할 수 없는 데뷔. 몇 해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당시 장면을 보여 주었는데, 드라마의 등장인물이 무한궤도를 보고 놀랜 반응이 바로 당시 무한궤도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었을 거야. 다시 그 화면 영상을 찾아보니, 풋풋한 신해철의 모습에 또한번 옛추억 속에 빠져들게 되는구나.


사실 그보다 먼저 1988년 강변가요제에도 출전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본선에 진출하지는 못했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하지 못해서, ‘그대에게라는 곡도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 몰래,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을 사서 이불 속에서 하룻밤에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최고의 히트곡이 만들어진 그대에게는 정말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요즘도 응원가 일순위로 뽑고 있고, 각종 경연대회에서 불리고 있는 그대에게’… 이제는 세대를 뛰어넘어 너희들까지 좋아하게 되었잖아.^^

그룹사운드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는 것이 드문 일이었는데, 노래가 워낙 좋다 보니 대상을 탔을 테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사람이 그룹사운드 출신 영원한 가왕 조용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구나. 그렇게 조용필과 신해철이 인연을 맺고 나서 이후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대.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탔으니, 이제 본격적인 활동을 해야 했으나, 아마추어 그룹의 데뷔 앨범을 만들어주려는 이들이 많이 없었대. 기획사들이 원하는 것은 돈 잘 버는 솔로 가수였던 거야. 하지만, 신해철이 원했던 것은 그룹이었어. 그때 조용필이 도움을 주었단다. 조용필이 이끌었던 밴드 위대한 탄생의 멤버가 만든 신생기획사에서 무한궤도의 1집 앨범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준 거야. 그 신생기획사가 1990년대 우리나라 음반 시장을 이끌었던 대영AV였단다.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은 서울대 그룹 실험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 알게 된 정석원이 무한궤도에 합류하게 된단다. (정석원은 나중에 아빠가 또 엄청 좋아하게 되는 01OB를 만들게 된단다.), 역사가 만들어지던 시기였구나.

그리고 무한궤도 1…. 이 앨범에도 아빠가 정말 좋아했던 노래가 있단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많은 기획사들의 우려를 날려버리듯 무한궤도 1집은 크게 성공을 했어. 그런데, 무한궤도리는 이름을 지었을까? 그 그룹의 심오하고 멋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은 없었어. 이 책의 지은이 강헌도 직접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이 추측을 했는데, 공감이 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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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무한궤도’, 이 특이한 밴드 이름은 스무 살 음악청년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담은 야망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무한궤도는 산업혁명기 영국인 리처드 에지워스의 발명품으로 탱크나 불도저를 움직이는 캐터필러를 말한다. 즉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속적인 궤도를 연결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무한궤도를 음악적 첫걸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채택한 이유에 관해 그가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네이밍에서 표명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드는 밴드는 앞바퀴와 뒷바퀴, 그리고 가운데의 작은 바퀴들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하모니를 일구어낼 것이며, 땅이 울퉁불퉁하거나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고랑이 패어 있다고 해도 불굴의 의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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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한궤도 1집에 성공을 했지만, 1집으로 팀은 해체되었단다. 아무래도 신해철 1명의 대한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신해철은 솔로로 데뷔하면서 연이어 히트 앨범을 내면서, 특급 스타 반열에 오르게 돼그렇게 솔로로 성공했다면 성공과 돈맛에 계속 솔로를 했겠지만, 신해철의 피는 밴드를 위한 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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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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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밴드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밴드가 아닌, 밴드 구성원 모두의 밴드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 아빠도 넥스트 1집을 사서 정말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는구나. 본가에 아직 그 CD가 있을 것 같은데,  다음에 가면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신해철의 꿈과 달리 그룹 활동의 한계도 있었어. 밴드 구성의 완벽체인 4명의 멤버로 구성이 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신해철의 비중이 너무 컸던 것은 어쩔 수 없었어. 넥스트는 4개의 앨범으로 활동을 접는단다. 그 넥스트에 평가를 강헌은 이렇게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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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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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넥스트 활동을 접고 해외 유학을 떠나게 돼. 그리고 외국에서도 계속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멈추지 않아. 정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되었어.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신해철은 솔로 활동, 넥스트 활동을 다시 재개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단다. 삶을 마감하던 그 해에도 컴백 앨범을 발표했는데, A.D.D.A라는 곡을 듣고 역시 신해철이라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가 그렇게 쉽게 가버릴 줄

정말 슬프더구나.


 

3.

신해철.

그는 가수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서도 논리 정연한 말로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존경스러운 논객이기도 했어. 신해철은 87학번이야. 우리나라 1987년에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면 국가와 사회문제에 눈을 뜰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래서 그가 박노해 시인의 헌정 앨범에도 참여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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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신해철은 짧다면 짧은 생애 내내 롤러코스터 같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스스로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그 원칙은 그가 음악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한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신해철은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같은 위악의 페르소나를 유쾌하게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지녔다. 나는 그와 세 개의 트리뷰트(tribute, 헌정) 작업을 같이했다. 2001년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200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2년 노무현 추모 앨범과 공연. 그중에서 사회적 반향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업은 한국 문화사에 노동자 문학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 음반 프로젝트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자 문학도였던 나와 내 동년배 사람들에게 <노동의 새벽>은 시인이자 혁명가를 자처한 박노해에 대한 입장 차이와 관계없이 충격적인 의미를 담은 예술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집이 (출간되고 20년을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노동의 새벽>은 단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4년 봄, 사상 최초로 시집 헌정 음반을 기획했다. 하지만 제작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프로듀서가 없었다. 나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흐름에서 그저 운동권 가요의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하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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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논객으로써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뜻하는 바를 주장했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기도 했어. 동성동본의 결혼이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그것이 불법이던 시절에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강력히 주장하였고,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로도 만들었단다. 그렇게 신해철은 노래하는 지식인으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었어. 청소년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이야기해주는 멘토 역할도 해주고

아무리 몇 번씩 생각을 해보아도 그의 부재는 우리 사회의 큰 손해구나. 촛불시위를 한창이었을 때 그가 살아 있었다면 함께 했을 것이고, 정권이 바뀌어 새로운 대한민국이 되어가는 모습을 함께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구나. 부디, 저 하늘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님과 함께 만나 바뀐 대한민국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으면 좋겠구나.

이 편지를 쓰면서도 신해철의 노래를 들으면서 쓰고 있어. 가사를 가만히 들어보니, 가사 하나하나에도 깊은 뜻들이 담긴 것들이 많구나..

…. ...

(18)
신해철에 관해서는 예술가로서의 삶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논리와 행동으로 참여한 논객, 혹은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입은 저 멀리 식민지 시대 이후로 근대 한국에서 대중예술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금기였다. 이들은 탈정치화의 영역에서 대중을 웃기고 울려 위안하는 대가로 인기와 부를 누리는 예외적 시민권자였다.

(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120)
신해철은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갈파하는 대신 그동안 수없이 불러온 사랑 노래의 문법을 계승해 표현함으로써 이 곡의 수용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러나 신해철은 당사자가 당하는 고통의 선연함을 놓치지 않았으며, 바로 이 선연함의 무늬가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매너리즘에 빠진 천편일률적 여타 발라드와 구별시킨다.

(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178)
계간지 <상상>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연예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을 이렇게 밝혔다.
"어차피 너희 연예인들은 인기가 없으며 죽는 것 아니냐. 저는 연예인이라는 말 자체를 소름 끼치도록 싫어해요. 인기를 먹고살던 시대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상업적으로 음악을 판매할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는 예술이 없었는가 생각을 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원시인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팔려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기 이전에 음악을 하자는 거죠."

(180-1)
서태지와 비교할 때 신해철의 애티튜드는 더 확연히 구별된다. 서태지가 철저한 은둔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면(바로 이 때문에 이지아 스캔들의 역풍을 심하게 맞았지만), 신해철은 야동을 히히덕거리며 보는 것을 숨기지 않는 그러나 똑똑하고 명석한 머리로 공부도 잘하는 왕수다쟁이 이웃집 형 혹은 오빠 같은 애티튜드를 견지했다. 그에겐 ‘마왕’이라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별칭처럼 ‘교주’스러운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동시에 겸손함과 솔직함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황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과격한 것 같지만 근거가 선명한 논지를 비속어를 동반하고 쉽고 재미있는 구어체로 풀어내는 수사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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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4-18 0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1988년 MBC 대학가요제 참가번호 16번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준 충격이 생생하게 기억나네요... 당시 온 가족이 함께 보고 있었는데, 노래가 끝난 후 잠시 조용했었지요.. 한참 후 아버지께서 ˝이 노래는 대중성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벌써 30년 전이네요 ^^:)

bookholic 2018-04-19 15:10   좋아요 2 | URL
그러네요. 30년이 휙~~~
아버님께서 음악적 센스가...^^

2018-04-18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