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마라톤 행렬 중 어딘가에 속해 있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모두의 틈에 섞여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슬프지 않다는 것이, 가끔은 담담히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37)

시계를 보려고 휴대폰을 들자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발그레한 얼굴과 풀린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웃음은 뇌를 춤추게 한단다. 가짜 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일단 웃기만 하면 뇌는 도파민이니 뭐니 하는 좋은 호르몬을 생산한단다.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 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49)

꼭 이 강의실의 의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의자의 마법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권위와 힘을 가진 줄 착각하는 마법에 걸리게 되죠. 그리고 수없이 깔린 의자에 앉으면 힘없는 대중이 되어 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법에 걸립니다. 의자는 의자일 뿐이라는 걸 다들 까먹어버린단 소리예요.”

(84)

대기업이 주도하는 예술 말고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었어요. 다양한 것, 작아도 가치 있는 기획이요. 비주류라는 이유로 예술성 높다는 딱지 붙여 별책부록처럼 끼워 파는 것 말고, 작더라도 그 자체로 인정받는 문화와 콘텐츠, 소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위로하는 예술과 문화를 고민하고 제공하고 싶었죠. 그래서 빚내서 공부하고 작은 기획사도 몇 군데 거쳤어요. 그러다 한계를 느꼈지요.”

(86-87)

놀아보고 싶어요. 세상은 경직돼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91)

억울하건 화가 나건, 사람들은 세상에 비일비재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꾸역꾸역 잘도 잊어버렸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잊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니, 살아지지 않는다.

(102)

말했잖아, 보수화된다고. 그리고 학원 돌리는 거 아니면 답 없어. 그게 꼭 공부 때문이 아니라, 엄마가 쉬려면 애들은 학원을 다녀야 되는 거더라구. 나한테 유일한 소통창구가 지역 엄마 커뮤니티인데 거기 드나들면서 나만 독야청청하기 생각보다 쉽지 않다. 혼자 튀면 엄마들 사이에서 특이하다고 따 당할 준비해야 돼. 엄마들 따가 얼마나 교묘하고 은밀하고 무서운지 모르지? 그게 나만 당하면 상관없는데 애의 교우관계, 나아가서 유치원, 학교생활까지 영향 미친다. .너 이게 그냥 빈말 같고 다큐에서 나오는 별난 얘기 같지. 제삼자가 들으면 우리나라 미쳤다고 하는데, 그냥 그 안에서 직접 하루하루 겪으면 그렇게 드라마틱한 일도 아니더라.”

(129)

우리는 배금주의와 세습적 행정으로 악명 높은 목사가 있는 교회에 가서 그 목사가 복도를 지나칠 때 목탁을 두들기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기도 했고, 장애인이라고 손님을 쫓아낸 힙한 레스토랑에 넝마 같은 옷을 입고 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체불한 대형 마트에서 지점장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지불하라라고 쓰여 있는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춤을 추며 짧은 노래를 부른 뒤 일 분 만에 사라지기도 했다.

(141)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김 부장이 정신을 차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점점 작아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광장을 메웠을 패기 어린 젊은이가 그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상상해봤다. 그러나 둥글게 허물어진 어깨 안에서 그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늙어버린 시민이 멀어져가고 있을 뿐이었다.

(169)

그래서 이젠 편안해지고 싶은 것뿐이에요. 꿈 같은 거, 하고 싶은 거 따위 생각할 필요 없이 남한테 치이지나 말고 하루하루 편안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는 말이 뭔 줄 알아요? 치열하다는 말. 치열하게 살라는 말. 치열한 거 지겨워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나름. 그런데도 이렇다구요. 치열했는데도 이 나이가 되도록 이래요. 그러면 이제 좀 그만 치열해도 되잖아요.”

(175-176)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담아놓은 채 화살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는 거요. 이렇게 돼버린 지 참 오래됐어요. 나 스스로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참 우습네요. 그럴 주제도 안 되면서 혼자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고 있었어요.”

(179-180)

아마 그 고민은 죽을 때까지 하게 될 거예요. 백 살이 될 때까지 같은 생각할걸요. 외롭다고,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괴롭고 끔찍하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거는요,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질문을 외면하죠. 마주하면 괴로운 데다 답도 없고, 의심하고 탐구하는 것만 반복이니까. 산다는 건 결국 존대를 의심하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에요. 스스로의 존재를 의심하는 게 얼마나 드물고 고통스러운지 알아가는……”

(187)

어쨌든 그 일은 내게 꽤 큰 교훈을 남겼다. 속내를 감추지 않고 단지 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거.

(219)

가진 게 없어도 모든 걸 그만둬야 할 때가 온다. 모든 것을 소거하고 오직 나 홀로인 시간으로 침잠할 시기가, 청춘의 배부른 핑계라 험담하는 이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랬다.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그런 혼자 말고, 진짜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유일한 핑계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때가 온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게 지금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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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왜 어려운가. 쓰기 싫기 때문이다. 쓰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뇌는 예측 불가하고 모호한 것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위험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안전 욕구가 본능적으로 있다. 그런데 글쓰기야말로 정체를 알 수 없다. 정답이 없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모호한 대상이다. 여기에다 끝까지 못 쓸까봐 불안하고, 못 썼다는 소릴 들을까봐 또 불안하다. 결국 피하고 본다.

(47-48)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습관에서 나뉜다. 프로는 아리송한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새로운 생각이 나거나 좋은 문장을 만나면 메모하고,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는 유심한 관찰한다. 반면 아마추어에게는 이런 습관이 없다. 프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쓰는 습관이 있고, 아마추어는 없다.

(48)

글 잘 쓰는 비결을 말하라면 나는 ‘3을 꼽는다. 학습, 연습, 습관이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습관이다. 단순 무식하게 반복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글쓰기 트랙 이에 자신을 올려놓고 글쓰기를 일상의 일부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서도 콩나물은 자란다.

(80)

생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말해봐야 한다. 그러면 들으면서도 생각이 난다. 누구나 남의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서 상대 말을 끊고 자기 생각을 말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말하는 것 못지않게 상대의 말을 많이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물고기가 잡힌다. 어찌 보면 말하는 것은 내 물고기를 나눠주는 행위이고, 듣는 것은 남의 물고기를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101)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우선 글 쓰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내가 찾은 방법이 있다. 글과 함께 노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써야 한다. 학창 시절을 생각해보면 공부할 때가 가장 마음 편했다. 수업 빼먹고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다시 햇빛 아래 섰을 때 얼마나 안도했던가. 궤도를 이탈해 우주를 유영하다 지구에 안착한 기분. 글도 쓰기 전보다 쓰고 있을 때가 마음이 편안하다. 책상 앞에 앉기 전 망설일 때가 더 힘든 법. 마치 겨울 바다에 뛰어들까 말까 바닷가를 서성일 때처럼. 막상 물에 들어가면 안온하다.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사람은 늘 글쓰기 전 상태이고 글쓰기가 항상 힘들다.

(199)

글을 쓴다는 것은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이다. 살아 있는 것만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죽은 것은 그저 떠내려간다. 깨어 있는 사람은 기억을 거슬러 글을 쓴다. 기억은 또한 죽은 것도 살려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은 무덤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묻혔으니 내가 죽지 않는 한 그들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고. 인생에서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글로 쓴 추억만 남는다.

(320)

삶과 글쓰기는 닮았다. 나는 매일 아침 할 일을 생각한다. 중요도 순으로 죽 열거한다. 하루 동안 할 일을 한다. 그리고 한 일에 관해 정리하고 평가한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글을 쓸 때도 생각을 떠올린다. 덩어리 짓고 순서 정하는 것으로 생각을 구성한다. 쓰고 나서 이리저리 고친다. 그렇게 한 장 두 장이 모이면 한 권의 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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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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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얼마 전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소설, 디 마이너스. 그 소설의 지은이 손아람이 쓴 또 다른 소설이자 그의 대표작으로 부르며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소수의견을 읽었단다. 이번 소설도 너무 좋았단다. 올해 아빠가 새로 알게 된 우리나라 작가들이 몇 분 계신데, 첫 번째 손가락으로 뽑고 싶을 만큼 읽는 소설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구나. 지은이가 한때 사법고시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미학과 출신의 작가가 이 많은 법정 용어와 법원 시스템에서 이렇게 잘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지은이는 정말 한때 사법고시를 준비했었을까? 궁금하더구나^^

이 소설이 처음 나온 것은 2010년이고 아빠가 읽은 것은 2015년에 나온 중판이란다. 초판이 나온 2010. MB 정권 시절로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기였어.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2009년 있었던 용산 참사가 생각이 난단다. , 가슴 아픈 사건이었는데, 어느덧 10년이 거의 다 되었구나.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사람들이 죽고, 감옥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면서, MB에 이어 박근혜까지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했단다. 그리고 또다시 더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야, 이런 일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고, 뒤늦게 큰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깨달은 것 같아 안타깝더구나.

이 소설은 재미뿐만 아니라, 권력을 잘못 뽑으면, 이 사회가 몰상식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교훈도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1.

, 그러면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줄게. 주인공 윤 변호사. 아빠가 주인공의 이름을 놓쳤던 것인지, 아니면 주인공의 이름이 언급 안되었던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냥 윤 변호사로 이야기할게. 지방의 법대를 나와서 대학 졸업 후 변변치 못한 건축회사를 다니다가 뒤늦게 사법고시를 공부해서 36살이 되어서야 사법고시를 패스를 해서 국선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이가 바로 윤 변호사야.

그러다가 우연찮게 아현동 뉴타운 시위 현장에서 경찰을 죽이게 된 박재호씨의 변호를 맡게 되었단다. 박재호를 만나 봤는데 박재호씨는 자신은 아들을 살리려다가 어쩔 수 없이 경찰을 죽였다고 했어. 열여섯밖에 안된 박재호의 아들이 시위 현장에서 죽었거든. 하지만, 검찰은 박재호의 주장과 달리 박재호씨의 아들을 죽인 사람은 경찰이 아니라, 용역업체 사람인 김수만씨라고 했어. 윤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되자, 이준형이라는 기자가 만나러 왔어. 이름은 남자 이름이었지만 여자였어. 이준형 기자는 현장에서 촬영한 CCTV 자료를 주었고,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직접 취재한 내용을 정리해서 주었어. 윤 변호사도 조사를 하면 할수록 박재호씨의 아들 박신우는 경찰이 폭행에 의해 죽었고, 박재호씨는 아들을 살리려다가 경찰을 공격해서 경찰이 죽은 것으로 보였어.

그렇다면 왜 용역업체 김수만은 자신이 죽였다는 하는 것일까. 경찰 수사 기록은 열람이 불과했고, 사건 현장은 사건이 일어난 즉시 피한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청소를 하였어. 증거를 없었고, 수사 기록도 볼 수 없었지. 윤변호사는 같이 일하는, 대학부터 알고 지내던, 형의 친구 장대석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어. 그리고 서울대 젊은 법대 교수 이주민 교수도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이 셋은금요모임을 갖고 같이 변론을 준비했어. 이들은 이 사건을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하기로 했단다. 그래서 윤변호사는 국선변호사를 그만두었어. 국가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

그들은 변론 준비에 이곳저곳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났어. 당시 야당 국회의원인 박경철의원도 관련 자료를 주면서 도와주었어. 물론 그는 국회의원으로써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겠지. 김수만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어. 자신이 박재호씨 아들 박신우를 죽였다고 하면서 뭔가 숨기는 듯했어. 그들에게 협조도 하지 않으려고 했어. 병원에 가서 사건 당일 일했던 레지던트를 만나기도 하고, 경찰들도 만나 조그마한 단서나 그들이 숨기는 것을 알아내려고 했어. 이 사건은 점점 사회의 이슈를 받으면서, 금요모임 멤버들은 이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하기로 했어. 검사 황재덕은 판을 키우는 것을 싫어했지만 반대할 명분이 없었어. 그래서 기소검사를 따로 데리고 왔는데, 미모의 젊은 검사인 이민정이라는 사람이었어. 외모로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의 인심을 사겠다는 뻔한 작전이었지.

이 사건이 많은 주목을 받게 되자, 대형 법률사무소의 유명한 변호사 이광철이 찾아왔어.. 이 재판으로 자신의 법무법인 광고나 하겠다는 심뽀를 보여 윤변호사는 자신이 끝까지 맡겠다고 했으나, 처음 윤변호사에게 의뢰를 했던 시민단체 민생살림의 사무국장도 이광철 변호사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박재호씨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어. 열 받은 윤변호사는 그만둬버렸단다.

 

2.

그리고 어떤 조폭 보스의 살인 미수 사건 변론을 해주면서 큰 돈을 버는 사설 변호사가 되었어.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사무국장이 다시 찾아왔어. 박재호씨가 미안하다며 다시 윤변호사가 맡아달라면서 말이야. 그렇게 윤 변호사는 다시는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다시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단다. 윤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 이주민 교수, 이준형 기자는 꼼꼼한 변론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박신우를 죽였다고 하는 김수만이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사라져버렸어. 가장 강력한 증인이라고 생각했던 변호인측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윤변호사가 얼마 전에 변호해서 무죄승소를 한 조폭의 보스로부터 연락이 왔어. 자신이 김수만을 데리고 있다고그 바닥에서 김수만과 조폭의 보스는 알고 있던 사이였던 거야. 조폭의 보스는 예전에 승소에 대한 답례로 김수만을 데리고 왔어. 김수만은 진실을 털어놓았어. 검사 홍재덕이 와서 회유했다고 했어. 박신우를 죽었다고 이야기하면 그의 조직을 봐주기로 하고, 재판결과도 집행유예로 해준다고 말이야. 그런데 나중에 검찰은 약속과 달리 김수만의 몸담고 있던 조직을 들쑤셔 놓았다고 했어. 그래서 김수만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돕겠다고 했어. 그것만이 자신도 무죄가 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 홍재덕이 회유하며 이야기한 것을 한 녹음파일도 있었어. 같이 변론 준비하던 이준형 기자가 이 녹음파일의 존재를 기사로 터트리는 바람에, 세상은 난리가 났지만, 윤변호사는 너무 일찍 공개한 것에 대해 이준형 기사와 심함 말다툼을 하기도 했어. 검찰은 즉각 반응했어. 검찰은 갑자기 윤변호사 사무실을 압수수색을 했어. 다른 핑계를 대고 했지만, 그것은 홍재덕의 녹음파일을 찾기 위함이었지. 그리고 녹음파일은 홍재덕에게 전달되어 바로 폐기되었단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절 녹음파일이 한 개만 있었겠니. 윤 변호사와 장대석변호사는 공판 마지막날에 그 증거물을 재판장에서 틀었단다.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고, 그 목소리는 검사 자리에 있던 홍재덕이었어. 그것으로 재판은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최후변론이 끝나고 배심원의 판정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단다. 그리고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박재호의 무죄판결로 결정했어. 박재호의 행위는 아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이 행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나라 배심원들의 판정은 단지 참고용이야. 판사가 최종 결정을 하는 거야. 국민참여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배심원의 판정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우리나라 판사들은 아주 쉽게 무시하는 것 같더구나.

이 소설에서도 판사는 배심원들의 판정을 뒤집고 박재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3년 형을 선고했단다. 그렇게 재판을 끝냈어. 현실에서도 국민참여재판을 하면서 배심원들은 무죄 판결을 했는데, 판사들이 배심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경우도 여럿 있단다. 여러 이성적인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서 내린 판결보다 그들보다 나은 것이라면 법 공부한 것 밖에 없는 한 사람의 판결로 죄를 결정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구나.

..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났단다. , 앞으로는 다시 그런 이들이 정권을 잡는 일이 없길 바래. 그래서 상식적인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그런 나라 말이야.

 

PS:

책의 첫 문장 : 사체는 은평구 뉴타운의 기초공사 현장에서 발견됐다.

책의 끝 문장 : 새들은 날의 오름을 노래하고 바람은 보아야 할 시절을 이르되, 지구의 땅과 물 위 사람들을 제하고는 결코 이름을 빌리지는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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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
조정래.조재면 지음 / 해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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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조정래님의 책을 읽었단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아빠가 조정래님을 좋아해서 조정래님의 태백산맥 10권을 필사까지 했었잖아. 단지 태백산맥 10권 필사를 하면 조정래님을 만나 뵐 수 있다고 해서 말이야. 그렇게 좋아하는 분의 책이니 빠짐없이 읽으려고 한단다. 이번에 읽은 책은 그동안 조정래님의 책들과 성격이 다른 책이란다. 혼자 쓰신 것이 아니라 공동 저자였어. 그리고 그 공동 저자는 다름 아닌 조정래님의 손자인, 이제 고등학생인 조재면군이었단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한가지 주제를 놓고 논술을 주고 받는 내용이란다. 어떤 주제에 대해 손자가 글을 쓰면 할아버지가 그 글을 수정해주고, 그리고 할아버지 자신도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야. 그런데 그 글이 원고지 서너 장이 아니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수십 장씩 쓰고 있단다. 조정래님이야 워낙 글 잘 쓰는 작가이니 그렇다 쳐도, 조재면군은 글 내용과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고등학생이 저렇게 장문을 글을 쓸 수 있다니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태어나서 보니 할아버지가 당대 최고의 작가라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직접 논술 지도를 해주신다? 색다른 기분이 들면서 자부심도 클 것 같구나. 조정래님께서는 손자뿐만 아니라 아들이 젊었을 때도 글쓰기를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예전에 다른 책에서 소설가로 살아가자면 가난하게 될 것 같아서, 아이도 한 명만 낳았다고 글을 본 적이 있었어. 그 한 명뿐인 아들이 군대에 다녀와서 구타로 인해 목을 크게 다쳤다고 했어. 그리고 당시 태백산맥은 금서로 묶여 있어서 조정래의 아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빨갱이 아들이라고 더 맞았다는 거야. 그런 아들에게 미안함이 컸던 조정래님은 아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직접 하셨다고 하는구나. 신문 사설을 통한 글쓰기였다고 했어. 군대까지 갔다 온 나이에 그런 글쓰기를 공부를 한 조정래님의 아드님도 대단하신 것 같구나.

 

 

1.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단다. 국정 역사 교과서, 가습기 살균제 사태, 청소년 PC 게임 시간 제한, 남녀 성평등, 비만 문제. 모두 최근에 이슈가 되었거나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들이란다. 각 주제에 먼저 손자 조재면군이 글을 썼단다. 조재면군의 글들은 고등학생의 글 답지 않게 논리정연 하더구나. 하지만, 그런 느낌 들었어. 일반적이다.. , 이런 느낌. 그러니까, 인터넷 뉴스 같은 데서 많이 본 글들을 논리적으로 잘 정리했다는 느낌이 들었어. 간간이 개인의 생각도 적긴 했지만 말이야.

그에 비해 할아버지 조정래님의 글들은 확실히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포함된 글처럼 보였단다. 그리고 조정래님의 글이 더 읽기 편했어. 이오덕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말글씨에 더 가까운 글들이었단다.

..

이 책에서는 조정래님이 손자의 글을 퇴고한 것을 캡처해서 실어 놓았단다. 꼼꼼하고 자세한 퇴고.. 손자의 글을 퇴고하면서 할아버지 조정래님은 뿌듯함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렇게 글을 주고 받는 것은 손자 조재면군이 고3이 되어 입시 준비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하는구나. 할아버지와 나눈 이 글쓰기나 나중에 많은 도움이 되겠지?

2.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제목에대화라고 써 있어서 그야말로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주 앉아서 나누는 대화일 거라 생각했어. 할아버지인 조정래님이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그런 대화이런 고급 논설문인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그러면서 아빠는 이런 논술지도를 해주지 못할 텐데너희들이 이 다음에 고등학생이 되면 결국 논술학원에 맡겨야 하나? 씁쓸한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한동안 했던 편지노트 주고 받기를 다시 해봤으면 좋겠구나. 너희들이 이제 막 글을 배웠을 때, 노트에 편지를 주고 받았었는데, 요즘은 뜸해졌잖아. 그것을 다시 해봤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조정래님처럼 글을 고쳐줄 수는 없지만, 글을 쓰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오늘은 독서편지를 짧게 마치고, 편지노트에 손편지를 오랜만에 써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딸도 없이 하나인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해 복학을 앞두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 한밤중에 야식을 먹어야 잠이 오고, 숨이 차오르도록 많이 먹고는 소화제를 먹은 우리들을 보면서 돼지도 개도 소도 말도 고양이도 그리고 날아가는 새들도 손가락질하며 깔깔깔 웃고 있다..


(16)
세 가지 신문 중에서 한 가지 사설을 골라낸다. 아들과 나란히 앉아 내가 먼저 사설의 제목을 읽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런 방향과 저런 방향에서 볼 수 있다고 두 가지 시각을 제시한다. 아울러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전개하는 이야기의 방법을 간추려 들려준다. 그런 다음에 내가 사설을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 나간다. 그러면서 문장의 의미를 설명하고, 논리 전개를 짚어 주고, 기승전결을 구분하고, 확인시킨다. 그리고 논리 전개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목 대목에서 예를 들어 가며 설명해 준다. 그 공부는 약 30분 정도 걸린다. 사설 한 가지를 읽는 데 3~4분 걸리니까 그 열 배의 시간이 들어간다.

(55-56)
그러나 그의 무능과 고집불통의 독단은 최순실과의 국정 농단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의 잘못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건을 그렇게 무감각하고 무책임하게 대응해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대해 절망케 만들었고, 국민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개성공단을 폐쇄해 버려 남북 관계를 냉전 시대보다 더 얼어붙은 파탄 상태로 몰아넣었고, 국민 그 누구도 모르게 결정된 사드 배치로 중국의 경제 보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나라 경제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만들었고,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사전에 단 한마디 의논도 없이 돈 몇 푼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고 발표해 버려 민족 자존심을 훼손하는 새로운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이 사건들은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나라를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83)
이제 전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 경제 이념은 자본주의뿐이다. 그것은 앞으로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는 속담을 낳게 한 인간들은 돈을 더욱 살아 있는 신으로 떠받들게 될 것이다. 그런 살벌한 시대에 이윤 추구를 본질로 하는 기업들에게 ‘기업 윤리’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참 부질없는 잠꼬대일지도 모른다. 교수님들도 변호사님들도 다 그 지경인 판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갈데없이 불의한 세력들이 합작한 살인극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태가 또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쉬 떼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탐욕이란 인간의 힘으로 제거할 수 없는 본성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정직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자가 온순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돈 앞에서 양심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하이에나가 고깃덩이 앞에서 얌전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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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4 13: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 10권을 필사하셨다구요? 우아....진짜 북홀릭님 대봑입니다 ^^

bookholic 2018-12-24 15:26   좋아요 1 | URL
에고고 부끄럽습니다^^ 제가 태백산맥 필사하고 나서 알라딘 서재에 포스팅한 것이 카알벨루치님과 친구맺기 전이었네요~~~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십시오~~^^

카알벨루치 2018-12-24 17:03   좋아요 1 | URL
참 메리크리스마스 하소서! 조정래 <태백산맥>이참에 읽어버릴까 내 맘에 불을 지펴주는 북홀릭님 감사합니다

bookholic 2018-12-24 17:21   좋아요 1 | URL
읽는 것보다 카알벨루치님의 독창적이고도 범우주적인 글씨체로 <태백산맥> 필사를 해주시면 엄청날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17:35   좋아요 1 | URL
북홀릭님 표현은 정말 아방가르드하시네요! 필사하신분은 제가 바로 옆에 두고 있었네요 그것도 3년...내공이...제가 <필사>책을 읽고 독서를 시작했었는데 태백산맥필사를 조정래작가가 며느리한테 시켰다고 하던데 북홀릭님도...일단 일독하는 것부터 먼저!ㅎ

붕붕툐툐 2018-12-24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 필사라뇨~ 정말 대단하셔요~ 조정래님은 만나셨어요??

bookholic 2018-12-25 1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네, 조정래 선생님을 만나뵈었습니다~^^ 즐거운 연말연시 되십시오~~~
 














(8)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우연찮게, 썩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룰도 제대로 모른 채 축구를 시작한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넓은 피치 위를 뛰어다니고, 공 다루는 섬세한 기술들을 하나둘씩 익혀가고, 팀원들끼리 호흡을 맞춰 골대를 향해 공을 착착 몰고 가는 재미에 푹 빠지며 , 사실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운동에 대한 깊고 오랜 오해 하나가 풀렸을 뿐인데 그녀들에게 축구를 시작한 이후의 시간들은 전과 다른 시간이 되었다.

(34)

이렇게 운동 효과 면에서나 대외 이미지나 일상 활용성에서 모두 애매하디 애매한 운동이면서, 결정적으로 접근성까지 낮다. 다른 운동처럼 여기저기 배울 곳이 있고 정보가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경로로 열심히 검색해 봐야 하나씩 겨우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이 그라운드로 진입하는 것을 겹겹이 막으며 철통 수비하고 있다. 축구로 입문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축구인 것이다.

(36-37)

나는 어느 날 우연히 호나우두가 스텝오버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보통 헛다리를 짚을 때는 달리는 속도가 확 줄기 마련인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수비수들을 휙휙 제치고 죽죽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저게 가능한가? 물리학적으로 말이 되나? 마지막에는 골키퍼까지 스텝오버로 제치고 골을 꽂아 넣는데, 축구가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노릇인가 어이없을 정도였다. 우아한 헛다리와 그물 안으로 감겨들어 가는 공의 궤적과 관중들의 얼굴에 역력한 감동의 흔적. 어마어마한 규모의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지만 세상이 잠시 숨을 죽인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축구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어 오랫동안 호나우두를 따라다니며 해외 축구를 찾아봤다. (새벽 중계가 대부분이어서 오랜만에 AM 김혼비가 맹활약했다.)

(43)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 생각해 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64)

이게 다 아웃사이드 드리블 때문이다. 아웃사이드 드리블은 발 바깥쪽을 이용해서 새끼발가락이 공 밑 부분에 살짝 들어가듯 차, 공을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 드리블 최고의 장점은 수비를 속일 때 아주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쪽으로 갈 것처럼 몸을 기울여서 상대 선수가 덩달아 그쪽으로 몸이 기운 틈을 타 반대쪽으로 휙 빠져나가기 좋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라면 단연 ! 골인이겠지만, 수비를 휙휙 제치며 빠져나가는 순간도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나를 축구로 확 끌어들인 장면도 호나우두의 골이 아니라 헛다리 짚기 아닌가! 로빙슛의 그날, 우리 주장이 보여 줬던 현란한 페인트 동작은 또 어떻고!

(67)

공을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어쩐지 공을 헛 찰 것 같고, , 발등, 새끼발가락, 땅을 딛고 있는 반대편 다리로 온 신경이 분산되면서 스텝이 엉키거나 힘이 지나치게 들어가 공을 이상하게 차고 만다. 인간이란 무언가를 의식하는 순간 그 의식의 대상에 필요 이상으로 파괴적인 힘을 주는 게 틀림없다.

(102-103)

오버래핑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는 수비수가 공격 지역으로 달려 나와 공격에 가담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수비수가 잠시 공격수가 되는 것이다. 실력도 활동량도 탁월한 선출들은 공격수 자리에 고정시켜 놓는 것보다 수비를 기본으로 하다가 때때로 공격에 가담하도록 하는 것이 팀 전력에 훨씬 도움이 된다. 감독님의 해맑은 전술 ;수비도 잘다고 공격도 잘하자.’가 곧 오버래핑 정신의 구현인 것이다! (물론 감독님이 그걸 의도하고 말했을 리는 절도 없다.)

(142)

그 뒤로도 생각만큼 쉽게 잠잠해지지는 않았다. 얼굴 어딘가에 도발적으로 도사리고 있는데 긴 머리에 가려져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할 상큼함과 신선함이 단발을 하는 순간 후두두둑 튀어나올 것만 같고, (하지만 긴 머리가 가리고 있던 건 단지 얼굴, 단지 그냥 얼굴뿐이었다는 슬픈 사실을 곧 마주하게 된다.) 머리 감고 빗는 시간이 줄어 편할 것 같고, (하지만 바쁜 출근 시간에 그놈의 뻗친 머리 펴느라 한참을 낑낑대고 나면 긴 머리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 또한 마주하게 된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 무게만큼 마음도 홀가분해질 것 같고, (반짝 그런 효과가 있지만 앞의 사실들을 마주하면서 점점 무거워진다.) 등등, 어쩐지 삶 구석구석에 작게 뭉쳐 가끔씩 성가신 통증을 유발하는 근육들을 단발이 산뜻하게 풀어 줄 것만 같은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해 봤자 별 거 없다는 걸 알아도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라는 알 수 없는 희망은 어찌나 잘 생기는지.

(176)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튀어나온 공을 리바운드해서 골로 연결하는 것,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바라 마지않았고, 하려고 노력했던 툭 쳐서 주워 먹기를 드디어 성공했는데, 하필 골키퍼가 나였다. 저 시나리오에서 골키퍼도 내가 되고 주워 먹는 사람도 내가 될 수 있었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반전이다. 마치 폴란드 영화 학교 2학년생이 실존주의에 대해 고민하다가 써낸 단편 영화 시나리오 같다. 살면서 내가 골을 넣는다는 것도 매우 현실성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면서 내가 자책골을 넣는다는 것은 아예 상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시에일어났다. 축구가 진짜 이렇게 전복적인 종합 예술이시다.

(210)

신체 조건상 남자 축구에 비해 힘과 속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 축구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온다 남자 축구는 뭔가 휙휙 재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면, (물론 그게 또 재미지만) 여자 축구는 상대적으로느리고 정적인 몸동작과 전개가 선수들과 공이 만들어 내는 축구의 전체적인 그림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패스 워크라든지, 오프더볼 상황에서의 움직이라든지, 역습 때의 호흡 같은 것들을 그때그때 섬세하게 읽어 내는 재미가 있다. 툭툭 주고받는 짧은 패스들이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호쾌한 슈팅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한 장 한 장 엇갈리게 섞인 트럼프 카드가 둥그렇게 만든 손 모양을 따라 폭포처럼 아래로 좌르륵 떨어지며 반듯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때처럼 살짝 황홀하고 근사한 기분이 된다.

(261)

정말 그랬다. 감독님 말이 맞았다. 좀 전에 나는 똑똑히 봤던 것이다. 내 발끝에서 튀어 오른 공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갈 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순간적으로 하얗게 빛나던 것을. 그것은 정말 하얀 달 같았다. 허공에서 공이 달이었던 그 짧은 순간, 그 달을 보면서 우리 팀 모두가 제발, 제발, 한 골만 들어가 달라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달빛처럼 은은하지만 환하게 빛나는 10 승리였다.

(264)

스토피지(Stoppage) 타임. 멈춰 있는 시간. 전광판의 시계는 멈춰 있지만 피치 위로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시간이. 앞으로 나의 축구도 그럴 것이다. 책 속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만, 그 아래로 김혼비 축구의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추가 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축구와 함께 어디서든 즐거울 것이다. 무엇보다 김혼비는 추가 시간에 강하니까.

(273)

그러다 보면 지금은 너무나 아득해서 보이지도 않는, 축구처럼 아직까지도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다른 많은 분야들에서 끊임없이 인식의 구획에 틈을 내고 틈을 넓히는 많은 사람들과 마침내 아무 구획도 없는 넓은 광장에서 만나는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초개인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그렇다 인간은 모일수록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축구공 앞에서, 특히 여자들은. 무엇보다 축구는 재미있으니까. 너무 재미있으니까. 뭐가 됐든 재미있으면 일단 된 것 아닌가. 정말이지, 이거, 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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