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요!” 인질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이군!” 나는 파트리키 귀족인데다, 율리우스 집안 출신이오. 율리우스 집안 출신이란 게 무슨 의미냐고 묻겠지, 안 그렇소? 그건 내가 아프로디테의 아들을 통해 그 여신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뜻이오. 나는 집정관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며, 나 역시 때가 되면 집정관을 지낼 거요. 나는 그저 평범한 원로원 의원이 아니라고! 시민관을 수여받았고…… 원로원에서는 발언권도 있고…… 원로원의 가운뎃줄에 앉고…… 내가 원로원 의사당에 들어가면 모든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준단 말이지. 심지어 전직 집정관과 감찰관까지도! 그런데 고작 은화 20탈렌툼? 내 몸값은 은화 50탈렌툼이오!”


(347)

하지만 키케로는 책상 표면이 안 보일 정도로 다양한 일감이 눈앞에 쌓여 있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전광석화처럼 결정을 내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은빛 혀와 금빛 목소리는 재치 넘치고 지혜로운 말을 쏟아냈고, 큼직하고 둥그스름하니 잘생긴 머리통은 사람들에게 고귀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때때로 키케로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한구석에 숨어 있던 눈부신 자아가 전면에 드러나기도 했다. 그 한 달 동안 키케로는 완전히 새로운 재판 진행방식까지 고안해냈다. 이것은 지금까지 로마의 소송 절차로는 불가능하던 일을 가능케 했다. 즉 배심원들에게 구체적이고 확실하며 산더미 같은 증거들을 아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변호인단이 피고인을 변호할 방도가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391)

저의 성향을 잘못 분류하신 건 아니에요, 외삼촌. 지금은 거기에서 벗어났으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저는 유피테르 대제관으로 지낸 시간이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 경험을 통해 강해지는 법은 물론 섬세해지는 법을 배웠고, 저의 광채를 드러냈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선 그것을 숨기는 법을 배웠어요. 돈이나 스승보다 시간이 더 소중한 아군이라는 것을 배웠고, 제 어머니께서 저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인내를 배웠고, 그 무엇도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지금도 배우는 중이에요. 외삼촌. 결코 배움을 멈추지 않았으면 해요! 저는 루쿨루스에게서,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실험해보는 방식으로 배움을 이어살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한발 물러서서 어떤 일이 벌어지나 지켜보는 거죠. 안심하세요. 외삼촌. 제가 가장 위대한 부동의 원동자로서 제일 앞자리에 서게 될 날이 올 테니까요.


(418-419)

저는 지금 제가 느끼는 것 이상의 슬픔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슬픔의 비극이죠. 우리는 늘 자신의 슬픔이 타인의 슬픔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여러분께 먼저 고백하고 싶은 점은, 제가 자신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차갑고 냉철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겠죠. 저는 한때 킨나의 딸과 이혼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명령에 불복하기로 한 거죠. 저의 개인적인 이득과 뒤따르게 될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와 이혼하라는 술라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여러분께 이미 슬픔의 비극에 대해 한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비극은, 누군가가 죽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한 번도 깨닫지 못하는 비극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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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자네한테는 적이 끊이지 않을 테니까. 복수의 여신들이 가련한 오레스테스를 늘 따라다녔듯, 질투가 자네를 늘 따라다닐걸. 질투 혹은 선망, 뭐가 됐든 남이 가진 것을 탐하는 마음. 누군가는 자네의 아름다운 용모를 선망할 것이고, 누군가는 체력을, 누군가는 훤칠한 키를, 누군가는 출생을, 누군가는 지력을 탐내겠지. 자네가 더 높이 오를수록 질투도 더 커질 거야. 자네는 어디서나 적에 둘러싸이고 친구는 없겠지. 남자건 여자건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 거야.”

카이사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 말을 들었다.


(219-220)

내 뜻을 오해하는군. 나는 지금 현실적인 공직이 아닌 야망에 대해 얘기하고 있네. 카이사르 자네는 스스로 완벽하길 원해. 자네를 불완전하게 만들 일은 어느 무엇도 일어나선 안 돼. 자네는 지금 그 소문이 부당해서 신경을 쓰는 게 아니야. 자네가 괴로운 건 그 소문이 자네의 완벽함을 손상시키기 때문이야. 적절한 시기에 모든 면에서 모든 방식으로, 완벽한 명예, 완벽한 출세, 완벽한 전력, 완벽한 명성. 그리고 자네가 스스로에게 완벽을 요구하듯 자네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완벽을 요구할 거야. 완벽에서 벗어난 자는 사정없이 내치겠지. 생득권에 대한 내 집착이 날 갉아먹었듯,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 자네를 갉아먹을 거야.”


(291)

당신 타고난 성격대로 해요. 그냥 붙잡고 해치워버려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신경쓰며 머뭇거리다간 상황이 제멋대로 돌아가기 일쑤예요. 그러니까 고민하지 말아요.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도 걱정하지 말고요. 그러다 일을 그르쳐요.”


(315-316)

두려워. 너무 두려워! 죽는 게 이렇게 두려울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 이건 숙명이야. 피할 수 없어. 곧 있으면 끝난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겠지. 나는 아무도 아니게 된다. (). 그 운명에는 고통이 없다. 꿈조차 꾸지 않는 무지(無智)의 운명. 영원한 잠. 왕관 대신 놀라의 풀잎관을 쓴 로마의 왕이었던 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사람들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유일한 불멸의 길이다.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서 기억되는 것. 나는 회고록을 거의 마쳤어. 다 쓰지 못한 분량은 겨우 한 권 정도다. 그 정도면 미래의 역사가들이 나에 대해 판단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영원히 죽이고도 남지.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회고록을 쓰지 못하고 죽었어. 나는 썼어. 그러니 내가 이길 거야. 내가 이겼어! 지금까지 내가 거둔 모든 승리 중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한 승리가 내겐 가장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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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세종 더 그레이트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조 메노스키 지음, 정윤희, 정다솜, Stella Cho 외 옮김 / 핏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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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백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하셨단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셨단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나라는 최근 문화 강국이 된 것 같구나. 전세계적으로 한류 열풍이 불고 있으니 말이야. BTS는 말할 것도 없고, 한식도 서양 사람들이 많이 찾고, 드라마와 영화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고 있잖아. 거기에 지난 겨울, 영화 <기생충>은 국의 오스카 상을 휩쓸었잖니

세상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다 보니,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진 것 같구나. 그리고 또 하나 한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많은 것 같았어. 영어나 중국어에 비해 한글이 독특하긴 하지말하는 그대로 글자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자음과 모음의 숫자가 많나….  그것도 아니고한나절만 배우면 뜻은 몰라도 읽고 쓸 수도 있다고 하는 한글. 외국 사람들이 보면 신기한 글자라고 생각할 만도 할 것 같아. 동그라미, 네모가 글자에 들어 있고 말이야. 한글을 알게 된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하나 같이 한글을 최고의 글자라고 엄지척을 한단다.

더 신기해하는 것은 그 한글을 사람이 만들었다는 사실이더구나. 어렸을 때부터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데, 보통 글자는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 오는 것이 변형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인데, 한글은 없던 글자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거니까 말이야. 물론 그 전부터 있던 글자들을 잘 수정하고 개선했다는 설도 있지만 말이야.

그런 엄청난 일을 한 세종대왕에게 반한 외국인 있었는데, 너무 만해 소설까지 쓰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 주인공은 마로 조 메노스키라는 사람이란다. 물론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TV 시리즈 <스타트렉>의 작가이자 프로듀서이자 제작자라고 하는구나. , 대단한 사람일세그는 5년 전에 처음 한글을 접하고 세종대왕을 알게 되고 세종대왕의 매력에 빠져 세종대왕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보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허구를 가미한 소설 <킹 세종 더 그레이트>를 영문판과 한글판을 출간하였다고 하는구나. 이런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하게 되어, 아빠도 그의 책을 읽어 보았어. 아빠가 <스타트렉>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스타트렉>은 몇 십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라마인데 그 드라마의 작가가 세종대왕을 존경해서 쓴 소설이라고 하니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단다.


1.

세종대왕과 한글을 다룬 우리나라 소설들은 참 많단다. 아빠도 그런 소설들을 여러 편 읽었단다. 그런데 외국 작가가 쓰는 세종대왕과 한글이라어떻게 썼을까. 얼른 책을 펴봤단다. 세종대왕이 나오고, 최만리가 나오고, 영의정 황희가 나온단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도 나온단다. 가상의 인물도 중요 역할로 나온단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진 이야기란다. 그래서 책 표면에 역사판타지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는 것 같구나. 세종대왕은 세자 시절부터 변복을 하고 궁궐 밖에 몰래 민심을 알아보려고 나갔단다. 왕이 된 이후에도 여러 번 몰래 궁밖에 나갔어. 그러면서 민심을 알게 되었고, 우리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세종대왕 시절, 명나라는 12살 어린 황제가 왕위에 올랐고, 그 어린 황제를 뒤에서 환관이 그를 조정했단다. 조선에 무리한 조공을 계속 요청을 했어. 명나라와 조선이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와 자식,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사이가 좋지 않은 그런 사이였던 시기였단다.

중국 대륙에는 명나라뿐만 아니라, 옛 칭기스칸의 옛 명성을 되찾으려는 몽골족 후예들이 평원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암암리에 명나라를 공격을 하곤 했어. 그런 몽골족에 이인자였던 에센 타이시가 칸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켰는데 성공한단다. 몽골족의 최종 목표는 명나라였지만, 배후에 조선이 늘 껄끄러운 존재였단다. 그래서 몽골족은 먼저 조선을 공격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그들의 타겟은 조선의 왕 세종이었단다. 그들의 계획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평생 세종의 암행을 도와주었던 문지기 순돌의 희생으로 실패하고 말았단다.


2.

세종의 한글 창제는 측근 적은 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 프로젝트였단다. 그 중에 왕비 소헌왕후도 있었는데, 소헌왕후는 병에 걸려 한글 창제를 보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단다. 우여곡절 끝에 한글, 즉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단다.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를 모르고 있었던 신하들은 깜짝 놀랐고, 최만리, 황희 등 많은 유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반대했단다.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다룬 책에 꼭 등장한단다. 훈민정음을 반대했다고 무조건 최만리를 나쁘게 평가하면 안되고, 정치인으로 다른 의견을 표출했다는 평가가 좀 너그러운 것이 아닌가 싶구나. 이 소설에서는 최만리가 몽골 세력을 끌어들여 세종을 암살하려고 했고, 세종은 그런 최만리를 끝까지 이해해주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단다. 그와 반대로 젊은 집현전 학자들, 예를 들어 박팽년, 신숙주, 정인지 등은 한글에 찬성을 했단다.

….

이 소설에서는 한글 창제를 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가상의 인물로 보이는 역관들인 평화와 매두가 등장한단다. 그들은 세종대왕의 비밀 임무를 때고 명나라와 만주 일대를 다니면서 언어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 왔는데,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동안 명나라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작전을 펴다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단다. 훈민정음 창제에는 여러 이름 모를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지은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

훈민정음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대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단다. 궁궐 안의 금속활자 인쇄소에 화재가 발생하는 사건이 발생했어. 이런 걸 예상이라도 하듯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 제작을 궁궐 밖 목판인쇄소에서 진행했어. 그리고 그 훈민정음 해례를 일본과 중국에 전달해 주었고, 당시 명나라를 통해 들어와 있던 신부에 의해 유럽까지 이 소식을 전달하게 된단다. 지은이가 우주를 다루는 드라마의 작가라서 그런지, 스케일이 큰 것 같구나.

대충 이런 스토리로 이야기를 그려진단다. 세종대왕은 못하는 것이 없는 천재형 왕으로 나오고, 한글은 배우기도 쉽고 쓰기도 쉬운 완벽한 글자로 소개되고 있단다. 이 책이 영어로도 미국에서 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까 하는 궁금증보다는 적은 숫자라도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세종대왕과 한글,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점이 궁금하더구나.

너무 기대를 했었나. 아주 재미있지는 않았단다. 그래서 조 메노스키가 시나리오에 참여한 <스타트렉>도 아빠한테는 재미가 없나? 이런 생각마저 들었단다. 그래도 미국의 유명한 작가가 세종대왕에 그렇게 푹 빠져서 책까지 썼다는 것이 신기하구나. 그리고 앞으로 이 소설을 바탕으로 글로벌 영상화도 예정이라고 하니, 어떻게 그려질지도 궁금하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싱그러운 초록 잎들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듯 떨어진다.

책의 끝 문장 : 전하, 부디 돌아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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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13)

존엄은 다르다. 존엄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면서도 개인의 공적 생활의 모든 규정 요인들로 확장된다. 정의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표현이 있는 것이다. 존엄은한 사람의 장엄함영광의 정도라고 할까? 존엄은 개인이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존엄은 개인의 자존감, 온전함, , 지성, 행동, 능력, 지식, 지위, 사람으로서의 가치의 총합이다존엄은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기에, 사람이 죽음에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이것이 가장 올바른 정의다. 존엄은 사람의 물리적 존재의 멸실에 대한 승리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바로는 폼페이우스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술라에게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엄이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를 무찌를 거라고 말했다. 옛날의, 전통적인 형태로 공화국을 재건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술라는 말한 대로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존엄이 손상될 테니까. 사회적인 추방과 공식적인 오명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따라서 술라는 자기 바깥에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힘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을 때 그는 만족할 것이다. 그때까지 술라는 쉴 수 없다. 쉬지 않을 것이다.


(284)

술라는 이제 자기 손아귀에 들어온 로마를 좋아하지도,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가가 너무 컸다. 또한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대한 기대도 없었다. 그가 가장 갈망한 것은 평화와 여유, 온갖 성적 환상의 충족과 머리가 빙빙 도는 폭음, 관리와 책임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없었는가? 로마 때문에, 의무 때문에, 그토록 많은 임무들을 마무리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내려놓는 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술라가 말을 타고 텅 빈 대경기장을 따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해야만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325-326)

저장 선반과 헛간, 저장고와 저장실에 스민, 그곳들이 가득차 있기를 바라는 페나테스라는 신들이 있었다. 항해중인 배들과 교차로들을 모으고 무생물 물체들의 목표의식을 유지시키는 힘들은 라레스였다. 나무들이 바르게 생각하도록 하는, 가지와 잎은 위쪽으로, 뿌리는 아래쪽으로 뻗도록 하는 힘들이 있었다. 물을 달콤하게 하고 강이 높은 곳에서 저멀리 바다까지 아래로 흐르게 하는 힘들이 있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행운과 복을 주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보다 덜 주며, 또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힘은 포르투나였다. 그리고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라 불리는 힘은 다른 모든 힘들의 총합이자,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하나 힘들에게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그 힘들을 한데 묶는 결합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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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미술 이야기 2 - 그리스.로마 문명과 미술 : 인간, 세상의 중심에 서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2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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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줄여서 난처한미술이야기 시리즈 2권을 읽었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의 형식으로 질문과 답변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읽기 편했단다. 1권에서는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은 워낙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익숙한 것 같지만, 미술만 떼어내어 자세한 설명을 들어본 경험이 없는 것 같구나.. 이 책을 통해 그리스 미술과 로마 미술의 대한 공통점과 차이점그리고 숨겨진 에피소드에 관한 알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 읽은 내용들은 금세 머릿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말이야. 더 사라지기 전에 얼른 너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겠구나.


1.

먼저 그리스 문명과 미술부터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그리스 문명도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쑥 솟아난 것은 당연히 아니란다. 그 이전에 있었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거야. 소위 오리엔트라고 말하는 곳에서 말이야. 그래서 미술이나 건축도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리스 건축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파르테논 신전도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대.

오리엔트와 그리스 사이에 에게 해라고 부르는 바다가 있는데, 그곳에서 먼저 그리스 문명의 태동이 있었단다. 당연하겠지오리엔트와 가장 가까웠으니까 말이야. 고대에는 육로로 가게 되면 빙빙 돌아가야 하고 산악지대고 많다 보니, 바닷길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바다를 중심으로 문명이 전달되었단다. 그 중심에 에게 해가 있었던 거지. 그 에게 해에 크레타라는 섬이 있었는데, 그 크레타 섬은 이집트와 그리스의 무역 기지와 같은 역할을 했어. 그리고 문명도 일어났지만, 화산 폭발로 멸망하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크레타 섬은 아틀란티스나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그리스 신화의 무대이기도 했는데, 이집트 미술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특징을 가진 미술로 승화시켰어. 예를 들어, 정면성의 원리로 인물을 그린 것을 들 수 있겠구나. 이집트에서는 높은 신분만 그런 방식으로 그렸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미노아 문명에서는 평범한 소년도 정면성의 원리로 그림을 그렸대. 그리고 누드 작품이 많았는데, 이것은 후에 그리스 미술의 특징이 된단다. 당당한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누드로 작품을 만든 거야.

에게 지역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트로이 전쟁이란다. 트로이 목마로도 유명하고 너희들도 아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 전설로만 내려오던 트로이라는 나라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제 있었던 나라로 밝혀졌단다. 당시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을 꽃피고 있었어. 이때가 기원전 1800년에서 1100년까지 이어졌는데, 무척 오래 전의 이야기구나. 미케네 문명의 유물이 나온 대표적인 곳이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라는 곳이야.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트레우스의 보물 창고라고 했다지만, 실제 연관성은 없다고 하는구나.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라고 발견된 것도 있지만 실제 아가멤논의 얼굴은 아니라고 했어.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1100년 경에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좀 더 시간이 흐른 기원전 800년 그리스 문명이 태어난단다.


2.

고대 그리스는 여러 도시 국가들로 이루어졌단다. 그리스는 해안선이 복잡하였고 섬이 많고 산맥도 높다고 했어. 도시들은 아무래도 해변 근처에 생겨나게 되었는데, 아테네, 테베, 스파르타, 올림피아 등 많은 도시국가들이 출현했어. 너희들도 이제 곧 배우겠지만, 고대 그리스는 오늘날 민주주의 시작점이었어. 그런데 오늘날처럼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권리를 준 것은 아니었고, 시민의 자격이 있는 성인 남성으로 국한되어 있었어.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의사 결정에 참여해서 의사를 전달해야 했어. 민주주의가 그리 쉬운 게 아니란다. 그리고 시민권을 갖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단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이지

고대 그리스 미술이라고 하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봐야 하나이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작 시점을 서로 다르게 주장한다고 했어. 올림픽의 시작한 시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집대성 한 시점그리스 알파벳을 사용하기 시작하던 시기 등으로 다르게들 주장했대. , 이제 그럼 본격적으로 그리스 미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미술을 재해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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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일단 미술에 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미술을 재해석해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문명의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서양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새롭게 해석해나갔거든요. 예를 들어 15~16세기 유럽에는 르네상스라는 미술 흐름이 있었지요.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부활시킨다는 걸까요? 바로 고전의 부활을 뜻하는데 그 고전이 바로 그리스 미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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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을 시대별로 구분할 때 이용하는 것이 도자기라고 하는구나.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의 변화를 시대별로 구분 할 때 기원전 1050년의 원-기하학 문양 시대부터 시작하여 기하학 문양 시기, 동방화 시기, 흑색상 도기 시기, 적색상 도기 시기로 구분한다고 하는구나. 이런 걸 너희들한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굳이 그런 시대구분까지 알아야 하나 싶구나. 그저 미술 작품을 잘 감상하면 되는 거지. 도자기를 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는 것이잖아. 시대를 거듭할수록 고급지고 기술이 들어가고 화려해졌다는 점만 알고 넘어가자꾸나.

그리스 조각상을 보면 젊은 남성의 나체를 조각한 경우가 많단다. 아빠도 학창 시절 미술책에서 그런 작품을 보면, 무척 궁금했단다. 창피하게 왜 벗겨 놓은 조각상을 만들었을까 하고 말이야. 그리스인들이 젊은 남성의 나체를 많이 조각한 이유는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초창기의 젊은 남자 조각상을 쿠로스라고 불렀어. 쿠로스를 보면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았는데, 후에는 그리스만의 특징을 가진 조각으로 발전했다고 하는구나. 그 특징 중에 하나가 젊은 남성의 누드인 거지. 그런데 그것을 통해 건강한 육체를 중시하는 등 그리스 내의 불평등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대.

쿠로스는 돌을 조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청동상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 청동상을 만드는 방법이 나와 있었는데, 여러 단계를 거쳐야 만들 수 있단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 생각을 했는지…. 여러 단계를 줄여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흙으로 빚고 그 표면에 밀랍을 칠하고 다시 그 위에 벽돌가루 등으로 감싼 다음불로 밀랍을 녹이면 틈이 생기는데, 그 틈에 청동물을 붓고, 식은 다음 벽돌가루와 청동상 안의 흙을 제거하면 된다고 한단다. 아빠도 청동상을 만드는 방법은 처음 본 것 같은데 신기하구나.

그리스는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으로 유명한데, 이런 민주주의 체제 때문에 조각상을 만들더라도 개인을 우상화할 수 있는 초상 조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 그리스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하르모디우스와 아리스토게이토만 초상 조각이 있다는구나. 예전에 학창 시절 배운 기억으로는 그리스에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어. 그런데 그 도편추방제라는 것이 가장 인기가 있어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사람을 쫓아냈다는 것이라고 하니, 그들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겠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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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가 유지하려면 사회에서 특별히 인기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지요. 이 법에 따라 아테네 시민들은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즉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냈습니다. 투표 결과 6000표 이상 받은 사람은 아테네 밖으로 추방당했어요. 그만큼 아테네인들은 독재자의 출현을 경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새기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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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에서 그리스 건축을 빼놓을 수 없을 거야. 가장 유명한 건물 중에 하나인 파르테논 신전이 건물은 아테네가 전쟁에서 이긴 기념으로 만든 건물인데, 이 건물이 왜 이렇게 유명하냐면,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람을 배려한 디자인으로 세웠기 때문이란다. 기둥을 디자인할 때 중간 부분을 약간 불룩하게 해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볼 때 지붕에 짓눌린 듯한 착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래. 배흘림 기둥 양식으로 유명한 우리나라의 무량수전도 떠오르는구나. 그리고 기중의 배치도 건물 안쪽보다 바깥쪽 기둥을 더 가깝게 배치해서 바깥쪽 기둥의 간격이 더 크게 보이는 착시가 발생하지 않도록 했대. 바닥도 완전 평평한 것이 아니라, 안쪽이 볼록한 곡선 형태로 착시 효과를 방지했다고 하는구나. 이렇듯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을 신경을 썼다고 하는구나. 파르테논 신전 둘레를 돌아가면서 신들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들이 있어서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는 그런 작품인 것 같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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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파르테논의 모든 곳에 휴머니즘이 녹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하고는 다르게, 이 건물에는 사실 직선이 없어요. 우리 눈은 둥글기 때문에 직선은 우리 눈에 들어오면 곡선이 됩니다. 우리 눈에 직선으로 보이려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는 곡선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파르테논 신전은 그런 착시까지 고려했습니다.

심지어는 바닥도 휘어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한쪽 끝에 서서 보면 맞은편 바닥이 안 보입니다. 바닥이 중간 부분에서 부풀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 때문이지요. 직선을 위한 곡선인 겁니다. 가장 높은 부분과 가장 낮은 부분을 비교해보면 바닥 표면의 높이 차이가 10센티미터 이상 납니다. 신전의 긴 축인 남북 면으로 보면 최대 12.3센티미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요. 동서 축도 중심에 최대 6센티미터 가까이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시야에 대한 그리스인의 이해도는 정말 놀랍다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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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잖니. 그리스 민주주의도 시간이 흐르면서 쇠퇴했어. 그러자 금기시되었던 초상 조각이 출현하였고, 개인 소유의 거대 건축물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주변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그리스를 점령하면서 고대 그리스는 쇠망의 길을 걸었어. 알렉산더는 그리스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그리스 문화를 존경했기 때문에 그리스 미술은 계속 이어졌단다.

하지만 온전히 이어질 수는 없겠지. 마케도니아의 미술과 합쳐져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를 헬레니즘이라고 한단다. 그리고 알렉산더를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미술 작품을 만들게 했대. 알렉산더가 그리스뿐만 아니라 동방의 페르시아까지 점령을 했어. 그래서 헬레니즘은 페르시아 지역까지 퍼지게 되었는데, 그렇다 보니 자연적으로 그리스 미술이 동방에 전파되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헬레니즘이 간다라 불상을 거쳐 우리나라 석굴암까지 영향을 준 것이라고 하는구나.

고대 그리스의 시대는 끝이 났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그리스 미술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근현대 건축물에서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을 본 따서 지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덕수궁의 석조전도 고대 그리스 건축물 양식을 본 따 지은 것이라고 하는구나. 화려했던 고대 그리스의 미술을 그렇게 오늘날까지 숨쉬고 있는 것이란다.


3.

로마의 시작은 기원전 753년 작은 마을이라고 하는구나. 예전에 읽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를 세운 사람이 로물루스였고 그의 이름을 본 따 로마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 외에는 정말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단다. 이 책에서 다시 읽은 내용을 기반으로 이야기해볼게 로마 이전에 이탈리아반도에는 에트루리아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들의 문화와 예술이 후에 로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참고로 에트루리아는 전쟁에서 패한 트로이의 유민이 와서 세운 나라라는 설도 있다고 하는구나.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가 건국했다는 건국신화가 있고, 최초 로마는 티베르 강의 늪지대에 작은 언덕에서 생겨났대. 로마의 문화와 미술은 앞서 이야기한 에트루리아와 당시 선진 문명인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단다. 그래서 그리스의 신들이 대부분 라틴어로 바뀌었지, 똑같았단다. 정체체계는 원로원 중심의 로마 공화정이 나라를 다스렸고,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리스와 달리 초상 조각이 많이 있었어.

고대 로마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자동차와 전기 시설 등이 없는 것만 빼고는 오늘날 도시가 갖추고 있는 것은 대부분 갖추며 살아갔단다. 여러 공공 시설과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연장도 있었고, 여러 가지의 형태의 주거시설과 완벽한 도로와 수도 시절이 있었어. 로마의 공공시설의 건축물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콜로세움이 아닐까 싶구나. 영화에서도 많이 나오는 콜로세움은 타원형인데 긴 쪽 지름이 189미터나 되는 무척 큰 공연장이란다. 무려 5만명이나 들어갈 수 있대그리고 또 하나 유명한 건물로 판테온이 있는데신전으로 지었으나 나중에는 성당으로 사용했다가 지금은 이탈리아 국립 묘지로 사용하고 있다는구나.

로마의 여러 건축물에는 장식을 위한 미술 작품들이 이용되었지얼마 전에 너희들과 화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빠가 이야기해준 고대 로마 도시 폼페이가 있잖아. 화산과 함께 도시 전체가 화산재로 덮였다가 오랜 시간 뒤에 발견이 되었는데, 그곳에 건축물과 함께 장식을 위해 사용한 미술 작품들이 그래도 복원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폼페이의 유물을 통해 로마 미술의 발전상을 볼 수도 있었대.

로마에도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리스 조각상과 달리 옷들을 걸쳤단다. 보기 덜 민망하구나. 로마 조각은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 자신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그렇다 보니 로마 황제들의 조각상도 많았대.

영원할 것만 같던 로마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단다. 3세기 무렵 조짐이 보이다가 로마 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이 된단다. 그리고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1453년 동로마가 멸망한단다. 그렇게 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로마가 남긴 기독교 세계관은 그 이후 시대를 지배하였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단다….

….

여기까지가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2권의 이야기란다. 아빠가 급하게 이야기한다고 빼먹은 내용들이 많은데, 이해 해 주렴… 1권에 이어 2권도 유익하면서 재미있었단다. 이 시리즈가 모두 여섯 권인데, 아마 다 찾아 읽게 될 것 같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 그리스 문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양 문명의 뿌리입니다.

책의 끝 문장 : 각자의 수도원과 성당 건축, 아름다운 필사본과 공예품을 보며 그리스식 합리주의와는 다른 서양의 이면을 만나보도록 하지요.

사는 내내 즐거움을 누리며 웃도록 하십시오.
삶이란 그저 버텨내라고 있는 게 아니라,
즐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 고든 B. 힝클리
- P38

앞서 말했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이라는 치열한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 남성의 육체는 나라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어요. 그야말로 체력은 국력이었던 거죠. 그리스 사회가 남성 육체를 찬양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겁니다. 아테네를 비롯해 몇몇 도시에는 미남 선발대회를 열기도 했고, 미술도 튼튼하고 강한 육체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 P199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테네 사람들은 적인 페르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관계를 복구한 것처럼 아테네도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예술가가 교류하게 됩니다. 그리스 예술가들은 페르시아 문화에 놀라워하고 영감을 얻었겠지요. 그리고 이전의 아테나 신전보다 훨씬 큰 신전을 짓겠다는 건축적 야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야망이 바로 페르시아와의 교류에서 자극받아 생겼을 겁니다. - P268

로마가 성장할 때 마치 부모처럼 나란히 로마에 큰 영향을 준 두 세력이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그리스, 그리고 이제부터 설명드릴 에트루리아입니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는 외래 문화인 반면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토착 문화에 가까워요. 로마는 관용과 다양성의 강자답게 두 세력으로부터 각각의 장점을 취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죠. - P350

로마인의 능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능력 말입니다. 이는 대단한 능력입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배운 것을 더 잘 응용해 사용하면 되죠. 로마인은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P353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76년 이후 서로마제국을 차지했던 게르만 용병대장은 결국 동로마제국 황제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일개 영주로 전락한 겁니다. 이후 서로마 옛 영토에서는 게르만족을 비롯해 수많은 ‘야만족’이 난립하며 조그만 영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서로마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명목상으로나마 자신이 로마제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 P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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