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288)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들의 대표적 존재인 이응준과 김석원은 우쓰노미야의 회유책에 그렇게 발목을 잡혀버렸다.

두 장교는 그렇게 우쓰노미야의 선한 면만 바라보았지만 그 자는 제암리 학살의 책임자였다. 그리고 그 무렵 조선민족을 절망으로 몰고 갈 무서운 일을 꾸미고 있었다. 홍범도의 독립군을 도운 만주 조선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출병을 본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만주 출병은 그가 조선군사령관직을 떠난 직후 실현되었다. 일본은 훈춘사건을 조작해 대규모로 출병했다. 그러나 독립군을 뒤쫓다가 챵산리(청산리) 등지에서 대패해 오히려 3천여 명이 전사했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만주의 조선인 3만여 명을 보복적으로 학살했다. 그것이 경신참변이다.


(290)

이응준은 권총 분실 사건과 우쓰노미야에 접근한 일로 인생의 길을 180도 바꿀 수도 있었다. 우선 임시정부 밀사인 최성수와 더불어 만주로 탈출할 수 있었다. 3.1운동 무력탄압의 원흉 우쓰노미야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지석규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를 저격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우쓰노미야에게 인간적 배신을 할 수 없었다면 그가 떠난 뒤 독립운동 전선으로 갈 수도 있었다.


(338)

염창섭은 일본영사관에 소속되어, 랴오닝성과 지린성 일대를 순회하며 동포들에게 만주국 건설을 찬성하게 지도하고 취약지구에 집단부락을 만드는 등 친일 행위를 하고 있었다. 원용국은 지린성 판스현에서 동포들을 회유해 항일무장세력이 발을 못 붙이도록 자위단을 조직하는 공작을 전개하고 있었다. 후배 학년 중 우등생이었던 윤상필은 관동군 참모부 조선반에 속해 있었다. 재만동포들을 만주국과 일본군 쪽으로 끌어당겨 항일세력을 와해시키는 온갖 공작을 기획하는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393)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이제 천명을 안다는 오십 줄 나이에 이르렀고 절반 이상이 퇴역했다. 현역장관들은 대부분 고국에 돌아와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뽑아내는 병사(兵事) 업무를 맡거나 전문학교와 중학교의 교련 교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퇴역한 사람들도 대개는 교련 교관 등 육사 출신에 걸맞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독립투쟁을 하고 민족혼 교육에 매달렸던 조철호가 세상을 떠나 그런 역할을 할 위인은 이제 없었다. 아오야마 묘지에서 뒷날 조국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던지자고 한 맹세는 대부분이 추억으로만 생각할 뿐 몸도 정신도 이제 일본의 통치에 젖어 있었다.


(502)

김광서는 최후가 불행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사범대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936년 간첩죄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2년 반의 금고형을 받고 복역했다. 1939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으나 그해 12월 다시 체포되어 8년의 강제수형령을 받고 카라간다 감옥으로 수용됐다가 거기서 북부 시베리아 코미 자치공화국으로 이송되었다. 철도 노역을 했고 1942 1 26일 철도수용소 부설병원에서 영양부족에 따른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1956년 유족의 탄원을 받은 소련 군사법원은 재심을 열어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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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쓰고, 함께 살다 - 조정래, 등단 50주년 기념 독자와의 대화
조정래 지음 / 해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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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달 전에 조정래 선생님께서 등단 하신지 50주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50주년 기념하여 책도 출간했다는 소식도 들었어. 가끔씩 조정래 선생님께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생각을 책으로 출간을 하셔서 아빠도 읽어보곤 했는데, 그의 소설만큼 산문집도 묵직하면서도 삶의 지표로 삼을 만한 글들이 많아서, 빼놓지 않고 읽곤 했단다.

이번 50주년 기념으로 출간한 산문집은 독자들의 질문들을 미리 받아서 답변을 하는 형식이었어. 아빠도 사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뜻밖에 선물을 받았단다. 오랜만에 받는 책선물이라서 너무 기뻤단다. 조정래 선생님의 등단 50주년을 축하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홀로 쓰고, 함께 살다>라는 책을 읽었단다.


1.

독자들의 질문들을 분류해서 문학과 인생, 대하소설 3부작의 세계, 문학과 사회... 이렇게 세 개의 주제로 나누어 정리했단다. 첫 번째 문학과 인생에서는 문학을 꿈꾸는 청년들의 질문이 많았고, 그런 문학을 꿈꾸는 청년들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조정래 선생님께서 평생 문학을 하면서 지켜온 철학과 자세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였단다.

예전부터 조정래 선생님께서 매체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 소설가는 시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그 시대의 산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문학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어. 언젠가부터 시대를 이야기하는 하는 문학을 참여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에 조정래 선생님은 거부감을 가지고 계셨단다. 문학이라고 하면 당연히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거기에 참여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그렇지 않은 문학을 순수문학이라고 해놓았으니 말이야.

===============================

(39)

군부독재는 강화되고, 그에 따라 분단은 고착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야기되는 현실의 모순과 시대적 갈등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 변화에 대해 순수문학 쪽에서 참여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고발문학은 문학성이 빈약하고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공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수십 년에 걸친 순수, 참여 논쟁입니다. 그 와중에 저는 작가가 되었고, 첫 작품집 <황토>의 작가의 말에 한정된 시간을 사는 동안 내가 해득할 수 있는 역사, 내가 처한 사회와 상황, 그리고 그 속의 삶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34년이 지나 태백산맥문학관 벽면에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고 새겼습니다. 이것이 저의 변함없는 문학관입니다.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인 유치함입니다. 이제 그런 소모적인 논쟁 아닌 논쟁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오직 좋은 소설, 감동적인 작품이 있을 뿐입니다.

===============================

그러면서, 작가는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어.

===============================

(80)

작가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야 하고, 불의에 저항하면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세계적으로 정의되고, 동의되어 왔습니다. 그건 바로 작가란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양쪽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함을 기본 조건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지 않느냐고요? 그건 그들의 사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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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유명한 이들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들 했단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어려운 질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구나. 누군가 아빠에게도 그런 질문을 던지면, 인생이 뭐 있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행복의 꿈을 가꿔 가는 거지이 정도의 식상한 답변을 했을 거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본 질문도 아니고 말이야.

조정래 선생님은 작가이시다 보니, 직접 수 많은 인생들을 직접 만드신단다. 그렇다 보니 더욱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렇게 생각하신 인생에서 대한 명언이 이 책에 몇 문장 실려 있어 적어보았단다.

===============================

(139)

제가 어느 땐가 이런 메모를 남겨둔 게 있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더듬거리고 멈칫거리고 두리번거리고 비틀거리고 허둥거리며 홀로 걸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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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인생이란 자기 스스로를 말로 삼아 끝없이 채찍질을 가해가며 달려가는 노정이다.’

인생이란 두 개의 돌덩이를 바꿔 놓아가며 건너는 징검다리다.’

인생이란 극본도, 연출도, 출연도 자기 혼자 도맡아 하는,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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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소설 3부작을 쓰시면서 수 많은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시기도 했지만, 실제 세상을 살아가는 분들이 다른 이름으로 소설 속에 다시 살게 된 분들도 많았어. 특히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신 분들이 소설을 통해 대신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 또한 조정래 선생님의 대하 소설 3부작의 역할이었단다. 독자들은 조정래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잘못된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되고, 당사자들이나 당사자들의 가족들은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거야.

===============================

(214-5)

이러한 객관적인 결론이 나오기 훨씬 전에, <태백산맥> 1분가 출간되고 나서 저는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전화를 줄줄이 받아야 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사람 대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가 책을 읽고 난 제 얘기를 들으시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얼마나 우셨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총살당하고 처음으로 사람 대접받은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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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10권짜리 대하 소설을 독자가 필사하는 열풍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단다. 작가로써 이런 일을 경험하는 것은 영광일 것 같지만, 그 필사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정말 해 볼 만한 것이라고들 한단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정하고 조금씩 필사를 해 나가다 보면 마음도 경건해지면서 힐링이 되고, 해냈다는 뿌듯한 느끼고그리고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도 들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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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그 또렷또렷한 글씨 한 자, 한 자에서 필사자들이 바친 정성과 노고가 얼마나 진하고 컸는지를 절절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성과 노고 앞에서 저는 그저 감사하고, 감동하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글 쓰기 잘했다는 큰 보람과 함께 삶의 가장 큰 행복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이 베풀어주는 사랑과 신뢰 중에 이보다 더 크고 무거운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100번 읽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깊은 애정이 한 번의 필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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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은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었는데, 간단 명료하게 네 가지를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그 중에 특히 네 번째 답변스마트폰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 아빠를 각성하게 하는구나. 정말, 이 스마트폰이라는 것에 중독이 안 될 수가 없더구나. 물론 그것을 통해 도움을 많이 받는 거도 있지만, 스마트폰은 분명 아빠의 독서 생활에 방해 요소란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책 읽는 것도 좀 준 것 같고, 너희들에게 쓰는 독서 편지가 계속 밀린 것도 스마트 폰 탓을 해보는구나. 그런 것을 알면서도 영상물을 보다 보면 또 시간이 휙 지나가버리고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좀 줄여보도록 노력을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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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으면 그거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첫째, 90퍼센트 이상 투표하라.

둘째, 시민단체 활동을 전개하라.

셋째, 하루 10페이지씩이라도 날마다 책을 읽어라.

넷째, 스마트폰에 빠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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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선생님은 앞으로도 어떤 소설을 쓰실 지 계획을 다 잡아 놓으셨다고 하는구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남겨 주시길 기대하면서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 저는 선생님의 소설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읽은 문학지망생입니다.

책의 끝 문장 : 넷째, 스마트폰에 빠지지 마라.


한 가지 명기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재능이란 예술의 세계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는 헤아릴 수 없도록 수많은 직종들이 있습니다. 그 직종들은 전부 다 우리 인간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다양한 직종들에 어울리는 온갖 재능들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다채로운 재능의 향연이 우리 인간사회의 약동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 여러 재능들도 성공적 열매를 맺으려면 소설 쓰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더 보태져야 합니다. - P24

그 인물의 중요성에 대해서 일찍이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그 고전적 정의는 시대가 어떻게 변하든 불변입니다.
‘한 작가의 능력은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개성적이고 전형적인 인물들을 창조했느냐로 판가름난다.’
- P130

작가란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그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야 하는 예술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업보를 지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학대하듯 스스로를 닦달하며 평생 긴장하고 최선을 다한 노력을 바치지 않고서는 그 업보는 풀리지 않습니다. 그걸 좋은 습관이라 할 수 있을까요? - P133

제가 보기에 우리 사회는 결코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제아무리 발전한 나라에서도 유토피아란 없습니다. 유토피아란 미래 희망을 위해 만들어진 환상적 언어이지 현실적 실현성을 갖는 언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만족이 없이 끝없이 팽창되는 것이기에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게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합니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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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1-06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님께서 등단하신지가 50년이 되셨군요~~
대학때 읽었던 태백산맥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년전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에도 다녀왔는데, 어디론가 훌쩍 떠나지 못하는 세월이 벌써 1년이 되었어요**

bookholic 2021-01-07 00:30   좋아요 1 | URL
정말 열정이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요...
이번 강추위에 코로나가 다 얼어죽어서, 봄에는 멀리 여행도 가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즐겁고 따뜻한 하루 되십시오~~^^
 
강치 - 전민식 장편소설
전민식 지음 / 마시멜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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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강치>라는 소설을 읽었단다. 이 책을 인터넷에서 처음 봤을 때, 강치가 뭐였더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이러면서 책 소개를 읽어보았단다. , 독도에 살던 동물이구나강치는 독도 주변에 살던 바다사자의 한 종이었단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그 강치를 너무 많이 잡아가서 지금은 멸종이 되고 말았다고 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제 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 땅인 독도에 침범해서 독도에 서식하고 있는 강치들을 잡아 갔다고 하는구나.

독도를 상징하던 동물 강치. 지금은 비록 멸종되었지만, 여전히 독도를 상징하는 동물 중에 하나. 소설 <강치>는 독도에 관한 이야기란다. 조선시대 독도를 지키고자 했던 안용복이라는 사람에 관한 소설이란다. 독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빠짐없이 나오는 사람, 안용복. 아빠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몰라. 예전에 읽은 김탁환님의 <독도 평전>이라는 책에서 잠시 소개되어 읽은 기억이 있을 뿐.


1.

독도 근해에서 어업을 하던 안용복 일행들 중에, 안용복을 비롯하여 세 명이 일본 어부들에 납치를 당한단다. 독도가 조선의 땅이지만, 조선 조정은 어리석은 결정을 내놓았단다. 독도에서 어업을 하던 자국의 백성들이 자꾸 일본 해적들에게 피해를 입으니까, 내 놓은 정책이 독도를 하기 못하게 도해금지령을 내린 것이란다. 독도 주변에는 많은 고기들이 많아 어업에 많은 도움을 주는데, 해적들 때문에 못하게 하다니비어버린 독도는 일본 해적과 일본 어부의 차지가 되어 버렸단다.

도해금지령이라고 하지만, 조선의 어부들도 간혹 독도 주변에서 고기를 잡았단다. 안영복 일행도 그렇게 독도에 왔다가 일본어부들에게 납치 당한 거야. 그 중에 업동이라는 자는 중상을 입고 죽고 말았고, 안용복과 박어둔은 일본까지 끌려갔단다.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까지 끌려가서 가장 많은 들은 이야기는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거야. 그 이유가 말도 안 되는구나. 일본은 80여 년 전부터 독도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내 주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일본 조정에서 남의 섬에 가서 어업을 할 수 있게 허가를 내 주었다는 거지.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말이더냐. 만약 일본이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면 무슨 허락을 맞고 어업을 하냐. 그냥 가서 잡으면 되는 거지. 허락을 받고 어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 안용복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들이 독도에서 가장 많이 잡는 것 중에 하나가 강치였단다. 강치는 고기뿐만 아니라 기름을 많이 뽑아낼 수 있었거든. 안용복은 그 전에 상인으로 일해서 일본말도 잘하고 검술도 뛰어났단다. 그를 납치해간 일본 어부들은 일본말도 잘하고 검술도 뛰어나다 보니, 안용복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영주에게 데리고 갔어. 꼭 같은 질문이 날아왔어. 왜 허락 없이 독도에서 고기를 잡았냐. 내 나라 땅에서 무슨 허락을 받고 고기를 잡냐이런 대답을 하는데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혼자 싸우다 보니,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입장이 되었단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 조정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 자신은 뼛속까지 조선인이었던 거야.

==========================

(103)

갑작스럽게 나는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들 앞에서 기죽고 싶지는 않았다. 조선에 대한 원망이 깊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조선인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지키지 못하면 모든 걸 빼앗긴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에게 힘이 있었다면 전국을 뒤져 가져온 산삼을 그렇게 헐값에 넘기진 않았을 터였다. 초량 왜관에 머무는 일본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날카로웠다. 그들에 대한 선입견에 휩싸여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안용복과 박어둔의 납치 사건은 일본 막부인 쇼코에게까지 알려졌고, 조선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한 막부는 안용복과 박어둔을 후하게 대해주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명시하는 서계를 직접 써서 주었단다. 그리고 그 서계를 가지고 조선으로 가라며, 일본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무사까지 붙여 주었어. 서계를 가지고 조선을 향하던 안영복과 박어둔은 쓰시마에서 제동이 걸렸단다.

쓰시마 도주는 막부와 생각이 달랐단다. 막부는 조선과 갈등을 꺼려했지만, 쓰시마 도주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다시 일본은 중앙 막부가 영향력이 컸지만 먼 지역은 도주의 영향력이 더 컸어. 쓰시마 도주는 막부의 서계를 빼앗고 내쫓듯 하여 안용복과 박어둔은 힘겹게 조선에 도착했단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곤장이었어. 도해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곤장 맞고 유배를 갔단다.


2.

일본에서 있었던 그의 일들이 소문이 돌았고, 일본의 사절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접위관 유일집이 안용복을 찾아왔어. 안용복은 그에게 서계가 있었고, 그것을 쓰시마 도주에게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러자, 접위관 유일집이 몰래 그를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단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명확히 하고, 빼앗긴 일본 쇼군의 서계를 받아오기 위함이었어.

==========================

(285)

우리가 가는 건 우리의 섬이고 우리의 땅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일본은 울릉도나 독도를 소유했던 번이 없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울진에 속해 있었지만, 저들은 근래에 와서 지들의 번에 속해 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독도든, 울릉도든 우리와 달리 일본 백성들이 거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일본의 지난 쇼군 시절에 요나고 사람들이 울릉도에 와서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도해 허가를 해준 일을 두고 자신들의 섬이라 우기고 있는 겁니다. 도해 허가를 내주었다는 사실도 웃긴 일이지만, 그런 사실을 파악했으면 강하게 항의를 했어야 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그리 못했지요.”

==========================

부산에서 직접 가면 다른 이들이 눈치를 챌 수 있으니, 울릉도와 독도를 통해 우회해서 가지로 했어. 그리고 유일집은 안용복에게 정 3품에 해당하는 감세장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어. 그렇게 안용복 일행은 다시 일본으로 갔단다. 온갖 어려움과 죽을 위기를 넘긴 안용복은 결국 쇼국 막부의 서계를 받아왔단다. 일본 최고 우두머리가 독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인정한 공식 문서인 거야.

그런 문서를 받아온 안용복이지만, 무능한 조선 조정은 별난 토론을 했단다. 안용복이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의견과 안용복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양분되어 격론을 벌였대. 결국 양쪽 모두의 의견을 들어, 안용복의 공을 인정하되, 죽음을 면하게 해주고 유배를 보냈다고 하는구나.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꽉 막혀 있던 나라였단다. 안용복의 그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는구나. 안용복은 아마 조용히 지내고 싶었을 거야. 어쩌면 몰래 울릉도에 가서 살았을 수도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안용복을 재평가하였는데, 이 소설을 마치고 책 뒷편에 그 글을 실었단다.

==========================

(369)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다. 미천한 일개 군졸로서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하여 강적과 겨루어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부개자와 진탕에 비하여 그 일이 더욱 어려운 것이니, 영특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상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에는 형벌을 내리고 뒤에는 귀양을 보내어 꺾어버리기에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와 독도가 비록 척박하다고 하나, 쓰시마도 또한 한 조각의 농토가 없는 곳으로서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내려오면서 우환거리가 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한 번 빼앗긴다면 이는 또 하나의 쓰시마가 불어나게 되는 것이니, 앞으로 오는 앙화를 어찌 말하겠는가?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뿐이 아니었다. 고금에 장순왕의 화원노졸(花園老卒)을 호걸이라고 칭송하나, 그가 이룩한 일은 대상 거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국가의 큰 계책에는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안용복과 같은 자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오에서 발탁하여 장수급으로 등용하고 그 뜻을 행하게 했다면, 그 이룩한 바가 어찌 이에 그쳤겠는가? – 이익의 <성호사설> 중에서

==========================

이 소설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용복이라는 인물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단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 찬 달빛이 파도 위로 켜켜이 깔렸다.

책의 끝 문장 : 봄볕이 짚신 밖으로 삐져나온 오른발 엄지발가락 위에 가만 내려앉았다.


"독도와 울릉도는 조선의 것이란 말이다!"
나는 독도와 울릉도가 나의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조선의 것이라 말했다. 우리를 끌고 왔던 어부가 몽둥이로 나의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 꾸미려면 언제나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한 차례 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섬이며, 그 섬의 바다는 조선의 바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의 매는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쏟아졌다. - P52

조선은 몇몇의 나라가 아니라 다수 백성의 나라여야 했다. 나라는 내게 목숨까지 버리라 말하면서도 사방이 막힌 이 순간에는 나를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눈물마저 새카맣게 타버려 흐를 줄 몰랐다. 나는 버려졌다. 그 점은 억울하지 않았다. 나라가 내게 기대한 일이 없으며, 나 역시 나라에게 기대할 일이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내가 마음이 아픈 건 살아남아도 우리가 의지할 곳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는 사실이었다. - P194

*1693년 9월 초, 안용복과 박어둔은 돗토리 번에서 나가사키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당시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한 내용은 오야 집안의 문서인 <죽도 도해 유래기 발서공, 이하 발서공>과 한자로는 ‘백기’로 적는 호키주의 일을 기록한 <이본 백기지>에도 실려 있다. <발서공>에는 안용복이 에도에 갔고,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에도 막부가 안용복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안용복에게 무엇인가를 줘서 조선으로 귀국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쇼군으로부터 받은 서계로 추측된다. 두 사람이 나가사키로 후송되었을 때 쓰시마 번 사람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는데, 이때 선물과 서계를 모두 강탈당했으며 이를 쓰시마 번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라는 가정 하에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해석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힌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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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렇게 푹 쌓인 눈 위를 걸으니 옛날 산 친구 생각이 난다. 백두대간은 물론이고 전국의 명산을 두루 다녀본 후 그가 던진 한마디.

앞으론 눈 쌓인 겨울산만 다니련다.”

연유를 물으니, 눈이 쌓이면 나무뿌리를 밟지 않아도 되고 흙이 패지 않으니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덜하다는 얘기다. 미안한 마음 없이 나무의 진면목을 바라본다는 것, 겨울산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37-38)

제주에는 많은 설화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설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몸집이 커서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관탈 섬에 걸쳐졌다고 한다. 그 설문대할망이 치마폭에 흙을 퍼 담아다 한라산을 쌓아 올릴 때 구멍 난 치맛자락 사이로 한 움큼씩 떨어져 나온 흙이 오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오름들은 제주도민에겐 뒷동산이며, 가축들에겐 풀을 뜯는 목장이었고, 지붕을 덮을 띠가 자라는 곳이자, 굼부리 안은 목동들이 바람을 피해 누울 수 있는 안식처였다.


(50)

제주어 사전에는 곶자왈을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헝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정의하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중산간지대의 숲을 대개 이나 자왈또는 곶자왈이라고 불러왔다. 따라서 곶자왈이란 민가 근처에 있는 숲으로, 쟁기의 날이 땅을 갈아엎을 수 없어서 농부의 손에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땅을 의미한다.


(72)

흑룡만리(黑龍萬里). 누군가 제주의 돌담길을 흑룡만리라 했다. 용은 바다를 희롱하고, 바다는 화답이라도 하듯 비릿한 물바람을 보내어 용을 춤추게 하며, 길은 그 사이에 길게 누워 있다.


(87)

협곡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탐스럽게 생긴 담팔수가 나그네를 반기고, 구실잣밤나무, 종가시나무, 황칠나무, 참식나무, 조록나무, 아왜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사이사이에는 예덕나무, 팽나무, 푸조나무, 멀구슬나무, 머귀나무, 때죽나무, 자귀나무, 단풍나무, 산벚나무, 굴피나무, 합다리나무, 꾸지나무, 곰의말채나무, 까마귀베개 같은 낙엽 지는 나무가 살고 있다. 숲 바닥에는 바람등취(후추등)이 바위를 뒤덮고, 맥문아재비가 보석같이 영롱한 열매를 달고 있다.


(116)

너도밤나무 하면 나도밤나무가 떠오른다. 나도밤나무는 너도밤나무더러 나도밤나무 대열에 끼워달라고 조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너도밤나무는 참나뭇과이고 나도밤나무는 나도밤나뭇과이다.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 잎의 모양이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주로 서해안 주변의 산에서 자란다.


(127-129)

옛날 울릉도에 사람이 처음 살기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산신령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산에 밤나무 100그루를 심으라고 하면서 만약 100그루를 심지 못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을 사람들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하루 만에 전부 심었다. 심은 밤나무에서는 싹도 나고 잘 자랐다.

어느 날 산신령이 찾아와서 그동안 심어놓은 밤나무를 확인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보아도 아흔아홉 그루밖에 되지 않았다. 산신령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여러 번 세어도 아흔아홉 그루밖에는 안 되는 밤나무가 그사이에 한 그루 더 생길 수는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심기는 100그루를 심었지만 그사이 한 그루가 말라 죽은 것이었다. 그때 뜻밖에도 옆에 서 있던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입니다.”하고 외쳤다. 산신령은 다시 그 나무에게 밤나무가 맞는지 확인했다. 그 나무는 자기도 밤나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를 너도밤나무라고 이름 붙여주고 잘 가꾸었다고 한다.


(136)

성인봉은 왜 산이 아니고 봉일까? 산의 격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곳의 높이는 984미터이다. 1000미터에서 16미터 못 미치는 큰 산이다. 사방으로 갈래를 친 겹산인데다, 산이 험준하고 계곡도 깊다.

산과 봉()의 차이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말이 많지만, 일단 산이라고 하면 산괴를 떠받치고 있는 땅이 있어야 한다. 한라산은 한라산을 떠받치고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에 산이며, 울릉도는 섬 자체가 산으로 떠받칠 땅이 없기에 봉이다.


(268)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의 일이다.

도읍은 정했는데 도읍을 감싸주고 궁궐을 지켜줄 주산(主山:도읍, 집터, 무덤 따위의 뒤쪽에 있는 산)이 없었다. 그래서 전국의 산에 연락하여 주산을 모집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산들이 도읍의 주산이 되기 위해 앞 다투어 한양으로 모여들었는데,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주흘산도 열심히 한양으로 쫓아갔지만 이미 삼각산이 먼저 자리를 차지한 뒤였다. 크게 실망한 주흘산은 돌아오는 길에 이곳 문경에 주저앉아 버렸고, 그때 삐친 것 때문에 지금도 한양을 등지고 앉아 있다는 재미난 얘기가 전해진다.


(281)

산에서 나는 약초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체질이 있으며, 따라서 같은 병이라도 약은 달라질 수 있다. 일찍이 중국 주나라의 명의인 편작이 자신의 저서 <난경>에서 의사가 아무리 고쳐주려 하여도 병이 잘 낫지 않는 환자의 경우 여섯 가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환자가 교만하고 방자하여 내 병은 내가 안다고 주장하는 자

둘째, 자신의 몸을 가벼이 여기고 돈과 재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자

셋째, 음식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자

넷째, 음양의 균형이 깨져서 오장의 기가 안정되지 않은 자

다섯째,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도저히 약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

여섯째, 무당의 말만 믿고 의사를 믿지 못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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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옷을 찾아서 -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권기옥
정혜주 지음 / 하늘자연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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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얼마 전에 <조선의 딸, 총을 들다>라는 책을 읽었잖아. 그 책에서 많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을 소개해 준 것은 좋았지만, 너무 많은 이들을 다루어 깊이 알아 볼 수는 없었단다. 그래서 그 책에 나와 있는 분들 중에 아빠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몇몇 분들의 책을 찾아보았단다. 그 중에 한 분이 우리나라 최초 여성비행사인 권기옥이란 분이었어. 독립운동을 함에 있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지만, 전투기 비행사가 되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겠다는 당찬 꿈을 가진 이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그 분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단다. 다행히 권기옥이라는 분에 대한 책이 몇 권 있었어. 그 중에 고른 책이 바로 정혜주님의 <날개 옷을 찾아서>였단다. 평전 소설이라고 써 있구나. 권기옥의 삶을 소설의 형식으로 썼다고 생각하면 돼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 여성 비행사를 다룬 영화 <청연>이 생각이 나더구나. 아빠는 보지 않은 영화이지만, 일제 시대 여성 비행사를 다룬 영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래서 당연히 <청연>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권기옥님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 좀 찾아 보니 영화 <청연>의 주인공은 친일까지 했다는구나. 영화 감독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그런 영화를그리고 영화 <청연>의 주인공과 권기옥님 사이를 두고, 최초의 여성비행사가 누구냐는 논란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여러 가지를 알아보면 권기옥님이 2년 가까이 앞선다고 하는데, 친일을 했던 <청연>의 여주인공을 일제 시대 당시 일제가 최초 여성비행사로 부각시켰다고 하는구나.

정작 권기옥님은 생전에 그런 논란을 보면서 “근래에 와서 내가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라고 화제에 자주 오르는 것 같소. 허나 내가 비행기를 탄 것은 무슨 최초가 되기 위한 사치스러운 욕심에서가 아니었소. 오로지 일편단심 조국광복이라는 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내 청춘과 열정을 바친 것이오.” 라고 하셨다고 하니, 정말 멋진 분이 아닌가 싶구나.


1.

권기옥님은 1901년 평양 근처 중화군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 평양에 와서 줄곧 평양에서 학교를 다녔단다. 열아홉 살 때인 1919 3.1 운동 때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기도 했고, 그 이후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 운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항일 시위에 꼬박 참석해서 여러 번 체포를 당했어. 그로 인해 고문후유증으로 병까지 얻게 되어 석방되었단다. 석방 후 몸에 괜찮아지면 또 독립운동을 하고, 강연회를 열기도 했어.

임시정부에서 몰래 잠입한 문일민과 장덕진의 폭탄 제조를 돕기도 했고, 임시정부의 자금 마련에 힘쓰기도 했어. 또다시 체포를 당할 위기에 몰리자 권기옥은 상하이로 망명하였어. 한참을 이야기했지만, 그때 나이 고작 스무 살이었단다. 꽃다운 나이 스무 살에 조선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 상하이로 간 거야. 상하이에서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학교 공부를 마치고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비행사가 되기 위해 항공학교 입학을 알아보았단다. 하지만 번번이 여자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했어.

23. 임시정부 이시영의 소개로 찾아간 윈난항공학교에서 드디어 입학을 허가해 주어 비행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고, 25살 드디어 비행사 자격증을 획득했어. 비행사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의열단들과 교류를 하면서 독립 투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어.

권기옥님은 중국의 국민혁명군의 근거지인 광저우로 갔어. 그곳에서 여운형을 만났고, 그를 통해 국민군 항공대 소좌인 서왈보를 만난단다. 권기옥은 서왈보의 도움으로 국민군 제1항공대 비행사로 초대받았어. 서왈보로부터 독립운동가 유동열과 이상정을 만나게 되는데, 후에 이상정과 결혼을 하였단다. 이상정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형이라고 하는구나. 이상정, 이상화 형제와 함께 사진도 같이 찍은 것이 있는데, 그분들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사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했어.


2.

권기옥이 비행사가 되었지만, 우리나라 임시정부에는 전투기가 없었어. 공군 자체가 없었지. 조선총독부를 파괴하겠다는 당찬 꿈을 접을 수는 없었어. 권기옥은 중국 공군 소속에 있으면서 중국과 일본 간 전투에 참여한단다. 10여년 간 중국 공군 소속에 있으면서, 중일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쳤단다. 10여년간 비행사를 마치고서 권기옥은 중국 항공학교의 강사를 하기도 하고, 남편 이상정과 함께 독립운동도 꾸준히 했단다.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시켜 활동했고, 한국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작전에도 참여를 했단다. 그렇게 임시정부에 속해 있으면서 전투를 준비를 하던 와중에 조선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단다. 귀국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준비를 했어. 남편 이상정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먼저 귀국했어. 그런데, 귀국 두 달 만에 뇌일혈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단다. 얼마나 허망할까. 그런데 뜻밖에 소식 하나. 이상정인 고국에 부인이 있었다는 거야. 남편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속았다는 배신감

....

중국에 공산당이 득세하게 되면서 권기옥님은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피신했다가 1949년에서야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공군 창설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했어. 평생 조국을 위해 사시던 권기옥님은 1988 88세의 일기로 눈을 감으셨단다.

….

책은 썩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기옥님을 존경하는 마음은 절로 생기더구나. 다시는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여성 독립 운동가라고 하면 유관순 누나만 떠오르고 끝나곤 했는데, 권기옥님도 꼭 기억할 것이란다. 너희들도 꼭 기억해주길그럴 것을 기대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권기옥 위인전도 함께 사 두었으니, 너희들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그리고 또 다른 여성 독립운동가에 관한 책들도 찾아 읽어봐야겠다.


PS:

책의 첫 문장 : 겨우내 모란봉은 눈옷 속에 꽃잎을 감추고 있다.

책의 끝 문장 : 역사도 개인사도 그 순간에 새로 쓰여진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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