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 책은 마족의 위대한 공주였던 어느 여마신, 벼락을 마음대로 부려 번개공주라 불리며 오래전에, 우리가 12세기라고 부르는 시대에 한 인간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녀의 수많은 후손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그녀가, 이 세상에 돌아와 잠시나마 다시 사랑에 빠졌다 전쟁에 나서는 이야기다. 또한 여러 마족, 남성이든 여성이든, 날아다니든 기어다니든, 선하든 악하든 도덕 따위에는 무관심이든, 아무튼 온갖 마족에 대한 이야기이며, 2 8개월 28일 밤, 다시 말해서 천 날 밤 하고도 하룻밤에 걸쳐 이어졌던 위기의 시대, 혼란의 시대, 우리가 괴사(怪事)의 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 시대가 끝난 후 이미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우리 모두를 영원히 변화시켰다. 다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우리의 미래가 말해주리라.

 

(196-197)

진정한 현실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세상은 평범한 시민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사납고 기이하다. 평범한 시민은 진실을 외면하고 베일로 눈을 가린 채 무지한 상태로 살아간다. 베일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면 두려워지고, 확신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고, 결국 술이나 종교로 도피하게 된다.

 

(210)

이븐루시드가 가잘리에게, 티끌이 티끌에게 말했다. “비이성은 비이성인 까닭에 자멸하기 마련이오. 이성이 잠깐 토막잠을 잘 때도 있지만 비이성은 아예 혼수상태에 빠질 때가 많으니까. 결국 비이성은 영원히 꿈속에 갇혀버리고 마침내 이성이 승리할 거요.”

그러자 가잘리가 말했다. “인간이 꿈꾸는 세상은 자기가 만들고 싶은 세상일세.”

 

(231)

모든 사랑은 두 연인이 내심 스스로와 어떤 약속을 하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상대의 바람직한 일면을 보았으니 못마땅한 일면은 무시하겠다는 다짐이다. 사랑은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이다. 사랑은 인생의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준다. 그렇게 마음 속에 온기가 혹독한 추위가 남긴 상처를 치유해준다. 그렇게 마음 속에 온기가 피어날 때 연인의 결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예 무의미하고, 그래서 스스로와의 비밀 약속에 서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의심의 목소리는 침묵시킨다. 나중에 사랑이 시든 뒤 이 비밀 약속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더라도 꼭 필요한 어리석음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연인들의 믿음, 즉 진정한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싹튼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322)

역사는 얼마나 불완전한가! 반쪽뿐인 진실, 무지, 속임수, 가짜 단서, 착오, 거짓말 등의 오리무중 어딘가에 진실이 묻혀 있으련만 우리는 믿음을 읽어버리기 쉽고, 그래서 다 허깨비다, 진실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의 절대적 신념이 또 누군가에게는 망언이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이란 한낱 상대주의 궤변가의 주장만 듣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강력히, 정말 강력히 강조한다. 진실은 반드시 존재한다. 당시 걸음마를 시작한 스톰의 신기한 능력도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뚜렷한 증거였다. 스톰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며 우리는 진실이 진실로 탈바꿈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413)    

우리는 이성적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갈등이야말로 오랫동안 인류는 규정하는 서사였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 사이의 차이점, 예컨대 인종, 지역, 언어, 관습 따위는 더 이상 우리를 갈라놓지 못한다. 오히려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사로잡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 모습에 대체로 만족한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겠다. 우리는-더 넓은 의미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우리는-이 위대한 도시에 살며 이곳을 찬미한다. 강물이여, 흘러라, 그대 사이에서 우리도 흐르듯이, 물줄기여, 어우러져라, 멀리서 왔건 가까이서 왔건 우리 인류의 물줄기가 두루 만나 어우러지듯이! 우리는 여기 물가에서 갈매기떼와 군중과 더불어 즐거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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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속삭임
칼 세이건 외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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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사람들이라면 다들 칼 세이건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듯싶구나. 인문학적 지식과 감성적인 문체로, 광활한 우주와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책. <코스모스>를 읽은 이들이라면 그 책을 자신의 독서 목록 열손가락 안에는 꼭 뽑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칼 세이건이 쓴 소설 <콘택트>. 영화로 더 유명한 소설도 참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단다. <코스모스>란 책이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에 있고, 그 책에 대한 리뷰는 여전히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단다.

문득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칼 세이건으로 검색을 해보았단다. 그의 책들이 쭉 검색이 되었고, 우연히 중고서점에 <지구의 속삭임>이라는 책이 있길래 구입했단다. 지은이가 칼 세이건인데, 책 소개 읽을 필요 있겠니. 장바구니로 직행시켰지. 책제목도 지구의 속삭임. 얼마나 감성적이고 시적이니책을 받고 나서야 어떤 책인지 알게 되었단다. 태양계 밖으로 보낸 우주 탐사선 보이저 호를 지적 외계 생명체가 발견했을 때, 지구에 대한 소개를 위한 디스크가 있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바로 그 디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것이 바로 이 책 <지구의 속삭임>이란다. 지은이는 칼 세이건 혼자는 아니고, 디스크 제작에 참여했던 이들의 공저로 되어 있단다.


1.

1960년대부터 미국과 러시아(당시 소련)는 우주 개발에 힘을 많이 썼단다. 그러나 그렇게 우주선을 쏘아 올려도 끽해야 지구 궤도를 도는 게 고작이었고, 그나마 달에 유인선을 보낸 것이 큰 성과라면 성과였단다. 광활한 우주에서 인류가 직접 가볼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었어. 그게 인류의 능력의 한계이고 말이야. 그로부터 50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인류는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했단다.

비록 사람을 직접 태운 우주선을 달 밖으로 보내지는 못했지만, 무인 우주선을 보낸 적은 있었단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이저 1호와 보이저 2호였단다. 1977년 보이저 1호와 2호는 태양계의 외행성들을 탐사하고, 그 이후로 계속 우주로 나아가 태양계 밖에까지 나가 탐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단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니, 보이저 1호는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났고, 보이저 2호는 2018년 태양계를 벗어났다고 하는구나. 이 우주선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외행성들의 고화질 사진을 전송하였다고 하는구나. 태양계를 벗어난 그들의 임무는 이제 지구의 속삭임을 우주로 멀리 멀리 보내는 것이란다.


2.

이 보이저 호에는 지구를 외계생명체 알려주는 레코드 판을 함께 실었는데, 이것을 칼 세이건이 제안을 했다고 하는구나. 이 레코드판이 외계인들이 만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의 하나 만날 것을 가정해서 작업을 했다고 했어. 먼저 오랫동안 보존이 될 수 있도록 금박을 씌웠다고 했단다. 그래서 이 레코드 판을 골든 레코드라고도 불렀어. 그리고 사용법에 대한 내용도 기록해 놓았어. 물론 지구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모를 테니, 그림을 통해 사용법을 적어 두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 그 곳에 있는 내용들은 무엇일까. 각 전문 분야의 사람들이 자료들을 수집하고 회의를 통해서 선정을 했다고 했어. 지구를 대표할 음악 27, 55개 언어로 된 인사말, 지구에서 들을 수 있는 여러 소리들, 지구와 인류를 알려줄 수 있는 사진 118장을 담고 있다고 하는구나.

이런 자료들에 대한 소개도 이 책에서 자세히 해주고 있단다. 미국의 우주선이지만, 이 우주선은 지구를 대표하는 우주선으로, 각 자료들은 세계 곳곳의 자료들 중에서 엄선했단다. 여러 나라의 인사말도 실려있는데, 우리 한글도 포함되어 있었어.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 인류와 비슷한 지적 생명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될 것 같구나. 단지 너무 멀리들 떨어져 있어서 만날 수가 없을 뿐이지. 아마 인류가 멸망하고 지구가 사라지고 태양계가 사라질 때까지도 그런 외계 생명체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보이저 호에 실린 골든 레코드는 찬란했던 지구의 속삭임을 가지고 우주로, 우주로 뻗어가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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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금으로부터 수십억 년이 흐르면, 지구는 적색 거성으로 팽창한 태양 때문에 이미 숯덩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저 레코드판들은 그때도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한때-만일 인류가 좀 더 거창한 활동에 나서서 다른 세상으로 이주한 뒤라면 그 전에-머나먼 행성 지구에서 번성했던 오래된 문명의 소곤거림을 간직하고 우리 은하의 어느 머나먼 지역을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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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

보이저 탐사의 주된 목표는 이렇듯 대단히 풍성한 과학적 정보를 얻는 것이다. 보이저 탐사는 역사상 최초로 외행성계를 상세히 정찰할 작업이며, 태양계의 다른 행성 가족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영영 바꿔 놓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우주에 대한 미적 감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보이저호에는 또 다른 것도 실려 있다. 전파 발신기가 죽은 지 한참 지난 뒤에도, 보이저 우주선이 태양권계면을 넘은 지 한참 지난 뒤에도, 그 까마득한 미래에도, 지구의 인사를 담은 두 장의 레코드판은 언제나 꿋꿋하게 우주를 항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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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 보이저 호와 골든 레코드를 편지를 써서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띄운 것에 비유를 했는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단다. 끝이 없다고 하는 우주로 쏘아 올린, 지구의 메시지과연 어떤 이가 그것을 받아보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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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사람들은 보이저호를 그 속에 쪽지를 담아서 배의 난간 너머로 망망대해에 던져 보낸 유리병에 비교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병은 특수 제작된 것이고 쪽지는 연필이 아니라 컴퓨터에 갈겨 쓴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병을 광활한 하늘에 던져 보낸다. 우주의 해변을 걷던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우리 세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답은 우리의 먼 후손이 기대할 문제일 것이다.

============================


3.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실제 외계 지적 생명체가 보이저 호를 발견하고, 골드 레코드를 작동시켜서 지구의 속삭임들을 듣고 보게 되었다면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가정을 소설이나 영화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이저호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그런 소재를 다룬 유사한 영화가 있더구나.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우주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넓고 넓은 우주를 생각하고 있다 보면 나의 존재가 너무 미미해지면서, 고민거리나 스트레스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단다. 우주는 최고의 명상거리가 아닌가 싶구나. 그런데 도대체 누구 이 우주를 왜 만들었을까? 자연발생적이라고 하기에도 이해가 안가는 점이 많고도대체 빅뱅 이전에 무엇이 존재했던 것일까.


PS:

책의 첫 문장 : 1977 8 20일과 9 5보이저(Voyager)’라는 이름의 두 특별한 우주 탐사선이 우주로 발사되었다.

책의 끝 문장 : 우리가 희망과 인내를, 최소한 약간의 지성을, 상당한 아량을, 그리고 우주와 접촉하고자 하는 뚜렷한 열의를 지닌 종이었다는 사실을.


라지오스가 지구 대기권으로 떨어져서 타 버리기까지 버틸 수 있는 수명은 약 800만 년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정보의 상당량, 심지어 라지오스 제작 시점과 목적에 관한 정보마저도 소실될 수 있을 만큼 먼 미래다. 그 때문에 미국 국립 항공 우주국(NASA)은 내게 우리의 먼 후손에게 전할 일종의 인사말로서 라지오스에 부착할 작은 금속판을 디자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사말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수억 년 전에 지구의 대륙들은 맨 위 지도처럼 모두 붙어 있었다. 라이오스가 발사된 시점에는 지구의 모습이 가운데 지도와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800만 년 뒤에 라지오스가 지구로 돌아올 때는 대륙들의 모습이 맨 아래 지도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음을 담아." - P22

인간의 음악이 다른 행성의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연히 보이저호를 만나고 그것에 실린 레코드판이 인공물임을 인식한 생명체라면 그것이 귀환의 희망 없이 발송된 물건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음악보다도 그 제스처가 우리 메시지를 좀 더 분명하게 전달할지도 모른다. 레코드판은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시적인 존재로 보여도, 그리고 이 우주 탐사선이 아무리 조악해도, 우리는 스스로를 우주의 거주지로 여길 만큼은 알고 있답니다. 레코드판은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우리 안에는 스스로 이미 멸종했거나 못 알아볼 만큼 변했을 게 분명한 머나먼 미래의 미지의 발견자에게 닿고 싶어 할 만큼 크나큰 무언가가 있었답니다. 레코드판은 또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이든, 우리도 한때 별들의 거주지인 이 우주에서 살았고, 그리고 당신을 생각했답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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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빅토르 위고는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빈곤때문이며, 그 빈곤의 책임은 바로 사회에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범죄는 사회의 부조리와 무관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빈곤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인 여성, 어린이, 하인, 저교육층이 불평등 속에 살아가는 것도 남편, 아버지, 주인, 고소득층, 고교육층같은 기득권층의 책임이라고 작가는 주장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말의 저작권은 위고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27)

<모비 딕>에는 스타벅이라는 이름의 일등 항해사가 등장한다. 유명한 커피 전문점 이름인 스타벅스가 바로 <모비 딕>스타벅에서 따온 것이다. 스타벅스는 우리에게 매우 대중적인 장소가 되었지만, 스타벅이 등장하는 <모비 딕>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고전은 아니다. 그러나 영미권에서 이 소설이 누리는 위상은 대단하다. 미국에서도 작가가 숨질 때까지 이 소설의 존재감은 미미했는데, 작가 사후 재평가를 통해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58)

빅토르 위고는 건축물이란 건축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역량과 상상력이 아니라 그 사회 민중의 삶과 정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퇴적물이 바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건축물은 민초의 삶이 그대로 반영된 돌로 만든 책이며, 수백 년에 걸쳐 민중이 힘을 모아 쓴 역사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60-61)

위고는 우후죽순처럼 세상에 나오는 책을 바벨탑에 비유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완성해 가는 건축물과는 달리 너무나 쉽고 빠르게 생산해 내는 책의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21세기에 와서 책의 바벨탑은 더욱 거대해졌다. 책을 넘어서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도구도 생겨났다.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하는 속도, 그리고 그 양까지 15세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중세 시대에 노트르담 대성당이라는 돌로 된 책을 향유한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지금은 정보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졌다. 하지만 온갖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사유할 힘을 잃어 가고 있다. 가짜 정보와 가짜 뉴스라는 독버섯에 야금야금 희생당하고 있다. 어쩌면 위고는 이러한 오늘날의 병폐를 화려한 퇴보라고 우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74)

19새기 장편 소설가들은 주요한 이야기 전개와 관련 없는 부분까지 장황히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에 단편 소설과 희곡을 즐겨 쓴 체호프는 군더더기 같은 문장이나 불필요한 장치를 결코 끌어오는 법이 없었다. 체호프가 제시한 다음의 총 이론을 보자.

이야기와 직접 상관이 없는 것들은 단호히 없앤다. 1장에서 총이 등장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총을 꼭 발사해야 하고, 발사하지 못했다면 과감히 없애 버린다.”


(123)

존재 지향형 학생은 교사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머릿속에 주입하지 않고 이해하는 데 집중한다. 노트에는 주요 내용만 필기하되,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자기만의 문장으로 풀어 쓴다. 이런 학생은 그날 배울 내용과 관련해 사건에 배경 지식을 찾아보고 교과서에서 왜 이렇게 설명했을까 생각해 본다. 수업 시간에는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며 교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다른 학생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이며 자기만의 지식을 쌓아 간다. 이렇게 쌓은 지식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단순 암기로 쌓은 지식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학습에 대한 흥미도는 단연 존재 지향형 학생이 높다.


(132)

루소는 열두 살 미만의 아동기를 감각이 성장하는 시기로 보았다. 이 시기의 아이는 전원 환경에 둘러싸여 지내야 하며, 책을 통한 교육은 금물이라고 했다. 책을 읽힌답시고 오랫동안 앉혀 두는 것은 감각이 성장하는 데 방해되며, 심지어 재앙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루소의 교육론 중에서 오늘날 우리나라 학부모들에게 가장 극렬한 반대에 부딪힐 내용이다. 열한 살이 되도록 책 한 번 펼쳐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35)

루소는 <사회계약론> <에밀> 1762년 연달아 발표했다. 그때 프랑스 정부는 루소의 책을 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루소에게 치욕을 안겨 주었다. 루소가 책 속에서 강조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논리가 왕과 귀족들의 세상이었던 당시 프랑스 사회를 비판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든든한 밑거름이자 버팀목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립을 하는 데 사상적인 토대가 되었고, 미국은 실제로 사회 계약의 과정을 통해 민주 국가를 세웠다. 그런 한편 <에밀>은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여야 한다는 교육론의 뿌리가 되었다.


(154)

셰익스피어는 500년 전에 오늘날까지도 흔히 쓰이는 단어를 약 2,000개나 만들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인이 지금까지도 사용하는 우리말 단어를 2,000개나 만든 셈이다. 셰익스피어가 만든 대표적인 단어로는 addition(추가), bedroom(침실), belongings(재산), champion(우승자), fashionable(유행하는), gossip(소문), hint(암시), successful(성공적인), swagger(건들거리다)등이 있다.

여기서 마지막 단어 swagger가 바로 힙합 용어로 알려진 스웨그(swag)’ 또는 스웩의 원형이다. 지금은 스웨그가 자기만의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표현을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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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1-02-26 0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정말 감사합니다 !!!!

bookholic 2021-02-26 10:33   좋아요 1 | URL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책을 만나고, 그 책에서 좋은 책들을 알게 되었거든요~~
즐거운 금요일 되십시오~~^^
 
원더 (양장 특별판)
R. J. 팔라시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콩(책과콩나무) / 201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원더>라는 책은 영화를 먼저 알게 되었단다. 몇 년 전에 개봉한 영화인데, 그때 예고편을 보고 나서 너희들이 좀 더 커서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 그리고 그 영화의 원작소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시간을 빠르게 흐르고, 아빠가 몇 년 전에 생각했던, 너희들과 함께 영화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어. 그래서 너희들과 영화를 같이 보기 전에 먼저 원작 소설을 읽어 보았단다.

하악 안면 이골증이라는 얼굴 기형으로 태어난 어기스트. 얼굴이 거의 반쪽이 뭉개져 있었고, , , , 귀가 제 위치에 있지 않았어. 어려서부터 크고 작은 수술을 수십 번을 했지만, 여전히 남들에게 얼굴을 보여주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단다. 마치 심한 화상을 입어 녹아 내린듯한 얼굴. 그래도 어기스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 아빠, 누나가 있어서 씩씩하게 자라날 수 있었단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평범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어기스트는 항상 우주인 헬멧을 쓰고 다녔어. 자신의 얼굴을 가려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어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날은 할로윈이었어. 가면으로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으니까 말이야.

엄마가 홈스쿨링으로 어기스트를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는데, 중학교에 가게 되면서 일반 학교 진학을 하기로 했단다. 어기스트가 하기로 한 것은 아니고 엄마가 그렇게 결정을 했어. 분명 어려운 결정이지만, 언젠가는 한번은 넘어야 할 고개라고 생각했어.


1.

다행히 가려고 하는 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너무 착한 분이셨어. 그리고 입학 전에 교장선생님을 미리 만나러 가봤을 때, 교장선생님은 친구들을 소개시켜주었단다. , 줄리언, 살럿. 늘 그렇듯 그들의 시선이 평범하지는 않았단다. 그들의 어색한 학교 소개를 받았지만,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단다. 이제 본격적인 학교 생활 시작. 쉽지 않은 생활이었단다. 잭이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점심은 늘 혼자 먹어야 했단다. 그런 어기스트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한 친구가 있으니 서머였단다. 잭과 서머 이외 다른 친구들은 어기스트를 다들 멀리했단다. 심지어 어기스트를 만지면 전염된다는 이야기까지 퍼졌어. 그런 소문들을 들었지만, 어기스트는 참고 학교에 다녔단다.

할로윈 데이. 원래 준비하려고 했던 스타워즈 가면이 없어서, 작년에 썼던 스크림 유령 가면을 쓰고 학교에 갔단다. 그런데그런데잭이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어기스트처럼 생겼다면 자살하겠다는 심한 말을 했단다. 잭은 스크림 유령 가면을 쓴 이가 어기스트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분명 스타워즈 가면을 쓰고 온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잭의 속마음을 알게 된 어기스트는, 심한 배신감에 충격을 먹고 곧바로 집으로 와서 침대에 누워 울었단다. 어기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 받으러 가는 일도 하지 않았어.

어기스트의 누나 비아. 참 착하고 예쁜 누나란다. 집은 모두 어기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갔단다. 비아는 자신의 집을 조그마한 우주라고 생각했어. 어기스트는 태양이고, 나머지 엄마, 아빠, 자신은 그 태양을 도는 행성이라고 생각했어. 부모님들이 자신을 챙겨주는 것은 적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척척 잘해냈단다. 그런 점에 불만도 있고 힘들기도 했지만, 비아는 밝게 잘 자랐단다. 그런 비아에게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절친 미란다도 있었어. 미란다는 어기스트에게도 참 잘해주었고, 어기스트의 우주인 헬멧을 선물한 사람도 바로 미란다였단다. 그런데 한 가족 같은 미란다가 여름방학을 지나고 나서 비아를 멀리했단다.  멋을 부리는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처럼 화장도 하고 그랬단다. 비아는 그런가 보다 하고, 미란다와 멀리 지냈단다. 할로윈 이후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어기스트비아는 어기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어기스트를 잘 설득해서 학교에 다시 가게 했단다.


2.

할로윈 이후 어기스트는 학교에 다시 나갔지만, 잭을 멀리했단다. 잭은 어기스트가 왜 그러는지 당연히 몰랐고. 어기스트는 서머도 멀리 하려고 했어. 왜냐하면 서머도 일부로 친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서머는 그런 거 아니고 진심으로 친하고 싶어서 같이 하는 것이라며 이야기를 하고 어기스트도 그 말을 믿었단다. 이제 어기스트의 학교 친구는 서머뿐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따가운데도 서머는 어기스트와 친하게 지냈단다.

잭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어기스트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부러 친한 척 한 것이 맞지만, 어기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하다 보니, 어기스트는 똑똑하고 유머감각도 있는 재미있는 친구였어. 그래서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좋았는데, 할로윈 이후 자신을 멀리해서 답답했단다. 잭은 서머에게 그 이유를 아냐고 물어봤는데, 서머는 유령이라는 힌트를 주었단다. 잭이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다가 나중에 깨닫고 후회를 했단다. 줄리안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이 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하니까, 왕따 당할 것을 걱정해서 우발적으로 어기스트 흉을 보게 된 것이었거든. 이것이 모두 줄리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줄리안이 어기스트를 놀리는 말을 해서 홧김에 줄리안을 주먹으로 날렸단다.

이 일로 잭은 정학을 먹었지만, 자신의 진심한 마음으로 다시 어기스트에게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했단다. 어기시트는 잭의 용서를 받아주고 다시 친구가 되었단다. 이제 잭과 어기스트는 서로 집을 왕래하면서 공부도 같이 하고 놀기도 같이 놀았단다. 둘이 함께 한 과학 프로젝트에서도 입상을 하기도 했단다. 그리고 점점 어기스트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났단다. 어기스트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것이지.

….

수련회를 갔단다. 23. 처음으로 부모님과 헤어져 친구들과 잠을 자야 하는 어기스트. 그곳에서 어기스트와 잭이 상급학년 형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어 그 형들을 몰아낼 수 있었단다. 싸우면서 더 친해진다고 하잖니, 다른 친구들도 어기스트와 절친이 되었단다. 친한 친구들이 많이 생기니 어기스트도 학교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단다.


3.

잠깐 어기스트의 누나 비아와 미란다의 잃어버린 우정을 다시 찾은 이야기를 해줄게.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란다가 다시 비아와 친해지고 싶어했어. 하지만 멀어진 마음을 다시 가까이하기는 쉽지 않았지. 미란다가 비아를 멀리했던 것은 비아가 싫어서가 아니고, 화목한 비아의 식구들에 비해, 자신의 식구는 엄마와 아빠와 헤어져서 잠시 심술이 났던 거였어.

비아와 미란다 모두 연극동호회에 가입을 해서 미란다는 연극의 주연을, 비아는 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비아는 스태프 이외에 여자 주인공의 대역 역할도 했어. 여자 주인공이 무슨 일이 생겨서 연극을 못할 경우 대신 주연을 맡는 역할 말이야. 연극 첫날비아의 식구들이 연극을 보러 온 것을 보고, 비아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 그래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선생님한테 연극을 못하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미란다가 연극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아주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를 했단다. 그리고 이 일로 서로 서먹했던 감정을 모두 풀어내고 다시 절친이 되었고 말이야

일년이 금방 지나고 어기스트는 중학교의 첫 일년을 마칠 시간이었어. 종업식 행사의 주인공은 어기스트였단다. 어기스틑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면서, 상을 받게 되었거든. 그렇게 모든 이들을 미소 짓게 하고 소설은 끝이 났단다.

….

이 영화와 소설이 비록 실화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는 어기스트와 같이 본의 아니게 기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단다. 그런 이들이 소설 속 어기스트처럼 잘 풀리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란다. 그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늘 편견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아빠도 전혀 없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구나. 노력을 해야겠지.

이 책을 읽고 나서, 너희들과 이 영화를 함께 봤잖니소설도 좋고 영화도 좋았구나. 너희들도 재미있었다고 하니 다행이고너희들에게 아빠가 물어봤잖아. 주변에 어기스트 같은 친구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솔직한 너희들이 지금은 바로 답을 못했지. 처음부터 그런 편견을 버리기를 쉽지 않고, 처음부터 진심 어린 속마음을 알 수는 없을 거야. 이런 소설과 영화를 통해 그런 상황을 생각해보는 기회도 되고 말이야. 그런 점에서도 괜찮은 소설이었구나.


PS:

책의 첫 문장 : 나는 내가 평범한 열 살 소년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책의 끝 문장 : 너는 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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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1-02-26 0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도 좋았는데 책도 읽고 싶어지네요^^

bookholic 2021-02-26 00:58   좋아요 0 | URL
네, 책으로 다시한번 감동을~~~^^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28)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이런 시설에서 12년을 보낸다면 그 아이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똑 같은 옷, 똑 같은 식판, 똑 같은 음식, 똑 같은 교실에 익숙한 채로 자라다 보니 자신과 조금과 달라도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왕따를 시킨다. 이런 공간에서 자라난 사람은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평생 양계장에서 키워 놓고는 닭을 어느 날 갑자기 닭장에서 꺼내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 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양계장 같은 학교에서 12년 동안 커 온 아이들에게 졸업한 다음에 창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닭으로 키우고 독수리처럼 날라고 하는 격이다.


(51)

다양한 형태와 높이의 천장과 다양한 모양의 교실 평면도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대형 건물보다는 스머프 마을 같은 느낌이 나야 한다. 운동장 주변의 담장을 허물고 가까이에 가게를 두어 주변의 감시를 통해 안전한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방과 후 시민들이 운동장을 광장처럼 사용하고 마을 주민 전체가 아이들을 키우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의 학교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도전 정신이 없고 전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국민만 양산할 것이다.


(83)

현대사회의 특징들은 TV 방송 매체에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방송은 많은 사람이 보기 때문이다. 방송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 대중의 요구는 곧 그 시대의 정신이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에는 시대정신이 반영된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최초의 디자인이 건축되어 한 명의 건축가의 머리에서 나올지 몰라도 적어도 그 디자인이 건축되어 우리 눈에 보이려면 공사비 대출을 해 주는 은행, 건축주, 시공자, 허가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방송과 마찬가지로 건축물도 여러 명의 공통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지어지기 때문에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의 건축적 이해와 가치관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다. 좋은 도시에 살고 싶은가? 나부터 좋은 가치관을 갖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58)

건축 리모델링은 재즈와 같다. 이름 모르는 과거의 어떤 건축가가 수십 년 전에 디자인한 건물 위해 현재의 건축가가 이어서 연주하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앞선 사람이 펼쳐 놓은 기본 멜로디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음을 펼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과거의 것을 따라만 가서도 안 된다. 제약 가운데서 자신의 개성을 펼쳐야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리모델링한 건축가는 백 년 전에 지어진 기차역의 구조에 덧대어 아름다운 미술관을 건축했다. 기차가 다니는 곳은 조각품 전시장으로 거듭났다. 군데군데 무거운 쇠로 만들어진 철길에서 모티브를 따온 디테일들도 보인다. 이 공간을 보면 두 명의 건축가의 연주하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재즈 음악이 들리는 듯하다.


(222)

건축가 지오 폰티는 계단은 두 개의 다른 공간을 연결해 주는 멋진 건축 요소라고 말했다. 계단을 올라가면 걷기만 할 뿐인데 우리의 키가 자라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반대로 내려갈 때는 줄어드는 체험도 하게 된다. 계단 위에서는 우리의 눈높이가 계속 바뀌는데, 눈높이의 변화는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속 주인공 키팅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에 올라가라고 요청한다. 작지만 수십 센티미터 커지는 그 시점의 변화가 엄청난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일상에서 그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다. 어린아이들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데 어쩌면 키가 작은 아이가 어른보다 커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계단이어서일지도 모른다.


(294)

홍대 앞의 인기는 강남 못지않다. 사람들은 종로의 익선동과 부산 감천마을도 좋아한다. 이들은 강남을 흉내 내지 않는다.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홍대 앞은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익선동은 아파트 단지 대신 마당과 골목길을 가지고 있다. 신도시가 똑 같은 강남 방식으로 양산되면 지역별로 줄 세우기가 될 뿐이다. 후발 주자일수록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가들과 부동산 업자들이 강남만 따라 하게 두지 말고 재능 있는 건축가들을 제대로 고용해서 지역성이 드러나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진주는 진주다운 도시가 되고, 속초는 속초다운 도시가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앞선 지역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 개발, 그것이 진정한 지방정치고 지역 균형 개발이다.


(297)

영화 <블랙 팬서>는 겉으로는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이지만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시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사회의 잠재적 위험이 만들어지는 방식 등 현재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담긴 영화다. 그중에서도 건축가인 필자의 마음에 가장 남는 이야기는 벽과 다리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마지막에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라고 말한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벽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한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302-303)

이처럼 2층 양옥집은 보일러의 보급과 함께 생겨났다. 얼마 후 철근콘크리트와 보일러를 합쳐서 만든 아파트가 나타났다. 당시 아파트는 12층까지도 지어졌다. 고층 아파트가 부동산의 빅뱅을 일으킨 것이다. 역사 이래 하늘 아래 빈 공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건축 업자가 고층 건물을 지으면서 공중에다가 없던 부동산 자산을 만든 것이다. 조선 시대 경제 계급은 극소수의 지주와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제한된 땅덩어리에 살던 우리에게 부동산은 일부 부유층의 소유였을 뿐이다. 그런데 아파트로 인해 부동산이 늘어났고 직장에서 일해서 아파트를 사면 누구나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 경제의 파이가 커지고 중산층이라는 계층이 생겼고, 근대화가 시작됐다. 모든 것은 보일러에서 시작됐다.


(370)

제대로 설계된 공간은 갈등을 줄이고 그 안의 사람들을 더 화목하게 하고, 건물 안의 사람과 건물 주변의 사람 사이도 화목하게 하고, 사람과 자연 사이도 더 화목하게 한다. 좋은 건축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물론 건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갈등을 조금이라도 더 해소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는 화목하게 만드는 건축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될 수 있다. 세상을 더 화목하게 하는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건축을 조금씩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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