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베토벤의 곡을 연주하는 일은 단지 음악 작품을 연주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방면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우리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베토벤의 삶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인생을 조명하는 것이 음악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감화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62)

베토벤 역시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찰나의 순간 듣고 끝나는 무언가가 아닌, 영원히 신화처럼 남을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작품에 일일이 작품 번호를 매기고 엄격하게 관리했다. 작품 번호를 붙이지 않은 곡도 있지만 심혈을 기울여 애착이 가는 작품에는 꼭 작품 번호를 붙여 정식으로 출판했다.


(64)

침묵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 마음 안에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이 가득 차 있다면 이어질 음악이 온전하게 느껴질 리 없다. 그래서 침묵의 순간에는 고요함과 평온함을 유지해야 하며, 그 깊은 안정감에서부터 에너지를 일으켜야만 모든 격한 감정들을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88)

누구나 남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약점이나 트라우마가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강점으로 승화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현재 자신의 사정이 너무 불리하다고 해서 미래의 가능성마저 닫아버려서는 안 된다. 과거는 이미 끝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현재보다 더 중요한 시간은 없다. 과거의 시간에 매몰되어 절망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미래를 바꿀 현재의 선택이 더 중요하다.


(101)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제하고 나보다 남의 시선을 우선시하면서 연주하는 연주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좋겠다. 고전 음악가라고 불리는 그들이 오늘날까지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이유는 틀을 벗어난 혁신적인 정신을 음악에 녹여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이 세월을 관통해 우리에게까지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치의 위선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는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105)

시대를 앞서간 피아노 명인 호로비치 역시 비슷한 어록을 남겼다. 1986 1 23,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콘서트 홀에서 한 기자가 호로비치에게 사람들이 마지막 낭만주의라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나를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가진 최후의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개인적이지, 표준화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견해가 있는 반면, 오늘날의 피아니스트들은 비평가들의 의견에 자신을 맞추려고 하죠. 나의 예술적 유산은 19세기에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같은 기자가 음반 산업이 요구하는 완벽함을 강조하자 호로비츠가 보인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나의 연주를 매끈하게 손질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더듬기도 하지 않습니까. 걸을 때는 넘어지기도 하죠. 한마디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108)

음악이야말로 표현이 자유로운 언어다. 사회가 문학을 검열하고 억압했을 때 마지막까지 자유롭게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던 도구는 바로 음악이었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연주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누가 연주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 그들은 기계처럼 악보대로 연주하는 수준을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곡을 재창조한다. 이그나츠 프리드만이 연주하기 시작하면 즉시 그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나의 전폭적인 찬탄의 대상이다.


(109-110)

젊음이 가지는 눈부신 활력과 무모함은 그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장년의 지혜와 깊이 있는 열정은 장년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다. 간혹 젊은 음악가들이 왜 벌써부터 하얀 머리가 난 철학가처럼 심오한 분위기를 풍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나간 젊음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이 20대 때 작곡했던 초기 피아노 소나타의 열정과 활기를 그대로 표현해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140)

음악에서 말하는 템포는 속도가 아닌 시간을 뜻한다. 이탈리아어로 시간은 템포(tempo), 영어로는 타임(time), 프랑스어로는 떵(temps)인데, 굳이 여러 나라 언어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 모든 단어들이 라틴어 템푸스(tempus)’에서 유래된 것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여기서 (tem)’은 무언가를 자른다는 뜻으로, 즉 템푸스는 시간을 자른다.’ ‘시간을 나눈다.’라는 뜻이라고 보면 되겠다. 절을 영어로 템플(temple)’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자른다는 뜻의 에서 유래되었다. 속세에서 떨어져 있다는 뜻에서 템플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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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1-22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평 마지막 권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 옵니다 ^^

bookholic 2021-11-22 19:39   좋아요 1 | URL
마지막 권 기대됩니다..^^
쫌 바삐지만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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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최신 완역판) - 키케로에서 윌슨까지 세계사를 바꾼 순간들 츠바이크 선집 (이화북스)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17년 전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단다. 그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인물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 책에서 소개된 몇몇 인물들 관련된 책을 더 본 적도 있어. 그 이후에 그 책은 개정판으로 꾸준히 팔리고 있었단다. 그런데 올해 아빠가 읽었던 그 책에는 2개의 에피소드가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리고 모든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는 최신 완역판이 작년에 출간되었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고 말이야.

그래서 다시 한번 읽어 보게 된 것이란다. 몇몇 이야기는 예전에 읽었던 내용들이 기억났단다. 그러면서 아빠의 기억력이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모양이네, 살짝 미소를 짓기도 했지. 예전에 아빠가 읽은 책에는 없고, 이번 완역판에 있는 에피소드는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유럽 사람 발보아의 이야기와 윌슨 대통령의 좌절을 그린 이야기란다. 17년 전에 이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필력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큰 기대를 들고 책을 펼쳤고, 각기 에피소드들이 모두 꿀잼이었단다. 역사는 때론 한 사람의 광기 어린 행동으로도 바뀔 수 있고, 우연의 일들이 모여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재미있는 일화들로 보여준 것 같구나.


1.

첫 번째 에피소드는 로마 키케로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가 읽고 있는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에서 찌질남으로 나왔던 키케로에 대한 재평가란다. 슈테판은 키케로를, 로마공화정을 죽음으로 지키려고 했던 휴머니스트로 평가했단다. 키케로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다 보니 그와 척을 두었던 카이사르, 옥바비아누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민주적인 공화정을 망친 사람들로 안 좋게 평가했단다. 물론 그가 때론 비겁하고 때론 고집도 부리고 때론 아첨꾼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민주주의 상징인 공화정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을 더 크게 보았단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봤을 때는 그와 척을 두었던 이들이 왕정으로 가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반대파인 공화정 측에 섰던 것으로 보이기도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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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는 쉬지 않고 일단 덕에 온갖 관직을 죄다 맡았고 온갖 지위에 올랐다. 포룸에서 소송을 벌였고, 전장에서 군단을 지휘했으며 집정관이 되어 공화국을 다스렸고 총독이 되어 속주를 다스렸다.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었다가 큰 빚을 지기도 했다. 팔라티움 언덕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가졌지만, 적들이 그 집을 불태우고 부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중요한 논문을 썼고 길이 남을 연설을 하기도 했다. 자식들을 얻었지만 잃기도 했다. 용감하기도 했지만 비겁하기도 했으며, 고집을 부리다가도 금세 아첨꾼이 되곤 했다. 칭송도 많이 받고 미움도 많이 받았다. 이 변화무쌍한 인물은 모순투성이지만 광채를 가득 뿜어내고 있다. 한마디로 키케로는 당대에서 가장 매력이 넘치는 흥미진진한 인물이다. 마리우스로 시작해서 카이사르로 끝나는 파란만장한 40년 세월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키케로와 끈끈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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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는 오스만 튀르크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가 어떻게 동로마를 점령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란다. 메흐메트가 술탄이 된 것은 1451년이었어. 그는 술탄이 되고 나서 지상 목표로 잡은 것인 비잔티움 함락이었단다. 당시 동로마제국은 이미 다 무너지고 수도인 비잔티움만 남아 간신히 생명을 연명하고 있었단다. 힘은 약화되었지만, 지형적으로 유리하고 성 전체를 둘러싼 강력한 성곽으로 철옹성처럼 무너지지 않고 있었어. 하지만 술탄 메흐메트는 수단과 방법과 가리지 않았어. 심지어 배를 들쳐 매고 산을 넘어가는 무모한 짓까지 말이야. 그런데 그 무모한 짓이 대성공을 거두었단다. 이렇게 성 안으로 진입한 오스만 튀르크는 오랜 역사를 가진 로마의 마지막 숨통을 끊었단다. 그로 인해 이 장면은 세계사에서 무척 유명한 장면이 되었단다.

….

세 번째는 바스코 누녜스 발보아라는 사람의 이야기란다. 풀 네임은 낯설지만, 발보아라는 이름은 익숙한 이름이었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유럽 각국은 신대륙을 차지하려고 몰려들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페인 출신의 발보아였단다. 그는 함께 온 군대의 일원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를 하고 궁지에 몰렸어. 어차피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데, 소문으로만 듣던 또 다른 거대한 바다를 발견하게 된단다.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는 보지 못한 바다 태평양이란다. 그러니까 발보아는 태평양을 최초로 본 유럽 사람으로 역사에 남았단다. 하지만, 나중에 그의 반란을 진압하러 온 스페인의 군대에 붙잡혀 참수당하고 만단다. 잘 알다시피 당시 유럽의 정복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단다. 이 책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불완전한 생명체들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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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이제껏 발보아는 왕권에 반기를 든 뻔뻔한 무법자에 불과했고 카스티야 법정에서 교수형이나 참수형을 선고받을 처지였다. 그런 사람이 막강한 추장의 처소를 방문하는 것을 계기로 세계사에 남을 결정을 내리게 된다. 코마그레 추장은 널찍한 석조건물에서 그를 맞이한다. 집에 가득한 사치품을 보며 발보아는 깜짝 놀란다. 코마그레는 손님에게 자발적으로 4천 온스나 되는 금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추장이 놀랄 차례다. 최고의 예우를 갖춰 영접한 신의 아들들이, 신을 닮은 위풍당당한 이방인들이 금을 보자마자 망나니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사슬 풀린 개처럼 검을 뽑아 들고 주먹을 휘두르며 서로 달려든다. 다들 악을 쓰고 날뛰면서 금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든다. 추장은 기가 막혀서 이 미친 짓거리를 경멸스럽게 지켜본다. 지구 끄트머리에 사는 자연인들은 문명인에게 자신들이 이뤄낸 온갖 정신적이고 기술적인 업적보다도 한 줌의 누런 금속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일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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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헨델이 위대한 걸작 <메시아>를 어떻게 작곡하게 되는지 이야기해주고 있어. 뇌졸중으로 오른쪽 반신 불구가 되었다가 온천 치료로 낫게 되는데 헨델은 기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건강을 되찾은 헨델은 마치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3주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작곡에 매달려 <메시아>를 작곡하게 되었대. 헨델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작곡한 것이 아니라 신이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현대 의술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 회복하기 쉽지 않은데 그렇게 회복하여 젊었을 때처럼 잠도 자지 않고 3주 동안 줄줄 악성이 떠올랐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겠구나.

다섯 번째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로 유명해졌다가 오늘날 프랑스 국가(國歌)가 된 <라 마르세예즈>를 작곡한, 군인이자 음악가인 루제 드 릴에 관한 이야기란다. 평범했던 그가 하룻밤에 작곡한 그 곡. 그 곡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대표곡이 없는 루제 드 릴. 이 곡의 흥망성쇠와 함께 자신의 처지도 똑같이 변했던 삶을 살았더구나.

….

여섯 번째 이야기는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 관한 이야기란다. 나폴레옹의 운명을 가르게 된 그 전쟁. 오랜 전투 끝에 유능한 장수들이 죽어나가고 능력이 아닌, 윗사람이 모두 죽어 어쩔 수 없이 원수가 된, 평범한 사람 그루쉬. 그가 잘 하는 것은 지시한 내용을 잘 따르는 일이었단다. 나폴레옹이 그에게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을 떼어주면서 시킨 일은 프로이센 군대를 추격하라는 것. 그런데 며칠 동안 추격했지만 프로이센 군대는 보이지 않았어. 아마 다른 경로를 가거나 프로이센의 작전이 바뀐 듯. 하지만, 그루쉬는 자신이 맡은 임무는 프로이센을 추격하는 일이라면서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프로이센을 찾았단다. 그러다가 워털루에서 폭음이 들려왔어. 부하들이 워털루로 가서 나폴레옹을 돕자고 했지만, 그루쉬는 그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아니라고 했어. 한편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백중세였던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그루쉬를 기다렸단다. 군대를 이끄는 원수라면 그 정도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하도 안 와서 전령을 보냈지만, 그 전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다음에야 그루쉬를 만났단다.

….

일곱 번째 이야기는 74살의 괴테가 19살 울리케를 사랑하는 이야기란다. 누가 들으면 노망이 들었다고 하겠지만, 괴테의 이 사랑으로 다시 젊음을 되찾은 듯, 다시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 작품들 중에 괴테의 대표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가 만들어졌대. 괴테의 나이 81살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노년의 사랑이 없었다면 역작은 없었을지도 몰랐다는역시 사랑은 사람을 건강하고 젊게 만드는구나. 아마도 사랑을 하면 호르몬의 변화가 생겨서 그럴 것 같구나.

여덟 번째는 서터라는 사람의 이야기란다. 신대륙을 발견 후 서부에서 금이 발견되어 골드 러쉬가 일어나기 직전 이야기는 시작된단다. 서터라는 사람은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의 땅을 싼 값에 얻게 된단다. 우연히 그곳에서 금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이 엄청난 금맥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돼. 이 비밀이 유지되기 어렵겠지. 소문이 나서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단다. 몰려든 사람들은 그곳에 건물을 짓고 금을 캐고 그랬어. 그 땅은 모두 서터의 소유였는데 말이야. 나라의 틀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많은 사람들은 상대하기 어려웠던 서터. 그래도 소송을 걸 수 있었고, 그 승소를 하게 되었단다.

이젠 최고 갑부가 되는가 싶었는데, 당시 서부가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사회가 아니었어. 무법자가 판을 치고 총 잘 쏘고 힘 있는 자가 살아남는 사회였지. 아무튼, 서터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폭동과 약탈이 일어났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 그리고 이후 거렁뱅이로 삶을 마감했다고 하는구나. 엄청난 금맥을 자신의 땅에서 발견했지만, 아직 나라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신대륙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며 살았던 서터, 불쌍하구나.

….

아홉 번째는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사형 장면이란다.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사형 집행 직전에 짜르의 사면으로 풀려난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는 유명하단다. 이 이야기가 아홉 번째 이야기인데, 독특하게 시()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단다.

열 번째는 사이러스 필드라는 사람이 이야기란다. 그가 한 일에 비하면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것 같구나. 성공한 사업가로 돈이 엄청 많은 사람인데 그 많은 돈으로 무모해 보이는 사업을 했단다. 그것은 미국과 영국 사이 대서양인 해저 케이블을 설치한 사람이란다. 아이디어는 전기기술자 기즈번이라는 사람인데, 이 무모하고 성공을 보장받지 못한 사업을 한 이가 바로 사이러스 필드라는 사람이란다.

아빠가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가능한 일일까 싶은데, 그 당시에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하다니정말 돈이 많거나 정말 도전 정신이 셌거나두 번 실패하고 세 번째 만에 성공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젠 유럽의 소식을 바로 미국에서 알 수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세 번째 성공이 얼마 못 가 불통이 되었다고 하지만 다시 설치하여 또 성공. 그의 무모한 도전은 그를 더 큰 돈방석에 앉게 만들었다고 하는구나.

….

열한 번째 이야기는 희곡의 형식으로 썼단다. 지은이 슈테판 츠바이크는 글을 쓰는 형식은 구애 받지 않고 다양하게 쓰시는구나. 역시 천재인 것 같구나. 희곡으로 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마지막을 그렸단다. 1910 10월 러시아, 톨스토이의 나이 83. 집에서 평온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었지. 악처가 있긴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 당시 러시아는 혁명 전야로 긴박한 상황이었어.

어느날 젊은이 둘이 톨스토이를 찾아왔어. 톨스토이의 글들을 읽고 그에 영향을 받아 혁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도와달라고 온 젊은이들에게 톨스토이는 혁명을 지지하고 않는다고 이야기했어. 평온하게 지내는 83살의 노인이게 무슨 혁명하지만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톨스토이는 점점 생각이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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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266)

선생님, 오직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부자라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굶주리며 평생을 지주의 지배 아래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형제의 사랑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느라 지쳐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리기보다는 주먹을 휘두르게 될 겁니다. 돌아가실 날이 머지않으신 선생님께 감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세상은 피로 뒤덮일 겁니다. 지주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자녀들까지 목숨을 잃고 능지처참을 당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사악한 자취를 몽땅 없애려면 그래야 합니다. 선생님이 그릇된 선택을 하셨음을 살아생전에 직접 보시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님이 평화로이 눈을 감으실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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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안일하게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젊은이들이 자신을 일깨웠다고 생각했어. 오랫동안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았던 악처 소냐와 헤어지기로 했어. 그동안 자신이 양심의 평화 대신 집안의 평화를 선택해서 살았는데,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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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이토록 한결같다니, 러시아 청년들은 정말 대단해! 이들은 모든 정렬과 힘을 증오와 살인에 쏟고 있어. 그것이 마치 성스러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들은 내게 좋은 일을 해 주었어. 두 청년은 나를 흔들어 깨웠어. 정말이지 그들 말이 옳아. 지금이야말로 나약함을 떨쳐내고 내 말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야.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 아직도 주저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올바른 것은 젊은이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니까. 젊은이가 스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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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언도 새로 작성해서 자신의 저작권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하고, 딸 샤샤와 주치의만 데리고 집을 떠났단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편안한 집이 아닌 좁은 기차역에서 마무리했단다. 톨스토이를 찾아온 두 젊은이로 죽어가던 톨스토이에게 다시 열정적인 삶을 주었던 것이야.

열두 번째 이야기는 위대한 2등 로버트 스콧 대령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7년 전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읽고 다른 책들을 찾아보았다고 했잖아. 그 중에 한 권이 스콧 대령이 남극 탐험하면서 죽기 전까지 썼던 <남극일기>란 책이란다. <남극일기>란 책은 정말 좋은 책이란다. 너희들도 나중에 꼭 읽어보길 바란단다. 최초의 남극점 정복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고, 그 어려운 길을 떠나 도착을 했는데, 자신보다 조금 빨리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The winner takes it all.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남극의 험한 날씨가 아닌 그런 좌절감이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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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인류 역사상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지구의 남극은 수천 년 동안, 아니 어쩌면 세상이 개벽한 이래로 인간의 눈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이었는데 찰나에 불과한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사람이 찾아온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두 번째이다. 한 달이 백만 번이 되는 기 세월 가운데 딱 한 달 차이로 2등이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1등이 모든 것을 얻고 2등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지난 몇 주, 몇 달, 몇 년 동안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숱한 고통을 견디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건만 이 모두가 말짱 헛수고라니! “그토록 애를 쓰고 고생을 하며 아픔을 견뎌낸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 스콧은 일기장에 이렇게 쓴ㄷ다. “이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원들은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지쳤지만,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희망을 잃은 사형수처럼 그들은 극점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환호하며 그리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다들 말 없이 지친 몸을 끌고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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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이야기는 스위스 망명 중이던 레닌이 어떻게 러시아에 귀환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란다. 스위스 망명 중에 그가 레닌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 보고, 그저 성실한 독서가로만 알려졌다고 하는구나. 그런 그를 봉인 열차를 태워 몰래 러시아로 보낸 것은 프로이센 정부러시아가 전쟁에 관심을 못 갖도록 러시아 국내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목적으로 레닌을 러시아에 보낸 것이란다. 그런데 그 레닌이 그 엄청난 혁명을 일으키게 될 줄 알았겠니.

….

마지막 열네 번째 이야기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이야기란다. 윌슨 대통령은 이상주의자였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리뷰 회의격인 파리강화회의(1919)에 참석을 했는데, 윌슨 대통령은 패전국까지 모두 아우르는 동맹 조직을 만들자고 했어. 하지만 실제 전쟁에 참여했다고 생고생을 한 승전국들은 패전국으로부터 전쟁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 결국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윌슨 대통령은 건강도 안 좋아져서 귀국을 했다고 하는구나. 결국 승전국들만 참여하는 반쪽 짜리 국제연맹이 결성되었어.

이렇게 일부 국가들만 참가해서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유지되겠니. 얼마 못 가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다. 위에서 이야기한 파리강화회의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의미가 있는 회의였단다. 1918년 결성한 독립단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이라는 분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보냈단다.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만큼, 그들에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말이야. 하지만, 정부 대표가 아니라면서 문전박대를 당했대. 나라 잃은 약소국을 돕겠다면 그런 걸 따지지 말고 도와주어야 진정한 강대국이지.. 쯧쯧. 1919 4월 임시정부가 세워진 다음 임시정부의 도움으로 우리나라 독립에 관한 자료 등을 다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도 우리나라 독립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아 강대국들은 약소국의 독립 의지를 무시했던 것 같구나. 그리고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쪽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이야기를 무시했던 것 같구나.

이렇게 이 책에 소개된 14개의 이야기를 간략히 이야기해보았단다. 이 책을 읽기에는 지금은 너희들이 어린 것 같고, 너희들이 나중에 고등학생 정도 되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구나. 아빠가 잊지 말고 이 책을 추천해 주어야겠구나. 너희들 취향이 아니면 안 읽어도 되고~~


PS:

책의 첫 문장: 영리하기는 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남자가 자신보다 강한 자와 마주칠 때 가장 현명한 처신법은 강자를 피해 가는 것이다.

책의 끝 문장: 우리 유럽을, 수천 년 내내 평화와 단합을 갈망하면서도 이뤄내지 못한 그 불행한 땅을 뒤돌아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성격과 품성에는 여러 요소가 희한하게 뒤섞여 있어서 설명이 어렵다. 그들은 여느 기독교도보다도 더 경건하고 신앙이 돈독하다. 열렬히 하느님께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지르곤 한다. 용감히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견디면서 영웅답게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지만, 지극히 야비한 방식으로 서로를 속이며 싸우곤 한다. 그런가 하면 한심한 짓을 벌이는 와중에도 새삼 명예를 지극히 존중하는 면모를 보이며 자신들의 과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놀라울 만치 정확히 파악하는 족속이 바로 그들이다. 발보아는 하루 전에는 묶여서 저항도 못하는 죄 없는 포로들을 사냥개들에게 던져주고 아직 따뜻한 사람 피를 뚝뚝 흘리는 짐승의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흐뭇해했다. - P94

그러나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운명은 야릇한 변덕을 부리며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에게 내맡기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세계사에서 몹시 불가사의한 순간이 되곤 한다. 어쩌다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운명의 실마리를 손에 쥐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해하기보다는 겁에 질리기 마련이다. 영웅들이 세계를 놓고 벌이는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면 엄청난 책임을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벌벌 떨다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운명을 놓쳐버린다. 이런 경우 힘차게 기회를 움켜쥐고 위로 올라서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위대한 존재가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기회를 한 번 놓친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다. - P160

위대한 순간이 속세의 삶을 사는 인간을 찾아 내려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엉겁결에 불려 나온 사람이 그 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모진 복수를 당하게 된다. 평온한 시절에는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과 같은 시민적 미덕들이 불길 속에 맥없이 녹아내리고 만다. 웅대한 순간은 늘 천재만을 택해서 불멸의 형상을 부여하는 반면, 우유부단한 자를 경멸하며 밀쳐낸다. 지상의 또 다른 신이기도 한 운명의 순간은 불 같은 팔로 대담한 자만을 들어 올려 영웅들의 천국으로 들여보낸다. - P181

위대한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곧잘 그가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떠나 멀리 도망쳐야만 하지요. 이렇게 된 것이 사필귀정입니다. 여기서 돌아가신다면 그 분의 삶은 완성되고 신성해질 겁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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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19 00: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은 14개의 역사 에피소드 책이군요 ㅋ 저는 평전인줄 알았는데 😅 17년 전에 이 책을 접하셨다니 부럽고 대단하십니다~!!

bookholic 2021-11-19 00:22   좋아요 3 | URL
얼마 전 같은데 17년이나 흐르다니....
17년이 휘리릭~~
즐거운 불금 되세요~~~~^^

scott 2021-11-19 00: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입문자용으로 이 책 쵝오!
몇번을 읽어도 소설 처럼 재미가 가득!!

분명 북홀릭님 아드님과 따님도 이책 좋아 할 것 같습니다. ^^

bookholic 2021-11-19 00:24   좋아요 2 | URL
우리 애들이 지금은 역사가 싫다고 합니다... ㅠㅠ
역사책 같이 읽어보자고 하면 ‘놉‘~~~ㅎ
여유로운 금요일 되시길~~~^^

mini74 2021-11-19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세련되게 바뀌었군요. 저는 거꾸로 읽는 세계사 아이 읽으라고 사줬지민 sf만 읽고있네요. 그래도 읽는게 어디야라며 사달라는 책 사주고 있습니다 ㅎㅎ저희 아인 어릴적 역사속으로 숑숑~ 책 좋아했습니다 ㅎㅎ

bookholic 2021-11-20 20:02   좋아요 1 | URL
그렇죠~~^^ 요즘 같은 시대 어떤 책이든 재미있게 읽으면 good이죠..
저도 이젠 가끔 같은 책을 같이 읽는 경우가 있는데,
재미가 솔솔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바람돌이 2021-11-19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저는 이 책 십몇년전에 읽었는데 안 읽은 줄 알고 또 읽었다죠. 진짜 문제는 다시 다 읽을때까지도 제가 이 책을 예전에 읽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요. 그럼 어떻게 읽은거 알았냐고요? 어쩌다가 예전에 알라딘에 쓴 글을 찾다가 봤어요. 떡하니 예전판에 써놓은 제 리뷰를..... ㅎㅎ

bookholic 2021-11-20 20:04   좋아요 1 | URL
ㅎㅎ 아니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산 책을 모르고 또 사는 경우랑 막상막하이네요~~
옛 리뷰와 다시 쓴 리뷰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합니다 ㅎㅎ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27)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벗겨 낸 세상의 비밀을 한 겹씩 먹으면, 어떤 비밀은 소화되고 흡수되어 양분이 되고, 어떤 비밀은 몸 구석구석에 염증을 만든다. 비밀의 한 꺼풀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의 시스템은 그걸 먹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시기가 너무 이르면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거나 목이 막혀 죽기도 하고, 너무 늦으면 비밀을 흡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시켜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빈 몸이 된다.


(49)

감정에 가라앉는 건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고, 무언가에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테면 현재가 울 때마다 미래는 현재를 울게 만든 원인을 찾아 없애는 식이었다. 놀리는 애가 있으면 찾아내 혼내거나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시험을 망쳤을 때는 울어 봤자 성적이 바뀌지 않으니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어 단어나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풀라고 말했다. 몇몇 친구는 그런 미래의 화법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나인과 현재는 그런 미래를 좋아했다.


(112)

찰나의 표정이란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비추는 호수의 수면 같은 것이다. 조그만 충격에도 금방 흩어지고 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한때,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것이다. 그러니 원망할 수가 없다. 미워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안쓰럽다는 걸, 불쌍하다는 걸, 가엾다는 걸, 애잔하다는 걸. 때때로 어떤 이들의 표정은 파도같이 잔잔하게 밀려오다 부서지고 흩어진다.


(118)

우연. 핑계로 쓰기는 좋지만 실상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치사한 단어.


(119)

우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난다. 세상이 정말 정해 둔 것처럼. 쥐 죽은 듯이 기다리다가 해결사가 나타나면 그제야 소리친다. 꽁꽁 숨어 있다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다가. 이렇게 갑자기.

정말 치사하게.


(189)

살아간다는 건, 적응한다는 건, 익숙해진다는 건, 버텨야 한다는 건, 존속한다는 건, 그러니까 끈질기게 존재한다는 건, 세계라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무게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지한다는 건 지킨다는 것이고 동시에 버린다는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버려야 하는 건 존재했던 모두다.


(376)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411)

이 꽃이 처음 싹을 틔웠을 때는 이 세상이 지구였는지도 몰랐을 거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있는 힘껏 세상 밖으로 나와 봤겠지. 물을 머금지 못하는 흙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과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시련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다른 씨앗들처럼 일찍이 삶을 포기했을 텐데, 땅에 있을 때부터 나인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밖에 하지 못해 기어코 세상에 나왔다. 그렇지만 나인은 후회하지 않는다. 이 행성이 자신의 행성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외롭지 않다. 후회한다고 해서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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