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

필요한 내용을 찾았는지 한동안 집중해서 읽던 산아가 사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오늘 면접에서 받아 온 옛날 건축에 관한 사전이라 설명하고 몇몇 용어를 알려두었다. 중수는 손질하여 고치는 것, 중창은 다시 짓는 것, 재건은 크게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한옥에서 문은 창살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 달라서, 세로살을 꽉 채우고 가로살을 위아래와 중간에만 넣은 건 세살문, 가로살과 세로살을 다 채운 문은 만살문, 문 중간에 빛이 들어갈 수 있도록 사각형이나 팔각형으로 작은 창을 낸 문은 불발기문, ‘자 형태로 살을 짠 문은 완자문, ‘자 무늬가 있으면 아자문이라 한다고.


(84)

학생 수가 많아서 그런지 교실은 마치 퍼즐판처럼 세밀한 경계로 각자 나뉘어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서른명도 되지 않는 석모도에서 그물처럼 성글었던 구분들이 여기서는 한층 촘촘해졌다. 어디 사는지, 출신 초등학교가 어딘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느 학원을 다니는지가 너무 중요한 기준이었다. 내 하굣길을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였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각자 학원 승합차를 타고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158)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 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344-345)

우리는 방을 나와 서로의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은 체 인사하고 퇴근했다. 나는 차창을 열어놓고 속력을 내어 섬으로 돌아갔다. 얼른 가서 무화과나무가 있는 마당을 지켜보며 마루에 누워 섬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정작 마을에서는 파도가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물결치는 소리만이 섬 소리의 전부는 아니었다. 배를 타고 나갔다 빈 배로 돌아온 사람들의 불평 소리, 어느 집에서인가 쓰레기를 쌓아놓고 타닥타닥 태우는 소리, 밥을 짓거나 부엌에서 그릇을, 외할머니가 설음질이라고 부르던 것과 똑같이 설렁설렁 닦는 소리, 말린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들의 착지, 마을 노인정에서 들려오는 노래방 소리, 소라껍데기에 귀를 가져다대고 그 안에서 바닷소리를 발견해내듯 그런 섬의 소리를 변별하다보면 다시 평정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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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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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해줄 책은 이미리내 님의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우연히 알라딘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책이고 귀가 얇은 아빠는 출판사의 광고성 책소개에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단다. 미국의 대형 출판사와 선인세 계약을 맺는 등 여러 나라에서 출간이 확정되었다는 내용이 아빠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단다. 지은이 이미리내 님은 스스로 자신을 미국 교포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고 했는데, 아빠도 작가의 약력을 자세히 읽기 전까지는 미국 교포인 줄 알았어. 왜냐하면 이 책은 영어 원서가 있고, 번역가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야. 최근에 외국에 있는 우리나라 교포들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는 일이 많아져서 이 책도 그런 책들 중에 하나인 줄 알았어. 그런데 책 앞에 한국어판 서문을 읽고 나서야 지은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렇다면 왜 한글이 아닌 영어로 소설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그 이유도 한국어판 서문에 나와 있었단다. 지은이 이미리내 님은 20살까지는 우리나라 일반 학교에 다녔고 20살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대. 그리고 나중에 결혼을 하고 남편이 홍콩으로 발령을 받아서 홍콩에서 살았는데 그곳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하고 위해 대학원을 들어갔어. 홍콩이다 보니 영어로 가르치는 대학원을 들어간 것이고, 영어도 문예 창작을 공부하게 되어 소설도 영어로 쓰게 되었지,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는구나. 그렇게 영어로 쓰다 보니 우리나라보다 영미권에 먼저 소설이 소개가 되었고, 단편 소설로 상도 받았다는구나. 그리고 이번에 첫 장편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8 Lives of a Century-old Trickster)도 영어로 써서 영미권에 먼저 출간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제를 모으게 되자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하게 된 것이란다.

출판사의 광고성 책소개가 거창할수록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는데, 기대 이상이었단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꿰뚫은 삶을 산 한 여인의 이야기인데 무척 재미있었어. 일제 시대 우리의 아픈 역사도 담겨 있고, 이후 분단 국가의 아픈 역사도 담겨 있었단다. 이 소설을 영어로 쓰셔서 우리나라 현대사를 외국에 소개했다는 점에도 지은이를 칭찬하고 싶구나. 한글이 아닌 영어로 소설을 쓰신 것도 잘 하셨네.

 

1.

그럼 지금부터 책 이야기를 해줄게. 황홀요양원에서 부고 담당으로 일하는 이새리는 흙을 먹는 괴짜 할머니, 묵미란 할머니를 알게 되었어. 묵미란 할머니는 새리에게 부고를 써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여덟 개의 단어로 이야기해 주었단다. 그런데 그 단어들이 예사로운 단어들이 아니었어.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한 할머니의 인생을 대표할 만한 단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 어떤 삶이길래 저런 단어들을 나열했을까? 궁금증이 확 늘어나더구나. 그런데 위 단어들은 여덟 개가 아니고 일곱 개였단다. 나머지 하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할 모양이구나. 어떤 사연인지 묵미란 할머니는 긴 이야기를 하게 된단다. 책의 순서는 시간 순서가 약간 섞여 있는데 그것도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어. 나중에 시간 순서대로 짜맞추면서 이전에 읽은 부분의 궁금했던 떡밥들이 하나씩 수거되는 기분이었단다.

시작은 다섯 번째 인생, 1961년의 이야기란다. 참고로 다섯 번째 인생은 단편으로 먼저 출간되어 미국에서 무슨 상도 받았다고 했어. 다섯 번째 인생 1961년의 이야기는 처음 읽을 때는 어찌된 사연인지 궁금한 부분들이 많은데 다른 인생들을 읽다 보면 어떤 일이 있는지 이해가 간단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다섯 번째 이야기를 쭉 해볼게. 1961는 임진강변 금파리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어. 여기서 는 묵미란 할머니는 아니고 또 다른 화자란다. 그 동네에는 임진강변에 돌아다니는 미친 여자가 있었단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마을마다 정신 나간 미친 사람이 하나둘 있는 것은 예사이던 시절이었어.

사람들은 그 여자를 처녀귀신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여자가 돌아다니면서 소리내는 것을 흉내내어 야다다라고 불렀단다. 하지만 는 그 여자를 얄루라고 불렀어. ‘얄루도 그 여자가 흥얼거리는 말 중에 하나였거든. 주석으로 얄루는 압록강의 영어 발음이라고 하는구나. ‘는 그 여자에게 동정심 또는 연민 또는 어쩌면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어. 어느 비 오는 날 는 메기를 잡으러 갔다가 그만 지뢰를 밟고 정신을 잃었단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전쟁 때 뿌린 지뢰가 터지지 않고 있다가 비 오는 날이면 떠 내려와 사고가 나기도 했는데 가 그만 그 지뢰를 밟은 거야. 정신을 잃었다가 깼다 잃었다가 했는데, 얄루가 자신을 안고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미친 여자로 알려진 있던 얄루가 말이야.

병원에 한참 있다가 퇴원을 했는데 친구 이 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어. 용의 형 이 얄루를 찾아가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둘이 몸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얄루의 몸 속에서 권총이 나와서 완이 빼앗았고 도망가는 얄루를 향해 권총을 쐈는데 맞추지는 못하고 얄루는 그 길로 도망을 갔다고 했어. 그후 얄루의 행적은 모른다고 했어.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얄루가 가지고 있던 권총이 북한 권총이었다는 거야. 그러니까 미친 여자가 아니고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이었다는 거지. 미친 척 하면서 남한과 미군부대의 정보를 빼간 걸로 의심되는 상황. 서울에서 조사하러 내려왔지만 끝내 얄루는 찾지 못했단다. 이렇게 다섯 번째 인생 이야기가 끝이 났단다. 그 얄루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바로 다음 장을 넘길 수밖에 없구나.

첫 번째 인생. 1938. 묵미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단다. 어린 시절이니 그냥 편이상 미란이라고 할게. 미란은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평양 인근에서 살고 있었어. 미란의 아버지는 고래잡이를 하셔서 집에 없는 날이 많았는데 집에 있는 날이면 어머니를 패는 가정폭력범이었단다. 사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단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어. 딸도 감옥에 가게 될까 봐 빨리 결혼시킨다는 것이 지금의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것이란다. 나중에 어머니의 어머니도 감옥에 가게 되고 두 분은 모두 감옥에서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아이들이 있으니 가정폭력범 남편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었어. 미란은 흙 먹는 버릇이 있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좋아서 그런 거라고 했어. 아버지는 툭하면 어머니를 죽도록 팼는데 어느날은 너무 맞아서 어머니의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단다. 미란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독초를 캐와서 몰래 아버지의 음식에 넣고 외출을 했단다.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죽어 있었어. 어머니는 미란의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 어머니는 땅을 깊이 타서 그곳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었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미란은 더 이상 흙을 먹지 않았단다.

 

2.

세 번째 인생 1950. 미란은 전쟁 중에 엄마와 동생이랑 헤어졌단다. 엄마를 찾겠다고 남으로 피난을 왔어. 여자의 몸으로 혼자 다니면 안될 것 같아서 남장을 해서 돌아다녔는데, 체구가 작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소년이라고 생각했어. 미란은 부산까지 내려왔단다. 미란은 어렸을 때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워서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미군부대에서 가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지. 통역 일을 하게 되었는데 미군부대 하우스라는 곳에서 일하게 되었어. 그곳은 미군상대로 성접대를 하는 여자들이 있는 곳인데 그 여자들 대부분은 강제로 동원된 여자들이었어. 일제 시대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이야. 미란은 화가 났어. 사실 미란도 일제 시대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했었거든. 누구보다 하우스에 있는 여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어. 미란은 하우스에서 알게 된 제니의 탈출을 돕기로 했어. 어느 날 미란은 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갔단다.

두 번째 인생은 1942. 년도만 봐도 암울하고 아픈 시대로구나. 공장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미란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단다. 많은 위안부들의 현재의 삶에 좌절하여 목숨을 끊기도 했지만 미란은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단다. 그리고 공격해온 미군들에 항복하여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할 수 있었어.

네 번째 인생은 195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 미란은 평양으로 돌아왔단다. 위안부 시절 엄청 친한 친구 용말이라는 이가 있었어. 친한 것뿐만 아니라 미란과 용말은 서로 닮아서 자매냐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어떤 일본군은 둘을 헛갈리기도 했었어. 용말은 말하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 해서 다른 위안부들에게 인기도 좋았어.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서 미란도 용말의 많은 부분을 알고 있었단다. 용말은 위안부에 끌려오지 않으려고 빨리 결혼하려도 보니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남편은 마음씨 착한 남자였다고 했어. 하지만 세 달 밖에 못 살고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강제로 붙들려 위안부로 오게 되었다고 했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용말은 병이 걸려 전장에서 죽고 말았단다.

전쟁이 끝난 미란은 갈 곳이 없어서 용말의 집으로 갔어. 용말의 남편 영민은 미란을 보고 당연히 용말이라고 생각했어. 자신의 집에 찾아온 여자인데 용말과 비슷한 용모에 세 달을 살다가 10년만에 봤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미란은 그렇게 영민과 함께 지내게 된단다. 영민은 지난 10년 간에 일에 대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어. 그리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단다. 영민은 10년 만에 만났지만 아내의 미세한 차이를 눈치챘어. 눈에 확 뛰었던 점이 사라져 있었고, 더욱이 발 사이즈가 작아졌던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정체를 물어볼 수는 없었어. 지금 이 여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영민은 아내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했단다.

 

3.

여섯 번째 인생 2005. 갑자기 시간은 훌쩍 뛰어 세기가 바뀌어 2005년이 되었단다. 다섯 번째 인생이 1961년이었으니까 40년이 훌쩍 넘어섰네. 최선생이라는 사람과 박수사관의 신문.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최선생은 대남 경찰이었어. 최선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란이었단다.

용말의 남편과 살고 있던 미란이 실수를 한 것이 있었어. 돈벌이를 위해 영어를 쓰게 되었는데, 영어를 너무 잘 하는 것을 의심 받아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어. 당국에서는 미란이 미군 부대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는 이력을 확인하고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하고 미란에게 제안을 했어. 스파이 일을 해달라고.. 미란이 거절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미란은 남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고 스파이 일을 시작했단다. 그렇게 스파이, 그러니까 간첩 일을 하게 된 거야.

그러면 이제 처음에 이야기해 준 다섯 번째 인생에서 미친 여자인 척 하면서 미군 부대의 정보를 빼간 간첩이 누구인지 알겠지? 남편 영민의 누나가 기차사고로 죽고 나서 누나가 입양하여 키우던 아이 미희를 영민과 미란이 입양하여 키우기로 했단다. 그리고 압록강 근처 혜산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지냈어. 미란은 미희를 친딸처럼 잘 보살피며 잘 키웠어. 사실 미란은 위안부 시절 몸이 망가져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거든. 미희는 커가면서 미란의 영향으로 외국어를 잘 하게 되었고 외국어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미희도 스파이 일을 하게 되었어. 미희가 어쩌다가 엄마가 하는 일을 할게 되었는데 자신도 엄마처럼 스파이가 되고 싶다고 한 거야.

이런 과거가 있었던 것이란다. 미란은 이념과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어쩌다 보니 스파이가 되어 자신의 일을 했을 뿐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수사기관에서 신문을 받고 있었어. 미란을 신문하는 박수사관은 다른 간첩 명단을 달라고 했어. 미란은 그 명단을 다 줄 수 있으나 실명은 모른다고 했어. 한 명만 실명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도 전향하는데 도와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단다. 그 한 명 누군지 알겠지? 딸 최미희였어.

….

일곱 번째 인생 2006. 에이드리언 루소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어. 루소는 프랑스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지내다가 중국의 새생명교회에 선교사 자격으로 가서 탈북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단다. 그곳에서 배성미라는 탈북자를 만났어. 배성미는 그 교회에 머물면서 루소 목사를 도와주며 생활하다가 둘은 사랑하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아람이라는 아기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배성미는 쪽지 한 장만 남겨두고 사라졌단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배성미라는 여자가 최미희일 거는 것은 짐작이 가지? 맞아, 배성미는 최미희였단다. 최미희는 공작원 교육을 받고 스파이가 되었단다. 배성미라는 가명으로 탈북자로 위장하고 루소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빼오는 임무를 맡게 된 거야. 그런데 루소가 미희에게 빠져서 사랑하게 되었고, 루소는 브로커에게 거금을 주고 남한에 데리고 와서 결혼까지 하고 딸 아람을 낳은 거야. 미희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와 접선을 했단다. 그런데 어느날 엄마는 더 이상 이 일을 하게 않을 때가 되었다면서 미희를 설득하기 시작했어. 자신이 먼저 자수를 하고 미희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겠다고 했단다. 일이 그렇게 된 거였어. 어느 날 갑자기 성미, 아니 미희는 루소에게 돌아왔단다. 그리고 그 동안 숨겼던 자신의 정체를 이야기했단다.

….

이제 다시 첫 장면의 황홀요양원. 부고 작가 이새리와 묵미란 할머니. 미란은 자신의 딸과 사위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했어. 새리는 속으로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어. 요양원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자신의 자식들이 외국에 살고 있어 바빠서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말이야. 요양원 사람들은 묵미란 할머니는 지금 뇌종양을 앓고 있어서 머리도 이상해져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흙도 먹는다고 했어. 그래도 새리는 묵미란 할머니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었어. 묵미란 할머니는 자신이 한 이야기들을 적은 일곱 권의 노트도 건네주었단다. 그런데 얼마 후 묵미란 할머니는 요양원을 탈출해서 근처 빈터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말았단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더욱이 그날은 딸 최미희와 사위가 찾아와서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했어. 그 전에 모시러 올 수도 있었는데, 2006년 전향한 미희는 한 동안 숨어 지내야 했고 미국으로 건너 간 다음에도 합법적인 미국 시민이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이제서야 합법적인 미국 시민이 되어 엄마 미란을 데리러 온 것이었단다. 그러나 묵미란 할머니는 떠나기 싫었던 거야. 딸에게 부담되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자기답게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다. 뇌종양으로 남아 있는 삶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소설의 이야기상 그런 마무리가 나을 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래도 딸과 만났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빠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이야기해줄 때면 편지가 길어지곤 하는데 오늘 편지가 참 많이 길어진 것 같구나.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이야기. 이미리내 작가님의 다음 작품들이 기다려지는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 생각이 처음 떠오른 건 내가 이혼을 겪고 있는 동안이었다.

책의 끝 문장: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혀는 마치 사탕에 입힌 새콤달콤한 가루처럼 굵은 흙에 한 겹 덮여 있었다.







"말이란 건 그냥 말이 아니란다, 아가. 말은 우리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 이상이야. 말은 그 자체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말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절대 일방통행이 아니야."
나는 엄마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고,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이보다다 더 똑똑한 엄마를 기대할 수 없었다.
"말을 부드러운 무기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아가. 네가 아버지가 모르는 말을 썼을 때 아버지가 왜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알겠니?"
- P65

어느 날 너는 우리에게 자기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냐고 물었다. "금주는 할아버지가 둘인데, 어째서 난 영이야?" 네가 투덜댔다. 나는 돌아가셨다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우리를 새로운 질문의 무한루프로 빨아들였다. "돌아가신 게 뭐야?" 그건 죽은 걸 뜻한단다.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더 이상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뜻이란다. 하늘나라로 가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야. "하늘나라에서는 뭘 해?" 누구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단다, 미희야. "왜?" - P182

나는 우리 결혼의 첫 번째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기 위해 내 기억을 샅샅이 뒤졌다. 언제부터 우리 자신을 우리가 딱하게 여겼던 다른 평범한 부부들과 다름없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을까. 예를 들어 식당에서 서로의 얼굴이 아닌 서로의 어깨 너머 빈 공간을 쳐다보는 부부. 이제 싸우고 싶지도 않을 만큼 서로에 대한 관심이 고갈된 부부. 마지막으로 잠자리를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부. 오로지 자식 때문에 함께 사는 부부처럼 말이다. - P232

미희는 마치 납치범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이 아이가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살아서 성장하게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어요. 내 몸에서 무엇이건 가져가도 좋고 내게 당신이 원하는 다른 어떤 비극을 줘도 좋아요. 내 다리를 앗아 가도 좋고, 내 눈을 앗아 가도 좋고, 심지어 내가 간 뒤에 이 아이가 정상적으로 살 거라고 보장만 해준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아요. 깨어 있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나의 작은 핏덩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아느니 차라리 영원히 잠들겠어요. - P317

갓 태어난 아람이는 하나의 블랙홀이었고 우리는 그 블랙홀에 기꺼이 빨려 들어갔다. 울음과 단속적인 짧은 잠과 수시로 폭발하는 식욕으로 우리의 잠을 앗아 가고 우리의 모든 일상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완벽한 폭풍이었다. 동시에 아람이는 우리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경이로움으로 채웠다. 그 아이는 우리가 지금은 잊은 어린 시절의 놀라운 경험들-우리가 이 세상의 신참자로서 주변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어떻게 모든 평범한 물건이나 사람이 우리의 무한한 호기심에 불을 붙였는지-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곁에 있는 것은 그토록 정신이 고양되는 경험이다. - P333

"내가 전에 갈망한 적 없던 흙을 갈망하게 되면 그냥 먹는 거지. 내 몸을 새것처럼 보존해서 110세까지 살려고 애쓸 생각은 없어." 묵 할머니가 킬킬거렸다. 그녀는 카르페디엠은 안 그래도 충분히 무모한 10대들에게 설파할 것이 아니라고, 그녀처럼 쪼그라든 늙은 몸들을 위한 경구라고 말했다. "오늘을 즐겨라. 그야말로 내일이 없을지도 모르잖나." 그녀가 속삭이고는 또 다시 킬킬거렸다. - P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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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4-11-29 2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지가 길어져도 상관없이 열심히 읽는 bookholic님의 독서 편지 독자중 하나입니다. ㅎㅎ 오늘도 좋은 책 리뷰 감사 합니다. _()_

bookholic 2024-11-29 22:44   좋아요 1 | URL
오타도 많고 앞뒤 문맥도 잘 맞지 않는 글을 읽어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날씨가 쌀쌀해졌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20)

리샹란(1920~2014)은 만주국을 대표하는 스타였다. 영화배우와 가수로서 만주국을 넘어 중국과 조선,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각지에 명성을 떨쳤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사이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성 스타라면 조선의 최승희와 만주국의 리샹란을 꼽게 된다. 최승희 후원회에는 여운형과 마해송, 후일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유명인들도 속해 있었지만, 그래봐야 이들은 권력 없는 문인이었다. 그에 비해 리샹란의 후원자들은 만주국의 실세들이었다. 그녀를 키운 건 일본 제국주의였다. 마치 푸이가 그랬던 것처럼.

 

(31)

역사적 책임에 관한 오랜 고민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그 말들 속에서 증발했다. 리샹란, 아니 야마구치 요시코와 그의 동료들은 아무리 사과해도 아물 수 없는 편법을 추진했다고 비판받았다. 지금은 한국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젓고 있다. (역사의) 전진이나 후퇴와 같은 거칠고 자의적인 표현은 가급적 삼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써야만 한다.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43-44)

일본의 정치학자 쿠마가이 나오코는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해 두 단계에 걸쳐 상이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후에는 한 가지만 선택적으로 기억되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단계의 전쟁 기억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대일본제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최종 단계의 전쟁 기억은 일본인 개인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고난과 고통들에 대한 일화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서 전쟁 기억은 후자로 귀결됐다. 무조건항복과 도쿄전범재판으로 전쟁이 범죄화되자, 일본인들은 전쟁 전반부의 영광스러운 군사적 전진의 기억을 묻어버린 채 전쟁 후반부의 고통스러운 경험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33-134)

<나비부인>은 예술의 이름을 빌려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환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탈리아 사람 푸치니가 어쩌다 미국 장교와 일본 여성 사이의 사랑을 오페라 소재로 삼게 됐을까? 전기에 따르면 코벤트가든에서 <토스카> 초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00 6월 무렵, <나비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단막극을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미국 해군 장교가 일본에 파견 나와 게이샤를 아내로 두고 자식까지 낳지만, 진짜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영어가 짧은 푸치니였지만 바로 이 이야기다 싶을 정도로 인상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푸치만 그랬던 게 아니다. “당시 서양 세계는 이 이야기에 미친 듯 열광했다.”

 

(141)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였다. 크리스처럼 잠시 베트남에 온 미국의 시각으로는 이 전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베트남전쟁은 30여 년에 걸친 두 차례의 인도차이나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만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이 진주한다. 나치의 괴뢰 비시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군은 전투에 없이 일본군의 온순한 포로가 됐다. 종전 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베트남 남부에는 영국군이, 북부에는 중국군이 진주한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 프랑스군에게 다시 무기를 쥐여준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지배하겠다고 선언한다.

 

(144)

2012 3 29,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50년 경과를 기념하는 연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렇게 전쟁을 미화했다. “베트남전쟁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지닌 채, 매우 힘겨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함께 의무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따뜻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던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처럼 부도덕한 전쟁에 끌려가길 거부하며 감옥행을 택했던 수많은 이들, 반전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미국인 대중의 분노를 생략하는 화법이다. 미군의 총칼에 죽은 베트남인에 대해 침묵하는 화법이다.

 

(242)

방송은 끊겨도 신문은 쉬지 않았다. 베를린과 계속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손기정이 1위로 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 왔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새벽 1시께 다시 광화문에 사람이 모였다. 점점 더 많은 인파가 운집했다. 마침내 새벽 2시께, 동아일보 사옥 2층 창으로 여자 아나운서가 나타났다. “손기정 선수가 일착으로 골인해 우승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멍했다. 이윽고 펄펄 뛰며 소리를 질렀다. “만세, 만세, 손기정 군 만세!” 잠시 후 제2보가 전해졌다. “다시 베를린에서 온 소식입니다. 손기정 군이 2시간 29 12초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고 남승룡 군도 3위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손기정 만세”, “남승룡 만세소리를 질렀다. 함성은 어느새 조선 만세로 바뀌고 있었다. 온 조선이 함께 환호하고 울었다.

 

(265)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의 모습,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책임지며, 그 역사를 학교에서 철저히 가르치고 숨은 나치를 끝까지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독일의 모습은 1970년대와 1980년를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성립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직 끝이 아니었다.

 

(274-275)

아카테는 뮤지컬을 보고 울었다. 다른 가족들도 속상해했다. 무대에 오른 냉정한 남자는 아빠가 아니었다. 뮤지컬과 영화는 아름다웠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우리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가족 이야기의 판권을 9000달러라는 헐값에 독일 영화사에 팔았고, 영화사는 다시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제작사에 판권을 팔았다. 그리고 영화로 이어졌다. 가족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됐고, 기억을 빼앗긴 느낌이었다고 90세가 다 된 아가테는 한탄한다.

 

(302)

님 웨일즈와의 인터뷰 말미에 장지락은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근본적인 질문으로 타인의 영혼을 괴롭히지 말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수였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그 걸음을 생각하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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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듀 - 경성 제일 끽다점
박서련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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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박서련 님의 역사 소설을 한 권 읽었단다. 오늘 이전까지 박서련 님의 소설을 세 권 읽었는데, 가장 재미있고 인상 깊은 소설은 가장 처음 읽었던 <체공녀 강주룡>이라는 작품이었단다. 박서련 님의 <체공녀 강주룡>을 다행히 처음에 읽어서 박서련 님의 다른 책들도 찾아 읽었던 것 같아. 그런데 박서련 님의 최애 작품이 오늘로 좀 바뀔 것 같구나. 이번에 읽는 <카카듀>라는 소설이 <체공녀 강주룡>보다 더 좋았단다.

<카카듀>는 일제 시대 실제 있었던 끽다점 카카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단다. 끽다점이라고 하면 오늘날 카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은 마신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로 만끽(滿喫)하라고 할 때 그 자란다. 끽다점의 는 예상했겠지만 차 다()란다. 아빠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책 소개를 읽지 않아서 카카듀라는 끽다점만 실제 있었던 것이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박서련 님께서 허구로 만든 인물들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재미있게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뒤편에 실린 작가 후기를 보고 나서야 소설 속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소설 속 까메오로 등장하는 라운규, 박헌영, 김구 등의 실존인물은 재미를 위해서 출연시킨 것이고, 주인공인 이경손과 현앨리스는 허구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주인공들도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거야. 특히 현앨리스의 경우는 약간 비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책을 덮고 검색을 해 보았더니 아주 낯익은 사진 한 장이 검색되었단다. 아빠의 좋지 못한 기억력이지만 이 사진은 분명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본 것 같았어. 일제시대 낭만 가득한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하는 민태기 님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서 본 것 것은 생각이 들어 그 책을 찾아 책장을 휘리릭 뒤져보았단다. 역시나그 책에 현앨리스 사진이 있었단다. 민태기 님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에 현앨리스와 카카듀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어.

아빠의 기억력에 또 한번 좌절이구나. 아빠가 재미있게 본 책에서 나왔던 내용인데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그나마 사진을 검색했을 때 기억이 난 것에 대해 조금은 위안을 삼아야겠구나. 이번에는 꼭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현앨리스에 대한 또 다른 책 정병준 님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라는 책도 주문했단다. 이 책도 읽어서 이번에는 꼭 기억하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와 함께, 그럼 소설 <카카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1.

주인공 이경손. 때는 1920년 경성. 만세 운동이 일어난 이후 엄마 나이 뻘 되는 사촌누나는 목사였던 매형이 만세 운동에 연루되어서 심한 옥살이를 하고 나왔단다. 감옥에서 나온 사촌누나는 매형을 찾아 나선다고 아이들 여덟 명을 데리고 상해로 가기로 했단다. 이때 어린 아이들을 경성역까지 데려다 주는 일에 경손도 도와주었단다. 사촌 누나의 첫째 딸 미옥은 촌수로는 경손보다 항렬이 하나 낮아 조카이긴 한데 나이는 경손보다 한 살 많았어. 경손은 미옥과 함께 어린 조카들을 경성역까지 데리고 가서 배웅을 해주었단다. 그렇게 사촌 누나 식구들은 모두 상해로 떠났어.

시간은 흘러 6년이 지났어. 경손은 그 6년 동안 예술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배우고 영화 감독이 되어 영화도 한 편 찍기도 했어. 비록 성공하지는 못 했지만… 6년이 지난 시점에도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관부연락선을 촬영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왔단다. 경손이 부산에 내려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단다. 예전에 부산에서 조선 키네마라는 영화사에서 처음 영화 일을 시작했었지. 그곳에서 라운규도 만나 친하게 지냈단다.

그런 부산에 이번에는 혼자 촬영하려고 내려고 온 거야.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조카 미옥을 만났어. 경성역에서 헤어지고 6년 만에 처음으로 본 거야.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미옥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단다. 미옥은 포와, 그러니까 하와이에 가는 길이라고 했어. 하와이는 미옥의 고향이었어. 사촌 누나와 매형은 결혼하고 하와이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첫째 아이 미옥을 낳았다고 했어. 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한국 아이였다고 하는구나. 미옥은 하와이에서 태어나서 미국 이름도 있었대. 앨리스. 지난 6년 동안 미옥은 결혼도 했고 이혼도 했다고 했어. 지금은 임신한 상태인데, 아기를 낳으려고 하와이에 간다고 했단다. 가족들이 지금은 모두 하와이 있다면서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경손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단다.

경손이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는 <춘희>라는 영화였어. 남자 주인공이자 투자자인 정기탁은 여자 주인공을 맡은 김일송을 반대했단다. 김일송이 독립운동을 했던 이력이 있어서 반대를 했어. 그러면서 오디션을 다시 한번 하자고 했어. 그래서 오디션을 했는데 역시나 눈에 띠는 이는 없었단다. 딱 한 사람 노래를 잘하는 이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대. 이음전은 나중에 이애리수로 이름을 바꾸고 엄청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 이 이야기가 왜 들어가 있나 했더니, 이애리수가 실존 인물이라서 그랬던 거구나.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찾아보니 <황성옛터> 등 꽤나 유명한 노래를 부른 유명한 가수더구나.

..

아무튼 그렇게 오디션을 하고 있을 때 미옥 아니 앨리스가 찾아왔단다. 부산에서 헤어진 지 1년쯤 되었을 때야. 아이는 하와이에 있는 가족들에 맡기고 혼자 귀국했다고 했어. 그러고는 자신은 경성에서 자리를 잡겠다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했어. 그러면서 끽다점을 같이 차리자고 했단다. 끽다점의 이름은 카카듀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막 희곡의 제목 초록 앵무새(Der grune Kakadu)에서 따온 것이야.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들이 찾는 식당이자 연극을 하는 내용의 희곡이었어. 초록 앵무새는 그 식당 이름이기도 했대.

..

카카듀는 관훈동 이성용 의원의 건물 1층에 세를 냈단다. 카카듀를 오픈하는데 필요한 돈은 앨리스가 댔어. 그렇게 끽다점을 열었지만 손님은 거의 없었어. 2층에서 병원을 하는 이성용 의원이 가끔 찾아오고 이경손의 지인들이 가끔 오고이경손과 앨리는 개업 피로회를 열자고 했어. 개업 피로회는 개업식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영화 포스터를 모아서 전람회 형식으로 하자고 했어. 이경손은 신문기자인 친구에게 부탁해서 카카듀 개업 피로회 겸 전람회를 신문 광고에 내게 했단다.

개업 피로회는 대성공이었어. 피로회 이틀 동안 문전성시를 이루었어. 이경손의 문학동인들, 영화계 인사들이 많이 왔단다. 이경손이 피로회 때 번 돈으로 카카듀에서 사용할 유성기를 사려고 했으나, 앨리스가 이미 몇 달치 월세를 미리 냈다고 했어. 앨리스의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유성기를 못 산 아쉬움이 살짝 있었지만

이경손은 영화 일도 계속 하는데 영화 쪽은 계속 흥행 실패를 거듭했단다. 카카듀는 경손의 지인들이 주고객이었고 그럭저럭 할 만했어. 이경손은 앨리스와 친척 관계인 것을 비밀로 하기로 해서, 다른 이들은 둘이 사귀는 사이로 오해하기도 했단다.

12월이 되었어. 2층의 이성용이 병원 일을 두만 두고 사라셨단다. 병원에는 다른 의사가 들어와서 문을 열었어. 그래도 오가며 인사도 하고 카카듀의 주인인데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2.

성탄절이 다가오자 앨리스는 카카듀에서 성탄절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단다. 지인들을 초대해서 성탄절 파티를 밤새 했어. 밤새고 아침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경손은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끌려 갔단다. 그리고 이유는 알려주지 않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어. 다시 정신을 들었을 때는 경찰서가 아닌 카카듀 안이었어. 나이는 앨리스가 한 살 많았지만 촌수도 경손이 아저씨 뻘이라서 늘 아저씨라고 깍듯이 높임말을 쓰던 앨리스가 갑자기 반말을 했단다. 당황한 경손. 앨리스는 지금까지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야. 앨리스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앨리스의 이야기를 해줄게. 앨리스의 아버지, 그러니까 경손의 사촌 매형은 현순이라는 목사였어. 나중에 검색해보니 현순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셨던 분이었단다. 앞서 앨리스의 아버지가 3.1운동에 연루되어 상하이에 가셨다고 했잖아. 현순은 상하이로 가서 다른 나라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달라는 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어. 현순은 목사 이전에 역관으로 일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단다. 현순은 그런 외국어 실력으로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에서 일하고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현순을 잘 따르고 했대. 앨리스도 박헌영, 김단야, 임권근 등과 교류를 하다 보니 공산주의 사상, 콤뮤니즘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는구나.

앨리스는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정준이라는 유학생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도 낳았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준은 완전 사기꾼이었어. 고향에는 어린 아이지만 정혼자도 있다고 했어. 정준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일본정부의 공무원이 되기도 했어. 독립운동가의 딸이자 자신도 독립운동을 하는 앨리스는 남편이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느끼고 그 집에서 나와 버렸단다.

현순은 앨리스에게 찾아와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앨리스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단다. 그 즈음 가족들 모두 하와이에 가서 해외교포들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단다. 앨리스는 하와이, 국내, 중국을 오가면서 정보원 역할을 했어. 그러던 중 남편 정준으로부터 딸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단다. 앨리스도 마음 약한 어머니였던 거야. 딸이 위독하다는 말에 정준을 찾아갔어. 하지만 이미 딸은 몇 년 전에 죽었다고 하더구나. 정준이 앨리스를 불러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야. 그런데 남녀 사이는 예측 불허. 어찌하다 정준의 아이를 또 임신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친일파 정준과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하게 된 거란다. 그리고 하와이로 다시 가던 길에 부산에서 이경손을 만났던 거야.

몇 년 뒤에 다시 경성에 온 이유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었어. 이런 사실을 경손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 카카듀를 이성용의 건물 1층에 세를 둔 것도 이유가 있었어. 이성용도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성에 왔던 거야. 앨리스와 이성용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지. 카카듀를 통해 정보를 주고 받고 독립운동 후원금 조달처로 이용했어. 개업 피로회 때 벌어들인 돈도 월세로 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후원금으로 보낸 것이었어. 최근에 일본 경찰이 이런 사실을 포착한 것이야. 그런데 앨리스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직접 신문하지 못하고 경손을 대신 체포해서 구타를 한 것이었어. 일종의 경고라고 볼 수 있지. 앨리스의 정체도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앨리스는 상해로 가기로 했단다. 경손도 같이 가려고 했으나 천진까지 갔다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단다. 경손은 다시 영화 일을 했고 여전히 흥행 실패를 했단다.

몇 년 후 상해에 있던 정기탁, 예전에 영화 춘희를 같이 작업했던 사람, 기억나니? 그 정기탁이 상해에 있었는데 경손을 상해에 초청했어. 그래서 경손은 영화인으로 상해에 갔단다. 상해에서도 영화를 두 편 찍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흥행은 좋지 않았어. 영화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어느날 이성용이 찾아와서 경손을 누군가에게 데리고 갔어. 경손은 앨리스에게 데리고 가는 줄 알았으나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김구였어. 김구는 3.1운동 기념식에 연극을 하나 하려고 하는데 연출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어.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왔단다.

경손은 두리번거리며 앨리스를 찾아보았어. 그리고 앨리스를 보았단다. 앨리스도 경손을 보았으나 도망을 갔단다. 왜 그랬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경손이 뒤쫓아가면서 앨리스는 불렀지만 끝내 대답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다시 갈 길을 갔단다. 그것이 앨리스와 마지막 만남이었어.

경손은 나중에 태국을 거쳐 홍콩으로 가려고 했는데 태국에서 정착하게 되었어. 영화 일은 그만두고 무역일을 했어. 태국에서 태국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들도 낳고 그랬어. 나중에 이성용이 태국에 와서 앨리스의 소식을 전해주었단다. 앨리는 미국 본토에서 대학 공부를 마치고 해방 이후 다시 우리나라에 와서 미군정에서 통역을 했대. 그런데 공산주의 이력 때문에 추방을 당했고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평양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그 이후 소식이 끊겼다고 했어. 언젠가는 앨리스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지만, 경손은 다시는 앨리스를 만나지 못했다는구나.

….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단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는데 그들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더 좋았단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현앨리스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생각될 만큼 매력적으로 그려졌어. 지은이 박서련 님이 각색을 했을 수도 있지만,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을 근거했다고 하는구나.

이경손은 나중에 <무성영화 시대의 자전>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일을 적었다고 했대. 아빠가 현앨리스에 대해서 더 알기 위해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를 샀다고 했잖아. 그 책에는 1928년부터 29년 사이 현앨리스의 행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 그 시절이 바로 현앨리스가 카카듀를 운영하던 시기였던 거야. 박서련 님은 그렇게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신 것 같구나. 아무튼 이 소설을 통해서 암울한 일제 시대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도 있었고, 더 뜨거운 가슴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이도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삼 알게 알게 되어 좋았단다. 지은이 박서련 님은 여러 장르의 소설을 쓰시는데 틈틈이 역사소설을 통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란다. 이 책은 너희들도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구나. 주변 사람들에도 추천을 해야겠구나.

오늘은 그럼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나는 예술을 믿는다.

책의 끝 문장: 이것이 나에게 일어날 모든 일의 가장 불가해한 요약이다


한편 나는, 특이나 당시의 나는 구식이든지 신식이든지의 형식을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도 비관적인 인식을 품고 있었다. 작품으로는 모든 장면과 대사에서 열렬한 사랑을 웅변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사랑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돈을 훔친 자도 사랑 때문, 사람을 납치하여 죽인 자도 사랑 때문, 사기 치고 배신하고 강제로 간음하고 교묘히 미치게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이 모두 사랑을 근거로 할 수 있는데, 한때는 인륜을 저버리게 할 만큼 막강하였던 동기가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조화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 P54

옛말에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고 하였던가.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후일 이 망국의 수도에 이렇게도 많은 예술가가 날 줄을 미리 내다보았을까. 수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인구 20만 안팎에다 토지 대부분이 날것으로 남아 있는 열악하고 초라한 도시. 그러한 경성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예술가연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몇은 필연 거짓되이 예술가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란 의심을 해봄 직했다. 때로 내게는 경성 전체가, 나아가 조선 전체가 거짓의 전당처럼 느껴졌다. 가엾게도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예술가가 아닌 자신을 예술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릿광대의 노릇. - P102

탈이란 즉 가면, 마스크, 얼굴 위에 얼굴. 그것의 사용은 본디부터 극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까지는 배우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지 않는가. 가면이 역할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였던 시대를 지나, 인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배우들은 가면을 벗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이 극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구극이 기껏 벗어던진 가면을 신극이 다시 한번 집어 들게 된 것은 그것을 언제든 벗을 수 있게 되어서다. 과거에는 가면을 벗는 것이 금기였으나 오늘날 가면을 쓰는 것은 금기가 아니며, 한때의 금기마저 연출의 한 소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신극. 또한, 이러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나 정도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자부에 나는 심취해 있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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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3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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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파운데이션 시리즈 3 <2파운데이션>을 이야기해줄게. 3권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권에서는 제2파운데이션에 관한 이야기란다. 2권에서 제2파운데이션의 위치를 찾으려는 노력들을 하다가 심리학자 에블링 미스가 그 위치를 찾았으나, 뮬이 위치를 알면 재앙이 다가올 것을 예상한 베이타가 에블링 미스를 죽이면서 2권이 끝났지오늘은 그 이후 진행되는 3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뮬은 제1파운데이션을 점령하게 된단다. 오랫동안 차근차근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던 제1파운데이션이 너무 허망하게 뮬에게 정복당하게 되었구나. 칼간 행성의 근거지를 둔 뮬은 은하제국의 제1시민이란 직책으로 불렀단다. 뮬은 상대방의 마음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잖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뮬에 전향을 하게 되었어. 그 중에 2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프리처 대위도 뮬에 전향을 하여 충성을 맹세했단다. 이후 한 프리처 대위는 대령으로 진군하였단다. 2파운데이션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했는데 한 프리처는 제2파운데이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어. 뮬은 한 프리처를 진급시키는 등 신임하고 있었지만, 전향자는 정신적으로 나약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그래서 전향하지 않은, 칼간 행성 출신 중에 유능한 이를 신하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 중에 베일 채니스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뮬은 여전히 제2파운데이션이 있다고 믿었어. 뮬은 한 프리처와 베일 채니스에게 제2파운데이션을 찾으라는 임무를 주었단다. 그래서 프리처와 채니스는 제2파운데이션을 찾아 우주로 떠났단다.

2파운데이션에 대한 정보는 그 옛날 해리 셀던이 이야기한 우주의 끝에 세웠다는 것이 전부였어. 채니스는 제2파운데이션의 유력한 후보군으로 타젠데 왕국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서 채니스와 프리처는 타젠데 왕국의 로셈 행성으로 갔단다. 로셈 행성은 농업을 주로 하는 행성으로 예전에는 독립적인 행성이었으나 타젠데 왕국에 점령을 당하게 되었어. 그들의 도착을 이미 알고 있던 로셈 행성의 총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프리처는 채니스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채니스가 제2파운데이션의 첩자라고 확신해서 체포를 하려고 했으나 채니스는 아니라고 항변을 했단다. 그 소식을 들은 뮬은 그들을 뒤쫓아 와서 뮬이 채니스의 두뇌를 확인해 보았단다. 뮬은 상대방의 감정을 조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 상대방의 머릿속도 살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보구나.

채니스의 머릿속을 읽어 보니 로셈 행성이 제2파운데이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그러다 제2파운데이션의 제2발언자가 로셈 행성에 도착을 해서 뮬과 감정 격돌을 하게 되는데 제2발언자가 뮬을 이긴 것 같았어. 뮬보다 더 강력한 자가 제2파운데이션에 있었나 보구나. 그뿐만 아니라 채니스는 한낱 미끼에 지나지 않았어. 채니스에게는 제2파운데이션의 위치가 로셈 행성이라고 알려주어 뮬이 잘못된 정보를 취득하게 한 것도 사전에 계획한 것이었단다. 채니스의 두뇌를 읽고 뮬이 로셈 행성으로 오게 유인한 거야. 그 사이 뮬이 없는 칼간 행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정을 했단다. 뮬은 뒤늦게 절망하여 프리처와 칼간 행성으로 귀환을 했지만, 칼간 행성은 이미 반란자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어. 그렇게 뮬의 권력은 5년만에 끝이 나고 말았단다.

 

1.

뮬이 죽고 또 한 세대가 지났단다. 2파운데이션은 여전히 알려진 바 없고 뮬이 죽은 이후 더욱 정체를 드러나지 않고 있었어. 아르카디 다렐이라는 소녀가 있었단다. 아르카디는 2권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베이타의 손녀딸이자 다렐 박사의 딸이란다. 아르카디는 어렸을 때부터 소설가가 꿈이었고 호기심 많고 똑똑한 14살 소녀였단다. 아르카디의 아빠 다렐 박사는 제1파운데이션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 제2파운데이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어. 그는 동료 펠리스 앤서와 회의를 하면서 제2파운데이션의 정보를 수집하러 칼간 행성에 있는 뮬의 궁전에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데 이에 적합한 사람으로 친구이자 도서관사서인 호르미 먼을 생각했어. 왜냐하면 호르미 먼은 뮬에 대한 최고 전문가였거든. 2파운데이션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뮬이었기 때문에 뮬에 대해 연구를 하다 보면 제2파운데이션의 위치나 정보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호르미 먼도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칼간 행성의 뮬의 궁전으로 가기로 했어. 진짜 임무는 숨기고 여행가는 것처럼 칼간 행성으로 떠나기로 했단다. 그런데 먼이 타고 있던 우주선에 아르카디가 몰래 탔단다. 호기심 많은 아르카디가 다렐 박사의 회의를 몰래 듣고 있었어. 우주선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없어. 다렐 박사는 딸이 동행하게 된 것을 오히려 좋게 생각했어. 먼에게는 아르카디를 조카라고 말하라고 했어. 조카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고 하면 먼에 대한 감시도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르카디가 똑똑하니까 먼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 먼은 칼간 행성에 도착해서 군주인 푸치 스테틴과 그의 아내 칼리아를 만났단다. 도서관 사서와 학자로만 살았던 먼에게 이번 임무는 너무 큰 임무였던 것 같아. 긴장을 해서 군주 앞에서 어버버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아르카디가 영리하게 이야기를 해서 뮬의 궁전에 들어갈 수 허가를 받았단다. 하지만 2주 동안 뮬의 궁전에서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먼은 특별한 것을 찾지 못했어.

그런데 푸치는 갑자기 아르카디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했어. 이걸 알게 된 칼리아는 아르카디를 도망치게 도와주었단다. 얼떨결에 칼간 행성에서 떠나게 된 아르카디는 고향인 터미너스로 가지 않고, 2파운데이션을 찾아 떠나려고 했단다. 먼은 뮬의 궁전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아르카디는 뭔가 찾은 것 같았어. 아르카디는 제2파운데이션을 찾아 길을 떠났어. 그런데 아르카디의 도망을 알게 된 푸치는 칼간 군인들을 보내 아르카디를 추격하게 되었어. 아르카디는 프림 팔버라는 상인을 만나게 되는데 프림 팔버가 칼간 군인들의 추격을 따돌렸단다. 아르카디는 트랜터에 도착을 했단다. 트랜터 기억나지? 은하제국의 수도였던 곳. 아르카디가 도착했을 때 트랜터는 옛제국 수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폐허의 모습이었어. 이젠 주로 농업을 주로 하는 행성이 되었단다.

 

2.

칼간 행성의 군주 푸치 스테틴은 파운데이션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쟁은 터미너스의 승리가 끝이 난단다. 전쟁이 끝나고 호르미 먼도 돌아왔어. 다렐 박사는 프림 팔버라는 상인으로부터 딸 아르카디는 트랜터에 머무르고 있다고 전해 들었단다. 다렐 박사는 호르미 먼으로 칼간 행성에서 연구한 내용을 들었어. 호르미 먼은 제2파운데이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어. 하지만 먼은 칼간 행성에서 두뇌를 조정 당한 것이란다. 어느날 딸 아르카디의 메시지가 도착했어. 우주는 둥글고, 둥근 원의 끝은 없다. 또는 시작점이 끝이 된다고 하면서 터미너스 행성에 우주의 끝이라고 하면 또 다른 끝도 터미너스 행성이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제2파운데이션이 터미너스에 있다고 한 거야.

다렐 박사는 딸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단다. 그리고 앤서가 제2파운데이션의 일원인 것을 알게 되어 그를 공격하여 제압했단다. 앤서는 자신이 제2파운데이션의 일원이 맞다고 하고, 터미너스에 제2파운데이션이 있는 것도 맞다고 했어. 2파운데이션의 일원은 50명 정도의 소규모라는 것도 밝혀졌단다. 50명은 모두 정체가 밝혀져서 체포되었단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는지 아빠의 기억력이 정확하지 않구나.) 아무튼 제2파운데이션 조직이 모두 체포되면서 제2파운데이션은 사라지게 되었단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제1파우데이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란다. 하지만 이 또한 제2파운데이션의 전략이었단다. 자꾸 제2파운데이션의 위치와 정체를 캐려고 하자 이렇게 가짜 정체를 드러내고 사라지게 해서 관심을 끊게 만들려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이란다. 50여 명의 제2파운데이션 일원들의 머릿속에도 그렇게 학습되어 있어 머릿속을 살펴보아도 그런 내용 밖에 없게 했단다. 그렇다면 제2파운데이션은 아직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단다. 2파운데이션은 트랜터 행성에 어딘가에 몰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단다. 그리고 제2파운데이션의 리더인 제1발언자는 다름 아닌 아르카디를 도와주었던 상인 행세를 하고 있는 프림 팔버였단다. 아르카디를 도와주었던 것도 가짜 제2파운데이션 작전의 일환이었어. 그렇게 제2파운데이션의 정체와 제1발언자의 정체를 독자에게만 공개하면서 파운데이션 3권은 끝이 났단다.

….

2파운데이션의 정체에 대한 반전이 이어지면서 소설이 끝이 나긴 했는데 왜 제1파운데이션과 제2파운데이션은 적대 관계가 된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들이 적대적인 이유가 소설 속에 나왔을 텐데 아빠가 제대로 캐치를 못한 것 같구나. 해리 셀던이 1000년 셀던 프로젝트를 짤 때 두 개의 파운데이션을 건설한다고 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두 개의 파운데이션이 서로 협력 관계가 아니고 왜 적대 관계가 된 것인지 잘 이해가 안 가는구나. 그걸 찾으려고 다시 읽을 수도 없고앞으로 남은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 이유를 유추해 봐야겠구나.

SF 소설은 그 세계관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관과 달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좀 있어서 정리해서 이야기해주기 쉽지 않더구나. 아빠가 이야기한 부분의 앞뒤가 잘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해 바란다. 아빠의 한계다.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1은하제국은 수십만 년 동안 계속되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런데 지금은 제1발언자, 프림 팔버의 혈색 좋고 두루뭉실한 얼굴에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말이란 원래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불완전하게 습득한 수단이다.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소리를 조합하고 추상적인 소리를 짜 맞추는 방법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음에 담긴 미묘한 감정을 목구멍에서 거칠게 흘러나온 신호로 타락시키는, 둔감하고 부적절하고 꼴사나운 수단이기도 했다. - P143

"인류 대다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고, 이로 인해 인류는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혜택을 얻죠. 선천적으로 정신과학과 깊숙한 연관이 있어서 인간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불러오는 이익은 아주 오래가지만, 더 추상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 나이가 이런 방향성, 정신이 최고로 발달한 사람이 지도하는 방식은 자비로운 독재자를 낳아 종국적으로 특권층을 만들어 내는 쪽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많은 사람의 반발을 사기 때문에 인류 대부분을 짐승 수준으로 떨어뜨려야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발전은 우리와 안 맞으니 피해야 합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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