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랑에 빠지면, 자기가 꿈꾸는 것을 이루려 한다면 억압체제에 저항하게 돼요. 왜냐하면 체제에서 하지 말라고 하니까요. 사랑과 자유는 항상 같이 가는 거예요. 인문학의 정신이 사랑과 자유가 아니면 뭐겠어요. 그 두 가지 내용을 가진 것이 인문주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예요.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어요.


(33)

노예사회, 농노사회, 노동자사회, 본질적으로 진보한 것이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들 다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지 못해요. 지금 노동자들이 아무리 농노보다 생활수준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 특정 소수, 부르주아들이 원하는 생산을 하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주인이라고 하고, 남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을 노예라고 불러요. 고전적 정의예요. 질적으로 보면 아직도 억압사회인 거죠. ‘소비사회라는 논리로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되기 때문에 노동계급한테 소비자의 위상을 주는 거예요. 월급을 주고 물건 만들고, 또 그 돈으로 소비하고, 이 과정이 계속 돌면서 계속 월급쟁이 생활을 하지만, 과거 농노보다는 경제 사정이 좋죠.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52)

인문(人文)이라는 말이 영어로 휴머니티(humanity)이기도 하지만, 한자로 사람 인() 자에 무늬, 결 문()자잖아요. 천문(天文)은 하늘의 무늬를 뜻하고, 지문(地文)은 땅의 무늬잖아요. ‘터무니없다는 말이 터의 무늬가 없다는 뜻인데, 풍수지리적으로 봤을 때 좋지 않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인문은 사람의 문맥을 읽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배운다는 것은 무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 안에 콘텍스트가 많이 들어 있는 거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표현을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가 글을 잘 쓰거나 말을 잘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콘텍스트가 많이 들어 있어서 오해 없이 설명을 해서예요.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별점으로 점수를 줘요. 그런데 평론가는 왜 좋았는지를 길게 쓰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평론가의 글을 읽고,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할 수 있죠. 콘텍스트가 불분명해서 생기는 반응이에요. 한마디로 글을 잘못 쓴 거예요.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평론가의 얘기가 더 쉬워요. ‘너무 좋았어이렇게만 말하면 뭐가 좋았는지 모르잖아요.


(65)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운 것은 놀랍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하고 얘기할 때 빵빵 터지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선순위에서 밀어놓은 것은 손주는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니까요. (웃음) 이상한 상상력을 가진, 새로움을 접하니까요. 젊다는 것은 새롭고 낯설다는 거예요. 어린아이들끼리는 서로 차별도 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인종차별을 할까요? 그러지 않잖아요. 차별은 위계질서가 굳어지고 우선순위가 매겨진 기존 사회에서 물려받은 거예요.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그런 거죠. 새롭고 낯설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현실은 굉장히 슬픈 일인 것 같아요.


(88)

자본주의는 공동체에서 쪼개진 개개인들이 생계를 걸고 참여하는 게임 같은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보고요.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필요를 만들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자본의 논리니까요. 그래서 빅데이터가 중요한 거예요. 노동자는 그 정보를 계속 빼앗기고 있고, 자본은 계속 그 정보를 축적하고 있단 말이에요. 플랫폼 기업들이 나보다 나를 더 잘 하는 사회가 됐어요. 내가 모르는 내 습관까지 알고 있어요. 내 나이와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취미는 뭐고 관심사는 뭔지, 내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방문했던 사이트에서 무엇을 검색하고 구매했는지…… 내 흔적들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책과 영화, 상품으로 광고 창에 뜨잖아요. 내가 남긴 소비의 흔적들이 플랫폼 기업의 자본이 되는 거죠. 소비자, 곧 노동계급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도록 강요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 팽창 전략이에요.


(124)

자본주의사회는 나이 든 사람이 권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배울 게 없는 존재로 만들어놨어요. 기계 조작도 서툴고, 데이터 분석 같은 일들은 젊은 직원이 대신 해줘야 돼요. 권력이 있기 때문에 해주는 거예요. 사실 기계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가장 잘 다뤄요. 할머니 할아버지 스마트폰은 손주들이 다 세팅을 해주잖아요. 이 순간 손주들이 우외에 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열등한 위치에 있게 돼요.


(152)

간혹 가다가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살지도 않는 집을 하나 더 가지고 있으면서 임대료를 얻어서 생활을 한다고 해요. 그러고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수익이 생긴다면, 그건 다른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한 거예요. 임대료의 경우는 물론 주거가 불안한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거죠. 작은 자본가고 작은 지주인 거예요. 그래서 속상하고 이런 사람들하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큰 집에서 사는 건 상관이 없지만, 대신 집으로 임대료를 받으면 안 돼요. 그런데요, 집이 없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간혹 월세 등을 받아서 노후를 유지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죠. 이 경우는 조금 난감해요. 가족공동체가 와해되어서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요. 이런 서글픈 경우가 아니라면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 등으로 이윤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자본가처럼 지주처럼 살면서 어떻게 노동계급을 아낀다고 떠들 수 있나요?


(178)

철학적으로 말해서 좋은 교육은 모순적인 표현이에요. 교육은 나쁜 거예요. 기성세대든 억압세대든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니까요. 더군다나 교육이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의미라면, 교육은 인문주의자가 목숨을 걸고 없애야 할 대상일 거예요. 교육이라는 말을 없애고 차라리 성장이란 말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정확히는 성장을 돕는 거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책과 교재는 다른 거예요. 교재 즉 교과서는 아이들을 졸게 만들죠. 반면 그 교과서 밑에 몰래 숨겨놓고 읽는 책은 그렇지 않잖아요. 선생님이나 부모가 읽으라는 교재와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이렇게 차이가 있어요. 앞에서 저는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반대로 타인의 권위에 눌려 타인이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은 노예라고 말했어요. 결국 교재는 노예의 문자고, 책은 주인의 문자였던 거예요.


(179)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아주는 일, 아니 정확히 말해서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낼 수 있는 길에 들어선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리고 노력 없이 주인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만, 그걸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폭력 수단과 정치 수단을 독점했기에 국가는, 그리고 생산수간을 독점한 채 국가의 비호를 받기에 자본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찾은 아이들은 이미 물을 만난 물고기와 같아요. 그러니 국가나 자본이 땅에서 살기를 요구해도, 그들은 가급적 물을 떠나지 않으려 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자신을 노예로 만들려는 경향과 맞서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모두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갈 거예요. 여기에 바로 인류의 희망과 미래가 있죠.


(205)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하는 거예요. 나를 좋아할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는 온전히 주어졌을 때, 그때 나를 좋아해줘야 기쁘고 희열이 있죠. 스토킹은 그 사람의 자유를 제거한 상태에서 나만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자유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죽이는 데서 정점에 이르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서는 타인의 쾌락과 즐거움은 중요하지 않고, 나의 쾌락과 즐거움만 있는 거죠. 개인주의적 자아는 자기 안에 갇혀서 쾌와 불쾌만을 따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자유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한 말이죠.


(228)

21세기 초반 한국 사회는 이런 모습이에요. ‘강남청와대, ‘여의도를 장악하려는 강남좌파와 강남우파의 각축장이죠.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강남우파의 무기가 기만적인 자유개념에 집중되어 있다면, 강남좌파는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표방해요.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유권자들은 강남좌파에 표를 던지기 쉬워요. 강남좌파의 애정 공세에 넘어간 셈이죠. 그래서 강남좌파는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 민감해요. 그들은 대중이 감정이입을 하며 분노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감정적이라고 할만큼 개입을 해요. 그래야 여론의 지지를 받고 새로운 선거에서 승리를 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강남좌파는 여러모로 좋은 지주를 닮았어요. 좋은 지주는 소작농의 집을 찾아가 그를 위로하는 말을 하고 쌀을 두고 가지만, 결코 자신이 독점한 땅을 주지는 않으니까요.


(256)

세상이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희망도 버려야 해요. 또 세상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비관도 버려야 하고요. 자본과 국가라는 구조적 악은 여전히 강력하게 거대한 요새처럼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이 요새의 문은 개개인의 노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렇지만,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문을 밀어붙어야 해요. 열리지 않더라도 그 문 앞에서 외쳐야 돼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저랑 함께 이 문을 밀어 열어젖힐 분 없나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267)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구시대의 혁명을 주정해요. “인민을 지배하는 상전, 곧 특수세력이 있는데, “구시대의 혁명이란 것은 특수세력의 명칭을 변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상전의 교체가 아니라 상전이 없어지는 것, 개인의 자유와 정의로운 공동체를 스스로 주인이 돼서 만드는 것이 혁명이라는 얘기예요. 신채호가 간디보다 수천 배 위대한 이유죠. 상전의 자리에 일본인이 들어오든, 아니면 한국인이 들어오든 마찬가지예요. 상전의 자리에 어떤 권력자가 들어오든 마찬가지죠. 상전의 자리, 형식, 혹은 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으면 안 돼요. 결국 신채호의 시선에서 촛불집회는 혁명일 수 없어요. 여전히 수많은 상전의 형식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작동하고 있으니까요. 상전인 회사의 CEO가 있고, 자본가가 있고, 국가는 명령을 내리고 있고, 입법으로 그것을 강제하고 있잖아요.


(301)

거대 문명이 탄생한 기원전 3000년 이래로 지금까지 인류는 복종의 시대에서 5000~6000년 정도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분업 체제에 진입을 해서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나서는 먹고살 수 없을 정도로 분업의 강도사 세졌어요. 자동차 바퀴만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생태운동을 할 수 있나요? 자동차가 존재해야 자기가 사는데, 산업화된 시스템에서 하나의 나사가 되지 않으면 생계의 위험에 빠지는 사회인 거예요. 타율적 복종에서 자발적 복종으로 바뀐 것뿐인데, 체제는 타율자율만 강조해서 자본주의사회가 왕조시대보다 더 발달했다고 얘기를 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복종에 방점을 찍어야 돼요. 노동자를 정확하게 출퇴근 노예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노예는 이렇게 정의 내리면 되죠. ‘출퇴근이 불가능한 노동자.’


(329-330)

저도 바람을 좋아해요. 제가 왜 산에 가냐면 산에서 느끼는 바람은 다르거든요. 더 정확히 말하면, 산에서는 수많은 바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산에 오르면서 몸이 뜨거워지고 땀도 나니까, 작은 바람도 쉽게 느껴지죠. 그래서 계곡으로 올라가지 않고 능선을 타요. 순간순간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고 이런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산등성이에서 갑자기 구름 생기는 것 못 봤죠? 비 오는 날 산에 가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습한 날은 바람이 조금만 불면 등성이에 구름이 생겼다 없어졌다 생겼다 없어졌다 그래요. 그런 광경이 너무 예뻐요. 그게 정서적으로 저랑 맞는 것 같아요. 타르코프스키하고 미야자키하고 모네하고 정서적으로 맞아요. 바람을 모티프로 자기 얘기를 드러내는 것, 바람과 멀리 있는 문명과 바람과도 같은 자연, 우주적인 것들에 감수성이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폴 발레리(1871~1945)<해변의 묘지>라는 시 마지막 구절이에요. 시가 아주 철학적이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는 이 구절이 자막으로 올라가면서 시작이 돼요.


(369)

몸의 시간은 정신보다 느리고 조심스럽고 그만큼 안정적이다. 아픈 몸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벌레가 가는 듯 마는 듯 걷는 것 같아, 언제나 몸이 좋아질까 감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건강한 몸이 아파지는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얼마나 집중도 높게 집필 작업을 했는지, 얼마나 정열적으로 강연을 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내가 몸을 힘들게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퍼져버린 것이다. ‘너 이제 혼자 가.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어.’ 몸은 몸으로 그리 표현했던 셈이다. 이제는 몸의 시간이었다. 몸의 마음에, 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어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말을 묵묵하게 들어주었던 몸 아닌가. 이제는 내가 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어야 할 때였다. 몸이 걷고 싶을 때 걸을 것이고 몸이 쉬고 싶을 때 쉴 생각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인가 <녹색평론>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카이 마코토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아빠도 그의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던 사람인데, 신카이 마코토라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었단다. 그런데 그의 작품 제목을 보니, ‘, 그 영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단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등 익숙한 애니메이션의 감독이었더구나.

<녹색평론>에서도 바로 그 두 영화, <날씨의 아이> <너의 이름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기억이 있구나. 아빠가 녹색평론에 실린 그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날씨의 아이>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영화를 보기 전에 책으로 나온 <날씨의 아이>를 먼저 읽겠다고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기억도 있구나. 그리고 이제서야 읽게 되었단다.

1.

외딴 섬에 살고 있던 고등학교 1학년이던 호다카는 무작정 도쿄로 향했단다. 아는 사람 아무도 없던 도쿄는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가지고 간 돈을 금방 사라지고 말았지. 다행히 도쿄로 가는 배에서 만난 스가 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그가 일자리를 하나 주었단다. 스가 씨는 조그마한 잡지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해보라고 했어. 스가 씨는 도시의 전설들, 미스터리, 재미있는 소문들을 모아서 잡지를 만들었단다. 스가 씨 말고 다른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인 대학생 나츠미가 전부였는데, 나츠니는 스가 씨의 조카였단다.

호다카가 처음 맡은 일은 맑음소녀를 만나 취재를 하는 거야. 그 맑음소녀는 소문에 의하면 날씨를 맑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어. 그 소녀의 이름은 히나였단다. 히나를 봤다는 사람들을 먼저 취재를 하면서 히나를 찾았어. 어떤 불량배들에게 괴롭히는 여자 아이가 있어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가 호다카가 찾고 있던 히나였단다. 그리고 호다카도 히나의 능력을 직접 보았어. 실제로 날씨를 맑게 해주었어. 얼마 전부터 도쿄에는 계속 비가 오고 있었는데, 호다카도 오랜만에 해를 볼 수 있었단다.

호다카는 이런 히나의 능력을 가지고 사업을 사자고 했어. 돈을 받고 날씨를 맑게 해주는 것이었지. 그래서 호다카는 히나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히나는 초등학교 동생 나기가 단둘이 살고 있었어. 그들은 인터넷에 사이트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뢰를 해왔단다. 히나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경찰들이 호다카를 쫓고 있었어. 왜냐하면 얼마 전에 일이 있었거든. 호다카가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총을 줍게 되고, (당연히 장난감 총인 줄 알았지…) 불량배에 괴롭힘 당하던 히나를 구할 때 겁을 주겠다고 그 총을 쌌거든.. (장난감 총인 줄 알았다니까…)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경찰을 총을 소지한 호다카를 계속 찾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호다카와 히나는 더 이상 사업을 할 수 없었어. 호다카는 히나, 나기와 함께 경찰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었단다.

2.

미성년자를 받아주는 숙소도 없고 밖은 8월인데도 이상기후로 눈까지 내리고 있었어. 간신히 호텔을 구한 그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단다. 셋 모두 아직 어리니까 어려움을 잠시 뒤로 하고 호텔방에서 신나게 논 거지. 히나는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었어. 날씨를 맑게 할 때마다 자신의 몸이 투명해지고, 이제 얼마 후면 자신의 몸이 사라진다고 했어. 다음날 정말 히나가 사라졌단다.

히나가 사라지고 이상 기후는 사라지고 여름 본연의 날씨가 되돌아왔어. 히나는 원래 그런 존재였단다. 히나가 사라져야 날씨가 제대로 돌아오고, 히나가 이 세상에 있으면 비만 온종일 오고하지만, 호다카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호다카에게는 히나가 이상기후보다 훨씬 중요했단다. 호다카는 히나를 사랑하니까. 호다카는 히나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단다. 그리고 결국 히나는 다시 돌아오게 되고, 도쿄의 날씨는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내기리 시작한 비는 3년 동안 쉬지 않고 내렸어. 호다카와 히나는 자신들 때문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단다.

이 책에서는 히나의 선택으로 이상기후가 계속되었지만, 실제 세상에서의 이상기후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상 기후는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단다. 사상 최고의 폭염, 사상 최고의 폭우한쪽에서는 지독한 가뭄, 한쪽에서는 지독한 홍수. 지난 여름 우리나라에서도 이상기후를 톡톡히 경험했단다. 그렇다면 이 이상기후는 누구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히나가 선택을 바꾸지 않은 것처럼 현실의 이상 기후를 불러일으킨 선택도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는 것 같구나. 이상 기후의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세지고 더 무서워질 텐데,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안타깝기만 하구나. 그래도 무엇인가 해야지내가 하고, 우리가 하고그렇다 보면 조금이라도 변하겠지.. 선택은 누구 한 사람의 몫이 아니야. 이 지구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이상기후를 없애는 선택을 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지금 당장 불편함을 주는 선택일지라도, 미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니까 말이야. 우리도 함께 노력하자꾸나.

PS:

책의 첫 문장: 비 내리는 3월 하늘에 페리의 출항을 알리는 기적이 길게 울렸다.

책의 끝 문장: 맞잡은 우리 손을 빗방울이 살짝 매만지듯 흘러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0-09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카이 마코토 이분 에니메이션 감독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책도 직접 쓰셨군요. 진짜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능력을 한꺼번에 가진 사람이 많단 말입니까? 하나도 없는 사람 슬프게 말입니다. ㅠ.ㅠ <너의 이름은>을 영화로 봤는데 <날씨의 아이>도 찾아서 보고 싶네요.

bookholic 2022-10-10 23:13   좋아요 2 | URL
<날씨의 아이> 영화는 저도 이번에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봤는데요.
<너의 이름도>도 함 찾아봐야겠어요~~^^
즐거운 한 주 되시고요~~
 
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몇 달 전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에 <헤밍웨이>를 괜찮게 읽어서, 그 시리즈의 다른 인물들도 살펴 보았단다. 아빠가 흥미를 갖는 인물들이 여럿 있었어. 그 중에 <절규>란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 뭉크를 읽었단다. <절규>라는 작품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데, 그걸 그린 화가 뭉크는 이름만 알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단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궁금했단다.

너희들도 그 그림을 보여주니 아는 그림이라고 했잖아. 원작보다 재미있게 패러디한 그림으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빠가 아는 뭉크의 그림은 <절규> 한 편이지만, 그 작품 하나만 봐도 그가 외롭고 어두운 삶을 살았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실제도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하는구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뭉크도 그랬던 거야.

====================

(14)

뭉크의 예술은 그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뭉크는 평생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해,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를 비롯하여 <마돈나> <불안> <아픈 아이> <이별> <키스>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


1.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1863년 노르웨이 로텐이란 곳에서 태어난 뭉크. 5살에 엄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13살에는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역시 폐결핵으로 죽었단다. 어린 시절 뭉크는 카렌 이모가 보살펴주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무척 컸단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뭉크는 어린 시절 엄마와 누나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의 삶 내내 어둠과 외로움의 색깔을 띠게 했을 거야. 나중에 그는 아팠던 누나를 떠올리면서 <아픈 아이>라는 작품을 그리기도 했단다. 이 그림을 처음 출품할 때는 호평과 혹평이 함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뭉크의 대표작 중에 하나가 되었단다.

오슬로의 옛 명칭은 크리스티아니아라고 하는구나. 뭉크의 아버지는 늘 모범적인 종교인으로 기독교적인 삶을 뭉크에 강요를 했지만, 반항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그것을 따르겠니. 뭉크도 예민한 성격이지만 20대는 20대였어. 20살 무렵 사교계에 참석하면서 인맥도 넓혀갔어. 한스 에게르라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와 진보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한스 에게르의 영향으로 자유연애를 해서 그런지 첫사랑은 밀리 타우로비라고 하는 유부녀였단다. 하지만 이 사랑은 1년을 넘기지 못했어.

1889년 뭉크는 파리에 유학을 가서 3년 만에 돌아와 전시회를 열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단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호평과 혹평을 받게 되는데, 베를린 화단에서 뭉크의 전시회를 혹평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것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서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의 반전이로구나. 뭉크는 1893년 그의 어린 시절 겪은 죽음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어둠을 그림으로 표현한 <절규>를 발표하는데, 아빠도 이 그림보다 사람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그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단다.

====================

(55)

뭉크의 <절규>는 일그러진 얼굴과 독특한 분위기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강한 인상에 압도당하고 만다. 해골 같은 얼굴에 늘어지고 비틀린 입과 턱, 강한 원색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풍경은 당시 선호되던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절규>는 마치 환상 속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

<절규> <절망>, <절규>, <불안>으로 이어지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구나. 그림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들이란다. 그런데 이 <절규>라는 그림이 두 번이나 절도를 당했다가 되찾았다고 하더구나. 그 두 번의 절도가 제법 최근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랬단다. 첫 번째는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올린 동계올림픽 때 절도 당했다가 되찾았고, 두 번째는 2004년에 절도 당했다가 무려 2년만에 되찾았다고 하는구나. 형사가 신분을 숨긴 채 용의자의 이웃집으로 이사 와서 그와 친분을 쌓은 다음 그 그림을 되찾았다고 하니,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로구나. 또 하나 <절규>에 숨겨진 재미있는 이야기(아빠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림 <절규>에 글씨가 써 있다고 하더구나. 자세히 봐야 보인다고 한대.

====================

(68)

노을 부분을 보면 아주 작은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라는 이 글귀가 최초로 발견된 건 1904년인데, 뭉크 자신이 썼는지 다른 이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체를 분석해 본 결과 뭉크보다는 관람객 중 누군가가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


2.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대. 아무래도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래도 사랑을 한 적은 있었어.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유부녀 밀리와 첫사랑. 반 년 만에 끝이 난 사랑이지만 뭉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랑이었을 거야. 먼 친척 율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는데, 율은 뭉크만이 아니라 당대 많은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단다. ‘검은 새끼 돼지라는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주점이 있었는데, 뭉크도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단다. 율도 그곳에 자주 오면서 많은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어. 팜므파탈이라고 할까? 나중에 뭉크가 <마돈나>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율이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게도 율은 팬이 쏜 총에 맞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대. 툴라라는 여인과는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안좋게 헤어지고 말았단다. 그러나 이런 사랑들 또한 모두 뭉크의 삶을 만들어냈단다.

====================

(138-141)

스물한 살 젊은 뭉크에서 첫사랑 밀리는 사랑이라는, 그가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예술의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다. 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서 만난 율은 30대에 들어선 뭉크에게 여자의 관성성과 마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에 만난 툴라는 뭉크에게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예술을 담도록 자극한 여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술가 뭉크에게는 다양한 자극을 주었던 반면, 한 인간으로서의 뭉크에게는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밀리는 쫓아 크리스티아니아를 헤매던 청년 뭉크와 툴라와 관련된 모든 지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크리스티아니아를 등진 중년의 뭉크. 뭉크의 인생은 이들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

….

뭉크는 30대 후반 오스고쉬트란드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단다. 여름휴가가 해마다 들렀다가 나중에는 이곳에 집을 구입하여 정착하게 되었어. 이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로,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지만 뭉크는 이곳에서 안정을 찾고 걸작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그렇다고 그곳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을 여행하기도 하고, 작품활동을 위해 외국에 가기도 했단다.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이 있는데, 이것을 처음 선보인 것도 베를린이었다고 하는구나. <생의 프리즈>는 뭉크 예술의 집약판이라고도 부른대.

====================

(216)

뭉크는 <생의 프리즈>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림들을 그릴 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 뭉크의 노트(MM N 46, 1930~1934)

====================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가 있다고 하는데, <절규>만 알고 있던 아빠에게 좋은 상식이 되겠구나. 지금도 오슬로 대학 강당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하더구나.

====================

(262-263)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작업은 뭉크 스스로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대형 공공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뭉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와 그 의미에 집중했던 반면,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작업을 하면서 인류와 민족, 지식과 역사 그리고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젊은 시절의 깊은 방황,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집요한 탐구에 몰두했던 뭉크는 50대를 눈앞에 둔 중년의 나이에 이르자 더 큰 관점에서 인류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


3.

중년이 되어서(1916) 크리스티아니아 외곽 에켈리에라는 곳에 땅과 집을 구입하여 1944년 죽을 때까지 지내게 된단다. 독신을 살아서일까? 그의 말년은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병마와 싸워야 했단다. , 그가 언제 외롭지 않은 적이 있을까? 그가 말년에 그린 자화상들이 여럿 있는데, 그 그림에서 외로움과 고독이 절절하게 느껴지더구나. 그런 그림을 그렸을 뭉크를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단다.

또 그의 말년은 전 세계적으로 무시무시한 2차 세계대전으로 무서운 시절이었으니, 그것 또한 그에게는 불운이었단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에도 많았는데, 나치가 집권하면서 그의 작품들은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82점이나 압수당하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나치가 망하고 독일이 전쟁에게 지기 전에 뭉크는 세상을 등졌단다. 그래서 다시 자신의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그 또한 안타깝구나.

이 책을 통해서 뭉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어 좋았단다. 아빠가 화가들의 전기를 읽은 것이 있나 생각해 보니, 김홍도와 고흐를 빼면 없는 것 같더구나. 미술 관련 책을 통해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읽은 적은 있지만 말이야. 이번처럼 화가들의 전기를 읽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구나. 이 책은 재미있게 잘 읽은 것 같구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에 화가를 다룬 것이 있으면 또 찾아서 읽어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에드바르 뭉크의 키워드는 단연 절규.

책의 끝 문장: 아마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한, 뭉크의 그림은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 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 P13

스물여덟 살의 뭉크가 그린 <칼 요한 거리의 저녁>(1892)은 뭉크의 불안정한 심리나 비관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는 그림이다. 아직 눈이 쌓이지 않은 늦은 가을 혹은 겨울 초입, 차라리 눈이라도 내려 쌓였더라면 거리의 불빛이 눈에 반사되어 조금은 환하고 포근한 느낌을 줄 테지만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지 않은 이 무렵은 노르웨이의 1년 중 가장 암울한 계절이다. 오전 늦게 뜬 해가 빨리 져서 초저녁인데도 어느새 거리는 어둡다. 색깔도 없다. 가로수의 잎도 다 떨어져버리고, 사람들도 짙은 색깔의 겨울옷을 꺼내 입어 도시 전체가 무채색이다. - P22

뭉크는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가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진보적인 정치사상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한 입장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에게르가 당시 사회 관습에 정면으로 반하는 파격적 사상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또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후 화단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혁신적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P35

표현주의는 이후 추상 미술의 탄생을 이끌었다. 뭉크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청기사파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후 내면의 감정을 순수한 형태와 색으로만 표현하는 경지에 이르면서 형상을 완전히 해체해버리게 되는데, 이때부터 추상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대를 앞서갔던 뭉크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시도는 동시대인들로부터 예술에 대한 모독 혹은 오만방자한 화가라는 혹평 세례를 받았지만 미술사 전체로 보면 현대 미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추상 미술을 탄생시키는 씨앗을 만들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P67

뭉크의 <아픈 아이> 또한 모티프상 이 시기의 베개 그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뭉크는 단지 이 모티프가 당시의 유행이기 때문에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에서 나온 모티프였다. 그렇기에 <아픈 아이>에서 뭉크는 사실주의적 화법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드러내다 보니 기술적으로 이를 보완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그저 자연을 관찰하듯이 볼 수는 없는 법이다. - P103

베를린에서 뭉크는 채 4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절규> <불안> <뱀파이어> <마돈나>과 같은 작품 대부분을 완성했다. 검은 새기 돼지 그룹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뭉크는 자신의 예술을 정립시켜 나갔다. 그리고 여러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렸을 뿐 아니라,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뭉크 미술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후 표현주의를 꽃피우고 추상 미술을 끌어내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72년 독일 국립 미술관은 독일 예술계 발전에 기여한 뭉크의 공로를 인정하여 뭉크의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도 열렸다. - P189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10-06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뭉크하면 절규 그 그림만 알고있는데 이렇게 새로운걸 알아갑니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도 언젠가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bookholic 2022-10-06 18:58   좋아요 2 | URL
절규하면 뭉크고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사진도 많고 읽기 편해서 저같은 초보자에 제격~~

mini74 2022-10-06 1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편들 좋거라고요.~ 연이은 죽음과 사랑 불신 등. 이 분 침대와 시계 사이에 서 있는 자화상 좋아합니다 ㅠㅠ

bookholic 2022-10-06 19:01   좋아요 1 | URL
절규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독특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더라구요. 말씀하신 침대와 시계 사이 자화상은 노년의 외로움을 리얼하게 표현한 것 같아요..

scott 2022-10-06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난당한 절규
찾아야 하는데
뭉크가 안다면
공포에 절규를 ㅜㅜ

bookholic 2022-10-06 19:02   좋아요 2 | URL
찾아서 다행임.
뭉크도 안심을...

그레이스 2022-10-06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넘 재밌게 읽었어요

bookholic 2022-10-08 00:41   좋아요 1 | URL
저도 재미와 정보, 일석이조였어요..^^
즐거운 연휴 되시고요~~
 
재능의 불시착
박소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이번에 읽은 박소연 님의 <재능의 불시착>은 인터넷 서점에서 책 둘러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책이란다. 평도 좋고, 직장인에 대한 소설이라고 해서 공감이 갈 것 같아 읽어볼 만 하다고 생각했어. 지은이 박소연 님의 이력도 독특하시더구나. 일단 엄청난 능력자로써 엄청난 일들을 해서 국무총리상까지 받은 이력이 있다고 하는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국무총리상까지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싶어. 그런데 그런 그가 적게 일하고 돈도 잘 버는 생활을 하고 싶다면서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하는구나. 그 이후 강연과 글을 쓰는 일을 한다고 하는데, 그의 이력을 보면 뭘 해도 잘 하실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 동안은 주로 아빠가 싫어하는 자기계발, 처세술에 관한 책을 쓰셨는데 이번에는 소설까지 쓰셨어. 이 책은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어. 지은이의 약력을 보고 놀랬는데, 이 소설들을 보고 한번 더 크게 놀랬단다. 글 솜씨가 여간 좋은 게 아니구나. 여덟 편이 이야기가 모두 재미있고 읽기도 너무 편하게 되어 있었어. 순식간에 다 읽고 말았단다. 아빠가 약속장소에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는데, 잘못하면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칠 뻔 했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설의 배경들이 모두 회사라서 오랫동안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아빠로서 많이 공감 가는 소재들이었단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다룬 이야기를 읽다 보니 장류진 님의 <일과 기쁨과 슬픔>이라는 소설도 생각이 났지만, 약간 다른 류의 소설이었어. 뭐랄까, 장류진 님의 <일과 기쁨과 슬픔>은 풋풋한 젊음이라면, 박소연 님의 <재능의 불시착>은 좀더 잘 익은 젊음이랄까. 둘 다 재미가 확실한 소설들인 것은 확실해.

한창 이야기하다 보니 아빠가 너무 좋게만 이야기를 했는데, 아빠가 기대를 안 하고 책을 읽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네. 아무튼 아빠한테는 아주 좋았단다. ㅎㅎ


1.

그런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막내가 사라졌다> 부서의 막내 사원이 회사를 그만둔다는 하고 문자만 남긴 채,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졌단다. 문자에는 다음 날 대리인이 와서 퇴직 처리를 하겠다는 했어. 일반적인 퇴사 방법이 아니라서 부서원들은 다들 당황스러워했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퇴사도 대리인을 통해 퇴사를 하나 싶기도 하고, 연락마저 다 끊은 것이 혹시 퇴사 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어. 막내 사원에게 했던 시킨 일들은 정당한 것들인가, 정도에 지나쳤던 말들은 없나, 여러 사람들이 이것들을 걱정하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막내 사원의 대리인이 올 때까지 초긴장을 하고 있었단다. 대리인이 왔을 때도 예의주시면서 긴장을 했는데, 다행히 원만하게 처리되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단다. 사표 수리를 안 해주고 사표를 찢어버릴까 봐 사표를 코팅을 했다는데

<가슴 뛰는 일을 찾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모든 직장들의 이상이 아닐까 싶구나.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를 수 밖에 없는 법. 지은이 혜진씨는 가슴 뛰는 일을 선택하겠다고 하고 NGO 회사에 취업을 해서 일하고 있었단다. 부모님은 모두 의사였고, 혜진씨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해외 봉사를 했고, 혜진씨도 따라 다니곤 했어. 혜진씨가 고등학교 때 사정상 혜진씨 엄마 혼자서 아프리카에 봉사를 갔었는데 그만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돌아가시고 말았지. 그래도 혜진씨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려고, NGO 회사에서 취업해서 봉사도 하면서 돈도 버는 일을 한 거야. 하지만 현실은 달랐지. 회사는 회사일 뿐. 하는 일만 어려운 사람들은 도울 뿐이지 업무는 다른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단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많이 실감했겠지. 그리고 남자친구의 어머니의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웠어. 엄마가 없다고 대신 엄마를 해주겠다는 식의 과도한 관심. 그런 것을 불편해 하는 혜진씨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친구. 남자 친구도 이상과 현실의 차이만 알려주고가슴 뛰는 일을 선택할 정도로 자유의지가 강했던 혜진씨는 결국 회사도 그만두고, 남자친구와도 헤어졌단다. 혜진씨에게 박수를 보내 주고 싶구나.

<전설의 앤드류 선배> 전설이라는 말까지 붙을 만큼 무능한 회사 선배가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소설로 쓴 것이 바로 이 소설이란다. , 상상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런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 같아. 자신은 다름 열심히 일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일을 망치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그걸 수습하는데 정신 없고, 생각만 해도 피곤하구나성격 더러운 선배만큼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선배가 무능한 선배가 아닐까 싶구나. 소설 속 무능한 선배는 결국 고문직으로 지방 발령을 받는데, 그 선배가 심성은 못 돼먹지 않아서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았단다.

<재능의 불시착> 얼마 전에 아빠 회사 사람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 다른 사람들보다 잘 하는 무엇인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걸 찾지 못하고 결국 평범한 회사원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이야기.. 그러면서 혹시 갖고 있는 재능이 오늘날에는 발휘할 수 없는 재능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어. 예를 들어 마차를 기가 막히게 끈다거나, 주판을 기막히게 튕긴다거나그런데 그런 생각을 아빠만 한 것은 아닌가 보구나. 이 책의 지은이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재능의 불시착>이란 소설을 쓰신 것 같아. 주인공 준은 어렸을 때부터 방향을 정확히 알고, 무게를 정확히 예측하는 능력을 가졌단다. 하지만 그런 재능들은 이 시대 어디에도 써 먹을 때가 없었단다. 장기 자랑에나 써 먹을까? 회사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냥 다니고 말이야. 결국 구조 정리로 회사에서도 쫓겨났어. 잠시 쉬는 동안 봉사 활동을 했는데, 포도 따기 봉사 활동을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무게 측정을 정확히 하는 그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받으며 가장 인기가 좋은 사람이 되었단다. 그로 인해 자신감을 갖은 준은 자신의 재능이 어쩌면 불시착한 것이 아니고 행운을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누가 육아휴직의 권리를 가졌는가> 이 소설은 남자 직원의 육아 휴직에 관한 이야기란다. 아빠 회사에서도 처음으로 남자 직원이 육아 휴직을 쓴다고 했을 때 좀 낯설어했던 기억이 있구나. 이 소설의 주인공도 그가 일하는 부서에서 1호 남자 육아 휴직자였단다. 아내가 임신 때부터 임신중독으로 고생하고 아이를 낳아서도 몸도 좋지 않은 상태고 육아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어. 아내가 계속해서 육아휴직을 쓰라고 처음에는 부탁을 했고, 그것이 경고로 바뀌고 협박으로 바뀌어서 결국 주인공은 육아휴직을 하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자신도 좋게 생각했어.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내를 도와 육아도 하고 자기계발도 하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육아휴직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아내의 복직 선언. 어라, 이게 아닌데, 주인공은 생각했지. 아내를 도와준다는 생각의 육아 휴직이었는데, 이젠 독박 육아가 되어버린 거야. 아내의 이야기에 반박하지 못하고 아내는 복직하고 주인공은 집안일과 육아를 하게 되었어. 물론 무척 힘들었지. 하지만 그동안 감으로 알았던 아내의 고충을 알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는 해피 엔딩.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된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주인공인데, 진상 학부모와 벌이는 에피소드를 그린 소설인데, 학보무가 갑이고, 어린이집 선생님이 을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착하기까지 해서 거절도 잘 못하고그런데 이 진상 학부모가 하는 행동은 점점 가관나중에 시원하고 복수를 해주는데 아빠 속이 다 시원하더구나.

<노령 반려견 코코> 가족 돌봄 휴가란 것이 있는 회사가 있단다. 가족들의 건강이 안 좋거나 하면 돌봐주기 위해서 쓰는 무급 휴가가 보통이란다. 그런데 주인공은 반려견이 늙고 많이 아파서 가족 돌봄 휴가를 신청했단다. 부장님과 인사팀은 전무후무한 이야기라서 당황했지. 반려견 때문에 가족 돌봄 휴가를 쓴다? 그런데 그 사정을 잘 들어보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어. 그리고 잘 생각해보니 이걸 잘 이용하면 회사 이미지도 좋아질 것 같았어. 그래서 주인공은 가족 돌봄 휴가를 받게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

마지막 <언성 히어로즈>는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글이란다. 언성 히어로즈. Unsung heroes. 보이지 않는 영웅들. 그들이 회사를 더 빛내고, 우리 사회를 더 빛내지 않을까 싶다.

자 이렇게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를 짧게 해 보았단다.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나서, 자기계발서와 처세술을 읽지 않는 아빠가 이 책의 지은이가 쓴 것은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서, 지은이의 다른 책도 구입을 했단다. 그 책은 이 책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너희들도 나중에 커서 회사에 다니게 될 텐데, 그때의 회사 생활은 또 어떨까? 그 때도 이 책의 이야기들에게 공감을 갖게 될까?

이 책의 한 이야기처럼 가슴 뛰는 일을 하면 좋겠구나. 그리고 이 책의 지은이처럼 말이야.


PS:

책의 첫 문장: 막내가 사라졌다.

책의 끝 문장: 다들 감사해요, 정말.


"그렇죠. 결국 세상에서 비싼 값을 쳐주는 재능을 타고나는 건 운의 영향이 큽니다. 시대도 마찬가지죠. 아마 저 같은 사람은 80년대에 태어났으면 틀림없이 실패자가 됐을 거예요. 몸이 허약하고, 술은 못 먹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이니까요. 웬만한 회사는 일 년도 못 버티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니 제 성공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게임 산업이 막 성장하고 있을 때에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진 한국에서 살았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남자는 잠시 멈추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저는 미친 듯이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운이었던 겁니다."
- P147

어쩌면 준이 그동안 뽑기에서 실패했다고 투덜거린 재능들이 언젠가 행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태수처럼 말이다. 준은 이제 고작 서른두 살이었다.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의 기준을 성인 평균 수명의 3분의 1로 잡았다고 했으니, 백 세 시대에서는 어린이가 서른세 살까지인 셈이다. 무엇을 새로 발견해도, 새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였다.
준은 아직 불시착한 게 아니었다.
- P15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09-30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어쩌면,,,제 이야기![첫 문장: 막내가 사라졌다.] 저!🖐🖐🖐 막둥이 ^^인데 ㅎㅎㅎㅎ

bookholic 2022-10-01 21:43   좋아요 1 | URL
ㅎㅎ scott 님은 사라지지 마세요~~~
 
















(41)

초기 소지가 불법이고 인구밀도가 높으며 경찰서가 비교적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의 범위를 좁게 가져가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주어 보복성 폭력 행위로 이어지게 하는 것보다, 팔을 잡는 등의 현상 유지만 하게 하고 공권력을 빌어 사건을 처리하는 편이 폭력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물론 몇몇 아쉬운 사건이 있긴 하지만 더 큰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현행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44)

살인미수 혐의를 받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 같은 주장을 하곤 한다. A라는 사람 때문에 B가 죽었다 치자. 이때 A에게 적용되는 죄명은 살인죄만 있는 게 아니다. A가 무슨 마음을 먹고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죄명은 네 가지로 갈린다. 죽일 마음이었다면 살인죄, 다치게 할 마음이었다면 상해치사죄, 그냥 좀 때려줄 마음이었다면 폭행치사죄,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실수로 죽게 했다면 과실치사죄. 똑같이 피해자가 사망했더라도 가해자의 마음속에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에 따라 죄명을 갈린다. 이러다 보니 살인(미수)혐의를 받는 피고인들 십중팔구는 형을 줄여보려 죽일 의도는 없었고 그냥 좀 혼내주려고만 했다고 주장들을 한다.


(68-69)

현행법상 집행유예 이상 전과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 벌금형이 가능한 젊은 피고인들의 집행유예형 요청을 만류하는 이유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 뒤늦게 공무원 시험 응시를 마음먹었다가 집행유예 전과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 나이 많은 피고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취업할 때 전과 기록을 제출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형 실효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집행유예 전과는 5년이 지나야 전과 조회 결과에서 사라지지만, 벌금 전과는 2년만 지나면 사라진다. 물론 둘 다 아예 사라지는 건 아니고 취업이나 기타 목적으로 조회할 때에만 보이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 크다. 나도 변호사지만 우리나라 법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한다. 집행유예 전과가 어디서 어떤 불이익을 가져올 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120)

도대체 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야만 하는 걸까? 바로 인권 때문이다. 형사재판이라는 게 국가 대 개인의 싸움이라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이 과정에서 사수하려 애를 써도 보장하기 힘든 것이 개인의 인권이다. 하지만 요즘 인권을 얘기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는 듯하다. ‘흉악범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는데 무슨 놈의 인권이냐. 도리어 피해자의 인권을 지켜야 한다반론이 대번에 돌아온다. 사실 그 간의 형법이 피해자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피고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면 반대급부로 피해자의 인권이 지켜지는 걸까?


(170)

사실상 주변 정황으로 성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방식은 무죄추정의 원칙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이 과연 피고인만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지적장애인 역시 상대를 선택하고 성관계를 즐길 권리가 있다. 그 관계에 대해 국가가 광범위하게 개입한다면 결국 사람들은 지적장애인과의 성적 접촉을 기피하게 될 것이다. 같은 장애인이라고 해서 처벌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니 이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이나 매한가지다. 눈앞의 불행을 막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들 앞에서, 멀리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얘기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상 궁금한 건 지적장애인 본인들의 얘기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연인들이 모두 수사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여전히 심연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207-208)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두 가지 책임이 발생한다. 하나는 국가에 대한 형사책임이다. 국가가 금지하는 범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받을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민사책임이다. 피해자에 대해 신체적 물질적 정신적 손해를 입혔으니 이를 경제적으로 배상할 책임이다. 두 책임은 완전 별개다. 국가에 대해 벌금을 냈다고 해도 피해자에 대한 민사책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합의를 해주지 않아도 별로 아쉬울 게 없다. 민사책임을 묻는 별도 소송을 피고인을 상대로 제기하면 되는데,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면 이 소송이 무척 간단해진다. 자신의 피해액을 증명해 형사재판 판결만만 첨부하면 입증이 끝나는 것이다. 어차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면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하고 형을 적게 받는 게 피고인 입장에선 여러 모로 이익이다.


(226)

공직선거법을 악법이라고 칭한 이유는 선거의 자유, 공정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문제는 공직선거법에는 평범한 시민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 많지만 너무 자주 바뀌고, 그 내용도 제대로 홍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술김에 선거 벽보에 불을 지른다든지, 선거 여론조사를 조작한다든지, 공천 대가로 돈을 받는다면, 그건 누가 봐도 법에 위반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 누가 선거에 대해 조금만 입을 잘못 놀려도 전과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앞서 언급한 명함 돌리기, 조명판 설치는 보통 사람과는 그닥 인연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직선거범의 처벌 범위는 이것보다 훨씬 넓은. 선거운동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넓은 처벌 범위 때문에 악용 가능성 역시 높다.


(263-264)

강도상해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해볼까 생각도 했다. 헌법재판소에서 강도상해죄에 대해 위험 결정을 한다면 피고인은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강도상해죄에 법정형은 너무 높다. 살인죄가 최고 5년인데 강도상해죄가 최소 7년이라는 건 뭔가 이상하다. 게다가 일단 강도가 성립되면 강도상해로 넘어가는 건 아주 쉽다. 병원에서 진단서를 쉽게 발급해주는 탓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