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살아 있다는 것

 

뭍에 잡혀 올라온 물고기가

온몸을 던져

바닥을 치듯이

그렇게 절망이 온몸으로

바닥을 친 적 있는지

그물에 걸린 새가

부리가 부러지도록

그물눈을 찢듯이

그렇게 슬픔이 온 존재의

눈금을 찢은 적은 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온 생애를 거는 일이다

실패해도 온몸을 내던져

실패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돌릴 겨를도 없이

두렵게 절실한 일이다

 

(16)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를 읽었습니다

당신이 그 이유인 것 같아요

고독의 최소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사랑을 만난 후의 그리움에 비하면

이전의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도

 

시 아니면 당신에 대해 얘기할 곳이 없어

내 안에서 당신은 은유가 되고

한 번도 밑줄 긋지 않았던 문장이 되고

불면의 행바꿈이 됩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시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당신 없이도 잘 지냈습니다

 

(22-23)

희망은 가볍게 잡아야 한다

 

희망은 가볍게 잡아야 한다

새처럼 날아가 버릴지 몰라 힘껏 움켜쥐면

손 안에서 숨 막혀 죽는다

이제 막 날갯짓 배운 어린 새를 감싸듯이

손의 오목한 곳에 올려놓아야 한다

아니면 공중을 나는 깃털처럼

무게도 중력도 없이

머리 위에 내려앉게 해야 한다

다른 머리 위에도 날아갈 수 있도록

너무 세게 붙잡아 모서리가 부서지거나

매달리며 애원해선 안 된다

절박할수록 가만히 희망을 품는 법을 배워야 한다

희망은 숨을 쉬어야 하고

나무 위의 새처럼 스스로 노래해야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가볍게 붙들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껍질 안에 절망이 웅크리고 있으므로

희망이 날아갔다가 언제든 다시 날아올 수 있도록

사방의 벽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한다

내가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50-51)

나의 전기 작가에게

 

불안한 생이 아니라 단지

불안한 날들이 몇 날 있었다고 적어 주기를

허무의 계절이 아니라 계절마다

허무한 감정이 두세 번 찾아왔을 뿐이라고

실수 많은 세월이 아니라

선택의 세월이었다고

발 헛디뎌 자주 넘어진 게 아니라

나만의 춤을 춘 것이었다고 써 주기를

우울한 시간이 아니라 다만

혼자 더듬어 나간 시간이었다고

고뇌의 날들이 아니라

희망의 불씨 뒤적인 날들이었다고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지만

집착이 아니라 소망이었다고 써 주기를

허약한 몸이 아니라 껴안다가 조금

부러졌을 뿐이라고

검은색 옷을 편애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격렬 감추기 위함이었다고

달처럼 이따금 혼자였을 뿐

어두웠던 것은 아니라고 적어 주기를

 

(66-67)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시가 써지지 않을 때면

낯선 고장에서 혼자 산 두 해 동안

불타는 밀밭과 삼나무와 소용돌이치는 구름과

고독한 얼굴을 2천 점 넘게 그린

고흐를 생각한다

자신의 심장 안으로 태양을 훔치려다 미쳐 버린 사람

정신병원의 작은 창으로 보이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 창 크기의 화폭에 담은 사람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 말한 사람을

 

불안한 예감에 기쁨이 반으로 줄어들 때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 가면서도

매분 매초마다 빛의 변화를 감지하며

수련과 연못을 250점이나 완성한

모네를 기억한다

빛 번짐을 막기 위해 고독한 밀짚모자 눌러 쓰고

팔레트에 가득한 초록색 물감 섞고 또 섞어

수련과 연못의 경계를 지운 사람

날마다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 사람을

 

내 운명이 내 운명인 것이 무거울 때면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인을 그린

샤갈을 떠올린다

닭과 염소와 꽃다발도 따라서 날고

한 여인을 사랑해 그녀가 죽어서도 창문으로 들어와

자신의 그림을 인도하며

푸른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고 말한 사람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사랑과 혁명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을

 

 

(92)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당신을 발견한 내 눈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내 귀를 사랑한 것이고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다가간 내 목숨을 사랑한 것이고

당신 곁에서 웃는 나의 아픔까지 사랑한 것이고

당신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를 숨 쉬는

나의 폐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지대가 꽃나무가 사랑하듯이

슬픔의 무게로 기쁨의 가벼움을 사랑하듯이

아무도 모르게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96-97)

곤충의 임종을 지키다

 

초록 여치 한 마리, 한 시간 넘게

가느다란 다리를 떨고 있다

작은 곤충에게도

죽는 일이 사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듯

지금까지 겪은 어떤 일도

이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제 끝인가 하고 보면

또다시 이어지는 경련

한 치의 벌레에게도 닷 푼의 혼이 있다는데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존재를 잃는 전율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통과해야만 하는 영역

한 생을 얻는 일보다 한 생을 내려놓는 일이

몸서리치게 벅차다는 듯,

내가 죽을 때

당신에게는 그것이 살아 있는 내 모습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겠지만

내가 당신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마지막 순간도

그것이라는 듯,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둘 다 고통이니

오랴, 내 차례여

나를 생각해 망설이지 말아라

 

 

(110-111)

나의 마음

 

봄날처럼 다정했다가 뼈를 부수는 서리처럼 냉정하고

무한허공처럼 넓었다가 토끼굴처럼 속 좁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부자유하고

꽃 피는 소리 들릴 만큼 고요했다가 벌집처럼 소란하고

목화솜처럼 부드러웠다가 호랑가시나무처럼 날카롭고

무슨 일에도 무심했다가 사소한 일에 감정 과잉이고

오체투지 수행자처럼 인내심 많았다가 극의 방향을 잃은 나침반처럼 초조하고

속수무책으로 매혹되었다가 속절없이 환멸에 젖고

민들레 풀씨처럼 놓아주었다가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가슴 뭉클했다가 반나절 만에 안색을 바꾸고

거리의 상점처럼 열려 있다가 봉쇄수도원의 덧문처럼 닫히고

새로 핀 분꽃처럼 희망찼다가 구겨진 포장지처럼 근심으로 얼룩지고

시냇물처럼 재잘거리다가 무너진 흙처럼 시무룩하고

한 개의 기쁨이 천 개의 슬픔을 잊게 했다가

한 개의 슬픔이 천 개의 기쁨을 잊게 하고

반딧불이의 꼬리처럼 환했다가 반딧불이의 얼굴처럼 어둡고

모두가 나였다가 누구나 타인이고

그래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가 무조건적인 마음이고

그래서 더 바랄 게 없는 천국이었다가 혼자만의 지옥이고

삶의 암호를 이해한 것 같았다가 때로는 암호 그 자체인

나의 마음

 

(130-131)

물음표

 

우리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명하는 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내 눈썹을 그릴 때 신은 어디서 검은 색을 얻었을까?

바다의 결정체인 소금은 왜 파란색이 아닐까?

숯은 불을 어디에 감추고 있을까?

바람은 자신을 손짓하는 나뭇잎을 어떻게 찾아갈까?

돌이 흘리는 눈물은 왜 냉정하지 않고 고단해 보일까?

무는 세상의 무엇이 보고 싶어서 흰 목을 빼고 있을까?

지빠귀처럼 사람도 자신의 얼굴을 정하고 태어날까? 그 얼굴은 어디서 고를까?

아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동안 빗방울의 심장은 두려울까? 두근거릴까?

거리에서 혼잣말하는 여인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걸까?

속으로 우는 울음만큼 절창이 없다는 걸 갈대 피리는 언제 알았을까?

모든 전등은 왜 약간은 떨면서 켜져 있을까? 자신이 돌아갈 어둠에 맞서기 때문일까?

내가 그리워한 첫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금 간 사랑을 꿰매려면 얼마나 긴 인동초 꽃실 빌려야 할까?

왜 우리는 평생을 함께 지내는 자신과 향복하지 않을까? 더 큰 형벌이 있을까?

억새는 왜 지나가는 모든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까?

내일을 알려면 얼마나 많은 어제를 불러 모아야 할까?

수십 억 인구 중에 왜 둘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걸까?

나는 언제부터 당신의 나이고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당신이기로 결정했을까?

누가 인간의 몸을 본떠 물음표를 만들었을까?

 

 

(158-159)

낮달맞이꽃 피어 있는 곳까지

 

안데스산에 사는 케추아족은

미래를 뒤쪽이라 부르고

과거를 앞쪽이라 부른다지

 

미래는 볼 수 없지만

과거는 볼 수 있기 때문이지

 

저 앞에서 걸어가는

수많은 나를 보네

시인이 될 줄 모르고 처음 시를 쓴 나

운명이 불안한 영혼을 건드리던 나

물집 같은 사랑이었던 나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르던 나

 

중고 책방들에 흩어져 있는 내 시집을 발견한

작년의 나

지구의 그림자 속을 걷던 지난겨울의 나

낯익은 것은 낯설음뿐인

언제나의 나

내일의 나를 희망한 어제의 나

 

수많은 내가

저만치 앞에서 걸어가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낮달맞이꽃 피어 있는 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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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1-11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류시화 시인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를 외우고 다녔었는데... 오늘 bookholic 님을 통해 시인의 시을 보게되니 옛 생각이 나네요. 추억을 떠오르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bookholic 2025-01-12 23:54   좋아요 1 | URL
최근에 출간된 류시화 님의 시집을 통해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주말이 금방 휙 지나갔네요...
내일부터 시작하는 한 주도 즐거운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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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단다. 매년 10월이면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까? 관심이 많단다. 아빠도 매년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진행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맞추기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누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까? 생각해 보곤 한단다. 그 이벤트는 매년 참여하면서 한번도 맞춘 적이 없단다. 왜냐하면 노벨 문학상은 대부분 아빠가 모르는 작가가 선정되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몇 해 전부터는 아빠가 모르는 사람에 투표를 했단다. 올해도 알라딘 인터넷 서점에서 고른 후보들 중에서 아빠가 모르는 작가에 투표를 했단다. 투표현황도 볼 수 있는데 매년 팬심으로 우리나라 작가가 1~2위를 차지했고, 올해는 한강 작가가 1위를 달리고 있었어. 아빠도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타면 좋겠다고 했지만, 아직은 외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어렵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나중에라도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한강 작가가 받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왜냐하면 부커상을 비롯하면 외국에서 유명한 상들을 여럿 탔으니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작년에 받을 줄은 몰랐단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주로 받기도 해서 더욱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 아무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아서 정말 기뻤단다.

아빠가 한강 작가의 책은 두 권 밖에 읽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사실 아빠가 한강 작가의 책을 두 권 밖에 읽은 이유는 책 읽은 순서 때문일 것 같구나. 아빠가 첫 번째로 읽은 한강의 책은 <소년이 온다>라는 책으로 이제는 많이 알려진 것처럼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배경으로 한 소설이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체지만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던 작품인데, 그 책에 대한 아빠의 감상은 그 책을 읽고 쓴 독서 편지를 참고해 보렴.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른 소설들이 여럿 있지만, 한강 작가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제로 조곤조곤 이야기하듯이 써내려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걸 어떻게 이야기할지 잘 몰랐는데, 노벨 문학상 선정위원회에서 명확하게 표현해 준 것 같았어.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

아무튼 아빠는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읽고 부커상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두 번째로 읽었단다. <채식주의자>는 누군가 평가한 것처럼 아빠에게는 기괴한 소설로,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읽기 무척 불편했단다. 만약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었다면 한 권 밖에 안 읽었을 것 같아. <채식주의자>를 읽은 이후 한강 님의 책들은 좀 보류를 했던 것 같구나. 그만큼 <채식주의자>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책으로 알고 있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선정 소식 이후 국내 베스트셀러 상위 차트는 모두 한강 작가의 소설로 채워졌단다. 책을 주문해도 며칠씩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열풍이었어. 아빠는 한강 작가가 아니더라도 매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들을 한 권씩 읽곤 한단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작가가 받았으니 기쁜 마음으로 두 권 읽어야겠구나..^^ 그래서 주문한 첫 번째 책이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또 다른 아픈 역사인 제주 4.3사건을 다룬 이야기라고 했어. 제주 4.3 사건은 아빠가 독서 편지를 통해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것 같구나. 그만큼 제주 4.3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 작가만의 문체와 감성으로 풀어나간단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으로 말이야. 아빠가 책을 이야기 전에 서두가 그렇게 길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쁜 나머지 좀 길게 이야기한 것 같구나. 그렇다면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볼게.

 

1.

주인공 경하는 한강 작가의 아바타 같은 사람으로 나온단다. 아픈 역사로 소재로 한 소설을 마치고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경하. 소설 속에서는 소설의 제목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난 악몽을 꾼 작가 자신의 이야기 아닐까 싶구나. 그 악몽이라는 것은 해변가에 눈 덮인 수많은 통나무들이 묘비처럼 서 있고 어느 순간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바다에 쓸려가는 꿈이었단다. 그 꿈 이야기를 친구 인선에게 해주었어. 인선은 경하가 사회 초년 시절 다녔던 출판사에서 함께 일했던 프리랜서 카메라 작가로 만나 친구가 된 이였어. 인선은 이후 다큐멘터리 영화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경하의 악몽 이야기를 듣고 그 꿈을 영상으로 만들자고 했단다. 그것에 몇 년 전 이야기였어.

그 사이에 힘든 읽을 겪고 바쁜 생활을 하면서 그 계획은 잊혀졌고, 인선은 어머니 병 간호를 위해서 제주에 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제주에 정착해서 생활하고 있었단다. 그런 인선으로부터 어느 날 전화가 왔어. 서울에 있는 병원인데 신분증을 가지고 급히 와달라고 했단다. 병원에 도착하니 인선은 손가락 두 마디가 잘려 봉합 수술을 마친 상태였어. 목공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봉합 수술을 했다고 했어.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은 봉합 수술을 부분의 신경이 죽지 않도록 3분마다 손가락 부위를 바늘로 질러야 하나는 거야. ,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바늘로 상처 부위를 찌르는 일을 부탁하러 불렀나, 싶었는데 그 일은 간병인이 하고 있었고 경하를 부른 이유는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어. 손가락을 다치고 곧바로 서울 병원으로 경황 없이 와서 집에 있는 앵무새 아마를 새장 속에 그냥 두고 왔다고 했어. 한라산 중턱에 한적한 마음에 집이 있었고, 제주에는 교류하며 지내는 사람이 없어서 경하에게 앵무새 아마를 보살펴 달라고, 아니 살려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어. 오늘까지 가야 앵무새 아마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니 곧바로 공항으로 가서 제주로 가 달라고 했어.

그렇게 경하는 병원에서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단다. 폭설도 그런 폭설이 없었어. 경하가 타고 온 비행기를 끝으로 그 이후 비행기들은 모두 결항되고 말았어. 공항에서 인선의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모두 거절했어. 폭설로 한라산 중산간까지 갈 수 없다고 했어. 그나마 아직 버스는 운행을 해서 버스를 타고 갔는데,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하고 갈아 탈 버스가 운행할지는 가봐야 한다고 했어. 일단 버스를 타고 출발눈은 점점 심해지고…. 두 번째 버스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포기하려고 할쯤 왔단다. 그렇게 어렵게 인선의 마을에서 내려서 다시 인선의 집까지 가는데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길은 눈으로 덮여서 어디가 길인지 잘 몰랐단다. 그래서 고랑에 빠져서 다치고 핸드폰은 잃어버리고

친구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 집에 도착을 했단다. 그런데도 불행히도 한발 늦었어. 인선의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어 있었단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어. 경하는 죽은 앵무새를 잘 감싸고 집 근처 나무 밑에 묻어주었단다. 그리고 다시 인선의 집으로 돌아왔는데, 경하는 사람 모양의 통나무들이 잔뜩 있는 걸 보았단다. 그것은 몇 년 전 경하가 꿈 속에서 보았던 그 나무들이었어. 그러니까 몇 년 전 경하와 이야기했던 경하의 꿈을 작업하자고 했던 것그것을 인선은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란다. 손가락 잘린 것도 그 작업을 하다가 다친 것이었어. 이런 바보…. 그걸 왜 아직도….

….

이제 잠을 청하려고 했는데, 폭설로 인해 정전까지 되었어. 난방시설도 안 된다는 거지. 인선의 옷을 찾아서 끼어 입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단다.

 

2.

그런데 이 소설은 4.3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고 했는데, 4.3 사건은 언제 나오는 거지?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단다. 책의 중반까지는 인선과 경하의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가끔 인선의 부모님이 겪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 속 사건들이 4.3 사건의 이야기라는 것은 알겠더구나.

….

인선의 집에서 잠을 자고 난 다음날 아침…. 앵무새 아마의 소리가 들려왔어. 분명 어제 죽어서 경하가 묻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경하도 죽은 것인가? 그곳보다는 앵무새 아마가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닐까 싶구나. 전작 <소설이 온다>에서도 영혼이 찾아오곤 했으니까. 앵무새 아마는 그렇다 쳐도 인선까지 멀쩡한 몸으로 제주에 돌아와 있었어. 그렇다면 인선의 영혼도 찾아온 것인가? 인선의 상황이 안 좋아져서 혹시 죽은 것인가? 어제 공항에서 전화했을 때 간병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단다. 이후 소설은 경하와 인선의 영혼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개된단다.

인선은 부모님 이야기를 해주었어. 특히 인선의 어머니 강정심의 이야기. 강정심은 어렸을 때, 그러니까 4.3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니와 친척 집에 가 있었는데, 집에 돌아오자 마을은 모두 불타고 시신들은 한데 모여 눈에 덮여 있었단다. 그때 처음으로 죽은 사람의 얼굴에 떨어진 눈은 녹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언니와 함께 눈을 치우며 시신을 확인했어. 엄마와 아빠의 시신은 찾았는데 오빠와 막냇동생의 시신은 못 찾았단다. 막냇동생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찾았는데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어. 아직 죽지 않아서 집에 데리고 왔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단다. 동생은 얼마 후에 죽고 말았단다. 아마 자신이 왜 총을 맞아 죽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죽었을 거야.

그리고 오빠는 대구형무소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 면회를 가려고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단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감되었다고 했지만 이후 행방불명이었어. 강정심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오빠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계속 실종자 가족들 모임에 나가는 등 희망을 놓지 않았어. 당시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예비검속이라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나 좌익 활동을 했던 수감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했어. 그때 강정심의 오빠도 죽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당시 젊은 남자 한 명이 도망을 갔다는 소문이 있었어. 그 젊은 사람이 오빠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정심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단다.

한편 인선의 아버지는 1948년에 19살이었어.. 당시 서북청년단들이 진압한다고 제주에 왔는데, 19살 남자면 그들의 타겟 일 순위였기 때문에 인선의 아버지는 산에 숨어 지냈다고 했어. 나중에 마을에 왔을 때 가족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총살당했다고 했어. 인선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15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고 했어.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했어. 강정심의 오빠와 같은 대구 형무소에서 있기도 했어. 나중에 강정심에게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알고 지내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구나. 하지만 인선의 아버지는 그때의 후유증으로 인선이 열 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어.

…..

인선의 가족들은 평생 아픔을 갖고 살아갔는데, 도대체 왜 그 아픔을 가져야 하는지 몰랐어. 국가 지도자의 무식함 때문에국가 지도자의 무식함은 정말 무서운 것이란다. 나라의 운명이, 국민들의 운명이 그 무식함에 희생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많이 봐왔거든.. 갑자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인선은 경하에게 자신이 그동안 작업했던 나무들을 보러 가자고 했어. 촛불에 의지하여 경하와 인선은 함께 숲으로 향했단다. 그러다가 촛불이 꺼져버렸는데, 그 순간 인선도 사라졌단다. .. 인선의 영혼이 사라진 것그 이야기는 병원에 있는 인선에게는 좋은 소식일 거라 생각했어. 그러니까 인선이 다시 깨어났다는 이야기이니까 말이야.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양자역학적 발생도 잠깐 떠올랐단다. 인선의 존재가 병원에도 존재하고, 제주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인선이 다시 눈을 뜨는 순간 제주에 존재하고 있던 인선이 사라지는 것이 마치 양자역학 같지 않니?^^

<작별하지 않는다> <소년이 온다>와 함께 아빠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더구나. 책을 읽고 보니,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 작가의 책을 원문으로 읽은 것이구나. 물론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도 읽었지만, 그 때는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이니까우리나라에서는 한강 작가만큼 역량이 뛰어난 작가가 많다고 생각해. 번역만 잘 이루어진다면 또 노벨 문학상을 작가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리고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더 많은 한국 문학들이 외국에 소개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P57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 P93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代殺)헌 거야. - P218

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 - P243

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 P273

모든 소리의 잔향이 허공의 눈송이들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도 눈의 입자들 속으로 삼켜졌다.
여기쯤 멈춰 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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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 캐드펠 수사 시리즈 1
엘리스 피터스 지음, 최인석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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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아빠가 기차를 탈 일이 있었단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게 되어 조금 설레기도 했단다. 기차 안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책을 읽을 생각에,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재미있는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고른 책인 엘리스 피터스의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책이란다. 얼마 전부터 알라딘 인터넷 서점 블로그에 자주 소개되고 있는 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란다. 리뷰하시는 분들이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아빠도 어떤 책인가 싶어 캐드펠 수사 시리즈 1권을 구입했었어.

지은이는 엘리스 피터스라는 사람으로 아빠는 처음 알게 된 사람인데, 지난 세기에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꽤 유명한 추리 작가인 것 같구나.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완간 30주년 기념으로 전면 개정판을 내놓는다고 하는구나. 모두 21권인데, 그 중에 10권이 출간되었더구나. 세상에는 읽을 책들이 정말 많구나. 아빠는 이제 1권을 읽었으니, 가끔씩 읽어야겠구나. 아무튼 기차 여행에는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 제격이라 생각하여 가지고 갔는데, 앞부분은 낯선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애 좀 먹었단다. 본격적으로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는 책장이 날개 돋친 듯 넘어갔단다. 주인공 캐드펠이라는 사람도 원칙주의자라기 보다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이라서 더 마음에 드는 캐릭터더구나. , 그럼 1 <유골에 대한 기이한 취향>을 이야기해줄게.

 

1.

때는 1137. 잉글랜드의 베네딕토회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늙은 수사 캐드펠이 주인공이란다. 젊었을 때는 십자군 경험하고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지금은 수도원에서 은둔하면서 지내고 있었어. 그 수도원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콜롬바수스라는 젊은 수사가 어느 날 갑자기 간질발작을 일으켰어. 동료인 제롬 수사가 콜롬바수스를 간호해주었는데 콜롬바수스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았다면서 어떤 숲으로 콜롬바수스를 데리고 가서 샘물의 성수를 뿌렸어. 그랬더니 콜롬바수스의 간질이 사라졌다고 했어. 사람들인 이 일을 신성하게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조작이라는 의견도 있었단다. 또 꿈의 계시에서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모셔달라는 했대.

콜롬바수스의 간질을 낫게 한 꿈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모셔오라는 계시도 무시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을 주교님과 왕자님께 이야기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어. 그래서 사절단을 꾸려서 성녀 위니프리드의 묘지가 있는 웨일즈 귀더린 지방으로 떠났단다. 사절단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로버트 부수도원장이 단장을 맡았고, 웨일즈 출신인 캐드펠 수사도 통역으로 사절단에 포함되었단다.

귀더린에 도착한 사찰단은 귀더린의 휴 신부님을 비롯한 신부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신들이 온 이유를 설명했어. 신부님들은 계시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위니프리드 유골을 가져간다는 것을 안 좋게 생각했어. 그런데 귀더린의 주민들은 더욱 격렬히 반대를 했단다. 사절단은 주민들을 좋은 분위기에서 설득하려고 했지만, 주민들은 더욱 격렬히 반대를 했단다. 자신들의 동네에 안장되어 있는 성녀의 유골을 가져간다고 하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주민 중에 리샤르트라는 지주가 있었어.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그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돈으로 설득하려는 우를 범했단다. 리샤르트는 자신을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다면서 더욱 반대하게 되었어. 사절단도 한번에 합의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 다음 만남을 갖기로 약속을 했단다.

그런데 다음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 리샤르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리샤르트의 딸 쇼네트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지 않는다면서 회담 장소에 왔단다. 그러니까 리샤트르는 회담 장소로 떠났는데, 회담 장소에는 도착하지 않은 거야. 사람들은 마을 곳곳을 찾아 다녔고, 리샤르트는 숲 속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채 발견되었단다. 그런데 그 화살은 누구 것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어. 바로 리샤르트의 충실한 일꾼 엥겔라드의 것이었단다. 누가 봐도 엥겔라드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건 현장의 엥겔라드의 화살이 있었기 때문에 엥겔라드는 감금해서 조사를 받아야 했어.

리샤르트와 엥겔라드는 서로 신임하는 사이였는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어. 쇼네트와 엥겔라드가 서로 사랑하고 있었는데 리샤르트가 그걸 반대했던 거야. 쇼네트는 어렸을 때 부모님들에 의해서 이미 페레디르라는 이웃집 청년과 정혼을 맺었단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엥겔라드에게는 리샤르트 살해 동기가 한 가지는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지. 범인도 그걸 노리고 엥겔라드의 화살을 이용해서 리샤르트를 죽인 것은 아닐까. 엥겔라드는 여기서 잡히면 난처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도망을 갔고, 그것을 존 수사라는 사람이 도와주었단다. 존 수사는 사절단의 멤버로 온갖 잡일을 하겠다면서 자진해서 온 사람이었어. 그런데 그가 왜? 존 수사도 엥겔라드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그를 도와준 것 같았어. 존 수사는 엥겔라드의 탈출을 도와주었다는 벌로 쇼네트 집의 마구간에 감금되었단다. 사실 그게 존 수사가 바랬던 것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쇼네트의 하인과 사랑에 빠졌거든.

 

2.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이 사건을 두고 입을 가볍게 놀려서 논란이 되기도 했단다. 리샤르트가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벌 받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어. 리샤르트가 덕망 받는 지주라는 것을 모르고 한 이야기였지. 아무튼 이 사건은 캐드펠이 조사를 하기로 했어. 사절단 중에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회담 장소에 없는 사람이 콜룸바수스와 제롬 수사였어. 그들은 성녀 위니프리드가 안장되어 있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어. 하지만 둘이 서로 알리바이를 해줄 수 있으니 사절단 중에는 범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다음날 콜룸바수스가 찾아와 사건이 발생한 날 자신은 교회에서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다면서 사죄하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제 제롬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었어.

이런 안 좋은 일이 있고 보니 귀더린의 휴 신부님과 마을 사람들은 성녀 위니프리드의 유골을 가지고 가라고 허락했단다. 그래서 로버트 부수도원장은 유골을 이장하기 위한 의식을 진행했어. 3일간 24시간 동안 쉬지 않는 기도를 했는데, 사절단 여섯 명이 번갈아 가면서 했단다. 캐드펠은 콜롬바수스와 마지막 날 밤샘 기도하게 되었는데, 콜롬바수스는 또 시작하자마자 기절하듯 잠을 잤단다. 몸이 경직되어 죽었는지 확인할 정도였어. 또 다른 간질처럼 보이기도 했단다.

캐드펠은 시신을 살펴보다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 화살이 사인이 아니고 가늘고 긴 비수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화살은 리샤르트가 죽은 다음 누군가 손으로 비수 구성에 꽂은 것이었어. 오래지 않아 화살을 꽂은 사람이 밝혀졌어.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던 페레디르가 자백을 했단다. 리샤르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때 엥겔라드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거야. 자신의 정혼녀와 사랑하는 사이니까 말이야. 페레디르는 깊이 사죄를 하면서 용서를 빌었단다. 페레디르가 시신을 처음 본 사람이지만 범인에 대한 단서는 아는 것이 없었어. 이 일로 페레디르 어머니가 놀라서 발작을 일으켰단다. 캐드펠은 페레디르 어머니를 진정시키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약 성분 진정제를 주려고 했는데 이미 4분의 3이 사라지고 없었어. 누가? 이걸 가져갔지?

이것으로부터 범인은 점점 누구인지 점점 좁혀지게 되었단다. 샤르트르의 딸 쇼네트가 캐드펠을 도와서 범인을 찾는데 도움을 주었어. 범인은 다름 아닌 콜롬바수스였단다. 사건이 발생한 날 콜롬바수스가 잠들었다고 했지만, 잠든 것은 함께 있었던 제롬 수사였고, 제롬 수사를 잠들게 한 것은 콜롬바수스가 몰래 마약 성분 진정제를 먹였기 때문이야. 제롬 수사는 자신이 잠든 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기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거야. 콜롬바수스는 그렇다면 왜 리샤르트를 죽였는가. 콜롬바수스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것을 꾸민 것이야. 자신이 신의 계시를 계속해서 받아 기적을 만들어내는 사람처럼 꾸미려고 했던 거야. 그래서 수도원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던 거지. 그 일을 반대하는 리샤트르는 그에게 눈엣가시였던 거야. 그래서 리샤르트를 죽인 것이란다.

캐드펠과 쇼네트는 그런 리샤르트의 마음을 이용하여 자백하게 만들었어. 하지만 쇼네트가 흥분하여 정체가 드러나서 콜롬바수스가 쇼네트를 공격하고 엥겔라드가 콜롬바수스와 싸우다가 그만 콜롬바수스가 죽고 말았단다. 캐드펠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법대로라면 엥겔라드는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캐드펠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야. 콜롬바수스는 리샤르트를 살해한 죄를 지었고, 죽음으로 벌을 받게 된 것이란다. 캐드펠은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단다. 콜롬바수스의 교회 바닥에 겉옷만 남기고 시신은 위니프리드의 관에 넣고 봉합을 했단다. 위니프리드의 유골은 원래 묘지에 두고 바꿔 치기 한 거야.

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콜롬바수스의 신의 계시를 받고 하늘로 승천했다고 했어. 긴가 민가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정황상 믿을 수 밖에 없었단다. 그렇게 사건은 마무리되고, 사절단은 위니프리드의 유골이 들었을 것이라고 믿는 관을 들고 슈루즈베리 수도원으로 돌아왔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아빠가 마지막 부분은 스포일러라서 이야기를 안 하려다가 그러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아빠의 기억이 사라져서 이 소설의 결말을 알 수 없을 것 같아서 스포일러를 다 적었단다. 양해 바람. 캐드펠 수사 시리즈 앞으로 간간히 찾아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귀더린의 유골에 얽힌 대사건이 시작되려 하는 5월 초순의 어느 맑고 화창한 아침이었다.

책의 끝 문장: 게다가 그와 한 잠자리를 쓰시는 분은 자신의 화환에서 꽃잎 한두 장 떼어 넘겨주는 것도 싫다 할 만큼 인색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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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금연은 정말 힘들다. 마크 트웨인은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20년 전 경험에 의하건대 금연은 매정하게 결별하는 의지밖에 없다. 금연 뒤에 찾아올 기쁨을 기대하며 끊어야 한다. 이제는 아침마다 칵칵거리지 않게 되고 양치질할 때 나오는 조갯살만 한 가래도 없어질 것이다. 방에선 곰팡내가 사라질 것이고, 얼굴엔 살이 뽀송하게 오르며 피부도 맑아질 것이다.

 

(77-78)

그래서 1905년에 발표한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통행을 명시했다. 그런데 기찻길이 좌측통행으로 들어오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제가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아예 1921년 도로 규칙을 일본과 똑같이 좌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철거된 서울 시내 전차들도 좌측으로 달렸다. 그때는 기차, 자동차, 사람 모두 영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식 우측통행 자동차가 거리를 누비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찻길은 우측통행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차량 우측통행을 규칙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대로 좌측통행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1962년 제정된 도로교통법이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는 좌측보행이 원칙이라고 규정하면서 좌측보행이 굳어지게 되었다.

 

(82)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게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95)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자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176)

미족미술협의회(민미협)는 이 그림을 1989년도 달력에 실었다. 그런데 이를 이용하여 부채를 만든 인천 지역의 한 재야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에서 느닷없이 신학철 화백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신 화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어이없게도 이 그림이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석인즉, 그림 아래쪽에서는 남한 사람들이 힘겹게 노동을 하고 있고, 위쪽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푸짐한 밥그릇을 앞에 놓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초가집은 평양의 생가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찰의 대공적 상상력이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경이롭기만 했다. 미술비평엔 인상비평, 양식비평, 재단비평 등이 있는데 가히 공안비평이라 할 장르가 나타난 것이다.

 

(256)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 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더불어 숲이라 쓴 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337)

그런데 <실천문학> 남도 답사에서 황석영 형은 3시간 만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내가 8시간 마이크를 잡으면서 나도 구라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아마도 윤재걸 시인이 한 말 같은데 백기완 선생이 라디오 시대 이야기꾼, 황석영이 흑백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통했는데 유홍준이 컬러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 박수 치며 웃었다. 이후 방동규 선생은 끝까지 재야의 라디오로 남고 내가 백기와,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도올 김용옥의 등장 이후 나는 이어령, 김용옥과 함께 세칭 ‘3대 교육 방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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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지도는 넣어두렴.” 포피가 제안한다. “베니스는 미로 같은 곳이야. 방향을 절대 못 찾을 거야. 내가 늘 말하듯이, 길을 잃은 것 같거나 혼란스러우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돼. 마음이야말로 가장 믿음직스러운 길잡이란다.”

 

(180)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시는 나에게 동정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쥐고 흔드는 캐럴 숙모와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딱 매트가 말한 대로, 할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내 간절한 바람을 다 억누르고 할머니 뜻대로 가는 나를 생각한다. 루시의 말이 맞을까? 루시나 나나 우리가 누군가의 애정을, 그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언젠가 얻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해왔던 것일까?

 

(269-270)

그래.” 포피가 대답한다. 하지만 반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포피의 시선을 따라가니 리코가 연주하던 장소인 넵투누스 분수가 있다. 팔각형 분수대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든 넵투누스 조각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주위를 웃고 있는 사티로스들과 청동으로 된 강의 신들과 물에서 솟구친 대리석 해마들이 둘러싸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은 도시로 돌아온 기분이 얼마나 묘할까. 이곳은 16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고, 포피가 리코와 손을 잡고 광장을 거닐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시의 모든 조각상과 모든 분수가 포피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기시킬 것이다.

 

(294)

나는 카프레스 샌드위치-껍질이 바싹한 빵에 신선한 모차렐라, 즙이 많은 토마토, 바질을 올린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은 후에 조심스럽게 포피에게 낮잠을 권한다. 포피는 낮잠이라는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듯 불끈한다. “공원에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왜 침대에 누워 있겠니?” 포피의 목소리는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쉬어 있다. “자연이 최고의 치료제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445)

네 엄마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단다.”

나는 얼어붙는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겨우 두 살이었다. 그 두 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엄마는 아팠다. 나는 평생 궁금했다. 나 때문에 엄마가 병에 걸렸을까? 엄마가 나를 원망했을까? 나는 엄마한테 성가신 존재였을까?

어떻게-?” 목이 꽉 조여 오지만 기어코 말을 잇는다. “어떻게 확실히 아세요?”

너는 천사였단다. 네 엄마는 너를 그렇게 불렀어.”

눈물이 관자놀이로 흘러내린다. 평생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저를 몰랐어요. 어떻게 자랐는지를. 그때 저는 그냥 갓난아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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