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한편 나는, 특이나 당시의 나는 구식이든지 신식이든지의 형식을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도 비관적인 인식을 품고 있었다. 작품으로는 모든 장면과 대사에서 열렬한 사랑을 웅변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사랑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이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돈을 훔친 자도 사랑 때문, 사람을 납치하여 죽인 자도 사랑 때문, 사기 치고 배신하고 강제로 간음하고 교묘히 미치게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이 모두 사랑을 근거로 할 수 있는데, 한때는 인륜을 저버리게 할 만큼 막강하였던 동기가 별안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조화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102)

옛말에 초상난 절에 중은 많다고 하였던가.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후일 이 망국의 수도에 이렇게도 많은 예술가가 날 줄을 미리 내다보았을까. 수도라고 해도 기껏해야 인구 20만 안팎에다 토지 대부분이 날것으로 남아 있는 열악하고 초라한 도시. 그러한 경성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예술가연하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몇몇은 필연 거짓되이 예술가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란 의심을 해봄 직했다. 때로 내게는 경성 전체가, 나아가 조선 전체가 거짓의 전당처럼 느껴졌다. 가엾게도 스스로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젊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예술가가 아닌 자신을 예술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릿광대의 노릇.

 

(215)

탈이란 즉 가면, 마스크, 얼굴 위에 얼굴. 그것의 사용은 본디부터 극의 모태가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중세까지는 배우들이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지 않는가. 가면이 역할의 은유가 아니라 역할 그 자체였던 시대를 지나, 인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배우들은 가면을 벗었을 것이다. 그때에는 그것이 극의 혁명이었을 것이다. 구극이 기껏 벗어던진 가면을 신극이 다시 한번 집어 들게 된 것은 그것을 언제든 벗을 수 있게 되어서다. 과거에는 가면을 벗는 것이 금기였으나 오늘날 가면을 쓰는 것은 금기가 아니며, 한때의 금기마저 연출의 한 소도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신극. 또한, 이러한 예술적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나 정도밖에는 없지 않나 하는 자부에 나는 심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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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치, 파란만장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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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몇 년 전에 장다혜 님의 <탄금>이라는 조선 시대 사랑과 음모를 속도감 있게 그린 소설을 본 적이 있단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봤는데 책 디자인이 <탄금> 스타일과 비슷해서 지은이를 봤더니 장다혜 님이더구나. <탄금>이 아빠의 취향에 완벽하게 맞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 작품은 어떤가 싶어 읽은 것은 바로 <이날치, 파란만장>이라는 소설이란다.

이날치라고 하면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검색해 봤더니, 몇 년 전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동영상 속의 삽입되어 엄청 유명해진 <범 내려온다>를 부른 국악퓨전밴드 이름이 이날치였더구나. 이 소설이 그 밴드와 무슨 연관성이 있으려나? 알고 봤더니 이날치는 19세기 조선에 실존했던 인물이고 소리꾼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국악퓨전그룹 이날치가 그룹명을 지은 이유가 그런 거였구나. 이번 장다혜 님의 소설 <이날치, 파란만장>은 조선 시대 소리꾼 이날치에 관한 소설이란다. 지은이의 말을 보니, 이날치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서 많은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다고 하더구나. 이날치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럼 이야기해줄게.

 

1.

계동이라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계동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는데 역병에 걸려서 함께 강제로 격리되었단다. 계동은 역병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계동의 아버지는 함께 격리되어 있다가는 아들 계동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망가게 했단다. 그러면서 지금의 이름을 버리고 이경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라고 했고,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잘 했기 때문에 소리꾼이 되라고 했어. 당대 유명했던 소리꾼이었던 송방울처럼 말이야. 그렇게 어린 계동은 아버지와 헤어지고, 이경숙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한양으로 길을 떠났단다. 어린 아이 혼자 한양 가는 길이 쉽지 않았겠지. 이제부터 경숙이라고 부를게. 경숙은 가는 길에 화정패라고 하는 남사당패에 들어가게 되었고, 묵호라는 사람이 경숙을 보살펴주면서 줄타기를 가르쳤단다. 그런데 경숙이 줄타기에 재능이 있었던 거야

남사당패에 들어온 지 4년만에 경숙은 최고의 줄꾼이 되었고 잘생긴 외모에 인가도 많았단다. 줄꾼으로 뛰어나고 날래다고 해서 날치라는 별명이 생겼고, 그때부터 경숙은 이날치로 불렸어. 이제부터는 이날치라고 부를게. 유명한 줄꾼이 되었지만, 이날치는 여전히 소리꾼이 되고 싶었어. 무작정 송방울의 집을 찾아갔지만, 청지기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단다.

이날치가 속해 있는 화정패는 한양에 머무르면서 공연을 했단다. 이날치가 머물고 있는 곳에 백연이라는 장님도 있었단다. 어떤 사연이 있어 장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백연은 홀로 지냈고, 곡비 일을 했단다. 곡비라는 것은 아빠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돈을 받고 다른 상갓집에서 가서 대신 곡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또 한 명의 주요 인물 중에 채상록이라는 사람이 있단다. 채상록도 어찌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란다. 왕의 딸인 자헌 공주가 채상록을 좋아했단다. 하지만 채상록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어. 화양이라는 여인이었지.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자헌 공주가 화양이라는 여인을 다른 왕자와 결혼시키게 했어. 그리고 청나라에 갔다가 그만 풍토병에 죽고 말았단다. 실제 풍토병으로 죽었는지 자헌 공주가 모략을 꾸몄는지는 모를 일이지. 채상록은 거의 왕의 명령에 의해 자헌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어. 하지만 자헌 공주는 결혼하지 1년 만에 낙마 사고로 죽고 말았단다. 채상록은 젊은 나이에 홀아비가 된 거야. 보통 사람이라면 재혼을 할 수도 있었지만, 공주의 남편이자 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재가도 어렵고 홀로 지내면서 왕의 행사에 참가를 해야 했단다. 왕의 눈치도 엄청 보면서 말이야.

어느날 채상록은 상갓집에 문상을 갔다가 곡을 하는 백연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화영과 비슷하여 깜짝 놀랐단다. 백연을 보기 위해 상갓집마다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자신의 처지 때문에 백연과 연을 맺을 수 없었단다. 신분 차이로 강압적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감시의 눈들이 많고 양심에 걸리기도 했지.

..

 

2.

그런데 이날치와 백연이 풋풋한 인연을 만들어가지 시작했어. 화정패의 우두머리 꼭두쇠의 딸 비금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예전부터 이날치를 짝사랑을 했었는데, 이날치와 백연이 풋풋한 인연을 만들어가자 질투를 하기 시작했고, 채상록도 마찬가지였단다. 채상록이 백연을 강제로 데리고 가려는 것을 알게 된 이날치는 백연과 함께 도망을 가서 숯골이라는 골짜기에 숨어 지냈단다. 채상록은 결국 그들의 거처를 알게 되었고, 이날치가 없을 때 백연을 속여서 데리고 와서 자신의 집에 가두었단다.

구용천이라는 소리꾼을 소개해야겠구나. 예전부터 국창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 원래는 동생이 훨씬 소리를 잘했는데, 동생이 그만 죽고 말았지. (이것도 구용천의 짓이라는 소문이 있었어.) 구용천은 아이들의 피를 마시면 소리가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법으로 아이들을 납치해서 피를 마시곤 했단다. 그런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말이야.

그런데 그 일을 맡아서 했던 이가 충격적이게도 이날치를 어렸을 때부터 보살펴 주었던 묵호였단다. 이날치가 한양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가 간신히 도망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것도 바로 묵호와 구용천의 짓이었던 거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날치는 심한 배신감이 들었고, 묵호와 몸싸움까지 하게 되었는데, 묵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싸움 도중에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죽고 말았단다. 이럴 것까지 없는데이날치도 그래도 묵호가 보살펴주었던 고마운 정도 있었기에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묵호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묵호는 죽고 말았단다.

화정패의 또 다른 안 좋은 일.. 화정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도박에 빠져 자신의 전재산을 날리고 이날치를 판돈으로 걸어 지고 말았단다. 이제 이날치를 꼼짝없이 다른 사람에 넘겨야 했는데, 이날치를 다른 이에게 넘길 바에야 재능을 없애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날치의 발 힘줄을 끊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단다. 갈수록 첩첩 산중. 그 와중에 화정패가 묶고 있던 곳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 버리고 목숨만 간신히 살렸단다.

목숨만 간신히 건진 이날치는 송방울이 거처하고 있다는 금강산으로 무작정 찾아갔단다. 결국 송방울 만나 그로부터 소리를 배우고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들었어. 나중에 송방울의 집을 찾아가보니 송방울의 부인이 말씀하시길 송방울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렇다면 이날치를 가르쳤던 이는 누구? 송방울의 혼령이었던가.

이날치는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단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소리꾼으로 활동을 하였고, <아무개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공연했어.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누구나 그것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구용천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그렇게 구용천을 고발하는 공연이었지.

한편 채상록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 가는 길에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백연은 궁궐로 끌려가 의녀가 되었단다. 나라에서는 매년 자헌공주의 기일에 제물을 받치는 의식을 벌였는데 매년 동물들로 하다가 이번에는 사람을 제물로 쓰려고 했어. 그 대상은 백연이었고 말이야. 한양으로 돌아온 이날치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갔지만 한 발 늦어 백연은 이미 죽고 말았단다. 이날치는 백연의 생전 소원대로 묘지에 잘 고이 잘 묻어주었단다. 이후 이날치는 소리꾼으로 크게 성공하고, 궁궐로부터 입궐 명을 받게 되었단다. 그렇게 이날치는 국창이 되었어.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궁 안에는 백연을 죽인 이들이 있었을 텐데, 이날치가 마음 편히 국창으로 소리를 했을까. 지금까지의 이날치 캐릭터를 봤을 때 복수의 목적이 아니라면 국창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소설은 여기가 끝이 났으니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고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역병이었다.

책의 끝 문장: 바야흐로 피곤한 국창의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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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144)

말이란 원래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불완전하게 습득한 수단이다.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소리를 조합하고 추상적인 소리를 짜 맞추는 방법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마음에 담긴 미묘한 감정을 목구멍에서 거칠게 흘러나온 신호로 타락시키는, 둔감하고 부적절하고 꼴사나운 수단이기도 했다.

 

(153)

인류 대다수는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고, 이로 인해 인류는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혜택을 얻죠. 선천적으로 정신과학과 깊숙한 연관이 있어서 인간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불러오는 이익은 아주 오래가지만, 더 추상적이고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더 나이가 이런 방향성, 정신이 최고로 발달한 사람이 지도하는 방식은 자비로운 독재자를 낳아 종국적으로 특권층을 만들어 내는 쪽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많은 사람의 반발을 사기 때문에 인류 대부분을 짐승 수준으로 떨어뜨려야 안정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발전은 우리와 안 맞으니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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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가을호 - 통권 1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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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녹색평론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든단다. 모르고 있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으로 읽지 말까 생각을 하다가도, 한줄기 빛이 되고 있는 녹색평론을 외면할 수 없겠다 생각하여 매번 읽고 있단다. 이번 2024년 가을호에도 아빠를 불편하고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진실들을 많이 다루고 있단다. 이전 녹색평론에서도 자주 다루었던 내용들이라서 새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런 문제점들이 바뀌지 않는 것은 심각성을 더하게 하는구나. 점점 심해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쇠퇴가 걱정되고, 점점 심해지는 친일정권의 행태가 걱정되고, 점점 심해지는 인구 소멸 시대에 피폐해지는 농촌이 걱정되고, 무엇보다 점점 심해지는 기후변화의 피해가 걱정되는구나.

민주주의 위기 탈출을 위해 시민 의회와 추첨제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시민 의회와 추첨제 민주주의는 녹색평론에서 10여 년 전부터 이야기를 하던 것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했던 것이란다. 문재인 정부 때 시민 의회의 맛보기와 같은 공론화위원회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현 정부는 친일과 가족일에만 관심 있고 그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보니 민주주의는 다시 후퇴하고 있단다. 만약 오늘날 시민 회의나 추첨제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다면 일본 핵오염수 유출이나 기후 위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을까 싶구나. 그런 것을 보면 현재 문제가 많은 가짜 민주주의인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 또한 바꾸기 어려운 정치 시스템 속에서 바꿔야 하니 쉽지 않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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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면, 즉 민중이 정치적 의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면 기후변화 문제 같은 것은 이미 오래전에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의존하는 미래를 선택할 것인지, 재생될 수 있는 에너지에 기반한 미래를 선택할지 보통의 시민들이 결정할 수 있었다면 오늘 우리는 매우 다른 궤도 위에 있을 것이다. 금융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서, 선출된 정치가들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삶, 3세계, 농촌을 사지에 몰아넣을 결정을 할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면, 우리는 지구의 안녕과 문명의 존속을 위해서 지금 각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고 있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이 폴리스의 안명이 자신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민중들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 소외된 채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뒤죽박죽이 된 현 상황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런 비정치적(무비판적) 태도가 현상 체제를 강화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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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가 시작된 지 1년이 되었구나. 얼마 전 뉴스에서는 해산물에서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 이하라면서 대서특필을 하더구나. 고작 1년이 지났는데, 자랑하듯이 이야기하더구나. 핵오염수가 해류를 통해 바다 생물들에게 영향을 받으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어, 그리고 1년만 버리고 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방류될 텐데, 진정 걱정이 안 된단 말인가.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 투기를 반대하고 우리나라 국민을 보호하자고 문제 제기를 하면 괴담이라고 큰소리치면서 공격하고. 아주 작은 확률의 위험성이 있다고 해서 귀담아 들어보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 계속 연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늦었지만 정부의 진정한 태도가 아닐까 싶구나.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지 알 수가 없구나. 왜 그렇게 일본에 고개를 숙이는지 이해가 안 되더구나. 무슨 큰 약점이 잡혀 있는 것인지

녹색평론에서 예전부터 이야기한 것처럼 방사능 수치에는 기준치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어. 사람마다 받는 영향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기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 어떤 나라가 방사능 수치가 높게 나오면 그 기준치를 올려버리면 되는 거야. 참 편한 방법이구나. 핵오염수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삼중수소도 마찬가지야. 나라마다 삼중수소 음용수 기준은 제각각이라고 하는구나. 우리나라 삼중수소 음용수 기준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무척 낮다고 하는데, 아마 저 수치보다 높은 삼중수소가 발견되면 다른 나라의 기준을 따른다면서 기준을 올리지 않을까 싶구나. 아무런 의미 없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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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오염수 안전처리 기준치가 나라마다 다르고 일본의 삼중수소 배출 기준은 해양생태계에 안전한 기준치가 될 수 없다. 후쿠시마 오염수의 실제 삼중수소 농도는 74Bq/L인데 일본의 원전 기준 삼중수소 농도가 6Bq/L이기에 이를 희석해 1,500Bq/L로 줄여 음용수 기준에 맞게 방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용수 기준은 미국이 740Bq/L, 유럽이 100Bq/L, 미 캘리포니아주는 15Bq/L이며 우리나라 환경부의 고시 기준은 놀랍게도 6Bq/L이다. 방사선 기준치는 행정 편의의 산물이다. 정상 운영 중인 원전인 월성원전의 실제 삼중수소 배출치가 13.2Bq/L라는데 그렇게 해도 핵종의 배출 총량은 변함없이 바다에 축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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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수소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 해볼게. 아빠도 이번 녹색평론을 통해서 삼중수소의 위험성을 자세히 알게 되었거든. 일반 수소는 수소원자가 2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중 수소는 수소원자가 3개로 이루어져 있는 물질로 방사성 물질로 분류되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해야 한단다. 아무데다 막 버려서는 안 되는 물질이야. 삼중수소는 생식세포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핵오염수를 통해 삼중수소가 계속 바닷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바다 생물에 영향을 주고, 바다 생물에 누적된 삼중수소는 상위포식자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인간에게도 영향을 주게 될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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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

미국의 핵융합 전문가인 아르준 마키자니 박사는 삼중수소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삼중수소는 높은 방사성물질이기에 인체와 다른 생명체에 위험을 끼친다. 자궁에 형성되는 시간과 성숙되는 시간 동안 난자에 영향을 줌으로써 삼중수소는 임신 중에 미래세대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정자와 정자세포에 포함해 있기 때문이다. 삼중수소는 임신 초기 유산이나 기형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영향 중 일부는 저선량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특히 중추신경계 형성에 대한 일부 유형의 손상이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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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일본 핵오염수가 인류에 영향을 받기 전에 먼저 인류가 멸종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근 기후 변화에 따른 피해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니 이 또한 걱정거리로구나.

 

2.

진작부터 탈성장을 했어야 했단다. 제한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제한된 자원으로 언제까지 성장을 할 수 있겠니. 결국에는 기후변화의 위기에 봉착을 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성장을 꿈꾸고 있으니,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에 읽은 <찬란한 멸종>에서 이야기하듯이 이젠 멸종의 길을 손잡고 갈 수밖에 없는가. 탈성장의 대안으로 농촌을 살려야 한다고 녹색평론에서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힘을 안 쓰고 있구나. 남일 보듯 하고 있어.

아빠가 생각하기에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선적으로 농촌 기본소득을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 터를 잡게 하는 거지.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자체와 단체에서 농촌 기본소득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색이나 낸다고 찔끔 주는 것이 아니고 좀더 큰 금액을 주어서 살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그 예산을 어디서 가지고 오냐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농업예산이 전체 예산의 2.8%밖에 안 된다고 하는구나. 농촌과 농업을 살리려는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니? 농촌과 농업을 살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이 예산을 좀 늘려야 하지 않냐 말이야. EU의 농업예산은 전체 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하더구나이게 진정한 미래를 위한 예산 분배가 아닌가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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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유럽은 농부의 나라로 불린다. 농업의 경제적 가치와 상관없이 농업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의미다. 유럽연합(EU)에 속한 27개국은 공동농업정책(CAP)이라 불리는 농업정책을 공유하는데, 이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다양한 규제와 농업정책을 공유하는데, 이 정책에 따라 농민들은 다양한 규제와 지원을 받는다. CAP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부터 시행됐다. 그래서 과거에는 식량자급률 제고를 위해 시장가격을 지지하고 농민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직불금 제도 등에 집중했다. 현재는 농촌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직불금 제도 등에 집중했다. 현재는 농촌의 환경적 기능과 기후위기 대응에서 농촌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예산을 늘리고 있다. 2022년 기준, EU 전체 GDP(국내총생산)에서 농업의 경제적 가치는 1.4%에 불과하지만 직불금 등 농업예산은 EU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달한다. 2024년 전체 예산 가운데 2.8%가 농업예산인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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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래에는 다시 농업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고 하더구나. 그런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기후 변화로 인해 올 여름 정말 더웠잖니. 그렇다 보니 농작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배추, 시금치 등 농작물의 가격이 엄청 올랐단다. 하지만 정부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구나. 뭐 하기야 현 정부에 무엇인가 기대를 하는 것이 잘못이지.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생각하니 북한의 오물 쓰레기가 생각나는구나. 마침 북한의 오물 쓰레기 관련된 내용도 이번 녹색평론에도 실려 있단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최근에 툭하면 문자로 북한에서 날라오는 오물 쓰레기를 조심하라는 안내를 받는단다. 그것도 정부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 북한에서 오물 쓰레기를 보내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먼저 북한으로 엄청난 양의 대북전단 풍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로 인해 휴전선 인근의 많은 사람들의 피해를 보고 있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당국에서는 그들의 행위를 눈감고 있단다. 북한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대북전단 풍선을 보내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오물쓰레기를 보내지 않겠다고 했으니 속는 셈 치고 그들의 말을 믿어 보고, 먼저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대북전단 풍선을 보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봤으면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북전단 풍선을 보내지 않는데도 북한에서 계속 오물 쓰레기를 보낸다면 그때 군사적 조치를 취하든 말든 생각해 보고 말이야. 이렇게 일차적으로 더 쉬운 방법이 있는데, 뭣 때문에 안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더 웃긴 것은 북으로 보내는 대북전단 풍선이 바람의 방향이 맞지 않아 북으로 가는 것은 10퍼센트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 우리나라 영토에 떨어져 쓰레기가 된다고 하는구나. 이런 짓을 왜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하는 돈은 어디서 났으며,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는 이런 짓을 왜 막지 못하는지 답답하구나. 총체적인 난국이구나.

녹색평론은 이번 호에도 서평을 통해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해 주었단다. 너희들을 교육 경쟁에서 풀어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아빠에게 눈에 띄는 서평이 하나 있었단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는 책의 서평인데, 이 책은 기회되면 한번 읽어보고 싶더구나.

..

오늘 독서편지를 쓰면서 아빠의 분노게이지가 좀 올라간 것 같구나. 심호흡을 하면서 다시 평온을 되찾아야겠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지금 우리가 비교적 평온한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인지적 한계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책의 끝 문장: 그것이 래디컬한 민주주의자의 숙명 아닌가?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광범위한 불신, 기성체제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 극단적 구호를 외치는 선동가 정치인들을 키우고 있다. 올여름 유럽에서 치러진 선거들에서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지만, 극우 정치세력들이 전 세계에서 확실하게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 현상은 더 이상 특성 지역에서 일어나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신흥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대체로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인 경제적 사회적 곤경을 엉뚱하게도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킨다. 이들은 정치적 자원을 독식하면서 민심을 잃은 엘리트 지배층과 거리를 두는 척하면서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기자신들과 과두 금권정치의 배후세력 ‘1%’의 권력을 키우고 호주머니를 부풀리는 데 몰두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한다. - P3

카터(미국 전 대통령)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의 무서운 성장은 현명한 투자에 의해 촉진되고 평화에 의해 활성화했다. 1979년 이후 중국은 단 한 번도 전쟁하지 않았다. 미국은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은 242년 역사에서 오직 16년 동안만 평화를 즐기며 ‘세계 역사상 가장 호전적 국가’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에 미국의 원칙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경향 때문이다." - P43

하비는 폴라니를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자유라는 아이디어가 ‘고작 자유기업을 옹호하는 것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것은 ‘소득, 여가, 사회보장이 개선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지만, ‘자신들이 가진 민주적 권리들을 활용해서 자산가들의 권력으로부터 대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헛된 노력을 되풀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자유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권력과 강요가 없는 사회가 없고, 권력이 아무 기능을 하지 않는 세상도 있을 수 없다’면, 자유주의 유토피아라는 비전도 물리력, 폭력, 권위주의에 기대지 않고서는 지탱될 수 없다. ㅍ폴라니는 자유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주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나 혹은 아예 노골적인 파시즘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좋은 자유들은 실종되고 나쁜 자유들이 군림하게 된다." - P63

늙어감은 두려운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늙어가는 신체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름을 줄이고, 체취와 하얗게 세는 머리는 가능한 한 감춰야 한다. 늙어감을 역행하며 시간을 멈추는 억지 행위를 자기권리, 자기계발이라고 믿는다. 시간의 흐름이 잠시나마 멈춰 선 외모를 만드는 건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다. 반면에 사회적인 삶이 정리된 때쯤 외모 관리를 멈춘다. 이렇게 외모의 관리란 사회적인 활동을 지속하는지 알리는 신호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정상성에 갇힌 노인세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경제성정을 이루고 경제위기를 극복했던 노인들의 삶의 태도지만, 동시에 늙어감을 경계하는 처지가 묻어난다. 노인들의 엄격한 이분법은 늙어감을 받아들이는 일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받아들이기보단 자기자신을 스스로 사회의 잉여 처지에 놓았다. - P153

사람들은 입만 열면 배고파 죽겠다, 돈 없어 죽겠다, 그리워 죽겠다 하고 아우성이지만 과연 죽을 만큼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돈이나 밥, 사랑 등은 없으면 괴롭기야 하지만 그로 인해 바로 죽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소중한 이유는 내게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에게 생명만큼 소중한 것이 있는가? 아니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다. 그런데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그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괴롭고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오히려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심정이 아마 그러할 것이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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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의 시대 -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토비아스 휘터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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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양자역학에 관심이 많은 아빠에게 눈이 똥그래지게 하는 책이 한 권이 나타났단다. 제목부터가 <불확실성의 시대>. 양자역학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 불확실성이 책 제목에 들어가 있으니 양자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이 양자역학을 다룬 책이란 것을 알 것 같구나. 이 책의 부제가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라고 되어 있구나.

물리학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발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1900년대 초기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물리학을 뒤집어 엎을 일들이 계속 출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거야. 1900년대 시작과 함께 기존의 물리학을 깨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이 연이어 출현하면서 물리학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하지만 세계는 어지러웠어.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고, 물리학자들도 양쪽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지. 그래서 이 책의 부제에 찬란어둠이 같이 들어가 있는 것 같구나.

이 책의 지은이는 뮌헨과 버클리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한 토비아스 휘터라는 사람인데 프리랜서 기자와 작가로 일하고 있다는구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 한 권인 것 같구나. 이 책은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현대물리학을 연대기 식으로 다루다 보니 아빠가 몇 년 전에 읽은 짐 배것의 <퀀텀 스토리>가 떠오르더구나. 아빠의 기억력으로 그 책의 내용의 기억이 많이 나질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몇몇 있었단다. 그럼 <불확실성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게.

 

1.

먼저 문을 여는 사람은 1900년 막스 플랑크의 이야기란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시에는 물리학은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다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발전할 것이 없다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대. 하지만 막스 플랑크는 물리학을 전공하였단다. 이전 물리학들이 계속 실패한 흑체복사에 관한 연구를 했어. 흑체복사란 반사가 전혀 안 되는 흑체에서도 온도에 따라 빛이 나오는 현상인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나 봐.

플랑크는 독일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고 1900 10 19일 드디어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실패했던 흑체복사이론을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발표하면서 상수를 하나 소개했는데, 그것이 과학계의 상수에서 가장 작은 상수인 플랑크 상수라는 것이었어. 플랑크 상수는  0.00000000000000000000000000655 란다. 소수점 밑으로도 0 26개나 있었어. 이 이론에 따르면 흑체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불연속을 가진 에너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을 깨는 거였어. 에너지는 연속적이라고 생각들을 했거든. 이렇게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 현대물리학의 시작이자 양자역학의 시작이 된 것이란다.

1903년 파리에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가 연구를 하고 있었단다. 마리 퀴리의 언니가 파리에서 의학 전공으로 유학하고 있어서 덩달아 파리로 왔던 거래. 혼자 공부하던 마리는 피에르 퀴리를 만나 함께 연구를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단다. 둘은 새로운 원소 방사성 원소를 두 개 발견하였단다. 하나는 마리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딴 폴로늄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유명한 라듐이었단다. 당시 방사성 원소가 그렇게 유해한 물질인줄 몰랐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내는 라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로 인해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더구나. 안타까운 역사지.

1905년는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지. 스위스 베른에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은 5개의 굵직한 논문을 한 해에 모두 발표했단다. 그 중에는 그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도 발표했어. 특수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아빠가 몇 번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

1911. 덴마크의 닐스 보어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해란다. 영국 켐브리지 대학교에서 JJ톰슨에게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지만, 영어가 서툰 닐스 보어를 냉대했고, 닐스 보어는 켐브리지를 떠나 맨체스터 대학으로 옮겼다고 하는구나. 맨체스터 대학에서 러더퍼드 교수 밑에서 공부를 했대.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너희들이 앞으로 공부하면서 교과서에서 자주 보게 되는 사람들일 거야.

1914년 닐스 보어가 뮌헨에서 원자와 전자 궤도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어. 이 이론에는 전자가 도약한다는 내용을 포함되어 있는데 왜 언제 어떻게 전자가 도약하는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어. 하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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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보어는 원자물리학을 창시했다. 그의 모형은 오랫동안 열려 있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새로운 질문도 만들어냈다. 전자는 도약할지 말지를, 그리고 어떤 궤도로 도약할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양자 세계에서 다시 어떤 일들이 즉흥적으로 벌어지는 것 같고, 인과 원칙이 다시 힘을 잃는 것 같다. “인과성 문제는 나도 많이 괴롭습니다.” 몇 년 뒤에 아인슈타인은, 원인 없는 양자 도약의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을 때, 막스 보른(Max Born)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것은 아인슈타인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 물리학자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속으로 알면서도, 감탄을 아끼지 않으며 보어의 원자 모형을 열심히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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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18년까지 세계1차대전이 일어나서 과학자들도 전쟁에 자유롭지 못해서 참여하게 되었다는구나. 세계1차대전을 이야기하자만 무서운 전염병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전쟁터에서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들이 죽었고, 전쟁이 끝나고도 이 전염병은 전 세계로 퍼져 500여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막스 베버와 에곤 쉴레 등 유명인들도 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구나.

1919 5 29일은 전세계적으로 개기일식이 있었단다. 일반 사람들은 태양이 사라지는 신기한 현상을 구경한다고 정신이 없을 때, 영국의 에딩턴이라는 사람은 몇 년 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빛이 중력에 의해 휘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단다.

 

2.

1924년 프랑스의 왕자 드 브로이는 빛과 전자 모두 파동이며 입자일 수 있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단다. 그 이전까지는 파동과 입자는 별개로 빛도 누군가는 파동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입자라고 했었거든. 그런데 드 브로이가 파동이면서 입자일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인데 이것은 정말 혁신적인 생각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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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1923년 말에 드브로이는 길고 외로운 숙고 끝에단순하고 대담한 아이디어에 이르렀다. 그는 광전 효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거꾸로 뒤집어보았다. 빛이 입자의 흐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입자 역시 어떤 면에서 파동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대단히 새롭게 과감하게 근거가 빈약한 결론이었다. 지금까지 입자는 파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응집된 알갱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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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 모든 물질에 이런 이중성이 있습니다! 빛만이 이런 분열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주 창조의 기본 재료인 모든 원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도 있는 이 논문이, 전자든 양성자든 모든 입자에는 파동이 있고, 이 파동이 공간을 이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주장을 반박할 것임을 나는 압니다. 그리고 이 주장이 오로지 나의 고독한 숙고에서 나온 것임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이 기이한 주장임을 나는 인정합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틀렸을 때 내게 닥칠 형벌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가장 깊은 확신으로 말합니다. 모든 사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고,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확정적인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노리는 아이의 손에 들린 돌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릴 수도 있습니다.”

드브로이가 강연을 마쳤고, 교수들은 당황하여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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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브로이의 발표 이후에 많은 이들이 당황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고,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 섬으로 요양을 갔다가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는 것을 성공했단다. 이 이후의 이야기들은 아빠가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짧게 요약해서 이야기할게. 하이젠베르크가 그 어려운 행렬역학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해서 동료 과학자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어려운 행렬역학을 공부해야만 했대. 그런데 1925년 슈뢰딩거가 비교적 쉬운 파동방정식으로 양자역학을 설명하였단다. 과학자들은 어려운 행렬역학보다 쉬운 파동방정식의 설명을 더 좋아했단다. 슈뢰딩거는 이 공식으로 여기저기 강연을 했었나 보구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한 양자역학은 전자의 입자에 대한 설명이 어려워 이를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 등이 반론을 냈지만, 얼마 후 슈뢰딩거는 하이젠베크르의 행렬역학을 일부 조정하면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과 동일함을 밝혀냈단다. 슈뢰딩거가 잘 나가다 보니, 하이젠베르크가 시샘을 했을 것 같기도 하구나. 어찌했든 양자역학을 처음 설명한 사람은 자신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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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247)

하이젠베르크가 헝클어진 부스스한 금발과 소년 같은 앳된 얼굴,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뒤늦게 강당에 들어섰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지만, 벌써 양자역학의 선두 그룹에 있다. 그는 이론을 창시했다. 그는 이 이론을 간단히 그 양자역학이라 불렀고, 슈뢰딩거보다 몇 달 먼저 개발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지금 강연을 해야 할 사람은 슈뢰딩거가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여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노르웨이 여행을 중단하고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서둘러 왔다. 그는 꽃가루 알레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트레깅을 위해, “스팀롤러(증기로 가는 삼륜자동차)를 타기 위해”, 그의 말을 빌리면, 다른 양자물리학자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북유럽에 갔었다. 그는 몇 주 전에 미에사 호숫가에서 야영하며 백야 속에서 양자역학을 곰곰이 생각했고, 양자역학을 이용해 헬륨원자의 기이한 긴 스펙트럼을 계산했고, 구드브란스달렌 골짜기에서 송네피오르까지 걸었고, 자신감을 가득 안고 뮌헨에 왔다. 스칸디나비아의 긴 햇살에 하이젠베르크의 얼굴이 갈색으로 그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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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폴 디랙이라는 사람이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합쳐서 설명하는데 성공했단다. 그리고 디랙 방정식으로 전자 스핀을 설명하였고, 반물질이라는 존재를 발견했어. 반물질도 여러 번 이야기해서 패스할게. 1926년에 슈뢰딩거는 독일에서 강연도 하고 보어의 초대로 코펜하겐에도 오는 등 바쁘게 지냈나 보구나. 슈뢰딩거가 보어와 토론을 하면서 남긴 말이 하나 있는데, 과학을 잘 비유해서 이야기한 것 같아 소개해 본다. “과학은 놀이입니다. 현실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노는 위험한 놀이입니다.”

1927년 코펜하겐에서 하이델베르크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단다. 이 이론을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는 못했지만, 대충 이해한 바로는 현재의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이란다. 그로 인해 미래의 위치와 속도도 알 수 없다는 것이야. 이것은 지금까지 물리학의 상식을 또 한번 깨는 이론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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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논문으로,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가 물리학의 토대라고 여겼던 인과성을 흔들었다. “’현재를 정확히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는 인과법칙의 명확한 진술에서 틀린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현재를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전자의 미래 위치와 속도의 가능성 확률만을 계산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통해 인과법칙의 무효성이 명확히 입증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한 시공간 혁명에서 감히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었다. 한때 뉴턴이 상상했던 시계태엽 우주는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이마누엘 칸트의 문장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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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론은 닐스 보어 조차 반대했었어그러다가 닐스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발표하면서 화해를 했다는구나. 하이젠베르크르의 불확정성 원리와 보어의 상보성 이론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완성되었단다. 이 코펜하겐 해석은 얼마 후에 브뤼셀에서 열린 그 유명한 5차 솔베이 회의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단다. 전자 나아가 모든 입자들의 위치가 불확실하고 확률로 존재하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닐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공방전이 이어진 5차 솔베이 회의에 대해서는 아빠가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으니 이것도 오늘은 생략할게.

….

 

3.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의 나치의 힘이 세지고 나치가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자 과학자들도 영향을 받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초대로 1 5개월간 머물렀는데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어 독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벨기에와 영국에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전하게 되었단다. 아인슈타인뿐만 아니고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했단다. 막스 플랑크는 이런 과학자들의 대탈출을 보고 안타까워 하면 히틀러를 만나서 설득하려고 했었다는구나. 하지만 히틀러의 답변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답변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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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381)

막스 플랑크는 이런 대탈출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독일 과학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히틀러를 만나려 애썼다. 1933 5 16 11시에 기회가 왔다. 플랑크는 유대인에도 인류에 소중한 사람쓸모없는 사람등 여러 종류가 있으니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는 부모가 유대인이지만 암모니아 추출 과정을 개발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독가스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게 하여 독일에 기여했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런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은 유대인이오. 모든 유대인은 엉겅퀴처럼 서로 들러 붙어 있소,.” “그러나 가치 있는 유대인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완전히 자해 행위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일에서 이룩한 그들의 과학 업적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외국을 유익하게 할거라고, 플랑크가 반박하고 설득했다. 히틀러는 악명 높은 특유의 흥분 상태에 빠져 무릎을 거세게 때리며 점점 더 빨라지는 말로 일흔다섯의 노교수에게 고함을 치고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겠다고 위협했다. 플랑크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플랑크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한심한 멍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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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는 (사실은 리제 마이트너가 거의 혼자서) 어떤 원자의 핵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그러면서 질량이 줄어들고 줄어든 질량만큼 에너지가 나온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어. 그로 인해 독일에서도 핵폭탄 개발을 추진하였고, 미국에서도 오펜하이머를 중심으로 핵폭탄 프로젝트, 여러 번 이야기해서 너희도 알고 있는 맨하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란다. 그리고 맨하튼 프로젝트의 끝은 일본에 투하된 핵폭탄 두 발이었고그렇게 <불확실성의 시대>의 책은 끝을 맺었단다. 하지만 지은이는 책은 끝났지만 과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아빠가 예전에 읽은 <퀀텀 스토리>에서도 1945년 이후에도 영자역학의 연구와 입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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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진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은 언제가 끝난다. 이 책의 물리학자들은 1945년 이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에 견줄 만한 진보를 더는 이루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공식을 찾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 역시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100년 전에 세운 그들의 이론은 오늘날까지 굳건히 서 있고, 우리의 컴퓨터칩과 의료장비 안에 들어 있고, 당시 이런 이론의 해석을 두고 그들이 겨뤘던 논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심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에 제기한 이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물리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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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양자역학을 이해할 때까지 아빠의 양자역학 책읽기는 계속될 거야.

 

PS,

책의 첫 문장: 당신이 사는 세상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과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어느 날 알게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책의 끝 문장: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전 전기역학의 창시자 맥스웰(James Maxwell)은 1871년에 이미 이런 자기만족을 경고했다. "(측정이 주를 이루는) 현재의 실험은, 중요한 모든 물리적 상수가 몇 년 안에 대략 추산되어 과학자들에게 남은 것은 그저 이 측정을 소수점 아래 수치까지 세밀화 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만연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다. "꼼꼼한 측정의 노력에서 얻어야 하는 진정한 보상은 더 큰 정확성이 아니라, 새로운 연구 분야의 발견과 새로운 과학 아이디어의 발달이다." 과학의 역사는 맥스웰이 강조한 대로 될 것이다. - P19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른의 확률, 슈뢰딩거의 파동,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것을 상보성이 양립시킨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그런 고전적 파동이 결코 아닌데, 측정하지 않을 때만 예측 가능하게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파동은 보어 자신의 양자적 사고의 기초인 대응원리에 맞아야 한다. 양자 시스템의 특징에 대한 실질적 설명은 결국 고전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확률 구름을 관찰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을 측정하지 않는다. 실험은 구체적인 측정값을 도출한다. - P293

마이트너는 과학학술지 <자연과학 검토>에 논문을 발표할 때 성만 적어서 제출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저자가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로크하우스 출판사 역시 저자를 남자로 예상하여 백과사전 원고를 의뢰하는 편지에 "미스터 마이트너"라고 적었다. 마이트너가 자신이 여자임을 밝혔을 때, 출판사는 원고 의뢰를 없던 일로 되돌렸다.
프라하대학교가 그녀에게 강사직을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마이트너는 오토 한의 실험실에서 "무급 객원연구원"으로 시들어갔을 터였다.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는 그제야 마이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냈다. 마이트너는 1913년 서른다섯 살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과학의 경이로움"에 기뻐했고, 마침내 스스로 커피 살 돈을 벌게 되었다.
- P432

보어는 이따금 고등연구소 옆 아인슈타인 집에 들렀고, 두 노신사는 옛날처럼,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다퉜다. 옛날의 결투가 더는 아니다. 오히려 소중한 루틴에 가깝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것은 위로이다. 그는 홀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너머에 있는 한 이론을 찾고 있다. 그의 사교 범위는 괴델과 몇몇 다른 친구들로 축소되었다. 두 번의 결혼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한 아들과는 사이가 벌어졌고 다른 한 아들은 정신적으로 아프고, 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아인슈타인이 1955년 4월에 생을 마감할 때, 그의 연구실 칠판에는 아무 결과도 도출하지 않는 공식들이 가득 차 적혀 있었다.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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