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전 -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성철.법정 지음 / 책읽는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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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

이 책은 알라딘 인터넷 서점의 책 전용 SNS인 북플이라는 곳에서 알게 된 책이다. 법정 스님을 좋아해서 책에 눈이 바로 갔다. 법정 스님이 떠나신 봄이 벌써 여섯 해 전이다세월이 참 빠르다. 그는 떠났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는 그가 늘 자리잡고 있다. 그런 법정 스님이 성철 스님과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설전>이라는 책이다. 부제가 "법정이 묻고 성철이 답하다"라고 되어 있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라는 말씀으로 유명하신데, 나는 성철 스님의 책은 읽어본 적이 없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것이 1993년이었다고 하니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책과 담을 쌓고 지내던 시절이라서, 그 분의 책을 접하지 못한 듯성철 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책을 통해서 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어 좋았다. 이 책은 부제에서 말한 것처럼 법정 스님이 묻고, 성철 스님이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법정 스님보다 성철 스님의 생각이 더욱 많이 드러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대담이나 토크콘서트를 책으로 엮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묻고 답하는 경우, 답하는 사람이 주인공인 것이 맞지만, 좋은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좋은 질문이다. 이 책은 책의 뒷표지에 적힌 것처럼 현문과 현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책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다. 그리고 책에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자연의 사진들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 적은 양이 담고 있는 슬기와 교양은 깊은 심금을 울린다.

 

[눈싸움]

책 제목 설전. 설전이라고 하면 말로 옳고 그름을 다툰다는 설전(舌戰)이 바로 생각이 난다. <썰전>이라는 TV 프로그램도 생각이 나고그런데 책 제목에 옆에 적혀 있는 한자를 보니 눈 설(), 싸울 전(). 이라고 써있다. 우리말로 해석해보면 눈싸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눈이 온 겨울이면 눈을 뭉쳐서 던지면서 놀던 그 눈싸움. 책제목을 왜 그렇게 지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후반부의 대화 주에 두 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시주들 앞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있다. 다른 제자들은 성철 스님 앞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법정 스님은 성철 스님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묻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좀더 진면목의 답을 이끌어내신 것이다. 이렇듯 두 분이 서로 주고 받는 말씀이 마치 즐거운 눈싸움 같았기 때문에 제목을 눈싸움이라는 뜻의 <설전(雪戰)>이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나중에 책 뒷날개를 보니 아래와 같이 책제목이 <설전(雪戰)>인 이유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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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냉철하면서도 부드러운 수도자의 자세를 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 하는 한편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웃게 만드는 유일한 다툼인 

'눈싸움'의 이미지를 통해 설전과 법정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구도의 문답과 인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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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불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불교에 관한 이야기. "불교란 무엇입니까?", "타 종교와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등 처음 불교를 접하는 사람들이 가질 만한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질문들도 있고, 중도 이론이나 중국 선종에 관한 질문 등 비교적 불교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선 질문과 답변도 오가곤 했다. 아무래도 두 분이 불교 신도들 앞에서 나눈 대화들도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전에 불교에 관련된 책들을 좀 접해서 그리 낯설지 않게 읽으면서, 오랜만에 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그런데 이 책을 법정 스님이 생전에 쓰신 수필집처럼 생각하고 책을 편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의 대화의 또 다른 주제는 우리네 삶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한 질문들도 오가곤 했다. 많은 대화 중에 요즘 우리나라 언론이 새겨들었으면 하는 내용과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특히 공감을 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나라 언론의 편향성은 이제 당연한 것으로 생각들 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 중에도 주요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대안 언론을 찾아 듣는 이들이 더 많다.

객관성이 결여되고 주관성이 깊이 개입한 기사들... 그런 언론들을 향해 성철 스님이 주시는 깊은 가르침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그들이 들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졌으니, 그들은 더욱 편향적이 될까 싶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욱 편향적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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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

...

그리고 지도자의 덕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시고 있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다시 읽고 발췌해 보았다. 이 쉬운 지도자의 덕목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나마 이번 선거에서 그런 지도자들에게 백성들이 회초리를 들어준 것을 보고, 아직 우리 백성들의 힘은 세다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희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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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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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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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쪽

내가 자꾸 깨친다 깨친다 하는 것은 사람이 그런 깨칠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다면 만날 노력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땅 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면,

거기에 금이 꼭 있을 것 같아서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암만 파도 금이 없을 것 같으면 헛일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도 헛일입니다.

문제는 그 광맥이 사람 사람 마다에 다 있나 없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런 무진장한 대광맥, 

금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근본 생명선입니다.



46쪽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모든 생각을 쉬어 버리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구하는 생각, 이것이 마음에 들어 있으면 아무리 섭생을 잘해도 소용이 없거든요.

그런 구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떨쳐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쉬고 사는 이것이 건강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79쪽

그러면 왜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고, '사바세계'라고 하는가?

내가 비유로써 말하는데, 아무리 한낮에 해가 떠서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더라도

눈먼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설사 눈감은 사람이 광명을 보지 못한다 해도 광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는 떠서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지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본시 부처인 중생을 바로 보지 못하고,

본시 절대인 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바로 뜨면, 광명을 따로 찾을 것 없고 극락을 따로 찾을 것도,

부처를 따로 찾을 것도 없습니다.

그리하면 이리 가도 부처, 저리 가도 부처, 여기도 극락세계, 저기도 극락세계,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85쪽

흔히 '용서를 하자. 용서를 하자'고 하는데, 불교의 근본사상에 용서란 없습니다.

용서란 내가 잘하고 남이 잘못됐다는 것인데,

모든 것의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며,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의 인격을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칼로 나를 찌른다 할지라도 

찌르게 한 것의 근본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내가 '참회'를 해야지 저 사람을 '용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 불교사전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97쪽

어떤 언론이든지 사회의 공기라는 것,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기관이나 단체의 이용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 곤란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춘추필봉(春秋筆鋒) 

말 그대로 시퍼런 필봉을 세워 나가야만 사회에 공헌을 하고

사회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언론이 근본정신을 버린다면 사회와 인류에 해를 주지 않겠어요?

지금도 잘하고 있겠지만,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명정대한 필봉으로

춘추필봉을 발휘하면 사회를 잘 선도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살릴 수 있겠지요.




102쪽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고 하면 근본 전제가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라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정치하는 사람이 사리사욕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 그것은 자살이 되고 맙니다.

어떤 단체의 지도자라면 그 단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죠.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에서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면 그 단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을 버려야만 국가도 살고 민족도 살고 단체도 살고 자기 자신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정치를 결국엔 국가와 민족에 큰 손해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지도자의 자격이란 참으로 사리사욕을 완전히 버린 

무아(無我)사상에서 전체를 위해 사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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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법칙 - 수학으로 배우는 법칙 시리즈 2
Transnational College of LEX 지음, 강현정 옮김, 곽영직 감수 / Gbrain(지브레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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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있음.

                  

[히포 패밀리와 트래캘리]

또 양자역학에 대한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부터 양자역학을 이해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책들을 읽어보고 있다. 이번에는 읽기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일본의 히포 패밀리 내에 Transnational College of Lex라는 교육기관에서 그들 스스로 공부하고 이해한 후에 낸 책이기 때문이다. Transnational College of Lex에서 펴낸 책 중에 몇 달 전에 읽은 "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란 너무 좋게 봤었다. 이 책을 통해서 푸리에 급수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설명들도 어렵지 않게 되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래서 <수학으로 배우는 양자역학의 법칙>도 쉽게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 읽은 <수학으로 배우는 양자역학의 법칙>에는 히포 패밀리에 관한 설명도 더 있었다. 히포 패밀리는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자연 습득으로 배우는 그런 모임이라고 한다. 자연 습득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이가 언어를 배울 때 따로 그 언어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아는 단어들을 조금씩 조금씩 익혀서 배워 나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도 낯선 언어에 대한 노출을 많이 해서, 처음에는 아무 뜻도 없이 발음만 비슷하게 하면서 나중에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러게 그들은 7개국의 말들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히포 패밀리에 일종의 스터디 모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Transnational College of Lex이고, 그들은 줄여서 '트래칼리'라고 부른다. 그들이 처음 만나서 공부한 것이 바로 푸리에 급수였고, 그 공부를 마치고, 두번째로 공부하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그들은 수식이라는 것도 일종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으로 수식을 이해하고 그 수식을 통해 양자역학이 무엇이란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10주 동안 양자역학에 대한 공부를 계획했고, 그 전에 양자역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먼저 읽었다고 한다.

쉽지는 않았다. 책의 첫부분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유치한 듯한 그림까지 섞어가며 쉽게 쓰여 있었고, 상식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이 나와서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책의 중간부분을 넘어가면서, 온통 알 수 없는 수식들로 어지러웠다. 아래 수식과 같은 페이지가 연속으로 나왔다. ,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책은 양자역학을 이해시켜주는 책이라기보다 증명하는 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을 연구한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을 설명한 수식들이 있는데, 그들이 계산한 수식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는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연필을 들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수식을 하나하나 따라 써 내려가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처럼 눈으로 읽어 내려간다면, 그 수식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에 읽은 <파동의 법칙>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운 수학에서 볼 수 있는 수식들이 많았지만, 이번에 읽은 <양자역학의 법칙>에는 수식 자체가 어려웠다. 그래도 이 책은 양자역학이 왜 생겨났으며,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연구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복잡한 수식은 건성건성 건너뛰고, 글만 읽어도 나쁘지 않았다. 이번 리뷰에서는 그런 양자역학에 대한 흐름만 정리해보았다.

이 책의 좋은 특징 중 하나는 반복을 자주 한다는 것이다. 한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그때까지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준다. 그러면 복잡한 수식으로 잃어버렸던 맥을 다시 찾아서 다시 한번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내 다시 출현한 복잡한 수식 때문에 한숨을 내쉬지만 말이다. 좀 아쉬운 점은... 수식을 대충대충 봤는데도, 수식에서 명백한 오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본 것만 두어 군데인데, 꼼꼼히 수식을 검토해 보았다면 그보다 더 많은 오류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책을 읽을 계획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수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읽길 바란다.

 

[빛이란]

양자역학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빛이다. 먼저 과학자들이 빛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부터 살펴보자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는 무엇일까? 고대 돌턴이라는 사람은 그것을 원자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 시절에 원자를 볼 수는 없었다. 근대에 들어서서 돌턴이 이야기한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많은 원자들이 발견되어 주기율표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원자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자, 광자 등 원자보다 더 작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입자들을 양자(量子)라고 했다. 그런 양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이질 않았다보이지는 않아도 그 양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 바로 바로 양자역학이다양자들이 자연에서 어떻게 움직이는 수식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그런데 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빛은 19세기까지만 해도 파동이라고 생각했다. 영이라는 사람이 실험을 통해 빛이 간섭한다는 것을 밝혔다. 간섭이라는 것은 파동의 성질이기 때문에 영의 실험을 통해 빛은 파동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런데, 파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흑체 복사다. 태양의 빛이 지구에 닿으면 지구는 따뜻해진다. 그것은 빛이 열을 전달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파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전달 물질이 있어야 열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빛이 열을 복사하는 것을 흑체 복사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과학교과서에 들어본 적이 있는 플랑크라는 과학자가 그래서 실험을 했다. 진공의 쇠상자에 온도를 높이면 빛이 나오는데, 온도에 따라 빛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양한 온도는 다양한 파동의 빛이 나온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온도와 빛의 파동과의 관계를 그린 그래프를 플랑크 곡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곡선을 수식으로 표현하려고 했는데고전역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빛의 에너지가 불연속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파동이라면 에너지가 불연속일 수가 없다... 여기서 고전역학이라고 하면 뉴턴의 역학과 거기에서 파생된 역학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자연의 모든 현상은 고전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랑크는 그 곡선의 식을 구해서 플랑크 곡선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논문에 발표하면서도 뉴턴 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문구를 추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의 고전역학은 절대진리와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천재가 등장하였으니, 바로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논문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빛은 파동이 아니라 입자라고 생각했다. 혁신적인 생각이란다. 선입견을 깨는 그런 생각. 그렇게 빛이 입자라는 가설을 내세웠는데 바로 광양자 가설이다. 이것이 1905년이었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1905년 한 해에 광양자 가설뿐만 아니라 특수상대성이론, 브라운 운동 등 3개의 위대한 논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외계인이거나 천재임에 틀림없다. 빛이 입자라고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것은 바로 광전효과와 콤프턴 효과란 것이 있다. 광전효과는 금속에 진동수가 큰 빛을 쬐면 전자가 튕겨나가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파동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입자여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콤프턴 효과는 빛 입자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x선은 충돌 후 산란되어 진동수가 작아진다... 진동수가 작아진다는 것은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이야기인데, 파동이라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현상을 운동량으로 증명해야 하는데운동량은 속도와 질량의 곱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빛의 질량이 있나? 없다... 빛의 질량은 0이다. 하지만 질량이 없어도 에너지와 속도를 알면 운동량을 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아인슈타인은 빛의 운동량을 구했다고 한다.

빛이 입자를 증명하는 실험 중에 안개상자 실험이라는 것도 있다. 콤프턴 실험에서는 전자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 물방울을 모아 놓은 안개상자에 전자를 쏘게 되면 전가가 지나가는 모습이 물방울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빛은 입자라는 것이다. 정말 빛은 신기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혀낸 빛의 성질들은 정말 확실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빛의 성질이 또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양자역학의 탄생]

원자에 열을 쪼이면 빛이 난다그것을 프리즘으로 보게 되면 불연속선으로 보인다. 그 모양의 형태는 원자마다 다르다. 이것은 예전에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선들이 불연속적으로 나타날 것인가? 그 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발머라는 수학교사가 취미로 그 선들의 관계식을 구했다고 한다. 그냥 불연속적인 선들로 보였는데, 특정 수식으로 그 선들과의 관계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 선들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톰슨이라는 과학자도 이 금속에서 나타나는 불연속 선 스펙트럼에 대해 연구를 했다. 그래서 전자의 존재를 알아냈다. 전자의 질량은 원자의 1/2000 이고, (-)전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럼 전자는 어떻게 생겼지톰슨은 전자가 수박씨처럼 위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원자가 수박이면 수박씨는 전자가 되는 것이다. 톰슨의 제자 러더퍼드는 α산란실험으로 톰슨모델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α파가 2만개 중에 1개꼴로 금속을 통과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톰슨모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전자는 원자핵 주변에 있다고 생각을 했다. 원자는 전기적으로 중성인데, 전자는 (-)전하를 띠고 있으니, 원자핵은 (+)전하를 띠어야 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전하와 (+)전하는 전자기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긴다. 그런 원자핵 주변의 전자는 이내 원자핵과 붙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인 전자가 원자핵을 주변을 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원심력과 전자기력이 같기 때문에 일정궤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모순이 있었다. 원운동은 가속도운동이고, 고전역학 중에 맥스웰의 파동역학에 의하면 가속도 운동을 하는 것은 에너지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원자력이 전자기력보다 작아져야 하고그로 인해 다시 전자와 원자핵이 서로 붙어야 한다고 했다. 그 밖에 전자의 움직임을 고전 역학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빛도 그렇고, 전자도 그렇고... 이런 작은 입자들의 미시적 세계의 현상들은 고전 역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작은 입자들의 현상을 설명할 새로운 역학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전자 궤도를 버려라]

닐스 보어란 과학자가 있었다. 원자 모형을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이론, 즉 입자로 설명하려고 했다. 고전 역학은 아예 적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양자역학의 규칙을 하나씩 하나씩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먼저 원자의 선 스펙트럼이 불연속적인 에너지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자가 몇 개의 에너지 준위를 가지고 있는 궤도를 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전자가 자신의 궤도를 돌고 있는 것은 정상상태라고 하고 이때는 빛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자의 에너지 준위가 달라질 때, 즉 에너지가 변할 때 빛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선 스펙트럼의 원자 구조를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좀더 보충해서 설명하면, 궤도가 높은 곳의 전자들은 궤도간 간격이 아주 좁게 되어 불연속이 아니라 연속처럼 동작한다고 했다. 그렇게 궤도가 높은 곳의 전자들의 움직임은 전자기력과 원심력이 같다고 하는 고전역학으로 설명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높은 궤도의 전자의 경우 고전역학을 이용하여 전자의 진동수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자의 궤도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닐스 보어는 원자의 궤도 구하는 것은 뒤로 하고, 선 스펙트럼의 빛의 세기나 구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보어가 구한 것은 진동수 구하는 방법까지였다.

닐스 보어의 제자 중에 하이젠베르크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초열이라는 병에 걸려서 헬골란트 섬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쉬면서 연구를 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역학을 궤도가 높은 전자뿐만 아니라 낮은 전자도 고전역학을 이용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변칙이었다. 그런 변칙을 써서 그는 보어가 하지 못한 선 스펙트럼의 에너지 크기를 구했다. 하지만 그도 전자의 궤도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궤도를 버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자가 방출하는 빛으로 진동수와 진폭을 구할 수 있다면서, 굳이 궤도를 밝혀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어야 물리학이라고 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물리를 부인했다. 아인슈타인은 관측이 가능한 것만이 물리학이라고 했다.

 

[전자의 정체는…]

루이 드브로이란 사람이 있었다. 아마추어 과학자로 독학으로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자가 입자가 아닌 파동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인슈타인이 빛이 파동이 아닌 입자라고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자를 파동으로 생각해서 계산했더니 양자조건을 만족하는 것을 밝혀냈다. 그래서 그는 전자는 파동이라고 논문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도 이 논문에 흥미를 느끼고, 그 논문을 슈뢰딩거에게 전달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한다. 슈뢰딩거는 전자의 파동방정식을 이끌어냈다전자가 파동임을 수식으로 증명한 것이다. 이 전자의 파동방정식을 유도해내는 식이 책이 쭉 나와 있지만눈으로만 읽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식이다. 그렇다고 손으로 천천히 따라 적는다고 이해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려운 수식의 연속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게 하는 페이지가 지나면 결국 슈뢰딩거가 이룬 것은 전자를 파동방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바라던 그것. 이미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슈뢰딩거의 전자는 약점들이 있었다. 그가 구한 파동방정식은 전자가 한 개인 경우를 구한 것이었다. 내가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전자 2개를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설명하려면 6차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전자 3개면 9차원, 더 많은 전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무한차원이 필요하게 된다고 했다.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시 전자의 이미지가 사라졌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막스 보른이라는 사람이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확률로 해석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파동이 아닌 입자들의 개수로 바꿔서 설명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이중슬릿 실험. 그것은 파동을 설명하는 실험이었다. 그런데 전자의 입자로 바꿔서 생각하고 이중슬립을 통과한 전자의 개수들을 세어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파동으로 나타난 간섭의 세기에 비례하여 전자의 개수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확률로 생각하니 다시 이미지가 돌아왔다고 했다슈뢰딩거 방정식은 한 개의 전자만 설명이 가능했는데, 보른의 확률해석은 전자가 많아도 3차원의 공간에서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전자를 한개만 쏘면 어떻게 될까? 이중슬릿에 전자를 한 개만 쏘면 전자는 둘 중에 하나로 들어오게 된다. 각각 확률은 반반씩이다. 그리고 이 경우는 간섭 현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가 우리가 관측을 하게 되면 전자는 영 딴 놈이 된다. 이를 확률파동이 수축한다고 하는데,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결국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보다 보면 가장 끝에서 출현하는 불확정성 원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자의 불확정성이란, 위치를 정확하게 보려고 하면 운동량을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려고 하면, 전자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전자는 눈으로 봤을 때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확정성 원리를 하이젠베르크와 보어가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전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관측될 때는 입자처럼 움직인다" 라고... 그리고 이때 파동은 실제 물질의 파동이 아니라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주장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물리학이라는 것은 명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니까 말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를 1927년에 주장하였는데그 이후에 이것을 뒤집는 이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은 옳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고양자역학은 현대 과학에서 아주 중요한 분야라고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 전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아직까지는 전자는 관측하지 않을 때는 파동처럼, 관측될 때는 입자처럼 움직인다라고 대답하며 된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아쉽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아직 양자역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모했다. 전에 다른 책에서 양자역학을 가장 쉽게 설명한 사람이 리처드 파인만이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제 파인만이 설명한 양자역학을 찾아봐야 하나.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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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작품은 그 작품들을 있게 한 모국어의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국어에 대한 은혜 갚기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면 서양 굴종적 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극복 없이 제아무리 글을 써봐야 독사는 없고,

결국 자기 파멸의 길만 재촉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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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나 의학같이 확실히 앞서 있는 것은 모르지만,

예술 특히 음악과 미술과는 달리 민족적 특성을 강하게 띠게 되는 문학에서만큼은

자기 주체성, 자기 존재감을 확실히 갖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2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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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일본 평론가가 한 평이 있습니다.

' 이 소설(태백산맥)은 단순히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한국민족을 이해할 수 있는 총체적 백과사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착취하고 괴롭혔는가까지 보여주고 있다.'

저는 이 평을 소개한 다음.

'유럽의 지난 200년 역사는 무엇인가.

전 세계를 향한 식민지 착취의 역사 아닌가.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오늘의 부가 약소국들에 대한 착취로 이루어졌음을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다.'(2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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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설은 인생에 대한 총체적 탐구이니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교육적이거나 계몽적인 대목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건 소설은 유익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능에 충실한 것이니

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10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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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과거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고 일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거가 우리처럼 슬프고 비참할수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만

또 그런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여러 가지 본능 중에 하나가 망각입니다.

정신의학에서 인간에게 망각이 없었다면 인간의 99퍼센트는 미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망각을 어떤 문제의 해결이라고 착각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역사를 그 망각의 착각에 빠지게 방치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단재 선생의 경고가 또다디 현실로 닥쳐오겠지요.

그런 참극을 막기 위해서 역사 공부는 필수적인 것이고,

소설 또한 역사 공부의 딱딱함과 건조함을 피해

다른 방법으로 역사의 상처와 고통을 일깨우고,

추체험케 하는 것이고,

그것이 소설가의 여러 임무 중에 또 한 가지라 생각합니다. (140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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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발견.

그래서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가치를 서로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일 것입니다.(19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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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고달프지 않은 인생은 없고, 힘겹지 않은 삶은 없어요.

그런 인생살이 속에서 희망을 만드는 건 우리들 자신이에요.

그리고 절망을 이기는 건 희망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새해 새 희망을 꿈꾸며 모두 힘내며 굳세게 나갑시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주인입니다.(20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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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당이 오만불손한 완력으로 탄핵안을 통과시켰으니 꼭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돠연 탄핵을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했는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어리석을 만큼 순수하게 권력 민주주의 실천에 나섰다.

그것이, 대통령 권력의 3대축이라고 하는 국정원, 검찰, 경찰을 

그전처럼 틀어쥐지 않고 독립성을 보장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로만 반복되어 온 3권 분립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

그 일을 한마디로 대통령의 권력을 스스로 축소하는 이변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자가 될수록 돈을 탐하듯 인간의 역사 속에서 모든 권력자들은 권력을 잡는 그 순간에

권력을 더 키우고자 욕심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탐욕에 치여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다.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자신의 권력을 줄여

민주국가의 틀을 바르게 세우고자 한 사람이 있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이 유일하다.(21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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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그런 척박함에 뿌리내리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그래서 그 꽃은 영원을 향하여 시들지 않습니다.

문학을 하며 호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말고,

굶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문학의 생명은 영원합니다.

그 확신 위에서 좋은 작품은 탄생하며, 굶주리며 쓴 좋은 작품은 영생을 얻습니다.

문학은 어차피 어느 시대에나 절대다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수가 선택하되, 그 소수가 인간사회를 이끌어갔습니다.

'작가란 인류의 스승이고, 그 시대의 산소다'

인류적 동의로 주어진 명예입니다.

그 길을 선택하는 것만 오로지 당신의 실존입니다.(29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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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해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너무 간단명료합니다.

문학, 역사, 종교를 포함한 철학 서적들을 꾸준하게 읽는 것입니다.(35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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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47호 - 2016년 3월~4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6년 3월
평점 :
품절


[참고] 스포일러 포함/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선거를 앞두고…]

선거다. 곧 있으면 또 하나의 중요한 선거가 있다이제 열흘도 안 남았다. 녹색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녹색당을 알리려고 많이 노력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녹색당이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녹색당이 꼭 국회에 진출했으면 좋겠다. 녹색당을 지지하게 된 원인은 바로 정기적으로 읽는 녹색평론 때문이다. 얼마 전에 녹색당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에 초대손님으로 시사인 주진우 기자가 나왔는데, 그 또한 녹색평론을 읽고 그로 인해 자신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그래서 녹색당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나도 "저도요~~"라고 속으로 이야기했다. 이 녹색평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의 영혼에 녹색이 덧칠해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녹색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정의당과 녹색당이 국회 제 1 당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그런 모습 말이다.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제는 결선 투표 없는 소선거구제로써 소수정당의 기회를 박탈하는 선거구제다. 대의 민주주의라면 백성들의 뜻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어야 하지만, 백성들의 정당의 지지율과 국회의원의 정당 비율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어찌 대의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국회의원이 300. 만약 정당 지지율이 3%인 경우, 대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국회의원 300명 중 3% 9명의 국회의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녹색당이 3% 득표를 하더라고 국회의원 자리는 1. 이건 말이 안된다. 이럴 바에야 이번 녹색평론에서 이야기하고, 그 전에도 여러분 언급이 되었던 제비뽑기, 즉 추첨제 민주주의가 더욱 대표성을 띠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지금의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제도이니 그들이 바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암울하다. 이번 선거 결과도 이미 누구나 예상하고 있듯 야당의 참패로 끝날 것 같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하나? 정의 당의 선전과 녹색당의 국회진출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 두 가지만 이루어져도 이번 선거를 대패해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희망고문이 아니길…

 

[()을 살리는 세계로]

이번 녹색평론 147호의 주제는 바로 "()을 살리는 세계로". 농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해마다 농업에 대한 정책은 뒤로 가고, 그로 인해 힘없는 농민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언론의 펜 속에 숨은 칼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정말 슬픈 대한민국이다. 작년에 그런 농민들이 시위하다가 백남기라는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중태에 빠지셨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정부 또한 그 사건에 대한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백남기 선생이 어떤 분일 줄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그분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젊은 시절은 민주화에 청춘을 불태웠고, 그 이후에는 우리 농촌을 살리기 위해 평생을 다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연해졌다. 그는 중앙대에 입학을 했고, 당시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광주 민주화운동에 연루되어 오랜 시간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나와서, 그 이후에는 농촌에 내려가 농사를 지내며, 여러 농촌 살리기 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그는 민주화에 앞장서면서도 우리나라 땅을 사랑하셔서 아이들 이름을 백도라지, 백두산이, 백민주화 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런 분들이 왜 찬 바닥에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야 하는가? 아무도 답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그 시위를 진압했던 경찰들은 진급을 했다고 하니, 이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 싶다.

농촌 살리기.. 결코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로컬 푸드의 개념을 확대하여 로컬의 개념을 국가로 확대해서 시행하자는 의견도 좋은 의견인 것 같았다. 그보다 전에도 한번 이야기가 되었던 농민기본소득이 가장 현실적이지 않나 싶다. 농업은 어찌 보면 국가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농민들에게 국가가 일정 정도 소득을 보장해주는 농민기본소득을 주는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일정 금액을 주는 국민기본소득이 어렵다면 국한적인 기본소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성남시에서는 청년기본소득을 실시하고 있는 것처럼 농민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죽어가는 농업의 마지막 인공호흡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해방 후 정치인 전진한이 1950년대 후반에 내세웠던 자유협동주의를 소개하였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니 그 또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내용이 자유협동주의를 잘 설명하는 부분인 것 같아 발췌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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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균점권을 주장할 때 전진한 선생의 논리는 아주 명쾌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노동을 상품으로 간주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매우 고루한 사상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참신하고 용기 있는 발언이에요. '노동력=상품'이라는 관념은 19세기적 발상이라는 거예요. 시대를 그렇게 앞서 나갔던 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어떤 진보적 지식인이 이렇게 과감한 논리를 펼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맑스를 공부한 사람들도 늘 노동력 상품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평생의 화두로 안고 살잖아요. 자본주의체제하에서의 노동은 상품이다, 라는 명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지는 않고 말입니다. 그러나 전진한 선생은 그것을 고루한 사상이라고 단정하고자본가가 돈을 출자했다면 노동자는 자기의 '노력'을 출자한 또하나의 '자본가'라고 선언합니다. 노동자도 출자자라는 거죠출자자와 출자자는 기본적으로 대등한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생기는 이익을 고르게 나누는 것즉 균점(均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당한 권리다, 이런 논리죠.'노동자=임금노예'라는 진부한 공식이 이 명쾌한 논리로 단번에 척결돼버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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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나라 농업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그런데, 그런 농촌의 유권자들은 농촌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이들에게 다시 표를 던지고 있으니,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4월은 세월호]

이젠 또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무섭기까지 하다. 세월호 사건이 벌써 2년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위로도 없었다. 이젠 국가는 그것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얼마 전 청문회에도 정부 관련자들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올해는 선거철이라고 더 관심이 줄어든 것 같다. 그들은 좋겠구나. 선거로 세월호가 감쳐줘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그런다고 숨겨지나?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깊은 트라우마를 준 사건이 말이다. 이번 녹색평론에서도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보다 시 한 편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 시를 다시 한번 발췌했다. 이제라도 잘못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사과할 사람들은 사과하는, 그런 이해가 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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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는 묻지 않으리

 - 시천주 2014 4 16

 

                            홍일선

 

길섶 풀 한 포기

외진 곳 몽돌 하나이

응달 습생들 벌레 한 마리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공경의 말씀 이 땅에 누대로 계셔서

은빛 갈대들이 기꺼이

마을숲이 되어주었던 강마을

앉은뱅이꽃으로 만든 집 울타리

아기들 옹아리도 뉘엿뉘엿 지는 노을도

그 마을 저녁 연기 만나 지극했으리라

그러하온데 갈대숲 너머

단양쑥부쟁이들이 스러지던 봄날

 

연둣빛 신생의 아픔이 그믐달처럼

그 집을 찾아주신 것

이기지 못하고 늘 지는 것들 쓰라린 것들

그것들 슬픈 눈빛들이야말로

온 생명 보듬어 안아야 할 대덕이시라고

어머니시라고 그리운 님이시라고

한 농부에게 조용히 일러주신 것

그 농부 그믐달이 이윽한 마당에서

그리하여 흙님 숲님 강님 햇빛님 곡식님께

삼가 무릎 꿇어 삼배 올린 것

하늘 아래 생명 가진 것들에게는

하늘님이 계시다고 그 농부 믿게 되었을 것이다

 

산천 오랜 기다림들이

꽃망울 터뜨리는 봄날

2014 4 16일 봄날

그 집에선 어미 닭들

줄탁동시 산고가 있더니

병아리들이 세 마리 다섯 마리

아홉 마리 열네 마리

목숨의 꽃들을 꼬옥 보듬어 안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룩한 봄날을 뵈옵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 그러하온데 진도 어디라 했던가

어여쁜 꽃들로 가득 찬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청천벽력의 소리가 들려왔던 것

울음이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들려왔던 것

그 집 갓 태어난 병아리들도 들었을 것이다

앉은뱅이꽃 울타리 홍씨도 들었을 것이다

못자리 물을 대던 이장도 들었을 것이다

아욱 씨를 파종하던 새마을 지도자도 들었을 것이다

비닐하우스를 손보던 김씨도 들었을 것이다

배꽃이 영 글렀다고 한숨짓던 배씨도

밀린 사료값 때문에 밭 한 두락 내놓은 황씨도

4대강 공사가 끝난 뒤부터 양수장 물이 말렀다고

투덜대던 강씨도 들었을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 들었을 것이다

살려달라는 소리 들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대저 에프티에이가 무엇이기에 난리를 치는 거냐고

묻고 또 묻던 구노인회장도 들었을 것이다

대처 나가 사는 아들 내외 온 김에

땅콩이며 강낭콩 옥수수까지 심어 한시름 놓았다는

홀로 사는 충주댁 할머니도 들었을 것이다

부녀회장님 당나귀 다정이도 들었을 것이다

언평 벙어리 내외도 들었을 것이다

 

오호라

거룩한 봄 날

꽃 피는 봄 날

소용없는 그리움이었을까

처음부터 부질없는 비나리였을까

이 나라 귀태鬼胎들의 시간 어디였을까

가여운 가여운 팽목항에

붉은 동백꽃들이 하나씩 하나씩 질 때

마침내 우리나라 꽃이 다 질 때

밭에서 일하는 게 큰 죄를 짓는 서 같아

일찌감치 집에 들어와 귀 세우는 시간

앉은뱅이 꽃집 어미 닭의 일곱 시간은 

지극한 생명의 시간이었는데

꽃이 지기 시작한 오전 아홉 시부터

꽃이 가뭇없이 진 오후 다섯 시 그때까지

거룩한 생명의 시간이었으리

 

이제 다시는 박근혜 그에게 묻지 않으리

오늘부터 쓰러진 것들에게 물으리

아픈 강물에게 물으리

시든 풀들에게 물으리

깨진 몽돌들에게 물으리

쓰라린 생명들에게

공경의 말씀으로 물으리

누구는 봄날이 간다고 설워하기도 하지만

이 땅 또 찾아주신 붉은 진달래꽃이 고마워서

시천주로 고요히 호명하노니

봄날 어린 꽃들이여

우리나라 꽃들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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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이번 녹색평론에 실린 서평에서 소개된 책 네 권은 모두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영희 선생의 삶을 쓴 <비판과 정쟁 - 리영희의 언론 사상>,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의 관점에서 쓴 생존기(?)를 그린 <동물 인문학>, 그리고 귀농에 관한 <귀농, 참 좋다>, 마지막으로 앞서도 이야기했던 추첨 민주주의에 관한 책인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라는 책... 다 괜찮았지만, 그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동물 인문학>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서 발췌한 내용을 일부 실었는데,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이유 없이 죽어가는 동물들의 심정을 동물들의 시각에서 적은 글들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 책이 읽고 싶어서 바로 주문했다. 이 책을 주문하면서 같이 주문한 책이 또 있는데, 그 책은 서평에서 소개해 준 책이 아니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여러번 이야기한 책이다. 전에 녹색평론을 통해 장일순 선생을 알게 되고 <좁쌀 한 알>을 읽은 적이 있는데그 책을 읽으면서도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 중에 이번 녹색평론에서도 여러번 이야기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도 같이 주문했다. 그 책들이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114쪽)
그(장일순)의 결혼 주례 이야기도 남다르다.

오늘날 세상은 온통 경쟁으로 가득 차 있네.
너나없이 남보다 한발 앞서서 남을 밟고 이겨야 해가 산다는 이상한 생각을 가진 채 살고 있어.
그렇지만 삶이란 건 일등부터 골찌까지 다 저마다 할 일을 하며 함께 도우며 사는 거라.
이 이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사람만이 아니고 자연과 더불어 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 모두가
서로 존귀하게 여기며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이 말이야.
그게 참다운 공생의 삶인 거지.
오늘 새로 결혼하는 두 사람도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천지신명과 더불어 그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준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133쪽)
장일순의 글을 인용하면서....

무엇을 이루려 하지 마라.
앉은 자리 선 자리를 봐라.
이루려 하면은 헛되니라.
자연은 이루려 하는 자와 함께하지 않느니라.
나는 한적한 들에 핀 꽃 밤이슬 머금었네.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마는 나 웃으며 피어났네.
누구를 위해 피어나서 누구를 위해 지는 것일까.
가을바람이 불면 져야 해도 나는 웃는 야생화.

(177쪽) <토마스 페인, 한 혁명가의 삶과 사상> 中에서
개인재산은 사회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사회의 도움 없이 한 개인이 개인재산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가 땅을 처음 만들어낸 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개인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켜 그에게 하나의 섬이나 대륙을 소유하도록 해보라.
그는 개인재산을 결코 획득하지 못한다.
그는 부자가 될 수 없다.
그처럼 수단과 목적은 분리할 수 없다.
수단이 없으면 목적도 없고 목적이 없으면 수단도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스스로의 손으로 생산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모든 개인재산의 축적은 그가 사회 속에서 삶을 영위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정의와 감사와 문명의 원칙에 의거해 볼 때, 그가 축적한 재산의 일부는
그 모든 것이 거기서 유래하는 사회로 다시 되돌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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