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우다 3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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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현기영 님의 <제주도우다> 마지막 3권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게. 이미 2권에서 제주도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지고,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느낌이 있었잖니. 남로당은 불법으로 규정되어, 남로당 수속의 사람들은 수배자로 지목 받아 도망을 가고, 학교들은 휴교를 했단다.

극우주의자 도지사인 유해진이 취임하면서 데리고 온 서북청년단은 그 이후로 수가 늘어났고, 그들은 제주도 경찰의 고위직을 차지하면서 더욱 영향력을 키워갔어. 서북청년단(서청)은 빨갱이들을 잡겠다면서 제주도민들을 탄압하고 약탈을 일삼았단다. 서청의 눈에는 제주도민들을 모두 빨갱이로 보았어. 남로당과 조금만 관련 있으면 구타를 하고 잡아서 고문을 해댔단다. 하지만 그런 서청의 만행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어.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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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그때부터 서청의 민중 탄압은 더욱 포악해졌다. 이 무렵에 많은 서청 단원들이 경찰로 특채되었고 제주경찰서 서장도 서청 출신이 되었다. 그야말로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한라산에 백두산 호랑이가 왔노라! 공포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조되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구타가 일상화되어 한번 걸려들면 언제 끝날지 모를 고문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남로당의 민애청 소속 청년들은 지하로 더욱 깊이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민애청에 속하지 않은 청년들도 잡히면 민애청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려워 무조건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상이 있든 없든, 뭔가 한 일이 있든 없든 간에 잡히기만 하면 무조건 개 패듯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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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의 청년들도 대부분 산으로 도망을 갔단다. 밤에만 가끔씩 마을에 내려왔다가 가곤 했어. 이를 알게 된 서청은 남아 있는 조천리 마을 사람들을 더욱 괴롭혔단다.

1948 1 22. 남로당 제주도당의 명단을 경찰에서 찾아냈고, 이로 인해 대거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단다. 그리고 2 7일에는 전국적으로 남한 단독 선거에 대한 반대투쟁이 일어났는데, 제주도에서도 이 투쟁이 일어났단다. 제주도민과 경찰이 충돌하기도 했어. 산 속에 숨어 있던 조천리 청년들도 우르르 몰려나와 이 시위에 참석을 했단다. 16살이 된 안창세도 그들을 도와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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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3)

그렇게 공포에 짓눌린 가운데서도 단독선거 반대를 내건 2.7사건이 터졌다. 설마설마하던 남조선만의 단독 선거 책동이 1월 중순이 되자 바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는데, 5 10일 이전에 남쪽만의 선거를 치른다고 했다. 지난 삼년 동안 온 나라 백성이 갈구해온 통일국가의 꿈에 대한 공식적인 전면 부정이었다. 온 천지가 분노와 탄식의 목소리로 들끓었다. 남로당과 민전이 2 7일을 기해 전국적 총파업을 일으키고 김구와 김규식 등 우익 세력이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단독선거 반대의 함성이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터져나왔다. 공장 노동자, 부두 노동자 들이 파업을 단행했고, 전기 노동자는 송전을 중단했고, 철도 노동자는 철도 운행을 중지했고, 통신 노동자는 통신을 두절시켰다. 수많은 학생, 농민, 노동자들이 가두시위에 나섰고 경찰지서들이 공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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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경찰에 잡혀 갔던 조천 중학원 학생 김용철이 모진 고문과 구타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조천리 사람들은 모두 분개하였고,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을 결의했어. 의병을 봉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가지고 무기가 없어서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온건파들도 있었어. 그런데 서청과 경찰에 의해 죽는 제주도민들이 계속 늘어만 갔단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지.

 

1.

드디어 1948 4 3일 밤. 청년들은 행동을 하기로 했단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어 대부분 죽창을 들었단다. 그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기로 했어. 무기도 없었지만 그들은 경험도 없어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단다. 그날의 시위는 실패도 끝났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경찰 당국은 약 한 달 간 시위대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어. 조천리에도 불안하지만 간만의 평화가 찾아왔단다. 당시 제주도 군대를 이끌던 9연대장 김익렬은 더 이상의 충돌은 막아야겠다고, 산 부대 사람들과 대화를 풀어보려고 했어. 하지만, 경무부장 조병옥은 그런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잘라버렸어. 그리고는 내륙에 있던 11연대(연대장 : 박진경)을 불러들여 치안을 맡겠어. 박진경은 강경파로 일본 관동군 출신으로 제주도민 30만명을 모두 죽여도 좋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어.

1948 5 16일은 남한 단독 선거일이었는데, 그 전까지 전국적으로 반대 시위가 일어났단다. 미군정은 대대적인 제주도 토벌 작전을 결정했단다. 조천리 사람들을 비롯하여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반대 시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어.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어진다는데 어떤 백성이 이를 좋아하겠니. 반대 운동은 상식적인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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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6)

조천리 사람들은 목장에 도착한 즉시 이슬 젖은 풀밭에 선 채로 얼마 동안 집회를 가졌다. 조천리와 와흘리 산부대 청년들 몇 명이 번갈아가며 연설을 했다. 저놈들은 우리를 반역자라고 하는데, 왜 우리가 반역자인가? 우리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것이지 민족에 반역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통일 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애국이지 왜 반역인가? 오히려 단독정부를 지지하여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반역 행위다. 이 나라의 허리를 잘라서는 안 된다, 국방경비대는 우리 편이니 곧 해결이 날 것이다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하는 행동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큰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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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토벌을 결정한 미군정은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토벌대 대장으로 정했고, 박진경이 이끄는 11연대가 토벌 작전을 함께 했어. 그들의 토벌 작전은 제주도민 전체를 상대하는 듯했어. 민간인들 학살도 서슴지 않았고, 5월에만 3000 여명의 민간인들을 잡아들였어. 그들의 만행이 심해지자 이를 참지 못한 군인들도 있었단다. 1948 6 18일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만행을 일삼던 11연대장 박진경을 죽였단다.

박진경 후임으로 송요찬 중령이라는 사람이 11연대장을 맡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어. 민간들을 잡아 무차별 고문하고 총살시키는 것은 계속 이어졌어. 전국적인 남한단독정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 8 15일 결국 남한단독정부는 수립되었단다. 이후 산부대 사람들의 투쟁도 힘을 받지 못하면서 이탈자와 변절자들이 생겨났다고 하는구나. 누가 그들을 탓하겠니.

 

2.

안창세는 그 동안 산부대 사람들의 연락책을 했는데, 함께 연락책을 하던 동료가 잡혀가서, 외삼촌이 운용하는 말 목장으로 도망을 갔단다. 그곳에 누나 안만옥이 있었는데, 창세는 누나와 함께 말들을 보살피면서 지내고 있었어. 산부대 사람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밀항으로 제주도를 빠져나가기도 했어. 미군정의 토벌 작전은 멈추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산부대 사람들과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다고 하는구나. 제주 토벌 작전이 길어지면서 여수 지역의 14연대를 제주도로 투입하려고 했는데, 이를 반대하면서 봉기가 일어났다는구나. 이것이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지. 미군정 토벌대는 방화작전까지 펼쳐 불을 질렀단다. 불을 피해 내려오는 이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했어.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죽이라고 하는 초토화 작전이었어. 불은 산뿐만 아니라 산부대 사람들이 마을에도 몰래 내려왔다 가니 마을도 불질러 버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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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90)

방화에 살인에 도취된 자들이 환각 속에서 계속 불을 지른다. 고함치고 총을 난사한다. 겨우 불을 피해 벗어난 사람들을 향해 총알이 사정없이 날아간다. 참새떼가 날고, 닭이 날고, 사람들과 개, 돼지, , 말 들이 달아난다. 총격에 쫓긴 사람들이 혼비백산 울담을 타고 넘어 산 쪽으로 도망친다. 근처의 대숲이나 덤불숲에 뛰어든다. 닭들도 덤불 아래로 오르르 숨어든다. 죽어가면서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내년 농사를 위해 보관 중이던 씨앗 망태가 타고, 이 집 저 집 곳간에서 쥐를 없애고 곳간을 지켜주던 업신 구렁배암들이 타 죽는다. 닭 한마리라도 구해보려고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던 소년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울담을 넘어 도망치던 청년이 총에 맞아 돌덩이 하나 가슴에 안고 엎어지고, 아기 안은 아낙이 솜옷 입은 등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쓰러진다. 쌀독은 물론 간장독, 된장독, 부엌의 물 항아리, 솥단지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와장창 깨진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노파들이 궤 속에 보관 중이던 호상옷 보따리를 챙겨 허리춤에 매고 불 밖으로 나가려고 허둥대고, 매운 연기를 마시고 캑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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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이렇게 점점 수위를 높이는 것은 빨리 토벌을 끝내라고 하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도 있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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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00)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어느 순간 검은 구름이 크게 찢기면서 그 틈새로 기울어진 저녁 햇빛이 폭포수처럼 눈부시게 쏟아진다. 그 사다리를 타고 주황빛 불의 날개를 펄떡거리면서, 불의 칼을 휘두르면서 수많은 천사들이 지상으로 쏟아져 내려온다. 불의 칼, 불의 날개들이 이글거리면서 지상을 휩쓴다. 하느님이 명령한다. “그러니 너희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라!” 최고 사령관 로스웰 브라운이 단호하게 천명한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이승만이 명령한다. “공비 토벌을 빨리 끝내라. 시일을 끌면서 이렇다 저렇다 보고하지 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다.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지체 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조병옥이 맞장구친가.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월남민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다. “한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서청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축복을 청합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곧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어서 그 붉은 무리들을 소탕하고 오시오!” 연대장 송요찬이 외친다. “일본 군대는 이러지 않았어! 더 잔인하게! 더 잔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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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대토벌 작전으로 안창세의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말았는데, 이 일로 목장 일만 하시던 외삼촌도 산부대에 합류하셨는데, 창세도 외삼촌과 함께 다시 산부대로 갔어. 계속되는 토벌 속에 겨울이 다가왔단다. 산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겨울은 또 하나의 고통이었어. 그들은 동굴을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지냈단다. 무기와 식량이 떨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이탈자도 늘어나고 체포되는 사람들도 늘어났어. 토벌대는 이들의 어려움을 봐주지 않고 더욱 악랄해졌단다. 산부대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는 동굴을 발견하게 되면 동굴 안에 수류탄을 던지고 동굴 입구에 매운 연기를 피워서 동굴 안으로 불어넣었단다. 토벌대와 경찰들은 모두 미쳐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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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직급의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져 있었다. 고문과 살인이 너무도 흔해졌고 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 무서운 광증은 집단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광기에 중독된 자들이 법을 가진 자, 법을 쥔 자가 되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죽이고, 시키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마구 죽였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인간에게 목숨을 준 신에게만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그들은 마치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은 죄인데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니, 게다가 그것이 애국 행위라니, 참으로 기묘한 희열이고 최상의 쾌락이자 최고의 자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힘에 도취되었다. 희생자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존재처럼 보였다. 매일 한명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떠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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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세도 결국 더 이상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귀순하기로 했단다. 귀순을 하더라도 총살당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창세는 다행히 매만 맞고 석방되었다고 하는구나. 도대체 제주도민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들은 그저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것에 대해 걱정되어 평화시위를 했을 뿐인데 말이야. 이는 백퍼센트 국가가 잘못이란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수십 년간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숨죽여 지내야 했단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나서야 국가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추념일로 지정하여 매년 그들의 억울한 넋을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단다. 그런데 아직도 간혹 우익인사 중에는 4.3사건에 대해 거짓을 이야기하기도 해서 울분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단다.

현기영 님의 <제주도우다>를 읽으면서 예전에 읽은 김용옥 님의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라는 책이 생각났단다. 혹시 너희들이 나중에 커서 현기영 님의 <제주도우다>를 읽게 된다면 김용옥 님의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라는 책도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구나.

,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3.1절 총격 사건 이후 반년 가까이 계속된 경찰의 가혹한 탄압은 도민의 가슴에 깊은 적개심을 심어주었다.

책의 끝 문장: 사나 사나 사니나 사나


미군정은 서청에 이어 도내 우익 청년 단체도 경찰 보조 인력으로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10월 말경에 미군방첩대의 지휘 아래 몇 개의 군소 우익단체를 합친 단일조직체 대동청년단(대청)이 결성되었다. 그동안 여론에 밀려 좌익이 붙인 삐라를 떼고 그 위에 자기네 삐라를 덧붙이는 따위의 소극적인 활동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이 아연 활기를 띠며 수배당한 청년들이 지하로 잠적하여 생긴 빈 공간을 차지하려 달려들었다. 서청과 마찬가지로 경찰을 도와 피의자 검거에 나서는 무서운 존대로 변신한 것이었다. 우익 학생 조직인 학생연명(학련)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그들은 세를 불리려고 시국 강연회, 삐라와 포스터 살포 활동을 맹렬히 벌여나갔다. 이제 법을 쥔 자는 우리다! 우리가 법이다! 우리 말이 법이다! 우리가 빨갱이라고 하면 빨갱이다! - P41

"자, 여러분, 이제 울음을 멈춥시다! 언제까지 우리가 울기만 할 겁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매 맞기만 할 겁니까? 저놈들은 용철이처럼 우리도 매를 때려 죽일 거우다. 저놈들한테 매 맞아 죽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앉은 채 매 맞아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일어납시다. 일어나서 싸웁시다. 싸웁시다! 복수합시다! 여러분, 저 악독한 서청 강도들을 이 땅에서 몰아냅시다! 여기는 우리 땅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땅을 저 침략자들이 짓밟고 있습니다. 저 육지 놈들이, 저 육지 경찰 놈들이, 저 서청 놈들이 이 땅을 짓밟고 있습니다. 침략자들을 물리칩시다!" - P68

미군정이 딘 소장을 둘러싼 최고 수뇌부가 항공편으로 날아들어 비밀회의를 열었는데, 딘 소장을 대변한 경무부장 조병옥이 화평 정책을 내세운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면서 무섭게 몰아붙였다. 김익렬이 모처럼 얻어낸 산부대와의 약속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군정 당국에 의해 파기되었다. 정책은 화평이 아닌 강경 무력 진압으로 급선회했다. 남쪽만의 단독선거인 5.10선거가 코앞으로 닥쳐왔으므로 그전에 군대를 투입해 저항 세력을 속전속결로 진압해버리자는 것이 미군정의 의도였다. 순식간에 경비대의 대이동이 이루어졌다. 온건파 김익렬이 해임되었고, 9연대도 일부만 남기고 육지부로 전출시키고 수원에 있던 11연대를 불러들였다. - P86

갑자기 교체된 11연대는 9연대와 달리 일본군이 쓰던 99식 장총 대신에 미제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군비 일체를 미제로 일신했다. 박격포, 로켓포 등 중화기도 들어왔다. 일본군 출신 중령 박진경이 연대장이었다. 그 무렵 경비대에서는 그때까지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민족주의 세력이 제거되고 그 자리를 일본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박진경은 북소학교 운동장에 박격포와 로켓포를 진열하고 사살한 시체들을 관덕정 마당에 늘어놓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수많은 사람들을 연행해 포로수용소에 수감했다. - P87

외세에 대한 싸움이 이제는 동족 간의 싸움으로까지 번져갔다. 산과 해변의 대립은 살벌했다. 좌우 양쪽이 번갈아 서로를 죽이고, 그 가족을 죽이고, 그 집에 불을 질렀다. 복수심에 눈멀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친구가 친구를 잡아먹고, 친척이 친척을 잡아먹었다. 천년의 공동체,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을 것 같던 끈끈한 우애와 혈연의 공동체, 씨줄 날줄로 정교하게 엮인 그 돈독한 공동체가 무참히 찢겨나가고 있었다. 일찌감치 군경에 장악당한 읍내의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위에 붙어라, 아래 붙어라 산에 붙어라, 해변에 붙어라." - P128

사람은 누구나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증오 없이는 싸우지 못하는 법, 지휘관은 신병의 마음속에서 증오의 불씨를 지피려고,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 밑바닥 깊이 숨어 있는 야만성을 일깨우려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 빨갱이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증오조차 없이 죽여야 했다. 아무리 하느님은 뜻, 하느님의 명령이라지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있다는 생각이 신병을 괴롭혔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수가 없었다. 상관이 무서웠다. 한라산의 산군보다 더 무서웠다. 우물쭈물했다간 무지하게 얻어맞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여전히 두려웠다. - P245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죽음이 아무 보람도, 아무 가치고 없는 죽음이 되어버렸어. 그게 원통해! 도대체 이건 인간의 죽음이 아니여. 짐승이라도 이런 떼죽음은 없어. 너무 억울해, 원통하고 절통해! 우린 결코, 우린 결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여! 너무도 원통해 죽어도 죽을 수 없어!"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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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2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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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현기영 님의 <제주도우다> 2권을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는 길고 긴 일제 시대가 끝나 해방이 되고, 약간은 어수선하지만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면서 노력하는 제주도민들의 이야기하는 부분까지 했었지. 특히 청년들 중심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단다. 이 소설의 중심인 제주도 조천리도 마찬가지로 정비를 하고 있었어.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갔던 사람들도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았어. 안타깝게도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1권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미군과 소련이 우리나라를 반씩 나누어서 통치를 한다고 했잖니. 그래서 제주도에도 미군정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그들에 의해 행정체계가 만들어지는데, 충격적인 것은 그들은 일제시대 일제의 앞잡이로 일했던 사람들을 재등용한 것이란다. 그들이 관리를 해봤다는 이유 하나였어. 나머지 제주도 사람들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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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

미군정이 충격적인 명령을 내린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공식 출범한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해체를 명령했던 것이다. 미군정이 삼팔선 이남 조선에서 유일한 정부라고 했다. 인민위원회 체제가 미군정의 행정체제에 반영되기를 원했던 도민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해방의 기쁨과 열광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도민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민위원회 간부들 중에서 미군정에 발탁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개는 친일파의 재등용이었다. 일제의 착취 기구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고 그 자리로 복귀하다니, 하급 관리들은 그만두더라도 친일파의 고위직 재등용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면서기를 하던 자들이 버젓이 면장으로 승진하여 복직하기도 하고, 순사 노릇 하던 자들이 경찰서장, 지서 주임이 되었다. 명칭이 순사에서 순경으로, 주재소에서 지서로 바뀌었을 뿐 복장도 검정색 일본 순사 제복 그대로였고, 무기도 일본군으로부터 압수한 99식 혹은 38식 장총과 일본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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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더 열 받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미군이 일반 시민들을 죽인 사건이 일어난 거야. 그러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뿐만 아니라 미군들은 제주도민들을 무시하고, 희롱했으며 폭행까지 휘둘렀단다. 제주도민들은 미군정을 해방군이 아니라 침략군으로 보기 시작했단다.

 

1.

1946년이 되었어. 안창세는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였단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얼마 안되어 아직 중학교가 많지 않았어. 조천리 주민들은 합심해서 학교도 직접 짓고 교원들도 직접 뽑아서 조천중학원을 세웠단다. 창세는 그 조천중악원에 다니기 시작했어. 미군정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조천중학원도 미군정에 의한 교육검열을 받기도 했어.

청년들은 여전히 자주 모여서 공부를 했는데,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공부도 했어. 그런데 최근에는 시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어. 특히 소련과 미군의 신탁통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어. 우리나라가 둘로 나뉘게 될까 봐 걱정을 하면서 말이야. 당시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제주도에서도 자주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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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109)

해가 바뀌어 1946년이 되자 제주도에서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졌다. 미국과 소련이 삼팔선을 경계로 조선을 둘로 분할하여 오년간 통치하려는 음모에 대한 반대였다. 한시바삐 독립하기를 갈구하던 조선 백성들에게, 특히 지난 반년 동안 뜨거운 열정 속에 새 나라 건설의 꿈을 안고 달려온 청년들에게 그것은 정말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해방자를 자처한 미국과 소련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경악 속에서, 조선 땅을 삼팔선으로 두동강 내어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차지하려는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천리에서도 오일장이 열릴 때마다 신탁통치 반대 집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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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여름은 긴 가뭄으로 모두들 고생했단다. 제주도에서는 66일간 비가 오지 않았대. 물이 부족해지면서 곡식들이 말라가고 그 해에 대흉년이 들었다고 하는구나. 식량 부족으로 고생을 했는데, 거기에 호열자라는 역병까지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대. 해방으로 희망으로 부풀었던 제주도민에게 자연은 시기를 했던 것인가? 주인공 안창세의 누나 안만옥의 친구 따알리아 혹시 기억나니? 간호사가 되려고 일본의 간호학교에 갔었잖아. 해방이 되고 나서 따알리아도 돌아왔는데, 따알리아는 간호사가 되어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았단다. 따알리아가 얼굴이 예뻐서 조천리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그 중에 정두길이라는 사람과 연애를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들에 알리기 부끄러워서 비밀 연애를 했더구나.

….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로 인해 남한과 북한이 나뉘어져 가는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어. 민심의 불만지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단다. 미군정은 그런 민심은 신경도 안 쓰고 강제 공출을 실시했단다. 가뭄으로 대흉년인데 공출까지 당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지. 전 인민위원회 청년 조직이 만든 민주청년동맹을 중심으로 강제 공출 반대 운동을 했단다.

 

2.

1947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어. 이렇게 상황이 어려워지자 제주도 곳곳에서 시위가 자주 열렸단다. 2 10일 최초로 미군정 반대 시위가 일어났어. 그러자 미군정은 병력을 증원했는데, 충청도에 있는 충남 경찰 부대 병력을 데리고 왔단다. 하지만 제주도민의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어. 1947 3 1일 삼일절 기념행사 때 제주도 전역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단다. 미군정은 이 집회를 모두 불법으로 간주하고 허가하지 않았어. 하지만 제주 곳곳에서 집회는 일어났단다. 조천리에서도 북소학교에서 3.1운동 기념행사를 했고, 집회 후에는 가두 시위를 했단다. 주요 내용은 미군정을 반대하고 남한단독정부를 반대하는 내용이었어. 다시 모인 주민들의 만세 소리를 듣고 다들 희망을 느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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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266)

극심한 불행과 좌절의 연속인 지난 일년이었다. 대흉년의 굶주림과 호열자에 짓눌린 죽음의 시간이었고, 강제공출, 복시환 사건, 친일파 재등용, 단독정부 추진 등등 미군정이 자행한 총체적 모순이 만들어낸 절망의 시간이었다. 해방의 감격과 미래에 대한 꿈이 참혹하게 짓밟힌 한해였다. 이제 사람들은 피폐했던 마음에 다시 활기가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환한 빛이 가득해졌다. 정두길은 감격이 북받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미군정을 반대하는 거대한 실체가 거기에 있었다! 정두길에게 그것은 소름 끼치는 강렬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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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 시위를 하는 주민들에 대해 미군정과 경찰은 강압적으로 맞섰고 폭행에 발포까지 하면서 민간인 여섯 명이나 죽였단다. 이런 평화적 시위가 죽을 만큼 잘못한 것인가. 제주도민들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단다. 이 사건은 더 시위로 이어지고, 총파업으로 응수했단다. 이때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경무부장 조병옥이라는 사람이 제주도에 왔단다. 하지만 그의 적반하장 언행은 일을 수습하는 것이 아니라 더 키우고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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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조병옥은 3.1절 발포 사건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정당방위였다고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심지어 사살은 내가 시킨 바다. 발포 명령자를 처벌하라고? 발포는 내가 명령했으니 처벌할 테면 나를 처벌하라라고 싸늘하게 비웃었다. 읍내 공무원들이 모인 시국 강연 사리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이었다. 너무도 놀라운 발언이어서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이 말이 도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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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강압 조치를 위해 조병옥은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경찰을 지원받아 증원시켰어. 제주도 경찰들은 제주도민들을 온건하게 대한다고 다 쫓겨났어. 육지에서 들어온 경찰들은 마구잡이고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서에 잡혀 들어오면 고문을 가했어. 이때 조천리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주로 청년들과 학교 선생님들이었어.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박경훈은 미군정의 이런 강압적인 조치에 실망을 하여 자진사퇴를 했는데, 후임으로 온 도지사가 완전 똘아이 같은 사람이었어. 극우주의자 유해진이라는 사람이 도지차로 취임했는데, 그는 서북청년단을 경호대로 데리고 제주도에 도착했단다. 그가 데리고 온 서북청년단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서북청년단은 서청이라고도 불렀는데, 북한에서 토지개혁 이후 땅을 빼앗기고 남한으로 이들로 공산당에 치를 떨던 이들이었는데, 완전 깡패나 다름없었어. 좌익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어. 그들 뒤에는 정부가 있었지. 그런 서청을 경호대로 제주도로 데리고 들어온 거야. 서북청년단은 도지사의 빽을 믿고 제주도 곳곳에서 횡포를 부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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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무자비한 테러 행위로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서북청년단의 존재가 제주 사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간 육지부의 각 도시, 각 읍면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대규모로 세력을 확장해온 서청은 좌파 인사와 집회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 백색테러의 대명서로 떠올랐다. 신임 도지사 유해진이 자신의 경호원으로 일곱명을 데리고 들어온 이래 서청 단원의 입도가 두어차례 이어져 지금은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충남 부대의 탄압에 시달리던 도민은 이제 그보다 훨씬 사나운 세력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승냥이가 나가더니 범이 들어온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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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 5, 미군정은 미군정 반대와 단독정부 반대 시위를 주도했던 민주청년동맹을 불법으로 지정했고, 얼마 안가 남조선노동당(남로당)도 불법으로 지정되었어. 내륙에서는 좌우합작에 노력했던 여운형의 암살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단다. 상황은 점점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단다. 여기까지가 <제주도우다> 2권의 이야기란다.

아직 4.3사건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도 열 받게 하는 장면들이 많이 있었단다. 이런 일을 직접 겪은 이들이 어찌 참을 수 있었을까.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참을 수 있겠지만, 그 폭압의 강도가 점점 세어진다면 결국에는 폭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해방된 지 불과 2년만에 이렇게 되다니…. 3권에서는 또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들이 일어날지… 3권도 조만간에 이야기해줄게.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천소학교에서 해방을 기념해 운동회가 열렸다.

책의 끝 문장: “! 비밀 엄수, 하겠습니다!”


해방 후 맞는 첫 봄, 신생의 기운이 제주섬 도처에서 샘솟듯 기운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새봄, 새 학교, 새 일꾼, 새 나라, 해 희망! 그 모든 것이 청년들, 소년들의 것처럼 생각되었다. 꽃들도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면서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침울했던 청년들의 가슴도 꽃망울 터지듯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렸다. 해방 직후 시작된 집단적 열광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전장과 탄광 등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지독한 절망감이 이제 급격하게 강력한 에너지로 바뀌어 그들을 추동했다. 그들은 생각했다. 지금은 귀향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상태라 취직난이 극심하지만 친일파들이 물러나면 자리가 생기리라고, 그러한 집단적 열광은 곳곳에 신설 중학원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증폭되었다. - P131

"일제의 노예 경험이 너의 마음에 무엇을 가르쳐주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무엇을 가르쳐주었는가? 그렇다, 내 나라, 내 땅을 다시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거하여 신탁통치 운운하면서 남북분단을 획책하고 있지만, 그것은 열화 같이 일어난 거족적 반대 투쟁에 의해 반드시 분쇄될 것이다." - P133

정두길 : 순태 너는 박헌영파지만 난 여운형이 맘에 들어. 그가 말하는 좌우합작에 나는 찬성이여.
부대림 : 나도 여운형이 좋아. 한독당 김구 선생의 노선도 좋아 보이고.
박털보 : 미국이나 소련이나 우리에겐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이여, 독립의 훼방꾼!
양순태 : 하아, 해방과 훼방! 거참 딱 맞는 말이네예. 해방군이 아니라 훼방꾼!
정두길 : 그래서 온 나라 온 백성이 이렇게 외치는 거 아니우꽈? (구호를 외치듯이 큰 소리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고, 조선 사람 조심하자!
- P162

조병옥은 3.1절 발포 사건에 대해 사과하기는커녕 정당방위였다고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심지어 "사살은 내가 시킨 바다. 발포 명령자를 처벌하라고? 발포는 내가 명령했으니 처벌할 테면 나를 처벌하라"라고 싸늘하게 비웃었다. 읍내 공무원들이 모인 시국 강연 사리에서는,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하듯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이었다. 너무도 놀라운 발언이어서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 이 말이 도민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 P296

무자비한 테러 행위로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던 서북청년단의 존재가 제주 사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그간 육지부의 각 도시, 각 읍면 지역에 조직을 만들어 대규모로 세력을 확장해온 서청은 좌파 인사와 집회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해 백색테러의 대명서로 떠올랐다. 신임 도지사 유해진이 자신의 경호원으로 일곱명을 데리고 들어온 이래 서청 단원의 입도가 두어차례 이어져 지금은 그 수가 수백명에 이르렀다. 충남 부대의 탄압에 시달리던 도민은 이제 그보다 훨씬 사나운 세력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승냥이가 나가더니 범이 들어온 격이었다. - P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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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우다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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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작년에 읽은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에서 서평으로 소개해주어 현기영 님의 <제주도우다>( 3)을 알게 되었단다. 현기영 님은 <순이 삼촌>이라는 단편소설로 유명하신 분인데, <순이 삼촌>은 제주도의 아픈 역사인 4.3 사건을 다룬 몇 안 되는 작품이란다. 그것도 4.3사건을 금기시하고 있던 군사독재 시절에 4.3사건을 다룬 소설을 내셨어. 당시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야.

오랫동안 4.3사건의 대표 소설이었던 <순이 삼촌>. 현기영 님은 이번에는 3권짜리 장편 소설로 4.3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어.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에서 <제주도우다>의 서평을 보고,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리스트에 올렸다가 이제서야 읽고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주려 한다. 책 제목 제주도우다우다입니다의 제주도 방언이란다. 오늘은 <제주도우다> 1권의 이야기를 해줄게.

 

1.

임창근과 안영미는 결혼한 지 2년이 갓 지난 신혼부부란다. 그들은 4.3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었어. 안영미는 제주도 출신으로 아직 생존해 계시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4.3사건을 경험하셔서 할아버지의 증언을 듣고자 했단다. 4.3사건이 발생한지 오래되었지만, 그 사건을 엮은 이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아픔이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 증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다시 상처를 줄 수 있어 조심스러웠단다. 안영미의 할아버지 안창세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자세하면서 친절하게 임창근과 안영미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셨단다.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 안창세의 나이는 열여섯이었고, 소설의 시작은 그로부터 5년 전인 1943년 제주 조창리라는 곳에서 시작된단다. 1943년이면 안창세의 나이는 열 하나였어. 1943년이면 일제 말기로 얼마 전 조정래 님의 <아리랑>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제의 강제 공출이 심해지고 징용, 징병 등으로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많이 끌려가던 그런 시기였단다. 열한 살 안창세와 누이 안만옥은 야학에 다녔는데, 그 야학은 불법이었단다. 이 야학이 일제에 발각되어 야학을 운영하던 야학 선생 이민하는 감옥에 갔다가 6개월만에 풀려났단다.

안창세의 아버지는 화물선을 이용하여 사업하고 있었는데, 1943년에는 일제에서 강제로 군수품을 나르게 하여, 군수 물자를 나르는 일을 하셨어. 그런데 어느날 큰 파도를 만나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이후 창세의 집은 살림은 무척 어려워졌단다. 강제 징용과 징병으로 조천리 마을은 텅텅 비다시피 했단다. 징용과 징병으로 빈 제주도에 만주에 있던 일본군인 관동군이 잔뜩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미군과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어. 진주만 사건이 이후 미군과 일본은 전쟁 중이었고,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진입한다는 소식이 있어서 관동군은 제주에 훈련 받고 있다가 여차하면 일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단다. 관동군의 군수품과 식량을 제주도민들이 대주어야 하다 보니, 제조도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단다. 뿐만 아니라 관동군이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안 미군은 전투기를 제주도로 보내 툭하면 폭격을 가했단다. 이로 인해 일본군뿐만 아니라 제주도 평범한 백성들도 많이 죽었어. 또 제주도와 일본을 오가는 여객선과 군용선도 공격을 받아 침몰되기도 했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물론이고 말이야.

안창세의 누이 안만옥은 해녀로 일하면서 집안 생계에 보탰단다. 만옥의 아주 친한 친구인 따알리아(본명 : 이순배)가 간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어. 그런데 어느날 간호사들이 전쟁에 징집되었다는 소문에 만옥도 친구 따알리아 걱정을 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해방이 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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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272)

면장을 마을 밖으로 내친 시위대는 예순살의 원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동쪽으로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만세동산으로 행진해갔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때 올라 만세를 불렀던 동산에 그 운동의 주역으로 징역살이를 한 김시범 선생을 모시고 오른 조천리민들의 가슴에는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조천리의 모든 항일운동의 원천은 만세동산이었고, 항일로 점철된 마을의 수난사는 언제나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런 만세동산에서 만세 소리가 다시 터져나온 것이다. 만세동산의 남쪽 사면을 빈틈없이 뒤덮은 군중은 강풍 맞은 대숲처럼 다 함께 온몸을 흔들면서 열렬하게 만세를 불렀다. 이십육년 만에 터져나오는 조선 독립 만세였다. 열세살 창세도, 열여섯살 행필도 땅에 두 발을 쿵쿵 구르면서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일제에 의해 억눌렸던 땅, 그 땅에서 기운이 솟아올라 그들의 몸에 넘쳐오르는 것 같았다. 온 세상, 온 우주가 환희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한층 가깝게 다가온 한라산을 향하여, 그 아래 질펀하게 펼쳐진 푸른 들판을 향하여, 저 푸른 희망을 향하여 함성을 지르고 또 질렀다. 휑하니 비어 있는 일주도로 또한 밝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질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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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방이 된 이후 징용, 징병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왔단다. 수십 년 일제와 친일파들에 억눌려 살았던 그들에게 이제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다들 기쁨을 만끽했단다. 해방이 되자마자 친일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일본군들도 사라졌단다. 조천리 사람들도 서로서로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민국 만세를 며칠 동안 목청껏 외쳤다고 하는구나. 아직 나라의 기틀이 없고 지방 자치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끌어가고 있었단다.  인민위원회는 청년들이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청년들은 자주 회의도 하고,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에 관한 책들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좋은 나라, 좋은 마을을 만들지 고민들을 했어. 멀리만 있던 희망이 현실로 다가오는 그런 기분이었어...

우리나라가 해방하는데 큰 공을 나라가 미국이었기에 미국에 고마움을 다들 느끼고 있었지. 그래서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의해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까지 아직 철수하지 않은 일본군에게 치안을 맡겼을 때도 이해하려고 했단다. 하지만 일본군이 다시 총칼 들고 활보하는 것을 보고는 누군가는 옛 기억에 치를 떨기도 했단다. 얼마 후 미군정이 제주도에 들어오면서 일본군을 완전히 빠져나갔단다. 그런데 안 좋은 소식도 들려왔어. 삼팔선을 긋고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이 통치를 한다는 거야. 그래도 당시만 해도 그 선이 모양이 바뀌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질 거라 생각지 못했을 거야. 한시적으로 그랬다가 우리나라 정부가 온전히 구성되면 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 징병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남으로 갈지 북으로 갈지 질문을 받았다고 하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남도 아이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고 했다는구나. 그렇지,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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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296)

우리 삼팔선이 그어진 중도 몰랐수다. 전쟁 중에 정신없이 살아서……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출국심사하는 맥아더 사령부 미군이 우리한테 물읍디다. 북조선으로 가겠느냐, 남조선으로 가겠느냐고. 허 참! 북조선, 남조선이라니, 난생처음 듣는 말 아니우꽈? 그래서 물어십주. 거 무슨 말이냐고, 북조선은 뭐고 남조선은 뭐냐고 하니까 삼팔선이 그어졌다는 거라예. , 그것참!”

그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해십주.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로 가겠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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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시대에 소학교에서는 일본어만 가르쳐서 어린 학생들 중에는 한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대. 그래서 학교에서 시급하게 가르치려는 것은 한글이었다는구나.

1권의 이야기는 4.3 사건이 일어나기 5년 전부터 해방 직후까지 제주 조천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끝이 났단다.. 광복 후 청년들이 스스로 나라를 이끌려는 모습도 보기 좋았단다. 우리나라 스스로 충분히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책에서 누군가 이야기한 것처럼 청년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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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청년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저 악독한 왜놈들을 위해 종노릇한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지긋지긋해여마씸. 식민지 청년이란 얼마나 가난하고 누추하고 비굴한 존재였수과? 우리는 채찍 맞아 돌아가는 팽이처럼 날이면 날마다 매 맞고 구박을 당해야만 했수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족쇄와 쇠사슬이 풀리고 해방이 왔수다. 금방 안세훈 선생님의 말씀, 참말로 옳은 말씀이우다. 이제 청년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시대란 말이우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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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비극적인 미래가 있을지 아마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거야. 그 비극적이고 슬픈 이야기는 조만간에 이어서 해줄게.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내 이름은 임창근, 나이는 서른두살, 전주가 고향이고, 한살 아래인 안영미는 제주가 고향인데, 우리 둘은 결혼한 지 이년 반밖에 안 된 풋내기 부부이다.

책의 끝 문장: 양쪽 광대뼈가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불거진 그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번졌다.


조천리 김해 김씨의 젊은 반역아 집단을 대표하는 최초의 인물은 솔뫼 김명식과 목우 김문준이었다. 솔뫼는 이론가였고 목우는 현장 활동가였다. 처음에는 서울의 같은 단체에서 함께 일하던 두 젊은이는 곧 헤어져 한 사람은 서울, 다른 한 사람은 일본 오사카로 활동 영역을 달리했다. 김명식은 <동아일보> 창간 역원이면서 1면의 논설란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한 열정적인 논객이었다. 자유가 무엇이고 평등이 무엇인지,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누구이고 맑스가 누구인지 아는 이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그 시절에 그의 논설은 새로운 사상에 목마른 청년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나중에 신문사를 떠나 정치조직운동에 투신한 그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세간의 이목을 모은 바 있었다. 그 사건으로 투옥된 그는 모진 고문과 옥독(獄毒)으로 병을 얻어 형기 중간에 출감했지만, 이미 몸은 형편없이 망가져 반신불수에 청각장애인이 되어 있었다. - P49

"조천리민 여러분! 그동안 우리가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수과?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렸수과? 부모 없는 설움보다 나라 없는 설움이 더 컸수다. 왜 놈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참말로 치가 떨립니다. 멸시당하고 매 맞고…… 아아, 그러나 이제는 해방이우다. 압제의 굴레에서 풀려났수다. 여러분, 고맙수다. 이 기쁜 자리에 우리를 불러 이렇게 축하해주시니 참말로 고맙수다. 하지만 우리가 축하받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어른님들이 있수다. 극악무도한 살인적, 강도적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다가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순국열사, 우리 마을 조천리가 낳은 영웅들, 그분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애도를 표합시다!" - P327

일제의 극심한 압박에 짓눌렸던 제주 사회는 일본군이 떠나자 도처에 신생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사방 초목도 억압에서 벗어난 듯 더욱 푸르고 푸른 바다, 푸른 하늘도 새로운 빛으로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밭마다 돌담 안에 가득 실린 조 이삭들이 탐스럽게 자라 풍작을 기약하고 있었고, 알뜨르, 진뜨르 비행장도 농토로 복구하여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었다. 전분 공장, 단추 공장, 방직 공장이 작업을 재개했고, 공습으로 파괴된 주정 공장은 복구 중에 있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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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역사 : 근대 -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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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라는 슬로건으로 역사 유튜브를 운영하는 황현필 님의 신간 <요즘 역사:근대>를 읽었단다. 이번 책은 구독자 100만을 기념하기도 하는 책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가끔 황현필 한국사 유튜브를 보는데, 몰랐던 새로운 내용을 알게 좋았단다. 역사라는 것이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황현필 님의 역사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 사관이 많이 공감이 되더구나. 아빠랑 아무래도 정치적 성향이 비슷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역사 사실을 합리적이고 이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의 생각에 다들 동의하지 않을까 싶구나.

이번에 새로 출간한 책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 스물한 가지를 뽑아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단다. 각각의 사건들은 아빠가 다른 책들을 통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해 준 것과 겹치기도 하더구나. 특히 작년에 읽은 강준만 님의 <한국 근대사 산책( 10)>과 올해 다시 읽은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 읽고 이야기해준 부분에서도 소개된 부분들이 많았어. 그래서 오늘은 지은이의 색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한 것들을 몇 개 발췌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단다.

 

1.

우리나라 근대를 여는데 중요한 인물 중에 한 명인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상반된 평가들이 많이 존재한단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근대화가 지연되면서 일제에게 뒤쳐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천주교 신자들 수천 명을 죽인 이력이 있고, 민비와 권력 다툼으로 인해 국력을 소진했다는 안 좋은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란다. 하지만 조선의 오랜 악습을 끝내는 공들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이 책에서는 그런 흥선대원군의 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어. 하지만, 무너져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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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물론, 국가적으로 천주교를 문란하다고 여긴 시대였다고 할지라도, 무려 8천여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를 학살하다시피 한 대원군을 마냥 존경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가를 새로 창업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오직 개인의 통치력만으로 시대적 병폐를 끊고, 이전 세상과의 긍정적인 단절을 이룬 인물로 대원군만 한 인물이 또 있던가?

첫째, 60여 년의 세도정치를 끝냈다.

둘째, 300년 만에 비변사를 해체했다.

셋째, 300년 만에 붕당정치를 끝냈다.

넷째, 300년 만에 경복궁을 재건했다.

다섯째, 400년 만에 서원을 제대로 철폐했다.

여섯째, 역사상 최초로 양반들에게 군포를 부과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원군이 30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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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서양 열강이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던 시절이었어. 프랑스가 쳐들어 온 병인양요에서는 프랑스군이 대패하고 돌아갔단다. 이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훔쳐서 달아났는데, 이것이 100여 년 뒤에 우리나라 고속철도와 연결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거야. 1995년 우리나라는 고속철도를 도입하면서 어느 나라와 손잡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줄 테니 프랑스의 TGV 도입을 제안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프랑스 TGV가 우리나라 고속철도로 들어오게 되었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프랑스는 <외규장각 의궤>를 한참 동안 돌려주지 않다가 2011년에 되어서야 영구임대 조건으로 우리나라도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좀 치사하구나. 나라 간 약속인데 제때 지키지 않고, 나중에도 조건부로 지켰으니 말이야.

미국이 쳐들어온 신미양요에서는 혈전 끝에 미국이 승리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조선 백성들의 저항에 대해 깜짝 놀라고, 승리를 했지만 강화도에서 퇴각하기로 결정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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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미군 대위 틸톤(Mclane Tilton)은 부인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남겼다.

나는 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한 섬에서 치른 전투만큼 끔찍한 기억은 찾아볼 수 없소.”

신미양요는 미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로저스 제독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음 날 퇴각을 결정한다. 조선 출정을 통해 미국과 로저스 제독이 얻어 낸 것은 없었다. 조선을 개항시키기는커녕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조차 받아 내지 못한 출정이었다. 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조선에 큰코다친 미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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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 시대 말기 우리나라 시스템은 이미 나라의 기틀로써 많이 무너진 상태였단다. 흥선대원군 마저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일본과 서양 열강이 우리나라에 물밀 듯 들어왔단다. 군인들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신 지식인들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지만 이내 실패하고, 부정부패한 지방 관리들에 불만이 쌓인 농민들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등 조선은 대혼란의 시기였단다. 정부도 무능력하여 나라 안의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자국의 힘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일본과 청나라의 군대까지 끌어들였단다. 이웃 나라 간의 우리 정부의 위험한 줄타기는 결국 한 나라의 왕비가 우리나라 궁궐 안에서 다른 나라인 일본의 칼에 맞아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단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왕은 겁을 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대피하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연출하였단다. , 창피하도다.

서재필이라는 사람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들어와 우리나라 스스로 독립해야 한다면서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했지만, 그가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하는구나.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동을 할 때도 조선 사람이 아닌 미국인으로 행동했다는구나. 그가 나중에 현충원에 안장되려고 할 때, 많은 역사가들이 그를 막았다고 하는데, 정부 기관은 좀더 심사를 하고, 많은 역사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할 것이지, 뭐 급하다고 그리 빨리 결정했는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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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서재필의 큰 오점은 따로 있다. 부유한 나라 미국 국적의 서재필이 가난한 나라 자신의 모국 조선에서 너무 큰 돈 욕심을 낸 것이다. 독립협회의 고문 자리를 받아들여 10년을 계약한 서재필은 독립협회가 문을 닫게 될 위기에 처하자, 남은 7 10개월의 급료를 지급하지 않으면 사퇴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황국협회까지 만들어 독립협의를 해산시키려 한 고종은 그깟 돈이 대수냐며 서재필의 남은 임기만큼의 급료를 모두 지급하였으니, 지금 돈으로 30억쯤이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만일 봉급을 두 배로 올려 주었다면, 서재필은 조선에 남아 있을 생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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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04)

1951년 서재필은 88세의 나이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눈을 감았다. 이후 미국에서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서재필의 묘소가 한국 뉴스에 나오자, 여러 기독교단체가 그의 유해 송환을 주도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서재필의 유해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에 안장되려는 순간, 한국의 역사가들은 현충원의 정문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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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조선의 수난 역사다시 일으킬 희망도 없이,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경술국치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단다. 500년 긴 역사가 이어진 나라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다른 나라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란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책임도 컸지만 하필 이 시절 왕이 무능한 고종이었던 이유도 컸을 거야. 그래도 고종이 일제로부터 강제로 폐위당한 이후에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등 왕다운 모습을 보였다는 평도 있는데, 이 책의 지은이 황현필 님은 고종은 끝내 무능했고,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황제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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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며 나라까지 잃었음에도 그는 대단히 풍족하게 살았다. 국권피탈기 고종의 행동들은 그저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된 후 고종의 독립운동이란 것들은 모두 자신의 황제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종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최소한 잃어버린 강토의 회복과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만백성의 자주성 회복을 천명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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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로 간단히 이야기를 마치려고 해. 앞서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그 동안 다른 책을 통해 한 이야기들과 중복이 되어서 짧게 했어. 황현필 님의 책들이 그렇듯 한 가지 소재에 대해서 짤막하게 요점 정리해서 말씀을 해주셔서 읽기 편했단다. 너희들 같은 청소년들도 읽으면 좋을 것 같았어. 문득 학교 교과서에 근대사가 어떤 식으로 기술했는지 궁금하구나. 한번 너희 교과서를 훑어봐야겠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할게.

 

PS,

책의 첫 문장: 1800,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책의 끝 문장: 옆집 아저씨가 아무리 잘났어도 내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존중하듯이 다소 아쉬운 역사라 할지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안동 김씨도 나름 계산을 했다고 한다.
왕이 되기 전, 어린 이 이명복의 연이 끊어져 어느 안동 김씨의 집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겁도 없이 대문을 두들기며 연을 달라고 하든지 그럴 용기가 없다며 차라리 포기할 텐데, 이명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 않아서 하루 종일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안동 김씨는 이명복의 우유부단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왕으로 세워 설령 그의 아버지 이하응이 살아 있는 대원군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껏 이하응의 처신으로 보아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P15

한 사람만 더 언급하자면 동학을 진압한다고 핑계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을 당시의 일본군 사령관이 오시마 요시마사다.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이 낯선 이름은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얼마 전까지 일본의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다. 그리고 전범임에도 사형을 면하고 일본의 총리까지 역임했던 기시 노부스케도 조슈번 출신이자 아베 신보의 외조부다. 당연히 아베 신조 역시 조슈번 출신이고,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정한론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이었으니 최근 일본의 정치 권력을 잡은 주류들의 사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P96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기어이 막아선 이순신.
우리 강토를 짓밟은 외적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고, 침략자의 후손들이 우리의 후손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량해전을 설계했던 이순신.
이순신은 비록 노량에서 전사하지만, 그는 일본 에도막부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에도막부와 조선은 250년의 평화를 유지했으니, 이순신의 노력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에게 짓밟히고 에도막부에 눌려 있던 자들이 에도막부를 몰아내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정한론이 다시 대두됐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한반도가 다시 침략당했다.
- P97

1592년 임진왜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일본이 외세와 치른 전쟁들이다. 모두 일본의 선제공격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선제공격에 앞서 일본은 단 한 번도 전쟁에 대한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다.
일본인이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무사도, 즉 사무라이 정신은 형식이자 겉치레에 불과했다. 사무라이는 자신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이었을 뿐, 그들 내면의 뿌리에는 닌자 정신이 깔려 있던 것이다.
- P151

민비는 임오군란 당시 도망 중에 만난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신처럼 받들고 살았다. 성리학 국가 조선의 궁궐을 무당이 마음껏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진령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고, 무당의 결정으로 벼슬이 주어지기도 했다. 민비가 세자의 건강을 기원하며 금강산 1만 2천 봉마다 쌀을 뿌린 것 또한 진령군의 진언 때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민비가 시해되기 전까지 조선의 서열은 고종 위에 민비가 있었고, 민비 위에 무당 진령군이 있었다. - P176

회고의 애국계몽운동단체는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였다.
회장 윤치호와 부회장 안창호를 중심으로 구성된 신민회는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여 교육과 산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안창호는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고, 이승훈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기호흥학회, 서북학회, 호남학회 등 각 지역에 학회가 설립된 것도 신민회의 역할이 컸다. 이 밖에 신민회의 주도로 평양에 자기회사가 설립되었고, 대국에는 태극서관이라는 출판사도 설립됐다.
신민회의 또 다른 특징은 비밀결사적 성격이 짙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신민회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다. 비밀결사의 앞뒤 연락책 정도만 알 뿐이었다. 대신 비밀조직인 만큼 신민회는 일제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계속 준비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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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공포는 없으신가요?”

자신은 없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사람은 최초로 죽음학을 했고 죽음에 대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정작 자기가 암에 걸리고는 감당을 못 했어. 그것을 본 한 기자가 물었지.

당신은 임종하는 사람을 지켜보며 그렇게 많은 희망을 줬는데 왜 정작 당신의 죽음 앞에서 화를  내고 있느냐?’

로스가 이렇게 답했다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동물원 철창 속에 있는 호랑이였지. 지금은 아니야.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나한테 덤벼들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

전두엽으로 생각하는 죽음과 척추 신경으로 감각하는 죽음은 이토록 거리가 멀다네.”

 

(44-45)

인터뷰가 뭔가? Inter. 사이에서 보는 거야. 우리말로 대담이라고도 번역하는데, 대담은 대립이라는 뜻이야. 대결하는 거지. 그런데 말 그대로 서로 과시하고 떠보고 찌르면 거기서 무슨 진실한 말이 나오겠나. 위장술밖에 더 나오겠어? 군인들이 전투할 때 왜 위장복을 입겠어살기 위해서 감추고 색을 바꾸는 거지. 인터뷰는 그래선 안 되네. 인터뷰는 대담(對談)이 아니라 상담(相談)이야.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수지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55-56)

내가 그 사람에게 물었지.

자네가 가장 잘 아는 게 뭔가?’

꿀벌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꿀벌을 잘 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만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밥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74-75)

차이는 있어.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신호가 있다네. 파이브 어 클락 새도(five o’clock shadow)라고 들어봤나? 샐러리맨들이 오후 다섯시가 되면, 깨끗했던 턱 밑이 파래져. 퇴근 무렵, 면도 자국에서 수염이 자라 그림자가 생기네. 그게 오후 다섯시의 그림자야. 매일 쳇바퀴 돌 듯 회사에 나와 하루를 보낸다. 문득 정식 차리면 오후 다섯시. 수염 자국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지면 우수가 차오른다네. 오늘 뭘 했지? 내일도 또 이렇겠지. 다시 전철을 타고, 술집에 가고, 이윽고 집에 돌아가 아내를 만나고….. 그게 샐러리맨의 고독이지.”

오후 다섯시. 남자의 얼굴에 수염 그림자가 생길 때, 여자는 립스틱 자국이 지워진답니다.”

 

(125-126)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로 사는 거라네. 떼 지어 몰려다니는 거지. 그게 어떻게 인간인가? 그냥 무리 지어 사는 거지.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남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 사이에 interview가 있는 것처럼.”

 

(144)

밤사이 내린 눈은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버린 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 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막이 내렸다 올라가는 건 일생 중에 그렇게 많지 않거든. 외국 여행을 한다든지, 수술했다 마취에서 깨어난다든지……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 거지. 보통 쿠데타가 밤에 일어나잖아. 자고 일어났는데 탱크가 한강은 넘어 세상이 싹 달라진 거야. 밤에 내린 첫눈이 그래. 쿠데타야. 오래 권력을 누리지 않고 바로 사라지는 쿠데타. 오래 있어 봐. 눈 녹으면 지옥이지. 곧 사라지니까 그만큼 좋은 거야. 아름다운 쿠데타.”

 

(168)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 목자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자를 바라본 거지.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 거야.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길 잃은 양은 그런 존재라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종교조차 문학이었다네. 신학에서 자를 빼면 시학이잖아. 보들레르도 니체도 나는 성경을 읽는 마음으로 읽었지.”

 

(171)

천재가 있으면 특별 교육시켜야 해요. 특권이 아니에요. 오히려 불쌍한 애들이지. 하나님이 인간들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쓸모를 못 찾은 놈에게 눈곱 하나 떼서 붙여주면 그 아이가 화가가 되고, 귀지 좀 후벼서 넣어주면 그 아이가 음악가가 되는 거예요.

너 세상 나가면 쓸모없다 조롱받을 테니, 내 눈곱으로 미술 해먹어라. 너 세상 나가면 이상한 놈이라고 왕따 당할 테니 내 귀지로 음악 해먹어라.’

그게 예술가예요. 예수가들은 그 재능 빼면 세상 못 살아요. 아무것도 못해서 범죄자 돼요. 그러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에요. 학교 만들어주는 게 자비에요.’

그 얘기 듣고 사람들이 웃고 잠시 침묵했어. 총리가 그럼, 통과된 걸로 알겠습니다하고 땅땅땅 때린 거야. 그 순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생겨났다네. 한예종 아이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오면 내가 그래.

너희들은 five minute kids, 5분 동안 태어난 아이들이야.’

 

(191)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 다 그 제자들이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225)

그렇지. 갑작스럽게. 물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 영적 판, 인화지가 있어야 셔터를 눌렀을 때 빛이 담기지. 종이 넣고 아무리 셔터 눌러봐야 거기에 뭐가 나와. 0.001초의 셔터를 끊어주는 그 짧은 순간에 감광지에 비치는 모습, 그게 영의 세계야. 순식간에 다른 세상을 보는 거지. 그런데 내 딸 민아처럼 하나님을 진실로 믿으면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머무는데, 나는 미끄러져서 계속 땅에 떨어져. 그래서 영성이 아니라 땅 지()자 지성이 되는 거야. 땅의 성이지.”

 

(245-246)

제 기억으로는 88올림픽 때 굴렁쇠 소년이 반바지를 입고 굴렁쇠를 굴리며 갈 때, 사이렌이 울렸던 것 같습니다.”

그 제목이 silence였지. 내가 올림픽에서 수십 억 지구인들에게 들려준 것도 바로 그 침묵의 소리야. 꽹과리 치고 수천 명이 돌아다니던 운동장에 모든 소리가 딱 끊어지고 어린애 하나가 나올 때, 사람들은 듣고 본 거야. 귀가 멍멍한 침묵과 휑뎅그레한 빈 광장을…… 그게 얼마나 강력한 이미지였으면, 그 많은 돈 들여서 한 공연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시끄럽던 운동장이 조용해지고 소년이 굴리던 굴렁쇠만 기억들을 하겠나. 그게 어린 시절 미나리꽝에서 돌 던지며 정적에서 나온 이미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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