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적 사고’였다. 표를 준 유권자들도 그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의도’가 아니라
‘본성’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도자기가 깨지는 것은 그의 의도와 무관한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사회적 위계(位階)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을 속이지 않았다. 검찰총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를 정확히 보려 하지 않았던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으로 윤석열의 결함을 감춰준 언론에
속은 시민도 많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21)
플라톤의 잘못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미덕인지 아는 철학자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따지지 말자.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권력을 쥐어줄 방법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상속하는 왕정국가에서는 생물학적 우연의
축복을 받아야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귀족정 국가에서도 높은 신분을 타고나지 않으면 권좌가 접근할 수
없다. 민중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공화정도 다르지 않다. 철학자가
선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지혜롭든 어리석든, 표를
많이 받는 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22)
포퍼의 말처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는 없다. 민중은 선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기도 하지만 사악하고 무능한 인물을 선택하기도 한다. 250년 전만 해도 국민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국가는 미합중국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의 문명국가는 대부분 민중이 보통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한다.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만 뽑은
나라는 없다.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사악하면 무능한 인물도 뽑았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똑같이 민주주의를 하는데도 정부 수준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권력자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서슴없이 악을 저지른 나라도 있지만 어떤 권력자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나라도 있다.
(30)
아이히만 재판 보고서 격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썼다. 보통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비속함’이 아렌트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고 본다. 아이히만은 나치 핵심
권력자들의 홀로코스크 기획 회의에 참석했고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법정의 아이히만은 사악한 살인자라기보다는 지극히 비속한
공무원이었다. 아렌트는 그의 잘못이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객관화’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적인
무능’이라고 했다.
(43)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롱당해야 한다면,
조금의 약점만 드러나도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정치검찰과
보수언론은 말했다.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수치와 불명예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정의니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노무현과
노회찬과 조국의 최후를 보았지 않았는가!”
(44)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도 완전무결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움츠리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자연이 준 본성에 따라 사회적 미덕과
선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들과 손잡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일의 세상을 오늘보다 무엇 하나라도 낫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윤석열을 보면서 마음에 새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 악의
지배를 연장한다는 것을. 부족한 그대로, 서로 다른 그대로
친구가 되어 불완전한 벗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나아가야 악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77)
국민은 이념적 균질 집단이 아니다. 국민을 균질
집단으로 만들면 사회는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 일가의 북한처럼 된다. 국민은 복잡한 이질
집단이다. 사람마다 정치적 이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다. 어떤
정책도 모든 국민의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헌법과 법률에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93)
한국의 신문 방송은 대부분 사회의 공론장이 아니라 기득권 집단의 이념을 전파하고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정보유통 회사가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보수 세력의 선전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서술이다. 도덕적 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니 언론기업과 언론인을 비난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그런 언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겠다. 현실이 그렇다고 말할 따름이다.
(96-97)
기자는 사회에 책임을 느끼는 지식인이 아니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기자는 사는 게 괴롭다. 월급을 받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회사원일 뿐인데 비리를 폭로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인권에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하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기자가 자본과 정치권력의 간섭과 횡포에 맞서 언론 자유와 편집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시대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 것처럼 보인 때가 잠깐 있었을 뿐이다.
(98)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 규범을 무시한다. 무엇보다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이권을 따고 광고주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 대주주의 대리인이 보도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기자의 독립성이나
편집의 자율성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념적 균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지키지 않는다. 윤석열과 국힘당에 불리한 사실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보도한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가 윤석열 정부와 정치검사의 비리를 보도하면 그 비리를 심층 취재하는 게 아니라 보도한 기자의 신상을 털고
보도 내용을 공격해 신뢰성을 훼손하는 데 집중한다.
(142)
연구개발 예산을 과격하게 줄이면 현장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극단적인 경우 진행 중인 연구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 시작하려면 연구를 접어야 한다. 연구원을 해고하고 신규 인력 채용을 포기해야 한다. 연구사업단에서
학위 취득 과정을 병행하는 대학원생도 내보내야 한다. 대학과 국가연구 기관뿐만 아니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삭감 조처는 기묘하게도 바이오,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디지털콘텐츠 등 소위 ‘4차 산업혁명’ 핵심 분야를 집중 타격했다.
(147)
그는 위험한 스타일의 권력자다. 사악한 권력자보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더 위험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현자라고 확신한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정반대 선택을 주저 없이 한다. 비판하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가족과 주변까지 괴롭힌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154-155)
윤석열은 전두환과 비슷한 데가 많아서 평행이론이 나올 만하다.
전두환은 군부 쿠데타로, 윤석열은 검찰 쿠데타로 직속상관을 공격해 권력을 차지했다. 전두환이 극소수 정치군인을 권력의 핵심으로 기용해 권력을 운용한다. 둘
모두 야당을 불순세력이라 여기며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두 사람 모두 좌파가 장악한 언론을 정상화해 여론을 바로잡겠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부부와 함께 민중의 조롱을 받는다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크게 다르다. 전두환은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윤석열은 기껏해야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괴롭힐 뿐이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한다. 윤석열은 전두환만큼 기괴하지만, 힘과 능력은 전두환에 닿지 못한다.
(165-166)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친일파라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무지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후쿠시마의 사고 원전에서 나온 핵 오염수에 어떤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오염수의 유해성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과 해양 방류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켜 ‘1 더하기 1을 백이라고 한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심각한 다툼이 있는 과학적 쟁점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논리의 규칙에 따라 토론하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머저리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머저리면서.
(174)
집단은 양심이 없다. 개인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지만
집단은 그렇지 않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가장
크고 강력한 집단이 국가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 정부를 구성하는 권력자들의 책무는 국가의 이기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힘과 능력만 있으면 국가는 무엇이든 한다. 미국은 19세기에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힘으로 빼앗았다. 20세기에는 베트남을
침략했고 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해 칠레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 21세기에는 국내법으로
국제무역의 규칙을 짓밟는다. 특별히 나쁜 국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
앞서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이나 냉전 시대 소련은 더한 짓을 했다. 러시아나 중국이 미국처럼 힘이
세다면 더 못된 행동을 할 것이다.
(182)
윤석열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로는 헌법을 읽지 않은 듯하다.
헌법에 관한 상식이 없다.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해 보라고?
국군 통수권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는 국방부의 육사를 앞세워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철거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 철거는 육사 교정의 조경 사업이 아니다. 육군과 육사의 정체성과 헌법 해석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고 국민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으며 반대자와 토론하지 않았다. 그는 ‘방구석 여포’다.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앞장서는 게 아니라 참호에 숨어서 ‘돌격
앞으로’만 외친다. 논쟁을 벌일만한 철학이 없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도 없으며 불리한 싸움에서 선봉을 맡는 배짱 또한 없다. 박수칠 준비를 하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의미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어퍼컷을 휘두를 뿐이다.
(191)
사람은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 능력은 일반지능, 전문 지식, 업무 자세, 타인을
대하는 태도, 전략적 사고 능력, 경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A급이라고 하자. A급은 A급을
알아보고 좋아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흔하다.
A급 책임자가 전권을 쥐면 주로 A급 인재를 기용한다. 그러면
그 A급들이 또 다른 A급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B급을 조직 책임자로 임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B급은 A급을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B급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B급 책임자는 기껏해야 B급을 기용한다. 아부를
잘하면 C급, D급도 마다하지 않는다. A급은 기용하려고 해도 어렵다. A급 능력자는 B급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조직은 C급 이하 등외까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219-220)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조국 자신도 모른다. 길든
짧든, 그는 그 시간에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울 것이다.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는지, 그가 불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는 있다. 조국과 윤석열의 운명이 완전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둘의 싸움을 둘 모두 명예롭게 끝낼 방법은 없다.
윤석열에게 조국은 이재명과 다른 존재다. 윤석열의 시선으로 보면 이재명은 ‘아직 죽이지 못한 자’다. 싸움을
멈추고, 공존을 시도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죽였던 자’다. ‘이미
죽였던 자’와는 공존할 수 없다. 조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살아난 자’는 자신을 죽였던 자를 죽여야 살아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석열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이재명이 아니라 조국이다.
(239)
민주당은 시대정신을 짊어진 유일한 정당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선거를 할 때마다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시대정신이 선거 때마다 새로 나올 수는 없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추구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가치나 목표라야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에 정치인
김대중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그것보다 높고 귀한 가치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254)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만남’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 인간 윤석열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본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더닝-크루거’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람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운명이 그를 덮친다. 자신에게 왜 그런 운명이 닥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