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은 정치적 사고였다. 표를 준 유권자들도 그가 이토록 무지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 ‘의도가 아니라 본성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도자기가 깨지는 것은 그의 의도와 무관한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를 정치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사회적 위계(位階)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이루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 국민을 속이지 않았다. 검찰총장으로서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그를 정확히 보려 하지 않았던 유권자가 적지 않았다. 화장과 조명으로 윤석열의 결함을 감춰준 언론에 속은 시민도 많았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21)

플라톤의 잘못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한 것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미덕인지 아는 철학자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따지지 말자.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권력을 쥐어줄 방법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권력을 상속하는 왕정국가에서는 생물학적 우연의 축복을 받아야 통치자가 될 수 있다. 귀족정 국가에서도 높은 신분을 타고나지 않으면 권좌가 접근할 수 없다. 민중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공화정도 다르지 않다. 철학자가 선거에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지혜롭든 어리석든, 표를 많이 받는 자가 권력을 차지한다.

 

(22)

포퍼의 말처럼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는 없다. 민중은 선하고 유능한 사람을 뽑기도 하지만 사악하고 무능한 인물을 선택하기도 한다. 250년 전만 해도 국민이 권력자를 선출하는 국가는 미합중국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촌의 문명국가는 대부분 민중이 보통선거로 권력자를 선출한다. 선하고 유능한 권력자만 뽑은 나라는 없다.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사악하면 무능한 인물도 뽑았다. 민주주의 선거제도의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똑같이 민주주의를 하는데도 정부 수준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권력자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서 서슴없이 악을 저지른 나라도 있지만 어떤 권력자도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막는 나라도 있다.

 

(30)

아이히만 재판 보고서 격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악의 비속함(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썼다. 보통 악의 평범성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비속함이 아렌트의 생각을 더 잘 표현한다고 본다. 아이히만은 나치 핵심 권력자들의 홀로코스크 기획 회의에 참석했고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법정의 아이히만은 사악한 살인자라기보다는 지극히 비속한 공무원이었다. 아렌트는 그의 잘못이 자기 머리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악을 행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객관화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아렌트는 이것을 전적인 무능이라고 했다.

 

(43)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롱당해야 한다면, 조금의 약점만 드러나도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정치검찰과 보수언론은 말했다.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수치와 불명예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정의니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노무현과 노회찬과 조국의 최후를 보았지 않았는가!”

 

(44)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도 완전무결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움츠리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자연이 준 본성에 따라 사회적 미덕과 선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들과 손잡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일의 세상을 오늘보다 무엇 하나라도 낫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윤석열을 보면서 마음에 새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 악의 지배를 연장한다는 것을. 부족한 그대로, 서로 다른 그대로 친구가 되어 불완전한 벗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나아가야 악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77)

국민은 이념적 균질 집단이 아니다. 국민을 균질 집단으로 만들면 사회는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 김일성 일가의 북한처럼 된다. 국민은 복잡한 이질 집단이다. 사람마다 정치적 이상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다르다. 어떤 정책도 모든 국민의 동의를 얻지는 못한다. 민주주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헌법과 법률에 정당 설립의 자유와 복수정당제를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93)

한국의 신문 방송은 대부분 사회의 공론장이 아니라 기득권 집단의 이념을 전파하고 그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정보유통 회사가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보수 세력의 선전기관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서술이다. 도덕적 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니 언론기업과 언론인을 비난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그런 언론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겠다. 현실이 그렇다고 말할 따름이다.

 

(96-97)

기자는 사회에 책임을 느끼는 지식인이 아니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기자는 사는 게 괴롭다. 월급을 받고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회사원일 뿐인데 비리를 폭로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인권에 정의를 위해 싸우라고 하니 난처하기 이를 데 없다. 기자가 자본과 정치권력의 간섭과 횡포에 맞서 언론 자유와 편집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시대는 지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시대는 있지도 않았다. 그런 것처럼 보인 때가 잠깐 있었을 뿐이다.

 

(98)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 규범을 무시한다. 무엇보다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유착해 이권을 따고 광고주를 위해서 기사를 쓴다. 대주주의 대리인이 보도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한다. 기자의 독립성이나 편집의 자율성 같은 것은 안중에 없다. 이념적 균형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도 지키지 않는다. 윤석열과 국힘당에 불리한 사실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보도한다. 유튜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탐사보도 전문 기자가 윤석열 정부와 정치검사의 비리를 보도하면 그 비리를 심층 취재하는 게 아니라 보도한 기자의 신상을 털고 보도 내용을 공격해 신뢰성을 훼손하는 데 집중한다.

 

(142)

연구개발 예산을 과격하게 줄이면 현장에 여러 문제가 생긴다. 극단적인 경우 진행 중인 연구 사업을 멈추어야 한다. 시작하려면 연구를 접어야 한다. 연구원을 해고하고 신규 인력 채용을 포기해야 한다. 연구사업단에서 학위 취득 과정을 병행하는 대학원생도 내보내야 한다. 대학과 국가연구 기관뿐만 아니라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삭감 조처는 기묘하게도 바이오,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디지털콘텐츠 등 소위 ‘4차 산업혁명핵심 분야를 집중 타격했다.

 

(147)

그는 위험한 스타일의 권력자다. 사악한 권력자보다 어리석은 권력자가 더 위험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는 현자라고 확신한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원하는 것을 무시하고 정반대 선택을 주저 없이 한다. 비판하는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 가족과 주변까지 괴롭힌다.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만족감을 느낀다.

 

(154-155)

윤석열은 전두환과 비슷한 데가 많아서 평행이론이 나올 만하다. 전두환은 군부 쿠데타로, 윤석열은 검찰 쿠데타로 직속상관을 공격해 권력을 차지했다. 전두환이 극소수 정치군인을 권력의 핵심으로 기용해 권력을 운용한다. 둘 모두 야당을 불순세력이라 여기며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

두 사람 모두 좌파가 장악한 언론을 정상화해 여론을 바로잡겠다면서 표현의 자유를 탄압한다. 부부와 함께 민중의 조롱을 받는다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크게 다르다. 전두환은 물리적 폭력으로 반대세력을 고문하고 죽였지만 윤석열은 기껏해야 검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괴롭힐 뿐이다. 그런 것만 가지고는 국민의 저항을 억누르지 못한다. 윤석열은 전두환만큼 기괴하지만, 힘과 능력은 전두환에 닿지 못한다.

 

(165-166)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태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친일파라 그런다고 하지만 나는 무지성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후쿠시마의 사고 원전에서 나온 핵 오염수에 어떤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지 모른다. 오염수의 유해성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과 해양 방류의 윤리적 쟁점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그러면서도 핵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리켜 ‘1 더하기 1을 백이라고 한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심각한 다툼이 있는 과학적 쟁점을 그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논리의 규칙에 따라 토론하는 게 아니라 의견이 다른 사람을 머저리라고 비난한다. 자신이 머저리면서.

 

(174)

집단은 양심이 없다. 개인은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지만 집단은 그렇지 않다. 집단은 크면 클수록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가장 크고 강력한 집단이 국가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와 정부를 구성하는 권력자들의 책무는 국가의 이기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힘과 능력만 있으면 국가는 무엇이든 한다. 미국은 19세기에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힘으로 빼앗았다. 20세기에는 베트남을 침략했고 군사쿠데타를 배후조종해 칠레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민주정부를 전복했다. 21세기에는 국내법으로 국제무역의 규칙을 짓밟는다. 특별히 나쁜 국가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미국에 앞서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이나 냉전 시대 소련은 더한 짓을 했다. 러시아나 중국이 미국처럼 힘이 세다면 더 못된 행동을 할 것이다.

 

(182)

윤석열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로는 헌법을 읽지 않은 듯하다. 헌법에 관한 상식이 없다. 어떤 게 옳은지 생각해 보라고? 국군 통수권자가 할 말이 아니다. 그는 국방부의 육사를 앞세워 독립전쟁 영웅들의 흉상을 철거하면서 책임을 회피했다. 독립전쟁 영웅의 흉상 철거는 육사 교정의 조경 사업이 아니다. 육군과 육사의 정체성과 헌법 해석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도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고 국민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으며 반대자와 토론하지 않았다. 그는 방구석 여포.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앞장서는 게 아니라 참호에 숨어서 돌격 앞으로만 외친다. 논쟁을 벌일만한 철학이 없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도 없으며 불리한 싸움에서 선봉을 맡는 배짱 또한 없다. 박수칠 준비를 하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의미 없는 포효를 내지르며 어퍼컷을 휘두를 뿐이다.

 

(191)

사람은 능력이 저마다 다르다. 능력은 일반지능, 전문 지식, 업무 자세, 타인을 대하는 태도, 전략적 사고 능력, 경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A급이라고 하자. A급은 A급을 알아보고 좋아한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흔하다. A급 책임자가 전권을 쥐면 주로 A급 인재를 기용한다. 그러면 그 A급들이 또 다른 A급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B급을 조직 책임자로 임명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B급은 A급을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B급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B급 책임자는 기껏해야 B급을 기용한다. 아부를 잘하면 C, D급도 마다하지 않는다. A급은 기용하려고 해도 어렵다. A급 능력자는 B급 밑에서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조직은 C급 이하 등외까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219-220)

자유로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조국 자신도 모른다. 길든 짧든, 그는 그 시간에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울 것이다. 어떤 운명이 그를 기다리는지, 그가 불탄 자리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는 있다. 조국과 윤석열의 운명이 완전하게 엇갈린다는 것이다. 둘의 싸움을 둘 모두 명예롭게 끝낼 방법은 없다. 윤석열에게 조국은 이재명과 다른 존재다. 윤석열의 시선으로 보면 이재명은 아직 죽이지 못한 자. 싸움을 멈추고, 공존을 시도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죽였던 자. ‘이미 죽였던 자와는 공존할 수 없다. 조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살아난 자는 자신을 죽였던 자를 죽여야 살아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석열의 가장 위험한 적은 이재명이 아니라 조국이다.

 

(239)

민주당은 시대정신을 짊어진 유일한 정당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선거를 할 때마다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는 없다. 시대정신이 선거 때마다 새로 나올 수는 없다. 여러 세대에 걸쳐 추구해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가치나 목표라야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에 정치인 김대중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시대정신을 제시했다. 그것보다 높고 귀한 가치를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254)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만남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와 인간 윤석열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대통령직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 객관화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본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더닝-크루거의 존재를 입증하는 사람이다. 너무 어리석어서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운명이 그를 덮친다. 자신에게 왜 그런 운명이 닥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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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balove 2024-07-02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시민 작가의 말이 모두 옳아서 슬픕니다

bookholic 2024-07-02 22:16   좋아요 0 | URL
네.. 너무 슬픈데, 너무 오래 남았습니다. ㅠㅠ
 















(123-124)

세상에 불평객이 없는 때가 없사외다. 세종대왕께옵서는 요순과 같으신 성군이거니와 재위한 지 30여 년에 문()을 높이고 무()를 가벼이 하시오니 태평성대에 그럴 만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무신의 불평은 면치 못할 일이요, 또 재야의 인재도 문장재시는 뜻을 이루기 쉽되 궁시(弓矢)를 잘하는 사람은 일생에 달할 길이 없으니 자연 문인은 교만하여지고 무사는 불평하게 되는 것이외다. 또 문신 중에는 자기의 현재 처지를 불만스럽게 여겨 매양 불평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이러한 무리를 가리켜 불평객이라 하는 것이외다하고 한명회가 좋은 구변으로 기운차게 말하는 동안 수양대군은 혹은 눈을 감고, 혹은 눈을 뜨고, 혹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혹은 무릎을 치며 명회의 말에 탄복하는 기색을 보였다.

 

(275)

당시 이름 높던 집현전 팔학사 중에서 경학과 인격으로는 박팽년이 으뜸이요, 책론으로는 하위지가 으뜸이요, 시로는 기개가 으뜸이요, 사학으로는 유성원이 으뜸이요, 어학과 교제와 모략으로는 신숙주가 으뜸이요……. 이처럼 다 각기 특색이 있는 가운데 찬란한 문장과 풍류 해학으로는 성삼문이 으뜸이었다.

 

(337-338)

그러나 그까짓 것은 수양대군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무리가 근심되는 것은 권력을 잡은 시초가 아니요, 옛 권력이 쇠할 만한 때인 까닭이다. 수양대군의 눈앞에는 끝없는 영화가 있다. 천추만세에 끊임없이 이어질 권세가 있다(왕의 자리만 얻고 보면 말이다). 인사(人事)의 무상(無常)을 깨닫기에는 수양대군은 너무도 젊고 너무도 순조로웠다. 건강하고 젊고(사십이면 한창이 아닌가) 뜻하는 바를 못 이루어 본 적이 없는 바에 순풍에 돛을 달고 물결 없는 한바다로 선유하는 것 정도밖에는 인생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런 수양대군에게 반성이 있을 리 없고, 후회가 있을 리 없으며, 무상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것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얼마간 더 인생의 어리석은 경험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이 쓰라린 무상의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는 10년이 얼마 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술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권세를 영원한 것으로 여겨 전력을 다하여 못할 것 없이 이것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454-455)

김질이 아무쪼록 자기는 빼고, 또 왕이 듣기 싫어할 말을 빼가면서 지루하게 전말을 말하는 것을 삼문이 고개를 흔들어 막으면서 그만해라, 네 말이 다 옳지마는 좀 깐깐하다하고 다시 왕을 바라보며 더 말할 것 있소. 상왕께옵서 춘추가 높으셔서 선위하신 것도 아니고 잘못하심이 있어서 하신 것도 아니시오. 나으리라든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같은 불충한 무리들에게 밀려서 선위를 하옵신 것이니까 원하는 것은 인신소당위(人臣所當爲)가 아니오? 다시 물을 것 있소. 그래서 오늘 나으리 부자를 죽여서 천하의 공분을 풀려고 하였더니 일이 뜻 같지 못하여서 이 꼴이 되었소. 마음대로 하시오하고 왕을 상감이라고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른다.

 

(458-459)

이때에 신숙주가 무슨 은밀한 말을 아뢰려고 왕의 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삼문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른다.

이놈 숙주야, 네가 나와 함께 집현전에 입직하였을 적에 영릉께옵서 원손을 안으시고 뜰에서 거니시며 무어라고 하시더냐. 내가 천추만세한 후에라도 너희는 이 아이를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든 너는 벌써 잊어버렸단 말이냐. 아무리 사람을 믿지 못한다 하기로 네가 이다지 극흉극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놈아, 네가 대의를 저버렸거늘 천벌이 없이 부귀를 누릴 듯 싶으냐.”

 

(470-471)

삼문은 붓을 들어,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 한 편을 지어 쓰고, 이개도 붓을 들어,

 

가마귀 눈비 맞아 흰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하였고, 박팽년은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腔)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좇을 건가

 

하였다.

 

(513-514)

이 지방은 노산군이 손수 쓴 것이다. 첫머리에 삼생부모영가(三生父母靈駕)’라고 썼다. 이것을 쓸 때에 가장 간절히 생각난 이는 조부 되시는 세종대왕과 아버님 문종대왕이시거니와, 금생에 한 번 대면해 보지도 못하고 또 일전에 종묘에서 그 위패까지도 철폐함을 당한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를 생각할 때에는 피눈물이 솟음을 금치 못하였다.

다음에 쓴 이는 조모도 되고 어머니와도 같은 혜빈 양씨와 그 세 아드님. 그 다음이 안평 숙부 부부자, 그 다음이 아버님 항렬 중에 가장 나이 많은 화의군 영, 다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분, 허후 등 계유정난 때에 죽은 사람들을 쓰고, 또 그 다음에는 성승, 유응부, 박쟁,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등을 쓰고, 다음에 외조모와 외숙 권자신의 패를 쓰고, 다음에 장인장모 되는 송현수 부처를 쓰고, 나중에 노순군의 유모 이오 부처를 쓰고, 나중에 대자로 충혼원혼영가(忠魂寃魂靈駕)’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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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길 : 조정래 사진 여행 - 조정래 사진 여행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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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얼마 전에 20여 년 만에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을 다시 한번 읽었잖아. 다시 한번 완독한 기념으로, 조정래 님의 산문집을 하나 추가로 읽었단다. 집에 있던 책들 중에서 오래 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던 <조정래 사진여행>이라는 책이란다. 이 책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 속에 사진이 가득 들어 있단다. 조정래 님의 갓난 아기 시절의 사진부터 학창 시절, 젊은 시절을 거쳐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대하 소설을 쓰시면서 취재 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들이 가득 포함되어 있단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410컷의 사진이 담겨 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조정래 님이 그리신 그림 2컷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어. 뿐만 아니라 각 사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적혀 있었어. 사진으로 보는 조정래 님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단다.

예전에 조정래 님의 <황홀한 글감옥>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글로 쓰는 자서전이라고 하면, 이번에 읽은 <조정래 사진 여행>은 사진으로 보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조정래 님의 문학과 함께 한 인생을 사진을 통해 보니 더 친근함이 가면서,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리고는 나중에 아빠의 인생도 어렸을 때부터 중요한 사진들을 쭉 모아 놓아서 정리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너무 빨리 흘러간 시간과 지금은 연락이 끊긴 사진 속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울컥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너희들이 쑥쑥 자라는 사진도 더 많이 찍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단다.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품은 사진기라는 말이 있는데, 아빠도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단다.

예전에 집에 화재가 발생한다면 사진 앨범부터 챙겨서 도망간다고 했던 어떤 분의 말씀도 생각이 나는구나. 우리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사진이야말로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고, 잠시나마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조정래 님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삶의 치열함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단다. 조정래 님을 따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방식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되는 것 같구나.

오늘을 이렇게 간단히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사진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이 거장의 발걸음을 따라 오늘의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과 역사에 대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담배를 하루 평균 3~4갑을 피우고, 커피를 5~6잔 마시며 열흘에서 보름을 자는 시간 빼놓고는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첫째 나타나는 증상이 두 다리가 10배 20배로 퉁퉁 부어오른 착각이 든다. 그래서 얼른 만져보면 그렇지 않아 주무르고는 한다. 두 번째가 변비 증상이다. 옛날에 똥줄이 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게 된다. 세 번째가 머리에서부터 차츰 차츰 피가 줄어들어 온몸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번째가 걷는데 다리가 내 뜻과는 다르게 휘뚱거릴 뿐만 아니라 발 밑이 어질어질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출렁거린다. 그런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겹쳐져오다가 막바지에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온몸이 녹아 흘러 땅속으로 잠기는 듯한 느낌 속에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말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든다. 그 죽음과 소생의 되풀이 속에서 원고지는 쌓여갔다. - P98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 강변에 동포들이 일군 마을 이름은 ‘3.1촌’.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그 독립 의지가 가슴 뭉클하다. 동포들은 짧은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긴 겨울에는 아무르강의 두꺼운 얼음을 뚫어 생선 중에서 최고로 치는 철갑상어를 낚었다. 영하 30도의 추위를 견디며, 그것을 판 돈이 독립 자금이 되고 자식들의 학자금이 되었다. - P188

원고를 쓴 기간만 <태백산맥>이 6년. <아리랑>이 4년 8개월이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했는데 <아리랑>을 끝내고 보니 쉰셋이 되어 있었다. 내 인생 장년의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아이’에 흘러가버린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쓰느냐고. 삶의 보람이 가장 커서인가? 소설은 사나이의 생애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어서인가? 그 대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원고를 쌓아놓고 그 사이에 서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려 했는지 모른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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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걸 조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74
존스턴 매컬리 지음, 김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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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이사벨 아옌데라는 분이 있단다. 그래서 그분의 책들을 몇 권 샀는데 그 중에 <이사벨 아옌데의 조로>라는 책이 있었어. 그 책 소개를 읽다 보니 <조로>는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존스턴 매컬리라는 사람이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이라는 5부작 시리즈를 잡지에 연재했는데, <카피스트라노의 재앙>가 다름 아닌 조로의 이야기였다는구나. 그래서 혹시 존스턴 매컬리의 책도 있나 검색해보니 아빠가 좋아하는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에 존스턴 매컬리의 <쾌걸 조로>라는 책이 있더구나. 그래서 <이사벨 아옌데의 조로>를 읽기 전에 먼저 원작인 존스턴 매컬리의 <쾌걸 조로>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지은이 존스턴 매컬리는 1883년 미국에서 태어나서 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앞서 이야기했던 <카피스트라노의 재앙>의 조로 시리즈를 썼고 그 시리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구나. 이 소설은 곧바로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그 이후에 많은 만화, 드라마, 영화 등으로 나왔단다. 아빠가 기억하는 영화로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한 <마스크 오브 조로>라는 영화가 기억나는구나. 지은이 존스턴 매컬리의 약력을 보니, 아빠가 어린 시절 어린이 TV 시리즈를 인기를 끌었던 <검은별>의 원작도 이 사람이 지은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럼 존스턴 매컬리의 <쾌걸 조로>를 이야기해줄게.

 

1.

조로는 여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구나. 배경은 서부 개척 시대이고, 라스 캘리포니아 스페인 식민지가 주무대란다. 그 마을에 얼마 전부터 조로라는 사람이 인디언 같은 억압받는 사람들과 약자의 편에 서서 폭압을 휘두르는 강자를 혼내주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났어. 마치 홍길동처럼 말이야. 그는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검은 망토를 입고 있어서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했어. 강자들이 당하다 보니, 경철과 군대는 그를 노상강도라 하고 쫓고 있었단다.

….

돈 디에고 베가라는 사람이 있어. 부잣집 젊은이로 무능하면서 어리버리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야. 그는 결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돈 카를로스의 딸 롤리타를 찾아갔단다. 그리고 어리버리하게 한번도 사랑이란 걸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하게 청혼을 했어. 롤리타의 아버지 카를로스는 부잣집 젊은이의 청혼을 반겼지만, 롤리타는 매력 없는 돈 디에고 베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어느날 불쑥 찾아왔다가 간 세뇨르 조로라는 의문의 남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단다. 조로는 롤리타를 찾아와서 박력 있으면서 솔직하게 사랑을 고백했거든. 하지만 롤리타도 조로가 노상강도로 경찰과 군인들에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조로에게도 선뜻 마음을 주지 않았어. 돈 디에고 베가가 조로의 반만큼만 박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조로를 쫓는 이 중에 라몬 대위와 곤잘레스 상사가 있는데 그들은 조로와 대면하게 되었을 때 조로한테 조롱당하며 결투에서는 지고 말았단다. 그런데 라몬 대위도 롤리타를 보고는 반해서 구애를 하게 되었어. 어느날은 집에 혼자 있는 롤리타를 강제로 추행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조로에 온갖 창피를 다 당하고 부상까지 입게 되었단다. 조로가 어려움에 빠진 롤리타를 구해준 이후 롤리타는 조로에 푹 빠지게 되었단다.

...

라몬 대위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조로를 추격했어. 이 소설의 이야기는 라몬 대위와 조로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이어진단다. 그런데 돈 디에고 베가와 조로가 같은 장소에서 나오는 적이 없고, 근소한 시간차로 엇갈려 나오게 되는데 이로 인해 돈 디에고 베가가 바로 조로라는 것을 조로를 처음 알게 된 사람들도 모두 알게 되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조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소설 초반부에 등장하는 어리버리한 젊은이 돈 디에고 베가가 조로라는 것을 바로 알았을 것 같구나.^^

조로는 나중에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아 응징자들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단다. 라몬 대위와 쫓겨 쫓기는 추격전과 대결로 소설은 이어지고 결국은 조로가 승리한다는, 약간은 뻔한 결과로 끝이 났단다. 그리고 조로의 정체도 밝혀지고 말이야.

….

소설 <쾌걸 조로>속 조로는 그동안 영화나 만화에서 봐왔던 유쾌하고 쾌활한 상남자조로 그대로였단다. 소설이 원작이었으니, 영화나 만화에서 소설 원작을 잘 살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겠구나. , 이제 원작을 읽었으니 앞서 이야기했던 <이사벨 아옌데의 조로>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읽어봐야겠구나. 곧바로 읽을 것 같지는 않고, 오늘 이야기한 <쾌걸 조로>의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읽어보려 해. 그럼 그때 또 한번 조로의 이야기를 해줄게.

, 그럼 오늘은 이렇게 짧게 마무리.

 

PS,

책의 첫 문장: 요란한 빗발이 붉은 스페인식 기와지붕을 다시 두드려 댔다.

책의 끝 문장: “얼씨구,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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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에너지, 고비용, 저효율의 의료산업 모델은 어떤 식으로든 폐기될 수밖에 없고, 자원을 덜 쓰면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의료공공성을 확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어디에서든 누구든 필수의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앞으로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원에서 실패하고 있는 상품들(의사, 약품, 기술)에 의존하는 시스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환원주의적, 기계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그대로 둔 채 공적인 개입과 비용을 늘리는 방식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왜 질병의 결과와 비용을 국가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더 많은 병원 병원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런 것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환경과 생활조건을 위해서는 왜 노력하지 않는가.

 

(11-12)

공공의료가 취약하다는 것은 전체 의료시스템의 취약성을 의미한다. 민간 의료기관은 공적 자원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을 위해서도 수익성에 기반한 경영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진료분야는 기피하거나 소극적이게 된다. 아무리 필수분야 진료기능이어도 기대수익이 약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중소 병원이나 사립대학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수익성이 높은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한다. 진료기능이 편중될 수밖에 없거니와 의료내용이 적정선을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비보험 분야의 확대 그리고 피부, 미용 분야로의 의사 쏠림 등은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14)

기후위기는 건강위기이고 심각한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기온 등 극심한 기후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환경재난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대응력이 부족한 취약 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기후위기의 심화로 코로나 같은 전염병 재난은 반드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복합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의료의 준비는 중요한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수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류의 안전을 위해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의료분야 탄소 발생 감소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지금의 조건에서는 진척이 어렵다. 의료공공성의 토대가 미약하여 이를 추진할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31)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전 세계 온실가스의 절반가량을 10%의 부유층이 배출하며, 특이 이들이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어내는 거대 기업을 통해서 배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중과세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한 핵심적인 과제다. 이는 토마 피케티 등의 세계불평등연구소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의 제안이기도 하다. 여기서 탄소세와 비교하면서 토론해보자. 흔히 탄소세는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는 과제이며, 또한 탄소 배출(혹은 에너지 소비)을 감축하는 방안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2018년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탄소세는 부가가치게와 유사한 간접세로서 소득역진성으로 핵심 오염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 오히려 조세불평등으로 사회적 저항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공공재생에너지의 조세 전략은 시민들의 필수적인 에너지 소비에 과세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과 대기업들의 소득과 이익에 과세를 하면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정조준한다. 이런 기후정의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불필요한 소비를 낳는 핵심적 원인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제이슨 히켈과 같은 탈성장론자의 인식이기도 하다.

 

(40)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둘째 치고, 서울시의 장래 교통정책은 대중교통의 수요를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사실이다. 요금을 올려 놓고 이용자가 줄지 않았어!”라고 환호성을 올릴 때 득은 버스를 운영하는 민간사업자와 보조금을 지급하는 서울시로 흘러가는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부담은 더 커지고 기후위기 대응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통요금 인상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현재의 부담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57)

굳이 의료제도가 상이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의사수가 비정상적으로 적다는 점은 한국 보건의료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상식선에서 납득할 수 있다. 한국의 의대 정원은 1990년대 중반 의대가 9개가 마지막으로 신설되며 3,300여 명으로 늘었다가 의약분업의 여파로 2006 3,058명까지 줄어든 뒤 2024년까지 18년째 동결돼 있다. 그사이 보건의료분야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2000년 한국의 경상의료비(총 의료비) 25 1,230억 원이고 GDP 대비 3.9%를 차지했다. 2022년 기준 경상의료비는 209 460억 원(잠정치), GDP 대비 9.7%이다.

 

(71)

미세먼지들이 자욱한 공기를 마시고, 미세플라스틱이 부유하는 물을 마시고, 항생제 투여된 고기를 먹고, 농약 묻은 야채를 먹고, 화약약품으로 숙성시킨 과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내부로 집착된 시선을 지속한다. 살벌한 경쟁의 기업문화 속 스트레스가 만연한 직장을 다니고, 휴식하고 운동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365일 자영업장을 운영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몸 내부로 향하는 강력한 시선의 방향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다시 나누어진 부분의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의 관성을 멈추지 못한다. 발암물질, 미세플라스틱이 이미 하이브리드된 몸인데, 의료는 자꾸 이 몸의 순수성을 말한다. 지금의 의료에서 몸과 몸 밖의 관계성은 무시된다. ‘관계없는 의료가 지금의 의료를 특징짓는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질책의 말을 듣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

 

(104)

자연환경이 훼손된 곳에는 독성을 가진 식물이 곧잘 번식해서 풀을 먹이로 하는 가축들에 해를 끼치기도 하고, 농업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식물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근원을 제압해서 생태계가 스스로 재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죠. ()이라는 개념은 생태적인 게 아닙니다. 문화적인 것이지요. 지구의 관점에서는 독()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126-127)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하루라는 시간은 똑같이 주어지지만, 돈은 다르다. 같은 액수의 돈이라도 부자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솜방망이 처벌이 되기도 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마련할 길이 없어 꼼짝없이 감옥에 갇혀야 하는 무거운 형벌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은 한국 같은 총액 벌금제를 진작 넘어서, 소득, 재산 비례 벌금제를 운영하고 있다. 핀란드는 이미 192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제도다. 2024년의 한국이 1921년의 핀란드보다 못할 수는 없다. 그만큼도 따라 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저 정부와 국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한 처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해 동안 5만 명이 감옥에 갇혀도,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윤석열 정권 들어서는 부자감세로 부쩍 줄어든 세수를 벌금 등의 세외 수입으로 만회하려는 꼼수까지 작동하고 있다. 죄와 벌은 무엇보다 공평해야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부자에게만 유리하고, 가난한 사람에겐 불리한 상황이다.

 

(143)

금년 봄, 사과값이 상승하면서 드디어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 문제가 기후변화라기보다는 단순한 농산물 유통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은 대구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주변에 사과나무를 심고 주민들에게 보급한 것이 대구 사과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후변화로 인해 대구지역 사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사과 산지가 북상하여 충주나 포천 지역이 주요 사과 산지가 되었다.

 

(177)

그리고 현재는 있는 줄도 몰랐던 정치행태를 이런 종류의 독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현재 인류 최고의 시스템도 악착스런 인간의 탐욕에 대한 제대로의 제어장치는 제어장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무척 변한 것 같아도 그 근본에서는 70년대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209)

병에 이유가 없다는 건 아프고서야 겨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다. 병을 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나는 애써야 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담배를 자주 피워서, 고기를 많이 먹어서, 운동을 하지 않아서….. 탓하려는 모든 것을 탓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병균이나 독성물질에 의한 몇 가지 질환을 제외하면 아직 그 원인이 명확히 밝혀져 있거나,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인과관계가 단순한 질환은 거의 없다.”(<죽음을 배우는 시간>, 창비, 2020). 전적으로 나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긴 했지만 나는 현대의학의 무능함에 정말 크게 놀랐다. 지난한 지료과정에서 내가 의학에 대해 단 한가지 제대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 여타 다른 학문이 그러하듯, ‘모른다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몸의 일은 기계와 달라서 정답의 세계에 있지 않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로봇과 AI를 위시한 의료산업이고, 의료진과 환자 모두 자본이 속삭이는 완치의 약속에 휩쓸린다.

 

(236)

국민 여러분께 더 가까이, 민생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현장의 어려움을 듣고, 국민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챙기겠다.” 22대 총선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처음 총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한 말이다. 여당의 총산 패배에 대해 사과하면서 민생을 강조하던 이날의 담화문에[서 윤석열 정부 지난 임기 동안 내내 붙어다니던 원전생태계 복원도 등장했다. 민생(民生). 단어 그대로 일반 국민의 생활 및 생계, 생명을 가진 백성을 의미한다. 민생을 위한다면 그것이 적어도 어떤 특정 이익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고 정치, 이념과 상관없이 일반 국민의 생활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원전이 민생이라는 이상한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핵발전소와 송전탑으로 고통받는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다. 한결없이 핵 진흥에 진심을 다하고 있는 그에게서 핵 진흥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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