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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즉 이제는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가는 단계라고 보는 졸음의 단계, 혼수상태를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그 소멸의 상태를 중단시켜 심장을 계속 뛰게 할 수 있고 호흡을 계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말기암 환자라든지 식물인간 상태를 겪는 뇌질환 환자 등에게도 생명 연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현재 연명의료로 발생하는 그레이 존(gray zone), 즉 삶과 죽음 중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 지대의 존재가 새롭게 부상했다. 이외에도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죽음에 관해 새로이 고려할 사항이 많아진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55)

법의학자는 확실한 증거로써만 진실을 추구한다.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든,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든 서사에 관심을 두기보다 명확한 증거에 입각해서 추론하는 것이다. 경험으로 쌓인 느낌이라든지 감각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 판단은 오롯이 백퍼센트 과학적 증거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법의학이다.

(146~147)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선은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과 우리의 삶을 별개로 떨어뜨려놓고자 하는 의식이 발동한 것이다. 죽음은 병원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타자화시키고 우리는 죽음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조금 더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삶의 공간에 남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병원이나 장례식장을 이용하게 되었다.

(176)

그렇듯 우리가 자살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 즉 죽고 싶어 죽는 것이라거나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라는 것은 모두 틀린 말이다. 세상에 진정으로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이다. 죽음의 이유는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

(238)

다들 자신의 죽음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내일 오든, 몇 십 년 후에 오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물질적, 심리적 정리는 삶의 정리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신의 책임, 권리, 의무에 대한 여러 가지 귀속을 마쳐야 편안히 죽음을 맞을 수 있다. 사실상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265~266)

영생에 대한 환상을 가지더라도, 즉 죽음을 어떻게 인지하든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언젠가는 소멸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실존적으로 반드시 부딪쳐야 되는 사건이며 우리 주변에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하고,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영생이라는 말에 오히려 끌려왔다.

그러나 사람의 마지막 여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여야만 현재 우리의 삶을 더 온전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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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12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ookholic님,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명절 보내세요.^^

bookholic 2019-09-12 19:0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풍요롭고 여유롭고 행복하고 즐거운 추석 명절 되십시오~~^^
 















(29)

그러나 나는 별 쓸모도 없는 물건들을 집안에 잔뜩 쌓아놓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아주 긴 시간을 시달리다가 수십 년 뒤 허비한 세월을 후회하는 어른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오랫동안 힘든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보다는 나은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최고의 자산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34)

이곳이었소. 물론 박사는 물리학자이니까, 반물질이 발견된 곳이 이곳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 하지만 현재 항공학의 원리들이 만들어진 곳도 칼텍이고, 지구의 나이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확정한 곳도 칼텍이라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르오. 로저 스페리가 좌뇌와 우뇌의 기능이 다르다는 사실, 그러니까 좌뇌는 언어에 쓰이고 우뇌는 시각이나 공간 감각에 쓰인다는 사실을 파악한 곳도 이곳이라는 것도. 분자생물학도 칼텍에서 만들어내다시피 했소. 그 일의 핵임에 있었던 사람이 박사 같은 물리학자인 막스 델브뤼크였지. 그는 그 공로로 1969년에 노벨상을 탔소.”

(44~45)

파인만은 철학 연구를 경멸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마찰은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파인만은 물리학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는 바빌로니아인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인으로, 바빌로니아인은 숫자와 방정식, 기하학의 이해에서 서양 문명 최초로 큰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우리는 수학을 발면한 것이 탈레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등 훗날의 그리스인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빌로니아인은 어떤 계산 방법이 효과가 있느냐, 즉 실재하는 물리적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느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그것이 정확한가, 더 큰 논리 체계와 맞아떨어지는가 하는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은 정리(定理)와 증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으며, 어떤 진술이 공표된 공리(公理)나 가정의 체계에서 나온 정확한 논리적 결과물일 때에만 그 진술을 참으로 여겼다. 간단히 말해서, 바빌로니아인은 현상에 맞추었고 그리스인은 그 밑에 깔린 질서에 초점을 맞추었다.

(98)

예를 들어 중력이 강한 힘보다 훨씬 약하지 않다고 생각해보라. 별은 훨씬 더 압착이 되어 핵연료는 빠른 속도로 타버릴 것이고, 생명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중력이 훨씬 더 약하다면, 전자기적인 반발력 때문에 물질이 하나의 별로 합체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강한 힘이 전자기력보다 훨씬 강하지 않다면, 대부분의 원자핵은 해체되어버릴 것이다. 물질 속의 전자와 양성자들의 숫자가 1퍼센트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나와 1미터 떨어진 사람 사이의 전자기력이 지구의 무게보다 더 클 것이다. 자연의 힘들은 서로 다르지만 섬세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왜일까? 이 답을 찾으려면 개별적인 힘들을 묘사하는 각각의 이론들로는 부족하다. 오직 모든 힘을 포괄하는 하나의 이론만이 존재에 대한 이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다.

(173)

그렇다고 나한테 좋은 상상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야. 사실 나는 소설을 상상하는 것보다 과학자의 일이 훨씬 더 힘들다고 생각해. 즉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있는 것을 파악하거나 상상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이야기지. 소규모로 또는 대규모로 벌어지는 일들은 처음 예상과 크게 달라지는 경우가 많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하네! 원자를 그려보는 데도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하지. 원자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일 거라고 예측하는 데 말이야. 원소의 주기율표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지.

과학자의 상상력은 제어를 당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상상력과는 다르네. 과학자가 뭔가를 상상하면, 신은 부정확하다거나 지금까지는 괜찮다고 말하지. 물론 여기서 신은 실험이야. 신은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 ‘, 아니야, 그건 일치하지 않아.’ 우리는 이렇게 말해 나는 그것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해. 그렇다면 이런 것을 보게 될 거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우리가 잘못 추측한 거니까. 하지만 글쓰기에는 이런 것이 없네.

(208)

나는 스스로 과학자라고 말할 수 있네. 발견을 하면 흥분을 하지. 흥분은 사실 자신이 뭔가를 만들어냈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을 때 오는 것이라네. 따라서 과학적인 것은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네.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어느 게 먼저고 어느 게 뒤인지는 모르겠네. 나는 통합된 사람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나의 회의주의 때문에 내가 과학에 관심을 갖는 것인지, 과학 때문에 회의적이 되는 것인지 그런 것은 모르겠네. 그런 것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해. 어쨌든 나는 무엇이 사실인지 알고 싶네. 그래서 사물을 들여다보지. 보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발견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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