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미국과 영국에서 1990년대 말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이른바 현대화폐이론(MMT) 학파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화폐와 국가재정의 본질에 대한 독일 역사학파와 미국 제도주의 학파의 접근의 전통 위에 서서, 자국 화폐를 발행하는 주권국가라면 그 세금징수 능력 이외에는 재정지출에 재한을 가해야 할 아무런 제약조건 따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균형재정론이란 이제 없어져야 할 미신에 불과하며, 오히려 민간부문의 경제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파산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재정의 운용은 매년 균형재정을 달성한다는 족쇄에서 풀려나 경기순환의 심한 등락과 그것이 경제와 사회에 가져오는 충격을 완화하는 것에 가장 우선적인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7)

가계에서는 부채가 부채일 뿐이다. 가급적이면 줄일수록 좋고 결코 방만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국가는 영원토록 그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영속 기업이며, 국가의 부채란 발행할 때에 비로소 본원통화를 위시한 각종의 금융자산이 생겨나고 금융시스템 전체가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국가가 부채를 발행하지 않으면 본원통화도 줄어들고 민간의 금융자산도 줄어드는 일이 벌어진다는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25)

예를 들면, 지금 한국에서 행해지는 조치들이 민주적 모델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선거로 집권한 정부가 긴급사태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도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정확한 진단검사, 사회적 거리두기, 격리, 감영자 동선 추적 등등이 그러한 조치들이죠. 그것들은 이 순간 꼭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조치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으니까요. 나는 지금 우리가 위기에 대응하려면 독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8)

지구화 시대인 우리 사회가 반영하고 있는 또하나의 취약성, 그것은 범지구적인 불평등입니다. 미국과 같은 부유한 나라에서도 이 질병은 누구든 감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불균형적으로 가장 잘 감염됩니다. 지구화 시대인 우리 시대에는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세계 도처의 모든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거울에서 보는 우리 모습입니다만, 별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죠.


(64~5)

미국 질병통제예방 센터(CDC) 2019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태어난 흑인 아기의 기대수명은 같은 해에 태어난 백인 아기의 기대수명보다 3.5년 짧다. 만약 현재 수준의 인종적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이 흑인 아기는 백인 아기에 비해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약 2.5,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전에 학교를 그만둘 가능성이 약 2, 감옥에 갈 확률이 백인보다 6배 이상 높을 것으로 예측됐다.


(117)

스마트폰 한 개에는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트랜지스터가 수백만 개 들어 있다. 순도 98%의 야금학적 등급의 실리콘을 얻기 위해 우선 석영, 순수한 탄소, 천천히 타는 목재가 약 1,600 ℃로 유지되는 용광로로 이송된단다. 그렇게 만들어진 야금학적 등급의 실리콘은 증착(蒸着) 공정을 위해 다시 약 1,000 ℃로 유지되는 정제공장으로 운송된다. 1ppb 불순도의 전자 등급 실리콘을 만들어내자면 여기서 또 에너지 집약적인 과정을 몇 단계 더 거쳐야 한다.


(128~9)

코로나19 사태는 자연을 외면하고 생태계와 절연한 인간의 삶이 빚어낸 예고된 참사이다. 지구생태계의 유기체적 구성원임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자연과 불화한 결과다. 근대 이후 인간은 개발과 성장이란 미명 아래 자연을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하는 야만을 일상화했다. 인간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교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영성과 감성, 치유력이나 면역력까지 앗아갔다.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자연의 일부인 바이러스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고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서 백신과 치료제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생태계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무차별적인 개발로 만신창이가 된 지구생태계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소생을 돕고, 더는 훼손하거나 고갈시키지 않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 사태는 기후위기에 맞닿아 있다.


(153)

그러니까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이비가 창궐하는 것은, 이러한 기독교의 자체의 비논리성에 주요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비논리성이 바로 기독교의 위대함의 원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굳이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아니 뭔가 공적을 쌓아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 자체가 죄악이다, 구원의 길은 은총에 있다, 라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과 사상가들의 한결 같은 메시지도 결국 그 비논리성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자기애라는 관념의 씨앗에서 발아한 생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은총이라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자유와 인간해방을 겨냥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56)

역병이 예기치 못한 사태를 촉발시킨 사례 중 이주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야기. 당시 연합국 수뇌들 사이에 독일의 전쟁책임을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있었는데,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독일에 대해 과도한 배상금을 부과하는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는 회담 기간 중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그 바람에 기력이 쇠잔해져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양보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 때문에 국가경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미증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면서 마침내 히틀러가 등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그러니까 극악한 만행을 저지른 나치즘의 출현의 배경에 스페인독감이라는 역병이 있었다는, 기막힌 이야기다.


(160)

최근에 세계적인 지적 총아로 등극한 유발 하라리, 이 젊은이는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만, 마치 세계의 미래에 관해서는 자기가 자장 잘 안다는 듯이 예언자행세를 거침없이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지배할 세계에 대한 경고를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라고, 간혹 선의로 해석하는 논자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유발 하라리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그 어두운 예언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을 가장 용서할 수 없지만, 실은 이것은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162)

며칠 전부터 몸이 이상하다. 누워 있으면 좀 견딜 만하기는  해도 그리 편치는 않다. 왜 이럴까.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심란한 터에 몸이 이러니, 자연히 기분이 처진다. 소위 코로나블루가 내게도 이런 식으로 오는가.


(206)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에서도 흑인의 비율은 압도적이다. 보도를 종합하면, 시카고 확진자의 50%, 전체 사망자의 70% 이상이 흑인이었다. 그러나 시카고 주민 중 흑인의 비율은 30%에 불과하다. 위스콘신주는 전체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이 고작 6%이지만 사망률에선 거의 40%를 차지했다. 미시간주의 경우 사망자 중 흑인 비율은 40%에 이르렀지만 주 전체 인구 중 흑인의 비율은 고작 14%이다.


(226~7)

아파트를 짓기 위해서는 일단 기존 건축물을 부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30년 이상 되면 노후 건축물이라 말하고 40년 이상 되면 철거해야 할 건물로 인식한다. 수백 년 된 유럽의 건축물을 부러워하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도시는 플라스틱의 짧은 생애처럼 30년이 지나면 폐기 대상이 된다. 이렇게 철거되는 건축폐기물은 대부분 수도권 매립지로 가고 서울, 경기도, 인천이 사용하는 제3수도권 매립지의 폐기물의 42%는 서울에서 온다. 문제는 반입되는 폐기물의 절반이 건설폐기물이고 30%는 사업장 폐기물이란 사실이다. 생활폐기물은 18%정도이다. 재개발과 재건축이 늘어날수록 매립지의 수명은 단축될 것이고 현재 수도권 매립지의 수명은 5년이 채 남지 않았다. 2025년 이후에는 서울시의 폐기물을 받지 않겠다는 인천시의 공언에도 불구하고 조성까지 7~10년 걸리는 대체 부지는 여전히 없는 상황이다. 쓰레기 대란이 몇 년 내에 현실화된다는 말이다. 서울시가 열심히 원전 1기 줄이기 운동을 통해 에너지 사용을 줄이더라도 아파트 단지 재건축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처럼, 아무리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을 해도 건축폐기물이 이렇게 많이 쏟아진다면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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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10: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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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9 23: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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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무반주 첼로 모음곡> 1890년 어느 날 13살의 카잘스가 중고 악기점에서 곰팡내 나는 필사 악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작곡 후 200년 가까이 오직 소수의 음악가들과 바흐 전문 학자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곡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콘서트홀에 어울리는 음악이기보다는 테크닉 연습곡으로 더 적합하다고 여겼다. 이 곡은 카잘스가 발견하고 갈고닦아 대중적인 매력을 입힌 후에서야 하나의 독립된 연주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슬픈 일에 연주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첼로라는 악기의 어둡고 서글픈 음색과 더불어 이 곡이 외롭게 하나의 악기만 요구한다는 사실로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첼로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라서 암울한 소리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장조로 쓰인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경쾌하고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는 태평한 태도와 황홀한 유기 또한 어느 정도 들어가 있다. 그 뿌리는 춤이다. 악장의 대부분이 유럽의 옛 춤곡들도 구성되어 있다. 무용가들은 이 곡을 위한 안무를 만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루돌프 누레예프, 마크 모리스, 대만의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이 이 곡의 추진력 있는 리듬에 맞춘 안무를 선보였다.


(56)

부자는 비좁은 거리를 지나면서 첼로 악보를 찾아 중고 악기점을 샅샅이 뒤졌다. 칼레 암플레에서 또 다른 악기점에 들어갔다. 곰팡내 나는 악보 꾸러미를 뒤지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게 뭐지? 싯누런 표지에 멋들어진 검은색 글씨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솔로 비올론첼로를 위한 6개의 소나타 또는 모음곡이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정말 제목 그대로인가? 불멸의 바흐가 정말로 첼로만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단 말인가? 페세타로 악보값을 치렀다. 파블로는 첫 악장 프렐류드부터 시작해 악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상상 속에서 형태가 갖춰지는 음악의 리듬을 따라 구불구불한 거리를 미끄러지듯 지나서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부터 손끝까지 채워지는 악보의 감각적 계산이었다.


(67)

클래식 콘서트에는 숨 막히는 분위기가 거대한 장막처럼 드리워진다. 소리 내어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목을 가다듬는 것도 악장 사이에 해야 한다. 연주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박수를 치고 싶어도 치면 안 된다. 하지만 클래식 콘서트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이렇게 엄격했던 것은 아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관객들은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다. 관객들이 멋진 솔로 연주를 실시간으로 환호하거나 반응하지 못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바흐 시대에는 이렇게까지 숨죽인 숭배 분위기가 아니었다. 교회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바흐가 자주 공연한 짐머만 카페 같은 장소에서 관객들은 자유롭게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담소를 나누었었다. 바흐가 클라비코드로 난해한 푸가를 연주할 때면 낮은 탄성을 자아냈으며 현란한 솔로 파트에서는 손가락이 ㅂ h이지 않을 정도로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89)

살아생전에 바흐는 유명하지 않았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혹은 동년배인 헨델처럼 유럽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일이 되기 전인 이름 없는 변두리 도시에서 세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커리어를 쌓았다. 빈이나 런던, 파리 등 다른 작곡가들을 생전에 유명하게 만들어준 대도시에서는 산 적이 없다. 오페라를 만든 적도,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도시에서 일한 적도 없다. 오페라는 당시 음악가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20~1)

미샤 마이스키의 웅장하고 표현력 넘치는 연주 스타일을 지나치다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가장 나쁜 평가를 찾자면 도스토엡스키의 감성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 첼리스트는 이렇게 항변한다. “바흐를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제한하는 것은 천재 작곡가에 대한 모욕입니다. 바흐는 그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였어요.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것은 우연히 그 시대에 살았기 때문일 뿐이죠.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낭만파 음악가이며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모더니즘 음악가입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5번 사라반드>를 들어보세요. 요즘 만든 곡이라 해도 손색없죠!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이유는 특정한 시대나 장소에 제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154~5)

카잘스가 연주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프렐류드>를 들어보면 장엄한 몰락으로 시작해 다시 일어선다. 가속도가 붙은 채 대혼란 속으로 뛰어들어 거의 한계점에 이를 정도로 안간힘을 쓰다 화음의 부케와 사라의 맹세가 나타난다. 매번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음반이다. 가장 낮은 음과 높은 음을 분리시키면 매력적인 별개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프렐류드 중간의 불협화음도 한번 떠올려보자. 놀라울 정도로 소음에 가깝지만 첼로 속 어딘가에 숨겨진 오케스트라가 아우성치며 귀 기울이게 만든다. 그 뒤로 경쾌함, 다듬어지지 않은 에너지, 영웅적인 면모, 대대적인 파괴, 풍부한 선율,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무한성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313)

안나 막달레나에게도 약간의 공로가 있다. 안나 막달레나의 매뉴스크립트에는 보잉 관련 오류가 많은데 첼리스트가 아니어서 오류를 바로잡거나 현의 테크닉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이러한 오류 문제로 안나 막달레나의 매뉴스크립트는 오랫동안 남편에게 매뉴스크립트가 보기보다 바흐의 원본과 가깝다고 말하는 시각도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안나 막달레나의 내뮤스크립트가 느긋하고 여러 음악적 세부 사항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루츠마허에서 카잘스까지 첼리스트들이 저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자기만의 개성을 남기게 되는 다행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안나 막달레나는 사라진 남편의 원본에 충실하게 필사함으로써 36개 악장의 타임캡슐을 조립해 미래의 감상자들에게 서양 음악의 걸작을 선사한 것이다.


(324)

1973 9, 카잘스는 이스라엘에서 유스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을 위한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지휘하고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를 뚫고 자동차로 오래 이동을 했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물론 가끔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 마에스트로(당시 96)는 좀 더 풍부한 표현력을 요구하며 한 악절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젊은 음악가들에게 힘주어 설명했다. “악보에는 표시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악보에 표시되어 있지 않는 게 수없이 많습니다! 그냥 음표를 연주하지 말고 음표에 담긴 의미를 연주하세요!”


(326)

카잘스는 언젠가 잡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의 생각만큼 종교적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 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깨어 있을 때 신을 발견합니다. 일어나자마자 바다로 나가면 사방이 신입니다. 크고 작은 것에 모두 들어 있어요. 나는 신을 색깔과 디자인, 형태로 봅니다.”

카잘스가 바흐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친구들이 테이프 레코더와 헤드폰을 가져왔다. <브란덴베르크 협주곡 1>이 흘렀다. 의식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카잘스는 영면했다. 마침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유엔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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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리는 돌, 나무, 흙 같은 자연 속의 재료를 가지고 건축물을 만든다. 그리고 그 건축물이 부산물로 만들어 내는 빈 공간 안에서 생활한다. 그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그 공간은 또 다시 우리를 만든다. 이처럼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공간을 통해서 다른 시대의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건축물은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건축물과 사람은 떼어 낼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건축물은 삶의 일부가 된다.


(44-46)

걷고 싶은 거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얼마나 많은 이벤트가 일어나는 거리인가, 어떠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는 거리인가, 어떠한 자연환경이 있는 거리인가, 어떠한 사람들은 만날 수 있는 거리인가 등이 그 요소들이다. 마지막 요소인 사람은 나머지 요소들이 구성되는 것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결정 난다. 보통,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이지만 나머지 요소들이 갖추어지지 않는 경우에는 사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거리를 완성하는 요소이지만 만들기 시작하는 요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거리의 상황이 사람들이 걷고 싶은 환경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답은 다음과 같다. 걷는 환경과 너무 차이가 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시속 4킬로미터로 걷는다. 너무 느려도 사람들은 걷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점의 입구가 자주 나오는 거리가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든다.


(66-68)

20세기 초반에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는 주택을 사람이 살 수 있게 하는 기계라고 정의 내렸다. 건축에서 기능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기능은 건축이라는 자전거의 두 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전거가 굴러가려면 두 개의 바퀴가 필요하듯 건축은 기능 이외에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바퀴가 필요하다. 현대 도시의 건축에서 부족한 부분이 이 부분이다.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빠른 자동차를 위한 길과 넓은 집들을 추구했지만 정작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성을 깨우는 공간을 놓쳐 온 것이다. 계절에 어울리는 한 곳의 노래가 우리의 삶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것 같은 감성을 울리는 건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건축은 대중음악이 팔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잘 팔리는 건축이 될 것이다. 또한 그런 건축이 많아질 때 현재 도시는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116)

건축은 오브제(object)의 성격이 강한 도자기나 그림과는 다르다. 건축은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는 공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재료가 교체되고 복원되고 사용되면서 보존되는 것이 옳다. 남대문은 재료가 오래된 나무이기 때문에 문화재가 아니라 그 건축물을 만든 생각이 문화재인 것이고, 그 생각을 기념하기 위해서 결과물인 남대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따라서 오리지널 남대문이 불타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오래된 나무가 불에 탔다고 통곡하면서 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194)

그 이유는 마당이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주상복합에 아무리 넓은 거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거실의 인테리어가 매일매일 시시각각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당은 때로는 비도 오고, 햇살도 비치고, 눈이 내리기도 하고, 낙엽이 떨어지기도 한다. 아침의 동편 햇살을 받은 마당과 저녁노을의 마당이 다르고, 밤이 되어 어두운 달빛을 담은 마당은 또 완전히 다르다. 그 밖에도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이벤트는 다양하다. 고추를 말리기도 하고, 바비큐를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벤트와 날씨가 마당의 얼굴을 항상 바꿔 준다. 마치 마당은 매일매일 벽지와 가구가 바뀌는 거실이라고나 할까?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고정되어 있고 매일 TV 보는 행위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실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220)

우리는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가 필요하다. 필자가 있는 사무실에는 책상 앞에 책을 쌓아 두는 직원이 있었다. 이는 그 직원이 단순히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개방된 책상이 불안해서 자신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서 책과 서류로 벽을 치는 것이다. 보통 사무실에는 큰 모니터가 벽의 역할을 해 준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업무용 데스크탑 컴퓨터까지 책상 위에 올려놓고 벽처럼 쓰고 있단. 요즘에는 듀얼 모니터로 작업을 해서 모니터를 두 대 사용하는데, 그 두 대의 모니터를 이용해서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나타나는 풍경이다.


(229)

선사 시대 때 사람들은 동굴에서 살았다.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 앉아 움직이는 불을 쳐다보고 그 위에서 밥도 해 먹었을 것이다. 최초의 집, 동굴에서 집의 중심은 모닥불이었다. 세월이 지나서 현대인의 집의 중심은 TV이다. 가족들은 모두 거실에 모여 앉아 움직이는 불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TV 화면을 바라본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과거 남자들은 밖에서 목숨을 걸고 사냥을 했고 집에 돌아오면 멍하게 불을 쳐다보면서 밖에서의 긴장감을 풀었다고 한다. 불을 쳐다보는 시간은 사냥 모드에서 휴식 모드로 바꾸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쟁이 심한 현대 사회에서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은 최소 30분은 멍하게 TV를 보아야 정신 모드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들은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TV 보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291)

철학자 강신자의 말처럼, 기억할 감정이 많다는 것은 인생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벤트가 많이 일어나는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성공적인 거리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는 거리가 되려면 다양하고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이벤트들이 필요하다. 그것이 쇼윈도의 다양한 상품이거나 혹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거나,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이거나 어떠한 것이든 좋다. 건축가는 이런 이벤트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할 수 있는 무대장치를 디자인하는 연출가이다.


(332)

극동아시아 문화는 유고가 지배적이었다. 사후 세계보다는 현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땅 위에서의 충()이나 효() 같은 관계를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극동아시아 건축은 땅과 연결된 개미처럼 관계성이 중요시되는 건축의 성격을 띤다. 반면에 유럽은 이집트, 그리스, 기독교에서 사후 세계를 중시했고, 이데아의 세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부터 오는 원칙을 중요시 하였다. 땅에 기초를 두지 않는 이러한 문화적인 특징 때문에 공중에 집을 짓는 벌처럼 기하학적인 건축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것이 서양에서 피라미드, 황금비율, 판테온 같은 건축 문화가 나오게 된 문화적 배경일 것이다.


(333)

서양에서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 이 단어는 동시에 우주를 뜻하기도 한다. 우주라는 영어 단어는 universe, cosmos, space 이 세 단어가 혼용되어서 쓰인다. 따라서 ‘space=cosmos’라는 결론이 나온다. cosmos라는 단어의 의미는 혼돈이라는 뜻의 chaos의 반대어로 수학적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space=수학적 규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어를 통해서 살펴보면 서양인의 의식 속에서 비어 있는 우주, 공간, 수학적인 규칙을 내재하고 있는 cosmos 등의 의미가 상호 연결되어져 있으며, 공간을 수학적 규칙을 가진 비어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과 사이라는 뜻의 ()’이 합성된 단어이다.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듯 단어만 살펴보더라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82)

과거에 건축은 과학이었다. 한 나라의 최첨단 기술을 과시하는 도구로서의 건축이 있었다. 건축은 어느 시대나 지구의 만유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 주는 과학적 도구이자 결과물이었다. 반면 의술은 과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까웠다. 지금도 오지에서는 무당들이 병을 고친다. 건축과 의학 이 둘은 19세기에 운명이 바뀌었다. 의학은 과학을 택해서 지금의 MRI와 각종 첨단 시설을 이용한 기술의 서비스가 되었다. 반면 건축은 예술을 택해서 지금껏 사회적 대접이라는 면에서 퇴보해 왔다. 반면 건축이 예술이 되면서 질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 이루어진 의학과 건축의 선택의 결과는 지금 의사와 건축가의 평균 연봉이 말해 주고 있다. 필자는 건축이 예술이라는 관념이 깨졌으면 한다. 건축은 예술이기도 하고, 과학이기도 하고,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이 종합된 그냥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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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폭이 좁고 어둡고 뾰족한 독일의 글자들과 달리, 이탈리아의 글자들은 햇빛을 받아 몸을 활짝 폈다.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변화해 가는 풍광 그대로, 글자들의 풍경도 마치 검고 빽빽하며 수직성이 강한 침엽수의 숲이 점차 사라져 가면서, 둥글고 넓은 활엽수 잎들이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돋아나는 듯한 모습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72)

라이프치히에서 학위논문을 쓰던 시절에, 한번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자료를 청하는 문의를 영어로 써서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얼마 후 우편함에 답신이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꺼내어 보니 답신과 자료들이 온통 프랑스어였다. 아시아식 이름에 독일 주소를 가진 지구상의 누군가가 고급 프랑스어를 번역없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일까, 그들은? 그때도 문득 깨달았다. 프랑스인에게든 독일인에게든 영어란 국제공용어이기 이전에 불편한 외국어일 뿐이란 사실을. 사람에게 그가 처한 지역과 그곳의 풍토, 언어, 공동체는 생각보다 깊숙이 개입한다. 세계화의 시대에도 지역의 실체는 공고하다.


(109)

유니코드라는 체계에의 영감은 이런 시적인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유니코드는 현재 13만 여개에 이르는 글자들을 포괄하고, 포함된 글자의 수는 계속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유니코드의 모든 글자에는 16진법의 고유번호가 주어진다. 유니코드는 인류를 거쳐간, 알려진 모든 문자들을 포용하고자 한다. 사용인구가 소수라고, 심지어 더 이상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배제하는 법은 없다. 쐐기 문자에서 이모티콘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모든 글자들이 지금도 유니코드의 자리들을 차곡차곡 채워 가며 바벨탑을 쌓아 나가고 있다.


(136)

사람과 닮은 사랑이 나타나, 그 동적인 ㅇ받침이 정적인 ㅁ받침을 돌돌 밀고 가는 이미지였다. 그때 깨달았다.

, ‘사람을 돌돌 움직여 살게 하는 동력은 사랑이구나!’

살아가고() ‘을 이루고 사람이 되고 사랑을 하는 것은 언어학적 근거로 따지면 모두 어원이 분분하지만, 우리는 이 서로 비슷한 소리와 모양으로부터 즐거운 상상을 누릴 수가 있다.


(137)

한국어 음성 상징에서 긍정적인 측면의 심상만 보자면, ‘사랑의 ㅅ은 생()을 연상시키고 ㄹ은 활력()을 일으킨다. ㅅ은 에너지이고, ㄹ은 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양성모음 ㅏ는 내적으로 수렴하는 음성모음 ㅓ와 달리 외부를 향해 확장되고 열려 있다. 마치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에너지처럼. 사람은 멈춰 있고, 사랑은 굴러간다. 사랑이 사람 사이에 흘러 들어 서로를 연결한다. ‘사랑이라는 한국어 단어 속에는 소리와 뜻과 모양조차 이렇게 서로 사랑을 한다.


(166)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명조체의 형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1916~1988). 최정호는 궁체 중 정체의 필법을 바탕으로 명조체를 설계했다. 즉 한글 글씨체인 궁체를 인쇄용 활자체인 명조체로 연결한 것이다. 20세기 중반, 최정호는 모눈종이에 한글 글자체들을 하나씩 설계해 나갔다. 이 설계용 도안을 활자 혹은 폰트의 원도라고 한다. 최정호는 명조체의 원도를 설계하려면 붓글씨에 대한 기본 지식과 이를 써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도 명조체는 궁극적으로 인쇄용 글자다운 면모를 가져야 하므로 서예와 달리 더 체계적이고 고른 모양새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따라서 작은 크기로 긴 텍스크에 적용해도 충분히 잘 읽히도록 명조체는 궁체보다 속공간을 크게 설계했다.


(179)

세계의 다양한 문자문화권에 정체와 흘림체가 있다. 인간에게는 글씨를 또박또박 단정하게 쓰고 싶은 마음빨리 쓰고 싶은 마음이 모두 있어서 그렇다. 흘림체에서는 손의 빠른 운동성이 글자의 형태에 그대로 실린다. 흘림체에서는 손의 빠른 운동성이 글자의 형태에 그대로 실린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유연한 흐름과 고유한 리듬이 글자 구조와 세부에 영향을 미쳐서 흘림체만의 독특한 형태가 나타난다.


(227)

대개의 붓은 한 번에 약 10밀리리터 정도의 먹물을 머금는다. 먹물은 탄소와 아교와 물의 혼합물이다. 색을 내는 탄소입자가 종이에 자국을 남기고 물은 증발한다. 그러나 눈이 녹은 맑은 물은 색을 내는 입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 붓은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대신, 마른 천에 물기가 닦이고 말려졌을 것이다. 얼음이 녹은 물은 붓털에서 그대로 증발했을 터다.


(293)

순우리말 그림은 어원이 같다. ‘긋다에서 왔다고도 하지만, ‘긁다에서 왔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글과 그림은 그 자리에 부재하는 화자, 소리, 대상이 흔적으로 남은 것이다. 부재하는 것들은 그리움을 일으킨다. 흔적과 자국이 마음에 남는 것을 그리움이라고 부른다. 그리움도 글과 그림과 어원이 같다. ‘그림도 본질적으로 부재하는 무언가와 더 잘 연결되고 싶고 더 잘 소통하고 싶은 그리움을 동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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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생태운동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별세
https://news.v.daum.net/v/20200625160332107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불과 며칠 전에도
2020년 5~6월호 녹색평론에서
그의 글을 볼 수 있었는데...
너무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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