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사는 내내 즐거움을 누리며 웃도록 하십시오.

삶이란 그저 버텨내라고 있는 게 아니라,

즐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 고든 B. 힝클리


(104)

일단 미술에 대해서만 말해보겠습니다. 서양미술사는 그리스 미술을 재해석해온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문명의 한 단계를 거칠 때마다 서양의 미술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새롭게 해석해나갔거든요. 예를 들어 15~16세기 유럽에는 르네상스라는 미술 흐름이 있었지요. 르네상스는 프랑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부활시킨다는 걸까요? 바로 고전의 부활을 뜻하는데 그 고전이 바로 그리스 미술입니다.


(199)

앞서 말했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끊임없는 전쟁이라는 치열한 현실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 남성의 육체는 나라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어요. 그야말로 체력은 국력이었던 거죠. 그리스 사회가 남성 육체를 찬양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겁니다. 아테네를 비롯해 몇몇 도시에는 미남 선발대회를 열기도 했고, 미술도 튼튼하고 강한 육체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242)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가 유지하려면 사회에서 특별히 인기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에는 도편추방제라는 제도가 있었지요. 이 법에 따라 아테네 시민들은 가장 인기 있는 사람’, 즉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냈습니다. 투표 결과 6000표 이상 받은 사람은 아테네 밖으로 추방당했어요. 그만큼 아테네인들은 독재자의 출현을 경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초상을 새기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268)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테네 사람들은 적인 페르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관계를 복구한 것처럼 아테네도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외교 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예술가가 교류하게 됩니다. 그리스 예술가들은 페르시아 문화에 놀라워하고 영감을 얻었겠지요. 그리고 이전의 아테나 신전보다 훨씬 큰 신전을 짓겠다는 건축적 야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야망이 바로 페르시아와의 교류에서 자극받아 생겼을 겁니다.


(273)

파르테논의 모든 곳에 휴머니즘이 녹아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하고는 다르게, 이 건물에는 사실 직선이 없어요. 우리 눈은 둥글기 때문에 직선은 우리 눈에 들어오면 곡선이 됩니다. 우리 눈에 직선으로 보이려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는 곡선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파르테논 신전은 그런 착시까지 고려했습니다.

심지어는 바닥도 휘어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한쪽 끝에 서서 보면 맞은편 바닥이 안 보입니다. 바닥이 중간 부분에서 부풀어 올라갔다가 내려가기 때문이지요. 직선을 위한 곡선인 겁니다. 가장 높은 부분과 가장 낮은 부분을 비교해보면 바닥 표면의 높이 차이가 10센티미터 이상 납니다. 신전의 긴 축인 남북 면으로 보면 최대 12.3센티미터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요. 동서 축도 중심에 최대 6센티미터 가까이 부풀어 올라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시야에 대한 그리스인의 이해도는 정말 놀랍다고 할 수 있죠.


(350)

로마가 성장할 때 마치 부모처럼 나란히 로마에 큰 영향을 준 두 세력이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그리스, 그리고 이제부터 설명드릴 에트루리아입니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는 외래 문화인 반면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토착 문화에 가까워요. 로마는 관용과 다양성의 강자답게 두 세력으로부터 각각의 장점을 취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죠.


(353)

로마인의 능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가능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능력 말입니다. 이는 대단한 능력입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배운 것을 더 잘 응용해 사용하면 되죠. 로마인은 이 점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479)

콜로세움의 기둥 장식을 설명할 때 말씀드렸던 그리스 기둥의 형식도 비트루비우스가 정리해놓은 것입니다. 그는 세 가지 기둥 양식에 단순하고 땅딸막한 토스카나식과 복잡하고 늘씬한 콤포지트식까지 추가해 총 다섯 가지의 기둥을 로마 건축의 기본 요소로 정리합니다. 이 다섯 가지의 기둥은 각각 직경과 기둥 높이의 비례도 정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둥머리가 화려해질수록 비례가 길어집니다. ‘도리아식은 남성적이고 이오니아식은 여성적이라는 설명도 비트루비우스가 처음 한 것입니다.


(530)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76년 이후 서로마제국을 차지했던 게르만 용병대장은 결국 동로마제국 황제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일개 영주로 전락한 겁니다. 이후 서로마 옛 영토에서는 게르만족을 비롯해 수많은 야만족이 난립하며 조그만 영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서로마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명목상으로나마 자신이 로마제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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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20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다 보면 즐거워지기도 하더라고요. ^^

bookholic 2020-10-21 00:29   좋아요 0 | URL
미소 가득한, 멋진 시월의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0)

곤충의 성공은 너무나 위대해서, 문자 그대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지구와 도시와 기술과 문명을 지배한다고 착각하게 하지만, 우리는 지구의 상태를 개선하기보다는 파괴하는 데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인류는 지구상에서 패악질이나 일삼는 악종 정도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만약 인류가 멸종한다면, 대부분 종들의 생활 여건이 대폭 개선되러 것이다(머릿니, 몸니, 사면발이와 같은 몇 가지 종만이 예외다). 이와 반대로, 지구에서 모든 곤충이 멸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곤충학자 에드워드 O. 윌슨에 의하면, 그럴 경우 육상 환경이 붕괴되어 혼돈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한다. 인류의 문명은 고작해야 최근 수천 년 동안 형성된 것이지만, 곤충은 무려 4억 년 동안 육상 생태환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성공적으로 공진화해 왔다. 곤충은 생태계의 필수 구성원으로서, 쓰레기를 청소하고 영양소를 순환시키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사실상 모든 유기물을 섭취 활용한다. 다리가 여섯 개 달린 퇴적물 섭식자는 죽은 식물, 죽은 동물, 동물의 배설물을 소비하여 생분해 속도를 크게 상승시킨다. 곤충은 포식자인 동시에 포식기생자로서, 다른 곤충들(초식곤충, 청소부곤충)을 먹어 개체수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곤충의 가장 강력한 천적은 역시 곤충이어서, 대부분의 곤충집단은 다른 곤충집단에게 잡아먹힘으로써 개체수가 조절된다.


(28)

이 같은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에 대해 고생물학자인 데이빗 라우프는 언젠가 이렇게 비꼰 바 있다. “하나의 종이 탄생하려면, 영향력 있는 분류학자가 그렇다고 우기면 된다.”


(46-47)

만약에 외계의 관찰자가 지구의 생물학사를 다시 쓴다면 좀 더 간단명료하게 기술할 것이다. “처음 약 30억 년 정도의 시기는 세균의 시대였고, 그 나머지 시기(캄브리아기부터 현재까지는)절지동물의 시대였다.”라고 말이다. 다세포동물이 등장한 이래 다양성으로 보나 개체수로 보나 가장 성공적인 집단은 단연코 절지동물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곤충은 유구한 다양성의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지난 3억 년의 시기는 곤충의 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에 비해 인간이 문화를 건설한 역사는 겨우 1만 년이다. 세균과 절치동물(특히 곤충)이 지구를 지배해 왔던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78)

동물의 육지 상륙은 인간의 달 착륙보다 훨씬 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동물들이 바다에서 나왔을 때, 건조한 육지에서는 매우 열악하고 험난한 환경이 줄지어 나왔을 때, 건조한 육지에서는 매우 열악하고 험난한 환경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에서 생활하려면 많은 도구들이 필요했다. 첫째, 육상환경의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한 골격계와 자유로운 이동을 위한 운동계가 필요했다. 둘째로, 자외선, 더위와 추위, 탈수로부터 몸을 지켜줄 표피계와 물과 공기 중에서 모두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호흡계가 필요했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동기였다. 오랫동안 안락한 보금자리였던 바다를 뒤로하고 적대적 환경으로 진출하려면 뭔가 결정적인 동기가 필요했다.


(88-89)

지금까지 전갈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으니, 그들에게 사죄하는 뜻에서 이제 전갈의 매력을 하나 알려드리고자 한다 암컷 전갈은 매우 훌륭한 어머니다. 사실 암컷 전갈은 가장 오래된 자녀양육의 모범사례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암컷 절지동물들이 알을 낳은 다음 새끼들에게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하는 것과는 달리 암컷 전갈은 수정란을 몸 안에 품고 다닌다. 암컷은 여러 달 후에 6~90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어미의 축소판처럼 생긴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등 위에 올라타 일주일 이상 머문다. 새끼들은 첫 번째 탈바꿈을 마칠 때까지 어미의 보호를 받다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제 살길을 찾는다.


(141)

데본기 후기와 석탄기에 특별히 많은 식물자원이 축적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막대한 양의 석탄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은 습한 기후 조건 때문만도, 고농도의 이산화탄소로 인한 엄청난 식물 성장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런 요인에 더하여, 초식동물의 소화력을 능가하는 바이오매스가 수백만 년에 걸쳐 생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초의 중요한 나무 소비자인 갑옷바퀴가 등장한 것은 석탄기 후기 이후였고, 뒤를 이어 깍지벌레가 나타났다. 마루를 갉아먹는 딱정벌레들이 다양하고 출현한 것은 페름기에 이르러서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욱 복잡한 나무 소비자 집단이 진화했고, 이에 따라 석탄기에 이루어졌던 식물 자원의 전 지구적 대량 생산을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199)

마지막 남은 삼엽충 한 마리가 얕은 조수 웅덩이에서 먹잇감을 찾다가 맥없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잠시 후 그의 시신은 물 위로 떠올랐고, 다른 삼엽충 시신들과 함께 조수에 휩쓸려 해변 한 구석에 나동그라졌다. 잠시 후 조그만 다리를 가진 곤충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아마도 최초의 바퀴벌레쯤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해변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삼엽충의 시신을 발견하고 우르르 달려들어 갉아먹기 시작했다. 때마침 근처의 고목에 걸터앉아 한가롭게 더듬이를 고르던 딱정벌레 한 마리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잽싸게 날아와 잔칫상에 끼어들었다. 식사를 마친 딱정벌레는 날개를 펼치더니 숲 속으로 되돌아왔다.


(252)

첫 번째 특징은 성충기가 길어서 적어도 두 세대 이상의 공존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비사회적 곤충들은 성충이 알을 낳고 죽어 버리므로, 대부분의 부모들은 생전에 유충들을 공동으로 양육한다는 것이다. 즉 성충들은 다음 세대에게 먹이를 공급하고, 노폐물을 제거해 주며, 포식자와 기생충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성충들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유충들은 무럭무럭 자라 사회의 노동력을 구성하게 된다. 세 번째 특징은 구성원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역할 분담은 엄격한 신분제로 이어진다.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생식능력이 없는 노동자들은 둥지를 짓고, 먹이를 구하러 다니고, 자라나는 유충을 먹여 살린다. 한편 둥지를 지키는 일은 병정들의 몫이다. 병정들은 커다란 머리와 구기의 소유자로, 둥지를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먹이는 노동자들에게 의존한다. 병정들 역시 생식능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흰개미 사회에서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개체는 극소수의 왕과 여왕들뿐이다. 이들은 지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왕족으로, 일단 왕국을 건설하여 1세대 노동자들을 양성해 놓은 다음, 평생 동안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297-298)

적응방산은 신생대에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연선책이 적응방산을 추동한 사례와, 새로운 생명체들이 생태적 틈새를 차지하여 다양화한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선캄브리아기의 경우, 영양분이 풍부한 바다에서 미생물들이 크게 증가했다. 산소가 풍부한 캄브리아기에는 호흡을 하는 다세포생물들이 번성하여, 다양한 외골격 동물들이 바다를 메웠다. 실루리아기에는 풍부해진 오존이 유해한 태양 광선을 여과해준 덕분에 동식물들이 육지로 진출했다. 실루리아기의 동식물들은 해안지대의 틈새로 이주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해, 최초의 육상생태계를 건설했다. 데본기에는 육상식물들이 내륙과 고지대로 영역을 넓혔고, 식물과 곤충이 서로 상대방의 다양화를 촉진했다. 석탄기에는 날개 달린 곤충이 급속도로 증가하여 공중으로 진출했다. 페름기에는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들이 증가하여, 그때까지 아무도 밟아 보지 않았던 생태적 틈새를 개척했다. 페름기 말에는 최악의 대멸종 사건이 일어났지만 생명체, 특히 곤충들은 위기를 잘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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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

진보운동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 얘기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을 받거든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고 그냥 약자, 민중, 이런 말들이 굉장히 추상적으로 들려요. (김종철) 선생님이 일리치 모임 시간에 말씀하셨던 이야기 중에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전쟁을 할 때 하늘 위에서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은 지상의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폭탄을 퍼부을 수 있다는 거죠. 위로부터 보는 관점의 위험성을 말씀하신 거죠. 사람이 구체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표적물로 추상화되어서 보일 때의 위험성을 경고하였어요. 선생님은 그렇게 구체적으로 인간을 보는 감수성을 갖고 계셨어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념이나 자기 생각에 매몰되면 바로 그런 것을 놓치기가 쉬운 것 같아요.


(24)

또하나 선생님의 혜안이 돋보였던 것은, 우리가 학내 직선제를 민주화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데, 김종철 선생님은 직선제가 꼭 좋은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특히 대학이 이미 자본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데 직선제는 욕망을 키워나가는 것을 부추긴다고 보셨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그 말씀도 맞았어요.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총장들의 면면을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형편없는 인물이 총장으로 많이 당선이 됐거든요. 구성원들이 돈 들어가는 일을 요구하고, 돈 잘 끌어오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총장이 되니까요.


(40)

그리고 창당(녹색당)하면서 제기했던 탈핵이라는 안건은 이제 다른 정치세력들도 많이 받아들였고, 기본소득도 그렇습니다. 이재명 지사를 좌담회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녹색당, <녹색평론>이 먼저 제기한 기본소득 이슈를 자기가 잘 써먹고 있다, 미안하고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렇게 저는 몇몇 의제들을 정치의제로 만든 데 녹색당이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보는데요, 지금 다시 정체성을 분명하게 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성 평등이나 소수자 인권은 외국의 녹색당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의제이고, 한국의 녹색당도 기본으로 가져갈 가치입니다. 그러나 녹색당의 정체성을 한 줄로 말한다면, “생태위기의 시대를 맞아 문명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정치를 하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녹색당만이 아니라 녹색가치를 지향하는 운동단체들도 그런 방향성을 잡고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54)

그런데 거기서 김종철 선생님이 진정한 평화는 자발적 가난을 통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는 평소의 지론을 설파하신 거죠. 경제성장과 강력한 무기체계가 뒷받침될 때만 평화가 성취된다는 일반론을 믿고 있는 다수 참석자들로서야 이 의외의 발언에 당혹하고 의아해했겠죠. 그 자리에 있던 꽤 유명한 어느 참석자가 선생님의 사상적 뿌리가 어디입니까하고 물어보더래요. 그래서 김종철 선생님이 우리 외할머니입니다.” 하고 답하셨다는 거잖아요. 저는 이 일화가 선생님의 사상이 선생님의 표현을 쓰면 비근대적농경사회의 토착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고 봅니다.


(65)

(김종철) 선생님이 진정 전하고 싶어 했던 말은 바로 이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에 부단한 최선을 다한다면, 마른 나뭇가지에 푸른 싹이 돋아나는 기적을 우리는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세계적 한국적 차원을 두루 고려한, 이 땅에서 찾기 드문 진정한 생태사상가였다. 나를 포함한 후학들이 이제는 선생님의 생태사상을 이어가야 할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삼가 머리 숙여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72~73)

비겁한 마음이 폭력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쇠퇴는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안팎의 자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도 폭력이 난폭하게 행사되는 것이 당연한 삶의 관행으로 굳어지게 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진정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시의 마음과 생명 공동체> 김종철 선생님 강연 중에서


(121)

게다가 기후변화라는 건 점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꾸준하게 점진적으로 변해서 악화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어느 날 갑자기 돌발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될 수 있습니다. 금년에 태풍이 몇 개 왔습니까. 그저께인가는 미국 뉴욕에 대설이 왔다죠. 스웨덴은 북극권인데 작년에 산불이 났잖아요. 지구사회 곳곳에서 혹심한 가뭄과 홍수, 태풍과 폭풍, 대규모 산불 등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기후재앙은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자카르타가 해수면에 잠겨서 수도를 옮긴다고 그러죠? 미국 플로리다에 마이애미라는 도시가 있잖아요. 부자들이 많이 사는 휴양지죠. 마이애미에서 부자들이 사는 지역은 전통적으로 저지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이 흑인들을 몰아내고 고지대로 이사를 가고 있다고 합니다.


(123)

저는 근대문명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근대문명이라는 게 결국은 자본주의 문명이고 산업문명이죠. 그리고 달리 이야기하면 석유문명입니다. 19세기에는 주로 석탄을 썼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탄소문명입니다. 탄소문명 시대에서 생태문명 시대로 빨리 넘어가야 되고, 그래서 생태, 생명사상이 100년 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저는 무슨 일이든지 결국 사상이 뒷받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경제를 전환해야 되고 문명을 전환해야 되고, 우리 생활을 전환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무턱대고 열심히 한다고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철학과 비전이 있어야 해요.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해주는 게 말하자면 사상적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 후기의 동학사상으로 이어져오는 우리의 전통, 이것을 한마디로 생명사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생명사상이 지금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138)

이명박이 4대강을 파괴한 과정을 보세요. 그 밑의 공무원들, 건설업자들 등등 숱한 사람들이 그저 절차에 따라서 진행하다가 보니까 우리나라 아까운 생태계 보고(寶庫)가 작살이 난 거 아닙니까.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게 꼭 무슨 큰 사건이나 예외적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순응해서 살 뿐입니다. 자기가 자주적으로 판단해서 생각하고 할 공간이 전혀 없어요. 아렌트가 그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아이히만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질문을 못 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없어요. 그렇게 멍청하게 있다가 보면 결과적으로 가공할 악행을 번하게 되는 구조,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는 게 이 시스템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근대의 본질이다, 라고 이반 일리치는 환대를 가지고 설명을 합니다.


(185)

지구온난화를 1.5℃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몇 달, 몇 해가 결정적입니다.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이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기후위기를 무시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당신의 자손들에게 그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입니다. 현재 어린아이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곳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갈 시대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은 정치지도자들에게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할 것을 요청합니다.


(196)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우리 교육을 되돌릴 수 없다는 판단은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우리 교육이 코로나와 같은 비상한 사태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무한 성장주의를 부추기고 인간과 지구의 생태위기를 방관한 우리 교육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이들을 인간자원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효용과 쓸모의 대상으로 전락시켜온 지난날의 교육은 반드시 다른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 전환은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지는 길에 교육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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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

진화생물학자 머렉 콘의 이론입니다. 머렉 콘은 주먹도끼를 만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주먹도끼를 필요 이상으로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 멋지게 만든 주먹도끼를 가져가면 이성에게 잘 보일 수 있었다는 거예요. 훌륭한 주먹도끼를 만들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솜씨가 좋다는, 바꾸어 말하면 머리가 좋다는 증거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걸 섹시한 주먹도끼 이론(Sexy Handaxe Theory)이라고 합니다.


(72)

많은 사람에게 미술은 삶의 부속이나 장식이라는 편견이 있지요. 하지만 미술이야말로 두 발로 걷고 도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우리가 타고난 생존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153)

피카소는 원시미술에서 이 조형 원리를 읽어냈습니다. 그래서 오른쪽과 같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지요. 이 그림도 부분마다 뜯어보면 사람 얼굴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를 보는 순간 이 그림에서 사람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처럼 닮음이 아닌 배치가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조형 원리의 발견은 현대미술의 문을 여는 대단한 한 걸음입니다. 그래서 피카소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167-168)

이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에 새겨진 빗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이처럼 빗살무늬토기의 빗금을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원시미술이 가진 힘이 크게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힘을 인간이 태초부터 품어왔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만 년 전 원시인들이 처음 벽화를 그린 이래 문명은 복잡하게 변화했고, 온갖 기술과 제도도 현란하게 우리 눈을 어지럽힙니다. 하지만 그런 지금도 원시미술은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왜일까요?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원시미술의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그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하는 호모 그라피쿠스가 살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253)

굳이 따지자면 피라미드 건설은 복지 제도에 가까웠어요. 농사일이 없어 놀고 있는 백성들이 일정한 소득을 벌어들일 수 있도록 했던, 고대 이집트식 뉴딜 정책이었던 거죠. 백성들은 일정한 임금을 받으며 피라미드를 쌓았습니다. 돈뿐만 아니라 몸보신하라고 마늘도 나눠줬고요. 몸이 아플 때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잔치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도 작업에 빠질 수 있었다고 하니 노예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354)

어쩌면 그게 미술사를 공부하는 목적일지도 모릅니다. 미술을 통해 긴 시간 인류가 품어온 바람이나 생각을 이해하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미술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로는 무엇보다도 죽음입니다. 이집트인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했고 그 고민을 나름의 미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이 만들어내는 죽음의 예술은 어떤 의미와 고민을 담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고대 이집트인이 만들어낸 죽음이라는 거대한 백과사전 안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29)

사람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저는 여러분이 미술사 공부를 미술이라는 언어를 익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어요. 이 언어를 익히고 나면 그 동안 몰랐거나 오해하고 있던 세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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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1)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들의 나약함과 우유부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과 함께, 출신성분이 혁명가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기초 자료가 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데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드물지만, 이런 이타적인 인간형들은 진정한 혁명가로서의 자질과 존경 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도 그런 유형의 하나였던 것이다.


(193)

좌익 내부의 정적들조차 김삼룡이나 이주하는 말이 통하지만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고 평했다. 먼저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상대방을 설득하다가 안 되면 감정이라도 분출시키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현상은 끝까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끝내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원칙을 관철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정적들이 조선공산당 중앙을 비판할 때 공식적으로 이현상의 이름을 거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상의 원칙이란 것이 상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지도할 때 보여준 그의 융통성과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이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205)

그러나 이현상은 도무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를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급 간부들은 이현상의 심중이 무엇인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짧게 표현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은유나 비유는 사용하지 않았고, 입에서 내뱉은 말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았다. 앞에서 한 말과 뒤에서 하는 말이 다르지 않았고, 정치적 암투를 위해 사람을 모함하거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거짓 호의를 베푸는 일이라곤 없었다. 근본적으로 복잡한 생각이나 정치적 욕심이 없는 담백한 사람이라고 보면 좋았다. 따라서 동료들이나 하급자들은 그가 회의 시간 내내 듣고만 있어도 무슨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어쩌다가 한마디 하면 그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360)

미군이라고 해서 마구 죽이지는 않았다. 미군도 일단 포로로 잡으면 죽이지 않고 며칠 동안 데리고 다니며 교양을 한 다음 살려 보냈다. 이 고지식한 공산주의자는 미워해야 할 것은 제국주의이며 제국주의 국가의 인민들은 다 같은 피해자라는 교리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쫓기는 처지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도 쉽지 않아 쏘아버리자고 주장하는 대원도 있었으나 이현상은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려준 미군들이 유격대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는 바람에 포격을 당하는 일도 생겼지만 이후로도 포로 수칙을 바꾸지는 않았다.


(377)

세속적인 욕심에 무심한 것은 역사를 바꿔온 대부분의 혁명가들이 가진 근본적인 성품이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을 역사의 동력으로 파악하는 역사가들은 혁명가들의 삶에도 이를 적용하고 싶어하여 세계의 혁명사를 당파 싸움으로 대치시키는 데 몰두한다. 그들은 혁명가들의 마음속에 희생과 용기, 이타주의의 고귀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혁명이 시대적으로 주류가 되었을 때 출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앞 다투어 뛰어든 투기꾼들의 행태가 그들의 분석에 근거가 되고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시간 순서대로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끼워넣는데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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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09-08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제가 쓴 이현상 평전 서평이 노동전선 단체에서 출판한 현장과 광장 1호에 실렸습니다.ㅎㅎㅎ

bookholic 2020-09-09 23:39   좋아요 1 | URL
와우,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