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나중에 알아볼 것들을 생각하는 일도 근사하지 않나요? 살아 있다는 게 기쁘게 느껴지거든요.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아요. 우리가 모든 걸 다 안다면 사는 재미가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일도 없겠죠? 그런데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제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으세요? 아저씨가 그렇다면 조용히 할게요. 전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만둘 수 있거든요.


(62)

이런 아침에는 세상이 온통 사랑스럽지 않나요? 시냇물의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와요. 시냇물이 얼마나 유쾌한지 아세요? 언제나 웃고 있어요. 겨울철에도 얼음 밑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요. 초록 지붕 집 근처에 시내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차피 여기서 살지도 못할 건데 무슨 상관이냐 싶으시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해도 전 초록 지붕 집에 시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거예요. 만약 없었다면 그곳에 시내가 꼭 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늘 따라다닐지 모르거든요. 전 오늘 아침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지 않아요. 아침엔 절대 그럴 수가 없어요. 아침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무척 슬퍼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머니가 바라시던 아이는 바로 저이고, 여기서 언제까지나 살게 되었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에는 큰 위로가 됐어요. 하지만 상상의 가장 나쁜 점은 깨어날 때 마음이 아프다는 거예요.


(168)

어머, 어떤 일이든 기대하는 데 그 즐거움의 반이 있는 걸요. 혹시 일이 잘못된다 해도 기대하는 동안의 기쁨은 누구도 뺏을 수 없는 거예요. 물론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실망할 일도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쪽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397)

전 초록 지붕 집에 온 뒤부터 실수를 많이 저질렀는데, 그 실수들은 하나같이 저의 큰 단점들을 고치게 해줬어요. 자수정 브로치 사건으로 제 것이 아닌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됐고요. 유령의 숲 일은 상상에 너무 빠져 드는 버릇을 고치게 해줬어요. 진통제 케이크 사건으로, 요리할 때 신중하지 못한 습관을 버리게 됐고요. 염색 사건을 겪으면서는 허영심이 없어졌어요. 이젠 더 이상 머리나 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오늘 실수는 지나치게 낭만을 찾는 습관을 고쳐 줄 거예요.


(428)

지난 한 해 동안 다들 열심히 잘해 주었어요. 여러분은 즐겁고 신나게 방학을 보낼 자격이 있어요. 밖에서 마음껏 뛰어 놀면서 다음 학년을 위한 건강과 활기와 포부를 가득 채우도록 하세요.


(472)

글쎄, 난 다이아몬드가 없어 평생 위안받지 못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긴 싫어. 난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충분히 만족해. 분홍 드레스를 입은 부인의 보석 못지않게 이 목걸이에 담긴 매슈 아저씨의 소중한 사랑을 난 알고 있으니까.


(475)

전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그저 쓸모없는 가지를 잘라 내고 새 가지를 뻗었을 뿐이에요. 초록 지붕 집에 있는 진짜 제 모습은 한결같아요. 제가 어디를 가든 겉모습이 어떻게 변하든 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요. 마음속엔 항상 어린 앤이 있어서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슈 아저씨와 정겨운 초록 지붕 집을 날마다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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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책을 펼쳐 들면 순식간에 나만 남습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한낮의 카페 한가운데 좌석에서든, 시계 초침 소리만이 공간을 울리는 한밤의 방 한구석에 홀로 기대 앉아서든, 모두 그렇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경험이지만, 그 고독은 감미롭습니다.


(13)

저의 서재에는 물론 다 읽은 책도 상당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서문만 읽은 책도 있고 구입 후 한 번도 펼쳐보지 않은 책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사는 것, 서문만 읽는 것, 부분부분만 찾아 읽는 것, 그 모든 것이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25-26)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중세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 <독일인의 사랑>을 썼던 막스 뮐러는 하나만 아는 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말했어요.


(68)

독서를 즐기는 것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려운 책을 통해 지적인 성취감을 얻는 동시에 독서력에도 도움을 받는다면 그다음에 다른 책을 훨씬 더 즐겁게 읽을 수 있거든요. 가끔은 생소하고 어려운 분야의 책에 도전해보세요. 일단 시작해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힘든 일은 아닐 겁니다.


(77)

왜 하필이면 3분의 2 지점을 보는 거냐면, 저자의 힘이 가장 떨어질 때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 무슨 책이든 시작과 끝은 대부분 나쁘지 않습니다. 저도 책을 낼 때 그렇습니다. 원고를 배열할 때 잘 쓴 걸 앞에 둡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앞쪽부터 읽어나갈 테니까요. 한편 맨 뒤부터 슬쩍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맨 뒤에 넣죠. 바로 그래서 3분의 2쯤을 읽으면 저자의 약한 급소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마저 훌륭하다면 그 책은 정말 훌륭하니까 그 책을 읽으시면 됩니다.


(98)

과학 분야 같은 것도, 중고등학교 때 기본적인 책을 재미있게 읽었더라면 나중에 책 읽기 훨씬 좋았을 텐데 싶어요. 지금은 독서에서 넓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적으로 한창 책에 깊이 빠져든 중고등학교 때 저는 깊이를 더 중시했던 것 같아요. 그게 좋기도 했지만, 특히 십 대에서 이십 대는 책을 넓게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143)

낮 동안에 일하느라 힘들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한 번도 안 가본 곳에 간다거나 그런 게 우리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습관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오히려 쩔쩔매는 시간이에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죠. 그런데 패턴화되어 있는, 습관화된 부분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 인생은 너무 행복한 거죠. 시공간 속에서 매번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세상을 향해서 갑옷을 두르는 게 최상의 행복 기술인데 그 습관 중에 독서가 있다면 너무 괜찮은 거죠. 예를 들어 매일매일이 습관으로 빼곡한데, 모처럼 이번 달 말일에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책을 한번 읽어보자. 그러면 책 읽는 게 행복이 아니라 쾌락인 거예요. 그런데 습관화되어 매일 책 읽는 사람이 있다고 쳐보세요. 저녁 먹기 전까지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면 책을 자동적으로 펼치는 거예요. 그건 행복인 거예요. 똑같이 책을 읽어도 쾌락이 될 수도, 행복이 될 수도 있는 거죠. 다만 쾌락은 지속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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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금세 자랐다. 몇 시간 만에 요람기가 끝났고, 그뒤로 몇 분 만에 아장아장 걷는 시기가 끝났다. 어머니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에 곁에 남은 이모가, 눈이 노랗고 우는 소리가 특이하고 가늘다며 내 이름을 매(hawk)라는 뜻의 키르케라고 지었다.


(101)

그가 말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 키르케. 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 아버지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 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 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 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 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107)

공포가 철썩철썩 나를 때렸고 파도가 한 번 칠 때마다 점점 더 싸늘해졌다. 고요한 공기가 내 살갗을 스멀스멀 가로질렀고 그림자들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내 혈관이 뛰는 소리 말고 다른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한 순간, 또 한 순간이 하룻밤 같았지만 마침내 하늘의 질감이 점점 깊어지고 가장자리가 희부예져갔다. 그림자들이 서서히 사그라지고 날이 밝았다. 나는 다치지 않은 멀쩡한 몸으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누가 돌아다닌 발자국도, 꿈틀거린 꼬리 자국도, 문을 할퀸 흔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엄청난 시련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253)

왜 이래,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잖아. 돼지라서 좋은 점도 생각해야지. 진창 때문에 미끌미끌하고 날렵해서 잡기 어렵지. 땅바닥에 붙어 다녀서 쉽게 엎어뜨릴 수 없지. 개하고 달라서 주인의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지. 찌꺼기든 쓰레기든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라지. 멍청하고 둔해 보여서 적들이 방심하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똑똑하지. 상대방 얼굴도 기억하거든.


(258)

내가 보기에 전쟁은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늘 어리석은 선택인 것 같아요. 거기서 뭘 얻던 간에 몇 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잖아요. 그러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더 크고.”

음 명예라는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 저희 사령관에게 그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줄었을 텐데요.”

뭣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나요?”

하도 많아서 기억을 더듬어봐야겠네요.” 그는 손가락으로 꼽았다. “복수. 욕망. 오만. 탐욕. 권력. 또 뭘 빠뜨렸지? , 허영심. 그리고 자존심.”


(294)

시인들은 잠을 죽음의 형제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대부분의 인간이 느끼기에 그 컴컴한 몇 시간이 생의 마지막에 기다리는 정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의 잠은 그의 인생과 닮아서 엎치락뒤치락했고 늑대들이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잠꼬대가 심했다. 나는 진주색 여명 속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잔뜩 긴장한 어깨. 레슬링 시합에서 쓰러뜨려야 하는 상대 선수라도 되는 듯 잡고 비트는 홑이불. 나와 함께 지내는 일 년 동안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음에도 매일 밤은 여전히 전투 태세였다.


(404)

오디세우스는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걸 좋아했지만 세상에 그와 비슷한 사람은 없었고, 이제 그가 죽고 없으니 그런 사람은 전멸한 셈이었다. 영웅들은 모두 바보라고, 그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그건 곧, 자기를 제외한 모든 영웅이 그렇다는 뜻이었다. 그랬으니 그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어느 누가 바로잡아줄 수 있었을까? 그는 바닷가에서 텔레고노스를 보고는 해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이가 둘이었지만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자기 아이를 제대로 아는 부모는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면 우리가 저지른 실수만 거울처럼 비쳐 보일 뿐이다.


(416-7)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 건. 왜였을까요? 한순간의 자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면 구혼자들은 찾아올 일이 없었겠죠. 제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테고요. 제 삶도.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 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것을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게 끔찍한 인생이 아니면 뭡니까? 사람들을 꼬드겨놓고 내팽개친 게 아닙니까.”


(417)

너희에게 돌아가기 전에 신들이 네 아버지에게 저승으로 들어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찾아가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생전에 알고 지냈던 아이아스, 아가멤논과 더불어 영원한 명성에 대한 대가로 요절을 선택한 과거 아카이오이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의 영혼을 만났지. 너희 아버지는 그 영웅에게 따뜻하게 말을 건네고, 찬사를 늘어놓고, 세간이 널리 이름을 떨쳤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를 나무랐지. 교만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고, 좀 더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425)

저희는 스스로를 탁월한 지성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맨 처음에 결혼했을 때 건드리는 모든 걸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바꾸어놓을 방법을 연구하며 같이 천 개의 계획을 세웠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졌죠. 그이는 아가멤논처럼 형편없는 사령관은 본 적 없다고 했지만 그를 이용해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죠. 그의 기발한 장치로 트로이아를 무찌르고 세상의 절반을 재편했으니까요. 저도 머리를 잘 썼습니다. 어느 염소끼리 교배를 시킬지, 무슨 수로 수확량을 늘릴지, 어디에 그물을 던져야 고기가 가장 잘 잡힐지. 이타케에서는 그런 게 관심사였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이의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구혼자들을 죽였지만 그러고 나니 뭐가 남았을까요? 물고기와 염소. 여신과는 거리가 먼 나이 먹은 아내, 이해할 수 없는 아들.”


(499)

나는 나이를 먹는다. 반질반질한 청동 거울을 들여다보면 내 얼굴에 주름이 져 있다. 몸도 불고 피부도 점점 늘어지기 시작한다. 약초를 썰다 베면 흉터가 남는다. 어떨 때는 그래서 좋다. 또 어떨 때는 허영심이 생겨서 못마땅해진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내 육신의 종착지는 당연히 흙이다. 거기가 내 육신이 있을 곳이다. 언젠가 헤르메스가 나를 죽은 이들의 신전으로 안내할 것이다. 나는 백발이 성성할 테고 그는 영혼을 인도할 때만 유일하게 진지해지는 이답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길 테니 우리는 서로를 거의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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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오디세우스는 고개를 숙인다. “맞는 말일세. 하지만 명성이라는 게 희한한 물건이란 말이지. 죽고 난 다음에 영예를 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미해지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 세대에서는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 다른 세대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는 넓은 손바닥을 편다. “기억의 대량학살 속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야.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그는 미소를 짓는다. “나중에 내가 유명해질지도 모를 일이지. 자네보다 더 유명해질지.”

글쎄요.”

오디세우는 어깨를 으쓱한다. “아무도 알 수 없지 않겠나. 우리는 잠깐 타오른 횃불의 불길과도 같은 인간에 불과하지 않은가. 후손들은 자기들 내키는 대로 우리를 추켜세우거나 깍아내리겠지. 파트로클로스도 나중에는 추앙을 받을지도.”


(423-424)

당신은 케이론이 그를 망쳐놨다고 했죠. 냉정한 여신이라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그를 망쳐놓은 사람은 당신이에요. 그가 이제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됐는지 보세요.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일로스를 죽이고. 비통한 마음에 저지른 잔인한 일들로 기억되잖아요.

그녀의 얼굴은 돌과 같다. 꼼짝하지 않는다. 해가 뜨고 저문다.

신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들이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겠죠. 하지만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은 워낙 쉽게 목숨을 잃는 것을요. 그를 또 한 명의 피로스로 만들 작정입니까? 그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세요.

더 풍성하게라니?” 그녀가 묻는다.

이제는 그녀가 두렵지 않다. 그녀가 내게 또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헥토르의 시신을 프리아모스에게 돌려줬잖습니까. 내가 말한다. 그것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어야죠.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리라를 연주하는 솜씨가 훌륭했죠. 목소리도 듣기 좋았고요.

그녀는 계속 기다리는 눈치다.

그리고 여자들. 다른 왕들 손에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그들을 데려왔잖습니까.

그건 네가 한 네가 한 일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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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완벽하게 승리한 역사였다면, 우리 스스로 완전한 독립을 이뤄냈다면,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이뤄졌다면 아마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길을 좇으면 좇을수록 아쉬움이 계속 커졌다. 항일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애국지사들은 너무나도 힘겹게 투쟁을 이어갔겄만, 끝내 영광을 잇지는 못했다. 영광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했다. 숱한 애국지사들이 도리어 억울하게 살다가 안타깝게 죽어갔다.

(51)

효창공원 입구부터 거대한 축구장(효창운동장)이 있습니다.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 남쪽을 막고 있습니다. 효창운동장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9 <2회 아세아축구선구권대회> 개최를 구실로 독립운동가의 표를 이장하고, 운동장 건설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효창원에 경찰을 배치해서 시민들의 참배를 막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만행이 이 전 대통령이 쫓겨난 뒤에도 계속된다는 점입니다. 1969, 박정희 정권은 김구 선생과 삼 의사 묘역이 능선으로 이어진 머리 쪽에 느닷없이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을 세웠습니다. 일본군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 때 만들어진 건데, 이 역시 반세기 넘게 김구 선생의 묘역과 삼 의사 묘역 머리 쪽에 버티고 있습니다.

(55)

김구 선생이 1946년 고국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했던 일이, 당시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단장 박열 선생을 통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수습해서 국내로 모셔오게 한 것이다. 의거 이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위해 국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긴구 선생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70)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이 탄생한 곳 서금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장소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 명명된 국가가 만들어진 곳이며,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이 정립된 곳이다. 우리 헌법이 세계만방에 공표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반복되는 건국절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99)

선생(예관 신규식)의 집을 나오니 빗줄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더 아쉬웠나 봅니다. 임시정부의 기틀을 마련했고, 외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까지 맡으셨던 분의 거처치고는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운 좋게 선생의 집에 거주하는 중국인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집 안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지만, 선생의 거주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번째, 두 번째 청사처럼 아무런 표식조차 없었습니다.

(136)

한번 상상해보자. 이름만 알던 지인에게 무려 현상금 200억 원이 걸렸다. 정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다. 결코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남남에 가깝다. 만에 하나 그 사람을 숨겼다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내 몸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런데 지인이 갑자기 나를 찾아와 숨겨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혹자는 거절에 그치기는커녕 현상금 200억 원에 눈이 멀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 1932, 중국인 주푸청 선생에게 찾아온 선택의 갈림길이었다. 그리고 선생은 200억 유혹을 뿌리쳤다.

(142-143)

김철 선생은 1932 1, 이봉창 의사 일왕 저격 사건, 같은 해 4 29일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장을 역임하며 김구 선생과 같이 대업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제의 핍박이 더욱 거세지자, 1932 5 10,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청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 등 임정 주요 인사들이 자싱에 피난처를 마련하는 동안 김철 선생은 자신의 숙소인 청태 제2여사 32호실에 임시정부 판공처를 설치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지속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178)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2015 12 1, 정식 개관했다. 위안소를 주제로 한 전시관 중 압도적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다. 2003 11 21, 박 할머니가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증언하자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 난징 중심부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3,000m^2 규모로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진열관 가운데에는 마당이 있는데, 한쪽 벽면이 70명의 할머니 얼굴 사진으로 구성돼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70명 할머니 중 다수가 한국 출신이다. 광장 가운데 박영심 할머니가 위안부 시절 임신했을 당시 모습이 동상으로 서 있다.

(215)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인사들이 그대로 미 군정에 부역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러난 일제의 자리를 미 군정이 채운 상황, 한평생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정정화 여사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어렵게 서울에 자리를 잡았지만, 믿고 의지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9 6 26일 암살당했다. 이후에 시련의 연속,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40년 지기이자 독립운동 동지였던 남편 김의한이 납북되었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 여사는 부역죄로 끌려가 투옥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 여사는 1991년 사망할 때까지 세상에 나서지 않고 조용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 이어진 독재정권이 그들을 가만히 두지않았다.

(230)

황포군관학교는 항일 애국지사 청년들이 군사 간부 훈련을 받던 학교다. 1924 6 6, 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설립되었다. 소련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설립한 소련식 사관학교이며 정식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 그러나 주강의 황포 장주도에 위치한 탓에 흔히 황포군관학교라고 부른다. 당시 장제스 총통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피압박민족 후원으로 조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며 대우하자, 지망생이 증가했다. 조선 청년들은 신식군관학교인 황포군교에서 새로운 정치와 군사를 배우고자 모여들었다. 의열단 의백 김원봉과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그 중 한 명이다. 김원봉 장군을 비롯한 의열단 간부들은 군관학교 4기로 대거 입학했다. 학생명단에서 확인한 인원만 73명이다. 무한분교까지 따지면 무려 200명이 넘는다. 이들은 황포군교 졸업 후 <조선혁명간부학교>로 이동, 조선 청년들의 군사간부 양성에 힘썼다. 결과적으로 1938 10 10, <조선의용대> 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335)

조명하 선생, 아마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 조명하 의사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거짓말인 줄 알았다. 마치 무협지 주인공처럼, 혼자 무공(?)을 연마했다. 단도 한 자루를 던져 의거에 성공했다. 그것도 당시 히로히토 장인이자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를 없애 버린 것이다. 1928 5 14, 대만 타이중에서 의거한 스물네 살 청년 조명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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