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공부란 자신을 아는 길이다. 자신의 속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신이 무엇에 들뜨고 무엇에 끌리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아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공부란 이렇게 자신의 꿈과 갈등을 직시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문이다.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그리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 이 점에서 공부에는 끝이 없다.

 

(34)

성적을 위한 공부든, 세상을 알기 위한 공부든,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를 이길 사람은 없다. 그래서 더욱, 공부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모두가 공평하게 공부하고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63)

진정한 를 찾은 사람이 주체적 개인이 된다. 자신의 분야에 진정성을 가지고 꿈을 키워가는 열정은 우열을 나눌 수 없다. 주체적인 개인은 서로를 존중하며 연대한다. 주체적 개인의 연대는 진정한 의 어울림이다. 갖가지 색깔을 가진 개인이 어우러지는 무지개 같은 연대는 개인을 더욱 창조적으로 만들고 사회를 더욱 풍성하고도 다양하게 만든다.

 

(79)

요컨대, 노력하는 둔재는 게으른 수재를 이길 수 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고 우보만리(牛步萬里)’.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분야에서 꾸준히 공부하는 인간으로 살아야 삶에 뿌리내릴 수 있고 더 나아가 행복해질 수 있다. 공부를 즐기는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내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공부의 출발은 호기심이고, 공부의 성공 조건은 노력이다.

 

(119)

한자로 사회(社會)’회사(會社)’는 어순만 다르다. 그러나 두 단어의 의미는 완전히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사회는 민주의 원리가 작동되지만, ‘회사는 이윤의 논리가 작동되는 곳이다. ‘회사사회위에 서면 민주주의는 죽는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회사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 고원 교수의 정확한 지적처럼, 선진국에서 민주주의가 깊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민주주의가 정치적 자유의 수준을 넘어서 그 사회구성원의 실질적 삶에 직결되는 사회권(social right)’의 실현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켰기 때문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3)

변화를 일으키는 결정적 순간은 이성으로는 억지할 수 없는 강한 감성의 힘이 자신을 지배할 때다.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그 무엇, 배꼽 아래에서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이 있어야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런 감정적 떨림 없이는 잘못을 인지하고도 행동하지 못한다. 지식 습득을 통해 머리로 깨닫는 것, 가능하다. 그로 인한 변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가슴 떨림과 만나야 또 하나의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공부는 이런 것 아닐까? 찰리 채플린의 명작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연설에 나오는 명대사는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영리함은 우리를 딱딱하고 불친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만 너무 적게 느낍니다.”

 

(211)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니다.” –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님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지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가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선생님

 

(232)

그렇다. 냉소하고 체념하면 안 된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은 두려움과 용기에 대해 마음 속의 용기야말로 비록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아도 점점 성장해서 커다란 나무가 되는 것이다라며 의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용기라도 커다란 나무가 될 날을 상상하자.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을 극복해나가자라고 토닥인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가진 권력이나 부의 크기가 아니라 정신과 기백과 영혼의 크기로 결정 난다. 세속의 삶에서 평민으로 살면서 사회귀족의 눈치를 보고 머리를 숙이고 무릎 꿇는 일이야 있겠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내면에서 굴종이 일어나선 안된다. 인간의 내면은 온전히 그 자신만의 것이다. 내면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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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사란 그 터무니없이 큰 나무와 같은 존재다. 건드려보고 즐겨봐도 어느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모조모 사용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하지만 광막한 들판에 서 있는 나무는 우리를 소요하게 만든다. 거기서 인생의 영욕과 의미,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내는 세상의 흐름을 사색할 수 있다. 역사란 이 큰 나무처럼 우리에게 좀 더 크고 긴 안목을 주는 쉼터다.

 

(178)

관중은 굴러온 돌이었기에 기반이 없었다. 또 관중은 명문거족 출신이 아니기에 줄타기도 할 수 없었다. 관중, 포숙, 소홀은 의리와 실력으로 뭉친 선비 집단이었고, 이들은 오직 공과에 의한 작위를 주장함으로써 좀 더 진일보한 세대를 열고자 했다. 물론 관중 사후 제나라는 다시 거성귀족들이 차지하게 되지만 광중의 시도는 춘추시대 첫 번째 관료제 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중의 정책들은 실로 다양하고, 그의 말과 행동은 개성이 넘친다. 그러나 관중을 생각할 때는 부귀한 말년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실력을 믿고 떠돌던 청년기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현실정치의 살벌함을 피부로 실감하던 장년기에 바로 관중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210)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군주와 신하의 재능을 나눈다. 신하는 군주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으며, 또 군주는 신하의 재능을 다 가질 필요가 없다. 군주는 신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으면 그만이다. 그 나머지 일들은 신하들이 한다. 군주는 신하들이 최선을 다해서 달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큰 인재와 작은 인재를 구분할 능력이 있으면 어떤 조직이든 다스릴 수 있다. 술을 좋아해도 술의 폐해를 알고 있으면 인재를 쓸 수 있다. 다혈질이라도 남이 제어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자신은 허명을 쫓더라도 실속 있는 사람을 옆에 구면 된다. 제나라 환공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238)

고대 전제정치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대대손손 부귀를 누리자는 것이다. 그러자면 성을 쌓아야 하고, 궁정을 크게 지어 권위를 높이고, 공실의 창고에 재물을 채워넣어야 한다. 그러나 관중은 말한다. 열심히 성을 쌓고 권위를 높이고 공실의 창고를 채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바로 백성들이 열심히 생산하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생산한 부가 어디로 가겠는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그 나라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고, 그러면 나라가 부유해진다. 나라의 사람들이 만족하면 공실은 안정된다. 굳이 농민들의 노동력을 과도하게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관중은 백성들의 시간을 뺏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누군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두렵다고? 그러면 스스로 오래된 사람들을 존경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그런 기풍 속에서 산다면, 함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설 땅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관중이 공실을 안정시키는 방법이었다. 관중의 방법은 향후 2천 년이 훨씬 넘는 동안 여러 가지 변주를 울리며 중국사에서 위세를 떨친다.

 

(337)

그러나 명백한 것은 관중과 환공이 먼저 동쪽을 제패하고, 남쪽으로 초나라를 눌렀으며, 북쪽 융적의 동남진을 막았다. 말년에는 중원과 서방의 문제까지 끼어들어 혜공을 세우고 융을 공격하여 진()의 명백을 이었고, ()의 동쪽을 두드려 겁을 주고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하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과연 동서남북에서 일광천하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관중이 환공을 보좌하여 한 일이다. 춘추시기의 환경에서 이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관중과 환공의 조합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358)

포숙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포숙은 군자입니다. 천승의 나라라도 도로써 주는 것이 아니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지나치게 미워합니다. 한 가지 악을 보면 종신토록 잊지 않습니다.”

평생을 함께한 마음의 친구에 대한 관중의 정당한 평가였다. 이 말에는 포숙에 대한 진정한 우정이 묻어난다. ‘정치, 그것 정말 할 만한 것인가? 포숙은 좀 물러나서 인성을 보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러자 환공이 다시 묻는다.

그런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습붕이면 됩니다. 그 사람은 잘 알면서도 아래 사람에게 묻는 것을 좋아합니다. 신이 듣기로 덕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이를 인하다 하고, 재물을 나누어주는 이는 선량하다 합니다. 참함으로 남을 이기고자 하면 절대 복종시킬 수가 없고, 착함으로 남을 길고자 하면 복종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에 임해서는 남모르게 하는 일이 있고 가정에 임해서도 남모르게 하는 일이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습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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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장서는 그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서란 그 주인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취향과 필요 때문에 한 땀 한 땀일군 책의 컬렉션을 말한다.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읽지도 않을 책을 장식용으로 마련했거나, 주위에서 선물받은 것으로 채워져 있거나,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기호가 아닌 그냥 방치된 책의 무더기는 장서가 아니다. 그래서 장서를 잠시만 둘러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43~44)

흔히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준다고 한다. 같은 글이라고 해도 나이에 따라, 처지에 따라, 생각의 깊이에 따라 새로운 감동과 공감을 준다는 말인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책을 읽다 보면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져서 읽지 않고 넘어가는 구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 책을 다시 읽다가 그 부분을 자세히 읽으면 어찌 되었든 처음 읽는셈이다. 두 번째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처음 읽는 것이라서 첫 독서 때에는 없었던 생각과 공감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두고 읽을수록 새로운 감동이 느껴진다라는 고전의 미덕을 경험했다고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처음 읽을 때부터 꼼꼼하게 읽어서 같은 내용을 다시 읽더라도 감동할 수 있다는 말도 틀리지 않고,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하는 독자도 많다. 다만 나의 경우는 처음 읽는 내용을 잊어버린다든가 건너뛰어서 두 번 이상 읽어야 처음으로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읽은 책인데도 그 내용을 궁금해하면서 읽는 경우도 허다하다. 두 번째 읽는 책인데도 처음 읽은 것과 진배없이 낯설고 신선한 경우가 허다하다.

 

(57)

노년에 이른 분들의 서재를 보면 주인과 함께 늙은 것을 자주 발견한다. 서제에 꽂힌 책이 대부분 주인이 젊은 시절에 모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서재를 보면 주인이 어느 시대에 젊었는지 한눈에 보인다. 특정 시대의 책들로 이루어진 서재를 보면 왜 노년이 되어서 독서를 게을리하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이제 요즘은 나도 새 책을 사기가 주저된다. 꼭 서재가 꽉 찬 탓만은 아니다. 산다고 해도 버릴 책이 태반이다. 졸지에 재활용 박스에 들어가거나 지역 도서관에 기부되는 책들은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이거나 유치하다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속절없이 내 방에서 쫓겨 가는 비운을 맞이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책에 담긴 지식과 이야기가 일정한 주기를 두고 재생산되어서인 듯하다. 새 책을 사서 실망하는 것보다는 내 서재에 있는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두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모비 딕>을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복해가는 즐거움도 크지 않을까.

 

(63~64)

이렇듯 뜨거운 동지애를 발휘하는 애서가들조차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 두 부류가 있다. 책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와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부류가 그들이다.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함부로 다룬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심지어는 침을 묻혀가면서 읽는다. 또 읽다가 멈출 때는 스스럼없이 다음에 읽어야 할 부분을 접는다.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애서가는 책을 마치 보물처럼 다룬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고 반드시 책갈피를 사용하며 심지어 책 표지의 띠지조차 소중히 여겨서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이런 부류가 책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사람을 보면 그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어떻게 책을 그렇게 험하게 다룰 수 있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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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08: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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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9 23: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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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취임한 지 석 달이 가까워 옵니다만, 지금까지의 그의 언행은 국가권력을 사익을 위해 사용해온전임자들과는 무척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운영의 책임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들에 대한 설명책임과 시민들과의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으면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시점에서 국가에 주어진 첫 번째 과제는 사회적 약자를 우선적으로 돌보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취임 직후 그가 가장 먼저 발표한 정책제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그리고 젊은이들의 일자리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국회 안팎에 아직 광범하고 뿌리 깊게 포진해 있는 기득권세력과 수구 언론들의 완강한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조치를 단행하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11)

민주주의는 복잡한 이론을 필요로 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민중의 스스로의 운명과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하는, 즉 자기통치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정치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윤리적으로 커다란 위기상황에 처해 있고 핵전쟁의 가능성도 여전히 상존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려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파스트트들이나 유사 파시스트들은 주장하지만, 실제로 가장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천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 점을 지금 한국에서촛불혁명'의 성과로 모처럼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그동안의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살리기 위해서 진행하고 있는 여러 실험들은 일본의 여러분의 주목과 관심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5)

이런 면에서, 영미권의 산업 민주주의란 독일의 경제 민주주의와는 달리 그 폭이 좁아요. 생산 현장 중심이죠. 독일의 경제 민주주의는 사회경제 시스템 전반을 민주화한다는 구상인데, 영미식 산업 민주주의는 현장 노동자의 집단적 권리(단결권, 교섭권, 행동권, 참여권) 보장을 골간으로 해요. 이런 점에 견주면, 우리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균형 성장, 적정 분배, 남용 방지, 주체 조화)은 영미식 산업 민주주의보다 범위는 넓지만, 내용이 좀 추상적이에요. 특히 국가의 경제 개입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민주화라기보다 국가화라고 할 수도 있겠죠.

 

(17)

그래서 예컨대, 제대로 된 일자리도 만들고 노동시간도 단축하고, 청년들이 자신의 꿈에 따라 공부하고 사회에 나와도 고른 대우를 받으며,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의 경영 참가도 적극 보장하고, 주거나 교육, 의료나 노후 문제를 사회 공공성 차원에서 해결해내는 새 해법들이 나와야 해요. , 경제민주화란 살림살이를 행복하게 하자는 거요.

 

(24)

-정치,경제 민주화가 이뤄진다면 일반인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지겠죠. 아이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꿈을 꿀 수 있고, 어른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겠죠. 더 이상 헬조선이 아니겠죠. 물론 이 모든 건 지난한 과정이라 긴 시행착오와 학습과정이 필요해요. 시간도 걸리죠. 중요한 건 나부터 깨어난 시민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또 여럿이 더불어 토론하고 여론을 만드는 거죠. 또 현 선거제도의 맹점을 고쳐나가면서(연동형 비례대표제, 결선투표제 등의 도입을 통해), 정치,경제 민주화의 의지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선거에서 뽑아야죠. 이렇게 되면 일반인들도 정치,경제에 더 많은 관심과 책임감을 느끼게 될 거예요.

 

(48)

결국, 뒤떨어졌다고 하는 아시아인들을 근대화시키기 위한 서구인의 노력은, 그것이 아무리 진지하고 이타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존경과 감사는커녕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토착민들은 자신들이 깃들어 살던 오래된 사회적, 정치적 질서로부터 쫓겨나고 또한 서구적인 것이 지배하게 된 세계에서 인간적 존엄성이 부정된 결과, 늘 서구를 서구 자신의 게임법칙으로 패배시키기를 꿈꿨다. 앙드레 말로의 예언적 소설 <서양의 유혹>(1926) 속에 등장하는 중국인 지식인은 유럽은 지금 유럽식 옷을 입고 있는 이 모든 젊은이들을 이미 정복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른바 유럽의 비밀이라는 것을 알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비밀 중 많은 것을 지금 아시아인들은 손에 넣었다.

 

(51)

세계화 경제의 수혜자로서 이 아시아인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이미지는,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목적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신감에 찬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인도는 경제의 세계화로 인한 단절을 중국보다 훨씬 더 눈에 띄게 드러내고 있다. 인도는 경제의 몇몇 부문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함으로써 사회 전체에 기대감을 높여놓고는 그 혜택은 매우 좁게 분배하고 있다. 그리고 환멸과 좌절을 느끼는 사람들의 수를 확대해온 결과, 허다한 사람들이 흔히 포퓰리스트와 종족주의적인 정치가들이 먹이가 되고 있다.

 

(116)

왜 많은 나라가 공론조사를 정책결정에서 주요한 기준으로 활용할까? 그 이유는 공론조사 방식이 갖는 탁월한 장점 때문이다. 공론조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쟁점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1차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1차 조사 결과의 의견 분포 및 인구통계학적 특성(지역별, 계층별, 성별, 세대별 등)과 일치하는 토론 참여자 표본을 선발한다. 표본은 많을수록 좋지만 토론 장소의 협소성과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어야 한다.(우리나라 핵발전소 문제에 있어서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301~501명 정도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155)

높은 질의 삶을 지향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한 자연스런 흐름이다. 이 덕분에 한 사회의 문화는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흐르며 변화무쌍해진다. 특히 혁신적인 기술의 산물이 등장했을 때에는 유행처럼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 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가 초래한 것은 인류가 예상치 못했던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라는 심각한 부작용이었다. 이러한 위기는, 우리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되묻게 한다. 결국 우리는 인식하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은 대규모의 산업적 기술보다 지역에서 자급자족에 필요한 기술이며, 지나치게 첨단으로 가기보다는 오래된 전통 기술과 눈높이를 맞추는 절충된 기술이라는 것을 말한다.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자원과 인력으로 짓고, 만들고, 고치고, 사고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다. 거대 산업기술이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는다면, 자급자족을 위한 기술은 덜 위험하고, 폐해를 일으키더라도 회복이 가능하고 빨리 복원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적정기술의 철학으로서, 도시든 농촌이든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어떤 기술을 어떻게 개발하고 쓸지에 대한 기준이 된다.

 

(169)

결론적으로, 나는 확신을 가지고 강조한다. 사회적 자본과 사회안전망도 없는 상태에서 마을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다. 사회적 자본의 비무장상태로, 사회안전망의 무방비 상태로 추진하는 모든 공동체사업은 사기이거나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평균적 능력의 주민,시민들은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 안전하게 사는 문제에 일상과 평생을 진력해야 하는 절박한 숙명에 처해 있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운데 이웃과 공동체를 챙길 여력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개인들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바람대로 기계적 연대를 벗어나 사회적 분업을 통한 유기적 연대로 옮겨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 폭주하면서 사회가 혼돈상태에 빠지고 규제가 도통 먹히지 않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를 걱정하는 현대사회의 실상이 아닌가.

 

(198~199)

동생 허균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누이가 생전 꿈에서 받아 적은 시에 푸른 바다 아득히 요해에 잠기고 푸른 난새 채색 봉황에 기대었는데 붉은 연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 내린 차가운 달빛 아래 떨어지네라고 하더니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3 9를 곱하면 27로 누이의 나이와 같다. 사람의 일이란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어 피할 수 없음이 이와 같단 말인가?

 

또 평하기를,

 

  누이의 시는 모두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유선시를 즐겨 지었는데 시어가 모두 맑고 깨끗하여 익힌 음식을 먹는 속인들은 따라갈 수 없다. ()도 우뚝하고 기이한데 사륙문(四六文)이 가장 좋다. 백옥루상량문이 세상에 전한다. 둘째 형(허봉)은 일찍이, “난설헌의 재능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이백과 이하가 남긴 노랫말을 읊은 것이다라고 평했다. , 살아서는 부부 금슬이 좋지 못했고, 죽어서는 제사 받들 자식이 없으니 아름다운 구슬이 깨져버린 원통함이 그지없다.

 

(204)

내가 대학시절 잘 읽었던 소설가 중에 이병주라고 있다. 특히 식미지시대를 신문기자처럼 혹은 역사가처럼 관찰하던 시선과 간결한 문제가 인상적이었지. 조금 엘리트주의적이었지만. 신화를 공부하면서 그때 그가 어떤 연재소설 앞머리에 붙였던 제사가 퍼뜩 떠오르곤 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말. 나는 이제껏 역사와 신화를 이보다 더 자신 있게 비교하는 말을 본 적이 없어. 우선은, 역사와 신화가 낮과 밤처럼 다르다는 뜻이겠지. 태양은 양이고, 달은 음이야. 태양이 질서와 논리라면, 달은 혼돈과 주술이야. 낮이 의식과 이성이면, 밤은 무의식과 감성일 테고. 낮에는 일을 하고 기록한다. 밤에는 잠을 자고 꿈을 꿔. 기록에 대해서는 기억이겠지. 역사가 사실과 관련이 있다면, 신화는 허구요 마법과 관련이 있지. 시간에 대한 인식도 아주 달라. 역사의 시간이 직선이든 나선형이든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발전의 그것이라면, 신화의 시간은 발전과는 상관없어. 그저 텅 빈 시계판 위를 빙빙 돌 뿐이야. 역사에는 종언이 있어도, 신화에 대해서는 종언을 말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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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자유가 없다면 인문정신은 숨을 쉴 수도 없고, 창조적인 수많은 작품도 존재할 수 없다. 내게 가끔 생기는 장난기가 강연장에서 또다시 도졌다. 아니, 지금 자유로워 보이는 젊은 대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강연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한 편의 시를 읽었다.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어서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21)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공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체제가 우리를 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약하게 외칠 것이다. “저는 한계를 지켰는데, 왜 그러세요?” 너무나 어리석고 나약한 한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허용된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23)

시는 소설이나 희곡처럼 단순히 문학 일반에 속하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다. 시는 문학의 가능성이다. 형식도 모방하지 않고 내용도 모방하지 않아야 시가 된다. 혹은 형식도 강요되지 않고 내용도 강요되지 않아야 시가 된다. 그렇다. 시는 글로 표현된 자유정신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시는 난해하다는 인상이 든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일체 외적인 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니까 느끼고 욕망하고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시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자유를 행사하는 진정한 시인 경우에는 어디엔가 힘이 맺혀있어야만 한다는 역설한다. 그의 말대로 진정한 시에는 반드시 시인의 자유정신이라는 보석이 박혀 있기 마련이다. 시인 자신이니까 살아 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자유가 없다면 시를 썼다고 해도 쓰지 않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45)

그가 쓰고 싶었던 자신에게 철저한 글, 즉 시가 어떻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다른 장르의 글과 달리 시는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글이다. 시를 읽는 것은 당연히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속내와 그 삶을 읽는 것이다. 어떻게 타인의 속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 읽기의 어려움은 수학이나 철학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46)

이제 더욱더 궁금해진다. 김수영은 가슴에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김수영은 시인이 되려고 했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이상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시인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지금부터 차근차근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숙고해 보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시인은 평범한 일반 사람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다. 일반 사람은 관습이나 교육에 따라 사물이나 자신을 이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세계와 불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세계가 조율한 대로 소리를 내니, 타인이나 사회와 불화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시인은 투철한 자기 이해에 이르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관습의 목소리나 타인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에서 추방할 수 있고, 나아가 잃어버린 자신만의 목소리를 되찾아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55)

그래서 그는 사태와 자기가 하나로 붙어서 생긴 타성을 이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을 보면 된다. ‘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에 한두 번이나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부닥치는 동안에 내 딴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이랄까-그런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나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본의 아닌 철학자가 된 셈이다.”

 

(123)

바로 이것이다. 김수영이 추구했던 새로움은 단독성의 발견에서 오는 새로움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지금 독자들에게 그리고 앞으로의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단독성을 발견했기 때문에 새로울 수 있었고, 단독성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행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얻었다. 반면 김춘수와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시적 테크닉은 시도했지만 단독성을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당연히 그들의 시는 그만큼 시적 보편성도 상실했다. 김수영이 동시대 모더니스트들과 자신이 다르다고 확신하도록 한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흥미롭지 않은가. 머리로만 쓰는 시와 온몸으로 쓰는 시가 이토록 확연히 다른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말이다.

 

(144)

그가 시인은 영원 배반자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 시인은 모든 면에서 백치가 될 수 있지만, 단 하나 시인을 발견하는 일에서만은 백치가 아니다.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밖의 모든 책임을 시인으로부터 경감하라!” - <시인의 정신은 미지>(1964.9)

 

(153)

불행히도 모든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순간, 당연히 가정이든 학교든 군대든 회사든 권력을 쥔 자들로부터 탄압받기 마련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로부터 스스로 단독성을 부정하는 개인들이 탄생한다. 외적인 탄압과 억압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과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그들이 유니폼, 즉 동일한 형식을 즐기는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제스처를 버리고 권력이 허용하는 제스처를 취해서 자신의 단독성을 은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폐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성,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159-160)

시는 나니까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의 구분도 사라질 것이며, 서로가 자기 삶의 형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즉 김수영이 말한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원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현재의 시는 무효가 될 것이다. 현재의 시에는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는 모습보다는 그것을 꿈꾸는 이의 설움이 묻어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순간, 그들의 말과 행동은 서러운 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히 긍정적인 시가 될 것이다. 이런 낙원을 꿈꾸면서 당분간 시인은 타인의 제스처가 아니라 자신의 제스처를 만들어 삶을 살아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단독성을 회복할 때까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173)

눈이 시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눈은 하늘이란 지고한 권좌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여 구체적인 곳으로 내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은 순수하고 고결하다. 신처럼 모든 것을 관조하지 않고, 스스로 더러워질 것을 감내하면서도 기꺼이 모든 것과 함께 하려고 한ㄷ. 눈은 더러운 진창도, 썩어 가는 시체도, 악취를 풍기를 오물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덮어 고결하게 승화시킨다. 눈 내리는 날 세상의 모든 존재는 빈부, 미추, 선악, 강약을 넘어서 동등하게 변한다. 부자의 집도 빈자의 집도 똑같이 흰 지붕이 되고, 대학 교수의 머리에도 구걸하는 아이의 머리에도 똑같이 흰 눈이 쌓이니까 말이다. 하늘과 땅이 지배와 피지배를 상징한다면, 눈은 지배 의지를 극복하고 구체로의 비약을 도모하는 시인 정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185-186)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시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망하게도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다. 김수영의 말대로 생각하면 서러운일이다. 보통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거나 완성되기 위해 지혜로운 사람이 교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통찰이 옳ㄴ다면, 이게 우리는 누구에게 기대서도 안 되고, 누가 기대는 것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되기 때문이다.

 

(197)

김수영은 시의 다양성과 문화적 실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시의 다양성은 시인들의 삶이 각기 다른 만큼 불가피한 것이고, 시의 실험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려는 시인들의 투철한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의 제스처도 흉내 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자신의 제스처로 살아가겠다는 사상은 진정한 시인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사활을 건 문제다. 이런 사상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시적 형식과 테크닉의 모색은 단지 원숭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남의 말을 자기 말인 것처럼 지껄이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화려하고 현란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쟁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를 완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238)
어느 개인이 공동체가 각인시킨 시선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노예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불온한 주체가 된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불온한 주체에 직면했을 때 공동체가 어떻게 몸을 도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적 인식에 이른 주체의 행동과 말은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릴 것이고, 그것은 마침내 무서운 전염병처럼 공동체를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킬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이 있다면 어떤 모양의 새로운 것이냐는 김수영의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된다. 그는 어떤 새로움도 좋다는 식의 새로움 강박증자는 아니었다. 물론 그가 기존의 낡은 시적 표현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거부한 것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자신만의 삶과 표현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김수영에 따르면 이런 억압을 뚫고 새로운 것을 모색할 때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것, 혹은 시적 인식이 가능한 법이다.

 

(267)

자유의 방종은 그 척도가 기준이 사랑에 있다는 것만을 말해 두고 싶습니다.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자유는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라고 볼 수 없지만,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호흡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환경에서는 여간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분간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이 순결하면 순결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기도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사랑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의 방종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세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백이면 백이 거의 다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의 자유가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를 방종이라고 탓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요즈음 느끼는 일>(1963.2)

 

(330)

어쨌든 시인은 자유를 노래하는 자유로운 존재여야만 한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시인이라고 자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과 시인들이 현실적 자유를 회피하고 관념적인 자유로 후퇴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들은 시를 적당한 감각적인 현대어를 삽입한 언어의 조탁이나 세련되어 보이는 이미지의 나열과 구성으로 썼다. 몽상과 상상의 자유라고나 할까? 그들은 시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을 현란하고 낯선 이미지의 시나 아름답고 예쁜 시를 만들어서 증명하려고 했다. 김수영에게는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예술파 시인들에게는 현실과 자신에 대한 “7할의 고민”, 즉 사상이 부재했다. 그러니 그들은 현실에 무기력하기만 한 시만을 쓸 수밖에 없었다.

 

(334)

시인이 가야 할 길은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지도자라는 형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문주의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표자와 피대표자라는 이분법 때문에, “작가는 달리지 않고 군중만 달리게 하는아이러니한 권력 현상이 발생한다. 어쩌면 참여파 시인은 자신이 왜 현실을 극복하려고 했는지 망각한 불행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유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339)

오늘날의 시가 골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회복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의 상실이라는 가장 큰 비극으로 통일되어 있고, 이 비참의 통일을 영광의 통일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자유를 읊고, 또 자유를 산다. 여기에 시의 새로움이 있고, 또 그 새로움이 문제되어야 한다. 시의 언어의 서술이나 시의 언어의 작용은 이 새로움이라는 면에서 같은 감동의 차원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현실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진정도 난해시냐 가짜 난해시냐의 기준도 이 새로움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자유다, 자유는 새로움이다. - <생활현실과 시>(1964,10)

 

(344)

시는 온몬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1968.4)

 

(370)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의 문화의 위험의 소재(所在)도 다름 아닌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치스가 뭉크의 회화까지도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 전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문예시평자가 역설하는 응전력과 창조력-나는 이것을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지 실험성이라는 부르고 싶다-은 제대로 정당한 순환작용을 갖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1968.2)

 

(377)

인간은 정당한 목적, 바로 자유다. 그리고 새로움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는 과거에 살던 누구와도 닮지 않고 앞으로 태어날 누구와도 닮지 않을 바로 그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움과 자유의 존재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에 걸맞게 새로운 삶의 스타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위기에 빠질 때 작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경고는 자유가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것일 수도, 아니면 스스로 온몸으로 자유를 구가하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듦으로써 자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작가의 작품들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벽과의 충돌을 기술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통념을 조롱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전망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카프카가 그랬고, 바이런이 그랬고,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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