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홍타이지의 불만은 이어졌다. 홍타이지가 특히 맹렬히 비난한 것은 공유덕, 경중명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그들이 귀순해 올 때 조선이 명을 도와 그들을 요격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전쟁의 단초를 여는 행위였다고 규정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 신료들을 비난하고 조롱한 점이다. 그는 인조의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虛言)만 일삼는 소인배들이라고 매도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그들 서생(書生)들이 10년간 이어져온 화의를 폐기하고 전쟁의 단서를 열었다고 비난했다.

(60)

정온은 청과 결전을 벌이자고 강조하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정온은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를 핑계로 전장으로 가는 것을 피하고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의 싸움은 기피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소속되어 사병처럼 부려지고 있는 현실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

대국 명조차 자신에게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소국 조선은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을 비롯한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인 조선도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럴 경우, 한족 출신 귀순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조에 본보기를 보이려 한다는 대목에서도 그러나듯이 홍타이지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181)

인조는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정변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었다. 인조를 옹립했던 시하들은 분명 광해군보다는 훨씬 나은 임금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조가 산성에서 나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을 경우, 그를 추대한 신하들은 인조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그래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명분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신하들이 나를 과연 임금으로 계속 떠받들어 줄 것인가?’ 인조로서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시나리오였다.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출성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데에는 이 같은 절박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281)

인조는 반정을 통해 추대된 임금이라 훈신들의 입김에 밀려 왕권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애초부터 안고 있었다. 실제로 1629 7, 인조는 조정 신하들에게 압제를 받고 있다며 자조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이후 확 달라졌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 친청파로 변신했다. 하지만 변신이후에도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소현세자의 급사, 왕세자의 교체, 원손 지위의 박탈, 강빈의 사사 등이 그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간시켜 충성 경쟁을 부추겼던 청의 획책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나아가 병자호란이, 역설적이지만, 인조가 추대된 임금이라는 정치적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64)

1633년 명의 반장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했던 이후 인조 정권이 보였던 태도 또한 유사했다. 당시 명과 조선이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후금은 분명 수군과 전함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이 사실이 갖는 중대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후금이 수군과 전함을 운용할 수 있게 된 이상, 유사시 조선이 피난처로 생각하고 있던 강화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 어떤 대책이 제시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인조와 신료들은 여전히 강화도로 들어갈 궁리만 했고,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방어를 책임졌던 김경징은 청군이 날아서 건너오기 전에는 절대로 안전하다며 대책을 마련하라는 주장을 일축했다. 전쟁 이전 청이 너희는 보나마나 유사시에 강화도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음에도 말이다. 급기야 1637 1 22, 청군은 전함을 동원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고, 강화도가 무너지면서 남한산성도 무너지고 말았다.

인정 정권은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략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아예 사실 자체를 망각했다가 커다란 비극을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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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무엇보다 반정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의 불안정한 민심을 채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괄의 난을 겪은 것이 자충수였다. 실제로 대동청, 재성청 등에 보관된 문서는 이괄의 난을 계기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을 겪으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의 어마어마한 은 징색, 가도 모문룡 진영의 항상적인 양곡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토적을 위한 군사력 증강계획은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157)

요컨대 정묘호란은, 홍타이지의 권력 강화 필요성 등 후금의 내부사정과 조선, , 후금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비롯된 복합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조선에서는 정묘로한을 강홍립이 후금을 사주하여 일으킨 전쟁으로 단순하게 규정하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송시열이 <삼학사전>에서 정묘호란을 강홍립이 오랑캐를 인도하여 국경을 침범한 사건이라고 했던 것을 비롯하여 서인계(西人系) 인물들은 대부분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도발한 전쟁으로 정의했다. 정묘호란을 아예 강노의 침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강노란 물론 강홍립을 가리킨다.

(208)

이렇게 표방과 실천이 서로 괴리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조의 행태에 대해 1630 3, 가평군수 유백증은 직격탄을 날린다.

, 오늘날 할 말이 많은데 나라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君德)의 득실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자신하여 남을 따르게 점이 부족하고, 의심이 많으면서 이기기를 좋아하는 단점이 있으며, 인자함은 충분하나 위엄과 과단성이 부족하고, 근심하고 애쓰는 것은 간절하나 실덕(實德)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주석(柱石)처럼 의지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밖으로는 외적을 막는데 간성(干城)처럼 맡길 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인심이 원망하고 등을 돌려 역변이 잇따라 일어나고 공안(貢案)이 고쳐지지 않아 부역이 불균등하기만 합니다. 호령을 내리는 것도 조변석개(朝變夕改)라 은혜와 믿음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이익만 따르고 공도(公道)가 무너져 벼슬길이 혼탁해져 뇌물 꾸러미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위급한 것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끔과 같은데, 신은 광해(光海)가 아직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259)

정묘호란 이후 조건은 이렇게 모병과 후금군 사이에서 난감한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오랑캐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을 힐난했고, 후금은 그들대로 조선이 맹약을 어리고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조선 조정은 양자 사이에 끼여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에게 후금과 화약을 맺은 것은 부득이한 기미책(羈縻策)임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서 후금 사신들의 통행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모병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단을 일으켰고, 후금군도 그에 맞서 병력을 풀어 요격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모병들은 후금군에게 피해를 입을 경우 조선 관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요컨대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샌드위치가 되었고 청천강 이북 지역은 화약고가 되었다.

(370)

1634 11, 강학년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부묘하려는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인조반정 이후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다음의 내용이다.

“<서경>정치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제어하고 나라는 위태로워지기 전에 보전하라고 했는데 전하의 국사는 이미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들어섰습니다. 여러 차례 대란을 겪었음에도 조금도 허물을 반성하지 않고 고식책만을 써서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옛날 난정 때문에 나라를 전복시킨 자들과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인데, 신은 그 종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전하께서 반정한 거사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한 세상의 드문 조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백이(伯夷)가 있었다면 반드시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을 것이고, 엄연년이 있었다면 반드시 곽광(霍光)을 탄핵하는 조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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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버리기 때문이지.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다카시마 아카시라는 사람의 연주는 재미있었다. 수면의 잔물결, 시원스레 지나가는 바람, 칠흑 같은 우주까지 보였다. 저 사람 역시 자기만의 음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308)

하지만 굉장히 어려울 거야. 진정한 의미로 음악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음악을 가둬두는 건 홀이나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이야. 경치가 아름다운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고 해서 진정소리를 데리고 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 해방했다고 할 수 있을까?

(433)

은하계 변두리 어딘가에 지구하고 비슷한 조건의 별이 있고, 비슷한 공기에 음파도 비슷하게 전달된다면 역시 음악이 발달하지 않을까? 그러면 비슷한 악기가 발달한 테고, 피아노 같은 무언가를 은하 어디선가 열심히 연주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 글쎄.”

마사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가능성은 있겠다. 그러면 그 별에도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있을지 몰라.”

(468)

프란츠 리스트 작곡, 피아노 소나타 나단조.

1852년부터 1853년 사이에 작곡, 초연은 1857.

리스트는 이미 피아니스트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 한스 폰 뵐로가 연주했다.

걸작으로 칭송받는 이 곡은 소나타 형식으로는 상당히 이색적이다.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인 탓에 발표 당시 이 곡이 소나타인지 아닌지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너무나 참신한 구조 때문에 매섭게 비난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에서는 주제부와 전개부가 악장별로 연주되는데, 이 곡은 악장이 나뉘어 있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1악장 형식이라는 점을 가장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30분 가까운 대작으로 어려운 곡이 많기로 유명한 리스트의 곡 중에서도 다양한 기량이 요구되는 최고 난이도의 곡이다.

(538)

가자마 진이 허공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아도 들판에 피아노가 굴러다니면 끝없이 연주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

세상에 나 혼자.

이런 곳이야?’

아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황야.

바람이 분다. 어딘가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드높은 곳에서 빛이 쏟아진다.

휑하고 척박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충만해지는 장소.

맞아, 이런 곳이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하지만 음악은 본능인걸. 새는 세상에 한 마리만 남아도 노래하잖아. 똑 같은 것 아닐까?’

(641)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처음 보았을 때는 이런 걸 어떻게 치란 말이야,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야말로 악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아닌가 싶을 만큼 수많은 음표들. 양손 화음이 끝도 없이 잔뜩 늘어서 있는 새까만 악보.

동경하던 낭만적인 2번을 몰래 연습해보았을 때는 해서는 안 될 장난을 치는 기분이었지. 물론 그때는 결국 흉내도 내지 못했다. 띄엄띄엄 연주하는 게 고작이라, 한 곡을 끝까지 연주할 체력도 기력도 없었던 것이다.

(654)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아주 조금, 지상의 중력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한 무언가를 덧붙인다면.

음악을 한다는 것이 그에 가장 합당한 답 아닐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는 순간에 곧 사라지는 음악. 그 행위에 정열을 쏟고, 인생을 바치고, 마음을 강하게 빼앗기기 때문에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덧붙은 작은 마법 같은 옵션 기능이 아닐까?

, 어느 정도 진실을 담아낸 답인 것 같아.

(674)

아아, 알 것 같아. 옛날에는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듣고 기록해왔는데, 지금은 아무도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듣지 않고 자기 귓속에 가두어두지. 다들 그게 음악이라고 생각해.

맞아. 그러니까 갇혀 있던 음악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자고 얘기했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선생님도, 나도 몰랐어. 선생님은 이제 안 계시지만 나는 계속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어.

(693)

뮤직. 그 어원은 신들의 기술이라고 한다. 뮤즈의 결실.

소년은 뮤직이다.

그가 곧,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곧 음악이다.

음악이 달려간다.

이 축복받은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음악이, 하나의 음악이, 고요한 아침을 가르며 바람처럼 멀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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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무리 객관적인 척 논리를 펴도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선호, 자기가 살아온 방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게다가 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인간의 성격조차 타고난 요소, 즉 유전자의 영향이 상당하다고 말해준다. 그 바탕 위에 인간관계, , 독서 등을 통해 쌓아온 직간접 경험들이 결국 라는 고유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26)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란 유아적인 이기주의나 사회를 거부하는 고립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51)

서교수(서은국 교수)에 따르면, 행복감이란 결국 뇌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뇌가 특정한 종류의 경험들에 대해 기쁨, 즐거움, 설렘 등의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실증적 연구 결과, 인간이 행복감을 가장 많이, 자주 느끼는 원천은 바로 인간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은 쾌감을 느끼는, 뼛속까지 사회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돈은 어느 정도의 문화적 생활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면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그룹의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사회성이 높은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에게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핵심 과제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인간에게 생존과 번식에 가장 필수적인 자원은 동료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활동, 즉 동료 및 이성과 어울리는 활동을 할 때 뇌에서 쾌감이라는 보상을 주어 이를 촉진시키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

(57)

내성적인 이들도 외향적인 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행복을 느끼는 체질인 것이다. 미각이 지나치게 예민해 강한 맛의 음식에는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이런 차이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조건 집단이 요구하는 술 잘 먹고 윗분 잘 모시고 분위기 잘 띄우는 씩씩한 전사로 거듭날 것을 강요하는, 그래야 어른 되었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예민하고 내향적인 사람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배려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문화의 사회라면 이들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집단의 강요 없이, 자기가 스스로 선택한 취향이 맞는 작은 인간관계들의 고리 속에서 말이다.

(93)

인간은 자기 경험의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결국 나 또한 과거의 나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 기회를 빼앗기는 것에 가장 분노하는 것이다. 물론 계층 이동의 사다리, 공정성 측면에서 이것도 중요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수의 공부 잘하는 아이뿐 아니라 다수의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실 더 중요하다. 또한 사회에는 공부 잘하는 것 외에 다양한 재능이 필요하다. 대학 입시를 봉건시대의 과거제도처럼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은 자칫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 공공의식이 부족한 엘리트는 사회에 오히려 더 큰 해악만 끼칠 수 있다는 것 역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36)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162-163)

실제로 의미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반대 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192)

앞서 얘기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아직도 수십만 년 전 원시시대의 자연선택 과정에서 형성된 뇌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시차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간에게 끌린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동료 인간이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라는 점은 미래에도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기계가 발전해도 인간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일 수 있다.

(256)

높은 세 부담을 북유럽 사람들이 감수하는 것은 내가 낸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여서 반드시 내게 혜택이 돌아온다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청렴하고 유능한 정부와 공무원들이 오랫동안의 실적으로 그런 신뢰를 얻어낸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면 도덕적인 것만으로 부족하고 유능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국민이 높은 세율을 감수하게 하려면 먼저 세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 국민에게 골고루 그 혜택이 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260)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북유럽사회에서 배울 것은 정치나 제도 이전에 먼저 그들의 문화적 전통이 아닐까 한다. 스웨덴의 문화적 전통 중 중요한 것으로 라곰(Lagom)’이 있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게, 적당히라는 뜻이다. 바이킹 시대 술통을 돌려가며 마시는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다음 사람이 마시지 못하니 적당히 나눠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한다.

(265)

결국 미래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이상 20세기의 경험만으로 모델을 찾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움직이는 과녁에 화살을 쏘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 현실에 맞게 응용할 수 있을 뿐 그대로 베끼면 되는 모범답안은 세상에 없다. 할 일은 지금 우리가 처한 문제에 대한 솔루션을 하나하나 실용적으로 찾아가며 앞서가는 나라들의 장점이나 경험을 부분적으로 참고하는 것이다.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유토피아적 환상을 경계하며, 더디더라도 분명히 내일은 오늘보다 낫게 만들 수 있다는 담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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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남편의 목소리에 조롱기가 묻어 있지만 삼바야는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 간다.

영혼도 사람과 마찬가지예요. 우리를 도와주는 영혼도 있지만 더 힘들게 하는 영혼도 있죠. 우리는 도움이 되는 영혼을 <구닉>이라고 부르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훼방꾼 같은 영혼은 <마라>라고 부르죠.”

(84)

깊이 생각해 봐요. 당신 어머니도 나중에 바뀌셨거든요. 움직임보다는 관조를,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멈춤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셨죠.”

어머니는 스스로를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비유했던 분인데……”

우리를 만난 뒤 변하셨어요. 하루는 나한테 파스칼인가 하는 당신네 철학자를 인용해 <인간의 불행은 모두 방 안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것, 이 한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신 적도 있어요.”

(126)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장님이에요. 그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감각이 일정 정도 왜곡해서 전달하는 신호들을 해석하고 있을 뿐이에요. 실재와 지각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꿈속에서뿐이죠. 내가 꾸는 꿈이 앞을 보는 사람들이 꾸는 꿈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 꿈이 현실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에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내가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299)

그렇다면 클라인의 병도 펠릭스 클라인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단지 미래의 펠릭스 클라인이 꿈속에서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을까?

7년의 풍작 뒤에 7년의 흉작이 오리라는 노예 요셉의 예언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대서양 건너편에 미지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는 꿈에서 <설득력 있는> 미래의 자신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뱀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나서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발견되었다.

분자의 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프리드리히 케쿨레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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