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어렸을 때는 누구나 다 예쁘죠. 살도 부드럽고, 어른들도 어린이는 누구나 다 예뻐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어린이처럼 돼라,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돼 있죠. 결론인즉 순순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는 게 핵심일 겁니다. 초심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받은 가르침이나 교훈을 잊지 않고 간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요. 그런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또 자아가 형성되면서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때가 묻습니다. 나이가 든 만큼 때가 많이 묻게 되는 거죠. 그러니 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 기자는 늘 초심을 잃지 않으니 존경한다고 말할 수밖에요. 저는 주기자를 만날 때마다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제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고요.

(73)

미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퓨처(future),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오는 미래에요. 그런데 성서의 대림에서 말하는 미래는 앞당기는 미래, 선취하는 미래입니다. 선취적 미래, 그러니까 내가 지금 비록 2015년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미 2020, 아니 멀리 2050년을 살고 있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이룩되고 통일이 이룩된, 박근혜는 이미 타파된 그런 미래를 살고 있는 거죠. 여러분이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75)

하느님, 불의한 정치인과 관료들, 재벌, 부패한 모든 공직자들, 사법부와 검찰 인사들을 모두 정화해주시고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꼭 이루어주십시오. 저희와 국민 모두를 깨우쳐주십시오. 순국선열의 고귀한 뜻, 그리고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애썼던 희생자의 삶을 늘 되새기며 아름다운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 역사를 배운다는 주제 속에서 나 개인의 삶, 가정의 삶, 공동체의 삶과 증언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핵을 이루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거짓된 자들이 잠시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만, 역사의 물줄기와 기록은 그것을 넘어서 언제나 정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꿈을 실현해가는 가족들, 그리고 우리 겨레와 동지들을 영육간에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옵소서. 이 밤, 기쁘게 잠들 수 있게 해주시고 희망찬 기쁨의 내일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우리 시대의 주역인 청년들에게 희망과 기적을 보여주옵소서.

(101)

저는 비례대표제가 바뀔 수 있다면 국회의원 수도 현행 300명에서 50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1948년 제헌국회 때는 인구 10만 명당 한 명의 국회의원이 나왔어요. 그러니 인구가 5천만 영인 지금은 500명쯤 나오는 게 맞지요. 우리가 정책을 논할 때 300명이 논하는 게 좋겠습니까, 500명이 논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많은 쪽이 좋겠죠. 국회의원 늘리면 세비가 더 늘어난다고 하는데, 지금 대통령이 한 해 동안 주무르는 예산이 얼마입니까? 375조 원이에요. 이걸 청와대와 재경부가 마음대로 씁니다. 반면 국회 예산은 27백억 원, 인건비까지 합쳐도 54백억 원에 불과합니다. 비교가 안 되는 수치입니다. 국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감시하는 게 국회입니다. 더 많은 국회의원들이 감시할 수 있어야 해요. 다 우리 세금이니까요. 청와대와 재경부가 자기들 만대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감시해야죠.

(159-160)

제가 함석헌 선생님을 직접 뵙기도 하고 그분의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게 많아요. 그분은 자신을 소개하시길 나는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다라고 하세요. 그분이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서 서너 번 가신 분인데, 해방이 된 다음에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해요. 그 뒤 , 내 나라 내 땅에서 고문을 당하다니싶어 북한을 몰래 탈출해 남한으로 건너오죠.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이건 또 이승만 독재에 박정희 독재에 온통 독재뿐인 거예요. 여기 맞서 싸우다 보니 , 나는 일제와 싸우고, 소련과 싸우고, 북한 공산당과 싸우고, 남한에 와서는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와 싸우는구나. 이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 거죠. 그러면서 고백하신 말씀이 나는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이라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우리 역사와 연결시킬 수 있을 때, 그러니까 순국선열, 한국의 역사, 우리 민족을 위해 나는 발길에 차인 사람이다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26-227)

우리 모두는 이 사회의 불덩어리예요. 더러운 것을 태우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이 불덩어리를 함부로 대하면 꺼질 수도 있고 짓밣힐 수도 있겠죠. 그러니 각자 주부는 주부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 그냥 흘려듣지 마시고 왜 저렇게 보도하는지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그런 보도를 하는 저의가 있고 나름의 계획이 있는 거니까요. 이런 걸 파악할 때 우리는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겠죠. 새누리당이나 새정치연합 국회의원이 얘기하는 것, 박근혜가 이야기하는 것, 국무총리, 검찰, 법관들이 얘기하는 것의 속내가 뭔지도 다 보일 거고요. 이런 것들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집중하셔야 해요. 집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함께 부모님이 내게 무엇을 가르치셨나내지는 이럴 때 나의 부모님이라면, 나의 스승님이라며, 예수님이라면, 또는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면서 우리 생각을 확장해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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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더 큰 자괴감은 외부검열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하기 시작하면서 찾아들었다. 교수님이나 간사 선배에게 한소리 안 듣기 위해, 막판에 대형사고를 치지 않으려고, 우리는 스스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누가 기획안을 내놓으면 그거 되겠어? 나갈 수 있겠어?” 자조 섞인 농담이 오갔다. 물정 모르고 용감한 제안을 내놓는 동료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안팎의 압력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부자유를 스스로 선택하는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표현도 점점 에둘러서, 비판인지 아닌지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문장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검열의 눈을 피해가고 비껴갈 수 있었기에.

(49)

담배 없이 대체 무슨 낙으로 사니? 이 답답한 세상에 담배라도 없으면 정말 숨막혀 죽을 것 같 같은…… 너도 한번 피워볼래?”

담배 없이 무슨 낙으로라는 말이 내 가슴에 탁 꽂혔다. 그즈음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대학과 학보사를 둘러싼 숨막히는 분위기, 신문사를 떠난 동기, 야학과 신문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나……

(89)

그도 그럴 것이 이날 언니가 연단에 선 장면은 그동안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에 깔려 있던 고정관념, 운동권의 기존 프레임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었다. 입학하고 난 뒤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들은 이야기는 데모할 때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돌을 날라다주거나 마실 물을 떠다주거나 피를 닦아주었다는 등의 미담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 치마폭으로 돌을 나른 조선시대 여인들의 현대판이라고나 할까. 그런 남성 중심적인 대학에서 이념서클 출신도 아니고, 운동권에서도 사실상 무명이나 다름없는 여학생이 데모를 주동하다니, 일대 사건이었다. 그동안 소문으로 무성하게 나돌던 데모 주동자 예상 명단에 혜자언니는 올라 있지 않았다.

(117)

무고한 양민들이 좌익으로 몰려서 죽어간 4.3의 영향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도로 친정부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억울하게 몰리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으리라. 시장통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바쁜 일상에 휘둘리던 우리 부모의 정치의식도 제주도민의 평균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평균 이상의 우파 보수층이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강제 징용당해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남한을 선택한 이른바 반공청년단소속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당시 같은 문중이던 현씨 집안이 배출한 현오봉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던, 시장통의 공화당 조직책이었다.

(237)

그 좁은 방에서 영초언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등사하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광주를 찾아가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시기에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온몸으로 결기를 내뿜는 그녀 앞에서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경험칙상 많은 걸 안다는 건 그만큼 위험해지는 지름길이었다. 이렇게 만든 유인물을 누구를 시켜서 어디에 배포할 것인지 나는 굳이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언니도 내게 같이하기를 권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한 차례 구속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해하고 가슴 아파했으므로.

(272)

행복! 당시의 내게는 참으로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사전 속에서나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 그런 단어로 여겨졌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정치부 기자들의 최대 전쟁터, 시사지의 판도를 좌우하는 대목인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사지 편집장인 내게 행복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가는 총 맞고 전사하기 딱 좋은 전쟁터에서 이 악물고 용케 버텨내고 있었기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걸어가는 느낌이었고, 내 영혼의 우물물은 바싹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자각에서 진저리치는 나날이었다.

(280)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순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비참한 심경이 들더라고. 우리가 그토록 목숨 걸고 맞서 싸웠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가 그 딸을 다시 대통령으로 만들다니. 우리가 젊은 날 한 그 모든 일들이 역사로부터, 국민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느낌이랄까. 박대통령이 당선된 뒤로 나는 텔레비전 뉴스만 봐도 입는 것 같아서 한동안 뉴스조차 보지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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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그가 좋았다.

SF, 판타지를 좋아한 대한민국의 음악 청년.

그의 집요한 광기와 좌충우돌의 불화,

어떨 땐 해학적이기까지 한 허세와 그 뒷면의 대책 없는 섬세함까지.

그는 대한민국의 1980년대가 분만한 가장 모순적인 열정을 지닌 청년이었다.

(18)

신해철에 관해서는 예술가로서의 삶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지점이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논리와 행동으로 참여한 논객, 혹은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입은 저 멀리 식민지 시대 이후로 근대 한국에서 대중예술인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금기였다. 이들은 탈정치화의 영역에서 대중을 웃기고 울려 위안하는 대가로 인기와 부를 누리는 예외적 시민권자였다.

(26~27)

신해철은 짧다면 짧은 생애 내내 롤로코스터 같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스스로 확고한 원칙을 가진 사람이다. 그 원칙은 그가 음악만큼이나 열정을 가지고 추구한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한다. 신해철은 쫌 놀아본 오빠의 미심쩍은 상담소같은 위악의 페르소나를 유쾌하게 연출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에도 언제나 본능적으로 약자의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지녔다. 나는 그와 세 개의 트리뷰트(tribute, 헌정) 작업을 같이했다. 2001년 들국화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2004년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2년 노무현 추모 앨범과 공연. 그중에서 사회적 반향이 상대적으로 가장 약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작업은 한국 문화사에 노동자 문학의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출간한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헌정 음반 프로젝트다.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이자 문학도였던 나와 내 동년배 사람들에게 <노동의 새벽>은 시인이자 혁명가를 자처한 박노해에 대한 입장 차이와 관계없이 충격적인 의미를 담은 예술적 사건이다. 나는 이 시집이 (출간되고 20년을 지나는 동안) 크고 작은 여러 이유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노동의 새벽>은 단일 시집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이 노래로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4년 봄, 사상 최초로 시집 헌정 음반을 기획했다. 하지만 제작비도 충분치 않았고, 무엇보다도 프로듀서가 없었다. 나는 2000년대라는 새로운 흐름에서 그저 운동권 가요의 동어반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음악적 감각을 새로운 관점에서 부여하는 음반을 만들고 싶었따.

(43)

무한궤도’, 이 특이한 밴드 이름은 스무 살 음악청년의 터질 듯한 가슴에 담은 야망과 의지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무한궤도는 산업혁명기 영국인 리처드 에지워스의 발명품으로 탱크나 불도저를 움직이는 캐터필러를 말한다. 즉 앞바퀴와 뒷바퀴를 연속적인 궤도를 연결하는 장치를 지칭한다. 무한궤도를 음악적 첫걸음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채택한 이유에 관해 그가 특별히 언급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네이밍에서 표명하려고 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드는 밴드는 앞바퀴와 뒷바퀴, 그리고 가운데의 작은 바퀴들까지 모두 일체가 되어 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하모니를 일구어낼 것이며, 땅이 울퉁불퉁하거나 도저히 전진할 수 없는 고랑이 패어 있다고 해도 불굴의 의지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85)

신해철에게 밴드는 평생에 걸친 화두이자 천형(天刑)에 가까운 숙명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음악 친구들과 함께 밴드로 데뷔했으나 한 장의 앨범을 끝으로 솔로로 후퇴했다가, 많은 우려와 저지에도 불구하고 인기 가수의 길을 반납한 채 다시 밴드 맨의 삶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은 지지와 비난의 극단적인 소요를 불러오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120)

신해철은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갈파하는 대신 그동안 수없이 불러온 사랑 노래의 문법을 계승해 표현함으로써 이 곡의 수용 범위를 확장시킨다. 그러나 신해철은 당사자가 당하는 고통의 선연함을 놓치지 않았으며, 바로 이 선연함의 무늬가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매너리즘에 빠진 천편일률적 여타 발라드와 구별시킨다.

(123)

넥스트는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획득하지 못한 한국의 젊은 록 밴드들에게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였고, 나아가 극복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넥스트가 이들에게 밴드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은 분명하다. 사실 1970년대의 신중현과 엽전들, 산울림, 1980년대의 들국화를 제외하면 이 땅에서 록 밴드는 저주받은 존재나 다름없지 않은가?

(178)

계간지 <상상>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해철은 연예인이라는 용어에 대한 불쾌감을 이렇게 밝혔다.

어차피 너희 연예인들은 인기가 없으며 죽는 것 아니냐. 저는 연예인이라는 말 자체를 소름 끼치도록 싫어해요. 인기를 먹고살던 시대도 있었겠죠. 그리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면 상업적으로 음악을 판매할 수 있었던 시기 이전에는 예술이 없었는가 생각을 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원시인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팔려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인기 이전에 음악을 하자는 거죠.”

(180-181)

서태지와 비교할 때 신해철의 애티튜드는 더 확연히 구별된다. 서태지가 철저한 은둔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면(바로 이 때문에 이지아 스캔들의 역풍을 심하게 맞았지만), 신해철은 야동을 히히덕거리며 보는 것을 숨기지 않는 그러나 똑똑하고 명석한 머리로 공부도 잘하는 왕수다쟁이 이웃집 형 혹은 오빠 같은 애티튜드를 견지했다. 그에겐 마왕이라는, 이제는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별칭처럼 교주스러운 카리스마도 있었지만, 동시에 겸손함과 솔직함도 지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황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과격한 것 같지만 근거가 선명한 논지를 비속어를 동반하고 쉽고 재미있는 구어체로 풀어내는 수사학이 있었다.

(267-268)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합리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동안 이른바 스타를 향한 10대의 동경은 예술가로서 그들을 인정하는 차원보다는 보이프렌드 혹은 걸프렌드 대리 만족의 수준에 머무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데뷔해서 방송국을 들락거릴 무렵 선배들은 한결같이 이 판은 똑똑한 척하면 죽는다라고 충고해주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허점을 보여야 대중이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성향은 조금씩이나마 퇴조하는 기미가 보이고, 아티스트가 자기 입장을 완고하게 고수하는 것을 지지하는 대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대중 덕분에 지금 내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제 대중음악가도 어떻게든 대중에 영합하려 하기보다는 뚜렷한 자기주장을 펼쳐야 할 때라고 본다. 하지만 모든 측면이 낙관적이지는 않다. 거리의 패션만 봐도, 하나가 유행하면 자기 개성은 팽개치고 너도나도 그쪽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순응과 주입만을 가르치는 교육 제도가 존속하는 한, 주류 문화에 일방적으로 몸을 맡기는 문화적 획일성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이제 삶의 밟고 어두운 모든 면을 가리지 말고 가르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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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제학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끼는 방법에 대한 과학이라고 묘사되어 왔다. “사랑은 희소성이 있다는 것이 이 개념의 기본 전제다. 따라서 사랑은 아껴서 사용해야 하고, 불필요한 곳에 써 버려서는 안 된다. 사랑으로 사회를 움직이면 개인적인 삶에서 사용할 사랑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찾기 어렵고,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자들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사랑 말고 다른 것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8)

시장이라는 기계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기본적인 감정 같이 단순한 것을 가지고 세계 평화와 모든 이의 행복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가정되었다. 따라서 모두가 이 이야기에 매혹된 것도 놀랍지 않다. 착취를 개인적 악감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급 7000원을 받으며 등골이 휘게 일하는 여성도 사악한 누군가가 강요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그리고 경제학은 피할 길이 없어. 우리의 본성에 있으니까. 사실 그게 우리의 본질이야.

우리는 모두 경제적 인간이니까.

(53)

이런 식의 접근 방법은 1950년대 들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시카고대 경제학과 소속의 남성 몇 명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경제학 모델을 이용해 분석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합리적 개인은 상여금을 놓고 남들과 경쟁하고 자동차 구매 시 더 좋은 조건을 취하려고 흥정을 벌일 뿐 아니라, 소파 뒤까지 청소하고, 빨래를 널고, 자녀를 낳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59)

결혼한 여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부엌을 치우고 다림질을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돕는다. 결혼한 남성이 퇴근하면 무엇을 하는가? 신문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깐씩 아이들과 놀아 줄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여가 시간을 집안일에 많이 쓰고,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피곤해진다. 베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성에게 더 낮은 보수를 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부엌을 치우느라 여성은 남성보다 더 피곤하다. 따라서 근무 시간에 남성과 동일한 노력을 기울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커의 생각이었다.

동시에 경제학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설명도 내놓았다.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이유는 그들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이다. 여성의 수입이 더 낮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여성이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족 전체로 볼 때 손해가 덜하다는 설명이다.

(86)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이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에 대한 비판은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샅샅이 연구하면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경제적 인간이라는 진실 말이다.

(130)

금융계의 혁신은 항상 시간과 돈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이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져 왔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금융에 회의적이었던 것도 바로 금융이 시간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간은 신에게 속한 것이고 신만이 관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성경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을 시간을 파는 행위라고 봤다. 고리대금업자는 돈을 빌려줌으로써 그 사람이 내년이 되기 전에는 살 수 없을 물건을 오늘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빌린 돈에 대한 이자는 대출을 받을 시점과 내년 사이에 경과하는 시간의 값이다.

(152)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루커스가 여왕의 질문(“왜 아무도 이런 일이 생실 줄 몰랐나요?”)에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경제학자들이 위기를 예측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애초에 이런 일은 예측할 수 없다고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185)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게 하려 평생을 싸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다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204)

1970, 미국의 한 CEO는 근로자 보수의 30배 정도를 벌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이 숫자는 500배가 되었다. 유명한 금융가 J.P. 모건은 미국 기업의 CEO는 평직원 월급의 20배가 넘는 보수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그 격차가 364배로 벌어졌다. 그리고 미국을 모방삼아 서구 사회에서 CEO 의 보수가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에서는 2002년에서 2012년까지 CEO들의 보수가 3배 증가했다. FTSE 100대 기업의 CEO와 평직원 평균 보수 격차는 1998 45배이던 것이 2010 120배로 벌어졌다.

(216)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으로서의 인간과 경제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가지 관계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경제적 관계다. 다시 말하면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동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220)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자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을 간단히 해결한다. ,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빵 한 쪽과 생선 한 마리로 신도들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먹고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믿는다. 험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그리고 우주가 우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282)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학에 인류의 현실적인 경험을 위한 자리는 없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허구의 인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인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286-7)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298-9)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신시켜야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임무다. 페미니즘의 관점은 불평등부터 인구 증가, 복지 혜택, 환경, 그리고 노령화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돌봄 인력의 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에 깊은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이상의 훨씬 큰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재까지는 페미니즘 혁명의 절반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성들을 더해서는 젓는 것까지는 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 깨닫고, 그 새로운 세상에 걸맞도록 사회, 경제, 정치에 변화를 가져오는 일을 해내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해서 작별을 고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더 폭넓게 포용할 수 있는 경제와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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