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런데 공교롭게도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시점에, 북한은 핵과 미사일 관련 합의를 비교적 잘 지키고 있었다. 핵무기 개발을 중단키로 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고, 부시 행정부로부터도 중유를 받고 있었다. 2002년 말에 불거진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보유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이지만, 확실한 것은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언급하기 전후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탄도미사일과 관련해서도, 북미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발사를 유예하겠다고 약속한 1999년 베를린 합의 및 2000년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준수하고 있었다. 9.11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된 알 카에다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38-9)

1950년 한국의 기독교 신자 수는 50만 명이었는데, 1991 800만을 넘어섰다. 1990년 초까지 10년 단위로 두 배씩 팽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기독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팽창했지만, 양적인 성장이 곧 질적인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장을 향해 돌진해간 한국의 기독교는 종교적인 내면화를 거칠 겨를이 없었다. 한국 기독교의 팽창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금 오래된 1993년 통계이지만, 전세계 50개 대형교회의 거의 절반인 23개가 한국에 있고, 서울은 대형교회 신자 수에서 단연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25년가량이 지난 지금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강남개발 등 부동산 붐과 맞물린 대형교회의 출현은 중소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 대형교회의 팽창은 신자가 늘어난 것보다는 중소 교회 신자의 수평이동에 의거한 것이다.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이고, 그 다음은 조용기의 동생 조용목 목사의 은혜와진리교회이다. 조용기 목사는 한때 주류 기독교에서 이단시했으나, 그 엄청난 신도 수 때문에 한국 개신교의 주류에 당당히 진입하였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영혼과 육체, 물질적 축복이 따른다는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론은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불안에 떠는 대중들을 사로잡아 순복음교회를 단시간에 급성장시켰다. 순복음교회의 성장은 성장주의와 반공주의의 굳은 결합의 산물로서 개신교를 넘어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필수적인 창문이 된다.


(40)

한국 개신교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밝음과 짠맛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밝음과 짠맛을 스스로 회복할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채, ‘개독교라고 사회로부터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이 글에서 다룬 성조기 휘날리며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사회의 영적-정신적 지도력과는 거리가 먼 기복신앙, 다른 종교를 배려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무례한 종교’, 주류 개신교에서는 이단이라 하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기독교 분파로 인식되는 집단들의 사회적 문제 야기, 주류 개신교 내에서 벌어지는 세습과 탈법과 재산싸움과 성추문 등등 개신교가 안고 있는 문제는 끝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은 개신교 내부로부터 나와야 한다. 1970년대의 유신 시기, 개신교는 우리사회의 억눌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앞장섰었다. 개신교가 사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지, 시민들이 개신교의 거듭남을 위해 기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65)

자본이 인구절벽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소비의 침체라고 했다. 문제가 소비의 침체라면, 해법은 단순히 인구를 늘리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본질은 고령화에 접어든 노인들이 마음 놓고 소비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당연히 강력한 노인복지 시스템이다. 그리고 왕성한 소비를 즐길 40대에게는 걱정과 불안, 공포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내세운 캐치프레이즈는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였다. 우리가 인구절벽을 고민하는 자본가들에게 해줄 말도 이와 비슷하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절대로 인구감소가 아니다. “문제는 복지와 분재야, 이 바보들아!”


(97)

역설적이지만, 환경문제는 국제관계를 평화적으로 만드는 길이 될 수도 있다. 환경위기 때문에 운명공동체라는 개념이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논리를 고집하는 새뮤얼 헌팅턴 등의 논객은 문명이 늘 상호의존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개돼온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 벤자민 프리드먼은 행복감에 관한 국제적인 조사를 통하여 그와 같은 문명 간의 교류를 고찰했다. 1960년대에 쿠바, 미국, 나이지리아는 각자의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행복도는 동일했다. 오늘날 행복감에 관한 국제적 조사를 보면, 나라 안에서는 부자일수록 행복감이 높듯이, 국민의 행복도도 타국과의 비교에서 순위가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프리드먼의 설명이다. , 일찍이 사람들은 자신을 이웃 사람들과 비교했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덕분에 거리를 먼 공동체에서 이상적인 모델을 찾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타인을 닮고 싶은 욕구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급증시킬 염려가 있다는 점에서는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앞으로 인간은 지구적 차원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114)

(일본은) 2013년 제정된 비밀보호법은 비밀을 누설한공무원과 그 밖의 사람들을 최고 10년의 징역형으로 처벌하고, ‘누설을 부추긴사람들, 특히 저널리스트들은 최고 5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14년 언론자유지수 순위를 보면, 일본은 세르비아와 보츠와나보다도 하위로 떨어져 있다. 일본변호사연합회에 의해 날카로운 비판을 받고 있는 이 비밀보호법은 투명성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특히 높아진 시기에 제정된, 심히 부끄러운 전체주의적인 법령이다.


(116-7)

올림픽이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열릴 것이므로 지금은 공중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알아두는 일이 필요하다. 일본 올림픽위원회가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들과 관중들에게 방사능 위험에 관련된 자료를 알려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3기의 원자로가 100% 멜트다운 상태에 있는 상황을 무시하고 2020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일본을 선정했을 때, 그 기준은 무엇이었던가? 그 결정이 무모해 보이기 때문이다.


(154-5)

이해관계를 떠나서 생각해보자. 토지는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 토지가치는 땅 주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토지는 모두가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고 인간이 만들어냈으므로 생산자가 그것의 이익을 향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반 재화와는 달리, 토지에는 공적 개념을 강하게 적용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지금 이 상식을 헌법에 넣으려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이 상식이 뿌리내려야 올바른 사유재산제를 구현할 수 있고, 투기 없는 자유시장경제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헌법으로는 토지투기도, 토지로 인한 불평등 심화도, 주거 불안정도 해결하기 어렵다.



(187-8)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이 1947 7 20일에 쓴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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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정확히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싸우는 거다. 브르타뉴에서 배웠지. 이 참혹한 세계는 약하고 무기력하고 굶주리고 슬프고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약자를 외면하는 건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일 게야. 특히 네가 군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전사가 어떤 남자의 딸을 빼앗고 싶으면 그냥 빼앗고, 땅을 원하면 죽이면 되니까. 결국 넌 전사가 아니더냐. 너한테 창과 탈이 있는 반면에 상대는 부러진 쟁기와 병든 소뿐인데, 거칠 게 뭐가 있겠냐?” 물론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조용히 걷기만 했다. 서쪽 성문의 통나무 계단에는 새로 내린 서리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아서가 입을 연 건 계단 위에 완전히 올라선 후였다. “하지만 데르벨, 우리가 군인이 된 건 바로 그 약자들이 우리를 군인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란다. 그가 곡식을 키워 우리를 먹이고, 가죽을 무두질해 보호해주고, 물푸레나무를 깎아서 창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 우린 그 사람들한테 봉사할 의무가 있어.”

(389)

그냥 대화나 하자는 것 아니냐! 대화는 문명의 이기야, 데르벨. 칼과 방패와 욕설만으로 삶을 꾸릴 수는 없지 않겠니? 우리 같은 사람들만이라도 그 명예로운 이기를 시도해야지.” 그가 콧방귀를 끼었다.

(515-516)

당연히 아니지. 데르벨, 사람들은 아서를 과서평가하고 있어. 그의 선과 친절을 보고, 정의 대한 웅변을 듣지만, 그 안에 정말로 어떤 불이 타오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데르벨, 자기도 모르긴 마찬가지야.”

어떤 불입니까?”

야망.” 그녀가 담담하게 내뱉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의 영혼은 두 마리 말이 끄는 화차야. 야망과 양심. 하지만 데르벨, 야망의 말이 오른쪽에 있기 때문에 양심은 그 말에 끌려갈 수밖에 없어. 게다가 그 사람, 능력도 있잖아. 그것도 상상도 못할 능력이.(슬픈 미소) 그 사람을 잘 지켜봐, 데르벨. 모든 것이 파괴되고 절망적인 순간이 되면, 사람들을 정말로 놀래줄 테니까. 전에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 사람은 이겨. 그때마다 양심의 말이 고삐를 빼앗아, 적을 용서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마는 문제지만.”

(557)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면, 문득 그 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 눈빛에 숨이 한 박자씩 빨라지고, 그 눈만이 행복의 모든 조건이며, 그 눈이 없으면 영혼은 공허한 껍데기가 되고 말 거라는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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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탈핵은 가능하다. 탈핵의 대안이 무어냐고 묻지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탈핵은 그 자체로 대안이다. 탈핵이라는 목표를 정해놓고 우리는 길을 닦아야 한다. 우리의 삶과 미래를 핵 마피아들에게 저당 잡힐 수는 없다. 설계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폐쇄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수명 연장을 할 것인가의 문제를 누가 정해야 할까? ‘우리 원자력계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관료들이 밀실에서 짬짜미하는 것을 계속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공론의 장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결정할 것인가? 핵발전소를 더 지을 것인가, 아니면 대체 에너지에 과감한 투자를 시작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모두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독일이 탈핵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 문제를 핵발전 전문가들이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탈핵을 결정한 17인의 윤리 위원회에는 소위 말하는 핵발전 전문가는 한 명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민주주의란 결국 일반인의 상식에 의해서, 또 일반인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28)        

더욱 중요한 것은 1mSv라는 기준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이 수치는 어떤 기분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전문가들에게 물어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선을 넘으면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이 선 아래면 괜찮다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자연환경에서 나오는 자연 방사선(혹은 바탕 방사선이라 부르며, 절반 정도는 땅에서 올라오는 라돈으로 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을 제외하고, 일상적으로 불가피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인위적은 상사선량을 어느 정도 낮은 수준까지 관리할 수 있는가로 기준을 잡은 것입니다. 건강이 아니라 통제(control)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1mSv라는 수치는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이상의 인위적인 초과 노출은 관리할 수 있되, 그보다 더 낮게는 관리하기가 어려운 수준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30)

방사선의 생물학전 영향은 방사선(에너지)이 사람 몸을 관통하면서 세포 내의 DNA 연기 서열을 끊거나 손상시키면서 시작됩니다. 본래의 염기 서열을 끊거나 손상시키면서 시작됩니다. 본래의 염기 서열이 끊어지거나 훼손되면 생체는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수리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일부 수리 작업이 잘못되면서 비정상적인 세포, 즉 암세포가 발생하게 됩니다. 잘못된 DNA에서부터 암 발생까지의 과정이 짧게는 2(백혈병의 경우)부터 위암, 폐암, 간암 같은 고형 암(딱딱한 덩어리 암)의 경우는 20~30년까지 소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 발생 초기에 적절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해당 암 세포들이 혈액이나 체액을 통해 다른 장기로 퍼지면서 전이가 됩니다.

(34)

세계적으로 위 내시경으로 위함 조기 검진을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위 내시경 검진 제도는 일본을 따랐던 것인데 일본조차도 현재 이 제도를 포기하려고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해봤으나 이를 통해 생존율이 높아졌다는 근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 내시경 검사를 열심히 해서 위암을 발견해 치료하는 효과나, ‘아프기 시작할 때 병원에 갈 수만 있다면(즉 의료 이용 접근성이 일정하게 보장만 된다면)’ 병원을 찾아가 그때 치료하는 효과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위 내시경 검사는 종종 부작용까지 수반되는 위험한 검사합니다. 위 속에서 기구가 잘못 움직이다가 위벽에 상처를 내거나 심한 경우 구멍을 뚫게 되어(위장 천공) 결국은 배를 째고 수술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위 내시경 검사 도중에 조직 검사 등을 많이 하는데, 조직을 떼어낸 후 지혈이 잘 안 되어서 계속되는 출혈로 2차 처치를 받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이런 합병증 리스크까지 계산하면, 정책적으로 이러한 제도를 고수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심각하게 재고해봐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의 건강검진 항목이나 미국에서 나오는 자료들에는 건강검진으로서 위 내시경 검사는 하지 말라는 권고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위 내시경 검사는 합병증 리스크가 더 높을 수 있고 검진의 효과는 증명된 바 없다는 것이 세계보건기구의 공식 보고서 내용입니다.

(65)

지금 기준치인 100Bq/kg을 넘은 일본 수산물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이 기준치 때문에 통과시키지 않은 일본산 수산물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건 경부고속도로의 속도제한이 시속 1000km로 되어 있는 것과 같아요. 도저히 위반할 수 없는 기준이죠. 그래서 우리 국민들의 피폭량을 줄이는 데 정부의 기준치가 한 번도 제 역할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반만 년 역사에 한 번도 발견되어본 적이 없는 숫자를 기준치로 두고는 그 이하는 모두 안전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113)

그럼 왜 포장 인도 위에서 유독 방사선량이 높았던 걸까요? 사실 모니터링 포스트를 세울 때는 주변을 깨끗하게 청소합니다. 또 포스트가 넘어지지 않도록 바닥에 콘크리트와 철판도 깔지요. 이런 요소들이 방사선을 조금 차단해주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보도에 깔린 부드러운 타일입니다. 도로에는 눈이 와도 잘 녹도록, 또 걷는 사람들의 무릎에 충격이 덜 가도록 부드러운 타일을 까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통행인을 배려한 것이지요. 하지만 소재가 부드럽다는 건 빗물이 스며들기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보도블록에는 방사선이 많이 섞인 비가 스며들어 남아 있습니다. 수압이 높은 물 청소기로 씻어내도 다 씻기지 않아요. 그러니 저 보도에서 방사선을 줄이려면 블록을 다 철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철거한다 한들 그 철거한 보도블록을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습니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저런 보도블록은 통학로처럼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길 주변에 많이 채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161-162)

핵발전은 본질적으로 물질에 대한 끝없는 탐욕과 에너지 중독의 산물입니다. 인간성 파괴를 부추기는 악마의 발명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것은 가장 비민주적인 속성을 지녔지요. 핵발전은 핵무기와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라서 공개적으로 운영할 수가 없습니다. 관련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제대로 보도도 되지 않지요. 독점적이고 대규모로 집중적으로 반공동체, 반인권, 반생명적이라는 속성도 명백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핵발전은 자연의 질서를 근원적으로 교란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핵에너지란 본질적으로 인간 능력의 한계 밖에 있는 문제입니다. 비유하자면 핵에너지는 현대판 판도라의 상자이자, 기독교 관점으로 보자면 선악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주 달콤해 보이는 에너지원이지만 자손 수천 대에 이르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고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188)

탈핵은 거저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논증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탈핵을 위한 시민 행동입니다. 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 일에 함께해야 합니다. 가깝게는 탈핵을 주장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일부터, 멀게는 탈핵 프로세스를 짜고 단계별로 국회를 압박하며, 탈핵을 위해 동아시아 시민들이 연대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실행에 옳기는 일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핵발전 기관차를 멈출 힘은 행동하는 국민만이 갖고 있습니다.

(246)

서울의 방사능이 왜 이렇게 도쿄보다 높은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환경운동가인 최병성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건축이나 도로 포장에 쓰이는 시멘트와 아스팔트에는 방사능이 섞인 산업 쓰레기와 철근들이 무차별로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한심한 일입니다. 저질 시멘트나 아스팔트도 문제겠지만,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을 지금 우리나라도 전국적으로 계속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한동안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를 가지고 다니다가 포기했습니다. 방사능이 전국적으로 다 나오니 갖고 다니는 게 의미가 없더군요.

(257)

우리가 사람답게 살려면 기본적으로 인간다운 위엄을 갖춰야 합니다. 품위 있게, 예의 바르게 남의 처지를 이해해야 사회가 성립됩니다 아무리 제도와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한 사람, 한사람에게서 출발합니다.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에 비해 인간적으로 왜소한 것은 틀림없어요. 하지만 지금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복합적인 위기 상황은, 과거의 그 어떤 세대도 경험하지 못했던 정신력과 지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녹색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서 재생 가능한 태양에너지와 식량 자급 시스템을 확보하고, 전쟁을 그만 두고, 평화 체제를 확립하고, 무엇보다 경제성장을 멈추고 생활수준을 낮추어 가난하고 소박한 상부상보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는 삶의 방식을 재창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인한 정신력과 탁월한 지혜가 필요한데, 지금같이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이것이 과연 가능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289)

사실 친환경 식품이라도 먼 거리에서 온 제품이거나 소비 규모가 크다면 에너지의 관점에서 친환경적이기 어렵습니다. 또 유기농이라고 해도 화학비료를 쓰지 않았을 뿐, 에너지를 투입하는 가온 재배로 얻어낸 것일 수도 있어요. 즉 비닐하우스에서 전기나 석유 등으로 열을 투입해서 채소를 기른다면 재배 과정에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환경적으로 건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일부 생활협동조합에서는 가온 재배를 하지 않도록 생산 농가와 따로 계약을 맺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계절과 관계없이 어떤 채소든 1년내내 소비하려 하면 저온 저장 시설을 가동해야 하니 또다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됩니다. 그러니 당장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깨끗하다고 해서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식품 소비에 있어 에너지 문제까지 확장해 고민할 때 본질적으로 친환경적인 내용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다다른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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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us_fugit 2018-05-21 0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미나에서 알게된 한 일본인 시만단체 회원분이 일본에서 측정되는 방사능 수치조차 믿을 수 없다는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측정소가 정확한 위치에 있지도 않거니와 측정기를 비닐로 덮어 씌우거나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때도 한동안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동요를 걱정해서 였다지만 음.... 현 상황과 비교해봐도 참으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녹색평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후쿠시마 건은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습니다.

bookholic 2018-05-22 00:07   좋아요 1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방사능과 핵발전소는 정말 지구의 암덩어리로 미래의 걱정거리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런저런 피해를 주고 있지만, 인류의 후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세대들이 지금의 세대들에게 많은 원망을 할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탈핵을 해야 할 텐데요...

Tempus_fugit 2018-05-22 00:53   좋아요 1 | URL
정말 정말 옳으신 말씀입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미래 세대에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그럴 권리도 없습니다. 사용 후 핵연료 관리비용도 천문학적이지만 더 나아가 현재 우리들, 미래세대들의 불안으로 인한 비용을 경제적으로 환산한 것을 더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겠지만 탈핵 쪽으로 더 여론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bookholic님과 같은 바램입니다.
 














(26)

모어는 유토피아 개념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위험하다고 이해했다. 철학자이자 선도적인 유토피아 전문가 라이먼 타워 사전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유토피아의 존재를 열정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아울러 자기 신념에 깃든 부조리를 꿰뚫어보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유머나 풍자와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는 정신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젖힌다. 사람이든 사회든 점차 나이 들어가며 현상에 익숙해지므로 자유는 감옥으로 진실은 거짓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현대 신조나 더욱 안타깝게는 믿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신념 탓에 우리는 여전히 주변을 매일 에워싸고 있는 근시안적 사고와 불공정성을 보지 못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어째서 우리는 1980년대 이후 어느 대보다 부유해졌는데도 점점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을까? 어째서 빈곤을 완전히 퇴치하고도 남을 만큼 부유한데도 인구 수백만만 영이 여전히 빈곤에 허덕일까? 어째서 개인소득의 60% 이상을 자신이 어쩌다 태어나게 됐을 뿐인 국가가 좌지우지할까?

(28)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는 것은 거의 허울뿐인 자유주의이념이다. 오늘날은 너 자신이 돼라네 일을 하라가 중요하다. 자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이상일지 모르나 공허해지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고찰은 두려움의 대상이므로 공공 토론에서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결국 공공의 장은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온정주의적이다. 거리마다 진탕 마시고 떠들고, 빌리고, 사고, 힘써 일하고, 스트레스에 짓눌리고, 부정을 저지르라고 유혹하는 덫이 널려 있다. 사상 표현의 자유에 대해 스스로 무엇이라 말하든 우리의 가치는 황금시간대에 광고를 내보낼 수 있는 재력을 갖춘 기업에 과대선전하는 가치에 가깝다. 광고 산업이 우리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의 일부가 어느 정당이나 종교 교파에서 비롯된다면 우리는 반기를 들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시장이므로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30)

세상은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청년이 정신과 진료를 받고, 경력 초기에 몸과 마음이 탈진하고, 항우울제를 상용한다. 사회는 실업과 불만, 우울증 같은 집단적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 탓이라고 거듭 비난한다. 성공이 선택이라면 실패도 선택이다. 일자리를 잃었는가? 더욱 열심히 일했어야 했다. 몸이 아픈가? 건강한 생활방식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불행한가? 약을 복용하라.

(72~73)

하지만 돈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열쇠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맞다. 하지만 한 국가를 전체로 보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기대수명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는 시기는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연간 약 5,000달러까지일 때다. 하지만 일단 충분한 양의 음식, 비가 새지 않는 주택, 깨끗한 식수가 확보되고 난 후라면 경제 성장은 더 이상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이때부터 행복 정도를 훨씬 정확하게 가리키는 지표는 불평등하다.

(124)

진보를 측정하는 기준에 따른 문제는 시대마다 다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계는 더 이상 경제의 진짜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시대마다 해당 시대에 맞는 진보를 가리키는 수치가 필요하다. 18세기에는 수확의 규모가 중요했다. 19세기에는 철도망의 반경, 공장 수, 탄광업의 생산량이 중요했다. 20세기 들어서는 국민국가의 경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산업의 대량 생산이 중요했다.

(149)

현대 지식 경제에서는 주당 40시간의 근로시간도 지나치게 많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창의적인 능력을 계속 사용하는 사람은 평균적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생산성을 발휘할 수 없다. 창의적인 자질과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인재를 보유하고 있는 부유한 국가들이 주당 근로시간을 가장 많이 줄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22)

수십억 인구는 풍요의 땅에서 제품 가격의 작은 일부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팔도록 강요당한다. 모두 국경이 있기 때문이다. 국경은 세계 역사를 통틀어 최대 단독 차별 요인이다. 같은 국가의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차이는 분리된 세계 시민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차이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은 소득 상위 8% 부자가 전체 세계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고, 상위 1% 부자가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최하위층 10억 명이 소비하는 금액은 세계 전체 소비액의 1%에 불과하지만 최상위층 10억 명의 소비액은 72%이다.

(236)

새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옛 아이디어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렵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269)

따라서 이 책에서 제안한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두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 첫째, 당신과 같은 사람이 바깥에 더욱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정말 많다. 내가 만났던 수없이 많은 독자들은 이 책에 소개한 개념을 전적으로 믿으며 세상이 부패하고 탐욕스럽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주위를 돌아보고 조직을 결성하라고 촉구했다. 세상에는 진심으로 좋은 의도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둘째, 낯이 두꺼워져라. 무엇이 중요한지 아무도 당신에게 명령하지 못하게 하라.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이어야 하고, 불가능에 도전해야 한다. 이 점을 기억하라.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동성 결혼을 요구했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미치광이라는 낙인이 찍혔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역사가 증명할 때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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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선 대부분의 왕들은 평화를 도모하는 훌륭한 방법보다는, 나로서는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 전쟁술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들이란 자기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토를 잘 통치하는 일보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새로운 영토를 손에 넣는 일에 고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의 고문들은 모두 대단히 영리해서 다른 사람의 학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적어도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총신의 영향력을 통해서 국왕의 측근이 되려고 총신들의 지극히 어리석은 발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기에 아부까지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입니다. 어미 까마귀는 자기 새끼가 제일 귀엽다고 하고 원숭이는 자기 새끼가 제일 귀엽다고 한다지요.

(31)

그래서 추기경님 앞이지만 내가 감히 이렇게 한마디 했습니다.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도둑을 교수형으로 처벌하는 것은 우선 정의에 어긋나고, 또한 어떤 경우에도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처벌 차제가 지나치게 가혹하고 게다가 효과적인 억제책도 못 됩니다. 단순 절도는 목숨을 앗아 가야 할 정도로 중한 범죄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아무리 가혹한 처벌로도 먹을 것을 구할 다른 방법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도둑질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잉글랜드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가 마치 학생을 가르치기보다는 매질을 하려 드는 도둑질을 하다가 목숨을 잃게 하는 대신에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거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도둑질에만 가혹하고 끔찍한 처벌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40)

만약 이러한 악폐의 치유책을 찾지 못한다면 절도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자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현 정책이 피상적으로는 공명정대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실제로는 공정하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을 엉망으로 키워서 어릴 적부터 기질적으로 점점 타락하며 자라도록 방임한다면, 그리고 초년의 습성에 따라 저지른 범죄에 대해 그들을 성인으로서 처벌한다면, 그렇다면 이는 먼저 도둑으로 만들어 놓고 나서 도둑질을 했다고 나중에 처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묻고 싶습니다.

(63)

국왕의 명예와 안위는 국왕 자신의 재산이 아니라 백성들의 재산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백성들은 국왕의 노고로 자신들이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국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 국왕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자신보다는 양들을 먹이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갖는 것이 목자의 의무이듯이, 자신의 안녕보다는 백성들의 안녕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 국왕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빈곤이 공공의 안녕을 보장한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소립니다. 역사는 그와 정반대를 보여 줍니다.

(64)

만약 백성의 극심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어서 학대와 약탈과 몰수를 통해서만 통치가 가능한 왕이라면, 그러한 상황에서는 왕의 권력은 갖고 있지만 왕의 존엄은 모두 상실하므로, 차라리 왕위를 양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왕이란 번영과 행복을 누리는 백성들을 통치할 때만 존엄성을 지니며, 걸인들을 대상으로 권력으로 행사할 때 왕으로서의 존엄성은 없는 것입니다.

(68)

당신이 나쁜 아이디어를 뿌리째 뽑지 못하고 오래 지속되어 온 악폐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다고 해서 폭풍 속에서 배를 저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낯선 아이디어를 오만하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정책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상황은 요령 있게 처리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좋게 만들 수 없는 것은 가능한 한 최소로 나쁘게 만들도록 힘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한 모든 제도를 좋은 제도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날이 그리 빠른 시일 내에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73)

그러므로 사유 재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공정하고 올바른 재화의 분재는 있을 수 없으며 국민이 행복하게 살도록 통치하는 국가도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사유재산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수많은 국민이, 그것도 가장 선량한 국민들이 근심과 걱정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압박을 받습니다. 이러한 부담이 어떤 제도를 통해 다소 가벼워질 수도 없다는 점에서 나의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도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든가 일정 액수 이상의 소득을 벌어들일 수 없다는 법을 만들 수 있겠지요.

(95~96)

일하는 데 여섯 시간만 할애하니까 생필품의 공급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의 노동시간은 생필품의 생산뿐 아니라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물품까지 생산하고도 남을 정도로 충분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인구의 상당 부분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우선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의 대부분이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여자가 일을 하는 경우라면 남편 되는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서 코나 골고 있지요. 그리고 신부들과 소위 종교인이라는 게으른 대집단이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모든 부자들을, 특히 신사나 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주들을 첨가해 보십시오. 이들에게 소속되어 거들먹거리면서 주먹이나 휘두르는 무리인 시종들도 포함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나태에 대한 핑계로 병을 가장하고 살아가는 건장하고 원기 왕성한 걸인들의 수효도 계산에 포함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생산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99)

모든 사람들이 유용한 직종에서 일을 하고 아무도 과소비를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보수 작업이 필요한 도로가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길에 나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공공사업조차 없을 경우에는, 시민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은 절대로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관리들이 하루 노동 시간을 단축시킨다고 선포합니다. 이 나라 헌정의 주요 목적은, 모든 시민은 육체노동에 투여하는 시간과 정력을 가능한 한 아끼어 이 시간과 정력을 자유와 정신의 문화를 누리는 데 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들의 생각으로는 사람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109)

이렇듯 유토피아인들에게는 빈둥거리거나 시간을 낭비할 기회가 없으며 일을 회피할 구실도 없고, 술집도 없고 맥줏집도 없고 사창가도 없고, 타락할 기회도 없고, 숨을 곳도 없고 비밀리에 만날 장소도 없습니다. 만인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자기 일을 하든지 아니면 건전한 방법으로 여가를 즐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생활 양식의 결과로 삶에 유용한 것들 것 당연히 풍족하게 되고, 따라서 그 누구도 빈곤하다거나 구걸을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118)

유토피아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그러한 어리석음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사회 제도 내에서의 성장과 교육과 좋은 독서를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각 도시에서 노동을 면제받고 학문에만 몰두하도록 지정되는 사람들의 수호는 비록 많지 않지만(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두뇌와 학문에의 헌신을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좋은 책을 접할 기회를 가지며,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녀 모두 일생 동안 여가 시간을 독서로 보냅니다.

(121)

사실 유토피아인들은 행복이란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하고 정직한 즐거움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덕 자체가 우리의 본성을 최상의 선으로 이끌어 가며,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러한 종류의 즐거움으로 이끌어 간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이와는 달리 덕은 그 자체로서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학파도 있습니다.

(132)

모든 종류의 즐거움 중에서 유토피아인들은 주로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이것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데, 그 까닭은 대부분의 정신적 즐거움은 덕의 실천과 선한 삶을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즐거운 중에서는 건강을 최고로 여깁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서 얻는 기쁨은 이러한 행위가 오로지 건장을 위해서일 때만 바람직한 육체적 즐거움으로 간주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라 오로지 질병의 은밀한 공격을 이겨 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병의 훌륭한 치유법을 얻기보다는 아예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할 것이며, 진통제를 구하기보다는 고통을 방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법이나 진통제로 위안을 얻는 즐거움은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이 더 좋겠지요.

(149)

유토피아에는 법이 몇 개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최소한의 법 외에 다른 법의 필요성은 느끼지 않을 정도로 교육이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인들이 보는 다른 나라들의 가장 큰 결함은 무한한 양의 법률서와 해설서를 가지고도 국사를 올바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도 없고 너무 난해해서 이해할 수도 없는 법률들로 사람을 결박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이 유토피아인들의 생각입니다. 변호사로 말하자면, 변호사들이란 사건을 조작하고 말싸움이나 다양하게 요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라서 유토피아인들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191)

생계에 대해서 아무 걱정도 없고 모든 불안에서 자유로우며 기쁘고 평화롭게 사는 것보다 사람한테 무엇이 더 큰 재물일 수 있겠습니까? 남편은 돈에 대한 아내의 짜증이나 불평에 시달리는 일이 없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가난을 걱정하거나 딸의 지참금을 마련하려고 애쓸 일이 없습니다. 모든 남자는 자신의 생계와 행복만이 아니라 자기 가족 전체의 생계와 행복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내,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등 양민들이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를 무척 좋아하는 긴 계열의 후손들까지도 포함됩니다. 한때 일을 했었으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조차도 마치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똑 같은 보살핌을 받습니다.

(193)

더 나쁜 것은 부자들이 개인적인 사기 행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국가의 조세법을 통해서 이 사람들의 하찮은 임금의 일부를 착취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입니다. 국가로부터 최상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최소의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최소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위배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착취에 법의 색깔을 입혀 놓음으로써 정의를 한층 더 왜곡하고 타락시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의를 <법적>인 것으로 위장하여 놓습니다. 오늘날 번영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볼 때, 그러한 나라들 안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국가라는 이름하에 자신들의 이익을 축적하고 있는 부자들의 음모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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