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억은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사진처럼 편리하게 구겨버리거나 도려낼 수도 없다. 기억은 스스로 사라진다. 파괴는 불가능하고 분실이 최선이다. 왜 잊으려 애쓰는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었음을 깨닫는가? 되찾을 때가 왔기 때문이다. 기억의 종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개와 같다.

(10~11)

세상은 말로 배울 수는 없어.”

하나같이 줄담배를 피우던 대학 선배들은 종종 역설의 정수와 같은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말. 그것은 말로 배운 말이었다. 말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배운 말로 나도 후배를 타일렀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말로 배울 수 없다는 건 사실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어쩌면 아닐 것이다. 경험보다 말을 많이 가진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끝없는 말들. 세상보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이야기. 아마도 세상은 언어가 소멸하는 날에 종말을 맞을 모양이다. 이제 선배들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말과 함께 나이 들었고 나이와 함께 거짓말의 비중을 늘려왔지만 다 지나간 일을 굳이 거짓으로 덮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 묻습니다. 혹시 끊을 날이 올 걸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까?

(28)

빗줄기라는 표현은 틀렸어요. 빗방울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한줄기처럼 보여도 띄엄띄엄 내리지요. 실은 세상 모든 게 띄엄띄엄 존재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비가 띄엄띄엄 내리듯이 디지털 역시 띄엄띄엄의 기술이다. 양자 에너지도 띄엄띄엄이다. 사랑도 띄엄띄엄 찾아오고, 소변도 띄엄띄엄 마려운데, 그 이유는 심지어 시간조차 띄엄띄엄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 만물이 띄엄띄엄하다! 그는 자기 철학에 이름까지 붙였다. 띄엄띄엄의 철학.

(43)

그런데 형사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묻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학생증을 넘겨받아 유심히 살펴본 다음, 무죄가 입증되었다는 듯이 그를 방생시켰다. 체포된 노동자들이 나오는 절차는 달랐다. 훨씬 길고 복잡했다. 더러 유치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교도소로 바로 이감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다른가? 관점에 따라 단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거나 혹은 서울대 학생과 노동자의 차이로 볼 수 있었다. 전자라면 대석 형은 술래잡기의 깍두기로 무시당한 것이고, 후자라면 장래가 창창한 명문대 학생으로 특별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씨발놈의 계급사회, 멸망해버려라!” 나는 그에게 학생증을 내밀지 않았으면 구속당할 수 있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는데 너무 치사한 질문 같아서 그만두었다.

(111)

, 진보적 자녀는 어떤 경우에나 나타날 수 있지만 보수적 자녀는 보수적 부모에게서만 나올 수 있어. 이 비대칭이 인류의 역사가 야금야금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원리일 거야.”

(223)

기숙사 침대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선배들의 전설을. 온갖 고문을 당하고도 기밀을 발설하지 않았다는 굳센 의지의 영웅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우리의 입을 여는 데는 고문은커녕 고만의 암시조차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나약해진 걸까? 세상이 너무 착해진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악을 악이라 믿지 않았던 게 아닐까? 우리는 악의 존재를 원했고, 우리 앞에 맞선 자들을 서슴지 않고 악이라 불렀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악을 신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227)

사실 나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였다. 인간은 불행이 따르면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불행이 닥치지 않는다고 의아함을 느끼지는 않는 법이다. 그리고 불행은 인간이 완전히 방심했을 때, 즉 몸과 마음의 긴장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았을 때, 무장강도처럼 불쑥 찾아와 최악의 피해를 남긴다. 그래서 그것이 불행이라고 불린다.

(254)

마음속에서만 꾹 담아둔 말. 그런 말은 검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할 가치가 있는 말이라고 느꼈다. 마음속에서만 담아두면 검증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332)

하지만, 겨우 그 정도를 과대망상이라 부른다면 이런 상상은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축제를 위해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는 게 아니다. 거꾸로 감옥에 보낸 사람들을 잊기 위해 우리는 축제를 벌인다. 축제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축제란 불바다인 전쟁과 피가 튀는 학살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다섯 개 국가경축일 가운데 네 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개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대한민국의 45개 국가기념일 가운데 17새가 전쟁과 관련이 있다. 축제는 인간의 죄에서 유래했다. 축제의 흥취에 익사 직전까지 젖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저지른 지나간 죄는 깨끗이 망각된다.

(352)

마르크스는 상품의 진정한 도량 화폐는 노동시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책장을 만들어내는 데 쓰인 노동시간은 책장의 사용가치를 자명하게 함축한다. 책장의 사용가치에 비해 노동시간이 크게 소요된다면 굳이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은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줄곧 평가된다. 바로 가격이다. 책장의 경우에는 4만 원이다. 이때, 책장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은 구체성과 특수성과 질적 차별성을 잃고 입에 넣어 우물거리는 한우 스테이크 한 점과 동등한 것으로 전락한다. 추상적 숫자가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되는 순간, 우리 세계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의 주인성은 박탈된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역사적 저작물을 아름답게 전시해놓을 의미 있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딱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 된다. 하루 열다섯 시간. 먼저처럼 날리는 톱밥. 유독한 휘발성 가스. 전기톱날이 앗아 간 손가락. 그 모든 것이.

한우 스테이크 한 접시와 같다.

(380)

이름이 없어서 세상을 정처 없이 표류한 사람. 세상은 이름들이 만물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곳이다. 부를 수 없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사물과 같다. 이름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을 뿐. 그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가슴 언저리가 아려오는 슬픔을 느낀다.

(500)

아름다움이 너무나도 드물기에 우리는 그것을 좇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대번에 홀린다. 세상에 거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주를 부유하는 작은 원소들처럼 그저 밀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플라톤에 한 표를 던진다. 지상에 완전한 아름다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다 배운 게 아닌가? 부질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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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 상품이란 하나의 서비스도, 여러 서비스의 집합도 아니다. 심지어 즐거운 시간이라고도 딱히 말할 수 없다(크루즈 감독과 스태프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느낌에 가깝다. 그래도 진정한 상품이기는 하다. 그 느낌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니까. 여유와 자극의 혼합, 스트레스 없는 방종과 광적인 관광의 혼합, 굽실거리는 태도와 얕보는 태도가 특수하게 혼합된 느낌이. 그리고 이 느낌은 만족시키다라는 동사를 통해서 마케팅된다. 모든 메가라인의 이런저런 홍보물에는 이 단어가 반드시 박혀 있다. “…평생 경험해본 적 없는 수준으로 당신을 만족시키는” “…자쿠지와 사우나에서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우리가 당신을 만족시키도록 해주십시오” “바하마 제도의 훈훈한 미풍을 맞으며 자신을 만족시키세요”.

(28)

죽음에 대한 이상한 갈망, 그리고 나 자신의 시시함과 쓸모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에서 비롯한 죽음에 대한 공포.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불안이나 고뇌라고 말하는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이것들은 같지 않다. 최소한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35)

이것은 내가 관찰했던 바와는 다르다. 내가 관찰했던 바에 따르면, 네이디어는 아주 엄격한 배였다. 냉혹한 그리스 장교들과 감독관들로 구성된 엘리트 간부단이 배를 운영했고, 하급 직원들은 늘 자신을 또랑또랑한 눈으로 관찰하는 그리스 상사들이 무서워서 겁에 질려 있었고, 승무원들은 진심으로 쾌활하기는 힘들어 보일 만큼 디킨스풍으로 중노동을 했다. 아마 쾌할함은 그리스 상사들이 클립보드에 끼워 다니면서 수시로 체크하는 직원 평가지에 민첩함고분고분함과 함께 평가 항목으로 올라 있으리라. 많은 직원은 손님이 아무도 안 본다는 걸 확인하면,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초췌한 피로함과 공포 어린 분위기로 금세 바뀌었다. 내가 볼 때 승무원들은 사소한 과실로도 잘릴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무서운 그리스 상사들에게 잘린다는 것은 티끌 하나 없이 반들반들한 상사의 구두로 엉덩이를 뻥 차여서 무지무지 오랫동안 헤엄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할 것 같았다.

(71)

예술인 척하는 광고는-아무리 훌륭하더라도-말하자면 당신에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따스하게 미소 짓는 사람과 같다. 이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은 그런 부정직이 우리에게 미치는 누적적 영향이다. 진정한 선의 없이 선의의 완벽한 복사물이나 모조품만을 제공하는 그런 것을 자주 접하면, 우리는 차츰 혼란스러워져서 나중에는 진실된 미소와 진짜 예술과 진정한 선의마저 경계하는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은 우리에게 혼란과 외로움과 무력함과 분노와 두려움을 안긴다. 절망을 일으킨다.

(106)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솟과 육식동물이다.

(185)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 아우구스티누스

(309)

랍스터는 그 자체로도 먹기 좋다. 적어도 요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1880년대까지만 해도 랍스터는 말 그대로 하층 계급의 음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만 먹었다. 초기 미국의 감옥 환경이 가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식민지는 수감자들에게 랍스터를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먹이는 것을 법으로 금했는데, 왜나하면 그것은 꼭 사람에게 쥐를 먹이는 것처럼 잔인하고 지난친 고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랍스터의 비천한 지위는 옛 뉴잉글랜드에 랍스터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한 가지 이유였다.

(322~323)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점부터 인정하고 넘어가자. 동물이 통증을 느낄 줄 아는가. 느낄 줄 안다면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가, 우리가 그들을 먹기 위해서 그들에게 통증을 가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당화되다면 어떤 이유로 되는가 하는 질문들은 극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이다. 비교신경해부학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통증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이므로, 우리는 자신 외에 다른 인간이나 다른 동물의 통증을 직접 알아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인간도 통증을 경험하고 따라서 그도 통증을 겪지 않으려는 타당한 이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하도록 이끄는 원칙들은 본격적인 철학의-형이상학, 인식론, 가치 이론, 윤리학의-영역이다. 아무리 고도로 진화한 비인간 포유동물이라도 자신의 주관적인 정신적 경험을 우리에게 언어로 소통할 줄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가 통증과 도덕에 관한 논증을 동물에게까지 확장될 때 부딪히는 추가의 어려움 중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고등 포유루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즉 고등 포유류에서 소와 돼지와 개와 고양이와 쥐로 갔다가, 그다음에는 새와 물고기로 갔다가, 이윽고 랍스터 같은 무척추동물로 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애매해지고 점점 더 뒤엉킨다.

(352)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리고 이 점은 틀림없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어떤 예술은 온갖 장애물을 넘는 추가의 노력을 들이고서라도 감상할 가치가 있으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단연코 그런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서구 고전문학을 압도하는 거물이라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전과 필수 교과로 추앙됨으로써 오히려 가려지는 사실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할뿐더러 재미있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의 소설에는 거의 늘 좋은 플롯이 있다. 강렬하고 복잡하고 철저하게 극적인 플롯이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와 경찰과 문제 있는 집안의 반목과 스파이가 나오고, 터프 가이와 아름답고 타락한 여인과 간지러운 사기꾼과 소모성 질환과 뜻밖의 유산과 반드르르한 악당과 흉계와 창녀가 나온다.

(366)

정보의 억압, 국가의 검열, 특히 그가 소중하게 여기고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자신의 신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경우가 많았던 계몽주의 이후 유럽 사상이 인기를 끄는 현실. 내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정말로 놀랍고 감동적이라고 느끼는 점은 그가 천재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용감하기도 했다. 그는 문학적 평판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놓지 못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은 굳게 믿되 세상에서는 인기 없는 신념을 세상에 퍼뜨리는 작업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에게 불친절한 문화적 환경을 무시하는 방식이 아니라(요즘은 이런 방식을 초월한다거나 전복한다고 표현한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그것에 대항하고 그것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해냈다.

(379)

이 윔블던 결승전에는 복수의 내러티브가, 왕 대 제왕 살해의 구도가, 극단적인 인물 대조가 갖춰져 있다. 이것은 남유럽의 열정적인 남성상과 북유럽의 섬세하고 임상적인 예술성의 대결이다. 디오니소스 대 아폴론이다. 식칼 대 메스다. 왼손잡이 대 오른손잡이다. 세계 이인자 대 일인자다. 나달은 현대적인 파워 베이스라인 게임을 최대한 밀어붙인 선수이고그 상대는 속도와 발놀림 못지않게 뛰어난 정확도와 다양성으로 이 현대적 게임을 또 다르게 바꿔놓은 인물이지만, 앞의 선수에게만큼은 유난히 맥을 못 추는, 혹은 기가 눌리는 선수다. 영국의 어느 스포츠 기자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기자단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나. “이 시합은 전쟁이 될 거야.”

(384)

페더러의 서브 속도는 세계 정상급이고, 서브의 위치와 다양성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서브를 넣는 움직임은 유연하고 딱히 별난 점은 없는데, (TV로 볼 경우) 특징이라면 공을 때리는 순간 온몸에 뱀장어처럼 스냅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다. 페더러는 공을 예상하는 능력과 코트 감각이 비현실적인 수준이고, 발놀림은 이 게임의 역사상 최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릴 때 축구 신동이었다. 이 모든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중 어떤 말도 이 선수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을, 그의 시합에 담긴 아름다움과 천재성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제대로 묘사하거나 환기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미학적인 것에는 비딱하게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에둘러 말하는 수밖에 없다. 혹은-아퀴나스가 자신의 형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그것이 무엇이 아닌가를 말함으로써 그것을 정의하는 수밖에 없다.

(395)

강한 서브로 넘어온 테니스공을 성공적으로 받아넘기는 데는 이른바 운동감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여러 작업들을 재빠르게 수행함으로써 육체와 그 인공적 연장을 잘 통제해내는 능력을 뜻한다. 영어에는 이 능력의 다양한 측면을 뜻하는 용어가 한 무더기는 된다. 느낌, 터치, 기량, 자기 수용 감각, 신체 조화 능력, 손과 눈 조화 능력, 근육 감각, 우아함, 통제력, 반사신경 등등. 이 운동감각을 다듬는 것이야말로 유망한 주니어 선수들이 매일 실시하는 극단적으로 힘든 연습의 주목적이다. 이때 훈련은 근육적인 것이기도 하고 신경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수천 번씩 스트로크를 연습하다 보면, 보통의 의식적인 생각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을 느낌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한다. 외부인의 눈에는 이런 반복 연습이 지루하거나 심지어 잔인해 보이겠지만, 외부인은 선수의 몸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선수의 몸속에서는 미세한 조정이 벌어지고 또 벌어지며, 각각의 변화가 주는 효과에 대한 감각은 설령 의식에서는 멀어지더라도 점점 더 예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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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때 제가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은 몇 명인지,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은 몇 명인지 세보았습니다. 몇 명입니까? 4명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그런데 4명 중에 2명은 갔다 왔고, 2명은 가 있고그러니까 지금 다른 나라 대통령은 5명 모두 무대 위해 올라가서 국민들에게 우리가 뭉쳐야 한다고 호소하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우리나라는 생각하기도 좀 불편한 그런 처지에 전직 대통령들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39-40)

지금은 촛불 이후 시대입니다. 촛불이 세상을 바꾸었고, 촛불이 변화의 첫 단추를 끼워놓은 상황이지요. 그래서 촛불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무엇을 해야 촛불의 정신이 구현되고, 역사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룰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앞서 이야기한 것들을 바탕으로 저는 촛불시대의 과제를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불평등을 평등으로, 불공정으로 공정으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평화의 정착으로, 이 세가지가 우리에게 떨어진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47)

대한민국은 공정합니까? 죄가 있으면 처벌을 받고,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으면 취직이 되고, 일을 잘하면 상을 받고, 이렇게 공정합니까? 답은 뻔합니다.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강원랜드는 우리 사회에 있는 불공정의 문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뿐입니다. 그외에도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 재벌의 대형마트와 골목상권 등 많은 예가 있지요. 지금이 촛불 후 시대라지만 여전히 함께 살려고 하기보다 우월한 지위와 강한 힘을 이용해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습니다.

(49-50)

사법부의 이러한 문제는 국민들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2015 OECD가 회원국 국민들이 자국의 사법 시스템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꼴찌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27퍼센트였습니다. OECD 회원국 평균은 54퍼센트였지요. 우리나라보다 사법부 신뢰도가 낮은 나라는 콜롬비아, 칠레, 우크라이나뿐이었습니다. 사법부라는 건 일종의 저울입니다. 잘못을 많이 하면 벌을 엄하게 주고, 죄가 없으면 석방해주는 저울과 같은 곳이지요. 쉽게 비유해볼까요. 시장에 갔는데 그곳에 있는 저울 중 27퍼센트는 진짜지만 73퍼센트는 가짜입니다. 500그램을 달아도 저울에는 800그램으로 표시됩니다. 그렇다면 그 시장에 가겠습니까? 우리나라 국민들은 사법부를 그런 시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58)

불평등은 다른 말로 기회의 불균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과의 불균등과는 다릅니다. 어차피 사람은 다 다르기 마련이고, 모든 일의 결과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똑 같은 기회를 받아야 합니다. 조선시대처럼 양반만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그렇게 대놓고 차별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균등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기회는 균등해야 약자와 강자가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66)

경제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강자가 독식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세금으로 복지를 늘린들 사회적 분배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격차를 메꿀 수는 없습니다. 불평등의 해소란 바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것, 일자리에서 차별받지 않고 일한 만큼 제대로 받는 것,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 노동해서 먹고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78)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누가 결정해야 합니까? 국민이 결정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도 국민이고, 세금을 내는 사람도 국민이고, 나누는 주체도 국민이라면, 우리나라 복지를 어느 수준으로 하고 어떻게 나눌지는 국민이 결정해야 합니다. 다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요. 28퍼센트에 머물 것인가, 매년 1퍼센트씩 높여서 10년 후 38퍼센트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대통령 후보가 28퍼센트를 유지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28퍼센트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어요.

(102-103)

대통령에 집중된 권한을 국민과 지방에 나눠주는 일, 이것은 정치개혁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 권한이 커질수록 정치인들도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에게 힘이 있는데, 정쟁이나 정계 구도만 신경쓰고 있을 수는 없지요.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은 국민과 지방의 권한이 더욱 커지는 방향이어야 한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108)

민주주의란 시스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업 또는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해도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나라가 문제없이 운영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을 때 시민들은 뉴스에 댓글을 쓰고 청원에 지지하는 정도로 자기 의사를 표현합니다. 촛불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이 생업과 학업을 내팽개치고 주말을 반납하면서 광장에 나온 것은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잘못했고, 비선실세가 부정하게 사욕을 채웠는데, 검찰도 경찰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국정원은 뒤에서 댓글만 쓰는 것 같고, 재판부는 죄다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국회는 손만 놓고 있고, 시스템이 전부 망가진 듯했기에 촛불을 들고 모인 것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경찰과 충돌하고 청와대 담을 넘었나요? 아니지요. 계속 외쳤습니다. 시스템을 복구하라고 말입니다.

(110-111)

그렇다면 가장 역동적이며 직접적인 참여는 무엇일까요? 정당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정당에 가입하는 사람을 권력지향적이거나 권력에 매수당한 사람으로 오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실제로 과거에는 그렇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다릅니다.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어느 당이 좋을지 고민이라면, 일단 지금 가장 자신과 뜻이 맞는 곳에 가입하십시오. 정당에 가입해서 당비를 내고 당원 투표에도 참여하면서 다른 당도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다 다른 당이 더 낫겠다 싶으면 옮겨도 괜찮습니다.

(137-138)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한가지 일만 하기에도 짧습니다. 그렇기에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클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직업이든 심혈을 기울여서 일하고 가치를 창출한다면, 세상에서 내리는 평가 이상의 거룩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더 훌륭하고 좋은 일들이 많지요.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없듯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다른 일을 할 생각과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일로써 우리나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저의 꿈이기에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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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개인은 각자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이익만 챙긴다면 사회는 구심력을 잃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공정한경쟁이 시장의 수요와 공급, 가격을 자연스럽게 조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9)

그러나 일본 경제학자 도메 다쿠오는 <도덕감정론> <국부론>을 면밀히 분석하여 애덤 스미스의 오명을 씻어낸다. 다쿠오는 먼저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는 이타심을, <국부론>에서는 이기심을 말한다면서 두 책을 단절된 것으로 보는 기존의 해석에 의문을 표한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를 해명하면서 결코 인간의 문제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라는 것이다. 이에 다쿠오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유로 <국부론> <도덕감정론>을 연결하며, “도덕 원리가 자연스럽게 경제 원리로 연결되고, 도덕의 세계가 경제의 세계와 이음매 없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세계를 꿈꾼 계몽주의 도덕철학자로 애덤 스미스를 복권한다.

(94~95)

2005 3, 유엔의 주도 아래 구성된 밀레니엄 생태계 평가위원회가 지구라는 공유재에 대한 총 2500여 쪽의 감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지난 50년 동안 자연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착취했다. 주요 원인은 2차세계대전 이후 인구가 폭증하면서 식량, 식수, 목재, 섬유, 연료 등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그 결과 1945년 이후 전 세계를 통틀어 농작지로 개간된 땅의 규모가 18~19세기 개간된 땅의 전체 규모를 뛰어넘었고, 호수와 강에서 끌어다 쓴 물의 양도 두 배 이상 늘었다. 수산자원의 4분의 1이 남획되고, 조류의 12퍼센트, 포유류의 25퍼센트, 양서류의 30퍼센트 이상이 다음 세기 안에 멸종될 위기에 처했다. 또한 지중해 지역, 온대 지역, 열대 및 아열대 지역 등 거의 모든 지역의 삼림 생태계도 절반 이상이 파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120~121)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따라 먼 길을 돌아 또다시 불황 앞에 선 지금, ‘시장 혹은 정부라는 양자택일은 간단치 않은 질문들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오늘날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해야 하는가. 시장은 과연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펼쳐지는 장소인가. 정부가 포괄하는 사회안전망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실업자들을 방치할지언정, 공장을 놀릴지언정, 그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시스템의 명성이 손상될지언정 진정한 원리를 찾아 후퇴하고 싶지 않다는 진성 보수주의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통제할 것인가. 위기마다 시장과 정부 중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는 의미 있는 일인가. 우리의 선택지는 이것뿐인가.

(156)

문제는 일본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 간의 통화전쟁의 부작용이 언제나 국제적으로 전개된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전 지구화된 산업구조 안에서 하나의 상품은 여러 국가에서 제조된다. 이런 상황에서 달라 가치가 하락하면 원자재 값은 상승하게 되고, 제조업 국가들은 결국 비싼 값에 재료를 사들여야 한다. 결국 해당 국가는 제조업 시장을 잃고 공장 폐쇄와 해고, 파산, 경기후퇴 등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선진국들이 양적완화로 챙기는 이익이 사실상 다른 나라가 쌓아놓은 돈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이유다. 결과적으로 양적완화는 교역 상대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또다시 수출이 줄어드는 경제의 악순환을 불러온다.

(183)

헤겔의 관념론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계는 정신으로 구성돼 있고(물질도 정신에서 나온다), 정신은 정반합(正反合)이라는 변증법적 운동 원리에 따라 절대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지금껏 인류 역사가 발전해온 길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을 가져오되 정신의 자리에 물질을 넣는다. 즉 세계는 물질로 구성돼 있다.(정신도 물질에서 나온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물질이 변증법적 운동 원리에 따라 진보한 과정이며, 생산수단을 차지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로마시대는 귀족이 노예라는 생산수단을 점유했다. 봉건시대에는 영주가 땅과 농기구를 소유했다. 자본주의시대에는 자본가가 공장과 기계를 가졌다. 그리고 그 아래로 여러 계급이 헤쳐 모여 서로 살 길을 모색하며 사회 변혁을 이끌었으니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21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아이디어를 잊는 것이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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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우선은 서사의 탁월함이다. <춘향전>은 한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다. 다만 이 사랑의 행로에 온갖 사회, 정치, 문화적 난관들이 겹겹이 치고 들어오면서 러브스토리가 전투를 방불케 하는 모험의 여정이 된다. 여주인공이 애정다툼으로 인해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살해 위협에 놓이는 이런 살벌한 러브스토리가 어디 흔한가. 이 같은 치명적인 삼각관계가 <춘향전>의 극적 긴장을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이다. 여기에 이별과 재회, 원한과 복수, 억압과 저항, 고난과 극복, 출세와 영락 등 명암이 뚜렷한 이야기의 원형들이 드라마를 종횡으로 얽어나간다. 그러니 이야기 구조가 입체적이고 디테일이 풍부할 수밖에. 강력한 코미디의 매력 또한 <춘향전>의 강점이다.

(88)

그것은 당시 청년문화의 한 아이콘이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꿈이되 이룰 수 없는 꿈을 의미했다. 일탈에의 꿈, 현실 저 너머 어떤 곳,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사회로부터 멀리멀리 떠난 곳, 탁 트인 대양과 무한의 자유, 권위적인 아버지를 뛰어넘은 젊은 세대의 미래, 그 모든 것을 통칭했다. 또한, 난숙한 풍요의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든 서구사회가 달라이라마나 라즈니쉬, 참선 등 동양적 패러다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듯, 과학문명과 경제개발의 중심인 서울에서 바라보는 동쪽 끝, 바다와 고래가 갖고 있는 어떤 근원의, 원시의 이미지에 대한 동경이었다. 하지만 해외이민이나 입산수도라면 몰라도 동해바다의 고래는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투지가 안 보이는 이루기를 진즉에 포기한 꿈이다. 청년기의 잠재울 수 없는 갈증과 허기와 객기, 군사정권 아래 숨죽인 병영사회 속에서 폭발할 듯한 대학사회의 스트레스가 거기 담겨 있었다.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좌절의 부호였다. 하시 말해, ‘허공에의 질주였다.

(114)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됐을 때 부푼 꿈이 깨져 허탈해 하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믿기 싫지만 진실에 가깝다. 총독부가 손목을 비틀어서 이광수가 <전망>이나 <조선의 학도여> 같은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들의 저류에 깔리는 필자의 정서는 억압과 굴종이 아니라 낙관과 투지에 들뜬 비상한 흥분 상태다. 다만,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광수가 어찌해서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멀쩡한 조선의 영화인들이 어찌어찌해서 마친내 민족의 죄인이 되고 말았는지는 연구 대상이다. 그것을 시대적 조울증스톡홀름 신드롬으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237)

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잠 속의 환각도 꿈이고, 미래의 소망도 꿈이다. 두 가지는 성질도 다르고 차원도 다른, 전혀 동떨어진 영역에 속해 있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유사성을 갖고 있다. 모두 마음의 작용이며, 물리적 실체가 없고, 지금 현실과의 관계란 그저 가느다란 끈 정도다. 나는 문득, 그 꿈도 꿈이라 부르고 저 꿈도 꿈이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우리말뿐 아니라 다른 언어를 만든 사람들도 똑 같은 발상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영어의 ‘dream’ 역시 두 가지 꿈이다. 중국어의 도 그렇다. 프랑스어의 ‘reve’(레브)나 스페인어의 ‘sueno’(스에뇨)도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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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3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 명절 잘 보내세욧!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