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자클린느의 정수 너그럽고, 밝고, 재능 있고,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큰마음 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 저 깊숙한 곳의 어떤 감정들이 용인되지 않음을 어릴 때부터 알았고 그래서 그런 감정들을 미소 띤 얼굴로 감추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해맑은 웃음 뒤에는 사적이고, 역설적인 성격이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그녀조차 꿰뚫어볼 수 없는 불가사의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자클린느 자신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삶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 사람들의 통찰력과 관찰을 통해 조금씩 베일을 벗었다. 마치 용액 속의 사진처럼 차츰 하나의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95-96)

플리스가 <첼로>에서 결국 연주는, 음악이라곤 배운 적도 없지만 아이의 머리맡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유모의 노래처럼 비과학적이고 구속이 없는 소리여야 한다고 했다. 첼리스트는 이러한 무위의 환영에 이르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단 하나의 악구에서도 무궁무진한 다양성을 창출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운지, 운궁, 뉘앙스를 생각하고 연습한다. 첼로는 피아노와 기타 많은 악기들과 달리 오른손과 왼손의 기능이 전혀 다르다. 마치 배를 쓰다듬으면서 머리를 문지르되 끊임없이 미묘한 변형이 이뤄지는 것과 비슷하다. 오른손은 소리를 내고, 왼손은 색을 입힌다. “연주를 할 때는 마치 맹인이 손과 손가락 끝으로 사물을 느끼듯이 오른손과 손가락 끝이 음악의 테두디를 훑고 지나간다고 상상하라고 플리스는 말한다. 이와 달리 왼손음악이 지시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도록 온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마치 살랑대는 미풍에도 흔들릴 만큼 기름을 매끈하게 바른, 교회 꼭대기의 바람개비처럼.”

(99-100)

자클린느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것에 대해 자주 후회를 하지만, 첼로와 보낸 시간에 대해서는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첼로는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것, 필요할 때마다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첼로는 나의 멋진 비밀이었다. 생명이 없는 대상이었지만 나는 첼로에게 나의 슬픔과 문제들을 모두 다 말하곤 했다.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건 뭐든 다 주었다. 첼로를 연주하는 일이 가장 좋았다. 연주를 할 때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첼로 연주를 통해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알 수는 없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116)

지난 몇 주, 런던의 청중들은 전도가 유망한 다소 어린 솔리스트들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이들 가운데 지난밤 위그모어에서 첼로를 연주한 자클린느 뒤 프레 양은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어린 연주자라고 믿기 어려운 기량을 가졌기에 그녀의 공연 논평을 쓰면서 전도유망을 언급한다는 것이 모욕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123)

퍼시 케이터느는 <데일리 메일>에 이렇게 적었다.

현재 빛나는 첼리스트이며, 이제 곧 저명한 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17세의 자클린느 뒤 프레는 지난 밤 로열 페스트벌 홀에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성인데뷔무대를 치렀다. 그녀의 연주는 기교의 자유로운 구사에 나이에 비춰 감탄을 자아낼 만한, 감정의 성숙이 결합된 것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지휘자가 루돌프 슈바르츠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함께 연주한 동료들이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홀을 메운 관중들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세 번이나 그녀를 무대를 불러냈다. 중후미의 요소들이 있고 분위기와 템포가 자주 바뀌는 엘가의 협주곡은 곡해석이 난해하다. 연한 푸른빛의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첼로를 연주하는 하얀 피부의 키가 훌쩍 큰 소녀는 29분 내내 신들린 듯한 모습이었다.

(133-134)

영재 아동을 둔 가족들은 부러움이 아니라 동정을 받을 만한데, 신동의 재능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인 탓이다. 비범한 재능은 가족의 활동과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며 시간, 에너지, 재력, 감정적 지원이라는 자원을 무리하게 쓰게 만든다. 교육자나 심리학자들은 신동이 한 가족의 평형에 미치는 영향은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아만큼이나 크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따를 것이라는 전언을 듣는다.

(155)

그녀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첼로는 도대체 만족이라곤 모르는 가혹한 공사감독이 되어버렸다. 헌신, 직관 그리고 타고난 재능이 그녀를 여기 멀리까지 데려왔고 더 멀리 나가기 위해서는 명료한 선택이, 일상의 삶을 넘어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해 보였다. 음악적 통찰력을 더욱 날카롭게 하려면 삶의 무게, 경험의 무게가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과거에 그랬듯이 앞뒤 보지 않고 오로지 연주만 계속한다면 언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딜레마는 더 깊은 고립감을 안겨주었다. 조운 클루이드가 그녀를 이해해주었지만, 자클린느에게는 자기 세대의 누군가로부터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녀는 조지 데버넘에게 눈을 돌렸고, 그는 흔쾌히 그녀에게 지지를 보냈다.

(183-184)

자클린느는 첼로의 소리를 내장과 가슴에서 올라오는 뭔가 기본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첼로는 어떤 악기보다도 인간의 목소리와 흡사하다. 고음역의 소리는 통렬하고 애처로우며 반대쪽 음역의 끝에서 나는 소리는 심원하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중간 음역에서는 좀더 익숙하고 부드러운 바리톤 소리가 난다. 어떤 음역이든 소리, 모양, 나무의 온기 그리고 연주자가 실제로 껴안듯 연주하는 모습은 첼로를 가장 관능적인 악기로 만든다. 동시에 첼로와 활은 나무, , 장선, 금속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며 여기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몸 전체를 사용해야 한다. 발은 굳건히 땅에 붙여 균형을 유지하고, 무릎으로는 악기를 흔들리지 않게 잡으며, 어깨에서 허리까지의 팔근육은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활 켜기를 해야 하고, 강철 같은 손가락은 길게 잡아 늘여 두껍고 길며 20파운드가 넘기도 하는 압력이 필요한 줄들을 내리눌러야 한다. 연주회 끝부분에서 지판에 대한 얘기를 하기도 했던 카잘스는 첼리스트에게 요구되는 신체의 이용과 기민함을 나무를 자르면서 동시에 한 꾸러미의 바늘에 실을 꿰는 일에 비교했다.

(238)

자클린느는 말로 표현 못하는 것을 음악을 통해 웅변적으로 전달했다. 그녀와 바렌보임은 브람스의 F장조 소나타와 베토벤의 A장조 소나타를 연주했고 밤이 깊도록 연주를 계속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거나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수지 매콰이어는 이렇게 회상한다. “재키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고 기운도 별로 없었지만 다니엘은 회복 중이었을 텐데도 기력이 왕성한 것 같았어요물론 재키도 일단 연주를 시작하자, 완전히 몰입했지만요. 다니엘은 스타로서 재키를 동경했어요. 그 둘이 처음으로 함께 하는 연주를 듣는 것은 정말 기억에 남는 일이었지요. 음악을 통한 합일이라고나 할까요. 우리가 틀림없이 식사는 했을 텐데 그런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단지 이 방에서, 나머지 우리들은 다른 걸 다 망각한 채, 연주에 빠진 그 둘을 바라봤다는 것만 기억납니다. 다니엘이 이 방을 나서면서 꼭 다시 그녀를 만날 거라고 한 말이 생각나네요.”

(318)

다발성경화증은 가장 초기 단계엔 진단조차 어려운 악마의 측면이 있다. 증상이 나타났다 돌연 사라지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잠깐 나타났다가는 어느새 그랬냐는 듯 없어져서 쉽게 잊어버리기도 하며, 혹은 자클린느의 경우처럼 신경쇄약의 징후로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호주에 있을 때 좀처럼 피로가 사라지지 않고 가끔 오른쪽 눈에 사물이 두 개로 겹쳐 보여서 진찰을 받았을 때 의사는 사춘기 외상장애라고 일축하고, 긴장을 풀 수 있는 취미를 시작해보라고 했다.

(356-357)

다발성경화증은 뇌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섬위의 절연체와 척수를 침범하는, 중추신경계에 일어나는 만성적이고 점진적인 질병이다. 손상을 입은 곳은 신경섬유를 감싸는 수초가 두껍고 딱딱한 경화성상처 조각으로 대체되어, 뇌에서 근육과 장기로 전달되는 메시지들을 방해한다.

(386)

그녀에게는 사랑이 부족했지요. 그녀는 마치 스펀지처럼 사랑을 다 빨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받아도 충분하지가 않았지요. 그녀는 클 줄기가 딱 하나뿐인 강인한 식물로 자랐어요. 그런데 그 줄기가 잘려져 나간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줄기가 잘리면 곁가지가 다시 자라기 시작하지요. 재키는 그렇지 않았어요. 마치 큰 줄기에서 줄곧 피가 흐르는 듯했습니다. 나는 그녀가 밖으로 나아갈 수 있게 날개를 펴도록 용기를 주려고 애썼어요. 나는 그녀가 삶은 계속된다는 것, 남들에게 줄 게 있다는 생각을 갖길 바랐습니다. – 소니아(물리치료사)

(446)

나는 그 놀라운 양면성을 지켜보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유쾌하고 아무 걱정 없는 소녀가, 계속해서 울어댈 이유가 있지만 그럼에도 항상 사랑스럽고 따뜻하며 잘 웃어대는 이 소녀가 있습니다. 반면에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건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 년간 뿐이었으니까요. 그녀는 말하곤 했지요. ‘왜 내게 이런 병이 생긴 걸까?’ 처음에는 이렇게 대꾸하지요. ‘ 오 세셍에, 너무 두렵지?’ 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됩니다. 아무런 할 말이 없다는 것을요.

(450)

자클린느는 자신이 연주한 슈만의 협주곡 음반을 사랑했다. 어둡고 감상적인 그녀의 해석은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 표현했다. 슈만 협주곡의 연결된 세 악장은 정류해낸 순수의 감정이다. 졸라는 이를 절망의 관능이라 했다. 첫 악장은 갈망으로 채워지고, 두 번째 악장은 부드럽고 시적이다. 마지막을 향해 가면 이행부가 있고 그 뒤 오케스트라와 첼로가 함께, 마치 슈만이 자신의 삶이 저물어가는 걸 지켜보기라도 하듯, 조용히 향수에 젖은 연주를 시작한다. 엔딩은 강력하고, 폭발적인 마지막 작별인사로 우리 모두를 울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한다.

아직도 음악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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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혼자 있다고 꼭 고독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고독은 물론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을 벗삼고 있다. 반면 내자 혼자 있든 누구와 함께 있든 나 자신이 내게 결핍되어 있을 때, ‘내게 결핍되어 있는 그 누구가 다름이 아닌 나 자신일 때, 이런 상태는 고립이다. (반대로 사랑은 상대방이 거기 있을 때조차 그가 그리운 상태를 말한다.)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거기, 내 안에 있다는 확신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과 내가 모두 결핍되어 있는 단절도 있다.

(34)

예술가는 고독 속에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끊임없이 통제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만. 그것이 없다면 관념과 이 관념의 실현간의 불가분의 통일성이 외부의 침입에 의해 깨어질 수도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떤 비율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낸 매시간에 대해 X시간을 혼자 보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늘 직감적으로 느껴 왔다. X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만큼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한 시간이다. 아무튼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는 내게 매우 친근한 의사 소통의 수단이었으며, 나는 거의 중단 없이 라디오를 들어왔다. 내게 라디오는 벽지와도 같았다. 나는 라디오와 함께 잠이 들었으며, 넴뷰탈을 포기한 후로는 라디오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고독의 메타포인 라디오는 여러 유리한 점을 지니고 있다. 마음내키는 대로 틀거나 끌 수 있으니까 우리가 원할 때 자리에 없고, 없어도 좋을 때 곁에 와 있는 타인들과는 달리.)

(41)

굴드는 청중 쪽으로 등을 반쯤 돌린 채 다리를 꼬고, 거의 비스듬히 앉은 자세로 첫번째 악장을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이 반쯤 벌어지고 무대 천장에 눈이 고정된 그의 모습은 황홀경에 빠진 사람과도 같았다. 그 다음 마지막 악장에 가 거의 뒤로 나자빠진 듯한 자세가 된 그의 머리는 건반에서 너무도 떨어져 있어, 자신의 손을 마치 자기 것이 아닌 양 바라보는 것 같았다.

(59)

음악의 핵심 속으로의 온전한 칩거, 모든 것으로부터의 결별, 성급한 떠남, 이 모든 일은 굴드가 무대를 떠난 순간 이미 일어나 있었던 일이었다. 1963년의 사건은 그의 긴 탐구의 첫 단계가 아니고 마지막 단계였다. 후퇴 혹은 은거는 결렬이라기보다 음악과 이 반복되는 실종간의 해묵은 내밀한 공모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음악은 그에게 참으로 존재하며, 그를 사로잡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연주회는 한층 고통스럽게 그를 음악으로부터 갈라 놓는 것이었다. 집착하는 모든 것, 만남, 아이들, 일상의 작업들과 같은 기쁨과 고통의 이 매듭들은 늘 그에게 탈주를 꿈꾸게 했다. “아무곳이든지, 세상 밖으로.”

(74)

그는 음악에 옷을 입히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음악이 옷을 벗기를 원했다. 또한 음악이 우리를 헐벗게 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것을, 털을 곤두서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들 속의 그는 몹시 마른 모습이다. 뼈의 열기를 식히기 위한 살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몸에는 엄청난 힘이 배어 있다. 일상의 과육이 해체되는 이 순간, 푸가의 골격에서 찾아지는 그런 힘이.

(99)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 시토회 수도자 토마스 머튼의 개념과도 비슷한 후퇴의 미학.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피아노 자신과도 거리를 둘 것. 그는 녹음이 있기 전 며칠 동안 자신의 피아노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피아노는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로 연주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연주하는 것의 정신적인 형상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순간의 손가락의 속박 사이에 일정의 투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손가락의 속박에서 우리가 해방된다. 형상이 그 개념의 순수성으로부터 한눈을 팔아 피아노에 부딪치는 일이 없었던것이다. 그는 또 피아노를 연주하는 비결은 어느 정도 자신을 악기로부터 떼어 놓는 방식에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분리의 순간들, 피아노와 음악을 분리시키는 기술들을 되새겨 보자.

(102-103)

굴드의 악기의 고독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했다. 헐벗은 연주. 악기가 미혹시킨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장식적인 기능을 삭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바흐의 장식음들을 그는 마치 장식음이 아닌, 악절의 다름 음들과 똑 같은 멜로디와 화음의 가치를 지닌 음들처럼 연주한다. 이들의 필연성과 절박함을 발견하기 위해서인 양, 분해되어 나온 뚜렷한 음들로 천천히 연주한다. 그러므로 페달이 사용되지 않는다. 페달은 옷을 입히고 가리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의 몸이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를 원했다. 우리의 몸이 인위적인 장식들을 박탈당한 채 벌거숭이가 되어, 살덩이의 치욕 속에 버려져 죽음으로 가듯이.

(106)

음악에 대해 그가 행사한 지배력은 음악 안에서의 지배력에 지나지 않았다. 음악에 오롯이 사로잡혀 있던 그는 절대로 음악이 그의 수중에 든 것처럼, 자신 안에 축적되고 정리되어 있거나 위협하는 것처럼 연주하지 않았다. 음악을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테면 아라우처럼 음악이 스스로 다가오도록 하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낳을 때처럼 안에서 밖으로, 위에서 아래로, 음악을 수행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따고, 들어올리고, 아니면 공중에서 낚아채는 듯했다. 언제나 밖에서, 뒤로 물러서며 끝없이 한계를 넓혀 가는 어떤 공간 속에 있듯이 그는 음악 속에 있었다. 더 가까워질수록,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는 그것이 포착되지 않기를 바랐다. 친숙해지면 음악은 꺼져 버리고 만다. 근원은 우리가 그것을 찾아나서면 자취를 감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무서운 것이 잊혀지고 나면 아름다움은 부재한다.

(108)

굴드의 연주에는 몹시도 신비한 무엇이 들어 있다. 아주 스타카토적이고 점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 세코(secco)식이 연주를 통해 탁월한 밀도와 놀라운 연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굴드는 페달을 통한 음의 용해나 손가락의 레가토 연주 증 외부적인 무엇으로 연결성을 만들어 내지 않고, 크레셴도와 디크레셴도를 통해 리드미컬하다기보다는 강양이 위주가 된 프레이징을 만들어 낸다. 연속성은 인접성을 통해서가 아니고, 완전히 별개인 음들의 꾸준한 단계적 상승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재봉틀로 땀을 드느냐, 모호한 후광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딜레마를 비켜 간다.

(124)

굴드는 불가능한 무엇을 추구하고 있었다.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두고 그가 음악의 무형성이라고 지칭한 그것이었다. 그가 보기에(아니면 실제로) 음악은 양극단 사이의 긴장이다. 대수의 복잡성과, 더 큰 초연을 지향하는 사고의 움직임. 그리고 음들 속에 감추어진 확고부동한 기반.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굴드가 확신했듯이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음악이 모습을 갖추자마자, 유한한 공간이 음악을 삼켜 버린다고, 결함과 결핍, 실추가 불가피하다고 믿어야 할까? 아니면 굴드의 연주를 듣고 내가 확신하듯이, 이 같은 타락 속에서만 무언가를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일까?

(149)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음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이따금 음악이 일체를 엄습해 깡그리 지워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음향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없을 수도 있지만, 음향은 거기에 있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다. 때론 아주 미미한 것, 거의 무효화된, 아니면 부서진 무엇일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음악은 내 안에 있고, 나는 음악 안에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내부에서 외부로, 내면이 된 외부로 나아감이다. 마치 내면에 이미 외부가 존재하는 양. 음악은 신의 자질들을 지니고 있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보존하면서 채운다. 그것은 에워싸고 조여 온다. 그러면서도 귀로 올라오는 기쁨, 혹은 첨예한 고통으로서, 아주 작은 부분이 되어 내부에 머문다.

(169)

굴드는 혼자 살았지만, 절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면 자신을 보호하고 그가 나누고 있는 말, 때론 광적인 환희를 담고 있는 말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기 위해 늘 배후에 음악을 두고 있었다. 종종 그는 말을 하다말고 물었다. “지금 내 생각 깊은 곳에 어떤 음악이 있는지 아십니까?”라고. 생의 말기로 접어들면서 그 대답은 점점 더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변신>이었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존 리 로버츠는 굴드를 사로잡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추측해 보아야 했다. 어떤 음악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의 내부에서 말을 하는지. 이번에 로버츠는 빗나가고 말았다. 굴드는 여전히 슈트라우스. 그의 마지막 작품 <4개의 마지막 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뒤 굴드는 완전히 지친 듯이 보였다. “나는 당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라고 상대방이 그에게 말한다. “그렇습니까? –벌써 마지막 노래에 와 있군요?-맞습니다. 정확히 그곳에 와 있습니다.” 여기서 시가 말한다. “벌써 죽음인가?” 악보에는 여전히 보다 느리게라고 적혀 있으며, 그 다음에는 리타르단도,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이끎음 Bb이 으뜸음 Cb과 경합할 때는 아주 느리게가 된다.

(185)

누가 진실 속에 있는 것일까? 누가 알겠는가? 그걸 알아야 할까? 사랑하려면 알아야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사랑에는, 아니면 단지 귀기울이는 데에는 전기적인 앎과는 다른 앎이 있다. 설령 앎이 사랑을 확장시키고 활력을 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절대로 사랑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이해하려면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안 된다.

(190)

나는 굴드가 연주한 <골트베르크 변주곡>의 마지막 녹음의 마지막 부분(아리아의 재현)의 마지막 음들을 듣는다. 지속된 화음이 잠시, 새가 날아가 버린 가지가 희미하게 떨리듯이 부르르 떤다. 굴드를 들으며, 굴드에 관해 쓰며 결국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들의 삶을 살지 않았던 예술가들, 그러나 이들 덕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그나마 괜찮게 살 수 있게 된 그런 예술가들을 경험할 때 늘 그렇듯이. 이 놀라움은 놀래키고 당황하게 만들고 기발하게 보이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참된 놀라움은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그래, 이거야. 이렇게밖에는 될 수 없었어리고 말하도록 만든다. 발설된 것은 방금 전까지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예술은 가장 높은 사명을 지닐 때 거의 인간적이 아닌 무엇이 되어 버린다.”고 언젠가 굴드도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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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웅문‘ 김용 타계..무협소설 대가 쓰러지다
https://news.v.daum.net/v/20181030235400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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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10-31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작가분인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ookholic 2018-11-01 13:43   좋아요 1 | URL
어제는 김용님 때문에 다들 옛날을 회상했을 것 같아요.. 즐거운 11월 되십시오~~
 















(369)

코니는 귀 기울여 들으면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도 뭔가를 주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허용이 안 돼요. 지금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아요. 당신이 말한 그 모든 것 또한, 랙비와 시플리가 사람들에게 상당한 이익을 나미고 팔고 있는 거지요. 모든 것은 돈을 주고 사야 해요. 당신은 심장 박동 한 번만큼도 진정한 공감을 나눠 주지 않아요. 그리고 게다가 누가 그들에게서 자연스러운 삶과 인간다움을 빼앗아 저리고 이 끔찍한 산업의 현실을 준 거죠? 누가 그런 짓을 했나요?”

(371)

그리고 잘못 생각하지 마오.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보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동물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의 착각을 강요하지 마오. 대중은 언제나 똑같았고 앞으로도 항상 똑같을 거요. 네로의 노예들은 우리 광부들이나 포드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소. 내 말은 네로의 광산 노예들과 들에서 일한 노예들 말이오. 그것이 하층 대중이오. 그들은 절대 바뀌지 않소. 간혹 어떤 개인이 하층 대중에서 벗어날 수 있소. 그러나 그걸헤 개인들이 벗어난다 해도 대중을 바꾸지는 못하오. 대중은 변할 수 없소. 그것이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요. <빵과 오락>! 오로지 오늘날에만 교육이 오락을 대신하는 나쁜 대체물 중 하나가 되었소. 오늘날 잘못된 것은 바로 우리가 빵과 오락이라는 프로그램 중에서 오락 부분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약간의 교육으로 하층 대중에게 해로운 독을 주입했다는 거요.”

(393)

당신 같은 사람이 지배한다고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지배하지 않아요. 우쭐대지 마요. 당신은 그저 당신이 받을 몫보다 더 많은 돈을 가졌을 뿐이고, 주급 2파운드를 주면서 당신을 위해 일하게 만들고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거라고 사람들을 협박하는 거죠. 지배한다고요! 그 지배로 당신은 무엇을 해주고 있나요? 아니, 당신은 메말랐어요! 당신은 유대인이나 악덕업자처럼 당신 돈을 가지고 횡포를 부릴 뿐이예요!”

(445-446)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돈만을 위해 일하고 잇는 자신들의 모습을! 여러분 자신들의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돈만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자신들의 소리를. 여러분은 돈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테버셜을 보십시오! 그것은 흉측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돈을 위해 일하는 동안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여자를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돈을 위해 일하고 돈에만 신경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며 여자와 잘 지내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447)

인간 세상이 파멸할 운명이고, 그 자체의 비열한 야만성에 의해 스스로 파멸할 운명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 그럴 때면 식민지들도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소. 달조차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거요. 그곳에서도 뒤를 돌아보면 온갖 별들 가운데 지저분하고 짐승 같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지구가 보일 테니까 말이오. 인간들에 의해 더렵혀진 지구가 말이오. 그러면 난 쓸개를 삼켜서 그것이 내 속을 갉아먹고 있으며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이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오. 그러나 기분이 바뀌면 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오. 지난 백 년 동안 인간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소. 남자들은 오로지 일벌레로 바뀌었고, 남자다움과 진짜 삶을 모두 빼앗겨 버렸소. 난 지상에서 다시 기계들을 다 쓸어내 버리고 산업 시대를 완전히 끝내고 싶소. 끔찍한 실수를 끝내는 것처럼 말이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고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난 나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나 자신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게 나을 것 같소. 내가 살아야 할 삶이 있다면 말이오. 그게 있을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말이오.”

(477)

육체의 삶이라.” 그가 말했다. “그건 동물의 삶일 뿐이오.”

그렇다면 그것이 지성만 발달하고 몸은 죽은 시체의 삶보다 더 나아요. 그리고 당신 말은 맞지 않아요! 인간의 육체는 이제야 겨우 진정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육체는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다운 불꽃을 한 번 깜빡여 주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꺼버렸고 예수가 완전히 끝장을 내버렸죠. 하지만 이제 육체가 진정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고, 정말로 무덤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우주 속에서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삶으로 피어날 거예요. 인간의 육체적 삶이 말이에요.”

(479)

그런가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그저 아기들이나 마찬가지예요. 칭찬해 주고 얼러 주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면 돼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마님?”

(614)

그러나 물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유는 당신과 내가 함께 살기 위한 것이오. 사실 난 무섭소. 악마가 허공에 도사리고 있는 게 느껴지고, 그 악마가 우리를 덮치려고 할 거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악마라기보다 맘몬(부와 탐욕의 신)이오. 난 그것이 결국 사람들의 집단 의지, 즉 돈을 원하고 삶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어쨌든, 커다랗고 하얀 두 손이 허공에서 사방을 더듬으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돈을 초월해서 살려고 애쓰는 사람의 목을 비틀어서 목숨을 끊어 놓으려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오. 어려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힘든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 정말로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소! 세상이 지금처럼 계속 돌아간다면 미래에는 이 산업 대중에게 죽음과 파괴만 있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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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변혁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속에 살며 조그만 거주지를 새로 짓고 작은 희망을 새롭게 품기 시작한다. 이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지금은 미래로 가는 평탄한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장애물을 비켜서 돌아가거나 기어 넘는다. 하늘이 골백번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

(10-11)

자유! 그것은 멋진 말이었다. 탁 트인 세상으로, 아침 숲으로 나가서 유쾌하고 멋진 목소리를 지닌 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서로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사랑은 단지 사소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88-89)

내가 보이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 나가는 이런 자잘한 행위들과 사소한 관계들은 그렇게 썩 중요하지 않은 것 같소. 그런 것들은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것이오. 지금은 그것들이 어디에 있소? 작년에 내린 눈은 어디에 있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내내 지속되는 것이오. 나 자신의 삶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발전한다는 점에서 내게 중요하오. 그러나 이따금씩 맺는 관계들이 중요하오? 그리고 이따금씩 맺는 성적인 관계는 특히 더 그렇소! 만약 사람들이 그 관계들을 황당할 정도로 과장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새들의 짝짓기처럼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일 뿐이오. 그리고 그래야만 하오. 그게 뭐가 중요하다는 말이오! 중요한 것은 평생 동안 지속되는 동반자 관계요. 그것은 한두 번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날마다 함께 사는 것이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건 당신과 나는 부부요. 우리는 서로에게 습관이 되었소. 그리고 습관이란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따금씩 얻는 흥분보다 더 중요하오. 우리가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어떤 종류이건 일시적인 경련 같은 흥분이 아니라 오랫동안 천천히 지속되는 것이오. 조금씩, 같이 살면서, 두 사람이 일종의 결함에 이르고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함께 교감하며 전율하게 되는 것이오. 바로 그것이야말로 섹스가 아닌, 적으로 섹스의 단순한 기능이 아닌 결혼의 진짜 비밀이오. 당신과 나는 결혼으로 한데 얽혀 있소. 만약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치과에 가는 문제를 처리하듯이 섹스 문제를 처리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체적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이니까 말이오.

(91)

인생이라는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완전한 인격을 서서히 쌓아 가는 것이 전부 아니겠소?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전부 아니겠소? 온전하지 못한 삶은 아무 의미도 없소. 성관계가 없어 당신의 온전한 삶이 망가지려 한다면 나가서 연애를 하시오. 자식이 없어 당신의 온전한 삶이 망가지려 한다면 당신 능력껏 자식을 낳으시오. 그러나 당신이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조화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요. 그리고 당신과 나는 그 일을 함께할 수 있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삶에 꼭 필요한 것들에 우리 자신을 맞춰 나가면서, 동시에 그렇게 맞춰 나가는 행위를 견실하게 살아 나가는 우리의 삶과 함께 엮어 하나로 짜 나간다면 말이오. 내 말에 동의하지 않소?

(116-117)

그러나 젊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우리가 므두셀라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다고 느낀다 해도 젊음이라는 것은 어떻게든지 활발하게 움직이는 소시를 내며 우리를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망도 없었다! 믹과 도망쳐서 삶을 하나의 긴 칵테일파티와 재즈의 밤으로 만들었다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것이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가 무덤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125)

돈은 어떤가? 아마도 돈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은 우리가 항상 원하는 것이다. , 성공 토미 듀크스가 헨리 제임스를 따라 고집스럽게 불렀던 것처럼 암케 여신 그것들은 우리에게 영원히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동전을 쓰면서 마지막으로 자, 할 말 끝! 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만약 우리가 10분을 더 살게 되면 우리는 이런저런 것을 사기 위해 동전을 몇 개 더 있으면 좋겠다고 바랄 것이다. 그저 일을 기계적으로 지속시키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돈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돈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그 외의 것은 사실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 , 할 말 끝!

(211)

코니는 하층 계급 역시 다른 모든 계급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테버셜이나 메이페어나 켄싱턴이나 모두 똑같았다. 이제는 딱 하나의 계급, 즉 돈을 좇는 사람들만 존재했다. 돈을 좇는 남자와 돈을 좇는 여자의 유일한 차이점은 돈을 얼마나 많이 가졌고 얼마나 많이 원하느냐 뿐이었다.

(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봄이었고 숲에는 초롱꽃이 피고 있었으며 개암나무 위에는 잎눈들이 벌어져서 마치 녹색 빗방울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봄이 되었는데도 모든 것이 냉담하고 무정하다니 얼마나 끔찍한가! 알을 품고 앉아서 너무나 멋지게 깃털을 부풀려 곤두세우고 있는 암탉들만이 따뜻했다. 따뜻하고 뜨거운 알을 품고 있는 암컷의 몸들이여! 코니는 자신이 항상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274)

그녀에게 새로운 것은 열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망에 찬 흠모하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항상 그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를 너무 많이 흠모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 없어질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워져 없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야만인 여자처럼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안에 깃든 흠모하는 마음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그것에 맞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속에 악마 같은 자기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자궁과 창자에 충만한 부드럽고 무거운 흠모와 맞서 싸워 그것을 격파해 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열정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316-317)

영국이여, 내 영국이여! 그러나 무엇이 내 영국인가? 영국의 웅장한 저택들은 근사한 사진감이고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의 영국인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멋지고 고풍스러운 저택들은 훌륭한 앤 여왕시대와 톰 존스 시대부터 그곳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금빛을 일은 우중충한 벽토 위로 검댕이 떨어져서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해 갔다. 그리고 웅장한 저택들과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저택들은 하나씩 버려져서 이제는 헐리고 있었다. 영국의 오두막집들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희망 없는 시골에 회반죽을 덕지덕지 바른 벽돌 주택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318)

이것이 역사이다. 하나의 영국이 다른 영국을 지워 버린다. 광산들은 저택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광산들은 전에 이미 오두막집들을 지워 없애 버린 것처럼 이제는 저택들을 지워 없애고 있었다. 산업사회의 영국이 농업 사회의 영국을 지워 없애고 있었다. 산업사회가 영국이 농업 사회의 영국을 지워 없앤다.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지워 없앤다. 새로운 영국이 옛 영국을 지워 없앤다. 그리고 그것은 유기적인 연속성이 아니라 기계적인 연속성이다.

(327)

그날 저녁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결혼 생활에 뭔가 영원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클리퍼드, 영원이라는 말이 마치 뚜껑 같은 것처럼, 아니면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우리 뒤에서 계속 질질 끌려오는 길고 긴 쇠사슬 같은 것처럼 들리네요.”

그가 짜증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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