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리는 고립을 지리와 상황의 결과로 여기곤 한다. 혼자가 된 과부, 남편은 죽고 아이들은 다 자란 여자, 그는 고립된 사람이다. 늙고 쇠약한 사람, 아예 물리적으로 바깥세상에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은 고립된 사람이다. 하지만 고립은 또한 마음의 상태일 수 있고, 실제로 종종 그렇다. 칩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택을 결정짓는 상태인 것이다. 마치 당신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나는 고립으로 추락한다. 어둡고 비자발적인 추락은 가속이 붙어, 내가 저지하기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나는 혼자 있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을 연속 열 번이나 열다섯 번이나 스무 번쯤 하고 나면, 더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19)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24-25)

혼자 있다는 것, 그 모든 다양한 형태는-혼자 살거나, 싱글이거나, 배우자나 가족이나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을 갖거나-연습이 필요한 기술이다. 고독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돌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자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교적인 생활을 가꾸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기꺼이 취약해질 줄 알아야 한다. 캐럴린 하일브런이 그 쌍둥이 기술을 터득하는 데는 60년이 걸렸다. 내 친구 그레이스는 40대 중반인 지금 그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20년 동안 혼자 살아온 그는 이제 프라이버시와 교유의 균형을 예전보다 더 자주 달성할 줄 안다. 나로 말하면,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다.


(34-35)

해석. 물론 이것이 핵심이고, 착각에 이르는 문이다. 수줍어하는 사람들은 과묵함의 망토 뒤에 숨은 채 상대가 스스로 관계에 대해서 품는 두려움이나 편견이나 자기 인식을 투사하는 빈 화면으로 기능한다.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 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태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주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84)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작은 인간 발전기 같은 록산이라는 이름의 두 살 조카를 볼 때면 나는 모성애 덩어리가 된다. 아이를 붙잡아서 껴안고 싶고, 그 자그만 얼굴과 손에 뽀뽀하고 싶다. 두 살 아기들이 즐기는 무한 반복 게임을 몇 시간이고 할 수 있다. (내가 아이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나를 쫓아서 30번 빙글빙글 돌고) 아이가 특히나 아이답고 사랑스러운 행동을 할 때면-낮잠을 자려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거나, 잠시 낯가림하며 제 아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있을 때-심장이 녹아내린다. 홀딱 반하겠네, 나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나는 생각한다.


(9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인의 애정이란 내가 얻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사랑받으려면 시험을 통과하고, 지적 후프를 뛰어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여겼어. 그러니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깊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내게는 놀라운 일이야. 이것이 네가 내게 준 선물이란다. 네 존재만큼이나 소중한 선물이란다.


(119)

최근에 부모님 댁을 방문했을 때 부모님이 전보다 더 늙고 약해지신 듯 보인 적 있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적 있는가? 젠장,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혼자 남으면 어쩌지? 아니면 이런 생각.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어쩌지? 아버지가 혼자 생활하실 줄이나 아나?

사람들이 흔히 부모님에게 느끼는 죄책감, 그러니까 당신이 부모에게 좋은 자식이 아니었다는 걱정이 들 때가 있나? 혹은 만약 부모님이 아프실 경우에 당신이 좋은 자식 노릇을 하지 못하리라는 걱정이?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고?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123)

이것이 삶임을 깨닫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 들수록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니라 더 쉬워진다는 신화를 믿으며 자라는데(그리고 이것은 진짜 신화일 뿐이다), 나이 드는 부모의 모습만큼 그 믿음이 사실이 아님을 잘 보여주는 것은 많지 않다. 실제로는 우리가 아니 들수록 잃은 것이 많아진다. 점점 더 크고 버거운 과제가 나타난다. 실수를 되돌리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144-145)

화가였던 어머니의 화실을 비우는 일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던 듯싶다. 화실은 갑자기 끝난 어머니의 인생을 생생히 떠올리게 하는 물리적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탁자와 붓과 페인트는 늘 그랬던 모습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진행 중인 작은 작품들, 스케치와 메모, 콜라주 재료, 색칠된 종이 무더기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그 방이 텅 빈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것은 잔인하고 부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겨우 일 분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


(150-151)

하지만 모녀 관계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되기 쉬운 게 그 때문이라면, 역시 그 덕분에 모녀 관계는 유달리 풍성한 관계가 될 수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머니란 딸의 내년에 있는 로드맵 혹은 거울이다. 우리가 어머니와의 관계에는 우리가 평생 배워온 교훈들, 우리가 과거에 걸어오다가 계속 걷기로 결정했거나 포기하기로 결정한 길들이 반영되어 있다. 여자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일이나 연해 문제든, 어디에서 살고 어떻게 입고 어떤 친구들을 사귈까 하는 문제든,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문제든-다소나마 자신의 결정을 어머니의 결정에 견주어 평가해보기 마련이고, 어머니의 노력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형성하거나 제약했는지, 강화하거나 약화했는지 따져보기 마련이다.


(183-184)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찾아드는 그리움의 외로움도 있고,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 채 내리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도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외로움이다. 일단 이 외로움이 들이닥치면, 이 크나큰 외로움을 극복하기란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 가게에서 외로움을 살 수 있다면, 일요일의 외로움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을 테고 그 위에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취급 주의-초강력


(186-187)

이런 것들은 어려운 질문들이다. 그리고 나는 외로움을 앞질러 달아나는 데 급급하여, 이 질문들에 답할 기회를 회피해왔다. 물론 가끔씩 기분 전환을 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새 신발의 치유력을 열렬히 증언하는 바다. 하지만 더 큰 질문들을 피하기만 했다가는 언젠가 반드시 역효과가 난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에 돈을 펑펑 쓰면서 종종거릴 때, 보통은 내가 평범한 일요일을 계획하는 것처럼 기본적인 일조차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자라는 느낌이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그날, 나는 잠시 우두커니 앉아있다가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일에 착수했다. 몇 달 동안 만들어야지 만들어야지 생각만 했던 커튼을 직접 만들어서 걸었다. 할 일을 해치웠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이 일로 새삼스럽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다. 내게는 절망감에 맞서 싸울 자원이 있다는 사실, 내 시간을 잘 쓰고 내 영혼을 잘 돌볼 능력이 있다는 사실, 외로움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사실. 그날은 그렇게 흘러갔다. 고독한 일요일이었지만, 결국에 외로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195)

나는 정말로 어떤 사람일까? 나는 정말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게 적합한 삶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격려받고, 무엇에 의욕을 얻고, 무엇에 만족하는 사람일까? 자아에 관한 이런 고민들은 대부분의 사람이(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20대에 묻기 시작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니 서른일곱에 문득 내가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는 고사하고 제대로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심란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나는 주야장천 취한 상태가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훨씬 더 어려웠다.


(212)

술은 그토록 알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우리가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술이 유일한 해결책인 듯, 술이 자신을 산산조각 나지 않게 붙잡아주는 접착제인 듯 느껴지죠. 하지만 사실은 술이 문제의 근원이죠. 술은 우리가 꼼짝달싹하지 못하도록 발바닥을 바닥에 붙여놓는 접착제죠. 그날 아침, 저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어쩌면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생각이 점차 자라서 결국 저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223)

술은 재미나 친밀감 같은 감정을 경험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줄 순 있을지라도 그런 감정들은 진짜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화학물질 덕분에 변한 나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김에 흉금을 터놓는 대화를 오래 나누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을 때 진짜 나는-어떤 면에서는 자신감 있고 다른 면에서는 겁 많은 나, 강한 동시에 약한 나-마음속에서 뒷전으로 물러났고, 그래서 안전해졌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혼자였다. 술을 끊는 것은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곳으로 나오는 것, 혹은 망가진 TV 안테나를 고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시야가 더 밝아졌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세상하고든 접촉이 더 또렷하고 확실해졌다.


(241)

나는 진심이다. 여자들이여, 궐기하라.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다. 분노와 공격성을 훈련하자!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법을 연습하자! 우리는 오랫동안 푸대접에도 겁쟁이처럼 얼어버리는 버릇을 떨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버릇을 끝장낼 때가 되었다.


(295)

하지만 순환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계절의 순환도, 감정의 순환도, 여름의 불안은 왔다가도 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올여름에 내 몫의 좋은 날을 누릴 것이다. 기분 좋고 낙천적이고 마음 가벼운 날, 내 내면의 풍경이 바깥 풍경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좀 더 비슷해지는 날, 내가 맨발에 밟히는 모래와 살결에 와닿는 더운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나는 나쁜 날도 겪을 것이다. 밝고 가벼운 것들이 모두 미워지는 날, 어두운 고치를 그리워하는 날,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면서 그 향기 나는 작은 머리통들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는 날.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요령껏 대처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처방책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확신하는바,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신이 영화관을 발명하신 것이다.


(325)

화를 터뜨리는 편이 언제나 효과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화를 내면 반드시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상처가 낫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나쁜 상황이 열을 내면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싸움을 잘 고르는 것 못지않게 대상을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와 정신적으로 치고받을 의향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화내는 것이 효과가 있으려면-어느 쪽에게든 생산적이거나 유익하려면-관련된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서로 신뢰해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괴로운 시기를 견뎌보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노라는 동전의 뒷면은 친밀함일 때가 많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겁나면서도 때로 가치 있는 일인 것은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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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3)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시시한 것들, 뭔가를 만들다가 발생한 실수, 막다른 골목,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한 것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애초의 설계에서 너무 많이 확장된 것들 말이다. 표준을 벗어난 것,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것,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 끔찍하고 역겨운 것. 좌우대칭이 어긋난 모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사방으로 번식하고, 싹을 틔우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수많은 개체가 하나로 줄어든 경우도 그렇다. 반면에 통계 수치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 예를 들어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화목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축하하는 풍경은 내게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내 감수성은 기형학(畸形學)이나 괴짜를 향하고 있다. 나는 이런 기형의 상태 속에서 존재가 참모습을 드러내고 본성을 나타낸다는 고통스럽고도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갑작스럽고 우연한 출현. 당황해서 튀어나오는 아이쿠소리, 완벽하게 주름 잡힌 스커트 아래로 삐져나온 속치마 솔기. 벨벳 의자 덮게 밑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낸 흉측한 금속 받침대, 부드러움에 대한 환상을 뻔뻔하게 깨뜨린, 푹신한 안락의자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스프링 하나.


(40)

심장. 그 신비는 확실히 밝혀졌다. 주먹 하나 정도 크기의 고르지 못한, 더러운 크림색 덩어리. 칙칙하고 보기 싫은 잿빛이 감도는 크림색, 크게 바로 우리 몸의 색깔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나 벽지를 고른다면, 우리는 절대 그런 색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둠의 색깔이자 내부의 색깔이다. 햇볕이 들지 않고 물질이 낯선 시선으로부터 음습하게 자신을 감추는 내부. 아무것도 과시할 게 없다. 하지만 피가 돌기 시작하면 화려한 치장이 허용된다. 피는 경고이고, 그 붉은빛은 경고의 신호다. 우리를 덮고 있던 조개껍데기가 열리고 세포 조직의 지속성이 깨질 수도 있다는.

실제로 우리 몸의 내부에는 아무런 색깔이 없다. 심장이 원활하게 혈액은 펌프질 할 때 혈액의 색깔은 콧물과 같다.


(83)

하지만 시간에 대해 나는 의견이 다르다. 모든 여행자의 시간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그것은 혼돈의 대양 속에서 정리된 시간, 섬과 군도의 시간이다. 기차역의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간,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그때그때 약속된 시간이자 자오선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먼동이 크기가 무섭게 오후와 저녁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온다. 그저 잠시 머무는 대도시에서의 빡빡한 시간은 하룻저녁을 송두리째 바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행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인적 없는 평원의 느긋한 시간이 있다.


(108)

뭔가를 글로 묘사한다는 건, 그것을 사용한 것과 비슷해서 결국엔 그것을 망가뜨리게 된다. 색깔이 엷어지고 모서리는 닮아서, 글로 적어 놓은 것들은 결국 희미해지고 사라져 버린다. 특히 장소에 관한 글이 그렇다. 여행 안내서들은 침략이나 전염병처럼 지구의 상당 부분을 파괴하고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다양한 언어로 수백만 부를 찍으면서 해당 장소를 속박하고 약화시키고 그 윤곽을 지워 버렸다.


(318)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체는 전적으로 신비로운 대상이다. 아무리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것을 더욱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열심히 유리를 갈면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어려운 언어를 창조했던 렌즈 연마공 스피노자, 그 철학자의 논리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듯 보는 것이 아는 것이므로.


(346)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은 공간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다. 모든 곳을 더욱 비좁게 만들고, 더욱 거대하게 만들고,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세부 항목들은 사라지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모양을 잃어버리며 쪼그라들어서 불분명해진다. 낮에는 아름답다혹은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들이 밤에는 마치 형태를 잃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가상으로 존재한다. 낮 시간에 드러난 형태의 다양성, 색의 현존, 음영 따위는 전부 헛된 것이 되어 버린다. 대체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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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경과학은 내가 매일 하는 예사로운 일이지만, 지금도 나는 인간의 뇌를 손에 받쳐들 때마다 경외감에 빠진다. 뇌의 상당한 무데(성인의 경우 1.4킬로그램), 기이한 균질성(꼭 탄탄한 젤리 덩어리 같다), 쭈글쭈글한 겉모습(둥그스름한 전체에 깊은 골들이 패여 있다)을 살펴보고 나면, 뇌가 순전히 물리적인 대상이라는 점이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 보잘것없는 물질 덩어리와 그것이 산출하는 정신적 과정들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16)

이제 아기의 스냅스 개수는 최대치에 도달했으며, 그 개수는 앞으로 아기에게 필요한 개수보다 훨씬 더 많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연결들의 만발 대신에 신경학적 가지치기가 새로운 전략으로 채택된다. 당신이 성숙하는 동안, 당신이 가진 시냅스들의 50퍼센트가 감축된다.


(38)

요컨대 그 생일잔치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이미 퇴색하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첫째, 당신이 보유한 뉴런의 개수는 유한하며, 모든 뉴런은 여러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각각의 뉴런이 때에 따라 다른 연결망에 참여한다. 그 생일잔치에 대한 기억을 담당하는 생일뉴런들이 다른 기억 연결망에 동원되는 일이 거듭됨에 따라, 그 생일잔치 기억은 퇴색한다. 기억의 적은 시간이 아니라 다른 기억들이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유한한 개수의 뉴런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망이 형성되어야 한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기억이 퇴색했는데도 당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은 그날의 장면 전체가 기억에 남아 있다고 느끼거나 최소한 추측한다.


(64)

시각이란 눈에 들어온 광자들을 뇌의 피질이 손쉽게 해석하는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시각은 온몸이 참여하는 경험이다. 뇌로 들어오는 신호들은 훈련을 거쳐야만 유의미하게 해석될 수 있고, 그 훈련은 그 신호들을 우리 활동의 감각적 귀결들과 비교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만 우리의 뇌는 시각 데이터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수 있게 된다.


(74)

뇌의 작동도 마찬가지다. 뇌의 작동은 한 지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뇌의 어떤 구역도 격리되어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뇌의 도시에서 모든 일은 거주지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한다. 그 상호작용은 온갖 규모에서 일어난다. 국소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먼 거리를 가로질러 일어나기도 한다. 열차들이 도시로 들여온 천연자원과 직물이 가공되어 도시의 경제에 편입되듯이, 감각기관들에서 유래한 미가공의 전기화학적 신호들은 뉴런들로 이루어진 초고속도로로 운반된다. 그러면서 그 신호들은 가공과 변환을 거쳐 우리가 의식하는 실재에 편입된다.


(86)

결론적으로, 당신의 머리 바깥에 있는 세계의 참모습은 어떠할까? 그 세계에는 색깔이 없을뿐더러 소리도 없다. 그 세계에 있는 공기의 압축과 팽창이 당신의 귀에 포착되어 전기 신호로 변환될 뿐이다. 그러면 뇌는 그 신호들을 감미로운 음악과 하는 소리와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쨍그랑거리는 소리로 가공하여 우리에게 제공한다. 냄새도 실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 바깥에는 냄새 따위가 없다. 공중에 떠도는 분자들이 우리의 콧속 수용기들과 결합하고 뇌에 의해 다양한 냄새로 해석될 뿐이다. 실재 세계는 풍부한 감각적 사건들로 가득 차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뇌가 손전등으로 대상을 비추듯이 고유한 감각 능력으로 세계를 비추는 것이다.


(110)

그러니 다음번에 사람이 걷거나 달리거나 스케이트보드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거든, 잠깐 멈춰서 인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동작을 완벽하게 지휘하는 무의식적 뇌의 능력에도 감탄할 시간을 가지기 바란다.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들의 복잡한 세부 사항은 수조 회의 계산에서 나온 결과다. 그 모든 계산은 당신이 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공간적 규모에서 당신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일어나는 신호 전달의 형태를 띤다. 지금까지 제작된 로봇들의 움직임은 인간의 신체 동작에 훨씬 못 미친다. 게다가 슈퍼컴퓨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반면에, 우리의 뇌는 놀라운 에너지 효율을 자랑한다. 인간 뇌에 에너지 소비량은 대략 60와트 전구와 같다.


(121)

컵 쌓기 챔피언 오스틴 네이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몰입 상태에 진입한 극한 스포츠 선수의 뇌파는 의식적 숙고의 재잘거림(내가 멋있게 보일까? 내가 이러이러한 말을 해야 할까? 내가 집에서 나올 때 문을 잘 잠갔나?)으로 요란하지 않다. 몰입 상태의 뇌에 서는 이마엽 저하(hypofrontality)’가 일어난다. 이 용어는 앞이마엽피질의 몇몇 부위에서 일시적으로 활동이 감소하는 것을 뜻한다. 그 구역들은 추상적 사고, 미래 계획, 자아감에 주의 집중하기를 담당한다. 이 배경 활동들을 줄이는 것은 선수가 암벽을 타는 비법의 핵심이다. 딘이 발휘한 것과 같은 솜씨는 내면의 재잘거림이 없을 때만 발휘될 수 있다.


(142)

당신의 뇌는 경쟁하는 정당들로 구성된 의회와 유사하다. 정당들은 국가라는 배를 조정하기 위해 끝까지 싸운다. 당신은 때때로 이기적으로 결정하고, 때로는 자비롭게, 때로는 충동적으로, 또 어떤 때는 장기적인 전망을 고려하면서 결정한다. 우리는 복잡한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욕망들로 이루어졌고, 그 모든 욕망들이 저마다 통제권을 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189)

전통적으로 뇌 연구는 고립된 뇌를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 접근법은 엄청나게 많은 외 회로들이 다른 뇌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우리는 깊은 수준에서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는 우리의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 거래 상대들이 중첩되어 이룬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 주위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관계의 형성과 결렬, 친밀한 유대, 강박적인 사회연결망 형성, 충동적인 동맹을 본다. 이 모든 사회적 결합을 위한 접착제는 뇌 속의 특별한 연결망들에서 생산된다. 어지럽게 퍼져 있는 그 연결망들은 타인들을 주시하고, 타인들과 소통하고, 타인들의 고통을 느끼고, 타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타인들의 감정을 읽어낸다. 우리의 사회생활 솜씨는 뉴런 회로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그 회로를 이해하는 일은 사회신경과학이라는 신생 분야의 기초다.


(202)

나의 얼굴 근육은 나의 감정을 반영한다. 그리고 당신의 뉴런 장치는 이 사실을 이용한다.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할 때, 당신은 나의 표정을 흉내 내본다. 물론 작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흉배내기는 무의식적으로 신속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 자동적인 거울 효과에서 당신은 내 감정에 관한 신속한 추정 결과를 얻는다. 이것은 당신의 뇌가 나를 더 잘 이해하고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더 잘 예측하기 위해 사용하는 강력한 묘수다. 알고 보면 이것은 수많은 묘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212)

집단의 구성원들은 서로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그들은 더 안전하고 더 생산적이며 위기를 더 잘 극복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호 결속의 성향을 일컬어 진사회성(eusociality)’이라고 한다. 진사회성은 혈연과 상관없는 무리, 집단, 나라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물론 개체 선택은 엄연히 일어난다. 그러나 개체 선택만 가지고는 인간의 행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경쟁적이고 이기적이지만, 우리가 삶의 상당한 부분을 집단의 이익을 위해 협력하면서 보낸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협력 덕분에 인간 집단들은 지구 상의 모든 곳에서 번성하면서 사회와 문명을 건설해왔다. 고립된 개인들은 저마다 아무리 환경에 적합하더라도 절대로 이런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진보는 오르지 연합과 연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진사회성은 우리가 사는 현대세계의 풍요와 복잡성을 낳은 주요 원인들 중 하나다.


(277-278)

개별 뉴런은 어둠 속에서 산다. 뉴런 각각은 다른 뉴런들과 함께 이룬 연결망 속에서 단순히 신호들에 반응하면서 평생을 보낸다. 개별 뉴런은 자신이 셰익스피어를 읽는 당신의 눈을 움직이는 일에 참여하는지, 혹은 베토벤을 연주하는 당신의 손을 움직이는 일에 참여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당초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른다. 당신의 목표, 의도, 능력은 이 작은 뉴런들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이 뉴런들은 자신들이 모여서 이루는 결과를 알아채지 못하는 채로 더 작은 세계에서 산다.


(285)

만일 의식의 업로드가 가능하다고 밝혀진다면, 다른 별들로 가는 여행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우리 우주에는 제각각 1000억 개의 별들을 거느린 은하가 최소 1000억 개나 있다. 우리는 그 별들 주위를 도는 외계 행성들을 이미 수천 개 발견했다. 그것들 중 몇몇은 지구와 꽤 유사하다. 문제는 우리가 현재 지닌 생물학적 몸으로는 그 외계 행성들로 가는 여행이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토록 먼 시공을 가로질러 그곳들에 도달할 전망이 전혀 없다. 그러나 당신이 디지털화되어 있다면, 당신의 시뮬레이션을 중단시킨 상태로 먼 우주로 발사한 다음에 1000년 후 어느 외계 행성에 도착할 때 재가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의식은 당신이 지구에서 발사된 다음에 곧바로 새 행성에 도착했다고 느낄 것이다. 의식을 업로드하는 기술의 등장은 웜홀의 발견과 마찬가지로 일 것이다. 그 기술은 우리가 우주의 한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주관적인 관점에서)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을 가능케 해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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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그는 로세르의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있었다. 지갑에 넣어 둔 유일한 사진이었다. 로세르가 피아노 옆에 서 있었다. 어쩌면 연주회 중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짙은 색 소박한 블라우스에 평소보다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소매에 목에는 레이스가 달린 옷은 몸매를 감추는 촌스러운 교복 같았다. 그 흑백사진에서 로세르는 아마득하고 흐릿했다. 멋도 없고, 나이도 불분명하고, 무표정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호박색 눈과 검은 머리카락, 조각처럼 곧은 코, 표정이 담긴 눈썹, 돌출된 귀, 기다란 손가락, 그녀에게서 나는 비누 향. 느닷없이 그를 덮쳐 고통스럽게도 하고 잠 못 이루게도 하는 섬세한 표정은 애써 떠올려야 했다. 그리고 이런 표정을 떠올리다 보면 깜빡 방심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180-181)

그들은 칠레가 몹시 가난한 나라로 광물, 그중에서도 특히 구리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지만, 정착해서 성공할 수 있는 비옥한 땅도 많고, 어업에 종사할 수 있는 수천 킬로미터의 해안도 있고, 무수히 많은 숲과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달과 같은 북쪽 황무지부터 남쪽의 빙하까지 칠레의 자연은 경이로웠다. 칠레 사람들은 한순간에 모든 걸 무너뜨려 사망자와 이재민이 속출하는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가난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지만 망명자들에게는 자기네가 살아왔던 과거와 프랑코 권력하에 있는 스페인의 미래에 비하면 칠레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칠레 사람들은 그들이 많은 것을 받을 테니 보답할 준비나 하라고 했다. 칠레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가난하지만 인색하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칠레 사람들은 늘 두 팔 벌려 자기네 집을 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나를 위해, 내일은 너를 위해.” 그것이 슬로건이었다. 그리고 총각들에게는 칠레 여자에게 한번 찍히면 도망칠 방법이 없으니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칠레 여자들은 매력적이고 강하고 권위적이라 죽음의 조합이었다. 그 모든 말이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판타지처럼 들렸다.

(316)

쿠바 혁명에 영감을 받은 지지자 몇몇은 진정한 혁명을 이뤄 평화롭게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무기를 들고 싸워야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옌데에게 혁명은 견고한 칠레 민주주의에 넉넉히 들어맞았고, 그는 칠레의 헌법을 존중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 한 손에 자기네 운명을 움켜쥘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고발하고 설명하고 제안하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요구하는 것이 문제라고 마지막까지 믿었다. 또한 그는 적들의 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공인일 때 아옌데는 약간 우쭐해하며 근엄하게 행동해 적들에게 건방지다는 트집도 잡혔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수수하고 농담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로서는 배신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마지막에 가서는 그 자신을 잃게 되었다.

(462-463)

빅토르는 임종이 임박한 마지막 순간의 로세르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그때 그녀는 우리 인간은 모여 사는 생명체이고, 우리는 고독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기 위해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가 혼자 살면 안 된다며, 심지어 그를 위해 애인까지 정해 주며 집요하게 굴었다. 빅토르는 느닷없이 매체를 정감 있게 떠올렸다. 그에게 고양이를 선물하고 텃밭의 토마토와 허브를 가져다주는, 마음이 열린 옆집 사람, 뚱뚱한 요정들을 조각하는 꽤 자그마한 여자였다. 빅토르는 딸이 떠나자마자 오징어 먹물 파에야와 크레마 카탈라나 남은 것을 메체에게 가져다주기로 했다. 그것을 새로운 항해이며, 그렇게 그는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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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중국이 백제라는 나라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개척한 서진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 중국에선 한반도 중부 이남을 삼한의 땅으로 인식했고,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하기 전에는 삼한의 맹주인 마한과 마한의 중심국인 목지국에 의해 그 땅이 다스려지고 있다고 믿었다. 말하자면 백제가 처음 대륙에 진출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은 백제를 마한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송서> <남제서>, <위서>, <주서>에 백제 편은 있으나 신라 편은 없는 것도 당시에 중국은 신라를 진한의 한 소국으로 인식한 반면, 백제는 대륙에 진출한 비교적 큰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사>에서는 신라의 위치를 백제의 동남쪽 5천여 리에 있다고 쓰고 있는데, 이는 백제의 대륙 영토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5천 리라는 개념은 백제를 대륙에 설정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수치인 까닭이다.


(167)

아신왕과 광개토왕은 둘 다 391년에 정권을 장악하고 392년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광개토왕은 18, 아신왕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모두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들은 젊은 혈기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다. 선제 공격을 가한 쪽은 광개토왕이었다.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줄기차게 복수전을 꾀하였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젊고 용맹한 광개토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광개토왕은 백제가 왕위 계승 문제로 내분을 겪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륙백제의 북쪽 요충지인 관미성과 주변 10개 성을 공략하여 얻음으로써 먼저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256-257)

하지만 일본 사학계의 주장처럼 임마가 일본에 의해 지배된 것은 아니었다. 임나엔 백제, 가야, 왜의 군대가 모두 주둔하고 있었고, 백제와 왜는 대사관 격인 객관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임나의 땅 주인은 가야이다. 가야는 6개의 분국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고, 백제와 왜에 비해 국력이 쇠약했다. 그래서 가야는 왜와 백제 양국과 동맹을 맺고, 임나 지역을 자유무역 도시로 내놓고 공동 관리를 한 것이다. 덕분에 임나는 당시 최대의 국제무역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왜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중국의 제국들도 임나에서 거래되는 물품을 사갔을 정도였다. 고구려가 섭라에서 사서 중국에 팔던 옥도 역시 임나에서 거래되던 것이었다. 현재 한반도 내에서 옥 생산지가 어디였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옥은 아마도 임나 지역에서 대거 생산되었던 듯하다. 임나는 그 옥을 기반으로 경제권을 형성하고, 국제적인 무역 도시로 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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