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파인 씨, 유감스럽지만 당신 따님의 점심 도시락까지 싸줄 시간과 여유가 내겐 없군요. 우리의 뇌를 일깨우고 가족을 단합시키고 미래를 결정하도록 도와주는 촉매제가 음식이라는 점은 모두가 아는 바죠. 그런데……”


(21-22)

엘리자베스가 앞치마를 두르고 촬영장에 들어간 첫날부터 그녀에겐 뭔가가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뭔가는 뭐라 말하기 어려우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질이었다. 또한 그녀는 아주 실용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고, 헛소리라고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들 이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다. 다른 요리 프로그램에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요리사들이 셰리주를 꿀꺽꿀꺽 마시며 방송을 유쾌하게 진행했지만, 엘리자베스 조트는 진지했다. 좀처럼 미소도 짓지 않았다. 농담하는 법도 결코 없었다. 그녀의 요리는 그녀만큼이나 있는 그대로였고, 아주 현실적이었다.


(75)

캘빈, 내가 배운 게 하나 있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풀 때 언제나 간단한 해결책을 간절히 바란다는 점이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고, 변할 수 없는 걸 믿는 편이 훨씬 쉽거든. 실제로 보이고 만져지고 설명할 수 있는 걸 믿기는 오히려 어려워. 말하자면 실재하는 자기 자신을 믿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137-138)

물론 화학자이니만큼 캘빈은 징크스에 집착하는 행위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미신일 뿐이다. , 그렇다면 좋겠지. 하지만 인생이란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시험할 수 있는 가설이 아니었다. 무언가는 반드시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캘빈은 엘리자베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게 뭔지 항상 경계해왔다. 오늘 아침에도 그녀는 조정을 하다가 죽을 뻔했다.


(226)

좀 이따가 메이슨 박사님 진료 예약이 있어. 그 전에 이 책을 반납하려고. 네가 <모비 딕>을 좋아할 것 같아. 인간이 어떻게 다른 생명체를 계속해서 과소평가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거든.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말이야.”


(339-340)

하지만 우리는 대개 일 때문에 낮잠을 생략하죠. 그러니까 제 말은 미국인이 그렇다는 뜻이에요. 멕시코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없어요. 프랑스나 이탈리아나 다른 어느 나라를 가도 점심시간에 우리보다 술을 훨씬 많이 마시고요. 인간의 생산성이 자연적으로 오후에 떨어진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에요. TV 업계에서는 이걸 가리켜 오후의 저기압대라고 부르죠. 뭔가 의미 있는 걸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데, 그렇다고 집에 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에요. 주부나 4학년 어린애나 벽돌공이나 사업가나 전부 마찬가지죠. 나른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오후 1 31분부터 4 45분까지는 소위 말해 생산적인 삶이라는 게 사라져버려요. 이 시간은 사실상 죽음의 시간대란 말입니다.”


(341-342)

저녁 식사를 만드는 거죠. 바로 거기서 당신이 필요한 겁니다. 당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4 30분에 시작해요. 시청자들이 오후의 저기압대에서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죠.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의 가정주부가 이 시간대에 가장 심한 압박을 느낀다더라구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걸 해내야 하거든요. 저녁도 짓고 상도 차리고 애들도 데려오고 등 일은 끝이 없다고요. 하지만 여전히 기진맥진하고 우울한 시간이죠. 그래서 이 특정 시간대의 책임이 막중한 거랍니다. 누가 나와서 무슨 말을 하든 반드시 기운을 북돋워줘야 해요. 당신이 시청자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사람들을 다시 일상으로 끌어내줘요. 엘리자베스.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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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의 글들 속에 담겨 있는 가장 훌륭한 모든 것들에 영감을 주고 부분적으로는 그것들의 저자이기도 한 그녀, 진리와 정의에 대한 높은 식견으로 내게 늘 아주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고, 그의 칭찬이 내게 최고의 보상이 되었던 나의 친구이자 아내였던 나의 사랑하는 그녀를 기억하고 비통해하며 이 책을 그녀에게 헌정한다.


(32-33)

자유권력의 갈등한 인류 역사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주 오래된 것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와 로마와 영국의 역사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지만 옛적에는 그러한 갈등은 신민들, 또는 신민들 중 몇몇 계급들과 정부 간에 존재했기 때문에, 자유라는 것은 정치적인 지배자들의 폭정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의미했다. 지배자들은 필연적으로 피지배자들에 대해 적대적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그리스의 몇몇 대중 정부들을 제외하면). 지배자들은 한 사람의 지배자일 수도 있었고, 한 지배 부족이나 계급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권력은 세습 또는 정복으로부터 생겨났다. 그 권력은 어떤 경우에도 피지배자의 이익을 위해서 행사되는 일은 없었다. 그 권력의 압제적인 행사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는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 절대적인 권력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38)

따라서 공권력의 폭정을 막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배적인 여론이나 정서의 폭정도 막아야 한다. 또한 사회가 공적인 처벌 이외의 다른 수단들을 사용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념들과 실천들을 그들의 행위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방식과 부합하지 않은 개성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능하면 형성되는 것조차 차단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인격을 사회가 정한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도록 강제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집단의 의사가 개개인의 독립성에 합법적으로 간섭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규정해서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독재를 막는 것만큼이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적절한 여건을 조성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


(50)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하지 않음으로써도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둘 중의 어느 경우이든 자신이 깨친 해악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후자의 경우에는 전자보다 훨씬 더 큰 신중함이 요구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해악을 미연에 끼친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가 아니라 예외적으로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방지를 못한 책임이 너무나 중대해서 예외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한 경우가 많이 있다.


(54-55)

이러한 사상가들의 개별적인 신념과 주장을 차치하고라도, 오늘날의 세계 도처에서는 사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여론의 힘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 법의 힘을 빌려서 개개인을 부당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경향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권력을 강화시켜서 개개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잠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든 변화들과 경향성은 그대로 놓아두면 저절로 사라질 해악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정반대로 점점 더 힘을 얻어서 가공할 만한 일이 되어갈 해악이다. 권력자의 자격으로서든, 아니면 동료 시민의 자격으로서든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행위규범으로 강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인간 본성에 수반되는 몇몇 가장 좋은 감정들과 가장 나쁜 감정들에 의해서 아주 강력하게 밑받침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빼앗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는 거의 통제하기가 불가능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는 강력한 도덕적 신념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권력은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현재의 상황이 지속되는 경우에는 사회의 권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59)

하지만 한 개인의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이 심각한 해악이 되는 이유는 그런 행위는 현재의 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까지, 그리고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인류 전체에게서 중요한 것을 빼앗아버리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 견해서 옳은 경우에는, 인류는 오류를 진리로 대체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다. 그 견해가 틀린 경우에는, 오류와의 충돌을 통해서 진리를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유익한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65)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경험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고, 반드시 토론이 있어야 한다. 토론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틀린 의견들과 실천들은 사실과 근거에 의해 점차 밀려난다. 하지만 사실들과 근거들이 인간의 지성에 어떤 효과를 미치기 위해서는 지성 앞에 호출되어야 한다. 사실들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실들이 지난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이 필요하다.


(91)

어떤 결론이 도출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지성이 이끄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사상가의 첫 번째 의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위대한 사상가가 될 없다. 진리와 관련해서 인류가 점점 더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이미 옳다는 것이 증명된 의견들을 늘 좋아가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적절한 연구와 준비를 갖춘 후에 스스로 사고해 나가다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들을 범하는 사람들이다.


(108)

기독교가 18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그 세력을 더 이상 확장해 나가지를 못하고서, 여전히 거의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주된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교리들을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믿고, 그 교리들 중 많은 것들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지성 속에서 그런 식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여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설은 칼뱅이나 녹스, 또는 그들 자신의 품성이나 성향과 비슷한 점이 많은 어떤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설일 뿐이다. 반면에, 그리도소의 교훈들은 그들의 지성 속에 수동적으로 공존해서, 아주 기분좋고 상쾌한 말들을 들었을 때 같은 효과만을 낼 뿐이고, 그 이상의 효과를 그들에게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109-110)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데에는 토론의 기회가 없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진리들 중에는 사람이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그런 진리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 진리들이 지닌 진정한 의미에 대해 훨씬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제기되지 않게 되는 경우에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을 그만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들 중 절반은 그들의 그런 경향에서 비롯된다. 우리 시대의 한 작가가 확정된 결론이 불러오는 깊은 잠이라고 말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115)

지금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이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류의 지성이 아주 높은 수준에 진입할 때까지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유익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유익한 주된 이유들 중 오직 두 가지 경우에 대해서만 고찰해왔고, 나머지한 경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경우 중 하나는 기존의 정설이 틀리고, 어떤 다른 의견이 옳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정설이 옳을 때, 반대자들의 틀린 반론들이 기존의 정성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더욱 명료하게 알게 해주고 우리의 지성 속에 더욱 깊이 각인될 수 있게 해주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는 경우였다.


(126-127)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불신자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 스스로 불신자들을 정당하게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소중한 가르침을 설파하는 상당수의 저작들이 기독교 신앙을 알지 못했거나, 또는 알면서도 배척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실과 진리를 추구한다고 할 수 없다.


(170)

하지만 지금은 이 사회가 사람들을 강제해서 동질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가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은 빈 구석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개성의 가치와 중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일을 하기에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든 것은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비슷해져야 한다는 이 사회의 요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이 하나의 정해진 형태로 획일화된 후에, 거기에 저항하고자 한다면, 그 획일적인 삶의 형태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들은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며, 심지어 본성을 거스르는 기괴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다양성을 보지 않은 채로 한동안 살아가다보면, 아주 신속하게 다양성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218-219)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직 한 개인 본인에게만 직접적인 해악이 돌아가는 많은 행동들을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 중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경우에는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행동들의 범주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이 그 예다. 그 문제는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는 오직 간접적으로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개인이 사적인 공간에서 행했을 때에는 그 자체로 그 어떤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행동들 중에도, 공공연하게 행해진 경우에는 사회에 의해 규제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231-232)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자신과만 관련된 일들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행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이 곧 자기 일이라는 미명 아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할 때에 자기 마음대로 행할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오직 한 개인에게만 관련이 있는 일들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소유하고 있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여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행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람의 다른 모든 관계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족 관계에서는 국가의 그러한 의무가 거의 완전히 방기되어 있다.


(234-235)

국민에 대한 교육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이 국가의 수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런 것에는 반대한다. 개개인의 개성, 그리고 의견과 행동방식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내가 지금까지 말해온 모든 것 속에는, 교육의 다양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을 대성으로 한 획일적인 국가 교육이라는 것은 국민을 하나의 틀에서 서로 똑 같은 사람들로 찍어내고자 하는 술책이다. 그리고 국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 권력이 왕이든, 성직자이든, 귀족 계급이든, 다수의 기성세대이든, 그 틀은 지배 권력이 자신의 뜻대로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 교육이 효과적이고 성공을 거두는 정도에 비례해서, 국민의 정신은 지배권력에 의해 장악되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신체도 장악당하게 된다.


(243)

이런 일들에서 정부의 개입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들 중에서 세 번째이자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정부의 권력을 불필요하게 키워주는 것은 큰 해악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미 하고 있는 기능들에 또 하나의 기능이 추가될 때마다, 시민들의 희망과 두려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점점 더 확대되고, 시민 중에서 적극적이고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정부나 집권여당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당에 목을 매는 자들로 변질되어갈 수밖에 없다.


(252-253)

정부가 개인의 노력과 발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고 촉진시키는 활동이라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정부가 개개인과 집단들의 활동과 역량을 이끌어내는 대신에, 그들이 해야 할 활동들을 정부 자신이 하고, 정보를 제공하고 조언해주며 때로는 경고를 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잘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에, 그들에게 족쇄를 채워서 그런 상태에서 일하게 하거나, 그들을 옆에 세워두고서 그들의 일을 직접 나서서 할 때, 폐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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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관계란 상대적이다. 어느 관계에서는 내가 우월한 입장이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순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고 약한 자에게 유독 가혹하게 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언젠가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호되게 당할 가능성이 크다.

응립여수 호행이병(應立如睡 虎行以病)’이라는 말이 있다. ‘매는 조는 듯이 앉아 있고, 호랑이는 병이 든 듯 걷는다라는 뜻이다. 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언제나 조심하며 낮은 자세로 임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진정한 고수는 절대 약자 앞에서 허세나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72-73)

송명시대의 학자 정자(程子) <논어>를 읽은 사람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논어>를 읽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다 읽은 뒤 한두 구절을 얻고 기뻐하는 사람, 다 읽은 뒤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로 뛰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러한 사람인데 다 읽고 나서도 또 다만 이러한 사람, 즉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정한 독서는 읽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앎으로 승화되어야 하고, 그 앎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 속에서 진정한 보석을 골라내어 자신의 삶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급변하는 오늘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지식의 전사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87)

법이 항상 약자를 보호하는 건 아니다. 이처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음에도 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더 곤란을 겪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말한 데에는 이처럼 약자 스스로 노력하여 원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126)

법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칙인데 그 규칙을 제대로 아는 사람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는 커다란 불균형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규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규칙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협박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행위임에도 이런 일들은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안타까운 일이다.

살면서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그때 명심해야 할 것은 혼자 앓지 말고 주위에 적극적인 자문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르고 당할 수야 없지 않은가.


(136)

당장 오늘부터 대화의 방식을 바꿔보자. 내 말을 하기에 앞서 상대방의 생각이나 의견에 대해 묻고, 그 질문에 대한 상대방의 대답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이다. 이렇게 딱 한 달만 해보자. 상대방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얻음과 아울러 당신은 사려 깊은 사람으로 각인될 것이다.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

올리버 웬델 홈즈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 순간이다.


(183)

완장을 찬 듯 어깨에 힘을 주며 임시로 주어진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면 결국 사람도, 자리도 모두 잃고 만다. 권력이란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권력에 눈이 멀어 섣부른 힘을 행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상황과 위치가 바뀔지 모를 일이다. 기억하자.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악역도 현명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잃어선 안 될 것이다.


(262)

수십 권의 책을 읽어 지식을 쌓고 시험을 거쳐 자격증을 땄다고 해서 바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이나 자격증은 전문가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임상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과 지혜까지 겸비해야 진정한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 정도 수준이 되어야 책임 있는 진단과 조언이 가능해진다. 책에서 배운 것만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어설픈 전문가가 초래하는 위험은 생각보다 크다. 나의 지난 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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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람이 법에 기대어 법정을 찾게 되는 때는 인생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을 경험하고 있을 때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만, 소송 이후의 삶은 천차만별로 달랐다. 어떤 이는 승소를 해도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지 못했고, 어떤 이는 패소를 해도 후련한 마음으로 결과를 받아들였다. 2년의 재판 끝에 승소를 했음에도 분노에 젖어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있는 반면, “이 사건은 이길 수 없습니다. 패소가 확실합니다.”라고 말해도 끝까지 철회하지 않고 심지어는 패소했음에도 나를 지인에게 추천하는 사람도 있었다.


(49)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상속으로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된 주인공들을 보면서 그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식들이 부모의 재산이 아니라 을 물려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중에는 부모의 빚을 물려받지 않기 위한 상속포기라는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3개월의 상속포기 신고기한을 놓치는 바람에 부모의 빚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듯 법에서 규정한 절차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기에 결코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93-94)

먼저 1단계는 당혹감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좀더 신간이 지나면 이런 상황을 초래한 상대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2단계로 넘어간다. 그리고 곧 화가 누그러지면 비난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며 스스로를 자책한다. ‘누구를 탓하겠어. 사람을 잘못 본 것도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지 못한 것도 모두 내 탓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3단계다. 이를 넘어서 4단계에 들어서면 상황을 직면하고 성찰하려 한다. ‘좋아, 어차피 일이 어떻게 된 거 최대한 잘 처리하도록 하자. 냉정을 잃지 말고 아울러 이번 일을 나의 교훈으로 삼자. 분명 이 경험도 내겐 득이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


(109)

우리 형법은 친족 간에 일어나는 일정한 범죄에 대해서는 형을 면제해주고 있는데 이를 친족상도례(親族相盜例)’라고 한다. 김 사장 아들의 경우처럼 직계혈족 간의 절도죄에 대해서는 형벌 자체를 면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51)

노자의 <도덕경>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疏而不漏)’라는 구절이 있다. ‘하늘의 그물은 굉장히 크고 넓어서 얼핏 봐서는 성긴 듯하지만 선한 자에게 선을 주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257)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나는 의뢰인의 말을 진실로 믿고 의뢰인을 위한 검투사가 되어 열심히 상대방과 싸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건을 숱하게 겪으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 한 가지는 승패만을 위한 논리를 내세우다가는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으면 문제의 사슬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266)

사람들이 소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 때문이기도 하고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서로 자존심을 걸고 법정싸움을 벌일 때는 적당한 수준에서 합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분명 서로 양보하고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 이득일 텐데 자존심이 걸려 있으면 달라진다. 합리적인 선택을 그 자존심이란 녀석이 가로막는다. 사람은 그만큼 감성적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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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예전 비누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물론 없었죠. 하지만 이게 더 좋아요.

예전 비누도 아무 문제 없었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게 더 좋을 수가 있어요?

. 더 잘 닦입니다.

전에도 잘 닦였어요.

이게 더 잘 닦여요더 빠르고.

, 그냥 보통 비누가 든 상자를 가져갈래요.

이제는 이게 보통 비누예요.

예전의 그 보통 비누를 살 우 없단 말인가요?

이게 보통 비누라니까요. 장담합니다.

아니. 나는 새 비누를 써보고 싶지 않아요.

이건 새 비누가 아니에요.

알았어요. 크로즈비 씨. 당신 말대로 해요.

저기요. 부인. 1페니를 더 내셔야 하는데요.

1페니를 더? 왜요?

비누가 좋아져서 1페니가 올랐거든요.

파란 상자에 든 다른 비누를 사면서 1페니를 더 내라고요? 그럼 그냥 예전의 그 보통 비누를 살래요.


(35-36)

죽기 백서른 두 시간 전 조지는 붕괴하는 우주의 소란에서 깨어나 밤의 어둠과 적막 속에서 눈을 떴다. 악몽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희미해지자 그는 그 적막을 이해할 수 없었다. 거실에는 긴 소파 옆의 작은 탁자에 올려놓은 자그마한 백랍 램프 하나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긴 소파는 병원 침대와 평행으로 놓여 있었다. 소파 반대편 끝 쪽에 손자 하나가 앉아 탁자 위 불빛에 몸을 기울인 채 책을 읽고 있었다.


(211)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왔다. 그녀는 그가 죽어가는 동안 매일 밤 몇 시간씩 얕은 잠을 잤다. 그녀는 테두리에 짙푸른 파이핑 장식이 달린 옅은 파란색 면 가운을 입고 있었다. 슬리퍼가 복도 나무 바닥에서 질질 끌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좁은 보폭으로 걸으며 잠과 피로 때문에 발을 약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 바닥을 덮은 페르시아 바닥깔개 위에 오르자 끌리는 소리가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 옆에 서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 조지, 당신은 내 마음의 몸을 기울이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 조지, 당신은 내 마음의 기쁨이에요. 우리 함께 멋진 인생을 살지 않았나요? 우리는 함께 온 세계를 돌아다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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