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작가 심훈은 1920~1921년 상하이에서 체류한 경험이 있다. 심훈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 이 소설을 썼다. 상하이의 거리 풍경에 관한 묘사라든가, 상하이에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 및 단체 활동 양상에 관한 서술 등을 보라. 어떤 사료보다도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해준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 체포하려고 노력하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이렇게 <동방의 애인>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으로 수용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형상화한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서술들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붙잡는다.


(70)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의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마음 맞는 동향 출신 동료 허헌과 함께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대한제국 시절, 두 사람은 입헌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체군주제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김익용은 설 립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가지고 있는 국가 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훗날 인권변호사가 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허헌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3.1운동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다.


(80)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폭력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의 결정에 의거하여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한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입각해 있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 금화 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과오를 바로잡아야 한다. 진상이 규명되어야 하고,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보의 마땅한 태도라도 생각한다.


(163)

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천황 즉위 등을 계기로 하여 세 차례 감형을 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과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겼었다는 이야기, 1941 8월에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하여 격투를 벌이다가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전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전향 및 예방구금제도의 시행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 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서 사상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되어야만 했다.


(289)

숨을 거두기 하루 전이었다. 채그리고리는 임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속에 담아둔 얘기를 꺼냈다.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유해를 의학 연구 재료로 사용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사후라 할지라도 신체를 훼손하는 일은 불효가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시신 기증 캠페인이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된 게 수십 년 뒤의 일임을 감안하면, 공공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선각자다운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 하나는 동지들을 만나고 싶으니 다음 날 오실 있는 분들은 모두 모여 달라는 부탁이었다. 국경에서 체포되지만 않았다면 의기투합하여 혁명사업을 함께 도모했을 동지들의 면면이 그리웠던 것이다.


(303-305)

101인 사건이란 식민지 시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3개 독립운동 탄압 재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 중 첫 번째는 ‘105인 사건재판으로, 식민지 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 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48일 사건재판으로, 3.1 운동 때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독립선언 사전 모의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한 탄압 재판이었다. 이어서 바통을 넘겨 잡은 것이 바로 ‘101인 사건재판으로, 3.1 운동 이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사회주의운동 대표 단체 조선공산당 재판이었다. 세 재판은 피고인 숫자가 각각 105, 48, 101인이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갖게 됐다. 당대 언론매체들은 이 세 재판을 식민지 조선 통치 20년래의 대표적 중대 사건으로 지목했다. 항일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신민회, 3.1 운동, 조선공산당이 나란히 손꼽히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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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런데 최근 학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 계급적 이해관계를 위해 역사의 기억들을 왜곡하고 전용하는 현상들이 나타나 우려스럽다. 2019년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 문제를 구실로 경제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때 국내의 보수적인 정치인과 지식인, 나아가 경제 단체들이 원인 제공자인 일본이 아닌 자국 정부를 향해 마구 손가락질하며 법석을 떨었다. 일본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한국 경제가 당장 망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도 같은 태도이다.

 

(37)

그런데 9*18 사변에 대한 중국 정부의 대일 정책은, 즉각적인 대일 항전을 바랐던 임시정부는 물론 상하이 민중과 대학생들을 점차 실망시켰다.

9*18 사변 직후 중국 정보는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연명에 호소하는 것과 함께 국내적 분열의 중심이 되고 있는 공산당 세력의 토벌에 집중하는 정책을 취했다. 이에 따라 동북지방의 방위를 맡은 장쉐량에게 일본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의 침략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선택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집중했다.

 

(142-143)

김구는 천퉁셩 부부의 극진한 환대 속에서 한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천퉁셩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자싱의 산천을 감상하고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상하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산과 호수, 넓게 펼쳐진 비옥한 토지를 감상했고, 임진왜란 당시 마을 부녀자들을 살리려다가 왜놈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승려의 슬픈 사연이 담긴 서문 밖 혈인사의 돌기둥, 그리고 소낙비에 보리가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오직 글 읽기에만 골몰한 서생 주바이신의 무덤에 얽힌 사연을 들으며 오랜만에 눈과 귀가 호사를 누렸다.

 

(277)

위혜림의 행적과 관련하여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방 이후 그의 행적이다. 정병준은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이후 행적을 연구한 논문에서,

‘1959년 안두희가 서울 수도방위사단 사령부 고급부관(대령 계급)으로 오사카에 나타나 경무대 기관원이던 위혜림, 나카지마 등과 북송손 폭파 공작을 벌였으나, 정보 누설로 공작에 실패한 후 귀국하였다.’

고 했다. 그리고 위혜림은 해방 직전에 상하이에서 아마기스 기관의 하부 조직인 무라이 기관의 기관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 휘하 특수 공작 기관이던 캐논 기관에서 일해고 이 기관이 해산된 뒤에는 이승만의 도쿄 주재 사설 기관인 경무대 기관에서 일했다고 한다.

위혜림과 김구의 질긴 악연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해방 전 김구 암살 공작에 밀정 노릇을 했던 위혜림이 해방 후에는 이승만 사설 기관의 부하가 되어,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와 함께 재일교포의 북송선 폭파 공작을 함께한 이 사실이.

 

(299)

임시정부가 재건됨으로써 이제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정국은 김구가 주도하는 임시정부와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혁명당이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양상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은 창당 당시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를 반대하고 재건한 입장이기 때문에 양측 사이의 갈등은 당분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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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여담이지만, 작품을 읽다 보면 작가의 성별에 따른 표현 차이가 조금씩 보이는데요. <프랑켄슈타인>은 여성 작가 특유의 휘몰아치는 감정 표현을 극대화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현은 특히 피폐한 분위기의 장르문학에서 빛을 발하죠.


(115-117)

저는 책벌레오서 평소에 독서가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읽은 책 중 쥘 베른 작품만큼 철저하게 독자와 함께 거니는 책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나 생업에 매달려야 하고, 잡다한 현실을 신경 써야 하죠. 여러분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쥘 베른의 책을 펼칠 때 우리는 꿈을 꿉니다. 육지를 등진 괴짜 선장에게 이끌려, 기이한 돌멩이를 사랑하는 교수에게 이끌려, 도박을 좋아하는 부자 신사에게 이끌려, 인생에 다시없을 여정을 떠나는 꿈을요. 


(118)

<해저 2만리>만 읽었을 때 저는 쥘 베른을 단순히 재미난 캐릭터성, 흥미진진한 서사를 잘 챙기는 작가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의 생각이 듭니다. 그의 작품은 픽션이 지녀야 할 미덕을 너무도 순순하게 보여줍니다. 독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장 명랑한 방식으로 풍요롭게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저는 쥘 베른을 사랑합니다. 그의 솔직한 매력을, 거침없는 열정의 서사를 사랑합니다.


(220-222)

내 타임머신은 시간선을 살해하는 도구나 마찬가지야. 한번 가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쳐서 본래 있던 세계는 사라져버리지. 언젠가 나는 반드시 이 기계를 파괴해야 할 거야.

단순히 새로운 시간선을 만들어내는 도구일 수 있고. 하나의 세계가 복도라고 하면 시간 여행은 수많은 복도를 만들어내는 거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항상 불완전해서 언젠가 그 복도 사이를 넘어갈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오.

나는 너무 많은 걸 알게 돼서이 기억이 있는 한 절대 시간 여행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나는 1891년의 그날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인생을 마치지는 않을 거야. 설령 기회가 생긴다 해도.

나는 기회가 생긴다면 더 높은 층위를 탐구할 거요.

그게 끝나면 어쩌게? 휴식을 취하는 건가?

휴식은 없소. 한계 또한 없소.

생명과 정신이 도전하여 뚫지 못하는 경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329-330)

이봐요, 로봇 공학의 3원칙부터 시작해보자고요. 로봇의 두뇌 깊숙이 심어놓은 세 가지 원칙이요.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2원칙.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3원칙. 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394-395)

<아이 로봇> <파운데이션>을 읽어본 지금 시점에서 말씀드리자면요. 아시모프의 작품들은 낡았기에, 레트로이기에, 다시 말해 올곧고 전형적이기에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수많은 고전 작가를 사랑합니다. <고전 리뷰툰>에 실은 작품의 작가들은 모두 제가 가슴으로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하지만 아시모프만큼은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사랑합니다. 작품으로 보여준 그의 이성과 통찰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긴 리뷰의 마지막을 빌려 젼호하려 합니다. 온갖 혼란이 밀어닥쳐 무엇이 올바른 가치인지조차 모르게 된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아시모프의 낢음이 필요합니다. 거미줄처럼 흩어진 역사의 앞날에 가장 알맞은 방향을 찾고자 한 그의 고전적 지성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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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순수 이성 비판>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봤어요. <순수 이성 비파>이란 게 정확히 뭡니까?

[답변] 이성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논증해보겠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신은 이성적으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죠.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이성의 범위란 직관적인 것, 직관을 통해서 서로 공유하는 것이고, 지성을 통해서, 수학적이라든지 과학적 지식의 범위 내에서 소통이 가능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우리는 부득불 하고 싶어 해요.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게 인간의 가장 큰 저주라 하거든요.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걸 말해보고 싶어하죠.


(23-24)

르네상스는 문화적으로 그렇게 한 거고, 그걸 철학으로 논증하기는 어렵잖아요. 이탈리아가 르네상스를 예술적으로 했고, 프랑스가 사회적으로 했다면 독일은 철학적으로 한 거예요. 칸트는 르네상스와 프랑스 혁명을 정리한 철학자다. 어준 씨가 칸트와 잘 통하는 이유는 경계에 많이 서봤기 때문이죠. 배낭여행을 많이 가셨잖아요.


(46)

자유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유를 잃으면 불편해요. 불편하지만 자유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죠.


(62)

헤겔이 칸트를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비판하거든요. 헤겔이 이렇게 말합니다. 칸트는 수영장에 가기 전에 수영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만 계속 가르친다. “너 수영이 뭔지 아니? 수영인 것과 수영이 아닌 것의 차이가 뭔지 아니?” 칸트는 이런 얘기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헤겔의 말은 뭐냐? “수영하고 싶으면 물속에 들어가라.” 현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현실에서 움직이는 걸 받아 적으라는 거예요.


(86)

자기 말로는 200년 뛰어넘은 거죠. 하하하하하하 실제로 포스트모던 계열의 모든 철학자들이 니체를 추앙해요. “세상에 중심은 없다. 모든 게 중심이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거든요.

니체에 의하면, 영원회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인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지금 말종 인간, 즉 마지막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아직 종교에, 허무주의에, 평등사상에, 쓸데없는 도덕에, 혹은 자본주의에 빠져 있거나 하는 헛짓거리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뛰어넘는 사람, 그게 초인입니다. 위버멘슈. 영어로 번역하면 오버맨(Overman.)


(114)

해마로 들어갈 땐 이것들이 다 결합니다. 청각 이미지, 시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가 결합하면 하나의 대상이 출현합니다. 그 대상이 낮 동안에 해마에 일시 저장됐다가 잠잘 때, 그 경험과 기억이 대뇌피질로 이동합니다.


(123)

20만 년 전 출현한 언어적 사고와 수백만 년 전부터 진화돼 온 이미지 사고가 항상 동시에 작동하고 있어요. 낮 동안에는 언어적 사고가 압도적으로 많이 작동해요. 그런데 잘 때는 더 오래된 이미지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정신작용은 이미지 사고 계열과 언어 상징 계열, 두 계열로 나뉩니다. 상상, 기억, 창의성은 이미지 기반 사고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도형을 그려서 하면 빨리 기억하잖아요. 기억이 원래 이미지적 사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50)

그래서 포유동물도 가장 초기 단공류는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데 왜 포유동물로 분류하느냐 하면 오리와 바늘두더지는 새끼가 알에서 깨 어미 가슴이나 털을 붙잡고 올라가 젖샘, 젖꼭지는 없는데 피부에서 접을 핥아 먹습니다.

젖을 먹는다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젖을 먹으면 포유동물로 분류합니다. 고래도 젖을 먹이고 박쥐도 젖을 먹입니다. 새끼를 낳아 새끼한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동물은 포유동물밖에 없습니다. 알을 낳는 건 그 기준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61)

그런데 포유동물은 밤으로 들어갔잖아요. 청각이 예민해졌죠. 밤에 안 보이잖아요. 돌을, 자갈을, 바위를 넘어야 되잖아요. 균형감각이 발달합니다. 게다가 천적이 어디서 올지 모르잖아요. 항상 예의 주시해야 되죠. 이게 전부 다 브레인의 진화를 가져오는 거예요.

선조와 비교했을 때 브레인의 크기가 두 배로 커지면서 포유동물은 공룡이 없는 신생대에 주인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신경 시스템을 중심으로 진화하게 돼요. 환경이 바뀌어도 신경이 적응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포유동물은 땅뿐만 아니라 하늘과 수중 형태에도 적응했고, 전 지구에 확산되는 거죠. 그걸 방산 확산이라고 합니다. 진화의 원동력인 중추신경 시스템, 브레인이 진화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63)

오늘 굉장히 중요한 말을 했는데, 원초적 기본 감정이 어미와 새끼의 정서적 유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다음에 언어를 쓰게 되잖아요. 언어를 통한 기억의 폭발이 일어나요. 감정의 핵심은 우리가 감정을 일으켰을 때 자아와 의식이 항상 함께 동작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 스스로 분명히 알잖아요.


(195)

레오나르도는 호라티우스가 말했던 시와 회화 사이의 갑을 관계를 거꾸로 뒤집습니다. “시는 앞을 못 보는 회화, 회화는 밝은 눈을 가진 시다.”


(293)

그런데 지금 한국의 클래식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 왔냐면요, 몇 년 전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러시아의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왔어요. <비창>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하는데, 3악장까지 엄청 화려하게 하고 딱 끝냈어요. 당연히 박수 칠 줄 알았을 거예요. 어디 가더라도 치니까요. 그런데 세상에, 3천 명이 아무도 안 치는 겁니다.


(295)

오케스트라를 보러 갔을 때 뒤에 서 있는 더블베이스가 몇 대가 뒤냐에 따라서 규모를 알 수가 있어요. 바이올린 숫자는 많아져도 티가 잘 안 나잖아요. 딱 봐서 더블베이스가 두 대 정도 된다. 그러면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옛날 음악을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4대 정도 된다 그러면 멘델스존, 슈만 같은 낭만음악을 하겠구나.’ 6~7대 있잖아요? ‘차이콥스키 하나?’ 이럴 수 있는 거예요.


(329)

그런데 육관이 말한 건, “너는 네가 꿈을 꿔서 양소유가 됐다고 생각하지? 너는 지금 누군가의 꿈에 있는 너일 수도 있는 거야. 너의 본질이 뭔데? 넌 성진도 아니고 양소유도 아니야.”라고 말한 거예요. 그게 바로 <금강경>의 핵심인 공 사상이에요. 불생불멸할 도를 닦겠다는 그 생각 자체도 헛되다는 겁니다. 그걸 공으로 꿰뚫어봐야 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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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이익주) 호구조사를 고려의 자율에 맡긴다는 것은 고려의 호구조사 결과를 몽골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전까지 고려에 설치되어 있었던 다루가치를 폐지하고 다시는 설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 낸 거죠. 또한 그 당시에 고려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전부 철수하게 하고, 홍차구 같은 부원 세력이 고려의 정치에 개입하려고 하는 것도 이제는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러한 쿠빌라이 칸의 약속이 쿠빌라이 칸이 죽은 다음 몰골의 후손들에게 세조가 정한 옛 제도라는 의미에서 세조구제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 이후에는 몰골의 누군가가, 또는 고려의 부원 세력이 고려의 자주성을 해치려고 시도하면 언제나 이 세조구제에 어긋난다는 논리로 막아 냅니다. 그래서 고려가 끝까지 국가로서 유지될 수 있었죠. 충렬왕의 외교가 거둔 성과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63-64)

(이익주) 그래서 충선왕이 폐위된 지 10년 만에 복위합니다. 사실 충선왕의 전성기는 복위하기 한 해 전인, 무종을 옹립한 직후부터 시작됩니다. 그때 원에서 심왕으로 책봉받습니다. 지금의 중국 선양시와 랴오양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분봉받으면서 원의 여러 왕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마침 충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고려 왕까지 되어 두 개의 왕위를 겸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원에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이 어전회의에서 토의되고 결정되는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케식으로 부릅니다. 충선왕이 바로 케식의 일원으로서 원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면서 원의 실력자가 됐죠.


(84)

(이익주) 사실 기황후의 능력은 외모보다는 몽골 여인과는 다른 학식에 있었습니다. 한가할 때는 <여효경>과 각종 역사서를 읽으면서 중국의 역대 황후 가운데에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사방에서 올라오는 공물 가운데 좋은 것이 있으면 태묘에 먼저 바친 후에야 그것을 가졌다는 기록도 있고, 수도 근방에 커다란 기근이 들었을 때는 자기의 사재를 털어서 무려 10만여 명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처럼 황실 안에서 상당히 현명하게 처신했다는 기록을 보면 몽골 사람들은 잘 갖지 못했던 유교적인 덕목을 기황후가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86)

(신병주) 여기서 고려 왕의 계보를 잠깐 살펴보자면, 충선왕의 아들 강릉대군이 충숙왕이 됩니다. 그다음은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이 잇고요. 참고로 공민황은 충숙왕의 차남이죠. 충혜왕이 폐위되자 동생인 공민왕이 왕이 될 뻔했는데, 결국에는 아들인 충목왕이 고려 제29대 왕이 되죠. 충목왕이 즉위할 때 여덟 살이었는데, 4년 만에 열두 살의 나이로 병사해요. 그렇게 해서 공민왕이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때, 이번에는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열 두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공민왕은 어린 조카 두 명에게 연이어 밀린 거예요. 충혜왕이 폐위되었을 때는 충목왕에게 밀려 재수하고, 충목왕이 죽었을 때는 충정왕에게 밀려 삼수한 거죠. 결국 공민왕은 삼수 끝에 고려 제31대 왕이 됩니다.


(108)

(류근) 뭐니 뭐니 해도 공민왕이 불굴의 자세로 추구한 자주성과 독립성이 가장 인상에 남아요. 그 삼엄한 원 치하에서 어떻게든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한 그 끈기와 오기에 아름다운 고려 정신이라고 박수를 좀 보내 주고 싶어요.


(128-129)

(이익주) 공민왕은 반원 운동을 시작으로 기황후와 싸우고 덕흥군에 의해 폐위당할 뻔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기죠. 그래서 이쯤 되면 권문세족들을 상대로 개혁을 추진했을 때 자기가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왕권을 대행하는 신돈이라는 사람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개혁도 추진하고 자기의 안위도 보장받는 길을 택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153-154)

(이익주) 그랬을 겁니다. 무신 전체는 아니고, 최영을 비롯한 몇몇 사람의 문제인데, 공민왕 대에는 홍건적과 왜구 등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변란이 계속되면서 무장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그런데도 공민왕은 이들이 더는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하고, 개혁을 통해 제거하려고 했어요. 신돈이 개혁을 시행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최영을 경주의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내보낸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 관한 불만이 최영을 비롯한 무장들 사이에는 계속 있었는데,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이 즉위하자 기회를 잡은 거죠. 개혁의 흐름을 중단하게 하고 그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면에서 이인임과 최영이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66)

(신벙주) 이인임 세력은 권력을 휘둘러 뇌물을 수수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제적으로 뺏는 일들을 자행해요. 혹시 수정목이라는 나무 들어 봤어요? 물푸레나무예요. 이 나무가 아주 단단합니다. 야구방망이로 만들어도 되는 나무인데, 이때 이인임의 수하들이 수정목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토기를 내놓으라며 때렸죠. 그러다 보니까 몽둥이가 국가에서 발급한 공문보다도 더 효과가 크다고 해서 수정목 공문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정말 공포의 대상이 됐다는 거죠.


(206)

(이익주) 그래서 왜구는 단순히 고려와 일본의 관계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가 모두 관련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화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1388년에 중국에서 원과 명이 교체되는데, 공교롭게도 139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같은 해에 일본에서 북조와 남조가 통합됩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왕조 교체에 준하는 변화들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관점에서 왜구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한 번쯤 가져 볼 필요가 있죠.


(226)

(이익주) 그렇죠. 이성계가 이렇게 강력하고 길게 자기 얘기를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입니다. 이성계가 군인에서 정치가로 점차 변신하는 모습이 보이죠.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며 내놓은 주장을 흔히 사불가론(四不可論)’이라고 하는데, 그중에서 여름철에 군대를 발해서는 안 된다.”요동에 군대를 보냈을 때 왜구의 공격이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장마철에 전염병이 돌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세 가지는 군인으로서의 판단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맨 처음에 제시한 이유는 이소역대(以小逆大)’라 해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면 안 된다입니다. 이 말은 성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명분론입니다. 군인인 이성계가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므로, 이때 정몽주나 정도전 같은 신흥 사대부들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해석됩니다.


(246)

(이익주) 저는 최영이나 이성계 모두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영에게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최영은 개인적으로는 참 청렴한 사람이었지만, 자기 개인의 청렴함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랬기 때문에 최영 개인은 청렴했지만, 공민왕 때는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고, 우왕 때는 이인임의 불법행위를 눈감아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막지 못한 거죠. 어쨌든 최영의 죽음으로 고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사라집니다. 이때부터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고려 왕조로서는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이 된 최영에게 국제적인 감각과 사회 변화에 관한 안목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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