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

, 손은 인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손 덕분에 우리는 정교한 도구를 만들고 환경을 적절히 활용하고 동굴 곰이나 사자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친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뇌는 손과 함께 진화했다. 손짓은 뇌의 발달을 촉진했다. 어쩌면 손의 움직임이 인간의 인지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활성화하는 주요 요인이었고, 정교한 언어 능력은 그 후에 발달했는지도 모른다. 뇌와 상당 부분 역시 손과 관련되어 있다. 손을 잘 조작하는 법을 파악하려면 뇌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


(113)

1400년대 초 언젠가, 사카키라는 이름의 유명한 우즈베키스탄 시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한 몸으로 계속 움직이려고 애쓰는 절름발이 개미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젊은이를 소재로 독특한 시를 썼다. 마침 시 속의 젊은이도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용맹한 전사를 중시하는 문화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젊은이는 용기 있는 작은 개미에게 크게 감동한 나머지 자신도 장애를 딛고 끝까지 해내겠다고 다짐하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시 속 젊은이는 세계적으로 위대하고 악명 높은 정복자 티무르였다.


(139)

에릭 에릭슨 같은 일부 프로이트 학자들은 루터의 가득 찬 장이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까지 했다. , 화가 나 있고 고통스러워하며 변비로 고생하던 남자가 가톨릭의 권위에 맞서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보니 당시에 현대의 변비약이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오늘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널리 신뢰받지는 못하지만, 심리적인 요인이 교감 신경계를 제약한다는 것은, 어느 학술 논문에 따르면 그래서 결장이 더 길고 넓어지고 건조하고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이다.


(141)

물론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이들 중에는 장 칼뱅과 울리히 츠빙글리를 비롯한 다른 핵심 창시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때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탄생하기에 전반적으로 적절한 시기였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루터는 종교개혁가들 중 가장 주목받았고 분명 가장 거침없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특히 자신의 장 활동에 관련하여 격렬한 불만을 자주 쏟아냈다. 그렇다. 1517년에 그가 얻은 종교적 깨달음은 변기에 앉아 입을 삐죽이며 찡그린 채 생각에 잠긴 수많은 경험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하지만 나는 악마를 물리칠 때 종종 방귀를 뀌어 쫓아 버린다라고 하는 등 설교, 연설, 편지에서 배설물을 언급할 때 전혀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221-222)

배역에 충실한 여느 충실한 할리우드 스타들처럼 바이런은 다이어트를 했는데, 체중을 줄이기 위해 설사약까지 사용했다. (그는 통통한 편이라 필사적이었다.) 한편, 그는 매우 넓고 다양한 팬층을 계속 끌어들였다. 어딘가 어두우면서도 잘 생긴, 전형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바이런은 예상대로 여성팬이 아주 많았는데, 이들 중 다수가 그에게 사인을 받거나 그의 머리카락 뭉치를 가지려고 안달했고 무엇보다 은밀하고 낭만적인 밀회를 원했는데…… 바이런은 이런 식의 탐닉을 꺼리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였고, 어느 정부의 말에 따르면 미치도록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나쁘고 끔찍한남자였다.


(237)

일부 신경학자들은 터브먼의 부상 후에 나타난 결과를 후천성 서번트 증후군으로 본다. 이는 뇌의 외상으로 특별한 재능이 유발되는 증상이다. 서번트 증후군 자체는 자폐증을 비롯한 선천적 소아가 신경 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발생하며 빈도가 100만 명 중에 한 명 정도로 매우 드물다. 후천적으로 갑자기 서번트 증후군이 발생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지금까지 약 50건의 사례만 기록되었다. 이는 대개 외상성 뇌 손상 이후에 발생하지만 뇌졸중 이후에 발생하기도 한다. 위스콘신 의학회가 인용한, 증거가 잘 정리된 사례는 열 살 난 소년이 야구공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에 발생했다. 의식을 찾은 소년은 달라진 뇌 덕분에 몇 가지 새롭고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중 하나로, 소년은 달력과 관련된 계산을 갑자기 놀라울 정도로 쉽게, 그야말로 몇 초 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달력을 보지 않고도 주어진 날짜에 해당하는 요일을 빠르게 말할 수 있었다.


(249)

벨은 소리를 계속 연구했다. 그는 청력 측정기를 발명했고 세상에는 청력을 측정할 수 있는 최초의 수단이 생겼다. 또한 소리의 수준을 측정하는 단위로 데시벨(decibel)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은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햇빛을 소리로 바꾸는 방법을 개발하여 광선 전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실험에 성공하자 아버지에게 햇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는데, 이는 무선 통신과 광섬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83)

레닌은 사망 직전에 집단 지도력을 촉구하는 스탈린을 당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권고하는 유서를 썼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 그중에서도 스탈린은 이를 감추었다. 스탈린은 주로 여론 조작용 재판과 처형을 통해 레닌 사후에 집단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사진을 조작하고 초창기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잘못된 사실을) 강조하는 영웅적인 그림을 새로 그리게 하여, 대중이 머릿속에서 그와 고인이 된 존경받는 지도자를 서로 연관 짓도록 했다. 이뿐만 아니라 죽어가던 레닌이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데도 그 뒤를 이어 곧 독재자가 된 스탈린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레닌을 숭배하게 만드는 것은 스탈린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에게 필요한 것은 그 숭배가 지속되도록 레닌을 부활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좀처럼 제기된 적이 없는 정치적 의문이 제기되었다. 죽은 지도자의 피부를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유지할 것인가?


(308)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뇌 연구를 통해 천재성의 기원이 밝혀졌을까?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연구자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생각한다. 1999년 맥매스터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실제 아인슈타인의 뇌는 평균보다 작았지만 두정엽 같은 특정 부분은 평균보다 컸고 더 많이 발달해 있었다. 그 후 10년 넘게 지난 뒤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의 연구진은 그의 뇌가 신경세포 대비 신경교세포 비율이 높았고 모든 신경교세포끼리 매우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쉽게 설명하자면, 아인슈타인은 인지 능력이 높아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쉽게 창의적인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추측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뇌구조가 지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이해하는 여정에서 시작점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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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럼 최남선의 경우는 어떨까? 최남선은 최린과 근거리에서 독립운동에 긴밀히 관여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뒷걸음치는 모습을 보였다. 구한국 관료들을 민족대표로 내세우려는 시도가 실팼을 때, 최린은 자신을 포함하여 최남선과 송진우가 나서면 되지 않겠냐고 호기롭게 얘기했다. 하지만 최남선은 거절했다. 학자의 삶을 유지하는 게 꿈이니 정치운동의 표면에는 나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린이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부착했을 때에도 최남선은 선언서를 쓰긴 하겠지만 작성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최린이 져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안 한용운이 책임질 수 없다는 최남선에게 어떻게 선언서를 맡길 수 있느냐며 차라리 자신이 짓겠다고 했다. 최린은 최남선에게 계속 맡길 것을 고집하여 한용운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밀했던 사이이기에 여러모로 속상했을 것이다.


(65)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날의 결정은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남았다. 그들의 결정은 끝까지 이해받지 못했고, 격렬한 불협화음을 낳았다. 민족대표 33인은 민족대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학생과 시민 앞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대규모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한정했다. 독립을 선언한 이후 구체적으로 진행될 독립운동에서 직접 지도하는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기획한 독립운동에서 스스로 이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탈인지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68-69)

민족대표들이 세운 독립운동 계획은 완전하지 않았다. 선언서를 기초하고, 선언서를 배포하고, 조직의 힘으로 함께할 사람들을 모아 가능한 몇몇 지역의 시위를 조직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었다. 많은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독립을 선언한 후 다음 계획도 치밀하지 않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 수정할 계획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곳곳이 비어 있었고, 곳곳이 허점투성이였다. 그러나 결핍은 참여를 낳았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부족함을 느낀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스스로 빈틈을 메워나갔다. 독립운동은 그렇게 민족대표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92)

우리를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16억의 양심이 우리를 후원한다. 우리를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2천만의 심인(心刃, 마음 속 칼날)은 우리의 무기다. 아아, 세계는 바야흐로 정의와 인도 위에 일대 부활을 수행하려 한다. 조선과 조선인은 이제야 생존과 존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지니고 있다. 거듭 말하겠다. 시대는 개화하고 있고 조선인은 자각했다고. - <독립통고문>


(120)

손병희 등이 파고다공원에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심판사의 질문에 강기덕이 답했다.

마음에 불평이 있었소.”


(136-137)

청주경찰서 경부 이성근(33)은 인종익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체포한 지 몇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기고 매달아도 묵묵부답이었다. 부풀어오른 눈꺼풀을 들어올릴 때 간혹 보이는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 쉬이 비밀을 털어놓을 리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그였다.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았다. 두드리고 매달다가 살살 어르고 달래면 결국 어느 순간 봇물 터지듯 없는 것까지 털어놓는 게 인간이라고, 여태껏 그렇지 않은 인간은 본 적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 단지 시간이 남들보다 좀더 오래 걸릴 뿐, 인종익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그였다.


(174)

동혁이 예심판사 앞에 섰다. 예심판사가 묻는다.

피고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

동혁이 답했다.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219)

예심판사가 김백평에게 물었다.

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된다고 생각했나?”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르며 조선인이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발표하면, 일본 정보나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독립을 희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학생이니 다른 것은 모릅니다. 다만 조선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가 일본과 병합되었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원래대로 독립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243-244)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그랬다. 그 큰 힘이 있어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 아무리 큰 폭력과 억압이 있어도 그 힘을 누를 수 있는 건 고작 10, 20년뿐이었다.

심대섭은 그 큰 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만세 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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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중국인들은 낮의 하늘이 밤의 하늘이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낮의 하늘은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던 거야. 아침엔 붉었다가 낮에는 파랬다가 저녁엔 다시 붉어지잖아? 흐린 날에는 회색이고. 하지만 밤은 늘 검지. 그리고 중국인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점을 쳤기 때문에 밤하늘이 더 의미가 있었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인들이 옳았어. 검고 어두운 하늘이 진실에 가깝지. 낮에는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오히려 우주의 본모습이 가려진 거고. 지금도 우주 관측은 깊은 산속의 천문대에서 밤에 하잖니.”


(19-20)

중국인들이 이 세계를 커다란 집이라고 이해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 집에 너무 거대하고 휑하다는 걸 깨달은 거야. 나는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20세기 후반부터 과학자들은 인간의 뇌를 곧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지. 두려움이나 기쁨 같은 특정한 감정을 관장하는 어떤 부위가 있을 거고. 그런 것을 찾아내면 감정의 비밀도 쉽게 밝혀질 거라고 믿었던 거야. 그러나 알면 알수록 그게 간단치 않다는 게 밝혀졌을 뿐이야. 유전자 지도만 파악하면 인간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만용과도 일맥상통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지. 아무리 간단한 감정이라도 그걸 느낄 때는 뇌와 몸의 모든 부분이 함께 작용해야 돼.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초조해지고 화가 나지? 소화기관들이 뇌와 신호를 주고받기 때문이거든. 인간의 뇌는 마치 우주와 같아서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고 있어. 철이 네 뇌는 이제 막 생겨나고 있는 우주라고 보면 될 거야. 이해하기 어려운 게 당연해. 너는 네 마음과 감정을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했어. 잘 모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앞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하다보면 더 진실하고 깊어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135)

그냥 얼음과 물일 뿐인데, 왜 이게 이렇게 가슴 시리게 예쁜 걸까? 물이란 게 수소와 산소 분자가 결합한 물질에 불과하잖아.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것을 아름답게 느끼도록 만들어진 걸까?”


(151)

제 생각은 달라요. 이 우주에 의식을 가진 존재는 정말 정말 드물어요. 비록 기계지만 민이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 감각과 지각을 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어요. 고통도 느꼈지만 희망도 품었죠.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의식이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드물고 귀한 일이고, 그 의식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는 것도 극히 짧은 시간이기 때문에, 의식이 있는 동안 존재는 살아 있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152)

의식이 있는 존재는 돌멩이나 버섯과 달리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요. 다른 존재의 고통에도 공감할 수 있고, 우주의 역사나 기원에 대해 알아갈 수도 있어요. 자기에게 고통을 준 존재들을 용서할 수 있고, 그 고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곰곰이 되새긴 다음, 그런 일이 자신에게든,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든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어요.”


(160)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 자아는 늘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할 뿐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그냥 흘려보내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기계의 세상에서는 자아가 사라지고 과거와 미래도 의미를 잃습니다.”


(203)

인간은 지독한 종이야.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동원해 닥쳐온 시련과 맞서 싸웠을 때만, 그렇게 했는데도 끝내 실패했을 때만 비로소 끝이라는 걸 받아들여.


(268)

어쨌든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른바 인간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에서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거나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우리 없이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쾌락을 제공하였고, 그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번거로운 번식의 충동과 압력에서 해방되어 일종의 환각 상태, 가상세계에서 살아갔다. 오래전 중국의 도가에서 꿈꾸었던 삶이 인간에게 도래한 것이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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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봉건(封建)이라 할 때 봉()토지를 하사하다란 뜻이랍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다란 뜻인데 즉, (또는 황제)이 일가친척에게 지방의 땅을 나눠주고 그 친인척들이 그곳에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어 살라는 뜻이랍니다. ? 이미 나라가 있는데 나라를 또 만들라고요? 독립하란 말인가요? 아닙니다. ‘큰 나라가 있고 그 안에 조그만 나라를 만들어 살라는 뜻이랍니다. 실제 이렇게 왕에게 지방 부동산을 받고 나간 친인척들을 제후(諸侯)라고 불렀고 그 꼬마 나라를 제후국(諸侯國)이라고 불렀는데 꼬박꼬박 수도의 왕에게 세금을 바치고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지원군만 보내준다면 사실상 내정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독립국 행세를 할 수 있었답니다. 당시 교통도 발달 안 된 데다 왕권도 강력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그 넓은 땅의 왕국을 유지할 수 있던 유일한 방법이 봉건제도였어요. ‘믿을 건 친척밖에 없다란 생각에서 시작된 이 봉건제도 덕분에 주나라는 무려 790년 동안 유지가 됩니다.


(62-63)

당시 중국도 마찬가지였어요. 춘추전축시대란 헬게이트가 열리자 이 혼란을 해결할 해답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상과 사상자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죠. 그중 원톱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공자(孔子)였어요. 공자는 인()과 예(), 어짐과 예절을 강조했고 묵자(墨子, 밥 묵자, 아닙니다.)란 어르신은 평화를 강조헸어요. 그리고 노자(老子)란 양반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를 외쳤답니다. 하여간 춘추전국시대의 각 나라들은 이런 사상 중 하나를 자기 나라 통치 이념으로  택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요. 지금 중국의 변두리인 산시성에 위치했던 진()나라는 우리는 , , 자연, 평화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는 법()이 최고다!”라면서 법으로 강력하게 나나를 다스렸어요. 결과적으로 그것이 중국을 통일시킨 원동력이 되었고요.


(140)

아시다시피 인도에는 카스트라고 4개의 신분 제도가 있지요? 수천 년 동안 뿌리를 내려 오늘날까지도 카스트 제도 때문에 벌어지는 신분 제도를 철저히 거부했어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란 철칙이 있었지요. 그 말은? 맞습이다. 불교틑 카스트의 나라인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또 다른 정착지를 찾아 나섰는데 그중 하나가 중국이었어요.


(144)

북조 역사에선 딱 한 인물만 기억하면 돼요. 바로 북쪽을 통일한 선비족의 나라 북위 효문제(孝文帝)’란 황제랍니다. 471년에 북경에 북위의 황제가 되는데요. 오랑캐 유목 민족 황제였지만 한족의 오리지널 중국 문화를 너무나 사랑했던 황제였답니다. 그래서 선비족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한족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북위의 수도도 북쪽 선비족의 근거지에서 지금까지 중국 역사의 중심지인 낙양으로 옮겨버려요. 부산 사람이 서울을 너무 좋아해서 부산 사투리도 못 쓰게 하고 동네 이름도 광안리에서 압구정으로 바꿔버리고 아예 부산을 버리고 서울로 이사를 온 격이조.


(162-163)

그때 아버지 이연은? 한가로이 호수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답니다. 이세민은 측근 부하를 이연에게 보내서 이 사실을 알랍니다. 아버지 이연은 깜짝 놀랐지만 할 수 있는 하나도 없었어요. 한순간에 당나라 권력이 이연에서 이세민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태자까지 궁 안에서 화살로 죽여버리는 인간이니 아버지라고 봐줄까요? 겁에 질린 이연은 이세민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자기는 스스로 쫓겨납니다.” 사실상 당나라는 애초부터 이연이 세운 나라라기보다 이세민이 세운 나라라고 해야 해요. 형제를 죽이고 또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왕이 된 조선 태종 이방원과 거의 싱크로율 100%랍니다. 이세민은 당나라 태종, 즉 당태종이 됩니다. , 그러고 보니 이방원도 태종이고, 이세민도 태종이네요! 하여간 서기 626년의 일이었습니다.


(206)

금나라가 열심히 남송을 괴롭히고 있을 때 금나라 북쪽 초원 지대에 또 다른 유목 민족이 힘을 키우고 있었어요. 바로 몽골족이었답니다. ‘몽고(蒙古)’란 한자 표기는 중국 한족이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표현이랍니다. ‘()’어리석다란 뜻이고 ()’오래되다란 뜻이에요. , ‘어리석고 구닥다리 민족이란 뜻으로 중국 한족이 의도적으로 만든 표현입니다. 몽골족은 이 중국식 한자 표현 몽고를 굉장히 싫어해요. 이제부터라도 몽골이라고 부르는 건 어떨까요?


(224)

그러나 이렇게 굶어 죽는 건 다 몽골족 때문이다란 생각에 당시 한창 송나라 부활 운동을 벌이던 홍건적에 합류를 해요. 그의 나이 25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꿔요. ‘주원장(朱元璋)’으로요. ()는 주살(誅殺)하다, 죽여 없애다()’와 발음이 같죠. 그리고 원()은 당연히 원나라를 뜻했어요. 마지막으로 장()인재라는 뜻이거든요. , ‘원나라를 죽여 없애는 인재란 뜻입니다. 얼마나 원나라에 대한 증오가 끓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233-234)

유럽이 대항해의 시대를 시작해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1492년이니까 거의 100년 전에 중국은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는 건데 왜 중국은 유럽과 달리 세계 제패를 못했을까요? 항해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스페인과 같은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 건설 또는 무역이 항해의 목적이었던 반면에 명나라의 항해는 우리 중국 짱이지! 무릎 꿇어!”라는 힘의 과시가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힘이 이 정도야!”란 것을 보여준 후 더 이상 항해를 하지 않았어요. 전 세계에 그냥 힘 과시용 순회공연한 번 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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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김한은 총독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오 그 밖의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도 이 같은 총독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을 언급했다. 그는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119)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쇠락하게 된 이유가 양반 의병장의 독단 탓이었음이 명백했다. 의병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했던 함경도 부대를 패퇴시킨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의 양반 출신 의병장이었다. 오히려 적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홍범도는 참았다. 지도자 간의 분쟁은 민족해방운동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연추 주민들의 여론이 그에게 위안을 줬다. ‘이범윤 죽일 놈이라고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160)

<독일 스파이> 혐의란 무엇인가? 이동휘가 그 혐의를 받아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관헌에게 체포됐다고 한다. 1917 5~6월의 일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으로서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시체제였다. <독일 스파이> 혐의는 교전 중이던 적대국가 독일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그해 4월의 레닌을 연상하게 한다. 2월혁명이 발발하자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의 지원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페프트로그라드에 귀환한 레닌은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또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노선을 천명했다. 그렇게 급진적인 반정부 운동을 지휘하던 레닌은 반대파에 의해 독일 스파이로 공격받았다.


(245)

2017년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연이어 출간되더니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봄에 <코레예바의 눈물>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수상했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썼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녀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형상화한 <세 여자>가 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부상하다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미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에 신문에 연재 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바로 그것이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 자리를 점할 것이다.


(314)

이데올로기적 외압 조항은 역사적 진실에 배치된다. 독립유공자 여부는 오직 순수하게 독립운동 공적 유무만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1945 8.15 이전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적이 있는지 여부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도 사후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외압은 배제되어 있다.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 8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가 애국지사다. 일제로 인해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이다.


(390-391)

옥중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이 질문에 그(김중한)는 자신의 독서와 사유 체험에 관해 얘기했다. 심리, 윤리, 문학, 생물학 등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는데, 특히 원시 인류의 생활 상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가 한다. 그때를 억압과 차별, 계급, 착취가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의 시기로 상정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도 주목할 만한다. 인생의 본질, 해방, 삶의 가치, 자기 파멸, 비애, 전투 등의 어휘가 그의 내면의식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이었다.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답했다. 인생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해방을 위한 투쟁이되 승리를 기약할 없는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비애감에 굴복되지 않고 계속 전투를 해나가겠다고. 이어서 좀 더 사색을 하고 좀 더 연구를 하여, 이제부터는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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