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본적인 것들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보람만 강요하는 행위는 문제를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람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일을 미화함으로써 당연한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비참한 현실을 눈속임하고 있다.

(20)

야근이란 계약으로 정해진 시간을 넘겨서 일한다는 의미다. ,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

이 예외적인 것이 가끔일어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야근은 예외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매일같이야근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나는 입사하고서 야근하지 않고 돌아간 날이 단 하루도 없어. 칼퇴근은 도시 전설이야라며 자신의 비참한 근무 환경이 마치 어엿한 훈장이라도 되는 듯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을 보면서 참 안쓰러웠던 적이 있다.

(51)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지 않아도 좋다. 회사를 옮겨다니는 것 또한 하나의 생활 방식이다. 딴 길로 새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 곧바로 회사에 취직해 그대로 정년까지 성실하게 일하는 삶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인생의 레일이 딱 하나뿐이고, 그 레일을 벗어났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어려워진다면 이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도상 설계 실수다.

(73)

만약 회사없이 자기 인생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회사에 지나치게 의견하고 있는 것이다.애사심을 갖는 것이야 괜찮지만, 기댈 속이 사라졌을 때 자신이 무너져내리지는 않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86)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를 놓고 다툰다.”월급을 받는 이상, 책임을 지고 일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정말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느라 분주하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책임이란 단어를 아주 어중간하고 모호하게 써먹고 있다.

책임의 범위를 정확히 설정하면 누구 책임인지를 두고 다툴 일도 줄어들고 무한한 책임을 짊어질 일도 사라진다. 각자의 책임 범위를 넘어선 일에는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을 수도 있다. , 자신의 책임 범위에 속한 일은 프로로서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이처럼 책임의 범위를 정확히 정하는 것은 일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88)

아무리 경영자 마인드로 일해도 종업원은 어디까지나 종업원, 어차피 고용된 처지다. 경영자 마인드를 갖춰 경영자에 버금갈 정도로 일한다 하더라도 월급은 당연히 고용된 처지에 맞는 수준으로 받는다. 월급은 고용자 수순인데 일은 경영자와 똑 같은 마음가짐으로 하라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을 하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종업원이 경영자 시선을 갖고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애당초 경영자는 왜 있는가? 설마 고용한 종업원에게 할 일을 전부 떠맡기고 경영자는 놀러 다니려는 속셈일까? 그렇다면 어디 일할 마음이 들겠는가.

(98)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다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사회와의 연관을 통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초등학교 직업교육에서 자주 듣는 말이야. 직업교육의 핵심인 현장 방문, 직업 체험 때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나 사회공헌같은 측면만 강조한다. ‘일에 보람을 느끼며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나 이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돈 이외의 기쁨을 얻는 어른들의 모습을 잔뜩 보여주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한다.

(137)

만약 좋아하는 일을 내 직업으로 삼았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취미로 하는 것과 업무로 하는 것에는 당연히 차이가 있다. 회사의 방침이나 고객의 사정에 맞춰 자기 의사와 반대되는 방식을 억지로 고수해야만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탓에 적절하게 맺고 끊지 못해 괴로워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141)

일을 하다보면 너무 괴로워서 전부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궁지에 몰릴 때가 있다. “그럴 때야말로 성장할 기회야. 절대 도망쳐서는 안 돼.”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괴롭다못해 이제 한계다 싶을 때는 무리하지 말고 도망쳐야 한다. 이것은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리는 것과는 다르다.

보통 도망친다는 행위를 꼴불견에 형편없는 짓이라고 여기는데, 도망치는 행위는 사실 일종의 안정장치. 괴로워서 더는 무리라고 느끼는 상황이 오래 이어지면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괴로워도 도망치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들 뒤에는 괴로운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매년 일 때문에 수많은 직장인의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너무도 연약해지는 존재다.

(166~167)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가기준이 아니라 나의 평가기준이다. 세상의 평가가 아무리 높더라도 나의 평가기준에 비췄을 때 높이 평가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괜히 거기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세상에서 낮은 평가를 받더라도 나의 평가기준에 비췄을 때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내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살아줄 수 없다. 내 행복은 나의 주관으로 판단하면 된다. 블랙 기업이나 좀비형 사축은 우리에게 가치관을 억지로 강요하려 할 거시다. 그런 타인의 가치관 따위는 무시하고 나 자신의 가치관에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괴롭다고 생각하면 그건 괴로운 것이다.

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무의미한 것이다.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재미없는 것이다.

내게 가치관을 강요하는 회사도 상사도 동료도 어차피 타인다.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는 인생의 최대 낭비다. 자신의 가치관에 솔직해지자. 좀더 나 자신을 위해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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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세기 28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日軍)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다. 그 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77)

, 불로하, 말 없는 강, 안으로 안으로 모든 것을 가라앉혀 비록 그 바닥에서는 물결이 거세어도 수면은 언제나 잔잔히 흐르기만 하는 강, …… 너 마르지 않고 너 나타나지 않는 그 강심을 나는 여기서 배우리라.”

어느새 이국의 태양은 머리 위에 올랐고 강물 위엔 쏟아진 햇볕이 물결을 덮으며 웅장한 음악이 강 밑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우리의 소망과 새로운 각오를 위해 강은 흘렀다.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군복을 입었다.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새 결의를 다짐했다. 모두 새사람이 되었다. 진정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조국 광복, 이 깊고 긴 강처럼, 크고 깊은 긴 일을 마침내 나는 찾아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떳떳한 조국의 아들이 다시 되었다. 기쁨과 감격은 이 아침을 신비롭게 하였다.

우리는 동북쪽의 조국을 향하여 경건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글대는 태양을 마주하고 가로로 한 줄을 만들어 서서 이 가슴의 감격을 조국에 고하고자 했다. 김준엽 동지, 윤경빈 동지, 김영록 동지, 홍석훈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차례로 서서 조국을 향한 배례를 한 것이다.

(188)

밤이슬에 젖고 땀에 젖으며 또 새벽서리에 젖는, 청색 무명 군복 한 벌은 충칭을 찾아가는 긴긴 수천 리 길 바람에 마르곤 하였다.

조국이 무엇이기에 이 길을 가는 것이냐.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우리의 그 줄기찬 의지에 몇 번이고 우리는 스스로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무의식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아닐진대,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우리의 신념은 더욱더 굳어져야 했다. 낮이면 폴싹폴싹 일어나는 황토의 흙먼지, 밤이면 마치 흔들리는 등불처럼 우리의 발걸음은 줄기찬 하나의 신앙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만의 의사가 아닌, 보다 큰 어떤 의사의 발현만 같았다.

 

(223)

, 조국 없는 설움이여.

우리의 조상이 못난 때문에 우리가 이 설원의 심야를 떨며 지새워야 하는가. 아니, 조금도 조상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돌린다는 것은 나의 비겁이다.

나의 조상은 또 조상을 가졌고, 그 조상은 또 못난 조상을 가졌다. 앞으로도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어야 하겠는가?

무수한 밤별이 울어주는 듯, 나의 눈에 들어오는 별빛이 어른거렸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입술을 깨물고 나는 폭발하려는 나의 가습을 막아야만 했다.

치미는 분노와 막아야 하는 입술의 의지가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나는 혁명적인 나로 나 스스로를 지향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파촉령의 설원에서 내 스스로에게 맹세한 이 결의를 위해 나는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나의 신념, 차디찬 결의는 이때부터 나를 지배했다.

 

(226)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아픔이 정강이에서 허벅지로 기어올랐다.

육중한 대지가 기울어, 우리가 그 속에 깔린 듯이 이 밤을 머리에 이고, 초침을 마음속으로 세고 있다.

, 이 은세계의 시련은 나에게 신념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야. 나의 신념이, 나의 생활의 철학이 이제야 생성되기 위해 나는 이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냐?

나는 밤하늘의 원망을 짓씹으며 어서 날이 새어 그 밝은 태양이 내 가습에 떨어지길 빌었다.

이 밤에 우리가 동사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저 떠오르는 정열의 햇덩이를 가슴에 삼키고 이 설원을 가로 달려가리라.

가리라. 가서 또다시 우리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이 몸에 불을 붙이리라. 그것이 혁명이면 이 붉은 정열을 혁명에 태우리라.

아름다운 희망이 동녘을 트면서 우리에게 기어왔다.

, 죽지 않고 살았구나!

 

(263)

길지 아니한 단 10여 일 동안, 그동안 우리의 눈에 비친 임정은 결코 우리가 사모하던 그 임정과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 본 것이라면 용서하십시오. 진정으로 여러 선배 선생님께서 이곳 이 땅에서 임정을 사랑하고 있다고 저희에게 생각되지 아니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과 탐욕을 내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탈출해서 기나긴 행군으로 오면서 그리던 임정은 모두 일치단결되어 있는 완전한 애국투쟁의 근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그 단결된 힘으로 오직 잃은 나라 찾는 데만 목숨 바쳐 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 그 기대는 지나친 하나의 환상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누가 준 것입니까?

조국을 잃고 망명한 입장에서 임정을 세웠기에 임정이 하는 일에는 파쟁이 개재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것은 저희가 잘못 본 것입니까? 아니면 사실입니까?

 

(341)

나는 차례로 이들의 표정을 눈여겨보았으나, 한평생 생애를 다 바쳐 투사가 되신 그 위엄 앞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수송기의 소음이 나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굳어지는 안면근육의 움직임으로 무쇠 같은 의지와 신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더 무슨 말을 나누리오. 오직 조국의 앞날과 조국의 땅이 한 치씩 한 치씩 다가오는 그 시공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요란한 심장의 고동을 좀 더 강하게 느끼면서 그 어떤 희열을 체감하는 것, 이것이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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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그런데, 여담이지만, 지옥이라는 것에 대해 재미있는 정의를 내린 시인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으로, 브렌덴 케널리라는 아일랜드 사람인데, 지금도 생존해 있습니다. 이 시인이 쓴 시에 지옥이란 경이(驚異)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그냥 당셩언 것으로 여긴다든지, 환한 햇살 속에 익어가는 옥수수밭을 보면서도 경이의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 게 바로 지옥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인은 그런 경이의 감정이 사라진 상태, 지옥이란 다른 말로 하면 권력욕망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이로움이 죽을 때, 권력(욕망)이 태어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인간이 세상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저 시인에 따르면, 인간이 권력을 탐하고 남을 지배하려거나 남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은 그의 정신과 영혼이 병들었거나 메말라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간은 사람 간의 관계(우정)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혹은 햇빛과 바람과 구름의 은혜로 익어가는 곡식을 보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자연의 운행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인지 모르는 지옥에서 산다는 것이죠. 참으로 탁월한 성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

급박하다는 것은 오늘의 정치상황 때문입니다. 시간은 빠르게 가는데,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 생존의 토대 자체가 붕괴한다는 경고가 끊임없이 나오는데도, 세계의 정치는 마냥 이 사태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닙니다. 최근의 미국 대통령 선거판을 보면 미국식 민주주의는 완전히 끝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기본적 교양도 상식도 없어 보이는 부동산 부호가 갑자기 나타나서 저렇게 대중들의 인기를 끈느 것을 보고 소위 엘리트 지식인들은 포퓰리즘의 대두를 걱정하고 있지만, 결국은 미국식 민주주의가 끝났다는 신호로 보는 게 옳습니다. 그동안 지배층이 정당정치니 민주주의니 하는 가면을 쓰고 정치랍시고 해온 게 실은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게 전부였다는 것을 깨달은 대중들의 분노가 표출됐다고 봐야죠. 소위 엘리트들에 대한 민중의 반란이라고 봐야죠.

 

(47)

이 두 가지 용어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활성단층은 지구의 40억 년 역사 중 180만 년전에 시작된 제4기에 형성된 단층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활성단층은 최근 ‘180만 년 이내에 한 번 이상 움직인 단층을 의미한다. 활동성단증의 정의는 두 가지이다. ‘50만 년 이내에 두 번 이상 움직인 단층 또는 3 5천 년 이내에 한 번 이상 움직인 단층으로 정의된다. 언뜻 보면 두 가지 정의가 또는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만족해도 활동성단층이 되므로 더 보수적인 기준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꼼수가 하나 자리 잡고 있다. ‘50만 년 이내에 두 번 이상 움직인 단층이라는 개념이 입증하기 매우 힘들다고 한다. 이미 움직인 단층에서 또 한번의 움직임이 있을 경우 단층면이 바스러지기 때문에 그 단층이 한 번 움직인 것인지 두 번 이상 움직인 것인 확인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질학자들의 설명이다. 따라서 활동성단층의 정의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은 ‘3 5천 년 이내에 한 번 이상 움직인 단층이라는 정의뿐이다. 다시 말해서 핵산업계는 (180만 년 내에 움직인) 활성단층이 아니라 (3 5천 년 내에 움직인) 활동성단층에서만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53)

9 12일 경주지진 이후 440회가 넘는 여진이 2주째 지속되고 있다. 많은 경주시민들은 반복되는 지진에 지쳐 있다. 친척 집에 피신을 한 사람도 많다. 여기에 원전사고의 불안감이 더해지고 있다. 진도 6.5에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원전이라지만 설계대로 시공되었는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과연 그 성능을 유지하고 있는지, 조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규모 5.8의 지진이 월성원전이 있는 경주에서 발생하였다. 또한 관련 정보는 투명하게 제공되지 않는다. 원자력계는 벌써 이번 지진의 진원지가 양산단층이 아닐 가능성과 활동성단층이 아닐 가능성을 주장하고 했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나는 이 정도의 사실들 앞에서 우리 국민이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대하여 충분이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63)

그럼에도 남북한 사이의 우발적 상황이 전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존재한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호전적 언행에 맞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마찬가지의 강경한 언사가 그런 우려를 키운다. 미국 조야의 전문가들도 박근혜의 발언이 북한의 체제 붕괴라는 소망적 사고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김정은 뿐만 아니라 박근혜 역시 불안한 존재로 여긴다. 킬리포니아 몬테레이의 미들버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제프리 루이스 연구원은 북한의 9월 핵실험 직후 인터뷰에서, 한국의 일부 관리들이 북한 지도부 희망을 품고 있는 것 같다고 우혀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국의 일부 정책결정자들이 김정은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74)

끝으로 10년 가까이 이어진 한국 보수정권의 역할을 짚고 싶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조그만 더 밀면 쓰러진다는 이른바 북한 붕괴론에 사로잡혀 미국과 북한의 대화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애를 썼다. 20여 년 전과 비교할 때, 한국정부가 미 의회와 싱크탱크에 쓰는 돈 등을 통해 북한문제와 관련해 워싱톤에서 행사는 영향력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오바마 정부는 조지 W. 부시와 노무현 정권이 종종 이견을 빚는 것을 본 뒤에 한국이 반대하는 정책은 하지 않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 테두리 내에서 대북정책을 폈다. 오바마 재임 중 북한과 딱 한 번 시도한 2.29 합의 때에도 남북한이 먼저 만나는 모양새를 취하게 해줌으로써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정부의 입장에 반하면 연구지원금이 행사 협찬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 전문가들도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비난을 자제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이 통일대박론을 펴고 그런 연구에 활발한 지원을 하면서 어떻게 통일에 이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빠진 채, ‘통일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춘 수백만 달러짜리 연구 보고서들이 넘쳐나게 되었다.

 

(95)

한국의 정치 현실을 보고 있으면 절로 나온다. 이건 뭐 합리적이지도 않고 최소한의 지켜야할 예의도 보이지 않는다. 견제되지 않는 권력이 늘 그러하듯이 기업인들의 비리는 사면되고 정치인들의 부패도 은폐된다. 권력의 심각한 부패만큼 걱정스러운 건 시민들의 둔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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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당연히 최도사는 거절할 리가 없고, 우리는 초가을 볕이 푸짐한 평상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투명한 가을 햇살이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서울에서 가져온 안주용 과자 몇 개를 내놓고 낮술을 마시니 골짜기 저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그래, 바로 이게 지리산의 맛이야하는 생각에 흐뭇한데, 시인이 한 김 올라 완성된 초록색 호박찜에 빨간 고추 고명을 얹어 내밀었다.

(81)

버들치 시인은 술잔을 쥐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내가 왜 버들치 시인을 좋아하는지 안다. 답답해하면서 왜 그를 보면 존경을 표하는지 안다. 그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고 남의 것을 남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어지러운 시절에 그건 너무나 귀한 덕목이었다.

(107)

나는 공항에서 신문에 실린 그의 기사를 보았다.

한국 작가 회의의 젊은 문인들로 구성된 젊은작가포럼(위원장 임경섭)은 박남준 시인이 그 삶과 문학을 통해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치열한 고뇌와 성찰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서 이 상을 준다고 밝혔다.”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치열한 고뇌와 성찰. 그 욕망에서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는 빠지리라. ‘그래도 좋다!’고 나는 생각했다.

(119)

쪼물락 쭈물럭

단단하던 감들이 만지면 만져줄수록

쪼글쭈글 시들어간다

축축 늘어진다

사람의 모난 마음도 쓰다듬고 어루만져주면

둥글게 두리동동 동그래질 것이다

감을 깎다가 익거나 으깨져서 물러진 부분들

서걱 베어낸 곶감이 있다

그 베어진 상처 쪼물락 쭈물럭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더니

그러니까 상처가 씻기고 치유되어서

동글동글~

(124)

나는 다르게 욕망할 뿐이다.”

그렇다 그들은 시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려보내기를, 저 산과 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누구보다 여행을 많이 떠나고 누구보다 계절을 깊이 즐긴다. 봄이면 야생 달래와 냉이 그리고 산나물을 먹고 여름이면 천렵한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인다. 가을이면 송이버섯 열 개로 친구들과 풍성한 파티를 벌인다. 나는 지리산에 갈 때마다 삶이 단순할수록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절감한다. 그리고 똑 같은 양으로 내가 얼마나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가도 말이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이들이 소유한 것의 양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가 의신마을 최도사다. 그는 계절별로 두어 벌의 옷을 소유하고 있다. 아마도 언제든 어깨에 달랑 지는 바랑 하나에 짐을 챙겨 그는 먼 길을 떠날 수 있으리라. 내 주변의 많은 성직자, 수도자분을 보았지만 최도사만큼 적게 소유하고 있는 이는 보지 못했다. 스스로 내비도의 교주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가긴 간다.

(239)

여기 지리산이야, 꽁지야. 친구들이 와서 지붕 다 고치고 지네들이 고기 사 와서 먹고 갈 거야. 넌 글이나 쓰라니까.”

그래, 거기가 지리산이었다. 소유가 전부가 아닌 곳, 욕망이 다다른 곳, 지혜가 다른 곳. 나는 문득 또 생각했다. ‘알았어. 내가 책 팔아 돈 많이 벌어서 지리산 한편에 땅이라도 살게. 그래서 다들 편히 살다가 갈 수 있게 할게라고. 아마도 친구들은 또 지청구를 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게 지리산 식이 아니라니까.”

(263)

유머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요즘 아재 개그라는 건 그러니까 유머가 아니다. 실소를 터뜨리게 하니까). 진정한 유머는 우선 교양, 그러니까 다양한 콘텐츠를 가져야 가능하고 그것을 구사하는 마음의 여유,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알아들을 귀 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머의 핵심은 남들이 은폐하는, 혹은 하려고 하는 진실의 과녁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데 있다. 우리가 만일 어떤 사람의 말에 웃는다면 그것이 진실의 과녁을 맞혔기 때문이다. “임금님은 벌거벗었어요.”도 그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의 과녁에 닿은 것은 힘이 있다.

부처나 공자나 예수(출생 연도순) 역시 대중에 큰 영향을 미친 데는 그들이 가진 진리의 감화력 외에도 연설의 유머가 큰 몫을 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웃기지 않는 무명의 연설자에게 대중이 몰려들기란 예나 지금이나 불가능하다.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게 쉽다는 말은 지금은 위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고리타분한 말일지 모르나 그 당시엔 얼마나 배꼽을 잡게 만들었을까. 그것이 얼마나 사실이며 듣는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카타르시스를 주었기에 예수는 권력자들에게 죽기까지 했을까.

(326)

그의 요리를 먹은 후(어쩌면 내 나이 탓도 있겠지만) 나의 밥상도 변하기 시작했다. 소박한 것이 점점 좋아진 것도 그와 1년을 함께 한 탓이리라. 오늘 나는 찻물을 우리고 밥을 말아서 들기름에 볶은 김치랑 단출히 아침을 먹는다. 땅에 뿌리박은 모든 것들은 땅에서 길어 올린 것들을 도로 내놓고 땅으로 돌아간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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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노 후보를 만났어요. ‘오늘 아무개를 만났는데 정몽준 쪽에서 이런 것이 왔다. 정몽준하고 한번 만나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배려를 잘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이야기를 하면은 그걸로써 적극 참여한다고 한다그런데 노 대통령이 저는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대통령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더라고. ‘정몽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단일화하는데 자리 가지고 뒷거래는 안 한다고 국민 앞에 몇 차례나 이야기했는데 그건 국민을 속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단둘이 만나서 덕담으로 한 이야기라도 그걸 근거로 해서, 당시니 그전에 이런 얘기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그걸 실천하라고 요구할 때 약속한 걸 어떻게 안 했다고 합니까.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그래요. 그래서 자기는 그 사람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면서 그런 식으로 자리 약속하고 그 사람 협조로 대통령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깨끗하게 소신을 지키다가 낙선하는 걸 통해서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 김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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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관계를 쫓아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런 정치인이 아니고 엄청난 괴로움과 정치적인 손해가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희생하면서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그런, 정치인으로서 찾아보기 힘든 면모, 이것이 결국 노 대통령이 국민 전체에 정치가로서 인식되는 원동력이었고 결국 그걸 통해 대통령까지 당선됐던 거고. – 김원기

(122)

노무현 후보가 나한테 유시민 씨한테 갈 건데 같이 가세그러기에, 원래 그전에도 서로 한 얘기가 있어서 그래 가죠. 유시민 씨한테 어떻든 간에 와서 좀 도와 달라고 하죠.’ ‘오케이, 그래. 오케이그래 가지고 그때 유시민 씨한테 가서 개혁당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했던 거죠. 그래서 구명보트를 좀 준비해 달라. 이 배가 난파선이 됐을 때 갈아탈 수 있는 구명보드라도 하나 있어야 될 것 아니냐거기 비스듬한 5층짜리 건물의 옥탁방 같은 사무실이야. 경사가 이렇게 있는. 집필방이라고 조그맣게 있는데 거기 가 앉아서 내 기억에 내가 탈 수 있는 보트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나이런 정도 얘기를 한참 주고받으면서 유시민 씨한테 그걸 부탁을 했어요. 그때 내가 왜 배석을 하게 되었나 모르겠어.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자리를 갈 때는 반드시 자기 참모들을 데려가는데 그 업무의 연동성과 연관성이 가장 좋은 사람을 데려 가거든요. 그래서 유시민을 끌어들인 개혁당의 출발이 그 여름에 돼요. – 안희정

(146)

1988년도에 처음 국회의원 당선됐을 때 코리아나 호텔 2층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 제가 스물 세살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분이 1946년생이니까 마흔두 살이고, 열아홉 살 차이잖아요. 저한테 뭐라 그랬냐면 나는 정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나를 역사발전의 도구로 써 달라. 나는 그게 가장 강한 거라고 봅니다. – 이광재

(149)

나는 그게 노 대통령의 가장 큰 흡인력이었다고 봐요. 자기언어. 그러니까, 1988년도 대정부질의하고서 굉장한 평가를 받았는데 그때 우리한테 뭐라고 했냐면 지도자와 지도자 아닌 사람의 구별점은 연설문을 스스로 쓸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다스스로 쓰려면 그 문제가 절실해야 돼. 그리고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사람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그게 노 대통령의 힘이었다고 봐요. – 이광재

(163)

노 대통령이 걸어갔던 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은 어떤 시대정신을 가지고 가장 어려운 사람과 더불어서 가장 전면에, 일선에서 자기 모든 걸 던진 사람이에요. 그런 걸 가진 사람이 노무현의 후예가 되지 인간적으로 가깝다고 되는 거? 난 그런 거 없다고 봐요. 그래서 친노라고 마친 큰 세력이 있는 것처럼 해서 연일 싸우는 사람도 고스트(ghost)와 싸우는 거고, 또 하나는 친노 적자는 없다, 내가 볼 땐, 오히려 시대정신에 헌신하는 자가, 그 사람이 노 대통령의 후계자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그런 사람이 반드시 또 탄생한다. ? 서민들이 봉하마을에 오는 걸 관찰해 보면,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많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기성 정치에 염증을 내면 낼수록 찾아옵니다. 그 공통분모를 믿는 사람이 또 탄생한다고 봐요. – 이광재

(214)

노무현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정치인이, 그 개인의 경력으로 보나 사회적 기반으로 보나 정치적 기반은 비주류의 비주류고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근데 그 시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를 가진 분이었어요. 사람들이 나름대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무현이라는 이 캐릭터에서 어느 한 대목인가를 자기 마음에 들어 하고 그래서 난 노무현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에요. 많은 결점과 더불어서 많은 미덕을 가진 분이었잖아요. 이분이 지금 대선에 나온다면 안 된다고 봐요. 또는 그전에 나왔더라도 역시 안 됐으리라고 봐요. 이거는 그때 딱 일회적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어요. 그리고 그런 캐릭터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안 생길 거라고 봐요. 우리나라 같은 조건에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분이에요. – 유시민

(241)

우리나라 교육은 통조림을 만드는 거거든, 가세등등이라는 것 자체를 교육이 깎아 버려요. 그러니까 고등교육까지 끝나면 그런 기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어요. 그 양반은 정말 희귀한 경우지. 대학을 안 간 게 굉장히 다행인 측면도 있다고 봐요. 교육으로부터 두들겨 맞는 통조림 공격을 덜 당한 거죠. 배우는 뭐냐면, 어렸을 때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거거든요. 교육과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이 끝없이 통조림화한 내면의 벽을 털어 내는 게 배우예요. 이 양반은 (이미) 털려져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매력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 –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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