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15)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하나의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익숙한 세계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과 불편한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

(20~21)

추상적인 상상을 해보자. 방금 하나의 어린 정신이 태어났다. 이 정신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정신의 이름은 ()’이다. ‘은 평화롭고 고요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어린 정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자기 안에서 자라난 질문들, 모순된 결론들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제는 공존할 수 없다. 정상적인 자기 자신과 모순된 자아상을 분리할 때가 되었다. 이러한 반대되는 자아상을 이제부터 ()’이라 이름 붙이고, 자아로부터 떼어내자. 이제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자아와 반자아의 투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투쟁 결과 어린 정신은 모순된 자아상을 수용한다. 이제는 도 아니고 도 아닌 새로운 성숙한 정신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숙한 정신의 이름은 ()’이다. ‘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로서 결함 없이 정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제 은 동시에 이 된다. 이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정신을 성장하게 된다.

(41)

성숙하고 똑똑한 학생일수록, 주체적이고 심오한 학생일수록 현행 교육 시스템에 적응할 수가 없다. 반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변태를 길러주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나이에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줄 알고, 친구나 가족의 안타까운 삶에 무관심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기형적인 학생만이 더 건강하고 정상적인 학생일지도 모른다.

(64)

구약은 신과 인간이 맺은 오래된 약속을 뜻하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예숙 그리스도가 기준이 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약속이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종교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기록이다.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구성은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 그리고 묵시록이다. 복음서는 4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1편으로, 사도들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서신은 총 21편으로, 사도들의 편지다. 마지막 1편은 묵시록으로, 요한이 계시에 의해 기록하였다.

(92)

이 질문은 대학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도서관에 앉아 철학과 과학 서적을 뒤적였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붓다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붓다의 삶과 가르침 속에서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타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102)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122)

물론 이런 대답은 어떤 사람들을 화나게 할 수 있다. 평생 하나의 관점이 옳다고 믿어온 사람에게 이런 불분명한 선택은 불경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묻고 싶다. 왜 하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야 하는가? 왜 하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서둘러야 하는 것인가? 물론 세상에는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결정해야 하는 문제도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건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146)

정리해 보자. 무엇이 문제인가? 플라톤주의가 절반의 세계를 억압한 것이 문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이념, 사유, 종교, 도덕만을 추구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을 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늘의 가치만을 추구하다가 대지를 더럽히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근대를 끝내려고 한다. 플라톤주의를, 그리스도교를, 이성중심주의를,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끝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149)

그렇다면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은 필요하다.

(155)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166)

하지만 나는 당신이 여행하는 영혼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행하는 영혼들은 대체로 숨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물을 파는 영혼은 비교적 사회에서 환영받는다. 그래서 여행하는 영혼의 소유자도, 우물 파는 영혼의 소유자도, 모두 자신이 우물을 파는 영혼인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평생을 거쳐 하나의 분야를 파내려가고자 한다. 당신의 부모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당신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지, 왜 평생을 소진하여 하나의 전문 분야를 가져야만 하는지를 말이다.

(198)

이러한 인류원리를 더 확장해보면 이런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어.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이 말에 대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고전 역학에서의 우주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실체니까. 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야. 지적인 존재들로부터 완벽하게 은폐된 동시에 자기 충족적이고, 그 안에 어떠한 지적인 생명체도 보유하지 않은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230)

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그가 이상주의자이며, 특히 인간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244~245)

군을 전역하고 현실세계에 던져졌을 때, 그래서 나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지금의 어설픔과 실수들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성숙한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낯설음을 나는 결국 극복할 것이다. 군대에서 적응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나는 잘 적응할 것이다. 다짐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어떤 책도 읽지 않으리라. 남들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고 말 것이다. 돈을 벌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노후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서글펐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성실한 청년이 되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의 영혼은 이미 늙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292)

사고 이후에 알게 되어 매일 듣고 있는 노래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노래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la Vida}’. 당시에 내가 이 노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가수가 누구인지, 노래의 가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언어를 뛰어넘는 그녀의 깊고 낮은 음성 때문이었다. 그 깊은 목소리는 나를 항상 예민하고 몰고 가는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모든 소리가 차단되었다. 나는 눈만 감으면 되었다. 그러면 불안한 세상 속에서 나만의 안전한 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공원 벤치에 앉아 노래를 들었다

(315)

네 맞아요. 당신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 잘 알아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미운 거죠. 그래서 더 세속적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거고요. 하지만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반쪽짜리 삶이었지요. 굳이 이상을 저 멀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었어요. 지금처럼 현실을 묵묵히 걸어가세요. 동시에 언젠가 필요할 때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이상도 함께 품고 가세요. 아무도 당신에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359)

[파드마삼바바] 허망해하지 마라. 너는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해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지 마라.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심판하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401)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면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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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의 방향성은 둘 중 하나다. 시장의 자유 또는 정부의 개입. 그리고 이 두 가지 방향성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은 세금이다. 세금은 사회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근원이다. 거칠게 말하면, 세금으로부터 모든 사회 문제가 비롯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세금에서 시작된다.

(37)

우선 지금의 누진세율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견해부터 알아보자. 이들은 현재의 누진세 제도 자체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보기에 누진세는 국가가 소수의 고소득자들의 권리를 강제로 침해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시장에서 노력하고 투자해서 얻은 성과를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는 경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윤리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현재의 누진세율을 낮추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지금의 누진세율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 알아보자. 이들이 보기에 누진세는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빈부격차가 극단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바로 지금이 누진세를 강력하게 적용할 시점이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들은 과세표준에서 최고구간에 해당하는 세율을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45)

시민은 놀랍도록 참을성이 강해서 문제가 악화되는 시점까지 기다리는 경향이 있다. 가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해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늦어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가 보통이지만, 시민의 움직임은 사회의 분위기를 역전시킨다.

진짜 문제는 움직이지 않는 시민에게 있다. 상황이 악화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부동의 시민들이 문제다. 그들이 사회의 절대다수일 경우 그 사회는 균형을 잃어버리고 특정 계층, 특정 계급의 이익만을 반복적으로 보장하는 부정한 사회로 변질될 수 있다.

(69)

시민은 권리를 갖고 있는 주체를 의미한다. 서울시나 부산시에 살면 시민이고 경기도나 충청도에 살면 도민인 것이 아니다. 물론 매우 좁은 의미로는 그렇게 쓰이기도 한다. 행정구역상 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시민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민을 언급할 때는 그런 협소한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은 의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갖는 주체 모두를 지칭하는 점을 기억하자.

(103)

자유를 기준으로 본다면 역사는 하나의 방향으로 진보해온 것으로 드러난다. 역사는 자유인의 확대, 같은 말로 자유의 확장이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리고 여기서 자유가 확장된다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 절대정신이 확장되고 있음을 말한다.

(111)

자유란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자유의 정의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정의는 실제로는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우선 앞부분, 자유는 타자에게 간섭받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특정 국가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고 한다. 다음으로 뒷부분, 자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이 지향하고 선택하는 것을 주체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가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고 한다.

(129)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인정하는 체제를 말한다. 생산수단의 개인소유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본질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한다고 할 때, 이때의 자유는 실제로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수단을 구매할 자유가 있다.

공산주의는 이에 저항하며 등장했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의 개인소유를 거부한다. 타인을 착취하는 부도덕한 상품이라면 이를 개인이 장바구니에 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신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없이 노동자에 의해서만 구성된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다.

(160)

시민에게는 의무가 있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의 이익을 고려해야 할 책임 말이다. 물론 모든 구체적인 사회적 쟁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세계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을 토대로 개별 사안을 단순하게 분류할 수는 있어야 한다. 시장의 자유와 정부의 개입으로, 자본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이익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으로,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시민들 스스로가 개별 쟁점의 방향성을 이해하고 분류할 수 있을 때, 사회적 담론들은 합리적이고 건강하게 논의되어갈 것이다.

세계에 대한 단순한 구분. 이것이 시민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다.

(183)

그런 까닭에 비정규직의 확대에 대한 논의는 문제가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는 동시에 리스크까지 높이는 제도는 불공정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비정규직의 확대에 저항하는 것은 시장 원리에서 매우 상직적이고 합리적인 일이 된다. 만약 특정 정부가 노동자의 임금 인상 없이 규제 완화를 통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만을 추구한다면, 그 정부는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는 정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그에 대응하는 고용 안정성 정책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205)

한국은 오랜 기간 동안 객관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교육체계를 유지해왔다. 강의식 교육과 전통적인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식 평가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교육 형식이다. 빠른 경제성장과 산업화가 요구되던 시기에 이러한 교육관은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했다. 문제는 진리가 실재한다는 절대주의 세계관에 익숙하다. 반대로 고정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와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성에 대한 담론들에 불편해한다.

우리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보수와 진보, 세금과 복지의 문제를 합의와 절충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이념 대립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교육의 형식보다 교육의 내용에 집중해오는 동안 한국인은 진리가 실재한다는 이념을 내재화하게 되었다.

(213)

우리는 교육의 형식이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교육에 대한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주제는 교육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것이다. 어떤 내용을 가르치고, 어떤 교과를 강화할 것인지, 선택과목의 수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고민에 집중되어 있다. 거 근본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교육의 형식인데도 말이다.

학생들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교육의 형식을 통해 학습한다. 특히 진리에 대한 이념과 경쟁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발생하는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그 원인은 우선 강의식 수업과 교실 구조 그리고 객관식이라는 평가 형식이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절대적이고 고정된 진리가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성인이 되었을 때 사외 문제를 옳고 그름, 선과 악의 문제로 접근하게 하는 경향성을 높인다. 다음으로 지속적인 교내 평가와 대입시험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경쟁과 그에 따른 결과가 정당하다고 믿게 된다. 문제는 경쟁의 형식이 사회의 책임을 개인의 책임으로 손쉽게 전환한다는 점이다. 어떠한 평가가 되었건 그에 따른 결과가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중간으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는 평가라면, 그 경쟁은 정의롭지 않다.

(227)

교육은 경제가 결정한다. 경제적 생활과 환경. 구체적으로는 일자리와 소득격파의 정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교육의 모습이 결정된다. 문제는 일자리와 소득격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대립하는 국가 방향성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면 상대적으로 일자리의 양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소득격차는 심화될 수 있다. 이러한 경제 환경에서 학생들은 과도한 경쟁에 노출된다. 반대로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면 상대적으로 소득격파의 완화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투자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이러한 경제환경에서 학생들은 마찬가지로 제한된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과도한 경쟁에 내몰린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와 빈부격차의 심화는 일자리의 수를 줄이고, 소득격차를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241)

윤리에서 말하는 정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관념과 닮아 있다. 그것은 정의로움에 대한 관념이다.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 어떤 사람은 기본적으로 차등적 세계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사회에는 수직적인 질서가 있으며, 엄연히 법과 규칙이 존재한다. 이를 준수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은 다르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세계를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절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갖는다. 따라서 차이와 차별이 없는 수평적인 관계의 실현을 위해 사회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274)

보수와 진보는 고리타분하고 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평생 한 가지의 정치적 성향만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 보수이고 평생 진보인 사람은 정치인밖에 없다. 시민은 자유롭다. 인생 속에서 변화하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에 따라 순간순간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면 된다. 이제 미디어나 타인의 말, 혹은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나와 사회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때다.

(310)

국제사회는 저성장 시대로 돌입했다. 모든 국가가 자국의 경제성장을 위해 경쟁하게 되었다. 이때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인플레이션 정책이다. 앞으로 국제사회는 자국의 통화량을 팽창시키고 화폐가치를 낮추려는 경쟁을 할 것이다. 미국의 양적 완화, 중국의 위안화 절하, 일본의 엔저 정책이 이러한 맥락에서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급격한 통화량 팽창에 따른 부작용으로 부동산과 주식 가격의 버블이 커질 수 있다. 경제성장과 경제붕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국가는 세계의 눈치를 보느라 통화량 팽창을 쉽게 진행하기 어렵겠지만, 강대국은 군사적, 정치적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스스로의 통화량 팽창의 정당성을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345)

시민은 그 자체로 자유다. 역사의 필연적 귀결로서 시민은 자유의 실현자다. 여기서의 자유는 두 가지 의미다. 개인으로서의 나를 구성할 자유와 사회를 선택할 자유. 삶의 현장 속에서 나는 치열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경쟁하며 나를 구성한다. 동시에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선택을 해야 한다.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잠시 회피하여 쉬고 있는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을 사회적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야 할 책임은 시민으로서 당신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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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누군가가 끼어들어 제지하려 했으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마시면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이름이 뭐랬지? 넌 우리 회사 오면 안 되겠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빈정대는 말투로 한마디 내뱉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

(186)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나는 여기서 나를 포함해 이런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서 만성적인 좌절감에 빠지는지 밝히고, 그런 좌절감이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 근본적인 문제임을 증명해보겠다. 또 타고난 능력과 근면, 성실함으로 개인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굴욕에 대한 답이 아니며, 그런 성공은 본질적으로 시시한 것임을 논해보겠다.

(191-192)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에게 지배 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196)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200-203)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중략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중략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 중략이들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중략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중략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이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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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대 그리스에서 추첨을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로 인정한 이유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어원이 말하는 그대로 데모스(demos, 전체 인민)가 자기 스스로 통치(kratos)하는 체제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를 특별한 엘리트의 지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지배로, 그리고 누구나 지배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동일한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을 지향하는 정치 체제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추첨은 데모스의 모든 시민들에게 관리가 될 수 있는 동일한 확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내일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있는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의 지배를 수용하는민주주의의 공평한 원칙으로 수용될 수 있었다.

(11~12)

누가 선발될지 사전에 알 수 없고, 재선의 동기가 없으며, 자신의 이익 표출이 곧 전체 국민의 이익을 표출하게 된다는 추첨 민주주의의 특징 때문에 강력한 이익집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해줄 의원들을 찾아내기 어렵게 된다. 제선의 동기가 없는 의원들은 선거로 선출되는 지금의 의원들처럼 국회 업무를 팽개치고 지역구에서 재선 활동에 전념하지도 않을 것이고, 서민들이 하루빨리 처리되기를 바라는 민생 법안을 계속 미루지도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법률 조항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세제 관련 법안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개정될 것이며, 연말에 도매금으로 수백 건씩 처리되는 법안들은 진지한 심의를 위해 처리 건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의회는 전문가 집단의 특권적 공간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진정한 민주적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23)

지금의 입법 기관은 국민을 전혀 대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 사회를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볼 수 없다. 우선 심각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성인 인구의 51퍼센트인 여성은 하원의 4.8퍼센트만을 차지한다. 인구의 12퍼센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하원의 4.5퍼센트만을 구성한다. 인구의 6퍼센트를 차지하는 히스패닉도 하원의 2.5퍼센트만을 차지해 저대표되고 있다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의 절반 정도는 전혀 대표되지 않으며, 이 중에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가난과 실업 등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대신 하원은 거의 모두 백인과 부유한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런 불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계층이 바로 변호사다. 변호사는 1983년 현재 전체 인구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하원의 46퍼센트를 차지하고 잇다. 따라서 우리는 대의 없는 과제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복지뿐만 아니라 엄청난 전쟁 무기와 대규모의 국내외 경찰과 정보기관을 지탱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많은 세금은,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승인한다.

(29)

이스터브룩은 매우 신중한 비평가지만, 의회의 현실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치에 입문한 후보자는 이제 체계적으로 이익집단을 찾아 헤매야 한다. 이익집단이 찾는 입법 목표에 맞는 매우 특별한 조건에 자신이 부합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정받고 돈을 얻는다. 그래서 의회에 입성하기도 전에 이익 집단에 구속돼버린다. 언젠가 그 의원은 계속 그 이익 집단을 지원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후원자를 찾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익 집단의 금전적 보복을 당할 수 있는 법안에 투표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닥칠 재정적 결과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런 모습과 부패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43)

간단히 말해 추첨을 통한 의회 구성의 방식은 미국 건국자들이 꿈꾸던 국민의 정확한 축소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원들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의원들이 선택되는 통계적인 선거구민, 즉 표본이 추출되는 단위는 자신들과 같은 국민으로 구성돼 있다. 의원들의 대표성은 자동적이며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논쟁과 의사 결정은 민주적 대의 방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 찾고 있던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전체 국민이 모두 모이기에는 너무 많다면, 추천으로 선택된 전체 국민의 복제품이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65)

시민들이 부패를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는 특정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몫을 넘어서서 권력을 행사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이런 상황은 미국 자동차 회사의 몇 백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영자들이 안전하지 못한 자동차를 만들어 수만 명을 불필요한 죽음으로 몰아넣고 도시의 공기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시 2억 명이 넘는 미국인들에게 죽음, 질병, 장애, 재산 손실을 안겨주는 원인이 된다. 부패는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게 만든다.

(103)

그런데도 우리는 추첨 민주주의가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라고 믿는다. 일단 추첨 민주주의가 널리 이해되고 나면, 선거권 확대를 자극한 공정성과 정의에 똑같이 압도적 호소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선거 운동을 좌지우지하는 돈의 영향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면 추첨이라는 방식은 좀 덜 이상한 것으로, 그리고 조금은 더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국민들이나 최소한 지독히도 민주적인 식민 개척자들의 후손들 중에 현행 제도 아래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가짜 대의제(pseudo-representation) 같은 형태가 지속적인 열정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때가 되면 추첨 민주주의는 공화국의 의회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부활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방법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117)

이렇듯 선출된 대표는 선출하는 사람하고는 사회적으로 다른 탁월한 시민이어야 한다는 탁월성의 원칙(principle of distinction)’이 대의제 정부에서 제도화됐다. 선거는 유권자보다 뛰어나다고 간주되는 후보들의 자기 선택(출마), 유권자들의 후보 선택(선거)이다. ‘선거(election)’엘리트(elite)’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으며, 몇몇 언어에서 똑 같은 형용사가 탁월한 사람과 선택된 사람을 뜻하는 것은 선거가 평범한 국민의 모습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뭔가 특별하고 탁월한 사람을 뽑는 제도라는 의미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후보자의 탁월함은 유권자들이 놓인 선택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후보자들은 유권자가 선거 시점에 가지고 있는 가치를 파악하고, 이것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여기에 끼워 맞춰 출마자를 결정하고 선거 운동을 펼친다. 후보의 탁월함은 강령이나 정책, 곧 공약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단지 사람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뿐 당선 이후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150)

한국 민주주의가 민주화를 성취했다고는 하지만 하위 계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들이 여전히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하는 대표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런 계층들이 투표 참여에 무관심해지고, 정치적 의사가 의회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에 책임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결국 위기의 본질은 대표의 문제로 정리된다. 대표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피선거권의 평등이 보장돼 있다고 하지만 정치적 영역으로 진입하는 과정은 조직화된 정당을 매개로 하는 거의 배타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공천을 포함한 선거 과정에서 여전히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거 과정에서도 인기와 인지도 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에게 출마할 기회의 평등은 허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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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다시 종후 팔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양손을 날처럼 세워 틈으로 끼워 넣었습니다. 그 순간 종후의 몸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왼팔이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후의 왼 팔목을 붙든 손이 딸려 나왔습니다. 떠오르던 종후가 멈췄습니다. 쓰러진 침대 뒤쪽에 실종자가 더 있는 겁니다. 저는 틈 사이로 팔을 더 깊숙이 집어넣었습니다. 손으로 더듬으며 그곳 상황을 머리로 그렸습니다. 침대 뒤 그 좁은 공간에 남학생 세 명이 원을 그리듯 어깨동무를 하고 뭉쳐 있는 겁니다. 종후까지 네 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마지막 순간을 맞았을 겁니다. 엇갈려 붙든 어깨와 손을 더듬는데 다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108)

누가 뭐라 해도 난 알아. 민간 잠수사들은 그때 정말 용맹했어.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훗말을 대비하지 않고 돌진했지. 나는 그들의 몸이 하루하루 축나는 것을 알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거의 못 줬어. 도움이 뭐야. 오히려 그들을 악순환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진통제처럼 굴었던 게 아닐까. 근육을 풀어 주는 건 조금 더 천천히 그리고 조금 더 오래, 그들을 계속 심해로 내모는 방편이었으니까. 선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그 역할이 늘 좋은 법은 아냐. 내가 아니라면 누군가 다른 물리치료사가 바지선에 올라갔을 거라고? 그 생각도 물론 했지. 하지만 그딴 건 내 맘 편하자고 나중에 지어 내는 핑계일 뿐이야. 묵살당하더라도, 그때 나랑 한의사들이 함께 잠수사들 몸과 마음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하루라도 빨리 잠수병 치료 전문의를 바지선으로 데려오라고 요구했어야 한다고 생각해. 후회는 왜 이리 항상 늦는걸까. 돌이킬 수 없을 즈음이 되어야 최선책과 차선책과 차차선책이 떠올라, 일은 벌써 최악으로 벌어졌는데 말이야.

(113)

상상은 전부 달랐습니다. 저는 실종자들이 침몰한 배에 승선하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구체적으론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품에 안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제각각 다른 존재인지 압니다. 키나 몸무게는 물론이고, 똑 같은 자세로 최후를 맞은 이는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극심한 공포와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마지막 순간일수록, 그 사람은 오롯이 그 사람인 겁니다. 그 차이를, 그 유일무이한 특별함을, 잠수사는 만지고 안고 함께 헤엄쳐 나오며 아는 겁니다. 인간은 결코 숫자로 바뀔 수 없습니다. 바지선에서 철구한 뒤 제가 가장 듣기 싫었던 질문은, 너는 몇 명이나 수습했느냐는 겁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수습한 숫자가 아니라 선내에 남아 있는 숫자였습니다.

(181)

수색과 수습의 문제점을 논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라. 나는 여전히 침몰 직후 구조 방기부터 실종자 수습까지, 정부의 무능함과 안일함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하지만 바지선에서 만난 잠수사들은 아냐. 나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을 맹골수도에서 잃은 국민이고, 내 앞에 앉은 사내들은 억울하게 숨진 내 아들을 찾고자 매일 잠수하는 국민이라고. 국민과 국민이 만난 거야. 유가족과 잠수사가 서로 사과를 주고받아선 안 돼. 오히려 우린 함께 국민을 우롱하고 상처를 입힌 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공개 사과를 받아야 해. 정말 머리 숙여 사과할 사람을 찾으려고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203)

완전히 미쳐 돌아간 겁니다. 실종자 수습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민간 잠수사들은 뼈가 썩고 근육이 찢어지고 신경이 눌려 휠체어 신세로 지내도 괜찮단 겁니까? 유가족이야 생때 같은 자식과 형제자매를 잃었으니 더 자주 더 빨리 실종자를 찾아 달라 요구했다 칩시다. 잠수사들도 흥분한 채 만용을 부려 잠수를 더 하겠다며 나섰다고 치자고요. 그렇더라도, 해경이든 범대본이든 이 참사 수습을 총괄하는 수뇌부는 냉정하게 판단해서 말렸어야죠. 하루에 두세 번씩 매일 심해로 냉정하게 판단해서 말렸어야죠. 하루에 두세 번씩 매일 심해로 들어가면 열에 아홉은 치명적인 잠수병에 걸립니다. 잠수를 다시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 장애를 안고 살거나 목숨이 끊길 수도 있어요. 지구상에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잠수를 시키는 나라는 없습니다.

잠수사도 인간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에요.

(205)

병원에 도착한 잠수사들은 모두 피곤한 표정을 띠었지만 밝은 웃음도 지었습니다. 잠수병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면, 그들 짐작으론 실어야 서너 달 안에 완치되어, 내년엔 다시 작업 현장인 심해로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겁니다. 난 이들이 적어도 2년은 잠수하지 않고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맹골수도에서 입은 트라우마는 단시간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다양하게 증상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특히 맹골수도의 심해와 흡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증상이 발현될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그것까지 정신과 전문의가 충분히 진단하고 치료한 다음에 현장으로의 복귀를 의논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복귀 시점도 잠수사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국가에서 관리해야지요. 말로만 맹골수도의 영웅이라 하지 말고, 그 영웅들이 트라우마로 고통받지 않도록 국가에서 챙겨야 합니다.

(308)

새빨간 거짓말이지. 우선 보상금을 받는 건 유가족이 가진 최소한의 권리야. 이번 참사의 보상금은 일반 교통사고 수준을 책정되었어. 희생 학생들의 경우는 도시 일용직 노동자 기준으로 금액이 산청되었다고. 아이들의 재능과 꿈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가장 늦은 수준으로 일괄 정리한 거야. 그러니 다른 참사와 비교해 봐도 보상금이 많을 수가 없어. 유가족이 받은 돈은 이 보상금에 희생자들이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금과 국민들이 낸 성금을 합친 거야. 다른 참사 때도 보험금과 국민 성금은 있었고, 잊을까 싶어 다시 지적해 두자면, 이 보험금과 성금에도 한 푼 나간 게 없겠지?

(378)

형님, 그런데 소설 제목을 왜 거짓말이다라고 지었어요?”

내가 민간 잠수사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했을 때, 관홍이 네가 대답하며 가장 자주 썼던 말이잖아? ‘416의 목소리에 출연한 유가족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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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2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신 수습하던 민간잠수사들의 바닷속 광경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가슴이 아팠던 책이었어요.
그간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심정적으로만
유가족분들을 가엾게 여긴 저의 소홀함에
잔잔한 파문을 던져 준 소중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