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장소만이 아니다. 결 좋은 목재를 구해다 책상이나 책꽂이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새 기운이 솟는다. 그 자체로 자기 정화의 시간이다. 좋아하는 공간, 가슴 뛰는 일을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 이 모두가 우리 삶에 퀘렌시아의 역할을 한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의 명상과 피정, 기도와 묵상의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평화로운 음악이나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내면세계의 안식처를 발견하는 그 시간들이 모두 퀘렌시아이다. 막힌 숨을 트이게 하는 그런 순간들이 없으면 생의 에너지가 메마르고 생각이 거칠어진다.

 

(21)

에게서 모든 존재를 포함한 더 큰 공동체로 사고의 중심축을 이동하는 것, ‘의 자리에 세상을 앉히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기준이 아직 에게 머물러 있다면 자기 생존과 이익에만 집착하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이 자기 중심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24)

마침내 스승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25)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을 가면 부드럽게 속삭인다. 두 가슴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큰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두 가슴의 거리가 사라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두 영혼이 완전히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때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 없이도 이해하는 것이 이것이 사람들이 화를 낼 때와 사랑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스승은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논쟁을 할 때 서로의 가슴이 멀어지게 하지 말아야 한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질러 서로의 가슴을 밀어내서는 안 된다. 계속 소리를 지르면 그 거리를 회복할 수 없게 되고, 마침내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35)

모든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의 내용이다. 어느 지점에 도달했는가보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가, 얼마나 많이 그 순간에 존재했는가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우리가 여행자면서 동시에 여행 그 자체이다.

이 일화를 이야기하며 짐 코벳은 책에 썼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목적지에 도달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

 

(39)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은 나의 외모와 겉모습이며, 두 번째 기준은 과거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다닐 때 본 나에 대한 인상으로 나를 정의 내리는-실제로는 그 시기의 나와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 본 적도 없는-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먼 과거의 이미지를 나의 참모습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것은 사실 몇 달 전, 혹은 몇 년 전의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지금은 변화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 절대로 달라질 자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인간이 자신의 편견과 판단에 대해 갖는 신뢰는 실로 놀랍다.

 

(40)

작자 미상인 다음의 글에 나는 동의한다.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의 스토리는 모른다. 그들은 당신이 해 온 것들은 들었지만, 당신이 겪어 온 일들은 듣지 못했다. 따라서 당신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당신 자신의 생각이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최고의 것을 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것이 아니라.’

 

(45)

죽는 날까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다. 따라서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 길에 기쁨과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의 다름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의 어원이 길들이다임을 기억하고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만 한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내가 옳다고 느끼는 길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46)

마름이 담긴 길을 걷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나란히 걷는다.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뒤를 좇는다는 것은 아직 마음이 담긴 길을 걷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가고 싶은 길을 가라, 그것이 마음에 담긴 길이라면, 마음이 담긴 길을 갈 때 자아가 빛난다.

 

(60)

어느 자연주의자는 말한다.

아침에 봄에 얼마나 감동하는가에 따라 당신의 건강을 점검하라. 자연의 깨어남에 대해 당신 안에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른 아침 산책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떨치고 일어날 수 없다면, 첫 새의 지저귐이 전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눈치채라. 당신의 봄과 아침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62)

<지상의 양식>에서 앙드레 지드는 말한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이 행성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떠날 때 당신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혹은 이 별에 여행 오려고 준비하는 새로운 영혼에게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 인간 세계에서 조심해야 할 긴 목록을 암기시키면서 볼바시옹의 자세를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지구에는 예찬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언제나 예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주겠는가? 덜 움츠리고, 덜 비난하고, 더 많이 예찬하라고.

 

(67)

당신은 이름 없이 나에게로 오면 좋겠다. 나도 그 많은 이름을 버리고 당신에게로 가면 좋겠다. 이름을 알기 전에 서로를 느끼면 좋겠다. 그때 신비의 문을 여는 열쇠가 우리에게 내려온다. 현존에는 이름이 없다. 궁극의 신비인 우리는 이름과 분류를 넘어서 있다. 그 세계에서만 우리는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내 안의 신과 당신 안의 신이, 내 안의 불과 당신 안의 불이 만날 수 있다. 내 안의 절대 고요와 당신 안의 절대 고요가.

 

(88)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의 80퍼센트는 두려움에 바탕을 둔 것이다 가슴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인생의 비전을 차단시킨다. 안전한 길은 큰 기쁨을 주지 못한다.

 

(93)

웃음이 통증을 완화시킨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웃음은 모르핀보다 몇 배나 진통 효과가 큰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키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며, 폐 깊은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게 한다. 또 웃을 때는 폐와 심장이 두 배나 빨라져서 유산소 운동이 일어난다. 10분 웃으면 2시간 동안의 마취 효과가 있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인체 오라 측정에서도 웃음 수련 후에는 어두웠던 색깔이 밝게 변했으며, 웃음 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옆에 서 있던 관찰자의 오라도 함께 변화했다.

 

(121)

공감은 행복에 직결된다. 만일 당신이 강렬한 기쁨이나 깊은 슬픔을 보이는데 상대방이 돌처럼 무신경하다면 당신은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 부족은 진정한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다.

 

(139)

정신에 가장 해로운 일이 되새김이다. 마음속에 되새김은 독화살과 같다. ‘문제를 느끼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쓰러지지는 말라.’라는 말이 있다. 첫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은 사실 큰일이 아니다. 그 화살은 우리의 선택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화살 때문에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쏘는 것이 더 큰일이다. 이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은 마음의 선택에 달려 있다. 외부의 일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두 번째 화살을 쏠 것인가?’

 

(154)

대재앙이 일어나리라는 걸 알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를 묻는 프랑스 일간지의 질문에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 삶이 갑자기 멋있어 보인다. 삶이 얼마나 많은 계획, 여행, 사랑, 배워야 할 것들을 숨겨 놓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게으름으로 인해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끊임없이 미루고 있는 그것들을. 하지만 그것들이 영원히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하면 그것들은 다시 아름다워진다. , 대재앙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하리라! 새로운 화랑들을 구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인도로 여행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하지만 대재앙은 일어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으름이 절실함을 무력화시키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오늘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대재앙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오늘 밤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184)

삶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에 대해 읽는 책이다. 그 책의 다음 장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좋은 결론은 책의 후반부에 적혀 있다는 것 외에는. 앞부분의 내용이 어둡다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고통은 진정한 길을 열어 준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루미는 다시 말한다.

슬픔은 기쁨을 위해 그대를 준비시킨다. 그것은 난폭하게 그대 집 안의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린다. 새로운 기쁨이 들어올 공간을 발견할 수 있도록. 그것은 그대 가슴의 가지에서 변색된 잎들을 흔든다. 초록의 새잎이 그 자리에서 자랄 수 있도록. 그것은 썩은 뿌리를 잡아 뽑는다. 그 아래 숨겨진 새 뿌리들이 자라날 공간을 갖도록. 슬픔이 그대의 가슴으로부터 흔드는 것마다, 훨씬 좋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224)

현자가 다시 말했다.

길일이란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늘이 바로 그 일을 하기에 길일이라고 말해 온 것입니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라마 왕자의 즉위식을 거행하십시오.”

 

(236)

고통은 우리를 동굴 안에 가두며, 영원히 외부의 빛을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삶이 이대로 끝나 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 기간을 통과하면 어느 날 봄 햇살이 느껴지고, 터질 듯한 꽃망울들이 보이고, 바람을 이겨 내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가온다. 어떻게 뿌리를 내렸을까 싶은 돌틈의 풀꽃에서 힘을 얻는다. 그 눈뜸,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 하나만으로도 어둠의 시기는 가치가 있다. 삶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이 더움 명상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배우고, 정화하고, 자기를 전체적으로 보는 기회이다. 그 영적 어둠의 시기를 통해 자기 안의 신성과도 연결된다. 그것이 정신적 고통이 주는 신비이다.

 

(247)

인간에 대한 가장 나쁜 예의는 너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바로잡아야만 한다는 자세이다. 각자의 내면에 훌륭한 교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연장이 망치일 때는 모든 대상을 튀어나온 못으로 보게 된다. 자신이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그 길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 길은 많은 옳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다. 행복한 관계는 비평이나 조언이 아니라 상대방의 순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265)

남자는 비통해하며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는 신에게 물었다.

난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나요?”

신이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 넌 아무것도 소유한 적이 없어.”

남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내 것은 뭐였죠?”

신이 말했다.

너의 가슴 뛰는 순간들, 네가 삶을 최대한으로 산 모든 순간이 너의 것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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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조금 이상하긴 해. , 어쩌겠는가, 내가 자꾸 말하는 걸 또 반복하자면 이렇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정해져 버린 진리를 알려주려고 내가 수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해야 할 건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니까.”

 

(76)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배움의 동기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도 아니고, 학습 뒤에 주는 눈깔사탕도 아닌 것이다. 배움 그 자체이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기회 그 자체다. 새로운 앎을 향한 이 마음을 우리가 짓밟거나 억누르지만 않으면 된다. 또한 아이들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흥미를 잃어가지 않도록 다양한 환경을 충분히 만들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78)

그 어떤 수학 동아리도, 그 어떤 퍼즐도, 그 어떤 지능 개발 게임도 없었다. 아이를 안고, 뽀뽀하고, 포대기로 싸주면서, 항상 돌보았을 뿐이고 그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결국은, 적어도 어느 특정한 연령대에서는 부모의 따뜻한 손길과 정서적인 유대가 아이의 발달에서, 특이 아이의 지능 발달에서 다른 어떤 형태의 활동이나 교육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부모, 여러분,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라!

 

(101)

나는 ?”라고 물었는데 아이들은 그건 왜 그렇게 되었지?”를 설명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싶다. 소나무가 자작나무보다 크다는 것은 논리적 결과인데, 논리는 무시하고 왜 큰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107)

내 단점은, 이런 행동을 보고 어린아이니까 그러려니 하지 못하고 어른이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반응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의 행동을 야단쳐라라는 원칙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행동이 따라주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건, 스스로 기분이 상해버린다는 것과, 전체 분위기가 아이들의 유치한 투정보다는 나의 이런 단점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174)

그렇다, 증명. 수학 전체를 통틀어 핵심적인 개념. 나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다. 증명은 다른 모든 학문과 수학을 구별하는 개념이라고. 무엇이 증명이고, 무엇이 증명이 아닌가에 대한 이해는 수백 년에 걸쳐 진화했다. 증명의 현대적인 형태는 고작해야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모습을 갖추었다. 지금은 수학 교사라면 누가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명제들을 지난 시대 수학자들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겼다. 위대했던 수학자들조차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이상한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완전히 딴 세상말 같은 추상적인 논의들로 어떻게 명제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182)

나의 기본 원칙 중 한 가지를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아이들에게 내 관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말이다. 그러나 그 원칙에는 더 중요한 원칙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원칙만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자는 원칙. 아마도 지금이 유연성을 보일 적당한 때일지 모른다.

 

(283)

(역주)러시아식 이름 부르기. 러시아 문학책을 읽을 때 껄끄럽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러시아 사람 이름은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 이름-아버지 이름(부칭)-이라는 구조다. 부칭에는 아들일 경우, 아버지 이름 다음에 주로 비치로 끝나게 해서 붙이고, 딸일 경우 브나로 해서 붙인다. 우리말로 바꾸면, ‘~비치‘~의 아들’ ‘~브나‘~의 딸로 해석할 수 있다.

 

(286)

그러나 누가 옳았는지 말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나한테 중요한 건 너희들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스스로 생각하기를 익혔으면 하는 거니까. 오늘도 그래. 너희들 가운데 한 명은 첫째 질문에 정답을 말했고 또 한 사람은 둘째 질문에 올바로 답했어. 그러나 누가 어땠다는 건 말 안 할 거야.

 

(383)

우리가 뫼비우스의 띠에 이르렀을 때 줴냐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우리가 언젠가 수업에서 그걸 함께 붙여보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2년도 넘은 일이다.  1981 2월 아니었던가! 줴냐 다음으로 뻬짜와 지마도 기억해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우리의 수업에서 한 어떤 것도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 설령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라도 필요하면 언젠가 떠오를 수 있다.

 

(398)

- 그런데 여기서 명심할 게 하나 있어. 만약 어떤 사람이 항상 모든 걸 옳게 말한다고 해서 이게 가장 똑똑하다는 것까지 의미하지는 않아.

- ?

- 왜냐하면 똑똑한 사람은 옳은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뻔하지 않은것들, 그러니까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그러면서 가끔 실수도 한다면 그는 어쨌든 똑똑한 사람인 거야. 현명하지 않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것, 꼭 말하지 않아도 되는 걸 말하지. 또 그 사람이 항상 모든 걸 옳게 말한다 해도 그러기 위해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이에 대해 지마가 질문했다.

- 아빠, 왜 아빠는 뭐든 교훈을 항상 말해?

 

(403)

그러나 훨씬 중요한 건 다른 것이다. 지마가 문제를 기억했고 그걸 오래도록 생각했고 마침내 풀이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마가 천재적이고 눈에 띌 만큼 놀라운 재능으로 반짝거리는 아이라는 인상을 준 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지마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값진 소질이 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오랫동안 생각해보고 완강하게 밀어붙여 체계를 잡는다는 것이다.

 

(515)

그림을 잘 그렸는지에 대해서 여기서 따로 말은 않겠다. 어쨌든 표현력은 하루하루 늘어갔다. 목도리를 펄럭펄럭 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건,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건, 풀밭에 있는 소들이건, 표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했다. 우리 부부 또는 우리가 아는 사람 누구건 그림 속 이야기 주인공이 되면 비슷한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516)

그러나 핵심은 역시 계속되는 에너지, 쉼 없이 그리고 나중에 또 그리려는 요구였다. 내버려두었는데도 줴냐 자신에게서 비롯된 그런 기적을 우리는 보았고, 그래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몰랐다. 그림을 향한 갈증이 평생 계속될 것인 것 아니면 시작했을 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아름다웠던한순간으로 사라져버릴 것인지.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아이에게 하루에 최소한 반 시간씩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했을까? 자연이 내린 경이로운 현상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 경이로운 현상이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앞에 있었던 것이다.

 

(520)

그래서 나는 또다시 독자들에게 말씀드린다. “제발 부탁이오니 잊지 말아주십시오. 아이들에겐 수많은 면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 그중 아주 작은 한 면에 대해서만 쓴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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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그의 아버지의 눈에는 이러한 시대 상황이 아마도 거의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 여러 대에 걸쳐 그래 왔던 것처럼,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방랑하는 음유시인이나 그 비슷한 부류의 방랑자를 제외한 약사들은 귀족의 궁정에서나 성직자의 궁정에서나(모차르트는 양쪽 다 해당된다) 당연히 하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시종이나 마차꾼처럼 하인의 제복을 입고(하이든도 생애 대부분을 이렇게 살았다), 하인들의 부엌에서 요리사, 부엌일 담당 하녀들과 어울려서 식사했다. 하인들 중에서도 악사의 지위는 높지 않았다. 그들은 고용주가 허락하지 않으면 여행을 할 수도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하이든의 첫 일자리인 보헤미아의 모르친 백작의 궁정에서처럼) 결혼조차 금지되었다. 대개는 시종처럼 필요에 따라 1 2역을 해야 했다(J.S. 바흐도 바이마르 궁정에 처음 일자리를 얻었을 때 공식적으로 그런 역할을 요구받았다.)

 

(26)

이를 테면 프리드리히 멜키오르 폰 그림 남작도 다른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이렇게 그 어린 영혼에게 정복당했다.

어디서 이런 아이를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말씨와 행동은 동심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풋풋함이 어우러져 찬란한 생명력과 원기가 넘쳐 흘렀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그 쾌활함은 그 아이가 제대로 영글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적정조차 떨쳐냈습니다.”

 

(29)

모차르트는 알았을 리가 없지만 트럼펫은 이 세상 어느 인간 집단에서나 강력한 남성, 더 나아가 남근을 상징했다.(아직도 그런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꿰뚫는, 공격적인 독재적이고 위협적인 속성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은 것이, 트럼펫은 어느 나라에서나 군대를 집합시키거나 적을 위협하기 위해 고안된 군악기이다. 18세기 유럽 음악, 특히 바로크 음악에서는 왕의 영광을 찬양하는 음악에서 가장 도드라진 악기로 쓰였다. 모차르트의 트럼펫 공포와 아버지에 대한 공포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그의 어린 시절 모토는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다. 성인이 된 뒤에도 스트레스로 힘겨울 때면 종종 그 모토를 읊조리곤 했다. 하느님이 그러하듯이 아버지도 베풀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게 아버지의 주요한 교육 기법 중 하나였다. 모차르트에게 스승이라고는 오로지 아버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이들을 학교 문전에도 데려가지 않고, 또래와의 우정을 거의 박탈한 채로 키웠다.

 

(83)

자식이 어린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른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양치기는 양을 잃어버렸다. 레오폴트로서는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박탈당한 것이었다. 의존적이었던 것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던 셈이다. 메이너드 솔로몬에 따르면 모차르트 가정에서 진짜 영원한 어린이는 볼프강이 아니라 레오폴트였다. 밖으로 내돌려진 신동들의 실제 모습(신화가 만들어낸 모습의 상대어로서)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모차르트가 청중이나 가족에게 휘둘렀던 바로 그 권력이다. 그가 권력을 남용한 흔적은 없지만 가족이나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읽다 보면 언제나 그가 권력을 의식했고 즐겼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루이 15세의 연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에게 차갑게 거절당했을 때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게 입 맞추기를 거절한 그대는 누구십니까? 황후께서는 내게 입 맞추셨습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와도 같은, 티 한 점 없는 어린 모차르트의 이미지를 바로잡아줄 요긴한 대목이다.

 

(112~113)

언제나 그는 가족이라는 단위에 방점을 찍었다.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연주 여행을 돌아다니던 시절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는 오로지 아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돈을 쏟아 부었으며, 그 결과 경제적으로 말할 수 없이 쪼들리게 되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모차르트에게는 죄의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실은 레오폴트는 자식들 덕에 한 재산을 벌었으며 그 대부분을 여기저기에 빼돌렸고, 그러면서도 남들에게는 쉬지 않고 돈이 없다고 불평을 해댔던 것이다. 레오폴트는 심리전의 명수였다.

 

(134)

모차르트는 헨델 이래로 후원자라는 족쇄 대신에 자유를 선택한 첫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를 함께 해방시켜 그들이 서로 끊임없이 대화하게 만든 첫 작곡가로 불려 마땅하다. K.271에 나오는 대화는 그 수준과 내용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관악 파트(오보에와 호른)를 음악적 대화의 일선에 내세운 것도 마찬가지이다.(첫 악장 알레그로에서 오보에와 피아노가 나누는 대화는 이런 매력적인 자리바꿈의 첫 시도이다.) 이때부터 그는 협주곡에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관악 밴드에게 이중의 역할을 주었다. 그 하나는 오케스트라라는 팔레트 위에서 색조를 혼합하는 마법의 중개자 역할이고, 또 하나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이다. 다수에 둘러싸인 독주자를 아우르고 각 파트를 하나의 위대한 전체로 연합해나간 것이 모차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이다.

 

(151~152)

그러나 여기에도 모차르트 특유의 초연함이 있었다. 그는 레오폴트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녀는 집안 살림을 모두 책임지고 있지만 그들의 태도로만 판단한다면 아버지는 그녀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그 가정에서 직접 목격한 것만 묘사한다 해도 편지지를 여러 장 채울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못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작고 까만 두 눈과 사랑스러운 용모에는 순순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위트가 없지만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가기에 충분한 상식을 갖췄습니다. 사치와는 거리가 멀고요, 옷차림도 대개는 초라해요. 그녀의 어머니가, 없는 살림에 다른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그녀는 뒷전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그녀는 살림살이를 터득했고 아주 친절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는 온 영혼으로 저를 사랑해요. 제가 이 이상의 아내를 바랄 수 있을까요?”

 

(169)

이 헌정의 편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 가지 특징은 모차르트의 힘든 고생에 대한 언급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그 어떤 일에도 힘들여 고생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저 음악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고 여겼다. 마치 모차르트는 하느님의 물길을 열어준 도랑이나 도구적인 존재였다는 듯이(언제나 악전고투하며 창작에 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베토벤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지만 비범하게 조직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으며, 따라서 사실상 모든 작곡 행위가 머릿속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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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2009)

 

(21)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 살아 있는 삶, 다시 말해서 죽음이 함께 깃들어 있는 삶을 고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식품을 고르기 위해서도, 사람 사는 동네에 이른바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59)

모든 시간이 같은 시간이 아니며, 모든 땅이 같은 땅은 아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같은 길이로 쪼개서 달력을 만들지만 어떤 날은 다른 날과 다르고 어떤 시간은 다른 시간과 다르다. 어떤 독재 권력이 추석을 양력 9 18일로 바꾸고 그날에 차례를 지내라고 강압할 수는 있어도, 이 나라 사람들을 남북으로 이동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추석인 날을 추석 아닌 날과 다르게 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제 고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나라의 시간 속에 쌓아놓은 기억이다. 땅이라고 다를까. 어느 부자가 어느 언덕에 아무리 호화로운 집을 지어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루이틀도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내 고개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비옥한 땅에서건 척박한 땅에서건 사람들이 살고, 꿈꾸고, 고뇌하는 가운데 조금 특별한 일을 실천하려 했던 기억이 한 땅을 다른 땅과 다르게 하고, 내 몸을 나도 모르게 움직이게 한다. 땅이 그 기억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이 땅에서 반만년을 살았다 한들, 한 사람이 이 땅에서 백년을 산다 한들,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과 같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78)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여 한반도와 만주에 걸치는 거대한 나라를 건설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나라라고 볼 수 있을까. 풍속과 문화가 지금과 같이 않을 것이며, 따라서 언어도 다를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소월의 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람살이 형편이 달라지고 서로 사귀는 범위가 달라졌을 것이니,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월이라는 재능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힘으로 이 땅에 지금보다 더 부강하고 살기 좋은 나라가 이룩되어, 거기서 수많은 다른 재능이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나라가 나라일 수는 없는 것이 확실했다. 고구려가 건설했을 큰 나라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이기를 바란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 나라의 역사가 어떤 역사이건 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에도 할 수 있었다.

 

(108)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말에 대해서도 필경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환경이고,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저와 이웃의 행복을 가꾸어가는 터전이다. 물론 우리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정의가 올바르게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이 정말로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살아온 역사도 우리의 민주적 의지를 제약하고, 여러 가지 물질적 조건도 우리를 가로막는다. 우리 개개인의 민주적 자질이 충분히 성숙한 것도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인격이 완성된 것도 아니다. 이 점은 우리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다. 어디에서건 민주주의의 이상이 실현된 적은 없다.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저마다 제 마음대로 행동해도 옳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조건이 이러저러하니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까지만 실현하자는 식으로 민주주의에 선을 긋는 것은 현실의 압제를 인정하자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

 

(176)

그런데 우리는 그 실패의 순간마다 변화한다. 사람들마다 하나씩 안고 있는 이 사소한 당신의 사정들이 실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 바로 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당신의 쓰고 있는 글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한다. 자신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할 중요한 지식으로 여긴다는 것이며, 자신의 사소한 변화를 세상에 대한 자신의 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275)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

 

(281)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 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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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R.R.마틴]<왕들의 전쟁 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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