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이전 세대들이 평화를 일시적인 전쟁 부재 상태로 생각했다면, 지금 우리는 평화를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여긴다. 1913년에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현재는 전쟁이 없지만 내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평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현재의 정황상 그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평화가 프랑스와 독일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에(모두는 아니지만) 퍼져 있다. 내년에 독일과 폴란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또는 브라질과 우루과이 사이에 심각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56)

1985년에 한국은 비교적 가난한 나라였고, 전통에 얽매여 있었으며, 독재체제하에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은 경제강국이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안정된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민주정권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1985년에 10만 명 당 아홉 명 정도의 한국인이 자살한 반면, 현재 한국의 연간 자살률은 10만 명당 서른여섯 명이다.

 

(92)

역사 공부의 목표는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머리를 이쪽저쪽으로 돌려, 조상들이 상상할 수 없었거나 우리가 상상하기를 원치 않았던 가능성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이끈 우연한 사건들의 연속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생각과 꿈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깨닫고, 다른 생각과 다른 꿈을 품을 수 있다. 역사 공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지만, 적어도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212)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그물은 곧 풀리고, 되돌아보는 우리는 그런 헛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천국에 가기를 바라며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으로 보인다. 어째서 30년 전 사람들은 공산주의 낙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핵 대학살을 불사할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백 년 뒤 우리 후손들에게는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236)

정기적으로 엄밀한 평점을 매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시대의 대중교육제도이다. 공장과 정부 부처가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숫자언어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지자 학교가 그 뒤를 따랐다. 학교는 평균점수에 따라 학생 개개인의 가치를 평가하기 시작했고, 교사와 교장의 가치는 그 학교의 전체 평균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리고 관료들이 이런 척도를 채택하자마자 실제가 변했다.

 

(261)

일부 과학적 발견들이 종교적 교의를 뿌리째 뒤흔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 아니다. 예컨대 이슬람 교의는 7세기 아라비아에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과학적 증거들이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잘 동작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은 우리에게 인간이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범죄자들을 질식시켜 처형해도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과학은 알지 못한다. 종교만이 이런 질문들에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아.

 

(283)

중세 사람들은 역병이 발생하면 하늘을 쳐다보며 신에게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오늘날 치명적인 새 유행병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사람들은 휴대폰을 붙들고 주식 중개인과 통화한다. 주식거래에는 유행병조차 호재이다.

 

(294)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된다. 사용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실제로 당신이 지식의 총량을 늘리면 그 지식은 당신에게 더 많은 원재료와 에너지를 준다.

 

(314-315)

감정은 우리의 사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절차에도 의미를 제공한다. 누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지, 어떤 외교정책이 채택되어야 하고 어떤 경제조치가 취해져야 하는지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교황의 명령이나 노벨상 수상자 협회의 결정에 복종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 국민들에게 당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우리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알고, 개개인의 자유선택에서 정치권력이 나온다고 믿는다.

 

(323)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 하늘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옮겨오면서 우주 전체의 성질이 변했다. , 뮤즈, 요정, 악귀 들로 바글거리던 외부 우주는 텅 빈 공간이 되었다. 반면 지금까지는 날것의 감정들을 처박아두던 별 볼일 없는 공간이던 내부세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풍부해졌다. 천사와 악마는 세상의 숲과 사막을 떠도는 실제하는 실체에서 우리 심리 안의 내적 힘으로 탈바꿈했다. 천국과 지옥도 구름 위 어딘가에 있고 화산 및 어딘가에 있는 실제 장조에서 마음의 내적 상태로 해석이 달라졌다. 우리는 가슴 안에 분노와 증오가 불붙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고, 적을 용서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눌 때마다 천상의 기쁨을 누린다.

 

(331)

인본주의적 삶의 최종 목표는 광범위한 지적, 정서적, 육체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온전히 발현시키는 것이다. 19세기 초 근대 교육제도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빌헬름 폰 훔볼트는 존재의 목표는 가능한 한 가장 폭넓은 인생 경험을 증류해 지혜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인생에는 오직 하나의 정점이 있는데, 그것은 느낌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경지라고 말했다. 인본주의의 모토로 삼기에 딱 알맞은 말이다.

 

(380)

스스로 자문해보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가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항생제 같은 과학적 발견, 컴퓨터 같은 기술적 발명, 페미니즘 같은 사상적 창조를 포함해 후보 목록이 많아 고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자문해보라. 20세기에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같은 전통 종교들이 이뤄낸 가장 영향력 있는 발견, 발명, 창조는 무엇인가? 이것 역시 어려운 질문인데, 고를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410)

사실을 말하면,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경험을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하지만 유일하지는 않은) 원재료로 이용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다시 경험하는 자아가 실제로 느끼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라마단 때의 금식과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배고픔을 다르게 경험한다. 이야기하는 자아가 배고픔에 부여하는 각기 다른 의미들은 매우 다른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462)

그러면 구글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네가 태어난 날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네 이메일을 모두 읽었고, 네 통화를 모두 기록했고, 네가 좋아하는 영화들, 네 유전자 정보, 네 심장 기록도 모두 갖고 있어. 네가 데이트한 정확한 날짜도 보관하고 있으니, 존이나 폴과 만날 때마다 네 심장박동, 혈압, 혈당수치를 초 단위로 기록한 그래프를 원한다면 보여줄 수 있어. 필요하다면 네가 그들과 가진 모든 성관계의 정확한 순위도 제공할 수 있어. 그리고 당연히 나는 너를 아는 것만 큼 그들도 잘 알아. 이 모든 정보, 내 뛰어난 알고리즘, 수많은 관계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통계자료를 토대로, 나는 너에게 존을 선택하라고 권해. 장기적으로 그와 함께할 때 더 만족스러울 확률이 87퍼센트야.”

 

(474)

자유주의가 직면한 세 번째 위협은, 일부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해독 불가능한 존재로 남아 소규모 특권집단을 이룰 거라는 점이다. 이런 초인간들은 전대미문의 능력과 전례 없는 창의성을 지닐 것이고, 그런 힘을 이용해 세계적으로 중요한 대다수의 결정들을 계속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유지보수를 담당할 것이고, 시스템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업그레이드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컴퓨터 알고리즘과 새로운 초인간 양쪽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계급이 될 것이다.

 

(497)

마음을 조작하는 기술과 마음의 스펙트럼에 대한 우리의 무지 그리고 정부, 군대, 기업의 편협한 관심이 합쳐질 때, 우리는 틀림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다. 우리는 몸과 뇌를 업그레이드하는데는 성공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사실 기술 인본주의는 결국 인간을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다. 시스템은 다운그레이드된 사람들을 선호할 텐데 그것은 그런 사람들이 가지게 될 초인간의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시스템을 방해하고 속도를 떨어뜨리는 성가신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모든 농부들이 알고 있듯이, 염소 무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는 대개 가장 똑똑한 염소이다. 농업혁명 과정에서 동물의 마음 능력을 떨어뜨리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기술 인본주의자들이 꿈꾸는 두 번째 인지혁명은 똑 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이다. 즉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전달하고 처리할 수 있지만, 집중하고 꿈꾸고 의심하지 못하는 인간 톱니를 생산할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503)

데이터교는 우주가 데이터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현상이나 실체의 가치는 데이터 처리에 기여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이색적인 비주류 개념 같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개념은 이미 과학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데이터교는 두 과학 조류의 격정적 합류에서 탄생했다.

 

(505)

이렇게 보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국가가 통제하는 공산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이념, 윤리적 신조, 정치제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경쟁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데이터를 나누어 처리하는 반면, 공산주의는 중앙에서 모두 처리한다. 자본주의가 데이터를 처리하는 방식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 그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독립적으로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유시장에서 빵 가격은 어떻게 정할까? 우선 모든 빵집이 원하는 만큼 빵을 생산하고, 원하는 만큼 가격을 매길 것이다. 소비자들이 여력이 되는 한 얼마든지 많은 빵을 살 수 있고, 경쟁관계인 빵집에 가서 빵을 사도 된다. 바게트 한 개에 천 달러를 매겨도 불법이 아니지만 아무도 그 빵을 사지 않을 것이다.

 

(513)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기술이 정치보다 한발 앞서 우위를 점하는, 인터넷 같은 혁명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곧 우리 사회와 경제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앞지를 텐데도, 우리의 정치적 레이더망에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다. 현재의 민주적 구조들은 관련 데이터를 충분히 빨리 수집해서 처리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적절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생물학과 사이버네틱스에 대해 잘 모른다. 따라서 전통적인 민주정치는 중요한 사건들을 제어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비전들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537)

21세기에는 더 이상 감정이 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고리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전례 없는 연산력과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우월한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있다. 구글과 페이스북 알고리즘들은 당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알 뿐 아니라, 당신에 대해 당신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백만 가지 다른 점들을 알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이제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을 그만두고, 이런 외부 알고리즘에 귀 기울이기 시작해야 한다.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투표하는 반면 다른 유권자는 공화당에 투표하는 정확한 신경학적 이유까지 안다면, 무엇하러 투표를 하는가? 인본주의의 계명이 네 감정에 귀 기울여라!”였다면, 데이터교의 계명은 알고리즘에 귀 기울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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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기는 절대다수의 시민이 일방적인 선전과 프로파간다에 오랫동안 노출돼온 사회에서 핵에 대한 시민적 상식이 선진적 탈핵국가들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더욱이 척박한 여건에서 자기희생적으로 활동해온 소수의 탈핵운동가들의 노력만으로 사회 전체의 해묵은 사고습관을 깨트리는 것은 애당초 그 한계가 명백했다. 또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사회의 핵에 관한 상식이 아직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왜곡된 교육과 사이비 언론 때문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끊임없이 인간의 이기심과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의 압력 밑에서 우리 자신이 보다 지혜로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박탈당해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6)

한미동맹과 관련해서 트럼프의 등장 이후, 미국은 한국에 삼중의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첫 번째는 북한에 대한 미국 단독의 예방전쟁 위협에서 한미FTA 재협상 요구까지, 기존의 동맹의 규범을 완전히 해체, 파괴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이다. 두 번째는 기존의 한미동맹을 관리해온 워싱턴의 관료적, 패권적 요구로, 그 내용은 차기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되어 있다는 빅터 차의 4월 상원 군사위원회 증언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진보적인 문재인 정부의 출현이 미국에 도전이기는 하지만 (1) 문재인 정부 취임 이후 북한이 도발할 것이 확실하고, 그에 따른 한미동맹의 강화 필요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독자적으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가능성은 적고, (2)중국이 사드보복을 지속할 것이기 때문에, 사드배치를 강행하면 이를 계기를 아예 한국의 대중국 경제의존이 줄어 한중 간에 경제적 이격이 발행할 긍정적인 전망도 가능하다고 증언했다. , 북한의 도발을 배경으로 한국을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키신저 등이 미국 패권의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보존을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빅딜을 추진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주한미군 철수 등 현재 한미동맹의 근간이 전면적으로 해체될 수도 있다.

 

(53)

여기에는 의도적으로 아시아의 위기와 긴장을 조성하려는 의사가 국제관계 속에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동안 많은 나라들의 관련 분야 기업들은 합법/불법적으로 무기시스템, 부품, 관련 기기, 소재-말하자면 창을 수출해서 거대한 이익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지스 시스템, 사드 등, 차례차례로 거액의 요격 미사일들과 여러 종류의 통상무기-방패를 이 지역 국가들의 정부에 떠넘기고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에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국가를 초월한 국제 군산정복합체라고 해야 할 세력이 대두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64)

피어슨과 튜더는 이 같은 변화가 북한사회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는 현상들도 포착한다. “도시 외곽에서는 농부들이 여전히 소를 끌고 밭을 간다. 병사들은 묽은 죽으로 연명한다. 심지어 평양시내의 보다 일반적인 주거지역에서도 수십만 시민이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평균적인 북한의 생활수준은 어림잡아 1970년대보다 더 나빠진 상태다.” 그러나 사적 거래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신흥 상업 계급이 떠오르는 것 등은 분명히 이전에 없었던 변화다. 출신성분에 따라 사회적인 지위가 결정되는 등의 전통은 여전하긴 하지만, 과거에 견줘 그 힘을 크게 잃었다. 이제 북한을 움직이는 주 원동력 가운데 하나는 이다. “북한의 새로운 시스템은 불공정하며, 다윈의 적자생존 방식이다. 하지만 적어도 평균적인 시민에게 삶의 주체라는 느낌과, 미미하기는 하나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과연 이것을 자본주의가 아니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153)

작가 반디1900년대 초 북한의 경제난과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민중의 노력이 배반당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1900년대 초는 구소련의 해체로 인한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연이은 자연재해, 미국이 주도한 경제봉쇄로 북한이 극심한 체제위기를 맞이했던 때였다. ‘반디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북한이 직면했던 경제위기가 권위주의적 정치체제, 민중을 배제하는 억압적 신분질서, 민중생활을 억압하는 과도한 통제에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반디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1990년대 초, 중분 북한의 상황을 그려냈다. 그는 민중의 성실한 노력이 배반당하는 북한의 현실에 절망했고, 아래로부터의 세계관으로 북한 체제의 변화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고발>은 북한에서 보내온 문학적 탄원서이다. 북한 민중의 고통에 대한 증언이며, 그 고통의 발화점이 민중을 배반하는 정치체제에 있음을 보여준다.

 

(204)

물론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체계적인 신화 서술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 특히 여러 부족을 통일했을 때라든가 나라가 외침을 받아 존망이 위태로울 때, 이런 체계화의 욕망은 자연스레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때 문자와 기록이 구전을 압도하는 현상도 나타나지. 한번 문자로 기록된 것은 신화든 역사든 이제 물리기도 쉽지 않아. 그 경우,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해. 가령 <고사기>의 경우 새로 정권을 잡은 야마토의 신화는 정사로 우뚝 서지만, 그렇지 못한 씨족은 자신들의 신화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문제는 신화가 체계적이면 체계적일수록 무언가 더 어두운 그늘을 감추고 있기 십상이라는 거야. ‘국사의 기원으로서 건국신화는 가령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일반적이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일본만큼은 신화가 신화로 머물지 않고 아예 역사 시기 전체를 관통하려는 욕망을 지닌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이게 무슨 뜻일지 생각해봐. ‘신화=역사가 되고, 그것도 만세일계의 신화=역사가 된다면?

 

(207)

일본의 힘은 바로 이렇게 모든 것을 바꾸는 힘에 있다는 거야. 이 점은 어쩌면 네가 이미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나보다 더 많이 실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자도, 철학도, 종교도 마찬가지야. 예컨대 일본의 도시에서는 시내 어디서나 을 볼 수 있지. 처음에는 그래서 어, 이상하다, 일본은 불교 대신 신도의 나라라지 않았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 나 또한 그랬고, 일본의 불교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신불습합이라는 관점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돼. 어떤 학자는 두 개의 이질적인 종교가 천여 년간이나 공존하면서 새로운 신 관념을 만들어낸 건 세계 종교사에 유례를 찾지 어려운 현상이라고도 하지. 그걸 일본인의 관용성 때문이라고 보는 데에는 조금 주저하게 되지만, 아무튼 우리가 돌아다닐 때 교토에서도 절 같은 신사, 신사 같은 절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잖아. 거기서 본지수적을 굳이 구분하는 건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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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사형은 대법원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집행되었다.

사형이 이미 집행된 줄도 모르고, 사형 판결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길을 가던 가족들은 그 소식을 듣고 주저앉았다. 내 남편, 내 아빠, 내 아들의 얼굴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안녕, 잘 가, 한마디도 해보지 못하고, 걱정 말라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보지도 못하고, 눈이라도 한번 마음껏 맞춰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잃었다. 나라에서는 유족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사형수들의 시신을 강제로 화장해서 가족에게 보냈다. 죽은 몸이라도 만져보고 싶었어요. 기진한 사형수의 부인이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144)

한지가 내가 사는 곳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볼 때라든지, 왜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볼 때 그랬다.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대답 대신 나의 할머니, 엄마, 옆집 아주머니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차라리 그쪽이 한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더 적합한 것 같아서였다.

 

(164)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221)

딸이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볼 수 있던 때도 있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가면 엄마!”라고 기쁘게 부르며 달려오던 딸이었다. 딸을 품에 안으면 모든 통증이 누그러졌고 다음날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났다. 세상의 누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밝고 예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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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가 엄청 낮은 편이라, ‘실망하고 좌절할 일은 적고 감탄하고 기뻐할 일은 참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걱정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고, ‘Just do it!’ 인생인 터라 세상에서 엄마표 영어가 제일 쉬었어요!”라고 소리칠 뻔도 했다.

 

(9)

엄마표 영어가 힘들고 육아가 힘들다면 그건 아이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때문에 힘든 것이다. 나 자신이 못마땅하고, 내가 처한 상황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육아고 엄마표 영어고 뭐고 다 지겹다. 나와 친정 엄마 사이에서 무의식 중에 쌓인 상처가 만든 어떤 강박, 트라우마가 불행의 이유로 작용할 때도 있다.  

 

(39)

이게 정답이다. 육아 문제는 자기 아이에게 물어보면 된다. 옆집 아줌마 말고 아이와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와 엄마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하려면 평소 아이가 엄마한테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정도로 관계가 좋아야 할 것이다. 아이와 평소에 이야기를 자주 나눠서 적어도 대화가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대화가 어색하면 엄마가 먼저 물꼬를 터야 한다. 엄마가 먼저 엄마의 힘든 점, 걱정거리들을 아이에게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대화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이에게 실수할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용서를 구할 줄 아는 엄마라면, 즉 대화가 통하는 엄마라면 아이는 솔직하게 속마음을 툭 털어놓을 수 있다. “엄마, 나 이거 안 하면 안 돼? 정말 못하겠어.” 그래도 대화가 시작된다. 엄마와 정말 툭 까놓고이야기 나누는 것이 익숙한 아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존중해주는 엄마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라면 이게 쉽다. ‘이게 뭐지? 왜 짜증이 나지? 이 억울한 느낌은 뭐지? 이 무기력은 뭐지?’하며 자신의 감정, 상황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리, 내 아이를 이런 아이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대화가 되는 아들과 엄마의 관계라면 엄마표는 저절로 올바르게 굴러갈 것이다.

 

(269)

두 아들의 엄마표 영어 17년 후에 알았다. 아이와 엄마를 성장하게 하는 건 대화였고, 대화가 어렵고 어설펐던 나를 키워준 것은 이었다. 대화의 소재가 꼭 책일 필요는 없다. 어떤 엄마에게는 그것이 TV 드라마일 수도 있고, 코미디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혹은 여행, 게임, 웹툰, 요리, 운동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나는 손을 뻗으면 잡히는 그림책과 소설책, 아침마다 배달되는 신문이 아이와의 대화 소재였다. 아이랑 대화 하는 거 쉽지 않다. 내가 무슨 토크쇼 진행자도 아니고, 이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늘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눴던 부부는 밤마다 마주 앉아도 또 이야기가 많다. 어제 이야기한 에피소드 후속편이 날마다 이어지기 때문에 보충설명을 해줘야 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그렇다. 대화를 많이 하는 집은 언제나 대화가 넘친다. 반면, 대화가 없는 부부, 대화가 없는 부모와 자식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감당이 안 되어 입을 닫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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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대부분 인간의 과도한 욕망에 기인한다.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바라는 욕망이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만든다. 이런 욕망과 일탈이 갈등을 유발하고 우리 사회를 망가뜨린다. “저 사람이 원래 저랬나?”라는 물음은 바로 이런 괴물의 탄생을 말해준다. 시대를 넘어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요강, 그 욕망에 빌붙어 소소한 욕구를 채우려는 또 다른 욕망덩어리들. 그들이 벌려놓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마천의 천도시비론(天道是非論)을 흘러간 옛이야기로 넘길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다.

 

(10)

사랑스러운 현재와 경재, 너희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벌써 스무 살 안팎이 되었겠구나. 나는 너희들이 10년 정도 지난 뒤에 이 글을 읽을 것이라 생각하고 쓰고 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나는 지금 암에 걸려서 언제 이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다. 복막 중피종. 현대 의학이 사실상 포기한 병 중 하나다. 워낙 희귀해서 우리나라 인구 5000만 명 중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이나 유럽의 통계를 찾아봐도 이 암에 걸린 환자 중 생존자가 거의 없다. 대부분 1년을 전후에 사망하고, 길어야 5년을 산다. 나도 병원에서 12~16개월을 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의사가 얘기한 예상 기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상대로 한 경험적 통계이기 때문에 나처럼 병원 치료를 피하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73)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당시 내가 읽은 책들이 대부분 고전이라는 점이다. 정작 내가 살아갈 현대와 관련된 책은 전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선생님들도 고전은 권장했지만, 현대를 다룬 작품을 소개해준 적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대학에 가서야 깨달았다.

 

(81)

대학에 들어간 뒤 처음 한두 달은 고민 기간으로 정했다. 재수를 해서 법대를 갈까, 아니면 정치학과를 그대로 다닐까. 한 달 만에 정치학과에 남기로 결정했다. 정치학과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보니 이 사람들은 나와 고민의 차원이 달랐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될 것인가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 꼴이 우스웠고, 상대적으로 선배들이 대단해 보였다. 아마 법대에 갔다면 언제부터 고시 준비를 할까 이런 생각만 했을지도 모르는데정치학과에서는 고시를 왜 보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98)

우리는 가끔 나만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증거를 찾고 싶어한다. 하지만 사람은 다 비슷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사람마다 분명히 조금씩의 차이는 있다. 하지만 비슷한 점이 더 많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공통점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주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 필요하다.

 

(111)

하지만 이때 생긴 꿈은 대학 4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경험한 것들에 대해 철학자들, 역사 속 인물들과 숱한 대화를 나누며 나 스스로 얻은 것이다. 그런 만큼 말 그대로 순순하고 소중한 나의 꿈이다. 그 꿈이 무엇이냐고? 그건 우리 사회를 더욱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드는 것, 그러면서도 인간미가 넘치는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사회를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현재로서는 민주주의이다. 다수 대중의 이해가 반영되면서도 소수를 보호할 수 있는 체제. 종교는 내세에서 그런 약속을 할지 모르지만, 나는 현실에서 그런 사회를 이루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혁명을 논할 것도 없이 그런 사회에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129)

입사 시험 경험을 통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먼저 한 가지는 사기업의 경우 절대로 똑똑하고 원칙에 충실한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올곧으면 회사의 부당한 방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최규석의 만화 <송곳>에서처럼 노조에 가입해 회사와 대결하거나 회사에 노조가 없다면 본인이 직접 노조를 만들 수 있다. 기업은 적당히 구부러질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원칙을 따지기보다 불법이나 부적절한 일도 회사의 지시라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158)

물론 그 전에 자신에게 인사권이 있다면 적절한 사람을 골라서 쓸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부족한 분야라면 자신보다 잘 아는 사람을 활용하고 그 사람 말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지도자가 모든 걸 다 알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대통령이 모든 분야를 어떻게 다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 내에서 적절한 배치가 필요한 것이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그러자면 리더는 우선적으로 사람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사(人事)가 만사다. 인사를 잘하면 나머지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205)

그렇다면 객관성은 아예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적어도 객관성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다. 바로 사회적 다수와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먼저 소수 권력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정부, 국회, 재벌, 법원 등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들이 권력을 잘못 사용했을 때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권력을 쥔 자는 소수지만 그들로 인해 영향을 받는 사람은 다수다. 언론의 일차적인 역할이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들 소수 강자에 대한 다수 약자의 견제를 말한다. 언론이 견제해야 하는 소수 강자에는 정부와 여당뿐 아니라 다른 언론도 포함된다. 이들 역시 중요한 권력기관이기 때문이다.

 

(245)

노무현은 내가 현실 정치를 접한 이후 김대중에 이어 열렬히 지지했던 정치인이었다. 물론 노무현 집권 기간에 지지층들이 많이 이탈했다. 노무현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말대로 구시대의 막내였다. 정치개혁이라는 관점에서는 그 누구보다 선명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권위주의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경제와 노동, 사회 개혁이라는 관점에서는 노무현 역시 시대의 한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그는 새로운 시대의 맏형이 되지는 못했다. 그 과제를 후대에 남겨졌고, 우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노무현은 우리 현대 정치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고, 그로 인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밑그림을 깔아놓은 인물이다.

 

(284)

구본홍 보도본부장 체제에서 MBC 뉴스는 조선일보를 베껴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엽기적인 행태를 보였다. 당시 우리 뉴스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언론으로서 정도를 가는 것인 양 보여주기식 보도가 많았다. 그동안 대통령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조직이 대통령 개인을 과도하게 비판했다. 보수적인 선배들이 이긍희 사장, 구본홍 본부장 체제를 맞아 마치 소신을 지키는 언론인인 것처럼 돌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것이다.

 

(302)

소수파 정권으로서 적을 제압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허허실실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행정권력 하나 장악하고서 대놓고 선전포고를 해봐야 소용없다. 보수세력은 입법부와 사법부, 언론이라는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행정부 내에서도 보수적인 관료들이 사실상 이들의 우군 노릇을 한다. 게다가 재벌이라는 가장 강력한 물적 기반이 이들의 편이다. 이들이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까지 잃게 되자 사법부와 언론 등에 호소하며 노무현 정부를 강력히 저지한 바가 있지 않던가.

 

(347)

언론이 바로 서는 것은 단순히 정치권력의 문제를 떠나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관련해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검찰이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면, 언론은 사회적 의제 설정을 통해 미래를 여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언론이 자유로워야 사람들이 현재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미래를 위해 중요시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의제가 형성되고, 하나씩 해결되어 나간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발전 모델이다.

 

(366~367)

<삼국지>에서 눈여겨본 인물이 한 명 있다. 바로 주유(周瑜). 주유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제갈공명의 비범한 재능이 신적인 경지라면 주유의 탁월한 재능은 인간적이었다. 그런 이류로 그에 대한 인간적인 안타까움이 못내 그를 잊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 주유가 다시 살아나 자신의 꿈을 성취하는 모습을 혼자서 상상한 적이 많다. 생과 사의 갈림길을 지나는 이 순간 주유를 떠올리는 건 나 혼자만의 연민의 감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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