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한 구가 더 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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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작년에 알게 된 시리즈 중에 캐드펠 수사 시리즈란 것이 있어. 중세 시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이었지. 작년에 1권을 읽고 계속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2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를 읽었단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오래 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가 작년에 새롭게 디자인되어 개정판이 출간되었어. 천천히 가끔씩 읽어봐야겠구나.

주인공은 시리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캐드펠이라는 수사란다. 작년에 1권에서 주인공의 소개를 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수사 캐드펠이 잉글랜드의 베네딕토회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농사일 등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빠는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더구나. 그리고 당시 잉글랜드 역사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어.

2권에서는 특히 당시 잉글랜드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2권은 1138년 잉글랜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당시 잉글랜드는 왕권을 두고 내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라고 했어. 헨리 왕(헨리 1)은 자신이 죽기 전에 후계자로 자신의 딸이었던 모드 황후를 후계자로 지명했단다.

모드 황후가 왜 황후라고 불렀냐면,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 황제의 아내였거든그런데 하인리히 5세가 죽어서 자신의 딸을 잉글랜드로 소환한 거야. 왜냐하면 헨리 왕도 후계자였던 아들이 죽어서 뒤를 이을 사람이 모드 황후밖에 없었거든그런데, 헨리 왕이 죽고 나서, 모드 황후의 사촌이 스티븐이 무력으로 왕을 차지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스티븐 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드 황후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전쟁이 벌어진 거야.

 

1.

캐드펠 수사가 머물고 있는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어. 그래서 수도원이 있는 슈루즈베리 성 사람들은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 웨일즈로 가기도 했어. 당시 슈루즈베리는 모드 왕후를 따르는 이들이 다스리고 있었어. 피챌런, 애더니, 아놀프 등이 그들이었단다. 그런데 스티븐 왕의 부대는 슈루즈베리 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단다. 피챌런, 애더니는 도망을 갔고, 아눌프는 체포당했어.

캐드펠 수사는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수도원장이 그의 보조로 17살 소년 고드릭을 보내주었단다. 캐드펠이 유심히 살펴보니 고드릭은 소년이 아닌 소녀였단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소년으로 위장하여 수도원에 와 있는 것이었어. 그런데 누구라도 유심히 살펴 보면 소녀라는 정체를 알 수 있겠다 싶었어. 캐드펠은 이유는 묻지 않고,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소년으로 잘 위장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단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자신은 애더니의 딸, 고디스 애더니라고 했어. 아빠가 방금 전 이야기했던 모드 황후 측 사람이었다가 피신한 애더니의 딸이었던 거야. 아버지는 성을 빠져 나가고, 자신은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수도원으로 피신한 것이라고 했어.

휴 베링어라는 사람이 있단다. 어린 시절 집안 어르신들에 의해 고디스 애더니와 약혼한 사이였단다. 휴 베링어는 원래 모드 황후 진영 사람이었는데, 배신하고 스티븐 왕 진영으로 붙어 버렸어.

스티븐 왕의 부대가 슈루즈베리를 점령한 다음, 모드 황후의 군인들을 교수형으로 죽였어. 얼라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스티븐 왕을 후원하는 사람의 딸인데, 오빠 자일스는 모드 황후 편에 들어 전쟁에 참여했었어. 얼라인은 교수형 당한 시신을 확인하다가 오빠의 시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단다.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비극을 낳는구나. 교수형을 당한 군인들의 시신 수습과 장례식 준비를 수도원에서 맡았는데, 그 일을 캐드펠 수사가 하게 되었단다.

모두 94명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했는데, 캐드펠 수사가 시신을 헤아려보니 95개였단다. 다른 수사 같으면 숫자를 잘못 알려주었나, 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캐드펠은 이런 걸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단다. 그는 교수형에 의해 죽지 않은 하나의 시신을 찾았단다. 젊은 사람의 시신이었는데, 낚싯줄 같은 것에 의해 죽음을 당했단다. 그래서 이번 캐드펠 시리즈의 제목이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로구나. 캐드펠은 이 시신의 정체의 밝히기 위해서 여기저기 알렸는데, 이 시신을 아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단다.

캐드펠은 의문의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게 되자, 수도원으로 데리고 와서 신도들에게 보여주었단다. 신도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고디스가 캐드펠을 조용히 찾아와서 말하길,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 시신의 주인공은 니컬리스 페인트리라는 사람이고, 모드 왕후 측 인사인 피챌런의 향사로 일했던 사람이야. 피챌런은 앞서 이야기했든 고디스의 아버지 애더니와 함께 스티븐 왕으로부터 피신한 사람이란다. 니컬리스 페인트리는 토럴드 브런드와 함께 피챌런의 보화들을 숨기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변을 당하게 된 것이었어. 이제 캐드펠은 니컬리스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했단다.

 

2.

며칠 뒤 고디스는 부상당한 젊은 남자를 발견하고 캐드펠 수사에게 이야기했어. 캐드펠을 오두막으로 옮기고 치료를 해주었단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버로 토럴드 브런드였단다. 니컬리스의 파트너말야. 니킬리스와 함께 보화 옮기는 일을 하다가 니컬리스는 죽고 자신을 부상당했다고 했어. 토럴드는 자신을 구해준 고디스가 애더니의 딸이란 것을 알게 되자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어. 토럴드는 부상당하는 와중에도 피챌런의 보화를 강물 속에 잘 숨겨두었다고 했고, 자신의 몸이 다 나으면 그 보화들을 모드 황후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했다. 고디스가 토럴드를 보살펴 주면서 그들 사이는 핑크빛으로 물들었단다.

휴 베링어는 계속 캐드펠 수사를 찾아오는데, 뭔가 감시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찾으려는 것 같기도 했어. 아무래도 사라진 고디스를 찾는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러면서 이상한 부탁을 하나 했어. 전쟁에 징발되기에 아까운 말 두 마리가 있는데, 그걸 숨겨달라는 부탁을 했어. 그래서 캐드펠은 그 말 두 마리를 수도원이 관리하는 외진 농장에 숨겨주었단다.

스티븐 왕의 군인들은 고디스를 찾으러 다녔어. 수도원에 들어와서 수색을 하기도 했어. 이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고디스는 토럴드의 보화들을 배에 싣고 도망을 갔단다. 무작정 도망을 가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 얼마 전에 수도원에서 열린 장례식 때 봤던 얼라인의 집이 강가에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의 집으로 갔는데, 다행히 얼라인은 고디스를 잘 숨겨주었단다. 스티븐 왕 진영에 쿠셀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얼라인에 푹 빠져 있어서 얼라인의 집에 와서 수작을 부리면서도 얼라인의 집은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단다. 자신이 꼬시려는 여자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오히려 점수를 깎이는 일이니까 말이야. 얼라인은 미사를 하려고 수도원에 갔다가 캐드펠에게 고디스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캐드펠은 토럴드에게 이야기해서 고디스와 함께 탈출하라고 지시했단다.

캐드펠은 휴 베링어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보았어. 휴 베링어는 고디스가 수도원에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고, 고디스가 보화의 위치도 알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휴 베링어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혼자 조사하러 다닌다는 거야. 마치 뭔가 큰 것 한방을 노리는 사람 같았어. 캐드펠은 그런 휴 베링어의 의도를 파악했어. 휴 베링어는 보화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야. 휴 베링어는 당국에 신고를 하면 보화가 당국에 넘어가게 되니, 혼자 조사해서 보화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란다.

이걸 노리고 캐드펠은 가짜 보화로 휴 베링어를 유인했어. 진짜 보화는 고디스와 토럴드가 함께 빼돌렸고, 휴 베링어는 기쁜 마음에 보화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돌멩이였단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알면서도 캐드펠의 추리력에 감탄을 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이 때부터는 니컬리스의 살인자를 찾는데 도와주겠다고 했어. 돈 욕심이 있어서 그렇지 본심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보구나.

고디스를 도망가는데 도움을 준 얼라인의 오빠 자일스가 교수형 당하기 하루 전에 스티븐 왕의 장교를 만났어. , 자일스는 모드 황후의 군대에 있었는데 왜 만났을까. 그는 전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배신을 했던 거야. 자신이 보화의 위치와 어떻게 운반하는 그 장교에게 알려주었어. 하지만 그는 결국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교수형으로 죽고 말았단다. 배신의 말로가 비참하구나. 그런데 그 스티븐 왕의 장교가 누구인지 아니? 바로 얼라인에게 대시를 했던 쿠셀 장교였어.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베링어와 캐드펠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어.

자일스의 단검에서 떨어진 장식이 니컬라스의 살해현장에서 발견되었어. 진실을 알게 된 베링어는 쿠셀의 살인 행위를 스티븐 왕에게 이야기를 하고, 결투로 그의 유죄를 증명하겠다고 했단다.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의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유죄라면 그 사람과 결투를 해서 질 수 없다고 믿었어. 하느님이 범죄자를 칼을 통해서 단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휴 베링어와 쿠셀 장교는 결투를 하게 되었고, 결투는 공방이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휴 베링어가 이기고 쿠셀은 죽고 말았단다. 이 결투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얼라인이었단다. 베링어와 얼라인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결투 이후 베링어와 얼라인은 정식 커플이 되었단다. 캐드펠이 추리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짝 맺어주는 큐피드 역할도 잘 하는 것 같구나. 앞서 고디스와 토럴드의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더니, 얼라인과 베링어의 사랑에도 큰 역할을 했단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단다. 아빠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메모를 해두었음에도 몇 군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잘못된 내용도 있을지 몰라. 아빠가 학창 시절에 책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추리 소설은 읽었던 기억이 있단다. 너희들에게 공부하다가 쉴 때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추천해주고 싶은데, 다른 것을 하면서 쉬고 싶겠지?^^ 그럼 이 책도 나중에 읽는 것으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앞으로도 가끔씩 읽고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을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소년이 처음 왔을 때 캐드펠 수사는 연못 옆 작은 텃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정의와 응보가 미칠 수 있는 그 어디에나 은총의 빛 역시 깃들 수 있는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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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6 - 오즈마 이야기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이지연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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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그레고리 머과이어 <위키드> 시리즈 마지막 6권에 대해 이야기할게. 6권의 제목은오즈마 이야기란다. 오즈마라고 하면 먼 옛날 오즈를 통치하던 왕가의 이름이자 통치자를 지칭하는 것이란다. 오즈는 원래 여자 승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오즈의 마법사가 왕위를 찬탈하고 당시 어린 오즈마 공주는 사라졌는데, 죽었다는 소문도 있고, 어딘가 숨어서 지낸다는 소문도 있었단다. 현재는 여러 번 이야기한 것처럼 엘파바의 남동생인 셸 황제가 통치하고 있단다. 그리고 이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에메랄드 시에 있는 오즈 정부와 독립하려는 먼치킨랜드가 내전 중인 상황이란다.

현재 먼치킨랜드의 총독은 라 몸베이란 사람이란다. 5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타임드래곤 부대의 대장 난쟁이, 꼬마 다피, 겁쟁이 사자 브르르는 도로시를 돕기 위해 재판이 열리는 먼치킨랜드로 갔잖니. 6권은 그 이야기에 이어진단다.  그들이 도로시 재판에 참석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단다. 도로시가 오즈를 떠나고 18년이 지난 후에 다시 오즈에 돌아온 것이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도로시는 10살에서 16살의 소녀가 되어 돌아온 거야. 도로시는 18년이 아니라 6년이 지났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도로시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도로시인 것이 분명하고, 겉모습으로 보아 18년이 지난 것은 분명히 아니었기에 지나온 시간에 대해 설왕설래 하기도 했단다.

재판은 도로시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어. 먼치킨랜드 사람들에게 동쪽 마녀 네사로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거든. 그래서 도로시에 재판 결과는 유죄라 정해 놓고 하는 재판 같았어. 마치 오늘을 우리나라 정치 판사들처럼 말이야. 꼬마 디피는 도로시를 변호하기 위한 발언을 쏟아냈단다. 당시 도로시는 우연의 일치로 사건 현장에 있었을 뿐 의도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고, 그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당시에 모두 그렇게 인정해서 도로시는 아무런 재판도 받지 않고 집에 돌아갔다고 주장했단다. 아주 합당하고 상식적인 주장이었지만, 이미 판결을 정해 놓은 재판부는 도로시에게 사형을 판결했단다. 그렇게 불법적인 판결에는 불법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꼬마 다피는 기질을 발휘하여 브르르의 등에 도로시를 태우고, 자신과 난쟁이까지 브르르의 등에 타고 재판장을 빠져나가 도망쳤단다. 그렇게 6권의 서막이 시작되었단다.

 

1.

한편 리르와 캔들 부부와 그들의 딸 레인, 그리고 리르의 배다른 누이 노르는 함께 지냈단다. 레인이 리르즈와 캔들과 다시 만난 지 2년이 지났지만 아직 온전한 가족 같은 느낌은 안 들었어. 레인이 워낙 독립성이 강했고 가족의 사랑을 절실히 원하지도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어.

5권에서 레인이 어린 시절을 글린다와 함께 지냈잖니. 5권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가 6권에서 들려주었단다. 레인이 태어났을 때 리르의 농장에는 나스토야 코끼리 공주가 와 있었는데, 나스토야 공주는 레인에 대해 예언을 하기를 힘들고 고난의 삶이 될 것이라고 했어. 아무래도 레인의 초록색 피부를 보고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닐까 싶구나. 레인이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캔들이 레인과 리르 곁을 떠났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와 같이 지냈단다.

리르와 캔들의 고민은 레인의 초록색 피부였단다. 리르는 자신의 엄마인 엘파바가 초록색 피부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고 있었거든. 어느날 농장에 여우가 찾아왔는데, 초록색 피부를 가진 레인을 보고 하는 말이 자신이 아는 큰뱀이 초록색 피부를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단다. 그래서 리르와 캔들은 레인을 데리고 그 뱀을 찾아갔고, 그 뱀은 레인의 피부를 정상으로 만들어주었단다. 정말 다행이구나. 그들의 또 하나 고민거리는 리르가 오즈의 사령관 체리스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야. 그들은 늘 도망을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그들은 딸 레인을 글린다에게 부탁하기로 했던 것이란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글린다와 함께 지낸 것이란다.

레인과 다시 만난 이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도망자 신세였단다. 그들 집에 도둑이 들기도 했단다. 다행히 마법의 빗자루와 마법서 <그리머리>는 그대로 있었단다. 리르와 캔들은 레인을 안전한 곳에 두자는 생각으로 레인을 레이너리라는 가명으로 시즈 지역의 세인트 프로스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단다. 그들의 신분을 들쳐내기 어려워서 노르가 엄마인 척 하면서 레인을 입학시켰어. 그리고 리르, 캔들, 노르는 노르의 고향인 키아모코로 돌아가기로 했단다. 한편 레인은 입학시기를 놓쳐 조금 늦게 입학을 하다 보니 남아 있는 기숙사가 없었어. 처음에는 하녀 스탈리와 함께 지붕 밑에 있는 방에서 지내다가 비어 있는 남자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어. 당시 남학생들은 모두 전쟁에 끌려나가 남자 기숙사가 비어 있었단다. 그런데 남자기숙사에 몰래 숨어 들어온 고아 팁을 알게 되었어. 팁도 잘 곳이 없어 남자 기숙사에 몰래 들어온 곳이었어. 팁은 먹을 것도 없었는데, 레인이 먹을 것을 몰래 구해다 주었단다. 그러면서 둘은 친해졌단다. 얼마 후 전쟁은 점점 심해져서 교장선생님까지 징병되어 전쟁터로 가셨단다. 학교에는 모두 여자 선생님들밖에 없었어.

 

2.

얼마 후 먼치킨랜드에서 <그리머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전쟁 상황은 더 안 좋아졌어.. 이 소식을 들은 레인은 부모님이 걱정되어 학교를 떠나 키아모코로 향했는데 이때 친해진 팁도 함께 가기로 했단다. 가는 길에 팁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어. 팁은 먼치킨랜드의 라 몸베이 총독 아래에서 일하다가 도망쳤다고 했어. 레인도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팁에게 해주었어. 먼 길을 남녀 둘이 가다 보니 사랑이 싹트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그들은 6주의 행군 끝에 키아모코에 도착을 했는데 레인에게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어. 고모라 할 수 있는 노르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단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리르는 누군지 모를 습격대의 공격을 받아 납치되었어. <그리머리>도 함께 도둑을 맞았단다. 캔들은 리르를 찾아 길을 떠났고, 홀로 지내던 노르는 사고로 인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어. 그 때 도로시를 데리고 재판소를 도망친 브르르와 꼬마 다피, 난쟁이가 카이모코에 도착을 해서 그들이 노르의 장례식을 치러주고 있었어. 5권에서 이야기했듯이 노르의 남편이 겁쟁이 사자 브르르였잖니. 브르르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큰 충격에 빠졌어.

.

레인은 카이모코에는 처음 온 것이야.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엘파바와 리르를 키운 유모였단다. 위키드 1권부터 나왔던 그 유모가 아직 살아계셨던 거야. 유모는 레인을 보고 엘파바와 똑 닮았다면서 엘파바와 헛갈려 했단다. 레인, 도르시, 난쟁이, 꼬마 다피는 노르의 장례식을 마치고 리르를 찾으러 길을 찾아 나섰단다. 그들이 떠나기 며칠 전 이상한 일이 하나 일어났어. 레인과 함께 도착했던 팁이 레인에게 편지를 남기고 먼저 길을 떠났던 거야. 편지에는 자신이 몸베이를 만나서 리르에 관해 물어보겠다는 것이야. 키아모코에 오기 전에 세인트 프로스 학교에서 먼치킨랜드가 <그리머리>를 얻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리르를 납치한 것은 먼치린랜드일 확률이 높으니까 말이야.

한편, 리르는 어딘가 감금 당해 고문을 받고 있었어. 알고 보니 예상한 대로 먼치킨랜드였어. 그들을 리르에게 코끼리로 변하게 하는 약을 먹게 한 다음 먼치킨랜드 수도로 데리고 갔어. 리르는 그곳에서 옛 군대 동료 트리즘을 만났단다. 트리즘은 예전에 에메랄드 시에서 드래곤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먼치킨랜드에서 또 그 일을 하고 있었단다. 도대체 드래곤들이 도 어디서 나타난 걸까? 5권에서 레인과 글린다가 오즈 군대의 한 마리만 빼고 모두 죽였는데, 그 한 마리가 먼치킨랜드에 도망을 와서 알들을 낳게 되었고, 그 알들에서 드래곤들이 다시 태어난 것이었어. 트리즘은 그 드래곤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단다.

레일은 떠난 팁이 먼치킨랜드의 수도에 도착했단다. 몸베이는 팁을 보고 자식을 다시 만난 듯 기뻐했단다. 어쩌면 팁은 몸베이의 숨겨두었던 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 몸베이는 리르에게 <그리머리> 사용법에 대해 알려달라고 강요했지만, 리르는 죽는 한이 있어도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했어.

..

 

3.

레인 일행은 에메랄드 시로 도착해서 레인과 도로시가 황제 셸을 만났단다. 레인과 셸의 친족관계를 살펴보면 셸은 레인의 할머니의 남동생이니까, 좀 어려운 말로 진외종조부가 되겠구나. 처음 만난 손녀 조카라면 상당히 기뻐할 만 한데, 셸 황제는 그들을 귀찮아 하는 듯 했으며, 리르는 자신이 납치하지 않았다고 했단다. 레인과 도르시가 셸 황제를 만나고 있을 때 드래곤들이 에메랄드 시를 공격해 왔단다. 그들은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어. 드래곤들의 공격으로 셸 황제는 제대로 반격하고 하지 못하고 전쟁에서 지고 말았단다. 먼치킨랜드의 라 몸베이가 길고 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야. 몸베이와 셸은 강화 조약을 맺게 되었어.

몸베이 일행에 팁이 있는 걸 보고 레인의 일행들은 깜짝 놀랐단다. 그들은 팁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팁이 레인에게 일부러 접근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단다. 팁이 레인의 집의 위치를 먼치킨랜드에 알려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그래서 리르가 납치되고 <그리머리>도 도둑맞은 것은 아닌지임무가 완수되었기 때문에 팁이 먼저 키아모코를 떠난 것은 것은 아닌지나중에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 되었고, 더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곳에 캔들도 도착해서 레인을 만났는데 리르가 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주었단다. 그런데 아직 시신은 먼치킨랜드에 있어 돌려받지 못했다고 해서, 셸 황제에게 부탁해서 리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몸베이에게 요청했어. 그러자 몸베이 총독이 말하길, 리르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했어. 마법에 의해 코끼리로 변신시켰는데, 다시 사람으로 변하지 않고 죽어가는 것을 선택했다는 거야. 그것만이 <그리머리>의 사용법에 대한 비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몸베이는 이제 전쟁에서 승리를 해서 그런지, 리르를 다시 사람으로 변하게 하는 마법을 썼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 리르는 다시 사람으로 변하긴 했는데, 멀쩡하던 레인의 피부가 다시 초록색으로 변했고, 더 이상한 것은 몸베이가 쫄딱 망하고 만 거야. 아빠가 뭘 잘못 읽었는지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단다. 그리고 팁의 정체도 밝혀지게 되었단다. 팁은 마법에 걸려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실제로는 100년 전에 사라진 오즈마 티페타리우스였던 거야. 오늘 첫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사라진 어린 오즈마 공주가 바로 팁이었던 거야. 팁의 마법도 풀려나게 되었어. 셸 황제는 오즈마 공주가 다시 나타났으니 자신의 자리를 팁에게 물려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오랜 내전은 끝이 나고 오즈마 공주가 통치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단다.

레인 식구들은 다시 서쪽 지역인 키아모코로 갔고, 도로시는 레인의 회오리 마법을 이용하여 다시 캔사스로 돌아가게 되었단다. 그렇게 <위키드>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가 끝을 맺었단다. 이 책을 읽고 오즈마 티페타리우스를 좀 검색했더니,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2권에 등장한다고 하는구나. 그 책에서도 소년으로 살아가는 팁으로 등장한다고 하네. 아빠는 <위키드>의 작가 그레고리 머과이어가 만들어낸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겁쟁이 사자 브르르처럼 원작 <오즈의 마법사>에 있는 인물을 새롭게 각색한 것이었구나.

아빠가 읽은 <오즈의 마법사>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의 1권에 불과했단다.. 사실 <오즈의 마법사>의 지은이 라이언 프랭크 바움은 1권의 성공으로 계속해서 시리즈를 냈고,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면 14권짜리더구나. 아빠는 1권만 읽은 것인데, 그것은 너희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구나. .. <오즈의 마법사> 열네 권을 모두 읽고 싶은데, 읽어야 할 책들은 산더미 같이 밀려 있고, 고민이구나. ‘언젠가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겠지만, <오즈의 마법사> 전권을 한번 읽어보고 싶구나.

아무튼 오늘로써 <위키드> 시리즈 6권도 끝이 났구나. 시리즈 소설들은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를 뿌듯함이 있어 좋구나. 너희들은 숙제 하느라 이 긴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을 테니, 나중에 숙제에서 해방이 되어 좀 여유로워지면 한번 읽어보렴.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밤이 될 때쯤에는 사자와 한 쌍의 동지가 별다른 사고 없이 국경을 지나 먼치킨랜드로 들어섰다.

책의 끝 문장: 그 모습은 마치 사나운 공기에 휘말려 올라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는 바다 그 자체의 초록색 얼룩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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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중섭은 날마다 두 가지에 집착했다. 하나는 그림, 또 하나는 가족. 화가들은 대부분 그림과 가족을 한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땐 가족을 잊고, 가족과 머물 땐 그림을 잊었다. 이중섭은 그림 속에 가족을 두고, 가족 속에 그림을 두었다. 아내가 이남덕이기에 가능했다. 그녀 역시 문화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림을 향한 남편의 진심을 투명하게 받아들였다. 이중섭이 기쁠 땐 화가로 기쁜 것이고 슬픈 땐 화가로 슬픈 것이며 화날 땐 화가로 화난 것이다. 부부의 대화는 그림에서 시작하여 그림으로 끝났다. 태현과 태성은 부부가 나눈 화담(畫談)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두 아들이 훗날 아빠처럼 그림을 업으로 삼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림을 평생 가까이 둘 것은 확실하다. 네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일궜다. 한국의 예의와 상식도 아니고 일본의 예의도 상식도 아니었다. 사람으로서의 예의와 상식은 너무 거창한 이야기다. 그들은 그림이라는 나라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35)

가족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가족은 굶주리지 않았고 울지 않았고 아프지 않았고 춥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평화로웠다. 부산과 서귀포의 참담한 현실과 정반대로 그린 까닭을, 아내와 두 아들은 따지지 않았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을 일용할 양식처럼 삼키며 하루를 나고 한 달을 나고 일 년을 났다.


(46-47)

밥은 굶어도 담배를 건너뛸 순 없었다. 술 또한 거의 매일 입으로 들어갔다. 이중섭에게 술과 담배는 갈매기의 두 날개처럼 어울리면서도 목적지는 상반된 생필품이었다.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면 희망은 더 희망적으로 절망은 더 절망적이었다. 과장은 허풍이 술자리의 중요한 안주인 이유였다. 이중섭은 대부분 더 절망적인 쪽이지만, 그 감정을 이야기로 풀진 않았다. 담배는 혼자서는 피우지만, 술은 어울려 마셨다. 벗들이 희망적인 상상에 파안대소하고 절망적인 예감에 호곡성을 터뜨릴 때, 이중섭은 위장병이 도진 듯 우울하고 쓰린 얼굴로 듣기만 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면 울음을 삼키며 눈물만 떨어뜨렸다. 울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서둘러 마시곤 아무 곳에서나 웅크려잤다.


(64)

빈센트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이중섭에겐 단연코 소다. 대작을 그리겠노라고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밝힌 적은 없다. 화우(畫友)들도 따져 묻기보다는 꼭 그리라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했다. 완성하고 나면 축하주를 마시자는 이도 있었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오랫동안 많이 그렸다. 두 송이부터 시작해서 열다섯 송이까지, 파리에서도 그렸고, 아를에서도 그렸다. 이중섭 역시 소를 계속 그렸다. 맘을 다 쏟아 그림을 그릴 조건이 되면, 가장 먼저 떠올리고 그린 것이 소였다. 도쿄에서도 그렸고 원산에서도 그렸다. 서귀포에서는 그리지 않았고, 부산에서는 그리고 싶어 끼적이긴 했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해바라기를 그린 사람이 고흐 이전에도 많았고 당대에도 많았으며 후대에도 많듯이, 소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화인들이 그린 소가 몇 마리가 될까. 헤아리기 힘들다. 이중섭과 가까운 선배 중에도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함께 만든 진환이 소를 좋아했고 자주 그렸다. 누가 먼저 그렸는가 혹은 얼마나 많이 그렸는가 하는 물음은 어리석다. 문제는 수준이다. 대작이란 두 글자는 작품의 크기가 아니라 최고의 성취를 가리킨다. 이중섭은 통영에서 소를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리라 결심했다. 고흐가 아를에서 전혀 다른 해바라기를 선보였듯이.


(78)

통영은 붉다. 이렇게 밝히면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통영은 푸르다를 잘못 말한 것이 아닌지 묻는 이도 있다. 이중섭도 통영을 방문객으로 오갈 때는 푸르름에 압도되었다. 전혁림의 그림에서 넘쳐나는 파랑이 과장이 아니라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였다. 부산에서 그림을 싣고 강구안에 내린 다음 날 새벽, 통영이 붉은 항구란 사실을 목도했다. 늦게까지 마신 환영주에 목이 말라 깨지 않았다면, 숙취로 두통이 심해 바람이라도 쐬자 싶어 산책을 나서지 않았다면, 밤길이 서툴러 되돌아오지 못하고 헤매다가 남망산에 닿지 않았다면, 비가 그치지 않았다면, 중절모를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두른 사내가 오르막을 경쾌하게 앞서 걷지 않았다면 통영의 새뜻한 붉음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89)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 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화가는 색깔에서 글자를 읽구, 시인은 글자에서 색깔을 본다! A는 흑색이구 E는 백색이며 I는 적색이구 U는 녹색이구 O는 청색이구, 불란서 시인 랭보래 말햇디. 시인이 모음들의 색깔을 맨들 듯, 화가는 색깔들의 모음으로 이야기를 발명해 왓어.”


(92)

통영에선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이들을 최하로 친다. 말 대신 행동을 믿으며, 그 손으로 그 사람을 평한다. 재산도 학력도 품성도, 단련된 솜씨 앞에선 하찮다.


(118-119)

요쪽은 현실파고 조쪽은 아아파입니더. 유치환 선생님은 아아파의 원로고 윤이상 선배는 허리고 지는 막내축에 속하지예. 삼일 운동 나고 두 파가 생깄십니더. ‘현실파는 일본인들에게 협조해 돈도 벌고 기술도 익혀 실력을 기르자는 입장이고예, ‘아아파는 굶어 죽어도 타협은 못한다는 입장이지예. 윤이상 선배가 운을 딱딱 맞차가 아아파를 설명하신 적이 있심더. 민족의 설움을 제 설움으로 받아들인 아아아아파는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아 하구, 봄날 아지랑이 전원서도 아아 하구, 가을 낙엽을 밟으믄서도 아아 한다구 말입니더. ‘아아파들 중엔 옥살이한 사람도 많심더. 팔일오 해방 후에 현실파들은 빠져나간 일본인들 자리를 차지해가 토영 경제권을 잡겄다고 설쳤지예. ‘아아파는 민족혼을 표현하구 가르칠라고 예술가도 되고 교육가도 됐심더. 문호협회도 맨들고…… 펭안남도 평원이 아이라 겡상남도 토영서 태어나싰다믄 돈이나 기술보단 민족의 양심을 지키는 아아파셨을 깁니더.”


(131)

두 사람을 묶어 비교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카인과 아벨이 그러하고, 유비와 조조가 그러하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그러하다. 음악가인 베토벤과 모차르트, 작가인 괴테와 실러도 이 범주에 든다. 화가들도 종종 언급되었는데, 대중은 고흐와 고갱을 제일 많이 입에 올렸다. 이중섭과 그의 친구들이 자주 논한 화가는 피카소와 마티스였다.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질투도 하고 경쟁도 한,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라이벌이었다. 열에 일곱은 피카소를 우위에 뒀고 마티스를 선호하는 화가는 셋이 될까 말까였다. 이중섭은 소수파에 속했다.


(132)

피카소가 분방한 방외인이라면 마티스는 수도하는 교수다. 피카소는 무리와 어울리며 으뜸이 되기를 갈망했고 마티스는 홀로 숙고한 작품으로 무리에 충격을 주기를 바랐다. 피카소가 불이라면 마티스는 물이다. 물이긴 하되 그림 속에서 펄펄 끓는 물이다. 피카소는 그림 외에도 각종 기행(奇行)으로 유명했다. 때마다 바뀌는 뮤즈의 이름과 사진이 잡지와 신문에 실리고, 작업을 위해 사들인 저택과 사진이 잡지와 신문에 실리고, 작업을 위해 사들인 저택과 즐겨 참여한 파티도 세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기행은 그림값을 떨어뜨리기는커녕 몇 배 혹은 몇십 배 뛰어오르게 했다. 작품은 작품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들러붙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은 화가가 피카소였다. 스스로 이야깃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귀찮아하지도 않았다.


(168-169)

사람은 둘로 나뉘디. 전쟁을 겪은 사람과 겪디 않은 사람! 전쟁을 모르는 남해바닷가 사람들보다두 내래 니순신 장군님과 더 가깝다구 느께. 장군님두 나두 전쟁을 겪엇으니까니. 둥세전이냐 현대전이냐, 나라과 나라 사이 전쟁이냐 나라 안 전쟁이냐, 요딴 식으로 나누딘 말라마야…… 전쟁은 전쟁! 전사자보다 몇 배 많은 삶을 뒤흔들구 파괴해. 새로운 무서움이구 낯선 끔찍함이라 이거이야. 죽는 것두 두렵다만, 개진 걸 다 잃구 사는 것두 무시무시하긴 마찬가지디. 가솔두 친구두 돈두 직업두 없이 사는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장군님께선 아셔. 하루라두 빨리 전쟁을 끝내구 싶으셨던 것이야. 길멘서두 서두르다 패하문 그 피핸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가. 냉정하게 버티며 견딘 사내! 전쟁이 무슨것인가를 온몸 온 맘으로 깨달은 사내! 통영 앞바다는 장군님이 오가신 물길이디. 내래 세빙관이나 충렬사나 착량묘에 가문 전쟁부터 떠올려. 장군님과 함께 고민할 문제니까니. 이 망할 전쟁이 몸과 맘에 새긴 상처를 장군님께 보여드리려구 붓을 놀렛던 것이야. 알것어?”


(174)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갓 넘어갔을 때, 이중섭은 전투하듯 예술을 하겠노라 말하곤 했다. 그만큼 치열하게, 죽을 각오로 임하겠다는 뜻이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더 이상 예술을 전쟁에 비유하지 않게 되었다. 전쟁과 예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예술은 평화다. 평화여야 한다.


(202-203)

속삭이는 소, 친구가 많은 소, 여물을 맛보고 찡그리는 소, 코뚜레를 흔들며 나무 그늘에서 조는 소, 우는 소, 되새김질하며 거품 흘리는 소, 기뻐 껑충껑충 뛰는 소, 노리는 소, 송아지를 불러들이는 소, 뒷발질에 열심인 소, 실수하는 소,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교접하는 소, 어미 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 코를 박고 물을 마시는 소, 올려다보다가 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 밭 가는 소, 날아가는 멧비둘기와 참새를 따라 고개 돌리는 소, 외톨이를 자처하는 소, 내달리는 소, 빼앗는 소, 머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소, 고집부리는 소, 벽을 들이받는 소, 엎드려 기다리는 소,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뒷걸음질하는 소, 앞발을 땅을 파헤치는 소, 꼬리를 흔들어 벌레를 쫓는 소,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서 인사하는 소, 오르막길 앞에서 한숨 쉬는 소, 늙었지만 병들지 않은 소, 멍한 눈으로 세월을 되씹는 소, 웃는 소, 새끼 낳는 소, 먼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소, 어미 소를 싫어하는 소, 숨는 소, 산책을 즐기는 소, 잠든 소, 병들어 마른 소, 절뚝거리는 소, 용서하는 소, 냄새 맡는 소, 멈춰 기다리는 소, 죽은 소.


(246)

이중섭이 가장 오래 가까이 두고 들여다본 화가는 루오였다. 루오를 접한 후부터는 마음의 시소에 얹는 화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루오가 홀로 한쪽을 차지했고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를 반대쪽에 묶어 얹었다. 고흐와 고갱과 마티스가 제 뜻을 발산하는 방식이라면, 루오는 그것을 색으로도 누르고 형상으로도 눌렀다. 곡진했다. 타인에게 내뿜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난타해 무너뜨렸다. 이중섭은 고흐처럼도 그려 보고 고갱처럼도 그려 보고 마티스처럼도 그려 보았다. 눌변과 머뭇거림과 내면을 파고드는 자신의 성향과 어울리는 화가는 루오였다.


(254)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에 대한 낙관을 아예 접은 예술가들도 나왔다. 한국전쟁과 맞닥뜨린 이중섭은 도쿄에서 연애할 때처럼 사랑이 충만한 세상을 줄기차게 그릴 수는 없었다. 피란민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만물이 화평하기는커녕 살아남기 위해 매일매일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러하기에, 아주 가끔은 아비규환을 잊을 만큼 강력한 유토피아를 그려보고 싶기도 했다. 사람은 희망 없인 살 수 없는 족속이다. 도쿄의 엽서화에서 둘만의 꿈을 속삭였다면, 월남 후 그린 유토피아는 끔찍한 체험에 바탕을 두되, 더 많은 이들이 따스함을 느끼고 미소 짓기를 바랐다. 현실엔 없는 행복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부산과 서귀포와 통영을 떠돈 이중섭만이 발견한 신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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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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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2023년 프랑스 콩쿠르 상 수상작을 읽었단다. 아빠가 콩쿠르 수상작을 가끔 읽는데, 최근 수상작들은 작품성뿐만 아니라 재미도 함께 담고 있는 것 같구나. 그래서 이번 책도 인터넷 서점에서 보고 망설임 없이 샀단다. 책 제목은 <그녀를 지키다> 지은이는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물론 처음 들어보는 작가란다. 작가 소개를 보니 소설가이면서 영화감독으로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어. 책이 생각보다 두껍더구나. 600페이지가 넘어서 지루하면 끝까지 읽기 힘들 텐데, 하는 걱정을 했는데역시 이번 콩쿠르 수상작도 최근 트렌드를 따라 가는 것 같았어.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를 다 잡은 듯했어. 어떤 조각가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역사 소설의 성격을 띠면서, 시대의 관습을 이겨내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었어. 책 두께가 괜히 두꺼운 것이 아니었구나. 책 두께가 두껍다 보니 할 이야기도 많고 바로 시작하자.

 

1.

주인공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비탈리아니. 프랑스 사람이란다. 아버지가 석공이셨는데, 아들도 훌륭한 조각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미켈란젤로라고 지어주셨어.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켈란젤로에게는 왜소증이 있었어.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세계 1차 세계대전 참전했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미켈란젤로의 어머니는 아들의 조각 공부를 위해 아들을 이탈리아에 있는 삼촌 알베르토에게 보냈단다. 알베트토도 조각을 하고 있었거든.

삼촌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피에트라달바 지역에 살고 있었단다. 알베르토는 조카를 처음 봤는데, 조카가 왜소증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그런 조카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단다. 미켈란젤로는 알베트로의 도제로 일하면서 조각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싫어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미모라고 불러 달라고 했단다. 아빠도 이제부터 미모라고 할게.

삼촌 알베르토는 술주정이 심해서 술에 취하고 나면 미모를 때리고 그랬어. 알베르토의 도제는 미모뿐만 아니라 별항, 엠마누엘레 쌍둥이도 있었단다. 미모는 그들과 친하게 지냈단다. 어느날 심한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폭우로 인해 오르시니 후작의 저택에 있는 조각상이 파손되어 수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단다. 미모도 삼촌을 따라 그 저택에 갔는데, 그곳에서 13살 동갑내기 비올라를 우연히 만났단다. 조각가의 도제와 후작의 딸은 신분 차이가 있어 대놓고 만날 수 없는 사이였지. 그들은 그 이후 가끔씩 묘지에서 몰래 만나며 우정을 쌓아갔단다. 어쩌면 사랑일수도

비올라는 미모에게 책을 빌려주었고, 미모는 그 책을 열심히 읽었단다. 비올라에게는 꿈이 있었어. 공부를 많이, 열심히 하는 것과 하늘을 나는 것이라고 했어. 그래서 비올라는 책도 많이 읽어서 아는 것도 많았어. 비올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날개를 보완하면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그러면서 비올라는 미모에게 하늘을 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비올라가 미모에게 빌려준 책을 후작에게 걸렸어. 후작은 당연히 미모가 훔친 것이라고 생각했어. 미모도 그 책을 비올라가 빌려 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 결국 미모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매질을 당하는 벌을 받았단다.

이 일을 주관한 것은 후작의 아들이자 비올라의 오빠 스테파노였단다. 천사 같은 소녀와 악마 같은 오빠..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 비올라에게는 오빠가 세 명 있는데, 첫째 오빠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었고, 둘째 오빠가 스테파노이고, 셋째 오빠는 좀 이따가 등장한단다.

….

1918년 전쟁이 끝나고, 1919년 유럽에는 사회주의 물결이 들이닥쳤단다.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서 오르시니 가문도 표적이 되어, 노동자들이 오르시니의 농장에 불을 냈어. 스테파노는 스라드리스타라고 부르는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강제 진압을 했고, 여덟 명이 죽고 말았단다. 이렇게 시대가 흉흉한 시절이었단다.

 

2.

시대가 흉흉했지만, 비올라는 꿈을 위해 정진했단다. 미모, 별항, 엠마누엘레가 날개 제작에 도움을 주었어. 하지만 그들의 첫 번째 비행은 실패하고 말았단다. 1920 11 22. 비올라의 생일을 앞두고, 비올라는 미모에게 비밀을 하나 이야기해주었어. 집 근처 숲의 동굴 속에서 몰래 곰을 키운다는 거야. 어렸을 때 새끼곰을 알게 되어 키웠는데, 지금은 그 곰이 무척 커졌다고 했어. 미모에게도 소개해주었는데, 그 곰의 이름은 비얀카이고 비올라를 아주 잘 따랐단다. 미모는 비올라의 생일 기념으로 곰 조각상을 만들어 주었어. 그런데 그 조각상이 정말 훌륭했단다. 열여섯 살짜리가 만들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후작이 그 곰 조각상을 보고 극찬을 할 정도였어. 그래서 미모는 비올라의 16번째 생일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단다.

앞서 이야기한 셋째 오빠 프란체스코가 미모를 찾아왔어. 프란체스코는 수도사 지망생이었어. 프란체스코는 미모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들은 그 이후로 오랜 시간 우정을 쌓게 된단다. 비올라의 16번째 생일 잔치. 후작은 그날 중대 발표를 했단다. 비올라의 약혼 발표로 6개월 뒤에 약혼을 한다고 했어. 미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비올라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어. 당시 이탈리아에서 여자에게 결혼은 모든 경력의 단절을 의미했고, 집에서만 지내며 사교 활동이나 하는 그런 일이었어. 하지만 비올라에게 위대한 꿈이 있었잖니. 그녀는 자신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지붕 위에 올라가 새로 만든 날개를 달고 날아 올랐단다. 생일 파트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어. 비올라는 잘 날아가다가 회오리 바람을 만나 30미터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어.

한편 삼촌 알베르토는 미모를 피렌체의 필리포 메티 공방으로 보냈단다. 미모는 비올라의 소식도 궁금했고, 비올라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지만, 삼촌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피렌체 메티의 공방에 오게 되었어. 미모는 메티의 공방에서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두오모 성당 보수 작업만 해야 했어.

뒤늦게 비올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단다. 비올라는 3주만에 코마 상태에서 깨어났지만, 다시는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어. 여기저기 골절상이 많아서 여전히 병원에서 지낸다고 했어. 미모는 계속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오지는 않았어. 한참 뒤에야 편지가 왔는데,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말라는 가슴 아픈 편지였단다. 미모는 깊은 상심에 빠졌고, 모든 것을 그만두고 떠나고 싶은 생각을 실천에 옮겼어. 메티의 공방을 그만두고 방황했어.

그러다가 비차로 서커스단에 들어갔단다. 비차로, 사라, 미모 이렇게 셋이 함께 다녔어. 앞서 이야기했듯이 왜소증인 미모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서커스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런데 그들은 패싸움에 휘말려 비차로가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서커스 영업도 중단되었단다. 그러던 중 비올라의 오빠 프란체스코가 바티칸 성당 소속의 신부가 되어 찾아왔어. 미모를 조각가로 채용하고 싶다면서 말이야. 그의 제안은 파격적이었어. 오르시니 가문의 소속으로 있으면서 바티칸의 일도 하는 것이라 했어. 미모를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많은 돈도 좋았지만 그보다 비올라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

2년 만에 피에르타달바에 돌아왔어. 삼촌 알베르토는 남쪽으로 이사 가고, 그가 쓰던 공방은 미모가 사용할 수 있었는데, 미모는 결혼한 친구 별항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헛간에서 지내겠다고 했단다.

오르시니 가문의 초대를 받아 갔어. 비올라는 많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비올라는 미모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단다. 비올라는 어렸을 때 미모와 소통했던 나무 그루터기에 그들이 몰래 만나 우정을 쌓았던 묘지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남겼지만, 미모는 일 때문에, 아니 일 핑계를 대고 로마로 떠났단다. 미모의 큰 잘못이었지.

이후 미모는 조각가로 크게 성공하게 된단다. 프란체스코와 우정은 더 도타워지고, 오르시니 가문과 잘 지내게 되었지만, 비올라는 여전히 볼 수 없었단다. 그러다가 비올라의 결혼 소식을 들었어. 가문의 명성에 걸맞는 유능한 변호사라고 했어. 미모의 가슴은 무너지는 듯했지.

….

 

3.

다시 과거로 돌아가보자. 1918 6 24. 그들은 10년 후 묘지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단다. 그리고 10년이 흘러 1928 6 24. 미모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묘지로 갔는데, 비올라도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나왔단다. 오랜만에 마주한 그들은 짧게 안부 인사만 전하고, 이젠 친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비올라는 이제 결혼을 하였으니…. 비올라의 남편 캄파나는 밀라노, 미국 등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주말에만 온다고 했어.

비올라는 임신이 안 되어 병원에게 치료 받았지만 계속 실패했어. 그렇게 되자 캄피나는 바람을 피웠고, 비올라에게 폭행까지 가했단다. 비올라와 캄파나 사이는 점점 안 좋아졌고, 비올라는 미국에 보내달라고 폭발하듯 이야기를 했어. 캄파나는 미국에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얼마 후 캄파나는 비올라를 영화 스튜디오를 데리고 왔단다. 그곳은 미국처럼 꾸며 놓았는데, 캄파나가 이야기하기를 이곳이나 미국이나 똑같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건지, 일부러 약 올리려고 그런지비올라는 크게 분노했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미모는 비올라에게 함께 미국에 가자고 해서 길을 떠났단다. 그런데 프란체스코가 이를 말리며 미모와 중재하여 비올라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단다. 비올라는 미모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였고 그 이후 미모도 멀리하게 되었단다.

어떤 날은 비올라가 사라졌어. 며칠 동안 식구들이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어. 미모는 그들만의 장소인 묘지에 가보았지만 그곳에도 없었어. 혹시나 하고 미모는 비올라의 곰 비얀카가 살고 있는 동굴에 가보니, 그곳에 있었단다. 비얀카가 죽어서 동굴에게 그를 추모하고 있었던 거야. 그 때 미모와 비올라는 다시 화해를 했단다. 캄파나와 비올라 사이는 더욱 안 좋아졌어. 캄파나는 가족들 앞에서 대놓고 비올라를 비판했어. 그리고 비올라의 사적인 것도 폭로했단다. 비올라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말이야.

사실 비올라는 시()를 쓰고 있었는데, 비밀로 해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그것을 까발린 거야. 홧김에 비올라는 나이프로 캄파나의 어깨를 찌르고 말았단다. 진작에 이혼을 했어야 했는데, 당시 아마 당시 유럽도 이혼은 못하는 분위기였던 가봐. 하지만 이런 폭행 사건까지 가족들 앞에서 벌어졌으니, 더 이상 어쩔 수 없었어. 프란체스코가 나서서 이혼을 제안했어. 그런데 캄파나는 반대를 했단다. 캄파나는 오르시니 가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야. 캄파나가 이혼을 반대하자, 프란체스코는 혼인 자체를 무효로 하자고 했는데, 캄파나는 또 반대를 했어.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캄파나가 저지른 강간 사건까지 이야기하면서 혼인을 무효 시켰단다. 프란체스코는 캄파나의 강간 사건까지 알면서 동생과 함께 살게 그냥 두었던 거야. 점점 비호감이네.

….

미모는 점점 자신의 실력을 인정 받아서 1942년에는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 자격을 받게 되었어. 그런데 정회원의 자격을 인정받는 행사에서 미모는 파시스트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어. 그 일로 그는 아카데미 회원 자격 박탈당하고 체포까지 되었단다. 그가 갑자기 이렇게 파시스트를 비판한 것은 얼마 전의 일 때문이었어. 얼마 전에 서커스를 함께 했던 비차로가 찾아왔는데, 사라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혔다는 거야. 미모에게 도와달라고 비차로가 찾아왔고, 미모는 인맥을 써서 사라를 풀어주었단다. 이 일을 경험하고 미모는 파시스트를 비판한 것이란다. 파시스트를 비판한 연설 이후 그의 작품 대부분이 파괴되었어.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피에타 상만 사크라 수도원에 옮겨서 지하 창고에 보관하였어.

 

4.

또 세월이 흘러 1946년 묘지에서 다시 만난 비올라와 미모. 비올라는 제헌 의회 선거에 출마한다고 했어. 여자가 의회 선거에 나간다는 것은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어. 집에서도 반대를 했단다. 그런데 경쟁 후보는 오르시니 집안의 앙숙이었던 감발레 집안의 아들이었어. 비올라를 지지해주어야 할 오빠들이 감발레 집안과 밀약을 해서, 땅을 양도 받는 대신 비올라 후보 사퇴를 약속한 거야. 그러면서 프란체스코는 미모에게 같이 설득해 달라고 했어. 당시 비올라는 살해 협박도 받고 있었어. 미모도 살해 협박까지 받고 있으니 이번만은 포기하자고 비올라에게 이야기했지만, 비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

비올라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꿈이 정해지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끝까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잖니. 미모는 비올라에게 다시 한번 미움을 사고 로마로 돌아갔단다. 그런데 가는 길에 큰 지진이 일어났단다. 엄청나게 큰 지진이었어. 미모는 비올라 걱정에 다시 오르시니 저택으로 향했는데, 오르시니 저택은 폭삭 무너져 내렸고, 비올라는 그만 시신으로 발견되었단다. 오르시니 가족 중에 프란체스코만 로마에 머무르고 있어서 변을 당하지 않았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946 6 1, 실제로 이탈리아에 큰 지진이 나서 472명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비올라가 죽은 시점으로 미모의 삶도 끝났다고 생각했어. 그의 삶에서 예술 부분만 남고 모든 것은 그때 끝이 났어. 미모는 그 이후 40년 동안 사크라 수도원에서 지냈단다. 평생 마음속에 비올라를 품고 말이야.

이 소설의 주인공 미모와 비올라 모두 매력적인 캐릭터인지만, 안타까운 결말이 안타깝구나. 결국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인데, 사랑 이야기만큼 서사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니.

소설 속에서 미모가 피에타 상을 조각한 것으로 나오는데,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피에타 상은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아닐까 싶구나. 너희들도 잘 알지? 그런데, 이 책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왔단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은 바티칸 성당에 전시되어 있는데, 예전에 보호막 없이 오픈되어 있었어. 그런데 1972년 라슬로 토스라는 사람이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15번이나 망치질로 손상시켰다고 한다. 그 이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는 방탄유리 안에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고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너희들과 엄마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다 알고 있었다고 하는구나. 심지어 엄마가 이야기하기를, 예전에 바티칸 여행 갔을 때 가이드께서 설명해주셨다고... 아빠도 분명 들었을 텐데, 좁쌀만한 기억력오늘 다시 이렇게 써 놓는 이유도 조금이라도 기억을 오래 유지해 보려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소설 참 재미있게 읽었단다. 두께가 만만치 않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지만, 누군가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조심스럽게 추첨해보고 싶구나. 지은이 장바티스트 앙드레아는 눈 여겨 보았다가 그의 신작이 나오면 또 읽어봐야겠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그들은 서른둘이다.

책의 끝 문장: 하늘에 새들이 날던 시절 태어났던 미모 비탈리아니는 위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 - P145

나의 표정에 별항은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입을 헤벌리고 나를 응시했으니까.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리석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대리석은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의 평행 육면체였다. 나의 구상을 실현하기에 완벽했다. 하지만 비올라의 생일은 11월 22일까지는 고작 열흘이 남았다. 나는 제일 좋은 도구를, 치오가 날은 닳고 자루는 갈라져서 손가락에 가시만 남기는 도구들을 쓰게 하고는 만져 보는 것조차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던 도구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야만 할 바로 그 장소를 쪼았다. 별항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 P199

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든 피에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려고 옷 주름의 완벽함, 해부학적 정확성, 몸짓의 우아함,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을 강조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전문가들이야 불쾌하든 말든,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은 얼굴에 있다. 성모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성모를 곱사등이로 만들어도 괜찮았을 거다. 거의 패배한, 피로가 포기의 순간, 영혼을 내맡긴 그 순간에 포착된 여인의 얼굴. <포착된>이라는 말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조각가가 그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는 데 3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미켈란젤로는 스냅 사진을 찍은 거였다. 단순한 끌과 대리석 덩어리만으로 무장하고 전투를 치러 낸 3년.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그 얼굴의 전부는 아니다. 그 얼굴에는 자신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이, 앞으로 곧 일어나려고 하는 모든 일이 담겨 있다. - P357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만약 전부 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도 있겠지, 미모. 네가 단 한 번도 틀리는 법 없이 처음부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넌 신인 거야. 네게 품은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신을 낳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 P422

비올라는 단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비올라가 입원해 있으면서 왜 나를 멀리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이제 그 시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모든 감옥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수감자들 역시 동일한 죄를 저질렀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믿었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냈다는 죄. - P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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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리스 조각상들이 양쪽으로 전시된 갤러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조각상 사이에 놓인 초록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코발트빛 하늘이 점점 보랏빛과 장밋빛으로 물들어 간다. 황혼은 일출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느려지는 것을 느낀 곳은 여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밖에 없다. 과거, 현재, 미래가 객차처럼 순서대로 흐르지 않고 서로서로 반투명하게 겹쳐져 있다. 몇 년 전의 일은 어제처럼 생생하고 가깝게 느껴지고, 내일은 몇 년 뒤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63-64)

샤워를 마친 후, 몸에 수건을 두른 채로 절름거리며 나와 침대에 쓰러진다. 내 몸의 모든 관절에 묵직한 추가 묶여 있는 느낌이다. 내가 누운 자리 아래 모든 층을 지나 로비까지, 그리고 지구의 중심까지 몸이 꺼져버릴 것이다. 자낙스 한 알을 혓바닥에 올리자 그제야 몸이 다시 위로 떠오른다. 선선한 바람, 희미하게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눈이 스르륵 감긴다. 밀려오는 파도처럼 잠이 쏟아지면서 검은 새가 나오는 꿈이 시작된다. 윤기 흐르는 흑단 같은 깃털, 굽은 노란색 부리, 기름방울처럼 반지르르하고 큼직한 눈. 전에도 이 새를 본 적이 있다. 검은 새가 앞장서서 날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간다. 그러자 다른 새들이 하나둘 모여들더니 이해 하늘을 검게 물들인다. 까악까악 울음소리의 장막이 나를 감싸고 내 몸을 상공으로 들어 올린다. 나를 둘러싼 검은 새들이 빙글빙글 구름 위로 솟아오르며 깃털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붙잡고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칠힌다.


(77-78)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생각나는 사람 아닌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다. 멋진 남자, 멋진 여자들과 친밀함을 나누고, 웃고, 서로 호의를 보였으며, 좋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러나 다음 극장에서 새로운 일정을 시작하고 나면 더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 달 동안 내 상상을 완전히 사로잡은 이들도 있었지만, 헤어지고 나면 더는 그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내 안에 어떤 공간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내 머리와 가습에 큰 공간을 차지한 채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기 때문에 나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들을 떠나보낼 수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자주 떠올리는데, 그렇다고 그때의 관계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다. 친구들을 그리워하던 나조차 이제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148)

모든 것은 입 밖에 내지 않을 때 더욱 강해진다. 두려움도, 슬픔도, 욕망도, 꿈도.


(159)

그러나 진짜 내 모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는 나조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곳, 우주의 중심에 있으니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내 기억이 존재할 때부터 항상 억눌러 왔던, 암석도 녹이는 뜨거움이 피부 아래서 온몸을 약동하고 있었다. 이제 댐의 수문을 열어 모두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227-228)

나는 수명과 기상 사이의 회색 지대를 좋아한다. 모서리 없이 부드러워서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딱딱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틸라가 아니다. 흔히들 내가 매일 아침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곧바로 자기 훈련의 루틴을 시작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이렇게 안개 자욱한 호수에서 뗏목을 타고 최대한 오랫동안 떠 있는 걸 무엇보다 좋아한다. 노를 저어서 꿈과 생각의 조각들을 건져 올리고, 그것들을 추억과 환상으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으로 분류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포인트 슈즈에 바느질을 하는 일(사소한 것, 기억). 나를 조수석에 태우고 어딘가로 운전해 가는 엄마(중요한 것, 환상:엄마는 평생 운전을 배우지 않았고, 우리 모녀는 어느 곳도 함께 가본 적이 없다). 전혀 일어난 적 없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완벽한 상상이 우리의 삶과 정체성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참 놀랍다. 그러나 머릿속의 모든 건 실재하며, 그 자체의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다. 물질보다 더 많은 암흑물질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우주처럼.


(312-313)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우아함이, 모스크바에는 감동이 있다. 그러나 유혹을 하는 도시는 오로지 파리뿐이다. 파리에 살다 보면 도시의 구석구석이 언젠가 내 눈에 발견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게 된다. 이를테면 구불구불해진 벽으로 몇 세기나 더 늦게 지어진 이웃 건물에 기대어 세월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중세 건물, 부르주아지들이 모인 몽마르트 한가운데 숨겨진 비밀 돌길 옆으로 나란히 들어선 작은 집들.


(387)

무용수들은 공과 사,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배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심하게 야단치며 평소처럼 틀리지 말고 완벽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끔찍하게 싫은 파트너와 춤춰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신경이 약한 사람, 춤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세계에서 절대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보다 춤을 우선시했다. 춤이 없으면 내 인생의 어느 감정도 의미 없을 테니까. 적어도 나는 여태 그렇게 믿었다.


(464)

언덕을 도로 걸어 내려온 뒤 벨리브 자전거에 올라탔다. 미끄러지듯 내리막길을 달리자, 부드러운 밤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뒤로 흩날렸다. 날이 추워져서 재킷을 입고도 몸이 떨렸지만, 발로 페달을 아주 살짝만 밟아도 바퀴가 스스로 가속할 때마다 기묘하고 짜릿한 예감이 들었다. 살면서 황홀한 깨달음의 순간을 이미 몇 차례 경험한 적 있었다. 바르나에서 감자티베리에이션으로 무대에 올랐던 밤에, 내가 사샤를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그때처럼. 내리막길 거리를 활주하면서 나는 이런 직감이 중력을 거스르는 무중력상태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아챘다. 내가 점프를 사랑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자유롭다는 걸 깨달았다. 사샤로부터, 레옹으로부터, 내게 고통과 분노를 주었던 모든 것들로부터. 나는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것에 대해 애정과 연민이 느껴졌다.


(469)

내가 말했듯이,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 최대 수년간 땅에 발 한 번 딛지 않고 공중에서 잠자며, 같은 종을 한 번도 보지 않으면서 홀로 바다 위를 나는 앨버트로스도 결국은 영겁의 서식지, 이들 모두가 태어난 바로 그곳으로 돌아온다.


(510-511)

나는 깊은숨을 내쉰다. 이미 조금도 쉴 틈 없이 꽉꽉 들어찬 2030년도 일정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내년 봄, 우크라이나 국립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이 아시아에서 합동 순회 공연을 할 예정이다. 우리 극장에서의 프로그램 외에도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투어이다. 물론 이는 드미트리도 잘 아는 사실이다. 수십 년간 각국의 발레계 최고위층 인사들과 쌓아놓은 인맥을 총동원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나도 열심히 나섰다. 우리의 인류애를 드러내고 아픔을 치유하고 양심을 회복하는 예술의 신성한 의무를 역설하느라 여러 차례 무대에 섰고, 그보다 열 배도 넘는 횟수의 화상회의를 진행했다. 때로는 이런 언어의 사치성에 머리가 빙빙 돈다. 우리가 같이 올라 춤춘다고 해서(꼭 발레가 아니라 그 어떤 숭고한 예술이라도) 무너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예술이 배고픈 자를 먹이거나 무고한 자를 보호하거나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집에 가는 길에, 스튜디오에서, 또는 무대에서 나를 감동시키는 무언가를 볼 때면, 진실과 아름다움이 만나는 지점이 어딘가 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다. 그 지점에 영영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고, 또는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녁 공기 속에서 그곳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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