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173)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 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만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는 날 어미는 네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줄 테다. 네가 큰 소리로 맑은 웃음을 터뜨려도 입을 막지 않고, 같이 웃으며 힘차고 뜨겁게 너를 안아줄 테다. 여기서 쓰러지는 건 아이를 두 전 죽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녀는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내색하지 않아도 아이를 잃은 충격은 역시 컸던 모양인지 뱀사골에서 좀 좋아지던 건강이 다시 나빠졌다. 당사업을 제대로 하려면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예전처럼 다른 동지들의 짐만 될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일꾼으로, 아니 아이까지 두 몫의 일꾼으로 이제는 제 할 일을 다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305-306)

지리산의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산꼭대기에서부터 화려하게 타오르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순간 낙엽이 지고 거센 북풍과 함께 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남부군의 마지막 낙원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11월 초 서남지구 경찰병력이 총동원되어 비행기까지 합동으로 달궁을 공격해 들어왔다. 대형폭탄과 기총사격에 밀려 남부군은 결국 한 달여의 천국을 버리고 그 달 말까지 지리산 곳곳의 골짜기를 전전하면서 월동준비에 바빴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깊어가는 겨울과 함께 남한 빨치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한 그 유명한 수도사단의 공세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후평에서 9백여 명에 가까운 대부대로 승승장구하던 남부군은 이 수도사단의 공세가 끝나고 난 후 150여 명 정도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그 수많은 인민군 정규부대도 넘지 못한 낙동강을 넘어 종횡무진 적의 심장을 들쑤시고 다니던 남부군, 후평에서부터 지리산까지 몇 천 리 장정 동안 유격부대답게 후방의 적을 마음껏 섬멸하고 다니던 남부군의 사실상의 유격투쟁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었다.

 

(388-389)

남편의 얼굴이, 이현상, 박종하, 이진범, 양봉순,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동지들의 피가 스미고 살이 썩은 이 산은 봄이면 더 눈부신 녹음을 피워낼 것이다. 이 산으로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역사는 소용돌이치며 저 거대한 지리산의 산맥처럼 수많은 봉우리를 만들며 흘러갔다. 우리는 어떤 봉우리를 만든 것일까. 우리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또 다른 동지들이 정상으로 오를 것이다. ‘평등이라는 말만큼 자신의 생명을 걸고 불꽃같은 열정으로 또다시 꿈꾸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현상도, 박종하도, 마실 동무도, 김 영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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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 개정 증보판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지음 / 폴리티쿠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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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024 12 3. 40여 년만의 비상 계엄 선포. 그것은 단순히 불법 비상 계엄이 아니었고, 치밀하게 준비된 친위쿠데타이자 내란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단다. 비상 계엄의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북한을 자극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는데, 북한이 그런 자극에 반응을 했다면 우리는 지금 전쟁 속에서 끔찍한 삶을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소름 끼치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런데도 아직도 그를 옹호하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 더욱 열 받고 화가 나는구나. 윤은 실패한 전두환이었어. 전두환을 따라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어.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을 했지만,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윤은 왜 전두환을 따라 하려고 했을까. 알코올중독자이자 정신병자라서 할 수 있는 판단이 아닐까 싶구나.

이런 시국에 문득 떠오른 책이 한 권 있단다. 김충식 님의 <남산의 부장들>이란 책이란다. 아빠가 몇 년 전에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가 김충식 님의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책을 구입했단다. 책이 생각보다 엄청 두꺼워서 읽기 망설이다가 이번 12.3 내란을 겪고 나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10.26 사건의 전후를 다룬 영화였는데, <남산의 부장들> 1961년 군사 쿠데타부터 1980 5공이 세워질 때까지의 이야기를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부장들의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는 책이란다. 당시 중앙정보주가 남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책의 제목이 <남산의 부장들>이라고 한 거야. 또한 이 책은 박통 시절의 우리나라 역사라고 할 수 있단다.

역사는 권력자의 중심으로 쓰여지다 보니,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고 있던 박정희와 그 측근들의 이야기는 곧 그 시절의 역사가 되니까 말이야. 아빠가 이 시절의 현대사를 다룬 책들을 여럿 읽은 적이 있고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굵직한 내용들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단다. 그러나 상세한 내용들과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들은 아무래도 아빠가 직접 겪은 시절이 아니므로 새롭고 놀라운 것들도 있었단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민주화되지 않은 당시는 억압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겠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자칫 잘못 했으면 그런 시절로 다시 돌아갈 뻔했으니, 큰일 날 뻔했구나.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관련자들은 모두 중형으로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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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71 12 6일 대통령 박정희는 돌연 국가비상사태라는 것을 선포했다. 특별담화 형식으로 발표된 비상사태는 북의 위협을 빗대 체제 강화를 꾀한, 말하자면 제1차 유신이었다.

놀랍게도 이는 헌법적 근거가 박약한 것이었다. 청와대측은 궁색한 나머지 당시 대통령 취임선서의 나는 국가를 보위하고…’라는 구절에 비상사태 선포의 근거가 있다고 우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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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놀랍게도 2024 12 3일에 일어난 일과 너무 유사하구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빠는 깜짝 놀랬어. 역사는 반복된다고… 1971년이면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0년이 된 시점이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친위쿠데타를 벌인 거야.

…..

1961 5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로 그가 정권을 잡는 과정도 이야기해주고, 그의 측근들이 한 짓들도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의 측근들, 그러니까 그의 똘마니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알력 다툼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김형욱, 김종필, 이후락, 김재규 등. 이 책에서는 이름의 영어 알파벳으로 쓰기도 하고 이름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름으로 통일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시절에 익숙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1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은 정치를 한다면서 그만 두고, 이후 짧은 시간 동안 김용순, 김재춘이 맡았다가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 되면서, 60년대 박정희 공포 정치가 극성을 부리게 되었단다. 김형욱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극우주의자였단다. 그는 법보다 주먹과 총칼이 앞섰던 사람으로,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완성하는데 (박정희 입장에서 보면) 공을 세운 사람이었어. 하지만, 박정희는 애완견을 오랫동안 곁에 두지 않았어. 70년대 버림을 받고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고, 김계원이라는 사람이 1년 정도를 하다가 이후락이란 사람이 바통을 이어받았단다. 이후락이라는 자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놈이었단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질렀으며, 공작을 부렸고, 상대 진영 후보를 협박하였다고 하는구나. 그들은 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기기 손쉬운 유진산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김대중이 후보가 되자 박통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하는구나. 아빠가 예전에 <김대중 자서전>을 읽고 쓴 독서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를 참고해도 좋을 것 같구나. 암튼 이후락은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지금도 큰 돈인 600억원을 쓰고, 지역 감정을 유발하는 비겁한 행태를 부려서 결국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구나. 그런데 아주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는구나. 그런데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선거 이후 박정희가 종신 집권을 마음먹지 않았을까 싶구나.

….

이후락이 벌인 일 중에 의외에 일이 있는데 바로 평양에 잠입하여 김일성을 만나 7.4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것이란다. 반공을 일삼던 박정희 독재 정권이 갑자기 햇볕 정책을 하다니…. 아빠도 학창 시절 이 부분을 배울 때 좀 의아해했단다. 하지만 남북의 관계 개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어. 1970년대는 이후락의 전성 시대라고 할 수 있었지. 그래서인지 이후락은 선을 넘는 행동을 하게 된단다. 1973년 김대중 납치극을 벌인 거야. 일본에 망명중인 김대중을 납치하여 일본 바다로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CIA에서 만류해서 살아난 사건이란다. 이 이야기도 아빠가 예전에 <김대중 자서전> 이야기할 때 했었단다. 오늘은 <김대중 자서전>에서 한 이야기랑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그 때 쓴 독서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도 좋을 것 같구나.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의 지시가 있었는지 결국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누군가는 박정희가 시킨 일이라고 하지만, 이 책의 지은이 김충식 님은 정황상 박정희의 지시 없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벌인 사건이라고 하였단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관계가 악화되고, 남북관계도 깨지고, 일본과 관계도 악화되었단다. 무엇보다 이 일로 이후락은 버림받게 되고 몰래 출국했다는구나.

 

2.

박정희는 이후락 후임으로 1973 12월부터 신직수를 중앙정보부장에 선임했어. 이 때에는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운동이 점점 심해지던 시절이었단다. 그래서 긴급조치가 발령되었어. 1974 1  발령된 긴급조치 1호는 이후 9호까지 이어지는데 독재 정권을 강화하는데 쓰이는 악법 중에 악법이었단다. 그것을 신직수가 주도하였단다. 이렇게 시국은 점점 불안정해지는 가운데 재일동포 문세광은 박정희를 시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하였단다. 이 일로 박정희는 큰 충격에 빠진 듯 했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이번 사건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연장 선상에 있는 것으로 한국인이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라면서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했단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를 14년간 경호했던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나게 된단다. 박종규 후임으로 온 경호실장이 그 유명한 차지철이란다. 국내 정세는 점점 불안정해지기만 하고,  남북 관계에도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진단다. 1976 8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일어난단다.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을 살해한 사건인데, 박정희는 이 사건에 열불을 내고 강경 대응을 했단다. 전쟁까지 일으키려고 했는데, 미군이 강하게 자제시켰단다. 1976년 재미 동포 박동선이라는 사람이 미국 의회에 불법 로비를 한, 일명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여 박정희 정부와 미국의 카터 정부는 관계가 악화되었어. 이 코리아 게이트로 인해 신직수가 물러나고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단다.

1977년에는 미국으로 망명을 간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하기 시작했어. 김형욱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회고록을 통해서 박정희의 비리를 폭로하려고 했어. 박정희는 사람을 보내서 협상을 했고, 돈을 받고 회고록 원본을 받아 오기도 했단다. 그런데 그 전에 유출된 사본이 있었던 거야. 그 유출된 사본으로 인해 김형욱의 회고록이 출간되었고, 김형욱은 파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다.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 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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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4대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이었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증발해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정되지 않은 인물.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제거됐을 것이라는 추측만 김형욱의 운명은 박정희 정권의 영욕을 상징하는 듯하다. 김형욱의 별명은 뚝심의 돈까스였다. 이 별명은 남재희 정치부 기자가 지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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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은 점점 심해지고, 박정희는 차지철의 의견에 많이 치우쳐 있었단다. 차지철의 권력이 정점을 이루고 있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차지철의 말 한마디에 민간 기업의 건물 높이까지 조정했다는구나. 1979년 여름부터 김재규는 박정희로부터 신임을 점점 잃게 되고, 이런 불만들과 차지철의 오만과 어지러운 국내 상황들이 어우러져 그가 결국 박정희를 제거하게 되었단다.

1976 10 26일 김재규가 일을 벌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로 인해 오랜 독재 정권이 끝나게 되었단다. 하지만 또 다른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박정희 아래서 때를 기다리며 성장하던 괴물 전두환에게 10.26 사건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보다 직책이 높은 이들도 있었지만,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10.26 사건의 조사를 주관하면서 세력을 넓혀 갔고,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또다시 군사 정권을 세워버리고 말았단다. 누가 봐도 사악하고 불의의 악마 같은 사람이란다. 그런데 2024 12.3 내란을 저지른 윤이 전두환을 흠모했었다고 하니,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구나. 보나마나 알코올에 찌든 녹아 내린 뇌가 있겠지….

오늘은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장들의 이야기가 담긴 <남산의 부장들>에서 인상적인 부분들과 이야기를 해서 전체적인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점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예전에 읽은 <김대중 자서전>이 자꾸 떠올랐단다. 너희들이 나중에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김대중 자서전>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나저나 헌법재판소에서 얼른 윤석열 탄핵 최종 판결이 얼른 났으면 좋겠구나. 아직도 복귀를 꿈꾸고 있는 윤석열과 그를 지키려고 하는 수구 정당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한국 중앙정보부장 10명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의 끝 문장: 5공의 팡파르가 울려 퍼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낙선의 5.16혁명 데모는 대질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강영훈 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군이 정치에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육사생도를 정치에 끌어들이는 그런 짓은 쿠데타의 경우에도 금기로 되어야 한다. 그 당시 육사 출신 대위 몇 사람과 내가 대질했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4년제 육사 출신 셋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그중의 하나가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내가 육본에 갔던 그날, 같은 11기 출신이라 해도 김성진(80년대 체신부장관) 등과 같은 장교는 지지 데모에 반대했고, 관망하는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 P47

정보부가 캔 미량의 석유는 유리병에 담겨 청와대에 올려졌다. 박 대통령은 너무 기쁜 나머지 국무회의 때 유리병에 담긴 원유를 탁자 위 재떨이에 붓고 불을 붙여보였다.
그러나 경제성이 없는 석유였다.
애당초 비서실장 김정렴과 오원철 등은 "탐사가 끝날 때까지 발표 않는 게 좋겠습니다"고 건의했다. 박 대통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 노다지’를 기대하고 정치적 효과에 사로잡힌 듯 그것을 발표해 버렸다.
희망이 크게 부풀면 절망도 깊다.
보통 한두 구멍 뚫다 마는 석유 시추는 포항에서는 무려 12구멍이나 시추되었다. ‘석유 원년(元年)’이니 하는 성급한 기대는 무참히 깨져갔다. 그리고 탐사 과정에서부터 주민들의 방대한 토지를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어 놔 90년대까지도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 P629

그 무렵 박 대통령은 추가적인 미군 철수에 맞서 핵무기 개발을 꿈꾸고 ‘작전지휘권’을 지렛대 삼아 대미흥정을 벌였다. 그의 비공개 어록.
"미국 사람들은 작전권 이양 문제에 신경과민이다. 주한미군이 적어도 현수준을 유지하면 미군이 지휘관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주한미군 수가 현수준 이하로 감축되면 다시 작전지휘권 문제를 협의하겠다. 여기에 대해 미국 측은 못마땅해 가고 있고 답변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자기 나라 군대를 몇 명 없고 장군만 몇 있다든지 하는데 남의 나라 60만인데 4만밖에 안 되는 미군이 지휘관을 갖고 있는 것도 이상한 상태 아닌가.
그러나 전쟁이 나면 해공군과 병참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6.25 때부터 이날 이때까지 작전지휘권을 미군한테 맡겨온 것이다. 이 문제는 휴정협정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어."
- P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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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2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은 우리가 불타기(분노·증오)에 치닫기를 바란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불타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하고도 안 싸워요. 그러나 ‘그들’이 일삼는 갖은 막짓과 바보짓을 멀쩡히 지켜보면서 ‘그들’한테 마음을 안 빼앗기면서 ‘우리 보금자리 살림짓기를 사랑으로 할’ 적에, 그들은 오히려 힘을 잃습니다.

‘그들’은 늘 우리가 ‘그들 쳐다보기’를 하면서 ‘그들 민낯에 불타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쯤 싸움을 걸려는지 기다리지요. 그들은 ‘몸돌봄(정당방위)’를 외치려고 노려봅니다. 그들은 아직 그물(법)에 걸리지 않는 테두리에서 ‘우리’를 놀리거나 괴롭히면서 ‘우리가 먼저 주먹질·불타기’를 하기를 바라요. 그래야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불기운(분노 에너지)’으로 그들 벼슬자리를 더 단단히 지키거든요.

바로 이런 불기운이 그동안 일본굴레(일제강점기)와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에 이르는 수렁에서 ‘그들’이 일삼은 짓입니다. 그들은 들너울(민주화)을 아예 짓밟거나 싹을 꺾지 않습니다. 그들한테 맞서려는 불길이 있어야 오히려 그들이 거머쥔 벼슬자리를 더 단단히 틀어쥐기 때문입니다.

저는 1970∼80년대에 어린날을 보내며 온갖 주먹놈을 겪고 지켜보았습니다. 국민학교나 마을에서 아이들은 돈있는 집이나, 힘센 주먹이거나 하면, 시험성적이 높거나 하면, 다들 이런 것을 휘두르면서 또래와 동생을 때리고 돈을 빼앗기 일쑤였습니다.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얻어맞고 돈을 빼앗기는 나날이었는데, 나라에 큰놈(대악마)이 있으면, 배움터와 마을에 작은놈(소악마)이 어우러지는 길을 바로 ‘그들’이 단단하게 세운 셈입니다. 1970∼80년대뿐 아니라 1950∼60년대와 1900∼40년대에도 이런 큰놈·작은놈 얼거리는 똑같았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주머니에 1원 한 푼조차 없으면 더 얻어맞더라도 뭘 빼앗기는 일은 없더군요. 그들이 주먹이 지쳐서 때림질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면 오히려 때림질이 지겹다면서 침을 뱉고서 떠나요. 어려운 말로 ‘비폭력·무저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늘 불타올라서 그들하고 어지럽게 뒹굴며 싸우기를 바라더군요. 그래서 그들하고 안 어울리고, 안 불타오르면 오히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벌이는 바보짓’을 느끼고 돌아보고 되새길 틈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느덧 모지리 윤씨가 바보짓을 일삼은 지 석 달이 흐르는데, 우리나라는 지난 석 달 동안 ‘대통령 없이 멀쩡히 잘 굴러가는 나라’를 보여줍니다. 아니, 우두머리라는 자리는 오히려 없어도 되고, 그런 자리를 맡는 나라지기가 없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줄, 나라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보금자리를 사랑으로 알뜰살뜰 살림을 꾸릴 적에 든든히 지키는 줄 알아보는 나날로 삼아야지 싶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가 불타오르기를 바라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타오르면서 그들한테 손가락질을 하고 싸움박질로 얼크러지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돌아볼 짬이 사라지고, 우리 집을 멀리하고 말아요. 그들을 모두 몰아낸 자리에는 무엇을 세워야 할까요? 또다른 모지리가 우두머리나 나라지기를 차지하면 똑같은 굴레가 찾아올 뿐입니다. 우리는 이즈음에 ‘아이들이 물려받을 아름길’을 어떤 손으로 어떻게 살림하면서 사랑누리로 가꾸어야 슬기롭고 어진 어른으로 설 만한지 생각할 일이라고 봅니다. 《아나스타시아 1∼10》(블라지미르 메그레) 같은 책이야말로 오늘날 찬찬히 읽고 새기고 나눌 노릇이지 싶습니다.

bookholic 2025-02-13 09:29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아나스타시아는 꼭 읽어보겠습니다.^^
 














(6)

오래전에 쓴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 현대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목숨까지 걸게 했던 사회주의는 이미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 쿠바 정도가 사회주의의 명백을 이어가고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사회주의란 소련이나 중국으로 대표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우리에게 사회주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가리키는 추상명사였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은 언제나 지금보다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동물이므로, 사회주의가 사멸했다고 하는 지금 이 시간에도 더 나은 어떤 세상,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옛 사람들의 기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일까.

 

(33-34)

나에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어항 속의 금붕어였을 뿐이었다. 어항의 벽을 깨뜨릴 수 없다면 굴욕적으로 숨쉬느니 어항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내게는 벽을 깰 방법이 없었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있을 따름이었다. 판검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다든가, 판검사가 될 수 없으니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의사라도 되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 해서 세상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나는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살기로 했다. 나를 소외시킨 세상을 오히려 내가 소외시킨면서 말이다.

 

(55-56)

역사란 세계사 책 속에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걷는 이 길, 내가 사는 이 반내골에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다는 게 신비로웠다. 구름 위로 솟은 지리산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비로소 구체적인 형상을 띠고 다가왔다. 할머니의 말대로 공산당이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면, 설령 두 분 때문에 연좌제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 역사였거나 어쩌면 완전히 잘못된 역사인 것만은 분명했다.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은 배웠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적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학교에서는 내 혼란의 일부분도 해결해주지 않았다. 왜 세상에는 차별이 있는지, 왜 나는 공산당의 딸로 태어나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지, 할머니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머니는 책에 씌어진 역사와는 다른, 보통사람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 내 부모는 그 역사의 와중에서 그것이 옳든 그르든,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까지 내던졌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92)

그러던 9월 전국적인 총파업이 시작됐다. 그가 소속해 있는 철도에서의 파업이 총파업이 불씨였다. 애당초 철도파업이 내건 요구사항은 쌀을 달라는 대부분 인민들의 요구와 별다른 바 없었다. 일급제 반대, 기본급료 인상, 가족수당 일인당 육백 원 지불, 물가수당 인상, 식량을 본인에게 네 홉, 가족에게 세 홉씩 지급할 것, 운수부 직원도 동등하게 대우할 것 등이 노조의 요구조건이었다. 당시 모든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엄청난 물가상승으로 일제시대의 삼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철도국장 맥크라인은 철도노조가 제출한 요구조건에 대하여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고 있으니 행복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군정청의 회답이 없자 철도노조는 24일 오전 9시를 기해 사만여 노조원들이 일제파업에 돌입했고, 26일에는 서울지역 출판부문 노동자들이 동조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26경성지방 총파업 출판노동조합 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51-152)

천하의 개망나니 박종하는 46년 말이 되면서 차차 변하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천하의 박종하를 저렇게 얌전하게 만든 게 누구냐며 수군거렸다. 박종하를 변화시킨 장본인은 곧 밝혀졌다. 바로 공산당이었다. 주먹이나 휘두르는 것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말뿐인 해방조선 젊은이의 답답함이 무신자를 위한 평등한 새 세계 건설과, 친일파를 비호하며 조선을 새로운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이라는 이 땅의 역사적 사명을 알아가면서 비로소 진정한 자기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놀랍게 변해가는 박종하를 보며 마을사람들은 공산당의 위력에 혀를 내둘렀다. 당시 남조선 대부분의 인민이 그랬지만 박종하와 같은 동네 사람들이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노인네나 젊은이들이나 모두가 좌익의 열렬한 지지자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동네에서 조금 말썽피우는 사람을 보면 으레 저놈 공산당 만들어야 사람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262)

동무들! 우리는 조선노동당 당원들이오. 굶주리고 짓밟힌 무산대중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가들이오. 혁명가는 이미 자기를 버린 지 오래요, ……혁명가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혁명당을 따라야 하오. 동무들은 한 지도자의 일시적인 오류로 혁명사업을 그르쳤다고 해서 영원히 혁명을 포기하겠다는 거요? …… 이번 전쟁은 언젠가 중앙에서 다시 검토될 것이오. 그때 모든 과오들이 가려지고 비판되겠지요. 이 점 명심하고 동무들 몇 명이서 북으로 가겠다는 거요? 이미 퇴로도 끊겼소. 지금까지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지금 당장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시오.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되면 각자 자기 부서로 돌아가 자기 임무를 다하시오.”

 

(313-314)

여름과 함께 소련이 유엔에서 한국전의 휴전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또 한번 해방이 물거품으로 사라자는 순간이었다. 여순사건, 작년 여름의 광주 입성, 그 짧았더니 해방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의지만으로 움직여지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내일모레일 것 같던 해방은 미제의 참전으로 물거품이 되고, 미제의 완전한 한반도 점령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저지되었다. 세계의 복잡다양한 얽힘 속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고 부서졌다. 그렇게 세상은 흘러가고 있었다. 얽히고설킨 거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확신하면서도 웬일인지 정체 모를 허전함은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사라지지 않았다. 생성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아름답고 분명한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에는 슬픔도 있는 것일까. 한 인간, 그 개체는 죽되 인류는 발전한다는 위대한 진리 앞에서도 그는 가끔씩 섬뜩한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다.

 

(363)

묻혀진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세계 어디에도 한국의 현대사와 같은 뼈아픈 비극은 없었고, 또 그렇게 철저하게 묻혀진 비극의 역사도 없다. 아직까지도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열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는 금기로 묻혀져 있다. 최근 들어 간혹 한두 사람의 묻혀진 이야기들이 비밀스럽게 들춰지기도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흐름이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한 한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대한 물줄기의 한 지류일 뿐이고, 그 작은 흐름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도 도도한 원 물줄기가 제자리를 잡을 때뿐일 것이다.

 

(384)

박갑출도 전적으로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제 남한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은 보라빛 먼 날의 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간부들 중의 어느 누구도 이전과 같은 혁명의 결정적 시기가 당장 다시 오리라고 믿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최후까지 싸우다 죽는 것과,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오고야 말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조직을 구축하는 길뿐이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10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뿌린 싹이 해방의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이 결정적 시기를 해방으로 성공시키지 못한 쓰라림이 남는 것뿐이었다. 이제 밀알이 되는 것, 땅에 뿌려져 더 많은 밀로 태어날 그날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남은 그들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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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선오는 눈을 맞으며 한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득한 눈발 저쪽에 무등산이 그 우람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산, 광주에 오면 누구나 바라보는 산, 언제나 중후하고 의연하고 듬직하고 넉넉한 자태의 무등산은 겹겹의 눈발이 지어내는 환상적인 옷을 입으며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광주를 내려다보듯 보듬듯 하고 있는 그 산을 무시로 바라보며 무등의 의미를 가슴에 새겼던 지난날을 김선오는 왠지 슬픈 감정으로 더듬고 있었다. 등수를 매길 필요가 없도록 으뜸이 되겠다는 꿈 속에는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

꿈은 클수록 좋고, 욕망은 치열할수록 좋다.”

 

(37-38)

그게 말입니다…… 얼핏 보면 항아리에 담아놓는 것이 더 손해일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 따지고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왜냐하면 딴 그릇에 따로 내와도 깍두기가 모자라게 되면 사람들은 또 달라고 합니다. 그럼 다시 갖다 주느라고 일손만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 담아두면 그 일손을 덜게 됩니다. 그리고 또…… 딴 그릇에 두 번 내온 것이 많아서 남기게 되면 그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항아리에서 각자가 먹을 만큼씩만 꺼내 먹으면 그런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항아리에 이렇게 담아두면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 같아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하고, 그게 더 손님을 끄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78)

허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자기 할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 일본놈들이 백배사죄하며 돈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을 판인데, 오히려 이쪽에서 사죄 같은 건 상관없이 어서 돈이나 좀 달라고 매달리는 형국 아니냔 말야. 그러니 자기 할아버지가 짓밟히고 모독당하는 것 같고, 괜히 헛된 일 한 것 같고, 또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우리가 허진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는데,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데모를 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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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 제주4·3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금숙, 오멸 원작 / 서해문집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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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다룬 책들을 몇 권 읽었단다. 소설이나 교양서적이었어. 제주 4.3 사건을 다른 책들 중에 <지슬>이라는 만화책이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단다. 아빠도 예전에 사 두고 있었어. 만화책이다 보니 너희들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얼마 전에 아빠가 4.3 사건을 다룬 한강 님의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지슬>도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고 읽었단다.

<지슬>이라는 영화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아빠는 만화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인 줄 알았는데, 반대더구나. 영화 <지슬>을 만화로 옮긴 것이라고 하더구나. 영화 <지슬>은 오멸이라는 사람이 감독을 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등 많은 상을 탔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만화책은 김금숙 님이라는 분께서 그리셨는데, 영화 내용을 충실히 따르셨다고 했어. 우리가 보통 만화와는 색감이 좀 달랐단다. 굵은 붓으로 터치한 것 같았어. 그래서 인물 묘사가 사실적이지 않아서 너희들이 안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제주4.3사건의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만화는 이런 거친 붓질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주인공들이 당시 제주도에 살던 평범한 서민들인데 그런 거친 붓 터치가 그들의 거친 삶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어. 또 한편으로는 수묵화 느낌이 나기도 했단다.

 

1.

책 제목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를 뜻한다고 하는구나. 요즘에야 가공식품으로 맛있는 과자나 술안주로 많이들 먹지만, 예전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비상식량으로도 생각되는 감자였잖니. 빈센트 반 고흐도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작품 속 사람들은 지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기억이 있구나. 지슬은 바로 그 감자의 제주도 사투리. 이 책에서도 숨어지내고 도망다니는 이들에게 서로 지슬을 주고 받았단다. 지슬은 단순히 먹거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던 거야. 제주 4.3사건은 아빠가 여러 번 이야기를 해서 또 하지는 않겠지만, 제주 4.3 사건은 피해를 입은 국민들만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고, 국가의 부당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던 군인들에도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란다. 이 책에서도 국가의, 상사의 부당한 명령에 갈등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어.

 

 

그 부분을 읽으면서 작년 12.3 내란 사태 때 출동했던 군인들도 생각이 났단다. 어디로 출동하는지도 몰랐던 그들이 내린 곳은 국회이고, 그들이 상대하는 것이 적군이 아니고 시민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소극적으로 대응을 하면서 갈등을 하는 모습이 카메라 속에도 보였거든.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은 당연한 것 같구나. 당시 몰상식한 지도자로 인해 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지. 그리고 그런 몰상식한 지도자의 흉악한 결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2024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또 한번 큰 충격이었지. 많은 상식 있는 국민들이 나서서 행동하여 과거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구나.

….

만화 <지슬>을 읽고, 영화 <지슬>도 보고 싶더구나. 그런데 어디서 볼 수 있나? 찾아봤는데, 고맙게도 유튜브에서 무료로 공개되어 있더구나. 오랜만에 영화도 한 편 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춘섭아, 조심해.

책의 끝 문장: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는 미군정과 미군 고문관이 있었지만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학살에 관해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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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진 2025-02-08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연극으로 4.3을 처음 만났죠. 가슴 먹먹했던 순간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책을 보기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죠.

bookholic 2025-02-08 22: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연극은 더욱 실감이 나겠네요...
그래서 나중에라도 4.3 사건을 다룬 연극을 못볼 것 같습니다.
너무 가슴 아플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