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모든 것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렸다.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 우리를 위해 세상을 바꾸는 일, 또는 그냥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결국 우리가 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도록 하는 우리 내면의 정의, 죽은 감수성을 되살리는 진정한 개혁, 이런 것이야말로 진실이고, 우리의 진실이고, 유일한 진실이다. 나머지는 그저 풍경, 느낌을 담는 액자, 생각을 적어놓는 서류철일 뿐이다. 들판, , 포스터, 옷 들 같은 것으로 가득한 총천연색의 풍경이든, 때때로 오래된 단어와 몸짓이 되어 표면에 떠올랐다가 다시 인간 표현의 원초적 어리석음 안으로 가라앉는 지루한 영혼의 흑백 풍경이든 마찬가지다.

 

(215-216)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을 주의깊게 들여다볼수록 동물의 삶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사람과 동물은 둘 다 세상에 무심코 던져진 채 살아간다. 둘 다 이따금 만족스러운 순간들을 누린다. 둘 다 매일 똑 같은 생리 현상을 해결한다. 둘 다 자신의 생각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 삶 이상을 살지 못한다. 고양이는 햇볕 아래서 뒹굴다가 거기서 잠든다. 인간은 삶 안에서 자신의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뒹굴다가 거기서 잠든다. 인간도 짐승도 숙명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둘 다 존재의 무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인간 중에서 위대한 자들은 영광을 탐하지만, 그건 개인의 불멸을 누리는 영광이 아니라 개인과 관련 없는 추상적인 불멸일 뿐이다.

 

(218)

내가 바라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 내 것,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갈 수 없는 인도나 남쪽 바다의 큰 섬이 아닌 아무 시골 마을이나 황야라도 좋으니 어느 곳으로라도 떠나고 싶다. 매일 보는 얼굴들, 일상, 하루하루를 그만 보고 싶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 내 고질적인 가식에서 벗어나고 싶다. 휴식이 아니라 삶처럼 다가오는 잠을 느끼고 싶다. 바닷가의 작은 오두막이나 심지어 바위투성이 산비탈의 동굴도 그런 순간을 선사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 의지만으로는 그런 순간을 누릴 수 없다.

 

(246)

언젠가 사람들은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우리가 태어난 세기의 일부를 해석하는 타고난 사명을 완수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 사실을 비로소 이해한 이들은, 동시대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불행히도 내 작품을 홀대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내가 그렇게 살았다니 유감스럽다고 글을 쓸 것이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을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증조부 세대에서만 쓸모 있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죽은 이들을 상대로나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254)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현실이 나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지 보려고 주위를 살피면 무표정한 집, 무표정한 얼굴, 무표정한 몸짓 들이 보인다. 돌멩이도 육체도 생각도 다 죽어 있다. 모든 동작이 멈춰 일체가 정지한다. 그 무엇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낯설어서가 아니라 정말 뭔지를 모르겠다. 세상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순간의 유일한 현실인 내 영혼의 밑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강렬한 고통이, 어두운 방에서 누군가 우는 소리 같은 슬픔이 존재한다.

 

(268)

오늘 나는 거리를 걷다가,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었던 두 친구를 따로 마주쳤다. 각자가 왜 상태에게 화났는지 내게 말해줬다. 둘 다 진실을 얘기하고 있었다. 둘 다 자신의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둘 다 옳았다. 둘 다 틀림없이 옳았다. 한 명은 이것을 보고 나머지 한 명은 다른 면을 보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발생한 일의 진상을 정확히 보고 있었고, 모든 같은 기준에 근거해 사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둘은 뭔가 다른 것을 보았고, 결국 둘 다 옳았다.

 

(273)

글을 쓴다는 것은 꿈을 객관화하는 것이고, 우리의 창조적 본성이 베풀어준 일종의 특혜로서 외부 세계를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을 낸다는 것은 이 세계를 다른 이들에게 줘버리는 것이다. 우리와 그들의 공통된 외부 세계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물질로 만들어진 현실적인 외부 세계뿐일 텐데 무엇 때문에 그리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내 안에 있는 우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가?

 

(280)

내가 인생에서 찾아다녔던 모든 것들은, 찾아다니려고 나 자신이 직접 버렸던 것이다. 나는 마치 뭔가를 찾아다니던 꿈속에서, 뭘 찾는지 이미 잊어버렸건만 넋을 잃은 상태로 찾고 있는 사람 같다. 그래서 뭔가를 찾아 헤매느라 이것저것 뒤지고 들어올리고 옮겨놓은 손의 실제 움직임이, 길고 흰 다섯 손가락이 양손에 달린 모습이, 찾고 있는 대상보다 더 사실적이 돼버린다.

 

(294)

독서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꿈을 꾸는 것이다. 부주의하고 산만하게 읽음으로써 우리를 이끄는 손에서 해방될 수 있다. 피상적으로만 지식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독서이며 심오해지는 길이다.

 

(299)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죽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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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나와 인생 사이에는 아주 얇은 유리 한 장이 있다. 뚜렷하게 바라보며 인생을 이해한다 해도, 결코 만질 수는 없다.


(129)

, 내 안에 살아 있고 내 안이 아니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죽은 과거여! 들판의 작은 집 정원의 꽃들은 오직 내 안에만 있구나! 뜰의 채소와 과일나무와 소나무들은 오직 내 꿈속에만 있구나! 내가 상상한 전원생활과 시골 산책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어라! 길가의 나무와 오솔길과 돌 들, 지나가던 시골 사람들…… 모든 것은 단지 꿈이었을 뿐, 내 기억에 새겨진 채 나를 아프게 한다. 그것들을 꿈꾸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던 나는 지금은 꿈꾸던 순간을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사실은 나의 진정한 그리움이자 나를 눈물짓게 하는 과거이고 죽어버린 진정한 삶이다. 나는 그 삶이 엄숙하게 관에 누운 모습을 바라본다.


(138)

모든 것에 지칠 때가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휴식을 주는 것마저 피곤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피곤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에게 휴식을 주는 것은 그것을 얻으려는 생각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걱정과 아픔 아래에는 낙담한 영혼이 있다. 인간적인 걱정과 아픔을 교묘히 피하고 자신의 권태마저 비켜갈 수 있는 이들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은 이들에게는, 어느 순간 의식 속에서 갑옷 전체가 갑자기 무거운 짐이 되고 인생은 전도된 걱정과 잃어버린 아픔이 되는 일이 별로 놀랍지 않다.


(156)

글을 쓴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문학은 인생을 무시하는 가장 유쾌한 방식이다. 음악은 마음을 달래고, 미술은 기운을 북돋고, 연극이나 무용 같은 행위 예술은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문학은 잠에 빠지듯 인생에서 멀어지게 한다. 다른 예술의 경우, 어떤 것은 눈에 보이는데다 살아 있는 형식을 사용하고 또 어떤 것은 인간의 삶 자체를 살아가기에 인생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160)

나는 국가와 인류에 종속되길 거부한다. 소극적으로라도 저항한다. 국가는 나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꼼짝 않는 이상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오늘날 사형제도도 폐지되었으니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나를 귀찮게 하는 정도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영혼을 더욱 단단히 무장하고 내 꿈속 더 깊은 곳에서 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국가는 나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운명이 나를 봐준 것 같다.


(169)

분개하지 않는다. 분개는 힘 있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체념하지 않는다. 체념은 고귀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위대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나는 힘 있는 자도, 고귀한 자도, 위대한 자도 아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꿈을 예술가라서 나의 불평으로 노래를 만들며 놀고, 내 꿈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도록 배열하며 논다.


(182)

정말 오랫동안 나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내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다. 아무도 나의 진정한 모습과 다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방금 무엇인가 아주 새로운 일을 했거나 뒤늦게 한 것처럼 숨을 쉬는 나를 느꼈다. 의식을 갖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일은 다시 나로 깨어나 내 존재의 궤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더 행복해질지 그 반대일지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길을 걷다 고개를 들고 성벽이 세워진 언덕 위로 차가운 불덩이로 만든 반사경 같은 노을이 십여 개의 창문을 불태우는 모습을 본다. 그 단단한 불의 눈 주위로, 언덕 위에는 하루가 저물 무렵의 포근함이 가득하다. 적어도 지금 나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막 나의 슬픔이, 저 지나가는 전차의 갑작스러운 소음과 젊은이들이 대화하는 소리와 살아 있는 도시의 잊혔던 속삭임과 마주치는 것을-나는 그것을 내 귀로 보았다-의식할 수 있다.

정말 오랫동안 나는 내가 아니었다.


(192)

어떤 이들은 삶에서 큰 꿈을 품지만 이루지 못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런 꿈도 품지 않기에 마찬가지로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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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5년 여름호 - 통권 190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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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3년여 만에 다시 정상 국가가 된 대한민국이 된 지 한 달여가 되었는데, 얼마 만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지 모르겠구나. 다시 정상 국가가 된 이후 첫 번째 출간된 녹색평론에서는 12.3 계엄령, 내란, 외한 사태를 뒤돌아보고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단다. 내란에 대한 특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의혹으로 그쳤던 내용들이 하나하나 진실이 드러나는데, 작년에 잘못했으면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되더구나.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북한을 도발하여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은 정말 놀랄 소식이었단다.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면 생각해낼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구나. 고작 0.7% 차이로 당선을 하고서는 무한 권력을 잡은 양, 마치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은 양, 권력을 불법으로 휘두르는데 지난 3년간 정말 불안했단다. 반대 정치 세력을 탄압하는 것은 군사독재정권을 보는 듯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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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윤석열이 0.7% 차이로 근소하게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필자는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지지율이 낮은 윤석열 정권이 향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세 가지 방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첫째, 야권 및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에 대한 양보와 타협, 둘째, 정치적 능력이 있는 인물을 기용하여 중간층을 포섭, 셋째, 이재명 민주당 대표, 문재인 전 대통령 등 야당 및 반대세력에 대한 일관된 탄압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할 것이며, 결국 북풍 또는 북한을 상대로 국지전을 일으키는 외환 방식에 의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선택권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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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이완용이 울고 갈 만큼의 친일 행보는 그의 국적이 대한민국이 맞나? 하는 의심을 사기도 했단다. 일본과 군사동맹을 강화한 것도 북한을 도발하여 군사충돌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했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정말 무식한 사람이 아닐 수 없구나. 저렇게 무식한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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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윤석열과 기시다 정권의 정치적 밀월관계는 캠프데이비드 공동선언(2023 8 18)을 통해서, 한일 및 한미일의 포괄적 군사동맹 강화와 대중국 포위망 구축에 한국과 일본이 선봉에 서는 것으로 이어졌다. 미국일변도를 주장해온 아베의 외교 노선은 인도태평양전략과 캠프데이비드 공동선언을 통해서 동남아시아, 대만해협, 한반도에서 3개국 군사력의 동시 운용을 가능케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격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12.3 내란 외환 사태는 한미일 군사협력의 토대 위해서, 한반도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면 미국과 일본이 언제든 적극적으로 개입, 지지해줄 것이라는 확신 위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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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기저기 개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단다. 누가 뭐라 해도 공무원이면서 막강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검찰의 개혁이 우선시 되어야겠지만, 사법부 또한 개혁이 필요하단다. 이번에 대법원에서 판결하는 것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경악을 하지 않았니. 대법관이라는 사람들이 헌법에 근거한 판단이 아닌, 정치적인 개인 생각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말도 안 되더구나. 그렇게 판결을 내린 판사들에 대해 아무로 조치도 할 수 없고 말이야.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들 또한 이미 엄청난 카르텔을 갖고 있으니 이 또한 뜯어고치기가 쉽지 않겠구나.

헌법재판소는 이번에 그를 파면시키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하면서 국민들의 신뢰도를 얻고 있지만, 우리가 파면의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헌법재판소도 잘 믿지 못하고 얼마나 마음을 조아렸니.. 9명에 불과한 헌법재판소 재판들에 의해 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단다. 이번 녹색평론에서는 그런 헌법재판소 시스템도 합리적으로 바꿀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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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했다. 이 문장은 가슴 아프다. 왜 주어가 국민이 아닌가 하는 마음의 저항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024 12 3,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을 맨손으로 막아내고 탄핵으로 이끈 것은 국민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광장정치의 힘을 보여준 쾌거였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파면 결정은 판사들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나는 탄핵 판결을 들으면서 국민의 한 명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짜증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허탈감,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 싶은 열망과 그놈이 그놈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의 절망감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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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빠른 속도로 정상 궤도를 되찾고 있단다. 주식 시장도 활개를 띠면서, 국장에 투자했던 사람들이 어깨를 으쓱하는 시절이 되었구나. 하지만 방심하지 말아야 한단다. 언론은 또 자세를 바꾸지 않고, 민주 정부를 깎아 내리려고 할 거야. 그리고 언제 어디서 새로운 악마가 출현할 지 모른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 들어선 정부는 좀더 국민의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란다. 아빠가 보기에는 지난 한 달 동안 하는 모습을 앞으로 쭉 유지하면 되지 않을까 싶구나. 그렇다면 다시 악마에게 정권을 내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1.

이번 정부는 정말 할 일이 많단다. 앞서 이야기했던 각종 개혁들도 중요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정책들도 시급하단다. 기후 변화는 이제 현실이 되었단다. 작년 여름은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는데, 올 여름은 이미 작년을 뛰어넘는 더위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단다. 그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영향으로 대형 산불이 늘어간다고 한다.

올 봄에 경북 지역에 큰 산불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잖아. 그런데, 이 책에서는 다른 주장을 했어. 큰 산불이 기후변화의 영향이 아니라, 우리나라 산림정책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이야. 그 증거로 일본이나 중국에는 큰 산불이 안 생기고, 심지어 2000년 이후로 산불 피해는 줄어들고 있다면서 말이야. 우리나라가 큰 산불이 일어나는 것은 산에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서 그렇다는구나. 실제로 올 봄에 큰 불이 난 경북지역은 금강송 등 소나무를 많이 심은 곳이라고 하는구나. 소나무에는 수분을 적게 갖고 있고, 송진이 기름처럼 불에 잘 붙는 성분이라서, 한번 불이 나면 끄기 어렵고 잘 번진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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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기후조건 및 기후변화 특징을 보이고 있지만, 최근 10년간 대형산불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발생 건수 및 피해면적 또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가 극심해진 2000년 이후 오히려 산불피해는 급감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 산불, 특히 대형산불은 최근 들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 차이를 기후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산불을 키우는, 기후변화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산림청이 얘기하지 않는 우리나라 대형산불 발생지역의 중요한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울진, 삼척, 고성, 밀양, 합천, 홍성, 안동, 강릉 등과 올해 발생한 대참사 의성과 산청 산불 등 대형산불 발생지역은 모두 소나무 우점림에서 간벌과 숲가꾸기 사업이 집중된 곳이다. 분명 기후변화가 아닌, 제도적 행정적 개입의 결과로 변형된 연료조건을 최근 잦아진 대형산불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불이 기후위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인위적 개입의 부작용을 감추려는 수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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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하는가. 활엽수림을 심으면 산불을 저지하거나 완화할 수 있다는구나. 활엽수들은 잎과 가지가 큰데, 그 안에 수분 함량도 많다는구나. 그래서 불이 잘 붙지 않고 불이 붙어도 천천히 붙는다고 하네. 활엽수가 많은 산은 큰 산불이 잘 안 나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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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한편, 소나무림과는 달리 활엽수림은 산불을 자연스럽게 저지하거나 완화하는 방화선역할을 한다. 참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와 같은 활엽수는 잎과 가지에 수분 함량이 높고, 불이 잘 붙지 않으며, 불길이 옮겨붙더라도 천천히 연소된다. 이러한 특성은 산불의 확산 속도를 낮추기 때문에, 진화 인력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등 인위적 관리의 손길이 적은 국립공원 지역은 대형산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데, 활엽수림으로 전환되는 생태적 과정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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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자유주의 노선의 우파 세력들이 각국의 권력을 잡으면서,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은 점점 뒷걸음치는 것 같아 안타깝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기후 변화에 대한 정책과 친환경에서니 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났어. 그리고 중동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계속되는 전쟁도 결국은 화석 연료에 대한 패권 전쟁이라고 하는구나. 지난 정부의 우리나라도 기후 정책에 있어 퇴행적이었기 때문에 남 말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단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기후 변화에 대한 정책과 환경 정책에 힘을 쓴다고 하니 기대를 해봐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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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반이민 반기후를 간판 정책으로 내세우는 극우정당의 부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가 기존의 세계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극우세력은 국가, 종교, 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모여들지만, 그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로 가동되는 자본주의경제라는 지지대가 필요하다. 유럽의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중동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 패권전쟁의 배후에는 자본주의경제와 극우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밀월관계가 숨겨져 있다. 같은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가 시도한 퇴행적인 기후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도 화석연료에 기반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의 연관성을 물을 수 있다. 원전과 댐 건설이 최선의 기후위기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반이민 반기후를 표방하는 서구 극우세력을 관통하는 역사적 흐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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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2년 전 <녹색평론>의 출간을 재개하면서, 우리는 무엇보다 사람들한테 필요한잡지를 만들고 싶었다.

책의 끝 문장: 그것은 지극히 어렵지만, 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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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근거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의 대체물로 인류를 선택했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주변부에 속한 인간이고, 내가 속한 집단뿐만 아니라 집단을 둘러싼 거대한 공간까지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신을 완전히 내버리지도, 인류를 대체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내 생각에 존재를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은 존재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생물학적 개념이라서, 인간이라는 동물종 이상이 될 수 없고, 다른 동물종과 마찬가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자유평동의 의식(儀式)과 더불어 인류에 대한 숭배는, 동물이 신처럼 숭배되고 신이 동물의 머리를 지녔던 고대 숭배 신앙의 재현 같았다.


(14)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 여인숙에 머물며 기다려야만 하니 감옥으로 여길 수도 있겠고,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사교장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 없는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숙을 감옥으로 여기는 건 잠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안에 누워 있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교장으로 여기는 건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편안하게 들려오는 저쪽 거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에게 넘긴다. 나는 문가에 앉아 바깥 풍경의 색채와 소리로 눈과 귀를 적시며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만든 유랑의 노래를 천천히 부른다.


(28-29)

완성을 미루고만 있는 우리의 작품이 형편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예 시작하지도 않은 작품은 그보다 더 형편없다. 무엇인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남아는 있게 된다. 초라하지만 그래도 존재한다. 다리를 저는 내 이웃의 정원에 놓인 하나뿐인 화가에 핀 조그마한 식물처럼. 그 화분은 내 이웃에게 기쁨을 주며, 때로는 나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내가 쓰는 글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의 글 덕분에 상처받은 슬픈 영혼이 잠시 시름을 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으로 충분하고, 혹시 충분하지 않다 해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인생사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35)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언젠가 미래 끝자락에서 누군가 나에 대해 시 한 편을 쓸 테고, 그때 비로소 나는 나의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다.

신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39)

문학이란 예술과 사상의 결합이며 현실의 흠을 덜어낸 결과로, 인간적인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루어야 하는 목표다. 그것이 동물적인 본성의 여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비롯된 노력인 한에서 그러하다. 어떤 사물을 표현하는 것은 추한 부분은 빼버리고 미덕만을 보존하는 일이다. 들판의 푸름에 대한 묘사에서 들판은 실제보다 더욱 푸르다. 상상 속에서 묘사한 꽃의 색깔은 세포의 실제 생명력 이상의 영속성을 갖게 된다.


(40)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뒤에 오는 이들에게 우리라는 존재의 모든 것은, 우리가 강렬하게 상상할 것들, 즉 상상을 구체화하여 현실로 이루어낼 것들이다. 역사는 빛바랜 파노라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해석들의 흐름과 믿을 수 없는 증인들의 혼란스러운 합의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소설가이고 우리가 본 것을 말하는데, 보는 것은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복잡한 일이다.


(44)

모두가 잠들어 적막한 집, 벽 뒤편에 걸린 괘종시계가 새벽 네시를 알리는 명징한 종소리가 들린다. 난 아직 잠들지 못했고 잠들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걱정거리가 있어서도 아니고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내 것인데도 낯선 육체는 죽은 듯한 침묵에 싸인 채 가로등의 희미한 달빛 때문에 낯선 육체는 죽은 듯한 침묵에 싸인 채 가로등의 희미한 달빛 때문에 더욱 쓸쓸한 그늘 속에 누워 있다. 너무 잠이 몰려와 생각을 할 수 없고,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느낄 수도 없다.


(56-57)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죽음의 불가사의함이야 어차피 내가 꿰뚫어볼 수 없으니 그만두고, 삶이 멈출 때 육신의 감각이 궁금하다.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어렴풋이 두려워할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전투를 잘 이어간다. 그러다 늙거나 병들면 자신이 심연이라고 인정한 무()의 심연을 두려워하며 거의 쳐다보지 않는다. 이 모두가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특히 죽음이 일종의 잠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재고의 가치가 없다. 죽음은 잠은 닮은 점이라곤 전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할까? 잠의 핵심은 깨어나는 데 있으나 알다시피 죽음은 그렇지 않다. 만일 죽음이 잠과 비슷하다면 죽음에서 깨어난다는 개념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죽음을 깨어나지 않는 잠이라고 생각하는 이건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다. 강조하거니와 죽음은 잠과 닮은 점이 없다. 왜냐하면 잠잘 때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가 아는 무엇과도 닮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도 죽음이나 죽음과 비교할 만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63-64)

책을 읽고 꿈을 꾸고 글쓰기를 생각하면서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교양 있는 삶을 산다면. 삶이 어찌나 조용히 흐르는지 권태에 빠질 것 같지만 너무 생각이 많아 권태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산다면. 감정과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이런 삶을 살되 감정에 대한 생각과 생각에 대한 감정. 그 속에서만 산다면. 꽃들에 둘러싸인 탁한 호수처럼 태양 아래 금빛으로 고여 있다면. 인생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고결한 영혼을 그림자 안에 지닌다면. 꽃잎에 앉은 먼저처럼 오후의 바람을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저물녘의 무기력을 따라 내려앉아 더 큰 것들 사이에 묻힌다면. 즐거움도 슬픔도 없이 명료한 이해만 갖고 빛나는 태양과 머나먼 별들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된다면. 그 이상 원하지도 그 이상 갖지도 그 이상 되지도 않는다면…… 굶주린 자의 음악, 맹인의 노래, 이름 없는 길손의 유골, 짐도 목적지도 없이 사막을 떠도는 낙타 행렬……


(66)

고독은 나를 황폐하게 만들고, 동행은 나를 억압한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생각이 방향을 잃는다. 모든 분석력을 동원해도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방심 상태에서 곁에 있는 존재에 대해 꿈꾸기 때문이다.


(78)

독서로 자유를 얻는다. 독서로 객관성을 획득한다. 나는 내가 되기를 멈추고,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그만둔다. 내가 읽는 것은 때로 나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명료함이고, 만물을 비추는 태양이고, 고요한 대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고,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간이고 녹색 이파리를 흔드는 나무의 견고함이고, 농장 연못에 깃든 평화이고, 포도나무 덩굴이 우거진 해안이 비탈길이다.


(81-82)

환경은 사물의 영혼이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이 표현은 외부 조건으로부터 주어진다.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교차하며 한 사물을 이루는데 이는 물질의 양,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 사물이 놓인 환경이다. 이를테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책상은 나무로 만들었으며, 이름은 책상이고, 이 방에 속한 가구 중 하나다. 이 책상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긴다면, 글은 이것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책상이라고 불리며, 일정한 용도와 목적이 있다는 개념들로 구성될 것이다. 또한 책상 위에 놓인 사람의 배열 상태에 따라 영혼을 드러내는 물건들을 수용하고 반영하며 그 물건들에 의해 변형된다는 개념이 포함될 것이다. 책상의 색깔과, 색의 낡은 정도, 얼룩이나 흠 등은 외부 조건에 의해 생긴 것으로 사실 나무라는 본질보다 이런 것들이 책상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책상으로서 존재하는 영혼의 내밀한 본질은 역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고, 바로 그것의 개성을 이룬다.


(92)

지금은 비록 불완전한 내 글을 보며 나는 눈물을 흘리지만, 먼 훗날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내가 이룰 수도 있었을 완벽함이 아니라 이 눈물에 더 감동받을 것이다. 완벽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울지 않았겠지만 더 이상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완벽은 결코 구현되지 않는다. 성인(聖人)들도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인간이다. 신은 침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은 사랑할 수 있지만 신은 사랑할 수 없다.


(100)

내가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마음 깊이 절실히 느끼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낌을 가지고 생각하는 반면 나는 생각을 가지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느끼는 것이 사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느끼는 것은 생각을 키우는 양식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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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한 구가 더 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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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작년에 알게 된 시리즈 중에 캐드펠 수사 시리즈란 것이 있어. 중세 시대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이었지. 작년에 1권을 읽고 계속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2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를 읽었단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오래 전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가 작년에 새롭게 디자인되어 개정판이 출간되었어. 천천히 가끔씩 읽어봐야겠구나.

주인공은 시리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캐드펠이라는 수사란다. 작년에 1권에서 주인공의 소개를 했으니 오늘은 생략할게.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나이 든 수사 캐드펠이 잉글랜드의 베네딕토회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농사일 등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빠는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이 실존 인물이더구나. 그리고 당시 잉글랜드 역사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어.

2권에서는 특히 당시 잉글랜드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2권은 1138년 잉글랜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당시 잉글랜드는 왕권을 두고 내전을 벌이고 있던 시기라고 했어. 헨리 왕(헨리 1)은 자신이 죽기 전에 후계자로 자신의 딸이었던 모드 황후를 후계자로 지명했단다.

모드 황후가 왜 황후라고 불렀냐면,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 황제의 아내였거든그런데 하인리히 5세가 죽어서 자신의 딸을 잉글랜드로 소환한 거야. 왜냐하면 헨리 왕도 후계자였던 아들이 죽어서 뒤를 이을 사람이 모드 황후밖에 없었거든그런데, 헨리 왕이 죽고 나서, 모드 황후의 사촌이 스티븐이 무력으로 왕을 차지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스티븐 왕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드 황후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전쟁이 벌어진 거야.

 

1.

캐드펠 수사가 머물고 있는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은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어. 그래서 수도원이 있는 슈루즈베리 성 사람들은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 웨일즈로 가기도 했어. 당시 슈루즈베리는 모드 왕후를 따르는 이들이 다스리고 있었어. 피챌런, 애더니, 아놀프 등이 그들이었단다. 그런데 스티븐 왕의 부대는 슈루즈베리 성을 공격해서 점령했단다. 피챌런, 애더니는 도망을 갔고, 아눌프는 체포당했어.

캐드펠 수사는 슈루즈베리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수도원장이 그의 보조로 17살 소년 고드릭을 보내주었단다. 캐드펠이 유심히 살펴보니 고드릭은 소년이 아닌 소녀였단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소년으로 위장하여 수도원에 와 있는 것이었어. 그런데 누구라도 유심히 살펴 보면 소녀라는 정체를 알 수 있겠다 싶었어. 캐드펠은 이유는 묻지 않고, 다른 사람들한테 들키지 않게 소년으로 잘 위장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단다. 그러자 소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자신은 애더니의 딸, 고디스 애더니라고 했어. 아빠가 방금 전 이야기했던 모드 황후 측 사람이었다가 피신한 애더니의 딸이었던 거야. 아버지는 성을 빠져 나가고, 자신은 잠시 몸을 숨기기 위해 수도원으로 피신한 것이라고 했어.

휴 베링어라는 사람이 있단다. 어린 시절 집안 어르신들에 의해 고디스 애더니와 약혼한 사이였단다. 휴 베링어는 원래 모드 황후 진영 사람이었는데, 배신하고 스티븐 왕 진영으로 붙어 버렸어.

스티븐 왕의 부대가 슈루즈베리를 점령한 다음, 모드 황후의 군인들을 교수형으로 죽였어. 얼라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스티븐 왕을 후원하는 사람의 딸인데, 오빠 자일스는 모드 황후 편에 들어 전쟁에 참여했었어. 얼라인은 교수형 당한 시신을 확인하다가 오빠의 시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단다. 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비극을 낳는구나. 교수형을 당한 군인들의 시신 수습과 장례식 준비를 수도원에서 맡았는데, 그 일을 캐드펠 수사가 하게 되었단다.

모두 94명을 교수형에 처했다고 했는데, 캐드펠 수사가 시신을 헤아려보니 95개였단다. 다른 수사 같으면 숫자를 잘못 알려주었나, 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캐드펠은 이런 걸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단다. 그는 교수형에 의해 죽지 않은 하나의 시신을 찾았단다. 젊은 사람의 시신이었는데, 낚싯줄 같은 것에 의해 죽음을 당했단다. 그래서 이번 캐드펠 시리즈의 제목이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로구나. 캐드펠은 이 시신의 정체의 밝히기 위해서 여기저기 알렸는데, 이 시신을 아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았단다.

캐드펠은 의문의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게 되자, 수도원으로 데리고 와서 신도들에게 보여주었단다. 신도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이야. 그런데 고디스가 캐드펠을 조용히 찾아와서 말하길,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 시신의 주인공은 니컬리스 페인트리라는 사람이고, 모드 왕후 측 인사인 피챌런의 향사로 일했던 사람이야. 피챌런은 앞서 이야기했든 고디스의 아버지 애더니와 함께 스티븐 왕으로부터 피신한 사람이란다. 니컬리스 페인트리는 토럴드 브런드와 함께 피챌런의 보화들을 숨기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변을 당하게 된 것이었어. 이제 캐드펠은 니컬리스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했단다.

 

2.

며칠 뒤 고디스는 부상당한 젊은 남자를 발견하고 캐드펠 수사에게 이야기했어. 캐드펠을 오두막으로 옮기고 치료를 해주었단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버로 토럴드 브런드였단다. 니컬리스의 파트너말야. 니킬리스와 함께 보화 옮기는 일을 하다가 니컬리스는 죽고 자신을 부상당했다고 했어. 토럴드는 자신을 구해준 고디스가 애더니의 딸이란 것을 알게 되자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어. 토럴드는 부상당하는 와중에도 피챌런의 보화를 강물 속에 잘 숨겨두었다고 했고, 자신의 몸이 다 나으면 그 보화들을 모드 황후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했다. 고디스가 토럴드를 보살펴 주면서 그들 사이는 핑크빛으로 물들었단다.

휴 베링어는 계속 캐드펠 수사를 찾아오는데, 뭔가 감시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찾으려는 것 같기도 했어. 아무래도 사라진 고디스를 찾는 것이 아닐까 싶구나. 그러면서 이상한 부탁을 하나 했어. 전쟁에 징발되기에 아까운 말 두 마리가 있는데, 그걸 숨겨달라는 부탁을 했어. 그래서 캐드펠은 그 말 두 마리를 수도원이 관리하는 외진 농장에 숨겨주었단다.

스티븐 왕의 군인들은 고디스를 찾으러 다녔어. 수도원에 들어와서 수색을 하기도 했어. 이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고디스는 토럴드의 보화들을 배에 싣고 도망을 갔단다. 무작정 도망을 가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 얼마 전에 수도원에서 열린 장례식 때 봤던 얼라인의 집이 강가에 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의 집으로 갔는데, 다행히 얼라인은 고디스를 잘 숨겨주었단다. 스티븐 왕 진영에 쿠셀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는 얼라인에 푹 빠져 있어서 얼라인의 집에 와서 수작을 부리면서도 얼라인의 집은 수색을 제대로 하지 않았단다. 자신이 꼬시려는 여자의 집을 수색하는 것은 오히려 점수를 깎이는 일이니까 말이야. 얼라인은 미사를 하려고 수도원에 갔다가 캐드펠에게 고디스의 소식을 전해주었고, 캐드펠은 토럴드에게 이야기해서 고디스와 함께 탈출하라고 지시했단다.

캐드펠은 휴 베링어의 행동을 의심스럽게 보았어. 휴 베링어는 고디스가 수도원에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고, 고디스가 보화의 위치도 알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어. 그런데 이상한 것은 휴 베링어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혼자 조사하러 다닌다는 거야. 마치 뭔가 큰 것 한방을 노리는 사람 같았어. 캐드펠은 그런 휴 베링어의 의도를 파악했어. 휴 베링어는 보화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야. 휴 베링어는 당국에 신고를 하면 보화가 당국에 넘어가게 되니, 혼자 조사해서 보화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이란다.

이걸 노리고 캐드펠은 가짜 보화로 휴 베링어를 유인했어. 진짜 보화는 고디스와 토럴드가 함께 빼돌렸고, 휴 베링어는 기쁜 마음에 보화를 차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돌멩이였단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알면서도 캐드펠의 추리력에 감탄을 하게 되었어. 그러면서 이 때부터는 니컬리스의 살인자를 찾는데 도와주겠다고 했어. 돈 욕심이 있어서 그렇지 본심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나 보구나.

고디스를 도망가는데 도움을 준 얼라인의 오빠 자일스가 교수형 당하기 하루 전에 스티븐 왕의 장교를 만났어. , 자일스는 모드 황후의 군대에 있었는데 왜 만났을까. 그는 전세가 기울어진 것을 알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배신을 했던 거야. 자신이 보화의 위치와 어떻게 운반하는 그 장교에게 알려주었어. 하지만 그는 결국 목숨을 구하지 못하고 교수형으로 죽고 말았단다. 배신의 말로가 비참하구나. 그런데 그 스티븐 왕의 장교가 누구인지 아니? 바로 얼라인에게 대시를 했던 쿠셀 장교였어.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어떤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이 베링어와 캐드펠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어.

자일스의 단검에서 떨어진 장식이 니컬라스의 살해현장에서 발견되었어. 진실을 알게 된 베링어는 쿠셀의 살인 행위를 스티븐 왕에게 이야기를 하고, 결투로 그의 유죄를 증명하겠다고 했단다. 중세 시대에는 기독교의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상대방의 유죄라면 그 사람과 결투를 해서 질 수 없다고 믿었어. 하느님이 범죄자를 칼을 통해서 단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휴 베링어와 쿠셀 장교는 결투를 하게 되었고, 결투는 공방이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휴 베링어가 이기고 쿠셀은 죽고 말았단다. 이 결투를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얼라인이었단다. 베링어와 얼라인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결투 이후 베링어와 얼라인은 정식 커플이 되었단다. 캐드펠이 추리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짝 맺어주는 큐피드 역할도 잘 하는 것 같구나. 앞서 고디스와 토럴드의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더니, 얼라인과 베링어의 사랑에도 큰 역할을 했단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2 <시체 한 구가 더 있다>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단다. 아빠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메모를 해두었음에도 몇 군데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잘못된 내용도 있을지 몰라. 아빠가 학창 시절에 책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추리 소설은 읽었던 기억이 있단다. 너희들에게 공부하다가 쉴 때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추천해주고 싶은데, 다른 것을 하면서 쉬고 싶겠지?^^ 그럼 이 책도 나중에 읽는 것으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앞으로도 가끔씩 읽고 이야기해줄게. 그럼, 오늘을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소년이 처음 왔을 때 캐드펠 수사는 연못 옆 작은 텃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정의와 응보가 미칠 수 있는 그 어디에나 은총의 빛 역시 깃들 수 있는 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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