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신데렐라의 호박마차처럼...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츠바이크의 문장을 읽는 기쁨을 한껏 향유하고 있다!

밖으로 나오자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벽에 의지한 채 멍한 표정으로 자기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물이 쓰러지기 직전 비틀거리며 몇 걸음 옮기듯이 휘청거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불시에 무언가에 가격당한 듯 머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누가 가격했을까? 분명 누군가 무슨 짓을 했다. 그녀를 해치고자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녀는 쫓겨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애써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방에 단단한 벽이 있어 그 안에 갇힌 느낌이었다. 축축하고 캄캄한 관보다 더 갑갑한 유리관 속에파묻힌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왜 나를 쫓아버리려고 하는거야?" - P217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5-23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이 나왔군요~!! 표지부터 제목까지 완전 마음에 드네요~!!

은하수 2023-05-24 09:43   좋아요 1 | URL
책 내용도 흥미진진합니다^^
예전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됐었다는군요
다락방님 서재 가서 봤답니다
아무튼 저는 아껴가며 읽고 있습니다!
 
[전자책]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보장!



   우리에게 <작은 아씨들>로 익히 알려진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초월주의의 야생귀리>를 읽었다. '병원스케치', '나의 콘트라밴드', '한 시간',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의 네 편의 단편으로 엮인 작품집이다.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주 재밌게 읽었다.  '초월주의'가 대체 뭐지? '야생 귀리'는 알겠는데.... 라는 궁금증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흠흠, 일단 궁금증은 해소가 되었다.  '초월주의'는 한마디로 '이상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원시 공산주의의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착취'를 통하여 얻어지는 목화, 비단, 누에, 가축, 가축의 분뇨료 만들어지는 거름 등의 도움없이 농사를 짓고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극단적으로 윤리적인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식물에서 얻어지는 전혀 보온성, 실용성이라곤 없는 옷을 지어입고 극단적 채식의 식단을 유지하면서 극단적 윤리적인 삶이라니... 한마디로 전혀 가능하지 않은 웃기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런 삶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도 백인 남자들이... 작가는 전혀 실현 가능하지 않는 삶의 방식, 무능하고 게으른 백인 남자 모두를  비판한 것이겠지만.



   작가의 아버지가 이러한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1843년 가족을 데리고 자신의 이상 실현을 위하여 몇몇 친구들과 뉴 잉글랜드의 척박한 산골짜기 마을로 향한다. 있는 것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집?과 창고, 농토 뿐이었는데 대체 무얼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있는 것은 원대한 이상 뿐.  농사라곤 지어본 적도 없는 남자들은 하나의 밭에 여러 가지 다른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곡식을 거둘 시기에 강연을 다니고 무엇을 할 줄 모르고 도구라곤 변변하지 않으니 강연이 없을 땐 그저 빈둥빈둥... '무엇도 착취하진 않는 삶'을 꿈꾼다면서 여성과 어린 아이들을 착취하는 건 착취가 아니란 말인가! 어린 자식들을 비롯한 가족의 생계는 온전히 올컷의 어머니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결국 공동체의 삶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몇몇 친구들이 다른 공동체로 떠나갔고 가족들의 생계는 온갖 삯 바느질과 남의 집 일을 봐주고 식모살이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여자들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한심한 백인 남자들이여! 




   아주 읽다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다.

   이것은 '초월주의의 야생귀리' 라는 단편의 내용이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족들의 삶, 어머니의 삶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자전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그런데도 사랑한다고?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극인거다...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으니까)과 연민, 원망 사이에서 고뇌하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을 것이다(어느 사회나 장녀는 고달프구나).  돈이라는 것을 버는 행위 자체를 경멸했으면서(얼씨구... 그럼 쓰지 말고 빚이라도 만들지 말든가) 끊임없이 빚을 만들어내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작품이 신문에 발표가 되거나 연재되는 형식이었으므로 독자의 순간적인 흥미를 끌지 못하면 발표를 할 수가 없었으니 작품성을 논하기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신문을 읽는 대다수의 백인 중산층의 의식 수준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리 작가가 철저한 노예 해방론자이고 사회 참여적인 페미니즘의 옹호자였다 할지라도 '글을 쓰는' 백인의 시각을 가진 여성이라는 시혜자적 입장을 포기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책의 단편 중 '한 시간'에 등장하는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이나 주인공이 종군 간호사로 나오는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콘트라 밴드의 뜻 : 간호사가 개인적으로 부릴 수 있는,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 흑인 환자를 말한다)'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에서 그런 입장을 찾아 볼 수 있다.  종군 간호사로 짧은 복무 경험이 있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이면서도 간호사의 개인 콘트라밴드와 동등하지 않고 여전히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노예와 같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50명의 흑인 노예를 거느린 백인 농장주인 개브리얼은 노예제 폐지론을 환영하는 청년이며,  북부에서 머물다 아버지의 병으로 농장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흑인 노예들이 폭력과 억압으로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마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대천사 가브리엘인 것처럼)인양  무장한 노예들 앞에 맨 몸으로 나타나 노예 해방을 선언한다. 아주 대 영웅이 등장 하신거다. 그러자 무장한 폭도들이었던 흑인 노예들이 그 말을 믿으며(심지어 흑인 노예들의 어르신을 통하여 밑 작업까지 미리 해놓았다. 젊은 주인 어르신은 주인님과는 다르다고) 어떠한 긴장감도 없이 수긍하며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이렇게 순식간에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어이없을 무...!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의 백인', 북군에 팽배해있었던 '노예제 폐지와 남북 전쟁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 라는 시각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시각이라기 보다는 미국 북부의 노예 해방론자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작품에 구현한 대변자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작품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스토리들이 실감나면서도 흥미진진한 서사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최대 강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죽박죽 엉망진창인 미국 워싱턴의 비능률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병원 운영을 유쾌한 시선으로 비웃기도 하고 여전히 흑인들은 자신들이 교화하고 해방시켜주어야만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들도 백인과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그들을 따뜻한 시선과 인간의 밝은 점을 부각시켜 서술한 점이 이 소설을 읽으며 발견한 작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역시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잘 읽히는 법이니까...  여러가지 눈에 거슬리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ㅡ 무엇보다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63년, 링컨 대통령이 그 해 1월 1일 노예 해방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노예 해방을 이룬 해이다. 무려 16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 동안 세상은 아마 백만 번도 더 변화했을 것이다 ㅡ 분명 또 배울 점이 남는다는 것은 나름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병원 스케치'와 '나의 콘트라밴드'는 사실 아주 재미 있었다. 왜 책 제목이 <초월주의의 야생귀리>인건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아참참...... 도망친 남부의 노예를 북부로 도망시켜주는 비밀조직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foad)"의 활약을 다룬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읽었을 때 그 지하철도의 역으로 집을 제공해준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는데,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도 잠시이긴 하지만 지하철도의 역으로 제공(1847년, 작가 연보 참조함)한 적이 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노예제 폐지를 찬성한 작가에게 감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되다!


‘됐어.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자, 이제 한번 볼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어두웠던 방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꽃무늬 벽지, 반들반들한 가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아한 세상이 돌아왔다. 그러나 신경이 한껏 예민해진 여자는 얼른 거울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비스듬히 거울을 보니 발코니 뒤편의 풍경과 방 일부가 보였다. 그러나 차마 자신의 모습을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빌린 옷을 입고 좋아하다니, 꼴불견 아닌가? 남들뿐아니라 나 자신도 속이는 셈이잖아?‘
엄격한 재판관을 현혹해서 관대한 판결을 얻어내려는죄인처럼 여자는 천천히 거울을 향해 다가갔다. 여전히눈을 내리깔고, 두려운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또다시 아래층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야 해!‘  - P92

여자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처럼 심호흡을하고 용기를 내면서 결심한 듯 눈을 떴다. 거울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 넘어질 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게 누구야? 이 날씬하고 우아한 여자는 누구지?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네. 이게 내모습이라고? 말도 안 돼!‘ - P92

여자는 말을 잃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말이 나오며 저절로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울에 비친 여자의 입술도 움직였다.
여자는 놀라 호흡을 가다듬었다. 꿈에서조차 이토록 젊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자신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선이 분명한 붉은 입술, 섬세한 눈썹, 물결치는 금발 아래로 훤하게 드러난 목이 돋보였다. 하늘하늘한 드레스에 감춰진 맨살이 새롭게 느껴졌다. 여자는 거울에 비친 여자가 정말 자신인지 확인하려고 거울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다가서거나 갑자기 움직이면 그 황홀한 모습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저절로 미간이 떨렸다.
‘이건 현실이 아냐.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는없어.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 P93

 그녀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생각을 멈추었다.
그 순간, 거울 속 여자가 크리스티네를 향해 웃었다. 처음에는 살며시, 그다음엔 활짝 눈을 끄게 뜨고 자랑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나는 참 예쁜 여자야.‘
자기 몸에 감탄하는 것은 어색하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몸에 꼭 맞는 실크 드레스 밑에서 움직이는 가슴, 날씬하면서 여성스러운 곡선을 드러내는 몸매,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어깨……. 여자는 새롭게 변신한 몸의 움직임을 보고 싶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천천히 옆으로 돌아보았다. - P93

그리고 다시 한번 자랑스러움과 기쁨에 들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조금더 대담하게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다시 한번 우아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빙 돌리며 빠르게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울 속여자가 또 한 번 미소 지었다.
‘아! 정말 날씬하고, 우아해 보인다!‘ - P94

‘좋아, 아주 좋아.‘
거울 속 여자가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여자는 황급히 복도를 뛰어가 이모의 방으로 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니 시원한 실크 드레스의 촉감이 더욱 산뜻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실려 떠가는 느낌이었다. 이처럼 가볍게 날아갈 듯 움직여본 것은 어린 시절뿐이었다.
드디어 여자는 변신에 도취하기 시작했다. - P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단연코 가장 가슴 아픈 장면들이었다. 활발하고 생기 가득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갑자기 이렇게 돌변하는 내용이어서 더 그랬던거 같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펑펑 울 뻔했다.
‘존‘이라는 인물이 꼭 실제인 것처럼...!
그런데 작가의 후기를 읽고 정말 사실인걸 알았다.
하... 어찌나 맘이 아프던지...
버지니아에서 워싱턴까지 노예해방을 위한 전쟁에 참전을 했고, 가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홀로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 이 젊은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


"존이 위독해요. 가능하면 부인을 만나고싶다고 하네요."
"이 환자가 잠들면 곧바로 갈게요. 그에게그렇게 말해줘요. 그리고 혹 내가 더 지체하면 안 되는 상황이 오면 알려주고요."
전령이 떠난 뒤 가엾은 쇼를 진정시키며 존을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이틀 늦게 도착했다. 

어느 날 저녁 ‘슬픔의방‘에 들어간 나는 최근에 비워진 침대에 새로 배치된, 체구가 크고 흰 피부에 잘생긴 얼굴, 지금껏 본 적 없는 고요한 눈동자를 지닌 군인을 발견했다. 부상이 더 심한 전우들이 먼저 병원에 도착할 수 있도록 뒤에 남은 한 군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도착한 다른 군인에게 여러 번 들었던 터였다. 그 둘은 다윗과 요나단* 같은 사이인 듯했다. 지치지도않고 존을 칭찬하며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 (123/464)

던 그 군인은 존의 용기와 침착함, 자제심,
한결같은 마음씨 등을 늘어놓은 뒤 언제나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존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직접 보면 아시겠지만요." (124/464)

나는 호기심이 일었고 그 훌륭한 인물을직접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가 도착한 후 서로 가까워지기까지 나는 하루이틀 밤 그를 지켜보았다. 사실 나는 큰 키에 맞춰 침대 길이를 늘려야 했던 이 건장하고 기품 있는 군인이 약간 무서웠다. 그는 좀처럼 말하는 법이 없었으며 불평하는 일도 없었고 동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할 뿐이었다. (124/464)

베개를 세워 머리를 높이고 누워 있을 때면 버지니아 출신의 이 대장장이는 죽어가는 그 어떤 정치인이나 전사의 초상화보다 더 완벽한 위엄을 드러냈다.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싸여 있는 얼굴도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아직 고통에 무릎을 꿇지 않은 생명력이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사려 깊은 표정으로 주위 군인들의 고통을 지켜볼 때면 그는 자신의 고통은 완전히잊은 듯 아름다운 연민의 표정을 얼굴에 떠올리기도 했다. 주름 속에 강인한 의지와 용기를 드러내는 그의 입매는 진지하고 엄격한 인상을 주었지만 미소를 지을 때면 여자못지않게 사랑스러웠다.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았고, 상대의 얼굴을 정면으로응시하는 그의 맑고 거짓 없는 시선은 그를신뢰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결코없으리라는 사실을 보장하고 있었다. 삶이의무와 환희로 가득하다는 듯, 마치 충만함 (125/464)

의 비밀을 이미 깨우친 사람처럼 그는 삶을꼭 부여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그가 딱 한 번 평온을 잃고 동요를 드러냈던 적이 있었다. 담당 의사가 존을 진찰하기 위해다른 의사를 데려왔던 날이었다. 존은 불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나이 지긋해 보이는 쪽을 향해 물었다.
"제가 회복될 수 있을까요, 선생님?" "그러기를 바랍니다." 존의 시선이 그의 침대를 떠나버린 의사들을 뒤따랐다. 의사들이 그 강렬한 눈빛을 보았더라면 더 분명한 대답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그의 얼굴위로 그늘이 스쳤다. 그러나 그 짧은 일식 日蝕 동안 피할 수 없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곧 평소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모든가능성을 열어둔 채 진정한 신심인 순종으로 신의 손에 문제를 맡겼다. (126/464)

다음날 밤 P 박사와 함께 회진을 돌던 나는 무심코 병실에 있는 환자 중 제일 고통 받는 이가 누구인지를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도 의사는 존을 힐끗 보았다.
"숨을 쉴 때마다 단도로 찔리는 거나 진배없어요. 포탄이 왼쪽 폐를 관통하면서 갈비뼈를 부러뜨렸고, 다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여기저기를 건드리고 지나갔으니까요. 저불쌍한 환자는 고통을 덜 수도 잊을 수도 없어요. 상처난 등을 대고 누워 있든지 아니면숨쉬기를 그만둬야 하니까요. 고통스럽고긴 싸움이 될 겁니다, 워낙 생명력이 대단해서 더 그렇겠지요. 하지만 절제와 인내로도목숨을 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럼 결국 죽는다는 말씀인가요?"
"가엾게도요. 손톱만큼도 희망이 없어요.
너무 늦기 전에 존에게 이 사실을 말해주는편이 좋을 겁니다." (127/464)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P 박사는 참 쉽게 말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은 잔인하도록 어려운 일이었으며 그가 예의바르게 덧붙인 것처럼 "수월한" 일이 결단코 아니었다. 나에게는 아직 그런 일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암울한 예언을 거스르고무엇인가 희망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그래서 내가 그 업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어지기를 남몰래 소망했다. 몇 분 뒤, 내가 새 붕대를 들고 다시 돌아왔을 때 존은 부축해주는 사람 없이 일어나 앉아 의사에게 등을 치료받고 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그의 등을본 적이 없었다. 나는 더 간단한 상처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던데다 간병인의 충직함을믿었기에, 힘과 경험이 필요한 존 같은 환자는 간병인에게 맡겨두는 편이 더 안전하고 (129/464)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강인한남성이 그 주변의 더 허약한 영혼 못지않게부드러운 여성의 간호를 갈망하며 여성이지닌 연민의 힘을 고대했을지도 모른다는사실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의사의 말을 들은 뒤 나는 그간의 무심함을 자책했다. 실제로 의무를 무시한 것은 아닐 테지만, 향수에시달리는 이 영혼을 위로하고 지금의 힘든시간을 조금 더 편하게 견디게 해줄 작은 배려나 친절 따위에 마음을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있던 존은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겉으로 고통을 드러내는 신호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마룻바닥 위로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 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있던 병동에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나는 그동안 숱한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30/464)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약해 보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없이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진 나는 마음을 열고 아기를 안아주듯 고개 숙인 그의 머리를 두 팔로 품으며 말을 했다. 
"존, 견딜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사람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 가득 고마움과 놀라움, 안도를 담아내는 것을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표정으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한결 좋네요! 누가 좀 이렇게 해주었으면 했어요!"
"그러면 왜 한 번도 부탁을 하지 않았어요?"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부인은 너무 바빠 보이고, 저는 혼자서도 어떻게든 버 (131/464)

틸 수 있으니까요."
"이제 위로에 목말라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존."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실천에 옮겼다. 이제 내가 그의 침대에 잠깐 들렀다가 가버리거나 아니면 고개만 끄덕하고 지나갈 때 종종 내 뒤를 따르던 그 상념 어린 시선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다른 환자들이 더 다급하게 나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그보다 더도움이 급해 보이는 환자들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른 많은 환자처럼 존도 나를 부족하나마 어머니나 아내 또는 누이의 대역으로 여긴다는 사실을깨달았다. 그는 나를 낯선 사람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는 무심하고 냉정한 친구였지만, 그러나겸손한 그는 내가 무심했던 진짜 이유를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132/46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3-05-2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 관심도서였는데 잘 보았습니다!

은하수 2023-05-21 21:18   좋아요 1 | URL
가슴아픈 스토리가 여럿이어서
읽는 동안 참 안타까웠어요.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단 재미는 보장할 수 있습니다^^

서곡 2023-05-21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군요~ ㅎㅎ 제가 루이자 메이 올컷 전기 ‘고집쟁이 작가 루이자‘를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 과정에 이 책도 알게 되었고요 루이자와 그 가족의 삶도 가슴 아픈 데가 있지요...답글 감사합니다

은하수 2023-05-22 00:11   좋아요 1 | URL
표제작이 작가 가족의 자전적 작품이라더군요. 착취가 없는 유토피아적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공동체라는데... 읽으면서 씁쓸했어요. 여자들의 고생과 고통이 어땠을지 상상이 안갈 정도여서 정말 짧은 단편인데도 여실히 느껴졌어요!
 
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너자매 중 언니인 앤 엘리자가 동생 에블리나에 대해 갖는 순간순간의 감정묘사도 뛰어나고 변해가는 심리가 너무 잘 드러나게 쓰인 소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업화와 물질 만능의 시대로 변해가는 뉴욕. 하층민 자매의 삶은 누구도 도울 수 없었던 것인지 읽는 내내 너무도 안타까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