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안에서 잠자게 내버려 둔다. 그보다 더하다! 죽어가게 썩어가게 방치해서 우리는 스무 살 적에 우리를 일으키는 영혼의 너그러운 움직임들을 나중에는 순진함, 어리석음이라 부른다.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사랑이 가장 천박한 쾌락의 퇴폐적인 외피를 두른다. 
그날 밤, 과거를 되찾은 것은 내 기억만이 아니었다. 내 가슴도 그랬다. 그 분노, 그 안달, 그 강렬한 행복의 욕구, 나는 그것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건 살아 있는 여자가 아니라 내 꿈들과 같은 직물로 지어진 유령이었다. 추억이었다.
전혀 손에 잡히지 않고, 전혀 뜨겁지 않은 심장이 말라버린 이 늙은 인간아, 너에게도 열기가 필요하느냐? - P128

내 입으로 말을 해다오. 너무나 이성적이고, 너무나 정숙한 엘렌에게 거짓말 말라고 말해다오. 그녀의 연인은 죽지 않았다고, 그녀가 나를 너무나 빨리 묻어버렸다고, 내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다오. 그녀의 말은 거짓이었다!  - P128

그녀 속에 갇힌 진짜 여자, 쾌락을 사랑하는 뜨겁고 쾌활하고 당돌한 여자를 알았던 것은 바로 나다. 오로지 나뿐이다!
프랑수아가 가진 건 무덤의 비문만큼이나 거짓된, 그 여자의 창백하고 차가운 이미지뿐, 나는, 나는 지금은 죽은 걸 가졌다. 나는 그녀의 젊음을 가졌다. - P129

그래, 바로 당신, 당신은 남편에게 이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이 한때의 미친 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고결한 여자지. 정말 그래? 한순간의 미친 짓?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산 건 그때뿐이었어.  - P129

그 이후로 당신은 사는 척만 했어. 사는 시늉만 했지. 단 한 번밖에 맛보지 못하는 삶의 진정한 맛, 당신도 알다시피 젊은 입술에서 나는 그 과일 맛, 당신은 내 덕에, 오로지 내 덕에 그 맛을 봤어. ‘가엾은 실비오, 쥐구멍 같은 곳에서 늙어가는 내 가엾은 실비오.‘ 

그런데 정말 날 잊었던 거야? 공정해야 하니까 말하는데, 나도 당신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 내가 나를 되찾기 위해서는 브리지트의 말, 어제 콜레트가 보여줬던 부질없는 절망과 부끄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과하게 마신 포도주가 필요했어. 하지만 당신이 거기 있는 한, 나는 당신을 그렇게 쉽게 놔주지 않을 거야. 확신해도 좋아. 

진실? 당신은 진실을 내게서 듣게 될 거야. 예전에 내가 처음으로 당신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경이로운 행복의 원천인지 깨닫게 해줬을 때 들었던 것처럼(당신은 원하지 않는 척했어. 소심하고 순수했으니까, 당시에는・・・・・…. 입맞춤, 좋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돼요………. 그래도 당신은 넘어갔어. 오, 당신은 얼마나 탐나는 여자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했는지………. ‘그건 미망에 빠진 한순간, 광기에 휘둘린 몇주였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소름이 돋아요.‘ 이렇게 말하긴 아주 쉽지. 

하지만 당신도 진실을 지우진 못할 거야.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는 진실을. 당신은 프랑수아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로, 나를 잃느니 차라리 모든 걸 받아들일 정도로 나를 사랑했어.  - P130

오, 조금 전에 콜레트가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에 그 목가적인 물랭뇌프로 외간 남자를 들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늙어가는 선량한 부인, 자식들을 도포는 착한 엄마로서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더군! 

그럼, 당신은 어땠지? 당신 딸이 누굴 닮았겠어? 브리지트 역시 우리 둘을 닮았어. 그 아이들은 생생하게 살아 있지만, 우린 이십 년 전에 죽었어. 우린 이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게 바로 진실이야. 

프랑수아를 사랑한다고, 당신 입으로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안 그래? 그래, 그는 당신의 친구, 당신의 남편이야. 함께 지내는데 익숙해졌지. 당신과 프랑수아는 오빠와 누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아닌 게 아니라, 룰루가 태어난 이후로 당신 둘은 오빠와 누이처럼 살았어.  - P131

하지만 당신은 결코 그를 사랑하지 않았어. 당신은 날 사랑했어.
자, 들어봐, 내 곁으로 와서 떠올려봐! 그 사이에 위선적으로 변한 거야? 아니야, 내가 늘 생각해왔듯이 당신은 다른 사람이야.

당신이 뭐라고 말했더라………? 그래, 스무살 시절에는 누가 갑자기 우리의 삶에 끼어들지, 날개가 달리고 눈부시게 찬란한 낯선 이가 길길이 뛰며 우리의 피에 불을 붙이고 우리의 삶을 망가뜨린 다음 훌쩍 가버리지. 그렇게 영영 사라져 버리지. 나는나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낯선 이를 되살리고 싶어.  - P131

내 말을 들어봐 날 봐 날 못 알아보겠어? 희고 추웠던 그 큰 복도, 당신의 늙은 남편 (프랑수아 말고 첫 번째 남편, 너무 오래전에 죽어서 지금은 아무도 이름을 입에 올리지않는 바로 그 남편), 침대에 누워 있던 그 남편을 떠올려봐. 그의 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지. 질투가 심하고 의심도 많았으니까. 당신과 내가 입을 맞췄을 때, 전등 불빛 탓에 천장에 비친 그 큰 그림자, 내가 가끔 꿈에서 다시 보는 그 그림자, 그게 바로 당신이라고, 그게 바라 나라고 우리는 생각해 왔어. 하지만 사실 그건 당신도 나도 아니었어. 그건 우리와 비슷해도 우리와는 다른,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낯선 사람의 얼굴이었어! - P131

내가 엘렌을 처음 본 날 그녀는 당시에, 그리고 고향 마을에서 머리카락이 검은 젊은 부인에게는 너무과감하다고 여겨지는 붉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당시의 그녀를 묘사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우리가 탐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렇듯 그녀를 너무 가까이에서 봤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당신이 깨무는 과일의 형태와 색깔을 알고 있는가? 내가 엘렌을 사랑했던 만큼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남자는 첫만남에 입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바라보게 되는 듯하다. 검은 눈, 금빛 피부, 붉은색 벨벳 드레스, 열렬하고 쾌활한 동시에 혼란스러운 기색, 도발, 불안, 충동이 묻어나는 젊은 여자 특유의 표정…………. 아직도 기억난다•••••••••. - P136

나는 오늘날의 청년들보다 훨씬 민첩하고 강하고 쾌활하고 모험을 즐겼다. 마르크 오네가 당시의 나를 약간 닮았다. 나도 그처럼 과한 도덕심에 질식하지 않았다. 나도 질투에 사로잡힌 남편을 물에 던져버릴수 있었을 것이다. 술을 마시고, 이웃의 여자를 유혹하고, 몸싸움을 벌이고, 더 심한 피로와 더 혹독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젊은 한때가 있었다.
- P137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지방 촌마을1의 거실, 살며시 열려 건반이 드러나는 커다란 피아노, 연어 살빛의 드레스를 입고 <어제보다는 낫고 내일보다는 못한 오늘>을 부르는 세실 쿠드레, 꾸벅꾸벅 졸면서 구운 거위와 토끼 시베를 힘겹게 소화하는 사람들, 너무나 가까워서 꿈속에서처럼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너무나 가까워서 섬세하고 신선한 피부의 향기가 느껴지는 붉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 너무나 가까운, 하지만 너무나 먼………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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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분위기 무엇?
살인이 드러나는 스릴러로 변했다!


"기억나세요. 아빠? 앙리와 룰루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조르주가 아기일 때였어요. 아빠, 엄마가 조르주는 하녀에게 맡겨두고 저만 데려가서 제가 얼마나 우쭐했는지 몰라요. 얼마나 기뻤는지! 오랫동안 기다렸거든요. 가끔은 한 달 넘게. 그날이 되면 소풍 바구니들을 준비했죠. 오, 맛있는 과자들…………. 지금은 어쩐 일인지 그때 그 맛이 안 나요. 반죽하느라 엄마의 아름다운 맨팔에 밀가루가 잔뜩 묻었죠, 팔꿈치까지요. 기억나세요? 가끔은 친구분들도 함께 갔지만, 대개 우리뿐이었어요. 점심을 먹고 나면 엄마는 날 풀 위에 눕혀 쉬게했고, 아빠는 엄마한테 책을 읽어줬어요. 그랬죠? 아빠는 엄마한테 랭보와 베를렌의 시를 읽어줬고, 전 정말이지 뛰어다니고 싶었어요. 그래도 전 거기 누워 아빠의 목소리에 반쯤 귀를 기울이며 내 놀이와 그렇게 흘러갈 긴 오후 나절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맛보았죠. 그・・・・.… 당시 내 기쁨 속에 있던 그 완벽함을."
콜레트가 말을 이어갈수록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고 깊어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잠시 입을 다물고있다가 말을 이었다.
- P82

"언젠가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기억나세요, 아빠? 우리는 차에서 내려 걸어야 했죠? 제가 피곤해서 징징거리자 아빠와 엄마는 수레에 풀을 잔뜩 싣고 지나가는 농부에게 저를 옆에 좀태워달라고 부탁했죠. 그 농부가 날 위해 가지와 풀잎을 엮어서 햇빛을 가려주는일종의 작은 지붕을 만들어줬던 게 기억나요. 아빠와엄마는 수레를 따라 걸어왔고, 농부는 말을 몰았어요.
그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두 분이도로 위에 멈춰 서서 입을 맞췄어요.……………. 기억나세요? 제가 가지 아래에서 갑자기 머리를 내밀고는 외쳤죠.
‘다 봤어요.‘ 
그러자 두 분은 웃기 시작했고요. 기억나세요? 우리가 가구가 거의 없어서 썰렁하고, 전기도 안들어오고, 식탁 한가운데 커다랗고 누런 구리 촛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다란 집에 들렀던 게 바로 그날 저녁이었어요…………. 오, 참 신기해요. 그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어쩌면 꿈이었을지도 모르고요." - P83

... ... 방 안의 후끈한 열기, 파이프 담배연기, 식탁 위의 타르트 향기, 과일로 가득한 그릇 주변을 맴도는 말벌들의 날갯짓, 농부들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술기운을이겨내는 법을 알지 못한 채 과음을 했을 때 빠져들게되는 비현실과 꿈의 느낌을 더욱 증폭시켰을 것이다.
소년은 계속 콜레트를 쳐다보았다.
"넌 물랭뇌프가 그립지 않니?" 프랑수아가 그에게무심코 물었다.
"아뇨, 여기가 나아요."
"저런, 배은망덕하기도 하지." 콜레트가 약간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맛있는 타르트 만들어줬던 것도 기억 안 나니?"
"오, 그건 기억나요."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오, 그건 기억나요." 소년이 반복해 말했다.
소년이 투박한 손으로 포크를 만지작거리다가 콜레트를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전 다 기억해요.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전 다기억해요."
우연하게도 갑자기 침묵이 찾아왔을 때 소년이 이말을 했고, 침묵 속에서 말이 너무 크게 울려 퍼졌기때문에 모두가 충격을 받은 듯 움찔했다. 콜레트는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었다. - P89

"다 기억하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
"무슨 뜻이냐 하면요. 여기 있는 누군가가 장 주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잊어먹었더라도, 전 기억하고있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잊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말하고는 콜레트에게 어서 일어나서 식탁에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뭔가 미심쩍기는 해도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프랑수아는 소년의 입을다물게 하는 대신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걱정스레캐물었다.
"네가 그날 밤 뭔가를 봤다는 뜻이니? 말해다오, 제발 이건 아주 심각한 일이야." - P90

"가지 말고 말해봐. 넌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알고있어, 확실해. 난 그 죽음에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 어린 시절부터 건너다닌 탓에발이 나무판자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는 다리를 건너면서 부주의로 물에 빠지지는 않아. 게다가 그날 장 도랭은 느베르에서 목돈을 받았어. 그런데 그의 지갑은발견되지 않았지. 경찰은 그가 강에 빠지면서 잃어버렸을 거라고, 지갑이 강물에 떠내려갔을 거라고 추정했어. 하지만 어쩌면 누군가 그를 죽이고 훔쳐 갔을지도 몰라. 그러니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봤다면 그걸 말하는 건 네 의무야. 안그러니, 콜레트?" 프랑수아가 딸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콜레트에게는 그렇다고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만 했다.
"불쌍한 것, 너한테는 정말 괴로운 일이겠지. 이 소년과 단둘이 얘기해 볼 테니 넌 나가 있으렴."
콜레트는 싫다는 손짓을 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있었다. 소년은 갑자기 술이 깬 듯 보였다. 그는 눈에띄게 몸을 떨며 프랑수아의 집요한 질문에 대답했다.
"예, 맞아요, 누가 그분을 물로 밀어 빠트리는 걸 분명히 봤어요. 그날 밤에 할머니한테 말씀드렸는데, 할머니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 P91

... ...참 이상한 밤이었어요.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나무들이 마구 요동쳤죠. 그러다 주인님이 보이지 않아서 자동차 옆에 계시나 보다 했어요. 방앗간으로 들어가려면 제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거든요. 전 주인님이 숨어 있거나 누굴 기다리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전 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러다 다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죠 두 사람이 다투고 있었어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전 달아날 시간도 없었어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밀어 물에 빠트리고는 도망갔어요. 전 주인님이 물에 빠지면서 외친 소리를 들었고요. 분명히 주인님 목소리였어요. 그분은 ‘오, 주님!‘이라고 소리쳤어요.
그런 다음에 풍덩 하고 물소리가 들렸죠. 그래서 저는집까지 부리나케 달려와 모두를 깨우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했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저에게 말했어요.
‘넌 입 꾹 다물고 있어. 넌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못 들었어, 알겠니?‘ 

그렇게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부인께서 혼비백산 달려와서는 남편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시신을 찾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셨어요. 그래서아버지가 방앗간으로 내려가셨고, 장 주인님에게 젖을물려 키우신 할머니는 ‘난 시트를 찾아봐야겠다. 내 손으로 그 아이의 시신을 덮어줄 줄이야, 가엾고 불쌍한아이‘라고 말씀하셨죠. 어머니는 저에게 어서 쿠드레로달려가서 주인님이 돌아가셨다고 알리라고 했어요! 이게 다예요.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예요."
- P91

소년은 잠시 망설인 후에 대답했다.
"예, 똑같이 말할 수 있어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장 도랭 씨를 물에 빠트린 남자, 얼굴은 자세히 못 봤니?"
아주 긴 침묵이 흘렀고, 모두의 시선이 소년에게 고정되었다. 오직 콜레트만 눈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앞으로 내민 두 손을 그러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못 봤어요." 마침내 소년이 말했다.
"알아볼 수 없었어? 단일 초도? 그날 달이 밝았잖니."
"저는 반쯤 잠에 취해 있었어요. 두 남자가 다투는걸 봤고, 그뿐이에요."
"장 도랭 씨가 도움을 청하지는 않았니?"
"그랬는지는 몰라도 전 못 들었어요."
"그 남자는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니?"
"저기, 숲 쪽으로요."
프랑수아는 손으로 천천히 자신의 눈을 쓸었다. - P94

그때서야 사람들은 콜레트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남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일들 하러 갑시다." 마륄레 집안의 가장이 말했다.
남자들은 잔을 비우고 밖으로 나갔다. 넓은 부엌에는 여자들만 남아 콜레트를 쳐다보지 않은 채 일을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프랑수아가 콜레트의 팔을 부축해 차에 타는 걸 도와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출발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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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이십 주기 추모 모임 단체 대화방에 나는 부영과 경애를 초청했다. 둘 다 들어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메시지를 올리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읽는 것 같지도 않더니 잠시 뒤 경애가 대화방을 나갔다는 알림이 떴다.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럴 줄 모르기도 했다. 나는 부영이 먼저 나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부영은 계속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게 대화방을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가는 최소한의 행위도 하지 않는 방치나 무시, 또는 자신이 초청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망각 같았다.
그렇게 부영은 끝까지 메시지를 읽지 않은 ‘1‘의 숫자로 남아 있었다. 올해에도 정원의 추모 모임에 간 사람은 나 혼자였다.(‘사슴벌레식 문답‘ 중에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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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ㅡ 주이와 프래니는 남매인데...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게 놀랍다. 이 작품의 백미는 주이와 프래니의 긴 대화가 이뤄지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적 신념과 이루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주이... 너무 멋지다!


눈 아래엔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고, 심각한 고민을안은 젊은 여자의 표지인 다른 미묘한 흔적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누가 보아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피부에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눈은 주이의 눈과 거의 같은 상당히 감탄스러운 빛깔의 푸른색이었지만 누이의 눈이 당연히 그러해야 하듯 두 눈 사이의 거리가 좀더 멀었고, 주이의 눈만큼이나 하루종일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눈은 아니었다. 사 년 전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녀가 졸업생 단상에서 버디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짓자 버디는 속으로 음울한 예언을 했다. 그녀가 언젠가 십중팔구 마른기침을 해대는 남자와 결혼을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녀의 얼굴에 그런 분위기도 있었던 것이다. - P161

"오빠가 하는 말 다알아. 그중에 내가 혼자 생각해보지 않은건 하나도 없어. 오빠 말은 내가 예수기도문에서 뭔가를 원한다는 거잖아. 그래서 나역시 오빠의 표현을 빌리면 사실은 소유욕이 많다는 거고. 흑담비 코트를 갖고 싶어하거나, 유명해지고 싶어하거나, 그놈의 명성 같은 걸 뚝뚝 흘리며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런 거 다 알아! 맙소사, 도대체 날 얼마나 멍청이로 생각한 거야?" 그녀의 목소리 속 떨림이 이젠 거의 말에 방해가 될 만큼 커졌다.
"알았으니까 진정해, 진정하라고."
"진정할 수가 없어! 오빠가 날 너무 화나게 하잖아! 오빠는 내가 이 정신 나간 거실에서, 미친듯이 몸무게가 줄고, 베시와 레스를 죽도록 만들고, 온 집을 뒤집어엎으면서 대체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P190

내가 기도문을 외우는 동기에 대해고민할 정도의 생각은 있다고 보지 않아? 나를 짜증나게 하는 게바로 그거란 말이야.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이번 경우는 돈이나 명성, 명예, 그런 것들 대신 깨우침 혹은 평화겠지, 내가 까다롭게 군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본위적이 아니란 뜻은 아니니까. 내가 더하면 더했지! 그러니까 저명하신 재커리 글래스께서 굳이 내게 그런 말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여기서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멎었고, 그녀는다시 블룸버그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눈물이, 아마도, 흘러내릴 듯했다. 이미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 P190

프래니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털들을 헤치느라 분주한 게, 그녀는 블룸버그의 털에서 벼룩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제 사실 울고 있었지만, 이를테면 부분적이었다.
눈물은 있었지만 소리는 없었다. 주이는 일 분 정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가, 딱히 상냥하지는 않지만 성가시게 느끼지 않도록 하면서 말했다. "프래니, 어떻게 할까? 버디 계속 연결해볼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는 계속 벼룩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후, 그녀가 주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잘 들리지 않게.
"뭐라고?" 주이가 물었다.
프래니가 되풀이해 말했다. 
"나 시모어와 얘기하고 싶어."
- P191

"이 집안 식구들은 죄다 각자의 빌어먹을 종교를 제각각 포장해서 가지고 있어." 그가 어떤 경외감도 담기지않은 어조로 말했다. "월트가 대단했지. 월트와 부 부한텐 끝내주는 종교 철학이 있었어." 그는 시가를 한 모음 빨았다. 재미있어하고 싶지 않을 때 재미있어하게 된 것을 상쇄하려는 듯이.
"월트가 언젠가 웨이커에게 이 집안 식구들은 모두 전생에 수많은 나쁜 업보를 지독하게 쌓은 게 분명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 월트의 이론으로는, 종교적인 삶이란, 그리고 그 삶에 따르기 마련인 온갖 고뇌란, 신에게 이 추한 세상을 창조했다고 비난하는 뻔뻔한 인간들에게 역겨워진 신이 게워낸 토사물이라는 거야."
- P195

"아직도 기도를 하고있는 거야, 응?" 그가 물었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젖히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거의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메이페어  억양으로 그가 말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요. 글래스 양, 잠시 시간이 있으신지요." 그 말에 대한 소파로부터의 응답은 확연히 불길한 침묵이었다. 
"원한다면 기도문을 외워, 블룸버그와 놀든지, 담배를피워도 좋고. 하지만 오분동안은 침묵을 지켜줘 친구, 그리고가능하면 절대 눈물 보이지 않기. 오케이? 알았니?"
- P197

"우린 거기 있었어. 거기 있었지. 내 말 들어봐, 친구, 넌 아주 훌륭했어. 내가 훌륭하다고 말할 땐 정말 훌륭한 거야. 빌어먹게 엉망진창인 공연이었는데 네가 잘 지탱해줬지. 바닷가재처럼 벌겋게 그을린 관객석의 인간들도 그건 알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 네가 연극과는 영원히 끝이라는 얘기가 들리네. 난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얘기가 들린다고. 그 시즌이 끝났을 때 네가 돌아와 장광설을 늘어놓던 걸 기억하고 있어. 아, 프래니, 너 정말 사람짜증나게 하지! 미안하지만 넌 그래 넌 연기라는 직업 세계에 용병들과 도살업자들이 득실득실하다는 빌어먹을 놀라운 발견을 했다고 했어. 내 기억에 너는 심지어 모든 좌석 안내원들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 - P248

도대체 뭐가 문제냐, 친구? 네 뇌는 어디에 있는 거냐? 괴물로 키워지는 별난 같은 교육을 받았다면, 적어도 그걸 사용해야지, 써먹어야지. 지금부터 최후의 심판일까지 계속 예수기도문을 외울 순 있겠지만, 종교적인 삶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거리두기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네가 평생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있을까? 거리 두기, 친구, 오직 거리 두기. 욕망에서 자유롭기. ‘모든 갈망을 멈추기‘ 그런데 네가 정말 염병할 진실을 알고 싶다면 말이다. 애초에 배우를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욕망한다는 것이다.
왜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내가 다시 얘기하게 만드는 거지? - P248

어느 시점에선가 빌어먹을 이 생애에서든 저 생애에서든, 뭐든-너는 배우 혹은 여배우가 되기를 갈망했을 뿐 아니라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어했어. 넌 이제 어쩔 수 없는 배우야. 네 갈망의 결과에서 그냥 걸어나올 수는 없는 거야. 원인과 결과, 친구,원인과 결과라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네가 할 수있는 유일한 종교적인 일은, 연기야. 원한다면, 신을 위해 연기하고, 원한다면 신의 배우가 되어봐.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게 또 있겠어? 원한다면, 적어도 노력은 해봐. 노력하는 건 괜찮잖아."
잠깐 짧은 침묵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친구. 네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지고 있거든.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이 빌어먹게 경이로운 세상에서재채기할 시간이라도 얻는다면 운이 좋은 거야." 다시 한번 더 짧은 침묵이 있었다. - P249

"나는 배우가 어디에서 연기를 하든 개의치 않아. 여름 공연일 수도 있고, 라디오일 수도 있고, 텔레비전일 수도 있고, 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있고, 가장 잘 먹고, 가장 보기 좋게 햇볕에 그을린 관객들이 있는 빌어먹을 브로드웨이 극장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네게 엄청난 비밀을 말하려 해. 듣고 있는 거니?
<거기엔 시모어가 말한 ‘뚱뚱한 여자‘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어.> 거기엔 너의 터퍼 교수도 포함되어 있어, 친구. 그리고 그와 같은 종류의 인간 수십 명도. 어딜 가도 시모어의 ‘뚱뚱한 여자‘가 아닌사람은 없다고 모르겠니? 그 빌어먹을 비밀을 아직 모르겠어? 모르겠니, 내 말을 들어봐, <그 ‘뚱뚱한 여자‘가 정말 누구인지 모르겠니?>………… 
아, 친구. 아, 친구, 그건 바로 그리스도야. 그리스도라고, 친구."

환희, 그것은 분명 환희였고, 프래니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전화를 잡고 있는 것, 그것도 두 손으로 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거의 삼십 초 남짓 다른 말이, 더 이상의 이야기가 없었다. 그때 들려왔다. "이제 그만 끊어야겠어, 친구." 전화기가 거치대에 다시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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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니와 주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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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읽어도 샐린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매사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한다.자신의 욕망과 종교적 수행이라는 두 상반된 명제를 가지고 방황하는 프래니와 오빠 주이가 나누는 대화는 지극히 아메리칸 스타일이지만 부러울 지경이다.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대화였지만 결말은 너무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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