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프롤로그
툰드라 지대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게 아름답고 편안한 매트리스일지 모른다.
늘 습기가 많아 약간 축축한 곳이라, 이처럼 맑고 쌀쌀한 아침에도 아래위로 비옷을 갖춰 입는 것이 좋다. 연분홍 주황빛 햇살이 알래스카산맥의 봉우리들 위로 이제 막 번지기 시작하면서 서쪽으로약 110킬로미터 길게 이어진 디날리 국립공원 Denali National Park의빙하로 덮인 하나의 거대한 장밋빛 돌기둥이 구름 한점 없는 하늘아래 무심하게 펼쳐져 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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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소설집 《완전한 영혼》 중 <영산홍 추억>
정찬의 소설은 권력과 인간의 관계를 관념적,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어서 읽었을 때 어렵게 느껴지고 일정한 스토리 라인을 잡기가 어려운 점이 특징인 것 같다.
그나마 수록된 단편 중 <완전한 영혼>과 <영산홍 추억>이 내용 이해가 쉽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두 단편이 재미를 느끼게 하는 요소가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신춘문예나 문학상에 준하는 수준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지극히 관념적, 형이상학적 소재‘들이란 것이니 재미를 말하긴 이미 힘들어진다.

<영산홍 추억>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떠올리게 한다. 빨치산, 미전향 장기수와 관련된 단편이기 때문이다. 물론 빨치산 활동에 대한 소설은 저 멀리 <태백산맥>도 있겠지만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어서 더 먼저 떠오른 측면이 있다.
재미를 말하긴 어렵겠지만, <영산홍 추억> 중에 이 말들만은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은 예감이 든다!

˝... 인간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있지만 역사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역사 앞에 무릎 꿇지않는 권력을 쟁취한 자들로 인하여 역사의 바퀴는 결코 정지하지 않을 것이란 것도!

그리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다 죽기 직전 집으로 돌아와 임종 순간에 남긴 말도...

˝... 나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최근 재발간 된 《완전한 영혼》엔 실리지 않은 마지막 단편 <황금빛 땅>은 권력과 말, 그리고 참된 샤먼, 주술, 동학 등의 말이 남겠지만 다시 읽는다해도 기억 속에 남길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소재여서...
참고로 <황금빛 땅>은 안견의 그림 ‘몽유도원도‘를 떠올리면 될거 같다. 복사꽃 피어 있는 무릉도원을 뜻하는 거니까. 그 복사꽃이 세상에 가득한 인간의 거짓된 말들로 인해 산산히 흩어져버리는 모습으로 소설이 끝난다.






<영산홍 추억> 중에서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좌익 사상범들은 몇 개의 감옥에서 풀려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살됨으로써 현재 1950년 이전부터 계속 구금된 좌익 사상범들은 한 사람도 없다. 지금의 좌익 사상범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혹은 정전 직후의 혼란한 시기의 사법 체계에 의해 재판을 받은 이들이다. - P162

이때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은 4·19 직후 대부분 20년으로 감형되었고, 따라서 1960년 중반쯤부터 시작된 만기출옥이 1970년에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불안을 느낀 유신 정권은 73년 전향 공작 전담반을 설치한 후 전향 강요 고문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이 파괴적 고문의 결과 비전향 사상범들은 세 가지 인간으로 분류되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전향한 이, 고문을 견디다 주검으로 화한 이, 그리고 끝내 고문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상을 지킨 이들이다. 죽은 이는 소내 의무 과장에 의해 사인이 조작되어 흙 속에 묻혔고, 사상을 지킨 이에게는 새로운 족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ㅡ영산홍 추억 중에서
- P162

"그것이 바로 사회안전법이라는 괴물이다. 간단히 말하면 전향을 하지 않으면 만기가 되어도 출소를 시키지 않는 법이다.

새파랗게 젊은 나에게 가없는 애정을 쏟았던 황선생이라는 분은 53년 이른바 빨치산 신분으로 체포되어 22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73년의 그 살인적 고문을 이겨낸 분이었다. 

황선생이 받은 고문은 정말 끔찍했다. 매타작에서부터 시작되어 물고문, 전기고문, 바늘로 온몸 찌르기, 관절뽑기, 비녀꼽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 태우기 등등 생명체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그분은 담담히 회상하고 있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물었다. 도대체 전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죄악이기에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느냐고." - P162

선배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비둘기떼들이 날개를 치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분은 말했다. 인간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있지만 역사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정신 속으로 섬광처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마지막 말. 어둠 속에서 홀로, 앙상한 뼈처럼 서 있는 말.
"그 동안 나는 역사라는 말을 수없이 해왔고, 또 들어왔지만, 그토록 무게가 실린 말과 마주치지는 못했다. 뭐라고 할까…………
존재의 전 무게로 육박해온다고 할까.….."
선배의 눈은 회상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 P163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궤적이다. 이데올로기는 이 궤적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관념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인간의 운동에 의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힘, 즉 권력으로 전화된다. 그러므로 역사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시키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권력화로의 운동 때문이다. 역사가 수레라면 권력은 바퀴이며 인간은 이 바퀴를 굴리고 있다. 역사에 철저히 복무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권력화시키는 운동에 철저히 복무함을 뜻한다. 철저한 역사 의식은 철저한 권력화의 의지와 다름이 아니다. 그러면 황선생은 어떤 모습으로 역사 앞에 서 있는가. 그 모습이 어떠하길래 나에게 전존재의 무게로 육박해오는가?"
- P163

"황선생은 신체의 자유를 철저히 박탈당한 감금된 존재이다. 권력이란 살아 있는 자, 운동하는 자만이 움켜쥔다. 죽은 자, 감금된 자는 권력을 잃은 자이다. 

권력자는 권력을 잃은 자를 죽일 수도 있고, 유폐할 수도 있다. 황 선생은 권력을 잃었기에 유폐되었던 것이다. 권력자는 죽임과 유폐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킨다. 이것은 역사의 바퀴를 굴리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냉혹한 법칙이다.  - P163

그런데 유신 권력자들이 사회안전법이라는 새로운 감금의 틀을 씌우는 순간, 황선생은 새로운 모습으로 솟구쳐 올랐다. 사회안전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상 전향을 강제하는 법이다. 전향을 하지 않으면 감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전향을 하면 감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황선생은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즉 가슴속에 품은 이데올로기를 버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유폐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 유폐의 주체는 유신 권력이 아니라 황선생 자신이었다. 스스로에게 유폐를 명령한 황선생의 모습은 바로 권력자의 모습이다.

자신의 선택한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권력화시키는 치열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유신 정권은 사회안전법을 만듦으로써 어리석게도 자신의 권력을 송두리째 황선생에게 갖다바치고 말았다. - P163

나에게 있어서 황 선생은 관념이 아니다. 
그는 내 영혼에 숨소리를 불어넣는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그 생명체가 유폐의 굴속에서 이데올로기의 뼈를 안고 시간과 싸워왔다. 이 싸움에서 그는 권력을 획득했다. 움직이지 않는 역사에 바퀴를 단 것이다. 

황선생은 나에게 진실을 말했다. 역사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말은 진실이다. 권력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 권력을 잃은 자만이 무릎을 꿇는다. 그는 역사에 바퀴를 달았다. 바퀴는 결코 정지하지 않는다. 결코……."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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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찬의 소설집 《완전한 영혼》ㅡ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두어야겠다.
표제작 <완전한 영혼>은 5.18 배경 소설이다.
그런데 무려 1992년 초판본이다. 내가 사는 곳이 市로 승격도 되기 전 소장도서이다. 격세지감ㅇㅣ로세... 알라딘에선 초판검색이 안된다. 하...
검색은 돼야 하는거 아닌가요?


아무튼 2018년 개정판과 차이점이 뭔가 살펴봤다.
그랬더니 초판본에는 7편의 단편이 실려있고, 2018년 판본에는 6편이 실려있다. <황금빛 땅>이란 단편이 ˝서사의 흐름과 양식적 조화를 고려(알라딘 책소개 참고)˝하여 초판본에만 실려있고 개정판에서는 빠졌다. 개정판본에 정희진 샘 해설이 실린 것도 달라진 점이다. 정희진 샘 해설도 궁금하긴 하지만 책은 최대한 덜 사고 빌려볼 수 있으면 빌려보는게 여러모로 이득!

하지만, 책이 진짜 낡았다. ㅠㅠ


˝회상이란, 그것이 즐거움이든 혹은 괴로움이든 사유(思惟)의 일상적 영역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영원한 쇠사슬인 동시에 자유의 짓푸른 공간이다.˝(7)

누군가를 회상하는 스토리임을 이미 알려주는 시작이다. 나는 이른바 80년대 운동권 학생이었고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제적을 당하였다. 이로 미루어 짐작되는 바 제대로 된 밥벌이가 어려운 상황이란 걸 예상할 수 있다. 고문의 고통 앞에 무릎 꿇은 것을 치욕스러운 패배로 받아들인 나는 그러나 밥 벌이를 위해 출판사에서 번역을 하며 지내는 일상에 스스로 혐오감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낀다. 운동권 선배인 지성수의 소개로 출판사에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곳에서 어떠한 연유로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장인하‘ 씨를 처음 만나게 된다. 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하는 그와 점차 필담으로나마 대화를 나누게 되고 ‘장인하‘라는 사람에 대해 점차 알아가게 된다. 장인하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장인하가 드러내는 내면 세계에는 독특하고 미묘한 울림이 있었다. 뭐라고 할까, 단순한 투명함이라고 할까. 아니면 투명한 단순함이라고 할까. 말하자면 너무나 단순해 투명해 보일 지경이거나, 아니면 투명함이 지나쳐 단순해 보이거나 그 어느 쪽이었다.˝(17)

결국 지성수도 나도 이런 장인하 씨에게 깊이 동화되고 지성수는 후일에 장인하에 대해 ˝소중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너무 맑고 천진한 사람이어서 그것이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 바보스럽기까지해 보이는 사람!
소설은 ‘장인하‘가 80년 5월의 광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째서 귀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지성수와 장인하의 긴 인연의 고리가 시작된 사건들까지 연결이 되면서 나의 회상은 이어진다.

˝나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해 성실한 영혼을 가진 이만이 획득할 수 있는 믿음이었다...
... 진보에의 믿음은 절망한 자에게 더 푸른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80년대 우리의 영혼을 떠받친 그 처절히 아름다운 믿음은 광주의 절망 속에서 잉태되지 않았느냐.˝(64~65)


이 세계를 진보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객관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던 젊은 영혼들. 80년 5월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에 투쟁하는 수많은 젊은 영혼들을 고문으로 짓밟은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 나라는 지금 진보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장인하‘와 ‘지성수‘의 입으로 전해주는 80년 5월의 광주에서의 끔찍한 참상을 듣다 자연스럽게 한 강의 《소년이 온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사실 다시 읽을래도 도저히 다시 읽을 용기가 없지만 시체 안치실에서 일하는 소년과 장인하가 겹쳐 보이면서 다시 한번 그 잔혹함에 가슴이 미어지듯 고통스럽기도 했다.

˝생명을 신뢰하는 선천적 본능˝을 지닌 장인하이지만 80년 5월의 광주에서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학생들(지성수 포함하여)을 마구잡이로 두들겨패는 공수부대원의 총을 빼앗으려다(하도 어이가 없었던 공수들이 학생들을 끌고 가지 않았고) 진압봉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골절이 된다. 이 사고로 결국 귀를 듣지 못하게 되었고, 나에게 한 고백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총을 막 잡으려는데 제 몸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다. 무엇인가가 허물어지는 소리였습니다. 내부가 파열되는 소리였지요. 정신을 잃었습니다.˝(41)


정신이 붕괴되고 허물어진 채로 귀까지 듣지 못하게 된 장인하는 시체 안치소 일을 자원하고 그곳에서 맞닥뜨린 삶과 죽음은 차라리 그에게 평온한 시간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 참혹함을 목격하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천진하고 투명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그에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건지, 그리고 ˝슬픔에 가득한 얼굴과 천진한 웃음˝ 뒤에 감춰진 그의 고통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런지...
장인하의 죽음 뒤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조그만 죽음이 회상 속에서 완전한 영혼의 모습˝으로 떠오를 때, 그리고 ˝지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저 너머에서 지상으로 흘러내려오는 그 비현실적 영혼의 모습˝으로 표현하면서 인간 장인하에 대한 나의 회상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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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애정 -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
도리스 레싱 외 지음,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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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애정‘이라는 두 가지 감정의 교차가 너무도 잘 이해되는 ‘엄마됨‘에 관한 작가들의 견해에 공감. 엄마됨도 비혼도 그리고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것도 모두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도 공감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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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단편 <아찔한 비밀>
바람둥이 남작과 유부녀의 뻔한 유혹 스토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츠바이크 씨,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두 사람에겐 훼방꾼일 유부녀의 12살 아들의 행동이 뭔지 모를 통쾌함을 선사한다. ㅎㅎ





"남작은 거짓말쟁이예요. 나쁜 사람이라고요. 그는 타산적이고 야비해요. 엄마랑 친해지고 싶어서 내게 친절하게 굴었고 개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거예요. 그가 엄마에게 무슨 약속을 했는지, 왜엄마에게 친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엄마한테서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굴 리가 없어요. 그는 나쁜 사람이에요. 거짓말쟁이라고요. 그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면 그가 항상 시선을 피하는 걸 알아챌 거예요. 아, 난 그를 미워해요. 비열한 거짓말쟁이, 악당 같으니라고!" 
아이는 버럭 화를 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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