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천 사장의 얼굴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예쁘장한 아줌마.
"그게 내 눈에 비친 천사장의 첫 인상이었다. 당시 천사장은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녀를 ‘아줌마‘라고 인식하는 데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 P102

나를 무리의 마지막으로 들여보내고 뒤따라 들어온천 사장이 카운터 바로 옆 벽에 걸린 자그마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노란기가 많은 조명 아래에서 코트와 머플러를 벗어 든 채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풍성한 머리칼, 그 아래로 훤히 드러난 긴 목, 폭이 좁은 브이넥 스웨터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딱 멈추는 브이넥의 깊이. 그 아래로 보이는 오목한 음영・・・・・・ 그 그림자는 선이 아닌 점의 형태였다.
나는 그 점이 늘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 P103

아주 슬쩍만 드러내는 점. 나는 그제야 천사장의 얼굴을처음 마주했을 때 어렴풋이 파악했던 것들을 구체화된 이미지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의 회식 이차 장소가다른 곳이 아니라 반드시 이곳, 천의얼굴 이어야만 했던이유는 바로 저것, 저 클리비지의 시작점 때문이라는 사실을. - P101

나는 회사 분위기를 파악하기도 전에 회식 분위기를먼저 파악해버렸다.
천의 얼굴. 그곳은 우리 회사 사람들, 구체적으로는 그회식 장소를 정하는 결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선호하는 이차 장소였다. 사실 선호라는 말로도 부족했고
‘이차‘가 ‘천의 얼굴‘과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들은 천의 얼굴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이렇게 외치곤 했다.
"잘 있었어? 내가 마시는 거 뭔 줄 알지?"
그러면 천 사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요. 알죠, 알죠."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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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한국소설 주간.
이 책도 저 책도 다 머리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손놓고 있자니 복잡한 생각들이 자꾸 밀려온다.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나신 그 분 때문에 마음이 너무 아프고 남은 가족 때문에 더 힘들다.
장류진의 《연수》 읽으면 잠시 피해갈 수 있을까...

출발지에 집 주소, 목적지에는 출근지의 주소를 검색해넣었다. 그리고 자동차 길 찾기 버튼을 터치했다. 아파트지하주차장에서 나가 우회전 두번, 바로 좌회전 한번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직진. 계속 직진, 사거리에서 크게좌회전, 그리고 직진 또 계속 직진. 그렇게 얼마간 가다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연수>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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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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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용 초단편이었어! 목적에 완벽히 부합하는 초단편들이어서 김연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구입한 나는 쪼금 실망. 하지만 역시 가독성은 최고. 난 또 다시 장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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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7-06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는 한 편도 안 읽어서 뭐를 읽을까, 하다가... 했는데.... 이 책은 피하겠습니다.

은하수 2023-07-07 18:18   좋아요 0 | URL
네... 김연수를 이 책으로 시작하시면 실망하실지도요^^
장편을 추천합니다.
전 처음 <원더보이>가 젤 좋았어요~~~
 

《긴즈버그의 말》 나의 인생 중에서...

지금은 믿기지 않는 어이없는 일들에 씁쓸한 웃음이 나지만 한편으론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들이 참 많았단 생각이 든다. 긴즈버그 같은 선구자들이 있어 주어서..!


ㅡ 긴 생의 기억들
자랄 때가장 기분 좋게 남은 기억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어머니가 책을 읽어주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
- 2016년 8월 16일, 뉴멕시코 산타페유나이티드 웨이United Way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며 - P128

2는 내게 행운의 숫자다. 컬럼비아대학교로 옮기기 이전에 나는 럿거스대학교에서 두 번째 여성 교수였다. 또한 컬럼비아대에서 두 번째 여성 교수였지만 종신재직권이 보장된 첫 여성 교수였다. 워싱턴 항소법원의 두 번째 여성 판사. 그리고 미국 연방대법원의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 <에런 하버 쇼〉 - P128

신이 내게 재능을 주신다면 위대한 디바가 되고 싶다. 하지만 슬프게도 음치다. 그래서 나는 단 두 곳에서만 노래한다. 한 곳은 샤워기 아래, 다른 한 곳은 꿈속에서다.
- 2017년 5월 24일, 아스펜 와이 펠로 토론회 - P129

1950년대 초반 (긴즈버그가 졸업한) 코넬대학교는 .………… 여학생 한명에 남학생 네 명이었기 때문에 여학생에게 좋은 학교로 통했다. 엄격한 쿼터제였다. 그 말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건 곤란했다. 공부 같은 건 하지 않고 파티나 쫓아다니는 여자라는 인상을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화장실에서 공부를 했다. 기숙사에 돌아갈 때에는 이미 숙제를 다 한 상태였다.
- 2016년 7월 14일, 성과 아카데미 인터뷰 - P129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원장이 우리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며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
- 2013년 2월 26일, <메이커스>(20세기 중반 미국의 여성운동을 그린 다큐멘터리)...... - P129

수많은 모욕이 가해졌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저 풍경의 일부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내가 하버드대 로스쿨에 다닐 때였다. <로리뷰> 발간에 참여하던 터라 라몬트도서관에 정기 간행물을 보러 갔다. 정문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못들어가요." "왜 못 들어간다는 거죠?" "여자니까요."
......
- 1993년 7월, 미상원법사위원회 인준 청문회 - P131

로스쿨에서 시아버지의 재정증명서를 내라고 요구했다. 처음에화가 몹시 났다. 내가 알기로 기혼 남학생 중에 장인의 재정 증명서를 내라고 요구받는 학생은 없었다.
- 2004년 9월 2일, <온리인 아메리카>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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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워스의 산
3
그리고 지금 나는 시인 워즈워스, 어느날 밤 그가 겪은 이상한 일을 생각한다. 그가 여름과 밤을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호수에 가서 작은 배를 빌려 노를 저어 물 위로 나갔다. 처음엔 달빛과 고요한 물을 가르는 노 소리가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가까이 있는 친근한 산봉우리가 그의 마음과 눈에 섬뜩한 유연성을 보였다.
우뚝 솟은 험하고 육중한 바위 봉우리가 그를 인식하고 물을 향해 기울어져 그를 뒤쫓는 듯했다. 그는 겁에 질려 정신없이노를 저어 도망쳤다.  - P48

그러나 그 체험을 통해 하나의 조화이자 생각의 친절한 매개인 미에 대한 단순한 심취에서 자연의 더 심오하고 불가해한 위대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늘 자연계의 빛과 고요를 사랑했지만 이제 세상의 괴력과 불가사의에까지,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선 곳에 있는, 뭐라고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그 음모들에까지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 P48

그 후로 워즈워스는 분명하고 균형 잡힌 풍경을 이룬 웅결체들과 기체들의 배열뿐만 아니라 회오리바람도 찬양하게 되었다. 세상의 미와 기묘함은 기운을 돋우는 상쾌함으로 우리의 눈을 채우는 한편 우리 가슴에 공포를 안겨주기도 한다. 세상의 한쪽에는 광휘가, 그 반대쪽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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