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구름이 반달을 가리자 잠시 사방이 캄캄해졌다.
달이 다시 나타난 순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눈앞의 정원에,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귀부인이 서 있었다.
나풀거리는 흰색 비단 겉옷은 소매가 펑퍼짐했고, 폭이 넓은 허리띠는 은색이었다. 얼굴은 눈처럼 하얬고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늘어진 머리카락은 숯처럼 새카맸다. 그 자태가 내게는 유랑극단의 무대 주위에 걸려 있던 그림 속 당(唐)나라 시대 절세미인들과 비슷해 보였다.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달빛을 받은두 눈이 일렁거리는 연못처럼 반짝였다.
그 표정이 어찌나 슬퍼 보이던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문득 가엾다는 생각이, 그 여자를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9

염은 어머니를 위해 바닥에 남겨 둔 닭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내 생각엔 이 땅에서 요술의 힘이 빠져나가는 중인 것 같아."
나 역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의심하던 터였지만, 그 의심을 입 밖에 내고 싶지는 않았다.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사실이 되어 버릴 것같아서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염은 귀를 쫑긋 세우고 주위의 소리를 열심히 탐지했다. 그러다가 일어서서는 내 손을 잡고 본당의불상 뒤로 나를 끌고 갔다. - P88

염의 목소리는 잔잔한 가을 연못처럼 담담하고 냉정했지만, 말자체는 정곡을 찔렀다. 우리 집을 찾는 손님이 점점 뜸해지는 와중에 짐짓 기운 있는 척하려고 애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문을 외우는 연습이나 춤추듯이 검 휘두르는 연습을 하며 보낸 세월은 다 헛수고였을까. 나는 궁금해졌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산속에 혼자 살면서 요술에 필요한 식량조차 제대로 사냥하지 못하는 염의 처지를 생각하며 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염의 목소리는 한순간 떨리는 듯하다가, 다시 도도해졌다. 연못의 수면에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처럼.
이내 돌아선 염의 표정은 앞서처럼 차분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거." - P92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방 천장의 대들보에 목을 맨 아버지를 발견했다.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즐거운 사냥을 하길> 중에서 - P95

고된 작업을 하는 사이에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 센트럴 거리에 늘어선 술집에서는 기계 팔이 손님에게 음료를 제공했고, 신계(新界)의 공장에서는 기계 손이 신발과 옷을 바느질했다. 빅토리아피크의 저택에서는 내가 설계한 자동 빗자루와 자동 걸레가 조심스레 복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도 들었다(직접 볼 기회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그 장치들은 바닥을 청소하다가 벽에 부딪히면 부드럽게 튕겨난다고 했다. 하얀 증기를 빠끔빠끔 뿜는 기계 요정처럼. 이로써 외국인들은 마침내 중국인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필요 없이 이 열대의낙원에서 즐겁게 살 수 있었다. - P103

마침내 그날이 왔다.
창문을 통해 비친 달빛이 아파트 바닥에 희끄무레한 마름모꼴을그렸다. 염은 그 마름모 한복판에 서서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며 새 얼굴을 움직여 보았다.
매끈한 크롬 살갗 아래에는 수많은 초소형 압축 공기 구동 장치가 숨어 있었다. 저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그 구동 장치들 덕분에 염은 원하는 표정을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두 눈이 달빛 속에서 흥분을 머금고 반짝였다.
"준비됐어?" 내가 물었다.
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07

나는 염이 그린 도안을 발전시켜 크롬 살갗이 접히는 정교한 구조와 금속 뼈대의 복잡한 연결 부위를 설계했다. 경첩 하나하나를결합하고, 톱니바퀴 한 개 한 개를 조립하고, 모든 전선을 납땜질하고 이음매를 용접하고 구동 장치 하나하나에 윤활유를 발랐다. 그렇게 염의 몸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광경은 경이로웠다. 내 눈앞에서 염은 마치 은빛 종이접기 구조물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기를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태곳적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는 크롬 여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중에서 - P108

그리고 지금, 만약 저 늙은 물소를 탈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때의기분을 다시 만끽하고 남은 하루를 후련하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얕은 진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물소는 여전히아무것도 모른 채 우물우물 되새김질만 했다. 진창 가장자리에 도착한 릴리는 물소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44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테디는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유리 조각을 꺼냈다. 커다란 거울을깨뜨려서 만든 조각이었고, 날카로운 가장자리에는 접착테이프가둘러져 있었다. 테이프에는 먹물로 적은 한자 몇 글자가 보였다.
"중국에서는 수천년전부터 거울로 재앙을 쫓아냈다네. 이 조그만 거울을 무시하면 안 돼. 이 안에는 굉장한 마법이 깃들어 있거든.
다음에 또 아이들이 자네를 괴롭히면 이 거울을 꺼내서 얼굴 앞에들이대게." - P153

화창한 가을날 오후였지만, 릴리는 한기를 느꼈다. 릴리의 상상 속에서 주위의 들판은
이 아열대의 섬을 꽁꽁 얼어붙게 한 백색 테러의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 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
‘z‘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 (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점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파자점술사> 중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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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십 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는 이유로 정은이 돈을 빌려주지 않았을 때 혜수는 정확히 같은 이유로 지갑을 연 것이었다. 정은은 그런 혜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건 혜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빌려줬다니 제정신이야? 너야말로 너무 야박한 거 아냐? 정은은 혜수와 오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보다 서로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중고 시절 이미평생의 우정을 모두 나누었기 때문이라고도 그 시절에 서로의 아주 깊은 데까지 보았기 때문에 이후로는 자주 만나지 못해도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런 나약한 말들> - P136

"그 부장이라는 사람도 그래. 당연히 회사 비품인 줄 알았겠지.
그 돈이 충분하냐고? 너무 과하게 준 거 같은데. 사진들 좀 없어진게 대수야? 부장도 알고 있어? 그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네가 스토킹하던 사람이라는 거."
"뭐? 스토킹?"
"일방적이었잖아. 너 혼자 좋아한 거고."
"뭐? 나랑 선생님은 진짜 친했어. 너도 잘 알잖아."
"애들은 다 수군거렸어. 정은이 걘 아직도 선생님 쫓아다니냐고, 중딩도 아니고 왜그러냐고, 친구없어서 선생님이 챙겨주던시절은 그만 졸업해야 하지 않겠냐고. 난 차라리 잘됐다 싶어. 그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도 없지. 너 혼자 과도하게부여한 의미밖에 없지. 그건 진작에 버렸어야했어. 네 손으로 직접 삭제했어야 했다고. 끝을 냈어야 했어. 근데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영영 청승 떨겠지."
<그런 나약한 말들> - P138

정은은 더는 화를 참지 못했다. 정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던혜수가 "맞아, 난 널 잘 모르지" 하고 시인했을 때, 정은은 혜수가그렇지 않다고 자신에게 맞서 소리쳐주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았다. 난 너를 알아, 내가 왜 몰라? 나는 너를 아주 잘 알아, 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혜수는 자신을 잘 모른다고 말했고 정은은 마치 이세상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런 나약한 말들>
- P143

승호가 애써주었지만 이번에도 잘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신청일 기준으로 생일이 보름 정도 지나버려 더는 만 삼십오 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담당자를 붙들고 공고일 기준이 아니었느냐고 거의울다시피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하여튼 쉬운게 없었다. 그래도 식당은 계획대로 열기로 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 - P163

내가 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아빠는 "남들 하는 것 좀 봐봐라. 사람이어떻게 저 좋은 것만 하고 살겠노?"라고 했다. 그런 게 삶인가? 모욕을 견디는 것......그렇다면 나는 이제야 겨우 살아가는 흉내를 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 <마음에 없는 소리>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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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너무도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환상문학의 세계를 만난것 같아 설렌다.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은 최근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 우연히 알게 된 책인데,
이 책에 수록된 14편의 단편, 중편이 모두 고른 작품성을 가지고 있을지 이제 겨우 두 편의 단편- 두 편 모두 내 마음을 충분히 흔들어 놓았다- 을 읽은 채로는 알수 없겠지만, 충분히 기대해봄직한단 생각이 든다.
옮긴이의 말을 참고해보면,
우선 2011년 미국의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가라는것을 알 수 있다. SF 판타지, 환상문학상의 양대 산맥이라는 휴고상과 네뷸러상 뿐만 아니라 판타지문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라는 세계환상문학상마저 석권하면서 파란을 일으킨 작품이 이 책의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이며, 지은이는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던 ‘오래된 신예‘ 켄 리우이다.
작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없이 읽었다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적으로 이보다 더 좋을수는 없는 빼어난 작품이란 것을 느낄수 있다.

‘종이 동물원‘에 등장하는 엄마의 편지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성행했던 농촌총각 장가보내기로 불리는 국제결혼 정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시아인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미국 남성이었던 아버지가 홍콩의 결혼 소개소 책자에서 엄마를 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고 행복한 삶을 꿈꾸며 미국에 오지만 엄마는 영어를 할줄 몰랐고, 고립된 삶을 살수밖에 없었다. 아들을 낳았지만 영어를 할줄 모르는 엄마와 오래도록 대화가 단절된 생활을 이어간다. 아들이 어릴 때 우는 것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종이호랑이를 접어주었고, 염소와 사슴, 물소도 접어 주었다. 한때 아들은 엄마가 만들어준 동물들과의 놀이에 푹 빠져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느덧 신발상자에 밀봉되어 다락방 구석에 박혀사는 신세가 된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병이 들고 종이 호랑이 안에 온 마음을 담은 중국어 편지를 남기고 죽는다.

엄마가 남긴 편지를 남의 도움을 받아 읽게된 아들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지 않을까...
엄마가 온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소재 자체로 이미 눈물샘을 장착하게 만든다.
눈물 줄줄 흐르는 감동을 느껴보고 싶다면 얼른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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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를 만든 민족은 많지만 ‘자기 ‘를만들었던 민족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 시유(施釉) 후 섭씨1,200~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본벌 구이를 하는 자기를만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했다. - P272

청자는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발달한 특이한 자기이고 유럽에서는 18세기 중국의 영향으로 겨우 자기가 등장한다"는 설명에 이어 "도자기는 흙과 불의 화학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므로, 도자기를 이해할 때는 기술과 미(美)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설명도 이어졌는데, ‘기술‘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아, 어렵겠다"
는 생각이 엄습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마이센 같은 어여쁜 찻잔이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어떤 왕과 귀족들이 아끼고 사용했느냐 같은 것이었는데, 수업은서양이 아닌 동양 도자에 관한 것이고 유물로서의 도자기에 대한 것이었으니 내 생각과는 왜 거리가 있었다. - P272

그 잔을 선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릇 사치는 돈 아까운 일이라 생각했다. 이제는 식기는 최대한 좋은 걸 쓰려고한다. 그건 스스로를 대접하는 마음 같은 것. 최근에 읽은여행작가 김남희 에세이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에도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자 먹더라도 예쁜 그릇을 꺼내제대로 차려 먹는 것이 최소한의 디그니티(dignity)를 지켜준다는 그 이야기에, 아마도 혼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백퍼센트 공감!
이건 혼자 살지 않아도 식구들이없는 시간 홀로 밥을 먹을 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딸아이든 아들이든 예쁜 그릇에 반찬, 국, 밥을 담아 먹게 했다. 취직하여 서울에서 혼자 있는 딸아이에게도 혼자 예쁘게 담아 먹으라고 어여쁜 백자세트 그릇을 사서 보내고 열심히 모아 두었던 앤티크 찻잔들도 여럿 보내주었다. 가끔 퇴근 후 저녁 상 차림 사진을 보내오는데 짬짬이 예쁘게 담아 먹는 모습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안심이 되곤한다.
이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니 우리딸도 공감하는 모양이다.
딸램이 읽고 나에게빌려준 책이기 때문에 안다! 한 권의 책을 딸과 돌려 읽으며 감정의 공유도 경험한다.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 P279

화려하고 섬세한 그릇과 마찬가지로 잘 깨지지 않는만만한 그릇 역시 참으로 귀한 존재. 사람 사귐도 그렇지않나, 나는 생각해 본다. 다루기 조심스럽고 까다로워서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들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항상 곁에있는 튼튼하고 듬직한 사람들의 중요함을 종종 잊어버리지만, 결국 오래 남아 곁을 지켜주는 건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고. - P280

청춘이란 그렇게 서슬 푸른 것이다. 지금은 부드럽고푸근한 정요 백자 같은 사람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생각한다. 모난 성미에 정 맞아 보기도 하고, 싸늘한 성정 때문에 미움받기도 해보아서 이제는 그만 동글고 눅진하게 살고 싶은, 40대란 뭐, 그런 시기인 것이다. - P281

약을 먹어야만 잠들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 생길때도 있고, 걱정 많고 항상 신경이 칼끝 같은 성격이 원망스러울 때도 물론 있다. 그럴 때는 또 다른 의사의 말을 떠올린다. "당신이 그 성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 당신 인생에서 그 성격이 가진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에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을 힘들게 하는 그 성격 덕이라는걸. - P291

알고 보니 나는 이미 라틴어 단어를 꽤 많이 접했었다. 학교의 문장(紋에는 ‘veritas lux mea(리타스 룩스 메아)‘ (진리는 나의 빛)라고 적혀 있었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외치는 ‘carpediem (카르페 디엠)‘(순간을 즐겨라)‘이라는말도 익숙했으며, 미술사 수업 시간엔 서양 옛 그림의 주요 주제인 ‘memento mori(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vanitas(와니타스)‘(허무)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전 라틴어에서 v는 영어와 w와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마지막 문장,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덧없는 이름뿐.) - P302

매시간 학생들이 제출한 퀴즈 답안과 과제를 꼼꼼하게 고쳐서 돌려주곤 했던 선생님은, ‘Angelus‘ (천사)의 격 변화를 설명하던 날 라틴어와 한국어 가사가 함께 적힌 악보를나눠주며 [파니스앙젤리쿠스]를 가르쳐주었다. 가사를 한줄 한 줄 번역해 주며 학생들에게 합창하게 했던 그는, 짖궂은 학생들의 요청에 큰망설임 없이 강단에 서서 직접 그노래를 불렀다.

Panis angelicus 천사의 양식
fit panis hominum; 인간의 양식 되고
Dat panis coelicus 천상의 양식
figuris terminum: 주님의 형상을 완성하네Ores mirabilis! 오! 묘한 신비여!
Manducat Dominum 주님을 먹는다네
pauper, servus et humilis.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 P304

다소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러나 진지하게 그는노래했다. 신(神)의 언어인 라틴어로 그가 주님의 양식을 노래할 때 나는 정신의 고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어떤 감각, 조물주의 커다란 손이 하늘로 들어올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교수 자리가 날지 불확실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서양 고전 연구를 업으로 삼겠다심한 시간강사와, 졸업 후에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단지 공부가 좋아 쓸데도 없어 보이는 라틴어 가의를 듣겠다 마음 먹은 학생들...... 그 낡고 허름한 지상의 강의실에서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고, 그 언어는 대부분의 수강생들에게 삶의 잉여였지만 분명 ‘위안‘이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하지만 유용한 것만이 반드시 의미 있지는 않으며 실용만이 답은 아니라는 그런, 위로. - P305

교양이란 학식과는 다르다. 교양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더 비정하거나 덜 비정한 세계를 상상하고 그에틈입할 여지를 준다. 그러한 자유라도 있기에, 우리는 지치지 않고 생(生)의 수레바퀴를 유연하게 굴릴 수 있는 것이다. - P308

Sapiens nihil facit invitus nihil iratus
현명한 이는 어떤 것도 마지못해 하거나 분노한 채로하지 않는다. - P308

아무리 낡고 지루하다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수업이 그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히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되었다. - P324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나를, 책이라는 맹수를 길들일 수있도록 정교하게 훈련시켰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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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었을 때, 늦은 밤 전철을 기다리며 여자친구와 벤치에앉아 있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때도 그랬다. 아주 짧았으니까줄곧 우리를 주시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텐데 어느 틈엔가 곁에 온 노인이 지팡이로 내 다리를 세게쳤다. 노인은 잔뜩 화가 나서 더러운 년들이라고 욕을 했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화가 난 것은 우리였는데 한편으론 무서웠다. 왜그렇게까지 악의를 갖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그랬다. 우리가 할아버지한테 뭐 했어요? 했냐고! 여자친구가 악에 받쳐 소리칠 때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노인과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는 승객들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 P17

우리는 수영은 못하고 해변을 걷기만 하다가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밤의 바다는 추울 테고 일 년 사이 더 늙어있을 우리에게 호기나 오기 같은 건, 충동적인 농담 같은 건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걷다가 쓸모없는 것들을 잔뜩 주울지도 모른다. 예쁜 소라껍데기를 하나 주워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워온 소라 껍데기를 서랍 속 상자에 잘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꺼내 귀에 갖다대고 파도 소리를 듣고 또 서로에게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 P37

우리의 긴 드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도 반장은 침묵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할말 있어?"
내가 묻자 반장이 장난스럽게 운전대를 흔들던 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진짜 용서 안 해줄 거야?"
이제 와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절대 구하지 않을 용서 아니었냐고 내가 용서를 해준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고. 나는 그런 것들을 묻지 않았다. 반장이 어떤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그렇게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보니 원하는 답을 해주기가 싫어졌다. 어릴때에 누군가에게 오랫동안 미움만 받았던 기억은 도무지 지워지지가 않았다. 상처가 됐다. 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해줄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싫어해."
반장의 표정은 빠르게 일그러졌다. 어쩌면 나도 그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친, 진짜."
반장은 짜증난다는 듯이 거칠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서는 있는 힘껏 문을 쾅 닫고 떠났다.
<굴 드라이브> - P69

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등골을 타고 땀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이느껴졌다.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지하철역까지 곧게 뻗은 차도 대신 샛길처럼 나 있는 주택가 골목을 택했다. 백 미터 남짓 되는 그 골목은 적갈색의 벽돌로 된 연립주택이 대부분으로 내가 사는 동네와 분위기가 아주 비슷했다. 모퉁이를 돌면 우리집이 나올 것만 같았다.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날인지 집 앞에쓰레기봉투를 내놓은 곳이 많았다. 골목 가득 희미하게 지린내가났다. 나는 냄새에 질색하며 도망치듯 빠르게 달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골목 입구 쪽에 있는 헌옷 수거함앞으로 갔다. 손바닥에 눅진하게 배어난 땀을 닦은 후 그녀가 준카디건을 그 안에 넣었다. 수거함이 꽉 차 있어서 힘으로 욱여넣어야 했다.<결로> - P93

하지만 유코의 한국어가 완벽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모두 조금씩취해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중에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유코도남자도 나의 여정을 죽은 친구를 대신해 떠나온 것으로 오해하고있었다.
나는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았어야 했을까? 그것은 어떤 빌미가 되었을까. 누군가 원진을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원진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미신적이고 원진에게도 옳지 못하다. 그런데도 그런 자책감이 들 때가 있다. - P111

"원진이가 죽었어요."
유코는 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죽으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뿌리치고 싶었다.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내가 대착없이 우는 동안 유코는 아무 말없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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