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이들은 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길로 나아가게 해 주고 싶다고. 엄마는 와타루가 음악에 소질이 있다면 그걸 소중히 키워주고 싶다고 즐겁게 말씀하셨어요. 아빠 부탁이에요. 제발 와타루가 피아노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저를 위한 피아노인데 저보다 와타루가 훨씬 더 잘 쳐요. 역시 음악에 재능이 있는 거예요."
"그럴까....... 그저 반쯤 재미로 치는게 아니고?"
"아니에요, 저는 어떤 곡을 치려면 아주 열심히 연습해야 하는데, 와타루는……………, 아무튼 천재일지도 몰라요."
"아하하, 천재라니 허풍이 심하구나."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 P168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버지와 딸이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와타루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걱정마저 잠시 잊을 만큼 아버지와 딸의 소통은 즐거웠다.
"그럼 마키코 넌, 아빠랑 엄마 중에 누구를 닮았을까?"
아버지는 놀리듯 말했다.
"둘 다 조금씩."
마키코가 웃었다.
"그렇구나. 그럼 아빠의 좋은 부분과 엄마의 좋은 부분을 조금씩 닮아다오, 마키코."
"응, 그럴게요."
"하하하." - P169

"요코!"
어디에선가 자신의 이름을 그리운 듯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가까운 언덕 그늘에서 코트의 깃을 세우고 웃으며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마키코였다. 그녀의 손에는 온실에서 키운 여러색깔의 꽃다발이 소중히 들려 있었다.
"어머."
그 모습에 발걸음이 멈춰선 요코의 뺨에는 발그레한 혈기가 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 P181

"병문안 왔어. 이 꽃은 가즈에가 전해 달래. 오는 대신 선물이라면서."
마키코는 요코의 가슴에 꽃다발을 안겨 주고 어깨에 손을 둘렀다.
"빨리 건강해져. 그리고 우리 셋이서 사이좋게."
말하다 말고 마키코는 문득 눈물이 고여 요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말보다 빨리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린 요코의 검은 머리칼과 옷깃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아아, 그리운, 물망초 향수 냄새여. 하지만 지금 이 냄새는 마키코로 하여금 위태로운 죄악과 전율하는 유혹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 냄새야말로 앞으로 세 소녀를 묶어 줄 우정의 표식과도 같이, 밝고 깨끗하고 고요하고 그립게 마키코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ㅡㅡㅡ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난다.......
- P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풋풋하고 순수한 소녀들의 우정 이야기 .




어느 날 그녀들

4월 말이었습니다. 벚꽃이 지고 가지 끝에 새잎이 흐드러지게나고 있었습니다.
성미 급한 양품점은 긴자 거리 쇼윈도에 밀짚모자를 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멋으로 레인코트를 팔에 걸친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빼먹고싶어질 만큼 아름다운 계절이었습니다. - P14

방과 후 밀치락달치락 혼잡한 교문 근처에서 마키코가 가즈에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주의자가 아주 엄숙하게 강경파 대장을 불러 세운 겁니다.
"가즈에."
"응?"
역시 강경파 스타는 다릅니다.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정확히 돌아보며 직립 부동자세로 걸음을 뚝 멈췄습니다.
"저기, 노트 좀 빌릴 수 있을까? 내가 학교를 이삼 일 쉬어서 필기 좀 보려고."
마키코가 말했습니다. 그동안 그녀는 환절기 감기에 목이 아파 이삼일 결석을 했습니다. 노트라면 학업에 충실한 가즈에에게 빌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그래, 좋아."
사에키 가즈에는 쩨쩨하고 못된 아이가 아닌 듯합니다. 가방을 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P14

"지금 여기 있는 거다 빌려줄까?"
시원시원하게 가지고 있는 노트를 내밉니다.
"고마워. 오늘 밤에 필기하고 내일 곧바로 돌려줄게."
마키코가 또록또록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별 다를 게 없는 대화입니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흔한 풍경입니다.
- P15

하지만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클레오 여왕, 아이바 요코입니다.
지금 요코는 마키코가 가즈에에게 노트를 빌리며 고마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요코는 아마도 속으로, ‘지루하게 노트는 무슨 노트야. 영화스틸 사진이라면 나도 많은데ㅡㅡ‘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 P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월에 부는 바람
현기영 지음 / 한길사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게 제주는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고 아픔 없이는 회상할 수 없는 고향이다. 극우 세력은 미군정이 개입한 4.3을 부정,왜곡,폄훼하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재기억‘함으로써 그 기억을 계승해나가야 한다. 세계를 향해 전쟁이 아닌 평화의 메세지를 당당하게 외칠 자격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곱 작품 모두 몰입의 대 환장 파티라고 할 만큼 빠져들어 읽었다. ˝치열함˝과 담대함˝, 그리고 섣불리 인위적으로 갈등을 무마하려하지 않는 태도에 감탄이 배어 나온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사람들만 남는다˝, 그리고 넷플릭스보다 성해나 책이 한 수 위 맞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5-04-0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거 읽어봐야겠네요!

은하수 2025-04-09 10:21   좋아요 0 | URL
네~~꼭이요.
강추합니다.
단펀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재밌어요. 소재의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구요^^
 

지워진 풍경

내가 태어난 곳은 제주시 노형동 외곽에 자리 잡았던 ‘함박이글‘이라는 이름의 자연 부락이었다. 그곳은 정부 수립 당시 4.3 토벌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잿더미로 변했던 300여 부락들 중 하나였다. 재앙에 회진이 되었던 그 마을들은 훗날 주민들의 손에 의해 대부분 재건되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영영 폐촌이 되어버린 곳들도 더러 있었다. 내 고향이 바로 그러한 곳이었다. 잔인무도한 권력의 손이 그 장소를 먹칠해서 지도상에서 영원히 지워버린 것이다.
- P123

한때 탑알 매립을 반대하는 시민운동이 맹렬히 벌어졌고, 객지에서 생활하는 나도 그 운동에 가담해 목소리를 보탠 바 있다. 하지만 자본과 자본주의적 인간들의 무차별 공세 앞에는 도무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 P128

그리하여 나는 고향을 잃었다. 오래전 군軍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나의 태생지인 함박이굴은 주민들의 떼죽음과 함께 지상에서 사라져버렸고, 제2의 고향 역시 그 이채로운 현무암 바위들과 선반물의 매몰과 함께, 그리고 수많은 바다 생물의 떼죽음과 함께 두꺼운 콘크리트 층에 덮여 영영지워지고 말았다. 내가 살던 동네도 사주관상을 보는 점집들의 밀집 지역으로 변해버려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 P128

자본은 과거를 소비해버린다. 자본이 휩쓸고 가는 곳에는 더이상 과거는 존재하지 않고 앞만 보고 무조건 내달리는 일직선의 진화론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무한 질주의 자본에게 자연이란 소비되기를 기다리는 일시적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고향을 찾아갈 때면 어쩔 수 없이 상실감에 빠진다. 고교졸업과 함께 그 섬 고장을 떠난 이후, 나의 삶을 인도해준 것은유년이란 과거와 자연의 빛이었다.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그시절, 나의 유년은 자연 속의 삶, 자연의 일부로서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그 유년의 자연이 파괴되어 없어져버린 것이다.
버치 기여 파괴 - P129

야만적 선동의 추악함

"야만성의 역사가 없는 문명의 역사는 없다"고 발터 베냐민은 말했다. 하지만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구가해온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참혹한 유혈의 세기이기도 했다. - P197

비명에 간 그 죽음 가운데 서럽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래도 제일 애통한 것은 아무 방어 능력 없는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한 경우일 것이다. 한 사회를 생물학적으로 멸절시키려 했던 제노사이드의 사례들은 문명의 가면을 쓴 야만의추악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난징, 히로시마, 킬링필드, 르완다, 동티모르, 보스니아의 학살과 국내 사건으로는 제주 4.3이 그 목록에 들어간다. - P197

얼어붙은 바다

후진국에 있어서 자유란 민중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위정자의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어 있다. 즉, 안정과 성장을 구실 삼아 자유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수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것이다. 이 ‘수호하는 자유‘란 진열장에 박제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민중이 목숨을 바쳐야 함을 뜻하고 소수 특권층의 자유를 위해 대다수의 자유가 유보되어야 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가 오히려 위정자의 통치무기가 되고 있음을 본다. - P228

민중이라는 바다는 그 위에 한 정권이라는 배를 태울 수도 있지만 풍랑을 일으켜 그 배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무서운 잠재력도 있다는 경구가 있다. 후진국의 민중이라는 바다는 지금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 얼어붙은 바다를 누가 각성시키는가? 저 한겨울의 결빙을 도끼로 깨뜨리고 싱싱하게 살아 있는시퍼런 민중의 바다를 드러내는 작업을 누가 하는가? 셸리와바이런이 해주지 않는다. 오늘날 후진국에는 그런 낭만적인지성은 없다. 그들은 늘 어둡고 괴롭고 어눌하다. 그건 그들이 항시 체포의 위협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P2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