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씨 이야기>
 그런데 그가 갑자기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벌떡 몸을일으켰다. 누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로즈 씨! 로즈 씨세요?"
그는 한 자동차 창문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보았다.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얼굴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였다. 친구, 먼 친척, 관계가 있는 사람, 척진 사람,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건 그 사람에게 차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다른 차들과 마찬가지로 보따리, 여자, 아이들로 가득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자동차였다. - P115

"내가 탈 만한 자리가 있나요?" 그가 소리쳤다. "내 자동차는 도둑맞았어요. 루앙에서부터 걸어왔는데 더는 한 발짝도 못 걷겠어요. 날 태워줘요, 제발!"
차 안에서 사람들이 의논했다. 한 여자가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다른 여자가 말했다.
"곧 루아르강의 다리들을 폭파할 거야. 그러면 저 사람들은 못 건너가."
그러고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로즈 씨를 향해 소리쳤다.
"타세요. 탈 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 보자...어쨌거나 재주껏 타세요." - P115

로즈 씨가 몸을 움직여 일어서다가 마르크를 떠올렸다.
"이 청년한테도 한 자리..."
"그건 불가능하네, 가엾은 친구"
"난 그를 두고는 가지 않을 거야." 로즈 씨가 
말했다.
너무나 피곤해서 그의 귀에는 자기 목소리가 
낯선 이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게 들렸다.
"친척인가?"
"아니, 아무 관계도 아니야. 하지만 부상을 당했어. 난 그를 두고 갈 수 없어."
"자리가 없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다리들! 다리들이 곧 폭파될 거야!"
자동차가 서둘러 출발했다. 로즈 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끝이었다. 그는 이제 죽은 목숨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 아이 때문에? 그는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여자 목소리를 들었다. - P116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어요! 사람들, 차들이 있다고요!"
그 혼란 속에서, 그 끔찍한 무질서 속에서, 다리가 너무 일찍 폭파되는 바람에 피난민의 차들이, 로즈 씨가 타기를거부했던 차까지도, 강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즈 씨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마르크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에 타지 않은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달으면서.
(1940) - P116

<그날 밤>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의 말들은 빈약하고 서툴렀으며, 목소리도 고르고 단조로워서 정열적이지 않았다. 그랬다, 엄마에게는 열정의 흔적이 더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자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가, 예술가, 천재적인 창조자가 망설이며,
틀려가며, 고쳐가며 <월광 소나타>를 연주하는 소녀들에게 말하듯 그 노처녀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다 내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면, 엄마의 입술은 물어뜯는 것도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닌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 P138

나는 엄마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강력한 경쟁자로 보이는 모든 여자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자란 그 세 사람은 안전했다. 그들이 엄마의 소중한 남자를 앗아갈 리는 없었으니까. 엄마는 그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망설이며 이야기를 시착했지만, 나중에는 기억의 물결에 휩쓸려갔다. 분명, 엄마가 말을 하면 할수록, 사랑은 떠나갔다. 마개를 열어놓은 향수병에서 향기가 날아가듯, 사랑은 그녀의 가슴에서 달아났다. 분명히 말하는데, 프랑스에서 첫 밤을 보낸 순간부터 엄마는 아버지를  잊기 시작했다. - P139

"하지만 언니가 아까는, 아까는..." 알베르트 이모가 외쳤다.
"아까는 내가 불행했다고 했지." 엄마가 끼어들었다. "사실이야. 난 네가 부러워. 너희의 평화로운 생활이 부러워. 하지만... 난 풍요로웠고, 가득 채워졌었어. 그런데 너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지?"
그러자 나의 이모 알베르트가 뜨개질감을 떨어뜨리고는두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P140

깜짝 놀란 엄마가 애석해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녀를 달래러 갔다. 하지만 이모는 엄마를 뿌리쳤다.
"왜 그러니, 알베르트? 나도 알아, 이해해, 내가 가여워서우는구나..."
"언니가 가엽다고? 오!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그러고는 고통과 앙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덧붙였다.
"언니는 이 모든 걸 우리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1942)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9
은유 지음, 지금여기에 기획 / 오월의봄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가적 폭력 앞에 한 개인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래도 되는˝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래도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진다. ‘간첩 조작 사건 무죄 목록‘이 너무 길어서 깜짝 놀랐다. 고문하던 그 사람들은 어디 숨어서 잘 살고 있을까?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도회>
I
캉프 부인이 공부방에 들어서면서 문을 하도 세게 닫는 바람에 샹들리에 유리 장식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맑고 가벼운 방울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책상에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처박은 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캉프 부인은 아무 말없이 잠시 딸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 앙투아네트 앞에 버티고 서서 소리쳤다.
"넌 엄마가 왔는데 고개도 안 드니? 계속 그렇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거야? 참 대단도 하지. 미스 베티는 어디있니?" - P9

이제 앙투아네트는 일어서서 짝다리를 짚은 채 건들건들몸을 흔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열네 살 여자아이, 젖살이 빠져서 어른들 눈에는 이목구비가 또렷이 구별되지 않아 둥글고 밝은 얼룩처럼 보이는 그 나이 특유의 창백한 얼굴, 그늘진 두 눈 위로 내리깐 눈꺼풀, 꽉 다문 작은 입을... 그리고 꽉 끼는 교복 아래로 봉긋 솟아올라, 가냘픈 아이의 몸을 부끄럽고 불편하게 하는 가슴, 커다란 두 발, 붉은 손과 잉크가 묻은 손가락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팔이 될지 모를(누가 알겠는가?), 긴 작대기 같은 양팔, 가느다란 목, 특색 없이 푸석하고 가벼운 단발. 그랬다. 앙투아네트는 사춘기였다. - P10

..... 가끔씩 죽이고 싶을 정도로, 칼로 얼굴을 그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혹은 발을 구르며 ‘아유, 정말 짜증 나!‘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앙투아네트는 어른들이 미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무서워했다. 앙투아네트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꼭 껴안으며 쓰다듬어준 적도 꽤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까맣게 잊었다. 대신 그녀는 머리 위로 날아드는 화난 목소리의 파편들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다.  - P11

<로즈 씨 이야기>
로즈 씨는 고양이처럼 신중하고 차분했다. 그는 순탄한삶을 살았고, 독신에다 부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깔보는 것 같은 거만한 표정을 지어 사람들에게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 P89

 그는 세상이 멍청이들로 가득하다고 믿는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싶을 정도로.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이었다. 그는매사에 몸을 사리고 앞뒤를 쟀다. 그의 지하창고는 산해진미로 가득했다. 그는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아주 훌륭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한 남자를 알려면, 그가 식탁에서, 또는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어떻게 구는지 봐야 한다. 로즈씨는 과일을 깎을 때나 여자의 손을 어루만질 때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드러움과 신중함을 보였고, 섬세하지만 오래가진 못하는 욕망을 드러냈다. - P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시에 나는 보안관찰을 받던 놈인데 내가 사라지니까 비상이 걸렸어. 삼척 집에 가서 김용태 어디 있는가 내놔라 하니까 우리 형님이 주소를 가르쳐준 거지. 나를 보더니만 ‘마산 동부경찰서까지 갑시다!‘ 하는 거야. ‘뭐 땜에 그래요?‘ 하니까 예비군 훈련을 안 받은 게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나왔대. 나중에 보충교육 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했더니 일단 가자네. 그럼 갑시다. 문 앞에 딱 나오는데 앞에 한 놈이 있고 뒤에 한 놈이 딱 있는데, 뒤에 한 놈이 내 옆구리에다 뭘 갖다가 퍽 들이대. 허튼짓하면 바로 쏴버린다 그래. 권총이야. 난 뭐 그래 예비군 교육 한번 안 받았다고 권총을 들이대나 황당하더라고. - P207

날 밀어넣더니 지들끼리 떠들어. ‘이 새끼 순순히 따라와?‘ ‘지가 안 따라오면 어쩔 건데.‘ ‘밥 챙겼어?‘ ‘안 먹였어요.‘
그러더니만 라면을 끓여서 왔는데 국물이 하나도 없어. 아마 내 생각엔 수프를 다 넣고 거기다 소금을 또 한주먹 넣었지 싶더라고, 라면을 먹어보니까 이게 짠 정도가 아니고 써서 못 먹겠어.
한 젓가락을 뜨고 딱 놓으니까 바로 날아와. ‘이 새끼야. 여기가 니 맘대로 처먹고 안 처먹고 하는 덴 줄 알아? 어서 처먹어!‘ - P207

그랬더니 백상지 갖다 주고 니가 태어나서 여기에 오기까지 있었던 일을 적어라 그래요. 진짜 아침에 무슨 밥을 먹고 점심에무슨 밥을 먹었는가 그것까지 다 쓰라는 거야. 3일 동안 잠도 안재우고 손가락이 아파서 못 쓸 정도로 반복시키더라고. 라면 그짠 걸 먹어가지고 갈증은 나지, 물 좀 달라니까 ‘야, 이 새끼야.
빨갱이 새끼한테 줄 물이 어디 있어‘ 또 두드려 패고. 내가 맞아서 정신 잃으면 머리에다가 물을 갖다가 부어버려. 깨워서 쓰고또 쓰고 딱 글을 쓰니까는 세 번째에 딱 그래. 이 새끼가 머리가보통 놈이 아니라면서 내용이 똑같다고 나보고 철저히 교육받아서 답변을 준비했다는 거라. 내가 이북에서 교육받은 내용을썼더니 교육받은 내용이 지령이라는 거라. 이북에서 교육을 받고 실행하려고 나와서 활동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내가 ‘난수표가 뭡니까?‘ 했다니까. 난수표가 뭔지도 모르다가 고문받으면서 알았어요." - P208

김용태는 고문을 24일까지 버텼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음습한 시멘트 바닥에서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오는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했다.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그의 몸이기억하는 가장 힘든 고문은 손톱 밑에 이불 꿰매는 큰 바늘을찔러 넣는 것. 열 손톱이 부옇게 뜨면서 몸의 가장 끄트머리부터 심장까지 조여 오며 온몸으로 전기가 지지력 흘렀다. 24일동안 24시간 내내 그는 생과 사를 수도 없이 오갔다. - P2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유 작가의 <폭력과 존엄 사이 -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의 '들어가는 말'에서 "잠깐 내린 눈"이라는 말이 나온다. 간첩의 누명을 쓰고 복역했던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 7명을 인터뷰 했다. 그 중 고 심진구와 부인인 이정미 두 사람은 노동 운동을 하다가 만났고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심진구가 집 앞에서 검은 승용차에 태워져 사라졌다. 왜, 어디로 끌려갔는지 몰라 가슴을 졸이다가 열흘 만에 안기부에서 연락을 받고 잠깐 남편을 만나러 갔는데 차를 빼러 간 안기부 직원을 피해 1~2분이나 될까 말까 한 순간 남편 심진구가 말하길 "나를 간첩으로 몰고 있다. 사람들에게 알려라." 라고 말했다. 간첩이라니... 그 순간 첫눈 같은 게 내렸고 그 기억이 콕 박혔다고 이정미는 반복적으로 진술했다. 


  "잠깐 내린 눈. 간첩이라는 번갯불 같은 말이 내리치는 순간 하얀 눈이 내렸다는 것. 어쩐지 몽환적인 그 상황을 나도 가만히 그려 보았다. 잠깐 내린 눈. 받아들이기 벅찬 현실을 위로하기 위해 하늘이 뿌린 선물이었을까.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하는 자연의 신비인가... ...  잠깐 내린 눈.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발생한 일, 손등에 눈을 맞은 사람만 아는 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믿어주지 않는 일. 그 어떤 삶의 지독한 장난도 돌이켜보면 또 잠깐 내린 눈 같은 순간의 일. 무죄 판결의 기쁨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시든다는 점에서 잠깐 내린 눈 같은 것.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환영."(14~15쪽)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란 낯선 존재. 그간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접점이 없었기에 아무런 상이 잡히지 않는다. 은유 작가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티비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너무나 멀고 피상적인 존재들. 

그러나 은유 작가는 다시 말한다. "폭력과 존엄 사이를 눈물, 연민, 인식, 성찰, 화해, 신의로 채운 묵직한 생애 서사는 물론이고 소소한 에피소드도 뭉클하고 재미나"지만 감옥에서의 삶을 말하는 또 다른 피해자 박순애는 '감옥 이야기'를 말할 때 가장 많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김평강은 감옥에서 대접받고 잘 지냈다며 출소할 때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는 이야기. 이것은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니 살만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장소의 여건보다 '관계의 질'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알아주는 주위 동료들이 있고 말이 통하는 벗, 책이 있어 나의 고통을 나눌 수 있고 의지가 될 때 비로소 감옥도 살만하다고 느꼈던 거 아닐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국가 폭력의 피해자로 억울한 옥살이를 5년(김순자), 7년(김평강), 12년(박순애), 15년(김흥수), 17년(이성희), 납북 어부였다가 1 년 만에 무사귀환, 다시 간첩으로 몰려 13년의 옥살이(김용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그 역경들을 대하는 태도와 망가진 일상을  복구하는 데 있어 타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좋은 직업을 택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삶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을, 인위적인 폭력 앞에 침몰하지 않고 그 사건을 계기로 다른 세상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변신했다는 것을,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는 큰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이번주는 지난 번 내린 비에 건조했던 대기의 먼지도 쓸려 가 공기의 질도 최상이고 서늘한데 햇살은 찬란해서 장마가 오기 전 최상의 날씨를 선사해 주고 있다. 실제 인터뷰이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세세한 부분들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에 울분이 차오르면서 화가 나지만...  그저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읽어보겠다.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놓겠다. "잠깐 내린 눈"처럼 작은 위안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은유 작가의 인용구를 남겨 놓아야겠다. 



















우리가 보는 것은 피와 살로 고동치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67쪽



사람은 삶의 주기성을 제대로 까닫지 못하거나 늦게, 너무 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경험이 쌓여야 알 수 있는 문제인데 누적된 증거가 없는 탓이다.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이의 슬픔이 너무도 절망에 가까운 것은 젊음의 무지 때문이다. 젊은 시절 위대한 성취를 꿈꾸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삶은 너무나 길어 보이고, 너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삶에 필요한, 삶이 가져야만 하는 그 모든 간격 - 열망과 열망,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 잠을 위해 멈추는 시간들처럼 피할 수 없는 멈춤들 - 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숨 돌릴 휴지기가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불행한 젊은이에게 삶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의 일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다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에 더 미묘한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마음의 평화가 있으리라. 

                                             - 엘리스 메이넬 <삶의 리듬>, 《천천히 스미는》, 84쪽



어둠 속에서 나는 삶을 향해 미소를 지어. 마치 악하고 슬픈 모든 것은 거짓임을 확인하고 그 모든 걸 순전한 빛과 행복으로 바꾸어내는 어떤 마법 같은 비결을 알아내기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야. 그리고 줄곧 내 자신 안에서 이런 기쁨의 이유를 찾아보려 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다시 스스로에게 미소를 짓는 수밖에. 스스로를 비웃기도 하고. 비결은 결국 삶 그 자체인 것 같아.        - 케이트 에번스, 《레드 로자》, 1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