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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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잔인한 세상에 대한 슬픔... 그리고 어리석고 헛된 폭력이 멈추지 않는 그들의 세상에서 연대와 희망을 말하는 이브 엔슬러! 미치도록 아름답고 처절한 문장들로 함께 사랑의 혁명을 이루자고 손을 건넨다. 어찌 잡지 않을 수 있으리.기꺼이 잡겠어요. 함께 분노하고 구역질하고 기억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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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혁명

우리가 이브를 어떻게 보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론적으로 이브는 태초의 여성이자 생명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성서 속 존재지만 신화는 우리의 실재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기반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만들고자 하는 세상의 경계를 쌓아올립니다. 이야기는 우리 행위와 삶의 건축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이브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그녀를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원형적 인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준 많은 원형적 여성 중 하나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P345

이브가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세뇌당하고, 이브가 순종을 강요당하기 전의 이야기, 

달과 별들의 물결 속에서 춤추던 그녀가 춤을 멈추기 전의 이야기, 

손길로 치유하고 미래를 보고 대지와 한 몸이 되기 위한 그녀의 힘을 땅속에 묻기 전의이야기를요. 

그녀가 기쁨을 끝없이 느끼는 법을 알기 전,
그래서 남자들이 세상과 자기들을 위해 여자들을 이용하는 법을 알기 전의 이야기. 

그녀가 기분 좋은 감정을 부끄러워하기 전의 이야기. 
그녀가 자신의 감정에 죄책감을느끼고 자신의 두뇌 크기를 부끄러워하기 전의 이야기,

자기 의견을 숨기고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을 사과하기 전의 이야기. 

출산이 벌이 되고, 남자에 대한 사랑과 봉사가 의무가 되기 전의 이야기. 

그녀가 분노를 삼키고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억누르기 전의 이야기.
......

이 모든 이야기를 기억하기 위해 이브는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녀의 갈망이 지나온 궤도가 우리가 되돌아갈 길이었기에, 그 열매가 바로 기억을 담은 회상의 묘약, 최초의 결합을 위한 최음제였기에 이브는 열매를 먹은 것입니다. 이브는 힘을 되찾고 그녀가 잘못된 정원에 떨어져 인질로 잡히기 전에 알고 있던 것들을 되찾기 위해 열매를 먹었습니다. - P347

그리하여 이브는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완전하고 독립적이며 에로틱한 자신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요. 관대하게 아담에게도 이를 권했고요. 그러나 곧장 징벌과 수치심, 죄책감, 억압이 그들 머리 위로 떨어졌어요.
그곳에서 쫓겨난 후로 그들은 내내 안과 밖을 정처 없이헤매며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습니다. 이브는 더 깊은 앎으로 가는 문을 연 죄로 내쳐진 거예요. 우리는 아버지의 정원, 아버지의 집, 실체 없는 지성의 세계 바깥에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모두 혜안을 가진 유목민이에요.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추방되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찾아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것은 정말, 그냥 태초에 있었던 우리의 세상을 기억해 내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 P349

이브는 아담에게도 신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일을 행하고 나면 뒤따를 일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화를 사, 자신이 물려받은 모든 유산과 정당성, 이름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가부장제라는 안락한 신기루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임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제가 이렇게 상기합니다. 그들은 이브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우리 최초의
내부 고발자가 되었어요. 자신이 잘못된 정원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열매를 베어 물고 씹고 목구멍 안으로 삼켜 자기 혈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새빨갛고 달콤한 열매는 기억을 불러오는 묘약이었지요. 그녀 안에 정의와 환희, 기쁨, 평등, 사랑, 연대를 향한 갈망이 폭포처럼 넘쳐흘렀기에 이브는 열매를 베어 물었습니다.  - P352

우리는 지금 가부장제로 오염된 자본주의자들의
황폐한 정원에 갇혀 기업이라는 아버지 신에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우리를 진짜 염려하기라도 한다는 듯이요. 성찰도 깨달음도 없이 나른한 자기들끼리 낙원이라 부르는 이곳이 마치 진짜이기라도 한 것처럼요. 유혹적인 소비지상주의와 전체주의적 감시, 기업이 소유한 미디어, 공허하기만 한 셀러브리티 문화, 인터넷 관음증과 괴롭힘으로 뒤범벅된 이곳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착각한 채로 말이에요. 
이브는 이것들이 신기루임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진짜 정원, 태초의 정원을 갈구했어요.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가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이땅에 자기 질서와 폭력, 징벌을 심기 이전의 정원을 원한 거예요. - P358

이브는 급진적인 사람이에요. 
저는 급진적 radical이라는 단어가 좋아요. 왜냐면 그것은 뿌리를 찾아간다‘는 뜻이니까요. 여러분, 지금이 바로 급진적인 변화를 꾀할 때입니다. 우리 몸을 되찾고 춤추고 북을 울리며 일어날 때입니다. - P360

우리가 믿는 세상 때문에 사과하는 일은 이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보살핌받는 세상을 원해요. 기름은 이제 땅에 묻어두는 세상을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존중받고 그에 걸맞은 급여를 받는 세상을, 가장 소외되고 눈에 띄지 않는 이들에게 영감받아 그들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세상을 원해요. - P360

생명 나무를 기억하세요. 열매/버섯은 아버지의 정원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었어요.

결국 이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을존중하고 생명과 사람, 우리들의 어머니를 아끼고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고자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이브의 후손들이에요. 아프리카 흑인 어머니의 딸 이브, 혁명가 이브, 이브는 열매를 먹어 통제되고 만들어진 정원 아래 감추어진 태초의 정원을 찾아냈습니다. 진실을 향한 갈망으로 열매를 베어 문 이브가 우리가 가야 할 진짜 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녀의 유산을 이어가야 합니다. - P362

이브, 자유의 어머니이신 그녀는 우리를 이 세상으로, 우리의 세상으로 해방하기 위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그 망할 열매를 베어 먹읍시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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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적으로 학대받고 매 맞으며 친족에 강간 당하고 괴롭힘 당한 여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정의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아 감옥에 수감되고 대중에게 신상이 공개되고 일자리와 경력을 잃기를 바랐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가해자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했고요.  - P303

하지만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많은 여자는 그 무엇보다,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어떤 의미인지 가해자가 정확히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여자들은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 미래를 꿈꿀 수 있기 위해서 그 일이 가장 필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온전한 인간이자 실재하는 인간임을 가해자가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자신이 가한 폭력으로 인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기를요. 그들은 가해자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기가 저지른 폭력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가해자가 깊은 반성의 시간을 거쳐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 P304

저는 자기 죄를 진실로 대면하는 성범죄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범죄의 뿌리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난의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진짜로 사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요. 단순히 무지 때문인지 능력 부족이나 수치심 때문인지 혹은 남자라는 지위 때문인지 알 수 없어요. 거부인지 뻔뻔함인지 아니면 그저 남자들은 고통을 마주할 수 없는지. 그도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 자존심과 권력을 지켜야 한다고 교육받기 때문인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 P306

우리는 계속해서 기다려 왔습니다. 저는 용감한 어니타힐 Anita Hill과 크리스틴 블래시포드를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끌려가 유린당했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해 매주 수요일이면 집회를 하는 한국 ‘위안부‘ 여성들을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 또한 병들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사과받지 못한 
그들이 어떻게 평안히 잠들 수 있을까요?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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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내몰린 여자들과 그들을 돕는 남자>
부카부Bukavu, 콩고민주공화국, 2007년 8월

이 글은 이브 엔슬러가 콩고민주공화국을 처음 방문하고 난 뒤 <글래머Glamour>에 쓴 글이다. 뉴욕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드니 무퀘게 의사를 인터뷰한 후 그 일을 계기로 콩고에 초청받았다. 그가 세운 부카부 판지 병원(강간피해 여성들을 집중 치료하기 위한 병원)에서 게릴라들과 정부군, 유엔군에게서 구해낸 여자들을 인터뷰했다.

작가는 말한다.
˝내가 먼 부카부 판지병원에서 그랬든 당신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기를, 마음을 열어주기를, 함께 분노하고 구역질해 주기를˝(140쪽)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이 짧은 인터뷰글을 읽었다. 차마 다 옮길 수가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인간이기를 거부한, 짐승보다 못한 그들이...
지옥이 있다면, 지옥에서 콩고 여성들이 겪은 고통만큼만 영원히 영원히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나딘은 주위에서 혼자만 따로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저는 스물아홉 살이에요."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는 닌자Ninja 라는 마을에서 왔어요. 그곳은 평소에도 치안이 불안정해요. 저희는 밤이면 자주 덤불 속에 숨어야 했지요. 그러다 군인들에게 발각되었어요. 그들은 제일 먼저 저희 마을 수장과 그의 자식들을 죽였어요. 저희 마을에는 오십 명의 여자가 있었고요. 저에게는 아이가 세명, 오빠가 한 명 있었는데, 군인들이 오빠에게 저와 
성교를 하라고 했어요. 오빠가 거부하자 그들이 그 자리에서 오빠의 목을 베 죽였어요."
나딘이 몸을 심하게 떤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 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라고 믿기 힘들다. ... - P148

나딘은 기억의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듯 
내손을 꼭 붙잡는다. 나딘이 누군가에게는 이 이야기를 반드시 털어놓을 필요가 있고,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깊은 좌절감만큼 분명하다. 나딘은 눈을 감고 사실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이야기를 한다. "군인 무리 중 한 명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랐어요. 태아는 꽤 컸는데 군인들이 아기를 죽였지요. 그리고 아기를 불에 구워 저희에게 먹으라고 했어요."

놀랍게도 그 오십 명의 여자 중 목숨을 구해 달아난 사람은 나딘이 유일했다.  - P149

여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았다. 바로 잊히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그들이 겪은 고통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그저 귀 기울이기만해도 그들은 큰 위안을 얻었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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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진 2025-01-23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을 읽으며 소년이 온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은하수 2025-01-24 00:55   좋아요 0 | URL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힘없는 약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기는 이런 전쟁은 정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요!
 

<레이철의 침대> 크로아티아, 1994년
자그레브 외곽 난민캠프, 보스니아 난민 인터뷰

레이철의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난 뒤 내 여정은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인터뷰를 신성한 사회 계약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 혼자만 대상에게서 이야기와 사건, 감정을 취해서는 안 됐다.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오고 가야했다. 나 또한 나를 내보여야 
했다. 기꺼이 약해져야 했다. 더는 나만 보호할 수 없었다. 이야기 밖에서 서성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은 자연스럽지 않고 그 잔혹함과 끔찍함은 불편한 것이 맞다. 이제 나는 때로 인터뷰 도중에도 눈물을 흘린다. 내가 한없이 작고 무력하다고 느끼며 이를 숨기지 않는다. 과거의 방어적인 태도와 구별짓는 접근 방식은 내 안에서 죽었다. - P137

제가 녹아들 수 있게 해주세요. 뒤섞이게 해주세요. 갑옷처럼 단단한 저의 자아를 해방시켜 주세요. 원안에 받아들여지게 해주세요. 저를 앞세우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집 잃은 사람이,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더 많은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망하는 일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저를 더 숨길 수 있게 해주세요, 익명이 되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나의 차례, 나의 메시지, 나의 몫, 나의 작품. 나의 순간을 걱정하는 마음을 버리게 해주세요. 마침내 원 안에 앉을 준비가 되게 해주세요.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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