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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은미 작가의 이 소설집에 수록된「눈으로 만든 사람」,「나와 내담자」,「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3개 단편은 '폭력 생존기' 3부작, 혹은 '친족 성폭력 생존기' 3부작(오혜진 평론가)이다. 이 작품은 물론 '정희진의 공부工夫 10 월호'를 듣고 읽게 된 거지만 평소 최은미 작가에 대해 품고 있던 나름의 평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앞으로 최은미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게 될 테니까. 그리고 역시 정희진 샘의 추천은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 ㅡ배동근 님이 번역한 『고래가 가는 길』도 넘넘 멋진 작품이었지만 에세이와 학술적 고찰을 넘나드는 방대한 양의 작품을 짧은 리뷰로 갈무리 하는 것은 나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ㅡ 이것도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나하곤 안 맞아... 이랬다면 앞으로 의심을 하게 될 테니까 나만의 감정으로 맺은 독서와 인생의 친구를 잃게 되는 거라 많이 속상했겠지!
세 단편은 친족 성폭력의 경험을 쓴 작품이라는 점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세 작품이 마치 연작인 듯 겹쳐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읽고 나면 각기 세 편의 작품을 읽었다기 보단 이어지는 하나의 작품을 읽은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친족내 성폭력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이 그런 착각을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눈으로 만든 사람」의 강윤희와 「내게 내가 나일 그때」의 유정은 각기 교사와 유명 소설가로서 직업도 다르고 성인이 된 후에 그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이나 상처를 대하는 방식이 전형적이지 않은데도 그러하다. 이는 여성 화자들이 통과해온 파괴적인 경험을 서술하는 방식의 동일성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개의 글들에서 일상성을 벗어나는 끔찍한 사건이 서술되고 이로 인한 고통의 양상들을 서서히 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친족 성폭력 생존기' 3부작의 경우 언어를 통하여 고통을 오히려 확장하였고, "사건 후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깊이 새겨져 있는 흔적들을 더듬어나가며 세계에 대응하는 인물의 몸을 드러낼 뿐", 섣불리 개입하거나 동일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보면서 "전형적인 성폭력 피해자는 없다. 단지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말한 정희진 샘의 말에 결국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래서... 난 세 개이지만 하나처럼 읽히는 이 3 부작 중 「내게 내가 나일 그때」를 줄거리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내가 나일 그때」는 친족 성폭력에 대해 쓴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것임을 밝히고 난 후 결코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소설가 유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린 시절 고향 미산에 살던 시절의 창용이 오빠로부터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받게 되고 유정에게 언제 한 번 고향에 놀러오라는 말을 들으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거기다 남동생 유태가 막냇 삼촌인 재상이 삼촌 - 성폭력의 가해자 - 의 소개로 미산에 땅을 계약하러 가기로 하면서 누나인 유정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는데, 유정은 어릴 적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로 인하여 고향엔 절대 가지 않을 거라며 펄쩍 뛴다. 하지만 같이 동행하기로 하는데 고향 마을엔 가지 않고 고향 미산이 내려다 보이는 내린천 휴게소에서 창용이 오빠 가족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유태가 땅을 계약하러 간 사이 유정은 휴게소에서 창용이 오빠 가족들을 기다린다.
내린천 휴게소는 백미터 높이의 교각 위에 세워져 있는듯 보이는데 그곳에 서면 고향 미산의 마을이 바로 앞에 보이고 허공에 구름 다리처럼 떠있는 듯하면서 비행접시 같기도 하고 야광 삼각자 같기도 한 기이한 형태의 견축물인데다, 내부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뷰가 좋고 푸드코트, 어린이 놀이시설, 쇼핑센타 등을 갖추고 있어서 이 휴게소만 보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유정은 유태가 땅을 계약하러 가고 남은 시간 동안 해바라기 센터 선생님에게 보낸 것인지 회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문자를 쓰면서 요즘 자신이 힘들어하는 상황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자신이 일 년 전 이맘 때, 산문 한 편을 썼고 글이 실린 겨울호 문예지가 집 우편함에 도착하고 그러다 받은 글의 청탁 취지문에 적힌 문장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창작자로서 당신이 부딪히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유정은 자신을 가장 부딪히게 하고 굴절시켰던 것에 대해 쓰고 싶었고, 결국 자신이 썼던 산문이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글이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글을 쓴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자신의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 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기 이전."(247쪽)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 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247쪽)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248쪽)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유정은 자신을 충분히 방어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고 가해자는 어른 남성(재상이 삼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 일에 원인을 제공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일을 내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는 것도 납득하고 충분히 받아 들일 수가 있는데 "자신이 잘못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259쪽)고 "죄책감은 가까스로 넘어설 수 있어도 수치심은 아직도 거대한 벽이었다."(같은쪽)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러니까 나는 왜 이러냐구요, 선생님. 나는 왜요. 왜 나한테. 왜 나는."(259쪽) 혼자 있을 땐 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면서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고 "그때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았기 때문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258쪽) 그 곳 상담소에 전화를 하게 된다. 유정은 이제 더 이상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고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같은쪽)
그런데... 왜? 왜 아무도 유정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 가족이라면 사과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아무도. 심지어 엄마조차도 동생 유태도 재상이 삼촌도! 알았다면 알았던 대로, 몰랐다면 몰랐던 대로. 재상이 삼촌에게 당한 성폭력의 경험을 알고 있을 텐데. 유태는 왜 아무렇지 않게 재상이 삼촌을 말하고 만나고 유정에게 고향에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일까? 가족들 누구로부터도 그와 관련해서 어떠한 연락도 받은 적 없는 유정. 미투 운동이 불 붙은 듯 일어나 여성들의 언어와 폭력의 경험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었던 친족 내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다. 결코 쉽게 말할 수 없고 공개할 수도 없다. 결국 그 친족 내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두려움을 감수하고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될 지 너무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최은미 작가의 말을 잠시 요약해보자면, '친족 성폭력을 나의 경험이자 개인의 문제로만 갖고 있었는데 '가족내성폭력' 해시태그가 그 당시 트위터를 통해서 제기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걸 공적으로 발화하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계속 논의되는 장면을 보니까 나도 이것을 공적인 문제로 제기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정희진의 공부 10월호, 오혜진 평론가의 말 참조함)고 명백하게 작가의 변을 밝힌 적이 있다.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 유정은 작가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한 인물이다. 하지만 말이 넘치는 시대에 말을 하고 글을 썼는데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이다. 이것이 유정은 더 견디기가 힘들다. 창용이 오빠를 만났을 때 유정은 말한다. "내가 얼마 전에 술을 끊었거든요." ... 술을 먹으면 자꾸, 죽고 싶어진다는 유정의 말에 유태의 얼굴은 더 이상 웃지 않고 일그러진다. 유정은 휴게소의 난간을 붙잡고 서서 고향 미산을 앞에 두고 바라본다. 고향이 바로 보이지만 갈 수가 없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내린천 휴게소는 불안해서 조증과 극심한 울증을 동반하는 현재의 유정의 심리를 나타내는 중요한 메타포다. 유정은 지금 지독한 울증의 상태를 겪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유태를 자신이 얼마나 괴롭히고 싶어하는지, 얼마나 피 흘리게 하고 싶어하는지를 깨닫는다! "자신이 마침내 무너지는 그 순간에 가장 힘들어할 사람이 유태이길 유정은 바랐"(261쪽)던 것이다.
내가 이 단편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문제적이라고 생각한 말은 이것이었다. 바로 유태의 이 말...!
"누나는 한 번이라도, 소설보다 먼저, 가족들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265쪽)
"누나한테 누나 소설 말고, 다른 사람이 있어?"(같은 쪽)
유정이 이 말을 들었을 때 유태가 말하는 소설이 자신의 모든 소설을 말하는 것인지 작년의 그 산문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유정이지만 자신의 소설들로 인해서 가족들이 가해자가 되고 다치는 것을 결코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정신 머리를 가진 자식이면 저딴 말을 할 수가 있는 건가 싶어서 너무 너무 화가 난다. 남자라서 그런 일을 안 당해봐서 모르는 건지, 알려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너무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그러는 게 이해가 안되는 것인지 도통 그 가족들의 무반응을 용서할 수가 없는 거다. 유정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면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인데. 고향 마을에 같이 가자고 전화하는 사이라면, 최소한의 애정을 가진 누나라고 생각한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했을텐데, 단지 누나가 신경질적인 성격이어서 주위 친척들과 소원한 관계를 맺는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넌 동생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다. 나였다면... 이런 동생이어서 이런 엄마여서 인연을 끊어버리고 말았을까? 혼자 극심한 고통 속에 남겨지는 것은 또 얼마나 두렵고 끔찍할까. 유정이 원하는 것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새삼스럽게 사과를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유태를 계속 보고 엄마를 계속 보고, 단톡방에 올라오는 조카 사진을 보고 웃고, 딸 소은의 소식을 전하며 "몇 달에 한 번이라도 둘러앉아 웃을 수 있는 것이었다."(264쪽) 유정이 두려운 것은 가족들을 안 보게 되는 것, 무언가를 체념한 채로 가족들을 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것이고, 유정이 원하는 것은 어떤 분열도 겪지 않고 제정신으로 가족들을 계속 보는 것이다. 하... 정말 너무 어렵지 않나. 그러니 유정은 극심한 정신질환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을 떠나지 못하고 결국엔 자기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만다.
동생 유태의 저 말을 들었을 때 그동안의 노력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여기에 서 있을 수가 없다는 생각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버틸 수 없다고,이제 더 이상 한 방울의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고 느낀다. 반병의 와인만으로도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신을 오래도록 파먹고 있던 그 마음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유정은 알았다. 그래서 "알고 있어서, 유정은 계속, 계속, 소리조차 나지 않아서, 계속, 가슴을 쳤다."..."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계속, 가슴만 내리찍었을 뿐인데, 찍어버렸을 뿐인데,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찍어버렸을 뿐인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리고..."(269쪽) 유정의 이상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창용이 오빠의 아내, 베트남에서 온 디엔 씨였다. 머나먼 이국에서 행복을 꿈꾸며 떠나왔지만 나이차도 많이 나고 한국 여자들처럼 세련되지도 교육을 잘 받은 것도 아니면서 한국말 좀 할 줄 안다고 한국 여자들처럼 사치나 부리려고 한다는 타박을 받으면서 삶을 견디고 있는 디엔 씨.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창용이 오빠네 가족을 보면서, 유정과 디엔은 서로에 대해 잘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억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디엔 씨는 차를 타고 떠나면서 쓰러지는 유정을 낚아채 듯 차에 태워 미산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데려온다.
다음 날 새벽, 잠에서 깬 유정은 방 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저만치로 보이는 교각 기둥을 올려다본다. 유정은 동네를 산책 하면서 경기북부 해바라기 센터의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날을, 진술녹화실 테이블에서 문서 작성이 이루어졌던 첫 시간을, 정확하진 않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4학년 여름방학 이후였던 것 같다고, 가해자의 이름을 직접 적은 것도, 너무도 익숙하고 낯선 그 이름을 적었던 그 시간을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환갑 쯤이 되더라도 자신이 처음 센터에 전화했던 2019년 10월 4일, 그 가을을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신호가 가고 네, 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어떻게 찾아와야 하는지 적힌 웹 발신 문자를 받던 과정 모두가, 자신에게 얼마나 절실한 응답이었는지를" 기억하게 될 거라고...!
마침내 유정이 고향 미산 마을에 단단히 발을 디딘 것도 너무 좋았고 그 매개자가 오히려 억압받고 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가지고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베트남 여성 디엔 씨여서 더 좋았고, 어젯밤의 음주로 정신을 못차리고 뒷자석에 널브러진 채 자고 있는 유태를 태우고 돌아가는 길에, 맑은 정신으로 운전석에 앉아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며 힘차게 출발하는 그 모습에서 한층 단단해진 유정이 마침내 '내게 내가 나일 그때'를 향해서 출발하는 것 같아 또 좋았다. 결국 나의 상처는 그 누구도 대신 아파할 수 없고 내 스스로 일어설 수 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유정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표제작인 「눈으로 만든 사람」과 「나와 내담자」,「내게 내가 나일 그때 」 3 작품이 '친족성폭력 생존 3부작'이라는 말이 붙은 이유가 바로 피해 여성들이 피해자로서 전형적이지 않고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일 것이고 그래서 읽고 나서 마냥 가슴이 답답하지 만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작품을 앞으로 계속 계속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