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이크는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어느 여인의 삶에서 24시간>
이처럼 유일무이한 순간, 어쩌면 열정이라곤 전혀 모르던사람만이 이렇듯 눈사태처럼 돌발적이고 허리케인처럼 맹렬히 분출하는 열정의 폭발을 겪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럴 때면 평생 사용하지 않았던 힘들이 돌무더기처럼 가슴으로 떨어져 내리는 법입니다. 저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이 순간만큼 놀랍고 완전히 자지러질 것 같은 일을 체험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이때 저는 무모하게도 갑자기 제 앞에 무의미한 벽을 발견하고는, 열정적으로 그 벽을 향해 이마를
부딪쳐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지면 그간 아끼고 쌓아온 제 모든 삶 전체를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 P161

그런 다음 무엇을 했느냐고요? 마찬가지로 아주 무의미한일 외에 무슨 일을 했겠습니까? 제가 한 일은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정말 이야기하기 수치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스로에게나 당신에게나 어떤 일도 감추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때 저는 말입니다....... 저는...... 다시 그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와 함께 보낸 모든 순간을 다시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함께 있었던 그 모든 장소가 저를 강렬하게 끌어당겼습니다. 그를 데려온 공원 벤치, 그를 처음 보았던 카지노, 심지어는 그 싸구려 호텔까지도 그랬습니다. 저는 그저 단 한 번이라도 과거의 일을 다시 체험하고 싶을 따름이었습니다. - P162

저는 먼저 카지노로 가서 그가 앉았던 테이블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테이블에 있던 수많은 손들 중에 그의 손을 기억해 낼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기억하지만, 그를 처음 본 곳은 두 번째방의 왼쪽 테이블이었습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아직도 제 눈앞에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몽유병자처럼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더라도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찾았을 것입니다. - P163

저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홀을 가로질러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입구에서 테이블에 모여 있는 인파를 응시했을 때, 참으로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바로 그 자리에 제 꿈결 속에나 있어야 할 그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설마 열에 들떠서 환영을 본 것은 아니겠지요? 정말...... 그가 어제 꿈에서 본 것처럼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룰렛 공에 두 눈을 똑바로 고정한 채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이었습니다!
- P163

오늘 오후에만 해도 지극히 신성하게 맹세하며 교회의 나무의자를 꼭 잡고 있었던 그 손은 이제 다시 음탕한 흡혈귀처럼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습니다. 그가 도박에서 승리하여 엄청난 돈, 거액을 따게 되었습니다. 그가 앉은 테이블 위에는 게임 칩과 금화, 지폐가 수북이 쌓여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뒤죽박죽 아무렇게나 뒤섞인 돈더미 속에서 신경질적으로 떨고 있는 손가락들은 기분이 좋은 듯 손끝을 쭉 펴고 있었습니다. 손가락들은 지폐를 하나하나씩 잡아 접고, 금화를 돌리며 어루만졌습니다. 그러고는 돌연 그것을 단숨에 한 움큼 가득 잡고는 룰렛의 어느 네모 칸 한가운데 집어던졌습니다. - P165

한순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고통으로 인해 저는 벤치로몸을 던졌습니다. 벤치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멍하니 있자니 죽음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히려 황홀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말했듯이 고통은 비굴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은 삶을 향한 막강한 요구 앞에서 움찔하며 물러섭니다. 삶을 향한 요구는 우리의 정신에 내재한 죽음의 열망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육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감정이 부서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습니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 P172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것은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P175

지금쯤은 당신도 어째서 제가 갑자기 제 운명을 당신께 이야기하려 했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앙리에트 부인을 변호하면서 24시간은 한 여자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지을 수도 있다고 열변을 토했을 때, 저는 그것이 제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최초로 제 입장이 증명된 것 같아서 당신에게 고마웠습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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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남성성 - 19세기 영국의 젠더 형성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573
박형지.설혜심 지음 / 아카넷 / 201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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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총서이지만 어렵지 않다. 19세기 문학 작품들 속에 나타난 남성성을 주제로 그동안 알고 있던 내용들을 정리하는 느낌으로 읽을 수 있다.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그리고 아직 1 9 세기적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많은 사람들.... 하나도 남성적이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깨어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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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17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완독 축하드립니다! 저는 왜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지.. 큰일이네요.
무엇보다 제목만 보고 엄청 어려울 줄 알았는데 어렵지 않다 하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후훗. 별 다섯 책이라니, 기대됩니다!!

은하수 2025-01-17 12:15   좋아요 0 | URL
일단 시작하면 금방 읽어지던데요~~~
한챕터씩 읽어야지 하고 진행하니 진짜 1주일안에 끝나네요.
그리구 문학작품 속에 나타나는 남성성이다보니 더 재밌더라구요.
술술 읽히기도 하구요.
저보다 빨리 읽으실걸요 아마~~?!
 

과거로의 여행

"오셨군요!"
그는 팔을 거의 활짝 벌리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아, 오셨군요!"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밝아지며 놀라움을 넘어 기쁨으로 변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자태를 훑어보았다.
"안오실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그렇게 절 못 믿으세요?"
이렇게 살짝 책망하면서도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그녀의 파란 동공에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 P9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9년 전이다. 그 후 그들은 서로 만날 수 없는 먼 곳에서 떨어져 지냈다. 그렇기에 이번 재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했다. 맙소사,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지냈던가! 9년이라면 오늘 이 밤에 이르기까지 거의 4,000번의 낮과 밤이 지난 것이 아닌가! 정말 길고 긴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지만, 단하나의 생각만으로 그는 순식간에 그 최초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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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남성성:19세가 영국의 젠더 형성》

제 6 장 영국 신사되기 : 위대한 유산

 『위대한 유산』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쓴, 가장 유명했던 영국 남성의 빌둥스로만Bildungroman이다. 빌둥스로만은 한 사람의 성장 과정과 발전을 다룬 소설을 말한다.
이 작품은 영국 신사 되기의 전형과 같은 작품이다. 영국 신사가 되기 위해서 어떠한 덕목이 필요한지, 신사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지, 19세기 신사가 어떠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읽으면 된다.

난 영화만 봤는데 6장의 논지와 영화가 전혀 매치가 안되더라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아쉬웠다. 얼른 읽고 싶지만 개인적으로 민음사 표지도 맘에 안들고 판형도 넘 불편해서 다른 출판사의 eBook으로 구매하기로 했다. 일단 표지가 맘에 든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신사‘의 이미지는 영화나 작품을 통해 익숙하다. 그래서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이 6장이 재밌었는데 읽으신 분들이라면 더 신나게 달릴수 있을 듯!
하지만 읽다보니 작품 속의 핍이 깨달았던 사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자각이 퍼뜩 드는 건 며칠 전 읽었던 이웃님의 페이퍼로부터 연유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가 국내의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한 원천˝, ˝자신이 속한 영국 사회가 물질적인 것, 특히 식민지 자본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란 문장이 우리 사회가 제 3세계의 가난한 여성들의 착취로부터 혜택받은 것이라는 자각과 연결되면서 쉽게 잊히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 미즈 여사의 책『가부장제와 자본주의』도 읽어야지 했는데..
읽어야 될 책이 자꾸 늘어간다.



˝... [위대한 유산]은 <애써 부인하고 있지만, 부르주아 사회는 실제로는 하층민 사회를 근원으로 거기서부터 힘겹게 상승해온 것이며, 여전히 하층민 사회에 의존하고 있음을 추적>하는 작품이다.˝ (224쪽)


˝... 진정한 <신사>는 계급이나 지위의 개념을 초월한다는데 동의한다. 신사는 단순히 특정한 계급의 구성원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장점과 자질에 근거하여 그 명칭이 부여되었다.˝ (230쪽)


˝이 소설은 핍이 성인으로 성장해가면서 신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빌둥스로만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소년 시절에 품었던 신사다움에 대한 막연한 욕망이 필연적으로 범죄와 제국이라누 불쾌한 현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시인해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깨달음을 위해 핍이 밟아나가는 험한 행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가 국내의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한 원천을 힘겹게 시인하는 과정과 병치된다.˝ (241쪽)


˝핍이 배우게 되듯, 진정한 신사다움은 돈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결함과 성실함, 온정, 인간애와 같은 마음의 자질과 관련되어 있다. 진정한 신사는 말이 없고 자신의 지위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신사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디킨스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신사의 정의는 (...), 계급보다 도덕성에 기초한 신사다움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268쪽)


˝핍은 영국 남성성의 다양한 정의에 관해 고심하면서 자신이 <신사>에 대해 최초로 내렸던 정의, 즉 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신사는 무책임하고 파산 상태에 빠진 상류층 젊은이로서, 좀처럼 존경하기 힘든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핍과 허버트의 빚은 작가인 디킨스가 어린 시절에 빚 때문에 아버지가 투옥되었던 경험과 관련하여 겪은 가장 큰 충격에서 비롯된, 그들의 삶에 대한 심오한 질책으로 이해해야 한다.
소설 끝부분에 이르면 핍은 실제로 경제적 능력겨ㆍ 상관없이 심정적으로는 진정한 신사이다. 막연한 상상이 점차 현실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핍은 자신이 속한 영국 사회가 물질적인 것, 특히 식민지 자본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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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17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릇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닫게 되는것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읽을게 더 많아지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민음사 로 [위대한 유산] 읽었는데요, 그 책은 여러가지로 읽기를 잘한 책이었어요. 책의 재미도 상당했지만(마지막엔 울었어요) 그 책 읽고 나니 다른 책 읽는데 도움이 진짜 많이 되더라고요. 외국 작품 읽다보면 ‘핍‘이나 ‘해비셤 부인‘이 진짜 많이 나오거든요. 그럴 때 각주를 읽지 않고 바로 떠올릴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후훗.

은하수 2025-01-17 12:17   좋아요 0 | URL
읽고 싶은 책은 쌓이는데 못따라가는 제 속도가 심히 안타깝네요 ㅠ

오늘 도서관 가서 바로 빌려왔답니다. 어쩐 일로 동너ㅣ작은도서관에 1,2권이 다 있는 이런 뜻밖의 행운이 다 있네요.
재밌다는 말씀들 많이 하셔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5 장 <제국의 온상>: 퍼블릭 스쿨과 남성성

19세기 영국 퍼블릭 스쿨은 대표적인 9개 학교인 이튼, 윈체스터, 웨스트민스터, 차터하우스, 세인트 폴스, 머천트 테일러스, 해로, 럭비, 슈루즈베리를 지칭하며, 흔히 그레이트 퍼블릭 스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논란의 여지없이 중.상류층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19세기 중엽부터 기존의 고전 중심 교육에 대한 강한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산업화와 새로 형성되는 중산 계층의 교육열, 나아가 제국 경영이라는 문제가 틀에 박힌 커리큘럼에 근본적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몇몇 의식있는 교장들이 교육환경과 조건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제 5 장에서는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이라는 작품을 예시로 하여 전개된다. 이 작품은 입학을 앞둔 8세의 아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쓴것으로 알려졌는데, 우연한 기회에 출판을 하게 되어 큰 인기를 끈다.

작품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 소년이 집을 떠나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노력하면서 자신이 꿈꾸던 존경받는 학생이 되고, 이후 그 학교를 방문하여 자신을 성장하게 한 학창 시절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전형적인 성장소설,
즉 빌둥스로만Bildungroman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세기 퍼블릭 스쿨의 생활상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했다는 점, 이 소설을 통해 영국의 소년들 사이에 새로운 남성상이 정립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을 떠난 소년들은 학교라는 낯선 공간에서 모험을 펼치고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상급생들로부터의 괴롭힘과 고문, 끊임없는 고자질, 규율과 만연한 체벌, 어렵고 지루한 공부 등은 교육기간 내내 이어진 요소들이었다. 이런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숭앙된 것이 <절제>이며 이는 빅토리아 시대 남성상의 큰 줄기로서 한편으로는 <신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를 겪을 소년들의 삶을 묘사하면서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접촉에 대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오히려 소년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와 감정을 부각시키는데 상급생과 신입생의 관계를 넘어서는 존경과 애정, 동지애의 감정들을 부각시켜 나타냄으로써 여성의 부재에 대한 차선책인 동성애 대한 사랑이 소년들을 지배하는 주된 감정이었음을 암시한다.

한편으로는 어린 소년들이 여러 측면에서 불안정한 정서적 상태에 놓여있었음을 시사한다.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시기에 멀리 떨어져 생활해야했던 정서적 박탈감, 엄격한 규율의 남성적 세계에서 살아남이야 한다는 압박감, 나아가 강렬한 성적 욕망을 경험하는 청소년기의 욕망과 접촉이 차단되어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기회가 박탈당한데서 오는 불안정함이 결국 정신적 미성숙으로 이어진다는 주장도 한편으론 일리있어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당시 동성간의 사랑이 이성애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남성에게 사랑이란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에서 반드시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와 이성애가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다른 종류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 말이다.
남성적 사랑은 이성애를 특징짓는 육체적 관계보다 ‘정신적 교감‘이라는 색채가 강한 개념이었으며, 정신적 사랑이란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오히려 높은 도덕적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남성들 사이의 사랑은 원칙적으로 섹스를 배제한 이성애와는 병립할 수 없는, 한 차원 높은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고양되었다. 그러나 동성애가 성적이든 아니든간에 ‘여성혐오‘라는 또 다른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남성들만의 공간이었던 퍼블릭 스쿨에서의 인간관계는 계속 이어져 대학, 군대, 교회, 의회, 클럽, 그리고 군대에 이르기까지 <공적인> 영역에 귀속한 남성의 행동반경 전체에 적용되었다. 19세기의 성공한 많은 남성들이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거나 남성들 사이에서 평생 지속되는 우정은 마치 부부와도 같이 늘 함께하는 유명한 남성커플들을 만들어내었는데 어찌보면 이 시대의 당연한 현상으로 자리잡은 것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퍼블릭 스쿨의 생활은 자신들이 <특권층>임을 자각하는 과정이다. 집을 떠나 학교로 가는 여정에서 톰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하층민에게 함부로 대하는 방식과 그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 몇 푼 쥐어주며 해결하는 방법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가를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다양한 행위들의 연습장이기도 하다. - P217

<특권층>이라는 자각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최고라는 자기최면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층민을 타자로 삼아 스스로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기도 하고, 심지어 학교 내의 집단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자 한다.  - P217

심지어 제국 경영을 위해 스포츠를 확산시킬 때도 인도에서 하는 크리켓은 특별히 영국의 퍼블릭스쿨 출신들과 인도의 고위 계급 간의 동맹 allegiances을 위한 매체의 성격이 짙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를 도덕적 목적으로 보고자 했던 상류층의 아마추어리즘은 19세기 말 프로페셔널리즘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고자 하는 중. 상류층의움직임이 그토록 맹렬했던 것이다. - P219

남성적 제국주의의 대중화 속에는 계급과 성별을 초월해서 대중들이 주인공 톰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자기최면의 미학이 숨어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퍼블릭 스쿨은 사실 무척 배타적인 엘리트집단이었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톰 브라운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톰 브라운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성찰하기보다는 스스로가 이미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자각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계층과 성별을 초월해 <영국인> 모두를 우월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제국이다. 그리고 식민지인들은 바로 수많은 낙오자, 즉 바람직하지 않은 수많은 남성성의 정형으로 이미 설정되어 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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