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식민지의 영국인: <퍼포먼스>로서의 남성성

식민지 영국 남성의 남성성에 대한 심리를 잘 보여준 두 작품인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어둠의 심연>을 들어 설명을 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읽진 않았지만 예전에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영화로서 티비에서 자주 방영해 본 기억이 남아있다. 아무튼 읽으면서 머릿 속에 <어둠의 심연>이 떠올랐는데 다음 페이지에 바로 나와 역시... 하며 읽었다.




... 식민 담론으로서 이상적인 제국주의자의 이미지를 먼저 식민 지배자가, 그리고 나중에는 흉내내기를 통해 피지배자가 차례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식민 모방은 이중의 행위라 볼 수 있다. 한편 실버만의 이중 모방은 식민 피지배자를 모방의 원형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기지시적인(自己指示的, self-referential) 성향의 이론으로서,
모방의 대상과 방향에서 기존의 개념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 이론에서도 근본적으로 원주민들은 영국인 식민 지배자를 모방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이 영국인들을 모방하는 그 순간, 이미 영국인도 피지배자인 원주민의 행위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 P67

로렌스 T. E. Lawrence의 자전적 소설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에 대한 논의에서, 실버만은 흉내내기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비틀기에 관해 설명하며, <아라비아에서 로렌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아랍인들에게] 재생산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태도, 풍습, 의상 등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한다. 로렌스는 아랍인보다도 더 아랍인처럼 되고 싶어한다. 만일 아라비아 의상을 갖춰 입고자 한다면, 최고의 것을 선택하라고 그는 조언한다. 이어서 로렌스는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의 게임에서 아랍인들을 거꾸러뜨리며 승리를 거두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 <유럽인들이 아랍인들의 게임에서 거둔 아랍인에 대한 승리>는 마치 지상 최고의 목표인 것처럼 여겨지며, 로렌스의 흉내내기 역시 그런 의도를 숨기고 있다. 실제로 <만약 그들(아랍인]을 능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완벽한 성공을 향해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로렌스는 기술한다. 로렌스는 <스스로에게 역할 모델의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아랍인들이 그를 모방하게 되면서, 로렌스는 아랍인으로
가장한 채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 P67

아랍인보다 더 아랍인처럼 된다는 것은 분명 문제의 여지가 있다. 아랍인에게 동화되지 않은 순수한 <로렌스>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로렌스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라비아의 영향력에 대한 감수성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 
1910년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로렌스는 자신이 아라비아의 환경에서 받은 인상을 사진 찍기 원리를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자신에게 투사된 모든 대상들을 검은색과 흰색으로 인화하는 민감한 감광 필름으로 스스로를 비유한다. 실버만이 지적하듯, 로렌스는 전통적으로 여성과 식민 피지배자가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점에 스스로의 위치를 정한 것이다. 문제는 그가 강력한 제국주의자의 이미지와는 상치되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의도성이 결여된 영국 백인 남성으로서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지배자의 정체성을 지닌 채 그 공간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 P68

무엇보다 원주민들은 실버만이 지적하고 있듯, <항상 본래 모습으로 귀환하는 속성, 즉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로렌스는 궁극적으로 원래 자신과는 다른 모습과 위치에 머물고 만다. - P68

필자의 견해로는 <아랍인보다 더 아랍인처럼> 되고자 하는 로렌스의 흉내내기 전략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권력에 대한 실패를 감추기 위한 방어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랍인과 자신 사이에 거리 두기에 실패한 로렌스는 유럽인으로서 흉내내기의 원형 모델이 되어 아랍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붕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아라비아의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 P69

19세기 영국이 인도에서 제국주의적인 권력과 존재의 전형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이를 위한 퍼포먼스 모델은 강력한 남성성을 외부로 발산할 수 있는 방법을 토대로 한다. 오히려 타자에게 동화되고마는 우를 범한 로렌스와 달리, 성공한 식민 지배자는 자신과 원주민 사이에 거리를 두는 모방 거부 성향을 가진다. 
이상적인 제국주의자가 되지 못한 로렌스의 실패는 이미 19세기를 지나 20세기초를 살았던 그의 시대적 변화에도 원인이 있다. 19세기 말에는 제국주의 전략에 치명적인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로렌스 자신이나 조셉 콘라드 Joseph Conrad의 「어둠의 속 Heart of Dareness」에 등장하는 커츠의 예에서 드러나듯, 식민 사업의 <실패>나 원주민과의 동화, <원시로의 회귀going native>를 그린 소설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 P69

19세기 중반 식민지 인도에서 제국주의의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던 영국인들은 정체성과 행동, 자기 재현 전략을 규정하고 구성하는 방식에서 성 역할에 따른 퍼포먼스에 의존하였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영국 남성들의 남성성과 제국주의자로서의 우월성은 반복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식민 주체에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대단히 성공적이고 지배적이어서 제국주의를 통해 새로이 구성된 그들의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 P69

한편 남성으로서, 그리고 제국주의자로서 그들이 채택했던 가면을 쓴 퍼포먼스들은 여성과 원주민에 의해 또 다른 가면을 쓴 퍼포먼스를 일으켰다. 
리비에어가 가면극으로서의 퍼포먼스로 규정했던 여성성과, 바바의 식민 흉내내기는 근본적으로 억압받는 자를 중심으로 한 퍼포먼스이자 모방이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은 이른바 피지배자가 모방할 수 있었던 표준이자 모델로서의 영국 남성 제국주의자들의 정체성이 결코 고정되거나 불변하거나, 영속적이지 않으며, 반복과 강화로써 구성된 퍼포먼스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다움을 갖추게 되는 리비에어의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 역시 그들의 각본대로 남성성을 연기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원주민들의 모방 대상이 되는 제국주의자들 역시 권력의 가면을 쓰고 자신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서 백인 남성 중심의 인종 담론과 성의 지배 담론은 결코 분리된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가부장적인 성 담론은 항상 다른 권력의 위계질서를 구성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고, 이 두 지배 담론의 행위는 영국 남성이 인종적, 성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수행하였던 동일한 성격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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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10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어둠의 심연 둘 다 보지 않았는데 그 둘을 들어 설명한다니 어쩐지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은하수 2025-01-10 08:14   좋아요 0 | URL
걱정 마세요~~ 1장 끝부분에 잠깐 나오구요.
그동안 읽으신 영미문학만으로도 충분하십니다. 쉽게 이해하실 거예요~~^^
 

[제국주의와 남성성]
제1장 식민지의 영국인: <퍼포먼스>로서의 남성성


1. 남성성과 퍼포먼스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역사와 영국적 남성성의 형성 관계를 살펴보는 이 책에서 본 장은 먼저 식민지 인도에서 영국 남성의 행동과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최근 인문학의 연구들은 정치적 또는 역사적 운동의 거대 담론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개인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접근들은 특히 거대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서 나타나는 심리 현상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P39

하지만 인도를 향한 영국의 식민 지배 욕망은 대단히 강렬했으며, 이를 위한 식민이데올로기 담론의 생산과 유지는 매우 체계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의 식민 전략은 인도에 있는 영국인들에게 식민 통치에 부합하는 제국주의자가 되도록 강요하였다. 즉 장교, 상인, 의사, 성직자와 같은 영국 개개인들은 제국주의의 정치적, 사회적 정책들이라는 좀더 큰 틀 속에서 그 정책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 P40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도록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영 제국의 이미지 강화에 부합되는 범주나 규범적인 행동의 기대 수준에 맞춰 자신의 태도를 적절히 결정해야 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인종과 계급 또는 성 정체성에 대하여 그다지 뚜렷한 자의식이 없던 영국 소년이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곧 자신이 영국 백인 남성이며 동시에 지배 엘리트계급의 일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 P40

샤이어스가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한 가부장적 남성성을 남성 권위의 추락과 권력의 불안정에 대한 상쇄 반응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인도에서 나타난 영국 남성성 역시 1857년 인도 항쟁 이후 식민지에서 영국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제국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사실에 따른 반동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권력자가 권력을 상실했을 때 유발되는 심리 현상에 대한 이 이론은 인도에서 제국의 권위를 위협받게 된 영국인들을 논의하는 데 유용하다. 영국인이 인도에서 지배집단으로서의 엘리트 이미지를 유지하려면 그러한 목적을 위해 구성한 남성성을 통한 <퍼포먼스>가 필수적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남성성은 곧 영 제국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아개념과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영국 남성성>은 그 자체로서 <퍼포먼스>였으며, 그 퍼포먼스는 19세기 인도에서 영 제국의 위상이 변화하면서 가장 극명하게 실천되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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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01-09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시작 안 했는데 올려주신 문장들이 무척 흥미롭네요. 저도 얼른 달려봐야겠어요!

은하수 2025-01-09 15:32   좋아요 1 | URL
얼른 시작하세요~~~
저도 이제 막 1장을 읽은 참이라...
근데 문학작품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어둠의 심연>을 예로 들어주니 정말 이해가 쏙 되면서 재밌어지네요^^.
 
출근길 지하철 - 닫힌 문 앞에서 외친 말들
박경석.정창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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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투쟁이라."

이런 말을 책에다 이렇게 대놓고 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의 박경석 대표를 처음 본 것이 아마도 2021년 12월 3일의 저녁 뉴스에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날 뉴스에서 본 영상은 휠체어에 타고 있는 전장연 장애인들이 지하철 승강장에 대거 등장하여 지하철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급기야 바닥으로 쓰러지거나 버티는 장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끌어내는 장면들이었다. 처음 보는 장면이었는데도 그 당시 몹시 화가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또 잊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일부나마 알게 된거지만 2001년부터 지금까지 박경석 대표와 장애인들이 투쟁으로 얻어내려 하는 것들은 비장애인이 보기엔 나무도 당연하고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권리들이어서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많이 개선이 되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

이들이 그동안 다양한 의제를 놓고 투쟁을 해왔다는 것은 조금만 검색을 해봐도 여러 곳에서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사실 너무 많았다. 기사가 차고 넘쳐서 다 읽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 동안 정말 다양한 의제들을 걸고 싸워왔잖아요.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서부터 교육권 보장,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탈시설, 자립할 권리 보장, 노동권 보장 등등등. 이런 것들은 대부분 지금 당장 법이나 제도를 바꿔내고, 예산을 적절한 수준만큼 확보하는 거가 단기적 목표긴 하죠. 그런데 그게 절대로 끝이 아니에요. 이 투쟁의 의미는 사실 더 넓은 차원에서도 발견이 되는 거거든.(329쪽)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침해당하면서 살아온 장애인들의 투쟁 방식에 우리는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투쟁 방식이 불법적인 건 사실이니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결코 몰랐다. 비장애인인 나라는 사람이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숱한 불법을 저지르고 비장애인들의 일상을 멈춰세우는,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세우고 버스에 탈 수 있게 해달라며 버스 앞을 막아서는 등의 이런 극단적이고  투쟁 방식 말고 좀 더 온건하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할 수는 없는 것인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박경석 대표의 대답은 "이렇게 합법적이고 착한 장애인들이 어딨어!"이다.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능력 없다고 시설이랑 방구석에 가둬 두고서, 교육도 못 받게 하고, 노동도 못 하게 하고 사회적 관계를 다 끊어 놓는 건 폭력 아닌가요? 뭐, 잘 돌봐준다고 말만 하면 땡인 건가? 이거 말고도 그래. 장애인들 싹 다 빼놓고서, 비 장애인만 태워가는 대중교통은 폭력이 아니에요? 그 상황을 유지하는 불의한 정권은 폭력이 아닌가? 국가가 헌법의 기준을 지키지 않는 건 어떻고, 그런 국가의 행태를 방관하고서, 그냥 누가 죽어나가건 말건, 권리를 침해 당하건 말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동참해서 살아가는 것도 사실은 어마어마한 폭력일 수 있어요.(234~235쪽)




우리들의 당연한 일상, 지하철이나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출근을 하고 누군가와 만나 어딘가의 장소에서 담소를 나누고 음식과 술을 나누고 운동을 하러 가기도 하고 길 가다 눈에 들어오는 예쁜 장신구를 사기 위해 가게엘 들를 수도 있고 집으로 돌아올 땐 내키는 대로 택시를 탈 수도 버스를 탈 수도 있는 평범한 일상. 나는 매일 어딘가로 출근을 하고 일을 하는 일상을 살고 있진 않지만 2001년의 그 영상을 보면서도 충분히 부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끌어내어지는 그들을 보면서 내 마음 속에 뭔지 모를 모멸감이 차오르는 기분... 그동안 내가 정말 아무 것도 알려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 끝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가해자가 된 기분...




그 동안 거의 1년을 일주일에 두 번 씩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물 속이 너무너무 무서워서 좀 극복을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고 언젠가 파타야 여행 갔다 수영장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영을 즐기는 외국인들을 보며 부러웠던 기억이 있어서 용기를 냈다. 1년 가까이 다녔지만 일주일에 두 번은 너무 부족하기도 하고 나를 앞질러 가는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속상하기도 하고... 1월부턴 매일 해보자 싶어 등록을 했다. 문제는 내가 차가 있지만 화,목만 사용을 한다는 점. 어쩔 수없이 나도 엄마인지라 출퇴근이 약간 불편한 아들에게 3 일 간 차를 양보하고 있다는 것이 매일 수영의 걸림돌이었다. 아침엔 좀 이르지만 아들이 주민자치센터에 내려주고 가고 끝나면 부랴부랴 씻고 나와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안 그럼 1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 도시 외곽으로 이사를 오니 이런 점이 불편하다. 하필 이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동권이라는 말조차도 생소한데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버스를 타는 일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나에겐 약간 불편한 경험이긴 하지만 충분히 즐겁게 이어갈 수 있다. 문득 버스를 타고 다시 생각한다. 저상버스이긴 하지만 장애인 휠체어는 어찌 타는 건지... 저상이긴 하지만 장애인 휠체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타려면 뭔가가 더 필요해 보이는데 그런 시설이 되어 있는 건지,  혹은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면... 장애인 활동 지원가가 늘상 도움을 주고 있는지... 저 턱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의자들과 높은 단차의 좌석 배치는 과연 장애인들에게 최소한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인지... 버스 창밖을 내다보면 참... 한숨이 나온다. 가끔 정말 절실하게 너무 걷고 싶을 때가 있는데 이 도시 외곽의 우리 동네는 마땅히 안전하게 산책을 하거나 걸을만한 공원도 정비된 개천변도 없다. 그럼에도 걸으려면 걸을 수는 있지만 군데군데 가다보면 느닷없이 인도가 없다!!! 좁디좁은 인도는 전봇대가 떡 하니 길을 막고 있다. 이러면 휠체어 타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닐 수가 없지 않나? 정말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나는 그동안 장애인들이 활동 지원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장애인이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니 최소한의 교육은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을 받고 있는 줄 알았다. 거기다 노동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너무도 먼 이야기라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다. 장애인들도 일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단 것은 물론 알고 있었지만 박경석 대표가 말하는 정도의 노동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왜 길에서 그동안 장애인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의문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지만 요즘은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도 정말 많은데 왜 내 눈엔 안 띄는 건지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에서 살고 있었던 것일까? 장애인들도 분명 사람이고 대한민국 국민인데 정말 정말 최소한으로다가 이동권조차도 자유롭게 누리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고 웃고 떠들고 함께 하는 일조차 힘들고 심지어 이런 이동권조차도 보장이 되지 않으니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더더구나 힘이 들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니 당연히 노동을 할 수도 없고 자립을 할 수도 없다. 장애인도 사람인데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하고 싶지 않겠는가. 시설에서 한방에 여러 명이 기거를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정책이 수립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개인의 사생활이란 것도 없이 단체 생활을 해야만 하고 이러니 자립이니 탈시설이니 하는 의제를 두고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 말이다. 모든 것이 안되는 첫째 이유는 바로 돈!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눈에 보이지 않으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고 그러니 항상 우선 순위에서 밀린다. 정말, 목숨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걸까. 




     우리가 일상을 멈춰 세우면서 싸워온 건요, 바로 이 일상의 당연함이라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이 사회에다가 딱 하고 보여주기 위한 거예요. 그 일상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서 그냥 살아 가는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줘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죠.(235쪽)




     저는 노동이 궁극적으로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해요.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건 결국 자기를 둘러싼 관계를 계속 변화시키는 과정이죠.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들은 이 일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분명히 다시 확인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자기 확인이란 건 곧 이 사회가 중증장애인이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되죠. 그 사람의 존재부터 해가지고, 이 사회의 조건에 대해서까지 다시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거야.(180쪽)




     직접행동이란 건요, 언제나 정세를 잘 파악해야 해요. 어디서 투쟁을 할 건지 장소를 계속 같이 탐색해가야 하는 거야. 지금 이 지하철로 내려가야 할 때인지, 아니면 시청을 점거할 때인지, 광장에서 집회 신고 내고 집회를 할 것인지, 이런 것들. 선거철 되면은 선거철에 맞게 행동을 조직해야 하고, 어떤 법 통과시켜야만 하는 때는 뭘 해야 하고 이런 것들 있잖아.(208쪽)




     이렇게 세상을 들여다보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진짜 중요할 수밖에 없는 게요, 장애인에 대한 무감각은 진짜 말 그대로 장애인이 잘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서 그런 거예요. 사실은 우리 주변 곳곳애 있는데, 완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게 만드니까 아예 신경도 안 쓰게 되는 거지. 감각한다고 해봐야 기껏해야 동정과 시혜를 발휘할 대상쯤으로만 감각하는 거 아닌가? 제가 정확하게 말을 할 수 있는데요, 이런 거는 동정과 시혜 베푸는 사람들한테나 따뜻함의 감각을 줄 뿐이지, 장애인의 존재와 목소리 자체를 감각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께네 이것도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을 해봤자 여전히 일종의 장애인에 대한 무감각 상태인 거야. ... (315쪽)





장애인 운동을 하면 할 수록 더 어렵고 복잡한 사연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박경석 대표의 글을 읽을 수록 실감할 수 있었다. 대표 본인조차도 장애를 입기 전의 봉사활동과 장애를 입은 후 복지관 직업훈련 과정에서 이 사회에 이렇게나 많은 장애인이 있었다는 거에 놀라고 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을 감각하는 수준이 아예 달라졌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장애인으로서의 차별을 겪을 때 자신보다 중증인 사람이 흔치 않던 시절인데 경증인 사람들도 다들 차별을 겪고 있었다고 말한다. 노들야학에서 본격적인 장애인 활동을 하다 보니 뇌병변장애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또 경증인 사람과 완전히 다르단 점, 경증인 이들의 욕구와 사회와의 갈등 양상도 지체장애인과 어머어마한 차이가 있는데 뇌병변 장애인과 비교해보면 진짜 또 빙산의 일각! 

그러니까 그동안 감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어마어마하게 다가왔고 2010 년 경부터 발달장애인을 본격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중증이면서도 탈시설한 장애인들을 점점 더 많이 만나게 되면서 이들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매번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이 될 수 밖에 없단 걸 깨닫게 되는 과정의 반복 또 반복... 그런데 청각, 시각 장애인은 또 다르고... 

이들이 다들 속도도 다르고 정치 성향도 다르고 욕구도 다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도 다르기 때문에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다 다를 수 밖에... 장애인이니까 하나다! 하고 뭉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지 알아가면서... 그럼에도 지지고 볶고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지원해가면서 뭉치게 되는 과정을 또 하나하나 겪으면서 조금씩 이루어내는 박경석 대표의 구심점 역할은 지금도 끝난 게 아니라는 거다. 비장애인이었다가 사고로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되고 필연적으로 장애인 운동을 하게 된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말하는 박경석 대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란 거를 계속 고민하는 그는 비장애인도 장애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당사자가 될 수 있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란 것을 계속 고민하는 한에서는 이 사람들의 입장이나 의견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유튭에서 가끔 보는 #도깨비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상이 있다. 은탁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교실에 삼신 할머니(이 엘리아)가 새빨간 정장과 구두를 신고 풍성한 목화 꽃다발을 들고 등장한다. 무심한 담임은 졸업생들을 축하해주라며 교실 밖에서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들어오게 하는데 사고무친 은탁인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한 채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새빨간 정장을 입은 삼신 할머니가 은탁이를 꼭 안아주며 너 점지할 때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러곤 돌아서서 담임에게 다가가 말한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수는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그 뒤에 무심한 담임은 참회의 울음을 터뜨린다. 설화에서도 삼신할머니가 꾸짖으면 바로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선생은 많지만 스승은 별로 없다는 댓글을 읽은 것이 생각나는데... 

나는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되새긴다. 너무 어이없을 수도 있는 여러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든다. 삼신 할머니에게 우리도 분명 꾸지람 들을 거라는 생각도! 이 세상 누구나 삼신 할머니가 점지하실 때 행복하셨을 거다. 그래서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다 더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 옆에서 이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는데 무감각하면 안되는 거라고. 그 사람들도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우리가 바꿔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뭐 언제까지 따뜻하게 감싸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만 하면서, 자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도 돈 남으면 대강은 좀 돌봐줄까 이럴 건데요. 그래선 안 되겠죠. 자본주의적인 노동 생산성 기준으로 무능력하다고 버려지는 사람들, 약해지는 사람들, 늙어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노동의 관계를 새로 맺어가지고,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관계 맺어 갈 것인가, 이런 거를 국가가 잘 지원을 할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거야.(186쪽)


중증장애인들에게 최우선 적용되는 권리중심공공일자리 같은 거를 시작으로 해가지고 공적 차원에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일자리, 권리를 생산하는 일자리들을 많이 만들어놔 봐. 물론 임금도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주고, 그러면은 모두가 나이 들어서도 지금보다 훨씬 더 의미 있게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 취급 안 당하면서.(187쪽)


활동가가 버티려면 일단 운동이란 게 지속 가능 해야 하죠. 그런데 이 지속가능성이란 건 절대로 우리 투쟁이 당장 어떤 성과를 냈는가에만 집중했을 때는 잘 마련이 안될 거예요. 성과가 전부라고 하면, 우리 투쟁 요구 관철 안 되면 좌절해서 관두고, 관두고 해버릴 거 아냐. 저는 당연히 성과도 중요하지만은 그게 당장 안 되더라도 조직 과정에서 고작 한두 명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게 된 거, 그 사람들의 존재가 거리의 정치 과정에서 조금씩 전환되는 거에 더 큰 의미를 둬야 한다고 봐요.

저는 장판을 넘어서 지금도 거리에서 열악한 상황 견뎌가며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에 힘쓰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이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잘 버텨주길 바라요. 그 버티는 과정 하나하나가 아무리 비루하고 작아 보여도 사실은 그게 엄청 소중한 거란걸 같이 깨달아 가면서요. 진짜 아래로부터의 정치란 건 이미 당신들이 꼴아박고 있는 그 거리에서 어마어마하게 이뤄지고 있는 거고, 사회와 정치의 근본적인

저는 장판을 넘어서 지금도 거리에서 열악한 상황 견뎌가며 아래로부터의 조직화에 힘쓰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이 많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잘 버텨주길 바라요. 그 버티는 과정 하나하나가 아무리 비루하고 작아 보여도 사실은 그게 엄청 소중한 거란걸 같이 깨달아 가면서요. 진짜 아래로부터의 정치란 건 이미 당신들이 꼴아박고 있는 그 거리에서 어마어마하게 이뤄지고 있는 거고, 사회와 정치의 근본적인 변혁의 씨앗이라는 것도 바로 그 작은 데서부터 발아할 수 있는 거니까요. 여기만이, 사회에서 목소리도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진지예요.(217~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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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남성성> 박형지.설혜심 지음


이 책은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남성성이 어떻게 정의되고 작용했는가를 고찰해보는 작업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영제국의 융성기에 젠더가 제국주의의 주요 도구로 사용됨과 동시에 중대한 산물로 자리 잡게 되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다.(15쪽)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에서 비롯되는 <빅토리아 시대>라는 말은 종종 19세기를 문화적으로 광범위하게 통틀어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1837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6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왕위를 지켰으며, 여왕이 서거한 1901년 무렵에는 전 세계의 4분의 1이 공식적으로 여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고 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상징하듯이, 빅토리아 여왕의 집권 말기까지 대영제국은 19세기 세계의 중심축을 형성하였다.


<탈식민>이나 <제국주의>는 사실 정의하기 어려운 용어들이다. 엘러키 보우머Elleke Boehmer와 같은 비평가는 <제국주의imperialism>와 <식민주의colonialism>을 구분한다. 보우머는 제국주의를 <한나라가 다른 영토에 대한 권한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 권한은 무력뿐만 아니라 허식과 상징을 통해 표현된다>고 설명하며,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특히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nation-state의 팽창과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식민주의는 <제국의 권력 강화와 관련된 영토의 점유, 자원의 착취 및 개발, 또한 점령한 영토의 토착민을 지배하려는 시도>로 보았다. 

요컨대 보우머에 따르면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영토에 대한 권한이나 권력을 주장하는 것이 제국주의이며, 식민주의는 그 나라에 대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련의 실질적인 실천으로 정의된다.   


역사학의 측면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식민주의보다 나중에 출현한 것으로서, 더욱 일반적이면서 폭넓은 개념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식민주의는 한 독립국가가 그 국가에 속하지 않는 한 지역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여 그 지역 주민들을 지배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한편 제국주의는 국가들 간의 종속적 관계의 성립과 유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공식적인 영토지배를 포함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식민주의와 다르다. 제국주의는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한 모든 힘과 행동을 포괄하는 개념이고, 거기에는 비단 식민지의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국제정치까지도 포함된다. 혹자는 식민주의를 제국주의가 변화하는 여러 단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형태인 특별한 단계로서 이해하여 식민주의를 제국주의에 귀속시켰다.

필자들은 <탈식민>에 관한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식민주의보다 광의의 제국주의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19쪽)



언제나 이러한 종류의 학술서들은 서문이 제일 어렵다. 하지만 역시 또 언제나 그러하듯 한 번 읽어서 어려우면 두 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그러면 내용 이해도 잘 될 뿐만 아니라 비로소 문체에 익숙해져  계속 읽어나갈 수 있게 된다.


최근 역사학은 영국 제국주의의 위계질서가 계급과 인종뿐만 아니라 젠더 관계에 기초하고 있었음을 주목한다. 미리날리니 신하Mrinalini Sinha는 『식민주의의 남성성 Colonial Masculinity』16)에서 남성적 지배자와 여성적 피지배민의 이미지가 정치의 장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논한다.  - P24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도인들을 식민지의 관료 체계에서 배척하기 위해 영국은 <남성적인 영국인>과 
<여성적 벵골인 바부 babu (영어를 쓸 수 있는 인도 관리)>라는 이분법적 정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P25

한편 여성과 여성성을 통해 제국주의를 재조명하는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성 차별적 전통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제국주의 연구가 중심부 여성들이 식민주의에 상당히 개입했었다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들은 식민지 관리의 아내로서, 선교사로서, 나아가 여행자와 작가로서 제국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899년에 이르면 식민지에서 활동하는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를 1천 명 이상 능가할 정도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의 연구들은 19세기 영국 페미니스트들과 제국주의 사이에
<우월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공통점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 P28

빅토리아 시대의 성적 이데올로기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성>으로 간주하자 
페미니즘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여성에게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하였고, 이를 근거로 여성이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P25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적 우월성을 둘러싼 제국주의 담론을 받아들여,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해야 하는 제국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적극 수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성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와 문명의 대행자라는 그들의 주장은 서구의 비서구를 향한 <문명화 과정>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는 제국주의 담론과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19세기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담보할 수 있게 만드는 <타자>, 즉 비유럽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 내의 젠더 문제는 식민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식민지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었던 것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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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1-08 08: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런 책은 서문이 제일 어렵지요. 저도 곧 시작하겠습니다!

은하수 2025-01-08 21:02   좋아요 1 | URL
파이팅~~~^^
정말 그렇겠죠?
계속 어려워 보여서 살짝 걱정 중입니다.
아니겠죠 ㅎㅎ
 

장애인운동이 단순하게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했느냐 안 했느냐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장애인들이 이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싸움의 내용을 함께 만들어가는 게 정말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운동이 이렇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전체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무엇이 진짜 당사자성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계속 현미경 통해서 감각해가지 않으면은 졸지에 저렇게 되어버리는 거거든. - P322

그러고 보면 장애인들하고 같이 운동을 해 온 비장애인들도, 장애인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장애인과 맺는 관계의 당사자일 수는 있는 거예요. 그러니께네 장애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란 거를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인 한에서는 이 사람들 입장이나 의견이란 것들도 절대 무시를 하면 안 되는 거죠. 비장애인들도 이미 장애인운동의 주체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 P323

이 세상에 통용되는 기준이라는게 대부분 시간에 기초해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배제도 시간을 
가지고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그러고 보면 시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건데요. 자본이 요구하는 경쟁의 시간, 생산성 있는 비장애인들에게 맞춰진 시간, 그 시간이란 거에 딱 맞춰서 이 사회의 ‘정상적‘ 속도라는 게 
규정이 되고 있잖아. - P328

그런데요, 이 세상에는 사회가 규정해놓은
 ‘정상인‘의 속도에 못 따라간다는 이유로 곧바로 더 이상 이 사회가 감각할 필요도 없다고 치부되어 버리는 존재가 정말 많잖아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면 정말로 안되는 거죠. 장애인들이 딱 그렇게
사회에서 배제가 된거고, 차별을 받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게 어디 우리한테만 적용되는 이야기겠어? 누구든 속도로부터 낙오가 되면은 그렇게 되는 거야. - P329

우리가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의제들을 걸고 싸워왔잖아요.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서부터, 교육권 보장,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탈시설, 자립할 권리 보장, 
노동권 보장 등등등. 

이런 것들은 대부분 지금 당장 법이나 
제도를 바꿔내고, 예산을 적절한 수준만큼 확보하는 거가 단기적 목표긴 하죠. 
그런데 그게 절대로 끝이 아니에요. 이 투쟁의 의미는 사실 더 넓은 차원에서도 발견이 되는 거거든. - P329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이 사회가 감각하게 하는 거, 이 사회에 통용되는 속도라는 거가 얼마나 문제적인지를 드러내는 거 자체에 사실우 더 큰 의미가 있는 거지. - P330

그건 자기 몸 자체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몸짓으로 이 사회에, 이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란 것에 경종을 울리는 거야. 
긴다는 건이 사람들에게 결국 자기 언어였던 거고, 나아가서 새로운 시간성을 창조하는 무기이기도 했던 거야. 
이거 정말이지, 엄청난 자부심이 될 수 있는 거거든. 사람들이 완전 무시해왔던 자기 몸의 속도로 세상 한복판을 기면서 이렇게 세상을 멈춰낼 수 있는 거구나. 나의 몸이, 나의 속도가 이렇게나 힘을 가질 수가 있는 거구나,하고서. - P334

이건 투쟁을 통해 존재가 전환되는 거야. 이렇게
장애인의 존재가 전환되면서 세상의 기준도 전화되고. - P334

감히 말을 할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속도를 멈춰가면서 우리 해방만 쟁취해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정상적이라는 기준, 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야만적인 기준을 벗어나서 될 수 있었던 나비가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듯이, 우리는 이 폭력적인세상의 기준을 바꿔낼 수 있는 씨앗을 이 사회 곳곳에 조금씩조금씩 흩뿌리고 있는 거죠. - P341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사회에 쌓여 있는 
애벌레의 기둥들을 허물어뜨리고 싶어요. 
제가 싸움의 현장에서 느끼는 내가 살아 있다는 이 감각을 여러분에게도 선물로 안겨다 드리고 싶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무감각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 모두의 다른 존재와 속도가 존엄한 것으로 인정되는 세상, 그러한 존엄이 돈 논리나자본주의, 경쟁주의, 비장애중심주의의 속도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함께 공유해가면서 말이지요.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여러분, 저와 함께 나비가 되어그 길에 함께해주지 않으실래요?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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